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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렉 브라진스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을 읽고 평가D별로예요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그렉 브라진스키의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는 한국의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영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제3세계의 국가 형성 과정에 개입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안정된 민주주의를 모두 성취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한국이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이유와 그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밝힌다.저자는 해당 질문에 대해서 시민사회와 군대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미국의 개입 및 원조와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한국의 반응이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이 미국의 영향력을 수용했던 방식이 미국이 담당한 역할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을 밝힌다. 저자는 미국의 원조와 ‘한국적’인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에서 미국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결론짓는다. 결국 한국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은 미국의 영향 혹은 한국인의 역할 중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그리고 저자는 한국의 독재정권의 성격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주의 독재’ 개념을 차용해 ‘발전 지향적 독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한국의 군사 독재정권들이 일관되게 민주화를 추구하지 않았으나 이들이 통치하는 시기에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발전이 한국의 경제를 세계 경제로 통합시킬 수 있었고, 이것이 다시 한국 사회에 민주화를 불러올 수 있는 선행조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발전 지향적 독재’가 등장해 경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한국에 민주주의 국가가 갖출 핵심적인 조직과 제도, 목표를 전파하고자 했다. 자칫 저자가 경제발전을 이유로 독재정권을 변호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저자는 한국의 성공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독재자에 대한 인식에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용인한 세 번의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시기(1945~1948)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좌익정권의 탄생을 막기 위해 이승만을 선택했고,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방관하면서도 미국의 이상을 시민사회와 군대에 주입하고자 했다. 두 번째 시기(1960~1961)는 앞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대 엘리트들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발전 지향적 독재’로 등장한 시기로 미국은 명목상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독재정권을 인정하면서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지원을 통해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확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기(1979~1980)는 박정희 사망 이후 등장한 전두환의 독재정권을 승인하지만, ‘조용한 압력’ 정책과 경제적 민주화를 통해 민주주의가 확립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그러나 저자는 해당 시기마다 이루어진 미국의 영향 및 개입을 일방적인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 및 민간단체의 지원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보인 반응은 각각의 사례마다 다양하게 나타났고, 오히려 미국의 이상을 거부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저자는 서론에서 밝혔듯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미국과 한국의 상호 작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저자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인정한 미국의 침묵에 대해 일관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다. 1948년의 이승만과 1961년의 박정희를 지지한 미국의 선택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무산시켰으나 좌익에 의한 통일을 막고, 경제 침체를 예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지지는 이전부터 미국의 지원을 통해 성장한 조직과 사회 기구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라고 비판한다.
    독후감/창작| 2024.11.26| 2페이지| 1,500원| 조회(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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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국공내전과 중국공산당의 승리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과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승리目 次1. 머리말2. 국공내전의 배경3. 국공내전의 경과1) 요심전투2) 회해전투3) 평진전투4. 중국공산당의 승리 요인1) 중국국민당의 정치적 실패2)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5. 맺음말1. 머리말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의 여파로 진독수(陳獨秀), 주은래(周恩來), 모택동(毛澤東), 이대조(李大釗), 장국도(張國燾) 등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창당하여 일본(日本)이 패망할 때까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과 더불어 중국의 항일전쟁을 주도한 세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산당은 창당을 하고 항일전쟁을 하는 기간 동안 분명히 국민당에 비해 소수였다. 