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20161803 이현주5장 진보로서의 역사1. 시대에 따른 역사관1) 중세적 역사관 : 유대인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과정이 나아가는 목표를 가정함으로써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갖는다. 그러나 역사의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역사의 종말’을 의미→ 현세적인 성격 상실2) 르네상스 : 인본주의, 이성우위 같은 고전주의적 견해를 부활, 비관주의적 미래관 대신유대, 기독교적 전통의 낙관주의적 견해를 수립3) 계몽시대 합리주의자 : 인간상태의 완성은 인류의 부, 행복, 지식, 미덕 등의 완성이라고 정했고, 이러한 믿음은 영국의 번영, 세력 강화, 그리고 자신감이 절정인 시기에 형성 ( 현세적 )“ 역사는 지상에서 인간세계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진보하는 것 ”“ 진보는 서유럽 문명을 활기차게 만들고 그것을 지배하는 이념” _『진보의 이념』 by 베리2. 진보에 대한 논의1) 진화와 진보의 의미진화 (evolution)생물학적 변화,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 유전을 몇 백만 년을 단위로 측정한다.진보 (progress)진보의 원천인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유효성을 늘리는 것2) 진보에 대한 사상가들의 견해① 계몽주의자(19c) : 역사의 법칙은 곧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의 위치를 자연 안에서 해석② 헤겔 : ‘역사는 진보하지만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다.’③ 다윈 :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 유전을 역사에서의 진보 원천인 사회적 획득과 혼동→ 진화 = 진보2) 진보의 특징① 진보는 명확한 시작이나 종말이 없다.: 진보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계속되는 각 시대의 요구나 조건이 저마다의 독특한 내용 을 이에 투입하는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진보의 종말이 있다는 가설에 관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가정하는 것은 신학자에게나 어울리며, 역사의 외부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는 것 ”② 진보는 일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전, 퇴보의 시기도 존재한다.: 역전도 탈선도 없는 계속된 진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명확한 역전도 ‘역사는 운 진보의 시작이다. ( 비연속성 )→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다 평등하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시간 장소에 있어연속적X“나는 전진과정에 있어야만 비로소 규정될 수 있는 목표들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이라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_ E.H 카※역사적 행위의 진보진보는 과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능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믿는 것이다.인류가 추구하는 목적은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역사 밖에서 나타나는 것X3. 역사에서의 객관성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진보의 과정’이며, 역사가의 과제는 진보의 과정인 역사를 ’객관성‘으로 통찰하는 것이다.1) 의미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이 아니라 ‘관계의 객관성’을 의미한다.곧, 사실과 해석, 과거와 현재-미래와의 관계에 대한 객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의 주관성’과 모순되지 않게 하는 장치 설정역사는 평가하는 것이지,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_ E.H 카2) 역사에서의 절대자, 변화: 역사에서의 절대자는 과거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상대적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어떤 것이고 생성과정에 있는 어떤 것이다.“우리가 나아가는 미래에 있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미래로 나아갈 때 비로소 형태가 갖춰지는 것, 또 우리가 나아감에 따라 그 빛에 비추어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차차 형성되는 그런 것이다.”→ 방향감각과 해석의 변화역사는 방향감각이 있으므로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여러 사건을 정돈시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과정자체는 언제나 진보하는 것이고, 동적인 것“ 역사가는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상기한다.” _ 네이미어→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를 줄 수 있다.※객관적인 역사가1.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사실을 선택하는 것, 올바른 해석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해석, 선택 모두 새로운 목표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제한된 시야를 뛰어넘는 능력3. 자기견해를 미래에 투입하는 역사가, 즉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 OE.H카가 살았을 당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지난 200년 동안 역사가 움직여 나아가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방향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고 인류가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나아간다고 믿었다.↓그 반동으로 비관주의의 분위기와 함께 역사가의 자리를 신학자와 회의주의자에게 내주었다.3) 역사에서의 객관적 판단역사란 사람들이 행한 일의 기록이며 하지 못한 일의 기록은 아닌 것이다.그런 역사는 불가피하게 성공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역사란 승리를 차지한 여러 힘을 앞세우고, 패배한 여러 힘을 뒤로 밀어냄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의 필연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하는 것이다. ” _ 토니(영국의 경제학자, 역사가)“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만한 민족만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 _ 헤겔이에 이사야 벌린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패란 보편적 타당성을 요구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나 원리만을 선호하여..... 가장 유용한 것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온다 ”이처럼 역사에서의 판단기준은 ‘보편 타당성을 요구하는 원리’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것’E.H카는 추상적 기준( 바람직한 것으로 추정 )을 설정해놓고 추상적인 기준에 비추어 과거를 비난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하였다.이론적 측면에서 보아 무엇이 바람직스러운지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지금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 당면한 목적의 실현 등 ‘효율적인 것’을 고려해야한다.√지체된 성공의미 : 오늘날의 명백한 실패도 내일의 성공에는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장점 : 우리가 앞으로 발생할 사건들에 비추어 판단을 미루거나 수정할 수 있다.