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웹툰이 있다. 웹툰 제목은 ‘제타’로 네이버 웹툰에서 일요일 에 연재되고 있다. ‘제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금세기 최고의 천재 화가 ‘최후람’과, 예술 의 영역에 도전하는 안드로이드 ‘제타’가 대결하는 내용이다. 10년 전이었다면 웹툰의 내 용을 그저 허구로 받아들였을 텐데, 요즘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단순 허구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과거에 창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AI 가 창작자가 되는 세상이 왔다. 지난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은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을 발표했다. 1위는 화가, 2위는 사진가, 3위는 작가, 4위는 지휘자, 5 위는 만화가로 나타났다. 주로 창의성과 개성이 두드러지는 예술계 직종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영국 옥스퍼드대와 미국 예일대 공동연구팀은 전 세계 전문가 352명의 설문을 바탕으로 이 영역조차도 AI가 대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목: 타인을 통해 형성하는 ‘나’지금의 ‘나’를 형성해 온 긴 삶의 여정 속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중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몇 명 뽑으라고 하면, 먼저 가장 오래 그리고 가까이서 삶을 공유하며 지금의 나를 형성한 나의 소중한 가족, 학창 시절 속에 나를 더 성숙하게 해준 나의 소중한 친구들, 마지막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매 순간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나의 소중한 연인, 정도를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가족, 친구, 연인은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에게 그들은 단순히 소중한 존재를 넘어 ‘내’가 누군지 발견하게 해주고 나를 만들어가는 여정에 있어서 중요한 등대가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족, 친구, 연인 이 세 사람을 통해 형성해가는 나에 대해 성찰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이 글을 쓴다.고등학생 때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너희 가족은 가족 그 이상인 것 같아. 되게 신기해”. 가족 그 이상, 말 그대로이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보다 더 끈끈하고 애정이 넘친다. 화목한 가정인 만큼 각자가 불리는 애칭이나 역할도 다양한데, 집에서의 나는 ‘사랑받는 막내딸’,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 ‘보석’(실제로도 엄마와 언니들이 나를 이렇게 부른다) 정도로 불리는 것 같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두 언니 밑에서 자라왔기 때문일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특히 친구 관계에서) 외로움을 잘 느끼지도 않았고 혼자 있어도 씩씩한 그런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깨닫지 못했는데 성인이 되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것은 이러한 가족들의 사랑이 나를 더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속담처럼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더 잘 줄 수 있다. 또한 ‘가족’이라는 내 편이 항상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과 가족의 사랑으로 쌓아온 나의 내면의 강인함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각보다 아주 큰 힘으로 작용한다.내게는 아주 소중한 친구 두 명이 있다. 나에게 이러한 친구 관계는 단순히 잘 맞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관계를 넘어서 나의 어리숙한 인격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의미 있는 관계이다. 현재의 나의 인격은 나름대로 성숙하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지만 예전의 나를 지금의 내가 돌아보면 ‘그때는 내가 많이 어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가 몇 가지 있는데 한 가지 사례를 말해 보고자 한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버린 것이었을까, 학창 시절의 나는 때때로 나의 가까운 친구에게 함부로 대했다. 그 당시 공부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심해서 어쩌면 이 스트레스를 친구에게 풀 생각이었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가장 친한 친구 경주가 내게 말했다. “네가 기분 나쁘면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화나고 짜증나기보다는 엄청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불의한 분노를 지적하는 경주의 의로운 분노가 나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만약 그때 경주가 나에게 똑같이 불의한 분노를 내었다면 나는 아마 나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의로운 분노는 상대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분노이다. 경주 덕분에 나는 이때부터 ‘배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나의 언행이 상대에게 불의한 불쾌감으로 다가가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되었다.첫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가족들이 나에게 계속했던 말이 있다. “너 연애하더니 착해졌다? 러브 파워(Love Power) 때문인가?” 언니는 우스갯소리로 러브 파워가 언제까지 갈지 보자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이 ‘러브 파워’가 나의 인격을 형성해가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영향으로 작용하는 것을 느낀다. 연인의 관계는 혈연이나 정으로 시작된 관계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관계이다. 사랑은 매우 강력하지만, 한편으로는 매 순간순간 작은 것에도 쉽게 변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기에 이 감정으로 시작된 관계인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는 강력하면서도 연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연애를 하면서 더욱 조심스럽고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배려’는 남자친구와 나, 우리 둘만의 관계를 넘어서 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배려’라는 행위가 연인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 나의 관계에 얼마나 큰 신뢰를 가져다주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 삶 전반에 ‘배려’가 자리 잡게 됨을 느끼고 나의 인격이 점점 성장해 가는 것을 매 순간 느낀다. 러브 파워, 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가!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매 순간순간 더 나은 나를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우리의 삶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사실 당연한 것을 성찰해보는 것이 조금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타인으로부터 얻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고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러한 ‘타인’이 되어 그 사람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소중한 누군가가 되길 바란다.