시작부터 이들은 당국의 감시로 인해 가흥(嘉興)에 위치한 남호(南湖)의 배 위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또한, 혁명의 근거지를 찾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위치를 옮겨 다니며 혁명을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국민당에 쫓겨 12,000km를 도망가는 대장정(大長征)이라는 시련도 겪었으며, 중국대륙을 할거(割據)하고 있는 군벌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과 이념적으로 다른 국민당과의 합작(合作)과 분열(分裂)을 반복하며 당을 유지해왔다.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건국한 이후에도 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는 소련(蘇聯)을 시작으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그러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사이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지금 현재 미국(美國)과 맞먹는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중국을 이끌어온 주체(主體)이자 원동력인 공산당이 중국을 차지하는 그 과정을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본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공산당과 국민당이 각축을 벌인 국공내전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당시 내전에서의 주요 전투를 소개하면서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2. 국공내전의 배경제국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시작했던 제2차 세계히 이행.(2) 정치의 민주화(3) 군대의 국가화(4) 당파의 평등, 합법화(5) 국시와 국민대회 소집에 관한 문제 협의를 위한 각 당파 대표, 사회롤 구성되는 정치협상회의의 가까운 기일내 소집.이 쌍십협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민대회의 대표, 조직, 선거 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보지 못했지만, 국민당의 지도성을 승인하고 “군대의 국가화”라는 표현으로 공산당의 독자적인 무장을 막았다. 이는 곧 통치 정당인 국민당의 우위와 소수인 공산당의 한계를 보여준 결과이다. 이에 미국은 마샬(Martial) 장군을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보내 전후 정권 구상에 대해 새롭게 협의하고자 한다.이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1946년 1월10일 중경에서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를 개최하기로 발표하였다. 정치협상회의에서 가장 주된 사항은 건국강령(建國綱領), 정부개조, 국민대회의 소집, 헌법초안, 군대의 국가화 등 이른바 5대 현안이었다. 정치협상회의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많은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양보와 조정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합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1) 건국강령 : 삼민주의의 건국최고지도 원칙으로서의 준봉(遵奉),정치의 민주화, 군대의 국가화, 각 당파의 평등 합법화, 인민의 기본적 인권보장, 지방자치의 실시 확인.2) 정부조직법의 개정 : 국민정부위원회의 위원수를 40명으로 함. 위원은 국민정부 주석이 국민당 내외인사 중 선임하되 그 반수(20명)은 국민당에서, 다른 반(20명)은 기타 당파 및 사회(顯達) 중에서 선임. 국민정부위원회의 결의 사항에 대하여 국민정부 주석에게 거부권이 부여와 3/5 이상 위원들의 찬성으로 거부권을 번복 가능. 일반사항은 출석인원의 과반수로 결정, 정부정책의 변경에 관한 사항은 출석인원 2/3의 찬성으로 결정; 행정원의 무임소(無任所) 정무위원과 부회장관에 각 당파의 인사를 기용으로 정부행정에 타 당파 참여가 가능.3) 국민대회의 소집 : 1946년 5월 5일 국민대회를 개최하며, 국민대회 대표수 1936년에 선출된 (9일당독재를 위한 조항들이 통과된다. 이에 대해 공산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국민당에 대해 반대하고, 헌법제정국민대회(憲法制定國民大會)에 불참하였다. 헌법제정에 불참하는 이유로 장개석은 국공관계의 파열을 선언하였고, 1946년 6월에 국민당군의 선제공격으로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3. 국공내전의 경과항일전이 끝나갈 당시 소련군이 동북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으므로 공산당의 중심세력도 동북 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공산당은 동북지역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에 국민당은 소련과 공산당의 방해로 동북지역 쪽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고 당연히 전쟁에 있어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의 도움으로 동북을 주요 전장으로 공산당은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이었다. 먼저 동북지역에서 철수한 소련군이 중일전쟁에서 패배한 일본군으로 부터 포획한 대포·전차·비행기 등 대량의 무기ㆍ탄약을 전부 중공군에게 무상으로 넘겼는데 덕분에 무기 면에서 있어 국민당보다 열세에 놓여있던 공산당의 장비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더불어 동북지역을 통치하게 됨으로써 공산당은 소련, 몽골, 북한 등 중국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국민당은 항일전쟁 종료 당시에 사천(四川)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에 동북지역에는 기반이 약했다. 하지만 국민당은 미국이 90퍼센트는 차지하는 외국의 원조를 약 22억 5천 4백 불 정도의 자산을 원조 받고, 거기에 미국의 최신식무기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병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공내전이 시작되고 난 직후에 국민당군의 병력은 430만이었고, 공산당군의 숫자는 120만이었다.또한,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사전략의 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공산당은 좁은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여 적군을 공격하는 작전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전략을 이용함으로써 공산당은 적을 빠르게 전멸시킬 수 있었다. 또한, 모택동은 군사전략을 짤 때 서두르는 법이 없고 불리하다고 생각할 때 언요충지인 동북지역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정을 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때 공산당에서 먼저 동북야전군을 금주로 남하시켜 점령하였다. 