√결론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이 눈앞에 있는 어떤 고정적인 판단기준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오히미래 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객관성을 획득한다.4.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 진리의 이중성1) 가치는 사실로부터 끌어낼 수 없다.: 자유, 평등 같은 가치체계를 나타내는 말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2) 사실은 가치로부터 끌어낼 수 없다.: 환경에 따라 어떤 상(象)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역사에서의 진보사실과 가치사이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 사실과 가치 분리X )가치와 사실 사이 어딘가에 역사적 진리의 영역이 있다.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6장 지평선의 확대< 깊이에서의 변화 : 이성의 확대 >1. 인간의 자기의식의 발전과 역사역사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자연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거기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관계되고, 또 인간이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시작된다.2. 인간의 자기의식과 발전 ( 이성의 기능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 )1)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인간을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고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존재 로, 즉 사유와 관찰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가 되는 존재로서 처음으로 그 지위를 확립했다.2) 17,18세기: 인간은 자기 주위의 세계와 그것들의 법칙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 인간이 복종해야 할 법칙, 인간이 만들 수는 없는 법칙3) 19세기헤겔: ‘섭리의 법칙’을 ‘이성의 법칙’으로 돌려놓은 관념을 갖고 있었다.“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일, 곧 그들의 의식에 나타나지 않아도 그들의 행위 속에 포함되는 일을 성취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행동하지만 이성의 정신인 ‘세계정신’을 통해 합리적이게 돌아간다.but 헤겔 역시도 인간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법칙은 없다고 보았다.마르크스: 세계가 합리적인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 법칙에 지배된다.따라서 의식적인 혁명적 행동을 통해 세계를 변혁시킬 것을 주장한다.? 무산계급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가 변혁을 주도해야한다.4) 20세기: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법칙들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충분히 인식이성의 기능=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이해하는 것X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을 개조하는 것ex) 레닌은 계급의식의 형성을 자동적X ,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 보았다.3. 20세기 이루어진 현대 세계로의 이행( 이성의 확장 )1) 경제학의 사례 ( 자유방임→계획, 무의식→의식 )1910년 :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신념 유지1930년대 이후 : 자유방임경제에서 관리경제로의 이행→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을 위해 경제의 방향을 결정 또는 통제할 수 있다.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복종과 수용↓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능력에 대한 신념으로 이행=인간사에 대한 이성의 작용에서의 발전을 의미한다.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증대를 의미 = 진보2) 과학의 사례: 객관적으로 법칙을 탐구하는 일 → 인간의 목적에 맞게 자연을 이용할 수 있고,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켜 줄 실용적인 가설을 만드는 일에 더 큰 관심3) 교육의 사례: 인간은 이성의 의식적인 발휘를 통해 자신의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변화★시킴교육자? 특정한 형태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성장하는 세대에게 그러한 형태의 사회에 적합한태도를 가르치는 일에 관심√정리인간에게 있어 이성의 기능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인간은 합리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을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 고양 → 20세기 혁명의 주요 측면 중 하나※ 과학혁명=기술혁명=사회혁명은 동시에 이루어짐산업혁명의 가장 주요한 결과는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증가한 것이다.이로 인해 인간이 복잡한 기계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동시에 사유하는 법, 즉 이성을 이다.
1. 고려시대 향리에 대하여 설명하시오.(연원, 신분적 지위, 임무 및 역할 그리고 변화추이)고려시대 향리의 연원은 신라 말 지방에 산재하여 웅거하고 있던 신라 멸망으로 이끈 주역인 호족에 있다. 이들은 고려가 건국된 뒤 일부는 중앙지배계층으로, 일부는 지방에 남아 지방행정을 맡게 되었다. 향리의 임무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대부분이 농민인 지방민으로부터 조세·공납·역역·군역 따위를 거두어들이는 일이었다. 또한 주현군 가운데 일품군 장교의 직도 향리가 맡았다. 향역을 세습하는 향리들의 신분적 지위는 일정한 지역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일반 백성들을 지배하고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고려 말에는 지방의 향리출신들이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었다.2. 고려시대 향, 소, 부곡 백성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대하여 설명하시오.향 부곡 소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관해서는 천인설과 양인설이 있다. 양인설 에서는 부곡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대표적인 천인인 노비가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부곡인은 천인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일반 군현인과 마찬가지로 향·소·부곡인 들도 기본적으로는 농민이었다. 그들은 또한 일반 군현인과 다름없이 공부·요역·군역 등의 의무를 국가에 지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소민만은 향·부곡인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민은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특별한 물품의 생산을 맡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조세와 요역의 부담이 면제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 대한 전체적인 부담이 덜하였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향·소·부곡인의 국가에 대한 부담은 그 형태가 서로 달랐다고는 해도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3. 