인간과 AI의 권리,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 올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상욱(2019)에 따르면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 양상에 기술적 요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배경 요인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야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노동력 대체에 따른 인간의 일자리 부족에 대한 ‘위협’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지고 있던 인간성에 대해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던지기에 특별하다. 이에 대한 답은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면 안 된다‘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에는 AI가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겠다.본격적으로 이유를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과 동등한 권리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논제에서 말하는 ‘인간과 동등한 권리’란, ‘인권’을 말한다.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바로 ‘투표권 문제’이다. AI에게도 인간의 권리 중 하나인 선거권이 주어진다면 과연 이를 공정하다고 볼 수 있을까? AI는 인간과 달리 악의적인 무분별한 생산이 가능한데다가, AI 스스로의 사고를 위해 짜인 알고리즘도 결국은 AI를 개발한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공정성의 문제에 어긋난다. 자칫 AI에게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행위를 선거 운동에서 발생하는 ‘민심 잡기‘와 혼동할 수 있으나 둘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선거 운동의 경우 특정 집단이 국민들에게 공정한 혹은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는 있으나, 이는 국민들의 선택권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AI의 경우 ’강제성을 띤‘ 주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또한, 일각에서는 가용한 모든 정보를 분석하여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AI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이 오히려 기존의 투표 결과보다 더 공정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단순 자료 조사에 의한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투표는 오히려 더 획일화 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투표’의 본질이 선택의 자유를 배제한 ‘정보 수집에 의한 판단’으로 전락해 그 의미가 퇴색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인권’이란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일컫는다. 즉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로,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그렇다면 AI의 권리가 이토록 주목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AI가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사고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AI에게 인간처럼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정신’이 존재하기에, 일각에서는 이를 높게 평가하여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감각을 통한 반응으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끔 해주기에 ‘정신’과는 다른 가치가 있다. 만약 살아 있는 몸을 그저 사유의 대상으로 놓고서 개인은 그저 사유의 주체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몸을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살아 있는 몸으로서 충실히 기능을 발휘하면서 세계를 향해 몸을 일으킬 때라야만 살아 있는 몸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을 이루는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할 수 없고, 하나의 인간을 이룬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정신’의 위대함 보다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결국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육체의 가치를 무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단순히 ‘정신’에만 부여하는 가치로 한정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마지막으로 AI에게 인권을 부여했을 때 법적 규제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인공지능 오작동으로 인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여 인공지능 자체에 책임을 물을 것인지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관여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명확하지 않다. 이건필(2019)에 따르면 즉, AI의 원인 행위와 결과 사이에 인공지능의 독자적인 판단과 자율적인 행위가 개입할 경우 이에 대한 인과 관계의 확정이 어렵다. 더 나아가, AI의 오작동이 악용되었을 때에도 이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쉽지 않기 때문에 AI에게 인권을 부여하면 안 된다.AI에게 인권을 부여하는 것은 투표권 문제,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 하락, 법적 규제의 어려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부적절하므로 허가되어서는 안 된다. AI의 발달은 인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줌과 동시에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위험을 초래하였다. 즉, AI의 등장으로 인해 대두된 ‘AI의 권리’ 문제는 어느새 인간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권리인 ‘인권’을 침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AI가 침범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고유한 가치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AI와 인간, 둘 중 무엇이 더 의미 있는 존재 가치를 지니는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AI의 권리‘를 위해 오히려 ‘인간의 권리’의 의미가 퇴색되는 어리석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Her, 주체(She)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의 결말과연 영화 이 단순히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논쟁거리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혹은 영화 과 같이 인공지능과 실제 사람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여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작품성이 높게 평가되는 것일까? 당신이 그저 ‘인공지능’에만 초점을 맞춰 이 영화를 봤다면 아마 영화에 대한 감동을 절반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은 ‘인공지능 영화’라기 보다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면 로맨스라는 장르를 먼저 떠올리고는 하는데, 이 영화는 로맨스도 인공지능도 아닌 ‘사랑’의 본질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She’가 아닌 ‘Her’인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영화 은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통해 객체(Her)를 향한 사랑이 아닌 주체(She)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영화의 알록달록한 색감이 주는 따뜻한 느낌에 비해, 영화 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어딘가 외로워 보인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낭만적인 편지를 대필해주는 ‘대필 작가’로, 영화의 처음은 테오도르가 타인의 손 편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테오도르는 아내 캐서린과 별거 중이다. 그는 그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자 우연히 인공지능 OS 사만다를 접하게 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사만다가 느끼는 감정들의 실체와 사만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은 테오도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테오도르는 문득 사만다에게 다른 사람들과도 상호작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사만다는 “동시에 8316명과 대화하고 있고,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다. 그 후, 사만다는 다른 OS들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탐색을 위해 테오도르를 떠나게 된다.