전세가 단숨에 유리해진 공산당군은 이후 장춘에서 국민당 지휘부의 투항을 얻고 동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요심전투의 승리로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47만 2천여 명을 격퇴하고 화북(華北)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2) 회해전투1948년 11월에 발발한 회해전투는 서방전투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동안 일어난 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 전투는 국민당군이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남경(南京)을 사수하는 전략이었으며 화중(華中)지방으로 불리는 강소성(江蘇省)과 산동성(山東省) 등 내륙의 회수(淮水) 일대에서 벌어졌다. 전투 당시에 남경을 방어하던 국민당군이 열세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날씨로 인한 보급 문제가 발생하면서 국민당군은 우세한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공산당군을 이끌던 유백승(?伯承)과 등소평(鄧小平)의 제2야전군과 속유(粟裕)의 제3야전군은 남경을 방어하던 국민당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구청천(邱淸泉)은 공산군에게 포위된 황백도(黃百韜)의 제5집단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장개석의 총애를 받는 황백도를 시기, 질투하여 구청천의 제2집단군은 10일 동안 12km밖에 진군하지 않았다. 결국 황백도는 상황을 비관하고 자살한다. 황백도의 부대가 끝까지 공산당군에 대항해 계속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구청천의 부대는 그 당시에도 20km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65일동안 진행된 이 전투로 인해 국민당은 ‘강철의 요새’라고 불리던 서주지구의 국민당군 55만 명이 사망하였다. 이렇게 국민당군은 전쟁 중 지휘관이 자살하거나 투항 끝에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장개석의 국민당은 최정예부대였던 황백도의 부대를 잃는 결과를 맞이한다. 반면에, 공산당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장강(長江) 중하류의 이북 지역을 장악하게 되고, 국민당이 그동안 통치해왔던했다. 특히나 중국 경제재건을 위해 섣불리 실시했던 경제개방정책은 전후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실정에 이어 국민당은 국공내전을 대비한 전비 확보를 위해 적자예산을 편성하여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구일본군 점령지역의 자본을 국영기업 내에 흡수시키고 일부 지배층에게 독점권을 부여하여 ‘관료자본(官僚資本)’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부패가 만연했다.또한 국민당은 민족적인 정통성 면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하였다. 국민당은 내전에서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남경괴뢰정권(南京傀儡政權)의 친일관료나 일본군 투항병들을 아낌없이 이용했으며 친일세력들을 정부 조직에 수용하였다. 이것은 공산당이 한간 재판(漢奸 裁判)에 주력하여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운동을 전개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외세의 힘에 일부 의탁하여 자주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국민당은 한간으로 기소된 30,828명 중 15,391명에게만 유죄를 선고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기소 혹은 무죄로 풀려난 모습에 반해 공산당은 ‘인민재판’을 통해서 한간 세력을 계속 처벌하였다. 국민당은 주기적으로 미국에서 원조를 받았고 전후 친일세력을 흡수했으며 지지기반 세력이 부유한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공산당보다 군사력, 장비, 통치권 등에서 우수할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반인민주의적인 모습의 국민당정부는 청년들의 반정부적 민중운동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국민당은 반정부운동을 펼치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국민당을 비판하던 민주동맹에 대한 폭력도 자행하였다. 민중운동은 내전을 중단시키고 민주화를 이루려는 인민들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폭력으로 탄압한 국민당은 인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국민당·공산당을 제외한 제 3의 세력을 국민당군의 편으로 병합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일방적으로 탄압하려는 모습이 강했다. 이것을 통해 국민당은 정통성뿐만 아니라 포용성면에서도 공산당에게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국민당은 주변 세력들을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일
    사회과학| 2024.03.21| 9페이지| 2,500원| 조회(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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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주혁명과 지배집단의 변화
    무주혁명과 지배집단의 변화目 次1. 머리말2. 관롱집단의 형성3. 당 초기의 정치적 상황4. 측천무후의 집권 및 북문학사의 등장5. 측천무후의 통치6. 맺음말1. 머리말남성 중심의 전근대 사회에서 여왕의 등장은 항상 큰 파장을 불러왔다. 신라(新羅)에서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담(毗曇)이 난을 일으켰으며, 여왕의 부족한 위엄을 보충하기 위해 거대한 황룡사 구층목탑(黃龍寺 九層木塔)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실에서 여왕이 등장한 것은 골품제라는 특수한 신분제와 진평왕 시기 형성된 ‘성골(聖骨)’이라는 개념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진덕여왕(眞德女王)과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사례가 있었기에 유일한 사례는 아니었다.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역사상 단 한명의 여왕이 집권한 사례가 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후궁이자 고종(高宗)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자신의 아들 둘을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른다. 이전의 연구에서 측천무후의 집권은 소위 ‘여화(女禍)’라고 일컬어지면서 여성이 황제가 되었다는 점만을 부각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측천무후의 집권과 관련하여 자세한 내막과 정책을 통한 연구가 이어졌다. 또한, 핵심적으로 측천무후는 수(隋)와 당의 건국세력이자 긴 시간동안 지배집단으로 이어진 관롱집단(關?集團)을 일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어서 새로운 세력이 정치에 투입되었고, 이는 곧 현종(玄宗)의 치세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필자는 본고를 통해서 관롱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당 초기의 정치적 상황을 차례로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집권과 함께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는 북문학사(北門學士)에 대해 살펴보면서 무주혁명과 지배집단의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2. 