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年 12 月 03 日 麗水 興國寺 한국건축사目次 1 2 3 4 흥국사 소개 및 가람배치 홍 교 , 부도전 범종각 일주문 5 대웅전 6 원통전흥국사 소개 여수시 흥국사 길 160 번지에 영취산을 등지고 위치하였다 . 국가의 운명과 사찰의 운명을 함께 지내는 사찰이며 고려시대인 1195 년 ( 명종 25) 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수군 승병이 있었던 곳가람배치 소개 대웅전을 주축으로 이루어져있다 . 아래서부터 설명하자면 홍교를 지나 일주문 , 스님들의 유골을 모신 부도전 , 공북루 , 영성문을 지나면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 있다 . 이 문과 법왕문 사이에는 범종각과 선불당이 있고 , 문을 지나면 전 면에 대웅전 좌측 적묵당 우측 심검당이 있다 . 그 뒤에는 원통전 , 웅진당 , 팔상전이 있다 .홍교 우리나라에서 현존하고있는 무지개다리로써 가장 오래된 크고 넓은 다리이다 . 홍교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나와 있는데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 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이 표현하였다 또한 다리 시작부분에는 하마비가 놓여있다 이 두개의 의미는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어 부와 명예를 다 내려놓고 들어가라는 의미이다일주문 일주문은 다포형식으로 3 출목첨차이며 기둥은 민흘림기둥이다 . 지붕은 맞배 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직선형 풍판이고 , 연화형 첨차모양으로 굽받침이 없다 . 못된 마음을 비우고 하나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만날자세를 갖춰 들어가는 문이다 .부도전 부도전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부도가 모여있는 곳으로 흥국사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석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신 부도가 모여있어 화려하지않고 소소한 것이 특징이다 . 12 개의 석종형 부도가 일렬로 배치되어있다 .원통전 관음전은 관음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이라고도 부른다 . 원통전은 앞면 5 칸 , 옆면 3 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앞쪽과 양쪽에만 있고 건물 뒤쪽에는 설치되어있지 않다 . 전체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 건물 외형은 민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우고 전면과 양 툇간에는 처마 밑으로 팔각의 활주를 세워지붕의 하중을 받게 했다 . 또한 2 출목 첨차로 되어있다 .대웅전 대웅전 역사와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한 디자인 외부 상세 내부 상세 도면대웅전의 역사 및 소개 대웅전은 인조 2 년 (1624) 계특대사가 절을 고쳐 세울 때 다시 지은 건물로 송광사 대웅전을 그대로 본 따 승려들이 직접 지었다 . 규모는 앞면 3 칸 · 옆면 3 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 ( 八 )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 이 장식구조를 기둥 사이에 3 구씩 배치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며 앞면 3 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키가 큰 빗살문을 달았다 . 대웅전은 기둥이 높을 뿐만 아니라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축대 또한 높아 더욱 훤칠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 불화와 각종 단청으로 치장된 내부는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대웅전의 디자인 前面 後面 앞에서 보면 봉긋한 영취산의 봉우리가 용마루 위로 솟아올라와 마치 부처의 육계처럼 보인다 . 뒤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영취산의 곡선을 따라 지붕의 처마가 연결되어 하나된 듯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의 외부 정면 3 칸 , 측면 3 칸인 다포계의 단층 팔작 지붕 건물 장대석 기단 위에 활주를 받침 기둥 위에 올린 살미 [ 山彌 ] 인 쇠서 [ 牛舌 ] 는 끝부분이 치켜 올라간 앙서 ( 仰舌 ) 와 끝부분이 처진 수서 ( 垂舌 ) 가 각각 3 개와 1 개로 구성되었다대웅전의 외부 탑이 없고 부도전만 있다 . 대웅전은 배를 , 마당은 바다를 상징한다 . 바다 위에는 탑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대웅전 마당에는 탑이 없다 . 대신 반야의 세계로 배를 끌고가기 위해서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에 여의주를 물고있는 용 4 마리가 있다 . 그래서 대웅전을 용선이라고도 한다 . 캄캄한 밤 바다를 밝혀주기 위해 거북이에 석등이 있다 . 문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미역줄기 등 해초가 그려져있다 .대웅전의 외부 장대석 기단 위에 활주를 받치고 덤벙주초 위에 그랭이질 한 기둥을 올렸다 . 격자교살문의 손잡이를 잡으면 삼학도를 면해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장대석 기단 활주석대웅전의 외부 평고대 서까래 도리 창방 주두 소로 평 방 안초공대웅전의 내부 내부 공포의 살미 중 제 3 살미 이상은 연화 당초를 초각하고 그 위에 용두나 극락조를 장엄하여 극도의 장식미를 추구하였는데 이 점을 보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알 수 있다 . 내부는 고주 2 개를 세우고 그 위로 앞 뒤 외목도리에 이르는 대들보를 걸치고 충량 4 개를 대들보에 걸쳤다 .대웅전의 내부 천장은 우물 정 ( 井 ) 자 모양을 하고 있는 우물천장 3 출목으로 굽받침이 없고 소로가 쌍갈머리이다 . 부처님 머리 위에는 지붕이 하나 더 있다 . 부처님의 집은 6 출목으로 되어있다 . 전체적으로 대웅전의 형식은 1 형식으로 판단되다 .도면 고주 충량도면 장대석기단 용머리 4 개 괘불 걸이 솟을빗살창 안초공도면 활주 민흘림 기둥도면 기둥 창방 평방 공포도면 충 량 주두 창방 솟을지붕 내외 3 출목 첨차도면 종도리 중 도리 하중도리 주심도리 외목도리 종보 대공 1 고주 7 량가 중 보 툇 보 평주 평 주 고주감 사 합 니 다 2019 年 12 月 03 日 麗水 興國寺{nameOfApplication=Show}
