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고통, 그 사이엔 성장이 있다-타자를 통한 되돌아보기-속죄, 그 이름의 대가는 혹독하나 용서받지 못한다. 엽기적이고 잔혹한 사건을 시작으로 셋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당시 브리오니의 섣부른 판단은 ‘어린 나이’ 때문에 아니, 덕분에 정당화될 수 있는 행동인가? 이러한 질문에 내가 섣부르게 ‘예’ 혹은 ‘아니오’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겠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수없이 저질렀던 일이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는 일을 마주했을 때 애써 진위를 무시한다. 결국 보잘것없는 경험을 빌려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사건의 잘못된 대상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역자의 말을 빌려, 이는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판단만 믿는 오만함이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모양새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휘두르는 폭력까지, 역자는 ‘속죄’의 주제를 다름 아닌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래, 브리오니는 너무나도 명백한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 그게 참 어렵다. 나아가 ‘나’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무엇보다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막상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필요치 않는 거지.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어질러진 옷가지를 옷장에 그저 쑤셔 넣은 채, 깨끗한 방만을 기억하려 한다. 이게 내 방이야, 혹은 이게 나야, 라는 합리화를 완성할 뿐이다. 이토록 자기성찰이라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방아쇠가 되는 게 타인이 아닌가 싶다. 옷장 속에 꼭꼭 숨겨둔 나의 흠을 타자에게서 혹은 타자로 인해 발견할 때, 마치 거울처럼, 지우고자 했던 나를 마주한다. 신화 속 메두사가 자신을 거울로 통해 바라보자, 돌이 되어 굳었던 것처럼 결국 피할 수 없이 직면하고 만다.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라니,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브리오니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로비의 신분을 무시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를 인지했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자기혐오를 분출했을 터이다. 이 혐오감을 지우기 위해, 애써 로비를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을까.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하고 합리화에 필요한 단서를 모으고, 이와 어긋나는 것은 조작하면서. 이러한 이유가 아니라면 브리오니는 그런 뼈아픈 속죄를 할 리가 없다. 그녀는 그들을 고통으로 인도한 가해자로서, 자신의 ‘앎’을 고찰했다. 혹여나 우월감과 열등감은, 그 성질이 비슷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이로부터 나온 자기혐오는 자기 파괴를 넘어 타인을 통제하려는 기질로 작동하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만약 배웠다면, 그녀는 성장했을 것이다. 성장, 이어서 성숙. 브리오니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에 성숙해졌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