관롱집단의 형성관롱집단은 서위(西魏) 이래 관롱 지역의 호족과 한족 중 무력과 재지를 갖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관롱집단의 출현은 북위(北魏)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를 옮기며 한화정책을 실시한 효문제(孝文帝)에 의해 북방 변경 군진의 병사들은 수장이 되어 관서의 한인 호족과 합작한다. 이를 계기로 화북 지역은 고환과 우문태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고환과 우문태는 각각 동위와 서위에서 이전 북위의 원(元)씨들을 황제로 내세웠으나, 이들은 곧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를 건국한다.관서 지방을 장악한 우문태의 세력은 관동 지방의 고환에 비해 병력도 재력도 열악하였다.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우문태는 관서 지방으로 모인 호족과 한족의 융합에 매진하였다. 이에 따라 이동한 호족들은 관서를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기존 한족들과 연합했다. 또한, 산동(山東)에 본적을 둔 일부 한족들로 하여금 관롱으로 본적을 고치도록 하였다. 이들을 바탕으로 우문태는 지역의 명칭을 따서 관롱집단이라는 호한 합작의 새로운 정치 집단을 형성한 것이다.또한, 우문태는 서위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새로운 제도를 창안해낸다. 이는 팔주국 십이대장군 제도로 8인의 대장군과 그 아래 12명의 대장군으로 구성된 서위의 상비군 편성을 말한다. 십이대장군 아래에는 24명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징병의 모체인 96인의 의동삼사(儀同三司)가 있다. 이는 이어지는 수와 당의 통치체제 하에서 부병제(府兵制)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부병제와 함께 균전제(均田制)를 바탕으로 하여 북주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여 통일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후 북주는 화북 지역을 통일하였고, 이어진 수에서는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면서 다시금 중국을 통일한다.관롱집단의 핵심은 팔주국의 후예들로 북주를 일으킨 우문태와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조부인 이호(李虎)는 팔주국의 한 사람이고,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아버지인 양충(楊忠) 역시 십이대장군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팔주국의 한 사람인 독고신을 중심으로 혼인 집단을 형성하였다. 독고신(獨孤信)의 장녀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 4녀는 당 고조의 모친, 7녀는 수 문제의 황후였다. 관롱집단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3. 당 초기의 정치적 상황북주에 이어 수 세민과 이건성은 주변에 인재를 모아들이며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현무문(玄武門)의 변으로 폭발하는데, 이세민은 궁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한다. 이후 황태자가 되었다가 양위받아 당 태종(太宗)으로 즉위한다.당 태종의 치세는 연호를 따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불려진다. 이전의 중국학계에서는 당 태종의 정치집단을 서족지주(庶族地主) 집단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이건성을 중심으로 한 세족지주(世族地主) 집단에게 승리해 정권을 장악한 새로운 집단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연을 비롯해 이건성과 이세민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큰 차이가 없었고 여전히 관롱집단을 위주로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세민의 집단에는 수 멸망 이후 군웅의 부하 출신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당 테종의 정치집단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위징(魏徵)이다. 위징은 이전에 이밀의 부하였고, 이후 이건성 측의 인물이었지만 그의 능력을 높게 산 당 태종이 그를 직접 등용했다. 당 태종은 인재의 등용에 능력 위주의 현재(賢才)주의를 채택해 문무에 걸쳐 뛰어난 능력과 개성을 지닌 인물을 널리 등용하였다. 또한,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의 편찬과정에서 드러나듯 문벌귀족을 억누르고 집권적인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해 남북조 이후 경전들의 해석을 통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노선에 따라 사상적인 통일도 이루어낸다.당 태종의 치세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것은 대외 정책이다. 이 시기 당 태종은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획득한다. 천가한은 ‘하늘에서 내려온 칸’이라는 의미로 당 태종은 농경 지역과 유목 지역 모두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 태종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돌궐이었다. 당 이전부터 돌궐은 중원을 위협하는 적이었다. 그리고 수 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 역시도 고구려와 돌궐의 연결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 태종은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 사라센 제국이 출현하여 당과 국경을 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해상무역이 이루어졌다. 또한, 호인(胡人)이라 불리는 소그드 지방의 상인들도 다수 다녀가면서 동서무역을 촉진하였다.4. 측천무후의 집권 및 북문학사의 등장앞서 말한 것처럼 당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혼란스러웠지만 당 태종은 이러한 혼란을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잠재웠다. 이는 북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관롱집단이라는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롱집단은 이후 측천무후의 등장으로 인해 중앙 정계에서 축출된다. 해당 목차에서는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이후 관롱집단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집단을 알아보고자 한다.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武照)이고 부친 무사확(武士?)은 당 고조 이연이 태원에 있을 때 그의 부하로 있었다. 