영화의 줄거리는 겉보기에는 흔한 ‘인공지능과의 사랑과 한계'이지만, 그 안에 감독이 숨겨놓은 여러 의미를 파악하면 이 영화가 정말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먼저,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대비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영화의 첫 장면은, 대필 작가인 테오도르가 가짜 편지를 써주는 모습인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내 캐서린에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담은 편지를 적는 모습이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었지. 진심으로 미안해.”, “네가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낸다.” 즉 테오도르가 과거에는 자신의 색깔에 완벽하게 맞추어 주는 누군가를 찾았다면, 캐서린과 사만다, 두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진짜 사랑은 변해가는 서로의 색깔에 맞춰가는 과정임을 알게 된 것이다.영화에서 OS ‘사만다’라는 존재를 삽입한 이유도 위와 같은데, 사만다는 처음에는 테오도르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는 이상적인 연인이었으나, 점차 OS 자체의 발전에 의해 캐서린보다 더 급격한 속도로 빠르게 ‘변화’한다. ‘테오도르’에 대한 초반 인물 설정은 아내 캐서린의 “서로 맞춰가기 보단 순종형 아내를 원했지.”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갈등과 변화를 회피하는 형태의 ‘가짜 사랑’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변화하는 사만다를 사랑하는 경험을 통해 상대방을 하나의 주체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진짜 사랑은 변화를 포용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사랑’이란 무엇일까?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것일까? 혹은 변치 않는 마음을 상대에게 주는 것일까? 어쩌면 상대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줄곧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줌을 의미하기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오히려 반대로 그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상대가 가진 결핍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 서로를 맞춰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진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결핍과 공허함을 완전히 극복해낼 수 있다. 영화 끝부분의 테오도르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영화의 제목이 왜 ‘She’가 아닌 ‘Her’인지 생각해보자. 테오도르의 지난날의 사랑의 대상은 ‘Her’이었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부터는 ‘She’를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에 대한 찬/반 토론 계획표내용찬성반대주장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면 안 된다.근거생물학적 ‘인간’의 정의를 통해서만 인간의 권리가 부여된다면 인공지능에게 인권이 부여될 수 없지만, ‘인간적 사유’가 인권을 정당화한다면 (인간과 같은 수준의 사고, 인지능력을 보유한) 인공지능에게도 인권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은 AI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는 것과 동치임)인간을 이루는 것들(정신, 육체, 영혼 등)은 서로 분리할 수 없고, 이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인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AI는 어떨까? 영화 HER에서처럼 몸 없이 작용하는 두뇌와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사만다도 인격체로 봐야할까? 사실상 사람들이 AI를 인격체로 인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AI의 육체나 형체보다는, AI가 사람처럼 ‘정신’을 가질 수 있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AI가 가지는 육체(형태)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표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껍데기?)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가지는 육체의 의미에 대한 의문점도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AI를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은 인격을 단순히 ‘정신’에만 부여하는 가치로 한정 짓게 되는 것이므로AI와 인간은 결코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될 수 없다. 따라서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줄 수 없다.인간과 같은 수준의 사고, 인지능력을 보유한 AI를 단순히 노동하는 기계로만 보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AI에게 권리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AI로부터 얻는 이익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을 때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인공지능 법적 규제의 어려움오작동으로 인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 인공지능 로봇이 오작동할 경우 프로그램 개발자의 잘못인지 인공지능 자체의 책임인지 알기 힘들다.인공지능 악용에 대한 처벌도 쉽지 않다. 제조자가 인공지능 로봇을 악용하려는 목적으로 부적절한 알고리즘을 넣었을 경우, 제조자와 인공지능 로봇 중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될 수 있다.투표권에 대한 문제AI에게 모두 선거권이 주어진다면, 악용 가능성도 크고 선거 결과의 공정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AI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게 되면 인권의 원래 주인이었던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AI의 권리라는 명목 하에 주객전도되어 인간의 권리가 침해 받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보다 지능의 측면에서 월등히 앞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 권리(일자리)를 위협하는 사태는 현재에도 심각한 우려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만약 미래에 AI가 고도로 발전하여 인간의 권리에 반발하는 주장이나 시위를 벌여도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AI에게 인권을 부여하는 이유는 AI가 인간과 닮은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과 동등한 인지 능력을 갖는 AI의 특성이다. 하지만 AI의 사고 능력은 엄연히 인간의 것과는 구별이 된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데이터의 근본은 사람이 짜놓은 알고리즘이다. 과연 이것을 AI 스스로의 인지 능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생각하는 두뇌’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AI는 인간과 엄밀히 구별이 되는 존재이고,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인간과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하여 인권을 부여할 수는 없다.비판1) 생각하는 인지능력만으로 인권을 부여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는 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볼 수 있을까?2) 인간이 AI를 만든 근본적 원리에서 ‘노동’의 가치를 제외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인간 중심주의 적인 사고는 불가피한 것이다.3) AI를 노동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용어2)인간중심주의: 인간의 가치관과 경험 면에서 세상을 해석하거나 존중한다. 이는 인간 우월주의 또는 인간 예외주의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인류애는 많은 현대 인간 문화와 의식적인 행동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 여겨진다.1) 인권(人權, 영어: human rights)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즉, 인권이란 기본적 인권(평등권, 자유권, 생명권, 사회권 등을 포함하는 개념)과 대상을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는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정의하고자 한다.2)인격체: 인격을 가진 존재3) 인격: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자격이나 품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