고려후기 신분제 동요의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시오.무신란의 발생, 원의 간섭, 공민왕의 개혁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주요 계기가 되어 고려 후기에 와서 신분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경제적 변화로는 고려 후기에 농장제가 발달하면서 세력가들에 의하여 대토지 소유가 늘어나고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전호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심하면 노비신분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신분이동이 이러한 정치적 변동이나 경제적 변화에 따라서 찾아지기도 하였지만, 제도의 변화에 힘입어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예로는 문반과 무반 사이의 교차와 충렬왕 원년(1275)부터 시행된 납속보관제도가 있다. 또한 일반 양인이 군공과 같은 특별한 공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양의 백은이나 미를 바치면 관직에 나아갈 수가 있었고 조선 후기 점차 부곡제가 점차 혁파되어 갔다.4. 고려후기 농민 천민 봉기의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시오.고려후기 농민 천민 봉기의 배경은 4가지 정도가 있다. 먼저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이다. 귀족사회의 수탈체제에 신음하던 피지배층의 광범위한 지지에 의해 의종24년에 성공한 무신란을 통해 집권하게 된 무신집권이 피지배층을 위해 수취체제 개편을 실시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지방관은 농민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시켰다. 세 번째로는 대토지겸병의 확대다. 고려 중기 토지겸병이 성행하고 농민의 전호화가 진행되니 전시과체제는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는 신분제의 동요다. 신분제도의 변화로 인한 피지배층의 사회의식 성장 또한 항쟁의 요인이었다. 무신집권기 피지배층의 항쟁에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지배층 상당수도 이에 호응하였다.5. 여말선초 사전개혁의 목적과 추진과정에 대하여 설명하시오.고려 말 사전의 확대는 국가체제 유지의 바탕인 농민경영의 재생산과정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사전개혁을 통한 공전의 확보가 필요했다. 우왕 14년 위화도회군으로 개혁파 사류가 결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성계 중심의 개혁파 사류는 6월에 우왕을 축출하고 나이 어린 창왕을 옹립하는 한편, 신망이 두터운 최영을 비롯한 여러 구신들을 제거하여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다음 곧바로 현안의 사전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들이 정권을 운용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국가재정의 조달, 새로운 정권에 복무할 관리들의 생활보장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전의 개혁은 가장 우선적으로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사전개혁의 구체적 절차는 동·서북면을 제외한 남부 6도의 양전과 또한 이 해부터 전국의 공사전조를 모두 공수하는 두 가지 큰일을 동시에 실현해 가는 것이었다.6. 조선 초 중인계층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변동과정에 대하여 설명하시오.중인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도 아닌, 두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한 중간계층으로, 조선시기 중인층은 문자 그대로 중간층을 지칭하고 사회신분 구성에서 수적으로도 매우 적은 존재였다. 중인층은 기술관이라는 직역을 가진 관리들을 포함하여, 향리 서리 토관 역리 등과 같은 경 외 아전직과 양반 사족층의 서얼층을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양반 사대부들과 근접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조선왕조의 통치권에서 활약한 존재였다. 기술직이었던 중인층은 조선왕조 초기부터가 아니라 성종조의 기술학이 천시되는 시기부터 형성되었고 양반들의 자기 도태과정에서 하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오면 반대로 기술직을 통해 평민신분층에서 중인 가문으로 상승하는 신분변동이 발생하였다.7. 조선전기와 후기의 가족구성, 상속, 제사, 혼인 등과 같은 관습의 차이를 비교 설명하시오.조선 초에는 일부다처제의 유습이 존재하다가 후기로 내려가면서 일부일처제도와 처첩제도가 확립되었다. 조선 초기 혼인 거주규칙도 사위가 처가에서 혼인생활을 하고 처가에서 자녀를 낳아 장성할 때까지의 오랜 기간을 생활하는 장기간에 걸친「서류 부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양변적 방계가족」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서류 부가의 기간이 단축되면서 양변적 방계가족 형태는 사라지고 직계가족이 이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남녀균분상속 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남자 이름으로만 재산을 상속하는 사례가 많다. 조선 초기 당시의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제사를 지낼 아들이 없으면 동종의 아들을 입양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양자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기에는 자녀에 대한 남녀차별이 싹트지 않았으나 조선후기가 되면서 남아존중 의식이 강화 내지는 확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조선후기 양반 수 증가의 원인과 이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설명하시오.양반층의 급증현상은 유학의 수적 급증에 의한 것이었다. 18세기 이후부터 양반층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유학이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게 된 데에는 다양한 신분계층의 유학 호칭에서 비롯되었다. 즉 양반의 유학 재생산, 「충의위」에서 「유학」으로의 직역이동, 중인층의 「유학」 호칭, 그리고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 등이 유학 급증현상의 주요 요인으로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엽이 되면 유학을 모칭하여 면역을 도모하는 것이 통용되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되었으며 군사대장이 빈 문서가 될 정도로 모칭유학의 수적 확대가 크게 진행되어 갔다.9. 조선후기 광작과 지주제의 변화 양상에 대하여 설명하시오.광작은 경작지를 확대시켜 비교적 넓은 농토를 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광작농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매매를 중심으로 토지소유 구조가 변화하고 있었고, 나아가 이앙법 등 새로운 농법이 보급됨에 따라 농업 경영상의 변동이 야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후기 토지매매로 인한 토지의 상품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결과 조선 후기 토지소유는 점차 신분과 무관하게 나타났고 심지어 서민층과 노비층 가운데도 대토지소유자가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토지소유와 신분으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한 토지소유형태는 결국 농촌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요인이 되었고 구체적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생산관계인 지주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