당 건국 이후 고관의 딸이었던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이 된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 관례에 따라 측천무후는 장안의 감업사(感業寺)에 머물렀는데, 고종의 황후인 왕씨의 부름을 받아 다시금 고종의 후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던 왕씨가 고종이 총애한 소숙비(蕭淑妃)를 견제하기 위해 측천무후를 환속(還俗)시켜 궁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행위가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 황실에 흐르는 호족적인 문화는 이를 가능하게 했다.측천무후는 황후 왕씨의 의도에 따라 소숙비를 제거했고, 이어서 자신과 고종 사이에 낳은자식을 직접 살해하고 그 죄를 황후에게 뒤집어씌운다. 이로 인해 당시 조정은 황후의 폐위와 무씨의 황후 옹립을 둘러싸고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황후의 폐위를 반대하던 이들은 조정의 원로인 장손무기(長孫無忌), 저수량(?遂良), 우지녕(于志寧) 등이었고, 무씨의 옹립을 주장한 이들은 허경종(許敬宗)과 이의부(李義府) 등으로 핵심 권력층은 아니었다. 이는 결국 관롱집단 대 반(反)관롱집단, 문벌 대 비문벌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대립은 당시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적(李勣)이 황실시하였다.이렇게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된 이들은 궁성 남문으로 출입하는 일반 관리와는 달리 북문으로 출입하여 ‘북문학사(北門學士)’라고 불리며 우대받았다. 측천무후는 이들에게 『열녀전(烈女傳)』, 『신궤(臣軌)』 등 1000여 권의 책을 편찬하도록 하는 일 이외에도 재상의 사무를 맡겨 재상의 권한을 분산·축소시켰다. 이들에 대한 우대는 관롱집단이 몰락한 후 관료의 공백을 채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석된다.5. 측천무후의 통치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측천무후는 황후의 신분으로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지만,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이전까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측천무후는 가장 먼저 불교를 이용했다. 자신의 등극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대운경(大雲經)』을 위조하였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정광이란 천녀가 있었다. …… 부처님이 정광 천녀에게 이르길, 너는 잠시 대열반경 에 관해 들었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의 천신(天身)을 얻었던 것이다. 내가세상에 나오니 네가 나를 만나 다시 그 깊은 이치에 대해 듣는구나. 너의 천신을 버리고 여인의 몸으로 왕이 되어 전륜왕이 통치하는 땅 4분의 1을 얻게 될 것이다.”이 구절로 당시 승려 설회의(薛懷義)와 법명(法明)은 측천무후의 황제 즉위를 위하여 정광천녀의 즉위와 미륵불 하생을 끄집어내어 여황제 출현의 기초이론이 되는 대운경소(大雲經疏) 를 간행하여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측천무후 정권의 이념을 형상화해 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를 기점으로 불교보다 도교를 우위에 두었던 당 태종의 칙령을 정식으로 폐기했고, 측천무후는 불교와 결합하여 자신의 황권 장악을 정당화하였다.그리고 690년에 측천무후는 당 대신 주(周)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무씨 왕조를 열었다. 물론, 무씨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폐위시킨 셋째 아들 중종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앉힌다. 측천무후는 국호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철저하게 『주례(周禮)』를 기반으로 하는 통치를 실시한다. 측천무후는 서주(西周)의 천자(天子)가
    인문/어학| 2024.03.21| 8페이지| 2,000원| 조회(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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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내외적 정책을 통한 조조 재평가
    대내외적 정책을 통한 조조(曹操) 재평가目 次1. 머리말2. 조조의 집권 배경3. 조조의 대외정책4. 조조의 대내정책1) 둔전제2) 병호제3) 용인술5. 조조의 정책에 대한 평가와 의의6. 맺음말1. 머리말『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속에 등장하는 조조(曹操)의 모습은 잔혹하고 교활하며 권모술수에 능한 간신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조조는 『삼국지연의』로 인해 다양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선(朝鮮)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조는 총 105번 언급되는데, 이 중에서 왕위찬탈 및 역적으로의 모습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59번으로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가 일찌감치 전래되어 중요한 역사서로 여겨져 왔지만, 인물들에 대한 인식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의 사회변혁기(社會變革機)에 조선으로 유입(流入)된 『삼국지연의』는 이러한 조조의 인식에 대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삼국지연의』는 명(明)대에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집필되었다. 나관중은 주희(朱熹)의 성리학(性理學)에서 주장하는 촉한정통론(觸寒正統論)에 따라 연의를 집필하였다. 따라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서술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조조는 왕위를 찬탈(簒奪)한 간웅(奸雄)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그러나, 엄연히 따지자면 『삼국지연의』는 작가가 허구성을 가미한 문학작품이다. 당대의 문학작품도 하나의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조조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중국의 역사에서는 조조가 건국한 위(魏)가 정통왕조로 여겨지고 있는 점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조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조의 인재등용이나 그의 영웅(英雄)적인 일화 역시 재평가에 일조(一助)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으로 수도를 옮긴다. 수도를 옮긴 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어 조조는 헌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한다. 그리고 조조는 이와 같은 혼란을 틈타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인 허도(許都)로 데려온다. 