달콤한 사탕수수 뒤에 숨겨진 씁쓸한 역사흰색과 검은색의 차이학 과 : 건축학부학 번 : 20184395이 름 : 이 선 순서론아이들을 달콤한 과자를 좋아하고, 어른들도 가끔씩 마카롱이나, 케이크 같은 달콤한 디저트를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며 먹는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단맛에 이끌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맛이란 설탕이나 꿀 등에서 느끼는 맛의 하나이며, 슈크로스와 글루코스 등 ‘당’이라는 성분에서 나는 맛이다. 당은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생성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맛, 인공감미료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을 많이 섭취해서 건강에 문제가 되지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단맛은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귀중한 식량이 된다. 기록에 따르면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도 고행을 마치면 설탕이 들어간 우유죽을 마셨다고 한다. 이를 통해 노동이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에게 단맛을 내는 초콜릿이나 꿀을 먹으면 효과가 바로 나타나듯이 설탕도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체력을 보충해준다는 효능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람은 즐거움을 느끼거나,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 달콤한 맛을 선호하게 된다.이러한 달콤한 맛을 내는 설탕의 원료는 사탕수수이다. 사탕수수란 키가 큰 다년생 초본으로서, 높이는 2-6미터로 대나무와 같이 생긴 줄기에는 단당류인 자당(sucrose)이 함유되어 있는 즙이 매우 많다. 이를 짜내고 증류하여 설탕을 만든다.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자당(蔗糖)은 정제해서 설탕이나 당밀의 형태로 식재료로 쓰거나, 발효시켜 에탄올이나 술을 만들며 럼주가 바로 사탕수수로 만든 술이다. 사탕수수는 덥고 습한 열대기후에서 자라며 서식범위는 적도에서 남아시아까지 매우 넓다. 본래 여러 종의 사탕수수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에서 자생했으며, 8세기 무렵 아랍무역상들이 인도로부터 들여와 그 뒤 10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지었다.본론사탕수수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노예제도의 면과 아프리카 노예로 인해 아프리카국가에 미친영향, 하와이의 다문화 사회에 있다.먼저 사탕수수는 다른 작물들과는 다르게 가축의 힘을 빌려 노동의 강도를 줄일 수가 없다. 모종을 심는 과정부터 기르고 수확하는 것까지 오로지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만 해결해야 했다. 수확 후 곧바로 정제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과 정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공장이 필요했고, 이러한 쉴 새 없이 설탕을 생산하는 과정을 플랜테이션이라고 부른다. 플랜테이션에는 대량, 집중적인, 지속적인 노동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사탕수수의 농장주들은처음 전쟁 포로에게 노동을 시키게 된다. 하지만 전쟁 포로도 일을 감당할 수 없자 노예 노동력으로 대체하였다.자세한 역사를 살펴보자면 1493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였지만 여왕이 원하는 후추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스페인은 후추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다른 유럽국들을 정복하는 욕망에 휩싸여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지했는데, 하지만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서인도제도에서 부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콜럼버스의 계획대로 후추를 대신한 사탕수수는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게 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량으로 정제된 설탕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아메리카 대륙에서 사탕수수 재배에 큰 성공을 거둔 스페인을 보고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따라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무자비한 침략과 전투로 인해 혀지 인구가 지속해서 감소하였고, 대륙 진출 과정에서 옮겨진 질병으로 인해 인구 감소는 속도를 붙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추가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식민대륙인 아프리카를 바라보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한 사탕수수와 공업제품을 아프리카로 운송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사탕수수 제배에 동원할 흑인 노예들을 실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한 노예들은 줄줄이 목숨을 잃었고, 유럽인들은 노예들은 소, 돼지 같은 소모품으로 여겼다. 유럽인들은 이 노예무역을 목화 재배 등 작물 생산에 그대로 적용하여 노예무역이 시작된1451년부터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된 1865년까지 940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아프리카 인들이 노예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그 후 사탕수수 재배가 확대되어서 16세기 중엽에는 150~200명의 노예들을 소유한 농장들이 등장했으며, 심지어 노예 수가 500명에 달한 곳도 있었다.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재배의 역사에서 17세기 중엽이 결정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점 이후로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크게 확대되었고 플랜테이션이 완전히 자리잡았다. 예컨대 바베이도스에서는 1660년대까지 유럽인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이후 아프리카 노예 노동이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수수 플랜테이션에서는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성 증가가 거의 없었으므로 세계적인 설탕 수요 확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생산 규모의 확대에만 의존했고 이는 곧 노예무역의 증가로 귀결되었다.그렇다면 사탕수수의 수요가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앨리자베스 애벗의 저서 설탕:달콤쌉싸름한역사(Sugar: A Bittersweet Histroy)에 따르면 홍차에 넣는 설탕 한 조각 때문에 노예 생활을 강요받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맨 처음 중국에서 차가 전해지게 되었는데 차가 전해지자 유럽 상류계급 사람들은 한 잔의 홍차를 마시는 시간이 주는 행복을 즐겼다. 홍차가 주는 본래의 씁쓸한 맛에 달콤한 설탕을 넣어 매혹적인 맛으로 변신시킨 이들의 음료는 서민층까지 퍼지면서 설탕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사탕수수 재배 면적이 점차 증가하고 생산량이 폭증하게 된다. 설탕은 사치품에서 기호품으로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설탕을 요구하였다.이러한 노예제도는 건장한 남자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여자들만 남게 되는데, 인구 구조면에서 여성의 비율이 더 많아져 일부다처제가 형성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남성 노동력 부족 현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부가하여, 생활조건이 악화되고 또 다른 여성 노예제를 유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