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소설 속에 소개된 '자살면허에 관한 특별법'이란 자살 또한 운전면허증처럼 자살면허 소지자에 한해서 합법적으로 허용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살면허'라는 것은 어쩌면 '자살예방법'이 극단적으로 진화된 미래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만, 미래사회의 독특한 면허증, 자살면허증의 존재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은 그것이 현 '자살공화국'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사실이다. 소설의 주제는 간단하다. 작품에 보여주고 있는 배경 그대로이다. 비인간화 된 사회. 인간미 하나 찾을 수 없고 자살이 만연해서 자살면허라는 제도까지 만들어서 제제를 해야 할 정도의 사회. 사람들은 맹목적이 되어버리고 있고 지극히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회이다. 비인간화를 보여주는 대목은 수도 없이 많아서 굳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 자살을 면허로 만들어 버린 '나라', 그 시국에 편승하여 '사교육'으로 돈벌이를 하는 학원, 아버지(국어)의 장례식에서 슬픔은커녕 주식만 들 여다 보고 있는 아들. 아내의 장례식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아 빈축을 산 주인공 수학. 그 와중에 세 아들의 아버지인 수학은 자식의 부양을 받기는커녕,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죽어가고 가고 있다. '기저귀를 찬 채' 찬 존엄성 잃은 죽음을 상상하고 찾아간 학원에선 젊은 여자가 할머니에게 줄 하나 비켜주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고 그 할머니는 결혼 하지 않고 자식 없이 '강아지'에만 목숨을 매는 할머니이다. '자살면허'가 일종의 스펙이 되어버리고, 학원에선 공부를 왜 하는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밑줄만 긋는 '젊은 학생'들, 학교에선 파벌 싸움으로 인한 무형의 폭력이 만연하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젊은이들이 연애도 하지 않고 개인적 삶에만 치중하는 사회. 그냥 이 작품의 배경, 이 작품 전체가 비인간의 상징이라 보면 될 듯하다.나는 자살면허증을 만든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소설은 자살공화국이 된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타인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두려운 결과에 직면했을 때는 절망감에 자살을 선택한다. 청소년 자살은 학교 성적, 가정불화, 왕따 등과 더불어 외로움과 고독이 원인이다. 청년기 자살은 학벌 경쟁, 취업 경쟁, 결혼과 육아, 높은 집값과 물가 등 경제적 위기가 원인이다. 중년에는 경제난, 가정불화, 가장으로 서의 책임감, 우울증, 외로움이 자살의 원인이다. 노인은 신체적 질환, 경제적 곤란, 가족 해체에 따른 상실감이 원인이다. 외국에선 자살이 주로 정신병적 요인으로 인식되지만, 한국에선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자살이 늘고 있다. 서론에서 말한 비인간의 상징을 보면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자살에 딱 알맞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사회구조를 바꿀 생각은 하지않고 자살면허증을 만들어 자살을 합법화 시킨다. 우리의 현실은 소설 속처럼 자살면허라는 것이 없고 다같이 학원에 모여 공부를 하고 자살을 언젠가 생각하고 사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그냥 주변사람들에게 좀더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어떤 의미에서 삶은 죽음으로부터의 저항이다. 우리가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강하게 삶을 느끼는 것처럼 죽음은 복잡한 생명보다 삶을 더욱 자명하게 만들어주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살 면허’라는 착상이 주목된다. 도덕적 금기인 죽음의 선택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면허를 통해 삶과의 관계성이 열린다는 역설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소설은 자살을 실패한 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나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행위로 서술하지 않는다. 단순한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제시한다. 주인공은 자살을 결코 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 최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차악(次惡)의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건 관심 뿐이다. 사랑 받는 사람이란 느낌을 가지지 못할 때, 즉 자존감이 붕괴될 때 사람은 자살을 한다. 자살은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생기는 절대적 고독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그를 내버려둔 타자, 사회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약자의 인격 침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시작되고 있다.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역량을 기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약자의 상황이 절망의 상태였음을 동의하는 것이기에 치유에 희망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