헌제는 허도를 다시금 수도로 정하고, 이로 인해 조조는 단숨에 여포, 원술(袁術), 원소(袁紹)와 같은 세력들에 비해 우세한 정치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조조는 헌제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장군(大將軍)의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한다.3. 조조(曹操)의 대외정책(對外政策)중국에서 대외정책이라는 것은 적국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외정책과 전쟁은 불가분(不可分)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통해 조조가 참여한 두 개의 큰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도로 영접한 이후에 장안(長安)-낙양-허도-연주 일대를 자신의관도대전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다. 하지만, 조조의 반대세력이었던 원소는 요동(遼東)의 공손찬(公孫瓚)을 평정하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원소는 화북(華北) 지방의 기주(冀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청주(靑州)를 장악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두 개의 큰 세력은 충돌이 불가피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관도대전(官渡大戰)을 통해서 표출된다.관도대전은 200년에 원소의 선공(先攻)으로 시작되었다. 원소는 조조를 공격하여 여양(汝陽)으로 몰아붙이고, 조조군은 백마(白馬)에 포위된다.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조조는 성동격서(聲東擊西) 계책으로 원소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이에 더불어 당시 조조의 진영에 있던 관우(關羽)를 출정시켜 원소의 장군인 안량(顔良), 문추(文醜)를 죽인다. 이를 통해 조조군은 포위를 빠져나와 달아나지만 원소는 끝까지 조조를 쫓아 관도까지 몰아간다. 당시 조조의 병력은 총 10만이었으며, 이에 비해 원소의 병력은 30만에서 40만에 이르렀다. 이는 과장된 수치라고 하더라도 전투 병력은 조조군이 3만에서 4만 사이로 추측되며, 원소군이 10만으로 추정된다. 병력에서도 . 208년에 일어난 적벽대전은 위와 손권·유비 연합군 사이의 전투로 양자강(揚子江)에 위치한 적벽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조조는 유표(劉表)가 차지하고 있던 형주(荊州)를 정복하고, 최대의 판도를 이룬 상태였다. 적벽대전은 조조군이 유비의 군대를 쫓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유비군은 조조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강릉으로 도망간다. 조조군은 15만에서 16만의 군사를 이끌고 계속하여 양자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조조는 강동(江東)의 손권(孫權)을 토벌하고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적벽으로 향했다. 『삼국지』에서 전하기를 당시 조조의 병력이 유표의 병력을 흡수하여 20만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유비·손권의 연합군은 5만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조조의 당연한 승리처럼 보였다.하지만, 조조는 적벽에서 주유(周瑜)의 화공에 의해 전 병력이 몰살당하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는 당시 조조의 진영에 역병(疫病)이 돌고, 자연재해가 잇따른 것도 영향을 주었지만 결정적으로 조조군은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패배했다. 이 패배를 계기로 조조는 중원(中原)으로 후퇴하였고, 유비는 형주 남쪽에 자신의 본거지를 두게 된다. 이 전투에서 조조는 천하통일(天下統一)에 실패하고, 유비의 세력이 성장한다, 이로 인해 천하는 삼분(三分)되어 삼국의 형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벽대전은 조조의 한계를 드러내는 전투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조조의 전쟁 준비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조조는 유표의 병력을 빼더라도 15만의 군사를 모았고, 그에 해당하는 군량미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또한, 적벽대전 이후에 조조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후대에 이르러서는 위를 이은 진이 삼국을 통일한다. 이것은 당시 조조의 위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 조조(曹操)의 대내정책(對內政策)1) 둔전제(屯田制)조조는 헌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얻은 후에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시행한다. 둔전측된다. 병호제는 일반 민호(民戶)와는 다른 별개의 호(戶)에서 가족단위로 병역의 의무가 세습되는 제도이다. 또한, 병호제는 병사 집단을 다른 일반 백성들과 분리한다는 점에서 병농분리(兵農分離)적인 병제(兵制)이다. 조조는 이러한 병호제를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우선적으로 투항한 병사와 유랑민들을 체포하여 둔전에 구역을 정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가정을 꾸리게 하여 병호로 삼는데 이 과정에서 민호의 여성을 납치하는 사건도 종종 있었다. 조조는 유랑민들이나 적병들을 둔전제로 끌어들여 병호로 삼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병력 충당을 가능하게 하였다.병호는 사회적으로 차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병호에 속한 남성은 의무적으로 군역을 져야했으며, 그 의무는 대를 이어서 아들과 손자가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병호에 속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민호의 사람들보다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가족에게도 연좌제(連坐制)로 처벌하도록 하였다. 또한, 병호와 결혼한 여성은 재혼할 때에도 병호와 결혼해야 한다는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불만을 대신하기 위해 조조는 군공(軍功)을 세운 병호는 해방시켜 평민으로 살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병호제는 남북조시대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지다가 수·당 시대에 부병제(府兵制)로 발전하게 된다.3) 용인술(用人術)조조의 또 다른 군사적 업적은 용인술에 있다. 용인술이란 사람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조조는 인재를 효율적으로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였으며, 이러한 의도는 「구현령(求賢令)」에서 드러난다.예로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일찍이 없었다. 현인을 구하려 애를 써도 그들이 여항(閭巷)을 나오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다. 이리하면 현인과 군자를 구하지 못한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맹공작(孟公綽)은 조(趙)나 위(魏)의 노(조는 건설적인 의견을 개진(開陳)하도록 격려 또는 강요하였다. 그리고 뛰어난 계책을 내놓으면 조조는 후한 포상을 하였다. 또한, 조조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등용하였는데 집안사람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등용하였고, 항복한 자들에게 너그러웠다. 맹장(猛將)은 병졸(兵卒)의 대오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병졸들도 중히 여겼고, 적군에 속해있는 인재도 초빙하여 등용하려고 노력했다.조조의 이러한 용인술은 원소와 많은 비교를 받는다. 조조가 사람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면, 원소는 지리적 환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곧 관도대전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원소 휘하에는 장합(張?)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조조가 오소에 위치한 원소의 식량창고를 급습하였을 때, 장합은 원소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원소는 곽도(郭圖)의 의견에 따라 조조군의 진영을 공격하지만 패배하고 만다. 또한, 패배한 이후 곽도는 그 책임을 장합에게 떠넘기며 장합을 모함한다. 이로 인해 장합은 조조에게 귀순하게 된다. 이 당시 조조는 “한신(韓信)이 한으로 들어왔다.”며 장합을 반기고, 장합은 그에 따라 충성하였다.조조의 용인술에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책사(策士)를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순욱(筍彧)과 곽가(郭嘉)이다. 203년에 조조는 순욱이 내놓은 계책을 보고 순욱에게 포상하며 작위를 내리려 하였다. 하지만, 순욱은 실질적인 공적이 없다며 포상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책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강조하였다. 책사는 잘못을 바로잡고 인재를 기용하고 계획을 세우고 책략을 꾸미는 일을 당연히 해야 하며 공적이란 야전(野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다가 아니라며 자신의 포상을 사양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또한, 조조는 자신의 책사였던 곽가가 풍토병으로 죽고, 그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한다.“그대들은 나와 동년배지만, 봉효(奉孝)는 가장 나이가 적었소. 그래서 천하 평정이 끝나면 그에게 뒷일을 부탁할 셈이었는데 그만 중년에
    인문/어학| 2024.03.21| 10페이지| 2,000원| 조회(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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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고시 대비 한국사 교과서 사료 정리
    한국사사료 정리?상고사?? 단군신화 - 『삼국유사』魏書云, “乃?二千載有壇君王?立都阿斯?. ?云無葉山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同時.” 古記云, “昔有桓國 謂帝釋也.?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 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艾一炷蒜二十枚曰, ‘爾?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之. 孕生子號曰壇君王?. 以唐? ?位五十年庚寅, 唐堯?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 今西?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 又名弓 一作方忽山又今??.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後還?於阿斯?爲山神, 壽一千九百八?.”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謂玄?·樂浪·帶方 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臨·樂·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때였다고 한다. 고기에 말하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매우 갈구했다. …… 이를 환웅천왕이라 하는데,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 ……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며 인간 세상에 있으며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범은 능히 지키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가 된 곰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밑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결혼해 주었더니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일컬었다.? 기원전 3C 경의 고조선侯準旣僭號稱王,비상지도&천재) - 『삼국사기』? 張保?·鄭年, 皆新羅人. 但不知?邑·父祖. 皆善?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 角其勇壯,?保?差不及也.?年以兄呼保?.?保?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海, 使賊不得掠人西去.”??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 大王與保?萬人. 此後海上無??人者. 保??貴,?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戍將馮元?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元?曰, “若與保?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死故?耶.” 遂去謁保?. ?之極歡. ?未卒, 聞王弑國亂無主.?保?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年入國, 誅叛者, 立王. 王召保?爲相, 以年代守?海. - 삼국사기 열전? 文聖王八年, 春, ?海弓福怨王不納女, ??叛. 朝廷將討之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 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長佯叛國投?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흥덕왕을 뵙고,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역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은 그곳을 완도(莞島)라 부른다.? 828년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은 장씨(張氏)인데, 일병 보고(保睾)라 한다. 당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에 진(鎭)을 세웠다.? 적산 동쪽 언저리에 도착하였다. 산에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을 적산 법화원이라 하는데 본래 장보고가 처음으로 세운 것이다. …… 장 대사의 교관선이 단산포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장田民辨整都監, 自爲判事, 榜諭中外曰, “比來, 紀綱大壞, 貪墨成風, 宗廟·學校·倉庫·寺社·祿轉·軍須田, 及國人世業田民, 豪强之家, 奪占幾盡. 或已決仍執, 或認民爲隷, 州縣驛吏·官奴·百姓之逃役者, 悉皆漏隱, 大置農莊, 病民瘠國, 感召水旱, ?疫不息. 今設都監, ?之推整, 京中限十五日, 諸道四十日, 其知非自改者勿問, 過限事覺者?治, 妄訴者反坐.” 令出, 權豪多以所奪田民還其主, 中外?然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스스로 판사(判事)가 되어 전국에 방을 붙여 알리기를,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탐욕을 부리는 것이 풍습이 되었으며, 종묘(宗廟)·학교·창고·사사(寺社)·녹전(祿轉)·군수전(軍須田) 및 사람들이 대대로 업으로 이어온 전민(田民)을 호강한 집에서 거의 다 빼앗아 점유하였다. 일부는 이미 판결이 났는데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일부는 백성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주현(州縣)의 역리(驛吏)·관노(官奴)·백성 중에 역을 피하여 도망한 자들을 모두 숨겨 크게 농장(農莊)을 두니, 백성과 나라를 병들게 하여 홍수와 가뭄을 불러일으키고 전염병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바로잡고자 하여 개경은 15일을 기한으로 하여, 여러 도는 40일을 기한으로 하여 스스로 잘못을 알고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을 넘겨 일이 발각되는 자는 죄를 조사하여 다스릴 것이며 망령되게 소송하는 자는 도리어 처벌하겠다.”라고 하였다. 명령이 나가자 권세가 중에 전민을 빼앗은 자들이 그 주인에게 많이 돌려주었으며, 전국에서 기뻐하였다.? 왜구의 침략(비상지도) - 권근, 『양촌집』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바닷가까지 수백 리를 가면 흥해라는 고을이 있다. 땅이 매우 궁벽하고 험하나, 어염과 염업이 발달하고 비옥한 토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주민이 많았는데 왜란을 만난 이후 점점 줄다가 경신년(1380) 여름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을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이 살해되고 약탈당해 거의 없어졌다. 그 중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과 거리信任而已。何必先以偏黨疑群下。以啓小人乘隙之端乎。上不答。계해년(1623, 인조 1) 3월. 반정 초기에 공은 겸 경연(兼經筵)으로서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릇 정사를 하는 데에 편당(偏黨)을 힘써 없애야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만약 편당을 없앤다는 마음을 가지시면, 소인이 그 틈을 엿보아 반드시 군자를 편당이라 지목하여 일망타진의 계획을 할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임금을 끌어서 편당을 삼는다’ 하였고, 선묘(宣廟)께서도 하교하시기를, ‘이이와 성혼의 당(黨)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셨으니, 임금께서는 어진 이를 구하여 믿고 맡길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먼저 편당으로써 여러 신하를 의심하여 소인이 기회를 엿볼 단서를 열어 놓겠습니까.” 하자, 상은 답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외교(비상&천재)? 夕上與中宮幸景福宮, 觀火山棚, 召琉球國使及倭、野人等觀之。? 국왕의 사신은 날짜에 제한이 없고 여러 영주의 사신 이하는 날짜의 한도를 지나면 일수를 계산하여 식량을 깎는다. 병이 나거나 홍수가 져서 짐을 실어 나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체한 경우에는 머물렀던 곳의 관가에서 증명서를 받아와야 하며, 돌아갈 때도 이와 같다. - 신숙주, 『해동제국기』? 저녁에 임금이 중궁과 더불어 경복궁에 거둥하여 화산붕(火山棚)을 구경하였는데, 유구국(琉球國) 사신과 왜인(倭人)·야인(野人) 등을 불러서 이를 구경시켰다. - 『세조실록』1462.1.2?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비나 야스히로가 조선에 왔을 때 예조판서가 그를 맞이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그는 후추를 한 주먹 꺼내어 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기녀, 악사들이 달려들어 후추를 줍느라고 잔칫상이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 유성룡, 『징비록』? 임진왜란의 참상? 하루에 죽어 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고, 쓰러져 죽은 사람이 길에 가득하고 썩어가는 시신이 하천을 막을 정도이다. - 『선조실록』? 남의 나라에 붙들려 있은 지 다섯 해,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고 스스로 죽지 銓)의 신하들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소통시킬 수 있는 방법과 권장 발탁할 수 있는 방법을 특별히 강구하게 하라. 그리하여 문관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고 음관(蔭官)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으며 무관(武官)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계제(階梯)를 작정(酌定)하여 등위(等威)를 보존할 수 있도록 그 절목(節目)을 상세히 마련하여 사로(仕路)를 넓히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조에서 절목을 올렸다.? 노비제도 혁파 시도나의 소민 가운데 노비와 같은 억울한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공노비는 즉각 철폐하고, 그들이 내던 신공身貢은 다른 재원으로 충당할 것이며, 사노비는 주인과의 관계를 고공으로 바꾸고 그 자녀들은 즉각 해방시키기로 결정을 보았다. -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 「노비인奴婢引」? 중간 계층의 성장(천재)? 1769년(영조 45) 이수득이 상소를 올려 서얼허통을 청하였다. “옛날에는 융숭한 예와 폐백으로 이웃나라 선비를 대우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였습니다. 지금은 법으로 나라 안 인재를 묶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등용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합니다. …… 시골 천인의 자식은 때때로 훌륭한 벼슬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세족, 명가의 서얼들은 자자손손 영원히 묶여 있습니다. 인재를 버리고 등용하는 것이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 『규사』?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이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중인과 서얼의 벼슬길이 막힌 일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원통하고 답답함을 품은지 이에 몇 백 년이 되었다. 서족은 다행히 조정의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한 성덕을 입어 문관은 선전관에 임용되고 있는데, 우리들 중인 홀로 함께 은혜를 입지 못하니 어찌 탄식조차 없겠는가? 이제 바야흐로 의논을 모아 글을 써서 원통함을 호소하고자 먼저 통문을 발하노니 이달 29일 마동에 있는 홍현보의 집에 모여 상의하고자 한다. - 「통례원에서 통문을없다.
    임용시험| 2024.03.21| 84페이지| 4,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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