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5-13의 강해 설교****제목: 하나님께서는 백부장과 같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Ⅰ. 서언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오늘의 성경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은 로마의 군정장교였습니다. 그는 지역을 다스리면서 교만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다스리는 지역의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눅 7:5). 그리고 자기 종을 배려하였습니다.백부장은 자기 종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자. 그 종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려고 가까이 오실 때에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이는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멀리에서 환자를 보지 않고, 만지지도 않고 치료하실 수 있다는 전능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믿음대로 응답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이 있어서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우리가 경건한 사람과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같이 지낸다는 것은 영육 간에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의 열병 걸린 하인은 이렇게 경건한 백부장의 가정에서 종이 된 것을 통하여 이러한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눅 7:3-5).오늘 우리 자신도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 더 나아가 교회에서 경건한 믿음을 통하여서 백부장처럼 유익을 주고 있는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이렇게 귀한 뜻이 있고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신 귀한 말씀을 백부장과 같은 인격과 신앙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자세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펴보고자 합니다.Ⅱ. 설교 본문1. 백부장은 그의 하인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마 8:5-7).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의 마지막 말씀(마 7:24-27)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확고부동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이제 그 믿음의 소유자들의 표본을 제시하면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먼저 예수님께서 산으로 내려오시면서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십니다(마 8:1-4). 그리고 이제 주인의 믿음으로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십니다.이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전도의 본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정하였습니다(마 4:13). 이 가버나움에는 로마군대 조직 100명으로 편제된 부대가 있었고, 이 부대의 지휘관이 백부장이었습니다.그 백부장은 그 지역의 유대민족도 사랑하고 회당도 지어 준 덕망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눅 7:5). 이러한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가버나움에 들어오시니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그가 예수님께 간구하려고 온 이유는 자기 가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이 귀한 사람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하인을 위해서였습니다. 중풍병은 신체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병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하인의 질병에 대해서 무신경한다고 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시기였습니다.백부장은 그 당시 노예제도가 역사상 가장 성행하였던 시대에 전제국가의 지휘관으로서 그의 시대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그러한 훌륭한 인격과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그러나 백부장은 좋은 인품과 신앙으로 자기 종을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그리고 유대인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오늘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은 볼 수 있는 눈과 도와줄 수 마음이 있다면 이러한 백부장처럼 교회 안과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도 만족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목격할 것입니다.2. 겸손한 자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마 8:8-9).백부장은 자기는 부족한 사람이요, 주님을 만나볼만한 사람도 못되고, 더욱이 자기 집에는 주님을 모셔들일 수도 없는 죄인임을 깨달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인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이방인 집에 들어가지 않는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까지도 알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겸손은 아주 중요한 은혜의 자세입니다.어거스틴은 제자들이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큰 은헤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겸손이니라”하고 하였습니다. 계속 두 번째 비결을 묻자 그때도 한결같이 “겸손이니라”하고 반복하여 대답하였습니다.사도 베드로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는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벤전 5:5-6)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는니라”(고전 15:8)하고 고백하므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백부장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며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권세있는 명령을 발하실 때 하인의 질병이 곧 떠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께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실 때 말씀으로 고치시거나 손으로 안수하여 고쳐주셨습니다.그러나 이 백부장의 믿음에 의하여 외적 증거에 의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멀리 두고 타인의 믿음에 의하여 질병을 고치시고 능력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진정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증명한 것입니다(히 11:1).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이자 천지만물의주권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종의 질병이 나을 수 있다는 백부장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3. 하나님께 나아가는 조건은 믿음입니다(마 8:10-13).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에게는 주님께서도 감탄하실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즉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그처럼 간절한 사랑, 사려깊은 인정스러움, 날카로운 통찰력, 탁월한 겸손, 무제한적인 신뢰가 융합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물론 믿음을 발견하셨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러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셨습니다.그리고 주님께서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은 동시에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도 됩니다. 유대인들이야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많았습니까!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한 역사가 있고, 영광의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혈통에서 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롬 9:4-6).
***** 출 4:10-17의 강해 설교*****제목: 하나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Ⅰ. 서언모세가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떨기 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십니다(출 3:1-6).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데 모세를 중심인물로 부르십니다(출 3:7-15).그러나 모세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을 핑계로 사명을 게속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지팡이와 나병 그리고 나일강의 기적으로 징표를 주시어서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출 4:1-9). 그러나 모세는 주저하였습니다.물론 모세는 40년 전에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에 능하였습니다(행 7:22). 그러나 40년간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출 4:10).그래서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가 되었습니다(출 4:10). 그러므로 자신은 출애굽의 역사에 주역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말을 잘못하는 자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워주십니다. 이제부터는 모세와 아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말이 둔한 모세에게는 말 잘하는 아론이 필요하였습니다. 반면에 능력이 부족한 아론에게는 능력있는 모세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두 형제가 협력자가 되어서 주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오늘의 출애굽기 말씀은 자기의 무능을 이유로 하여서 소명을 거부하고 있는 모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쓰시려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깨닫게하는 말씁입니다.Ⅱ. 설교본문1. 인간의 생사화복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출 4:10-12).모세는 출 4:10-12에서 자신이 말을 잘하지 못함을 이유로 하여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오 주여”라는 모세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간절한 부탁과 애원 그리고 탄원입니다.하나님을 대변하려면 말을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전에는 말에 능한 자였습니다(행 7:22). 그런데 그는 40년 동안 목자 노릇만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 접촉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애굽 사람이 쓰는 용어도 다 바뀌어서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보편적으로는 30년이 지나게 되면 말들이 자연스럽게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모세는 바로를 만날때에 필요한 수완이나 협상력이 매우 떨어져 있었습니다.하나님의 특사로서 역할을 하여야 할 모세는 지나친 겸손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의 사정에 대한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후에도 말재간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40년간 동물들과 광야에서 살다 보니 밖에 세상 특히 애굽 문화에 대해서는 너무 멀어져 있었습니다.비록 모세의 표현은 거부 같지만 모세의 속마음은 진실로 사양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십니다.하나님의 창조는 주권적입니다. 사람으로 말할 수 있게 누가 만드시고 시행하시겠습니까? 그 결정권자가 누구십니까?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쓰실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그의 뜻대로 불러 쓸 권한과 능력이 있으십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이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가득 찬 것 같이 지금까지 모세가 갈 수 없다고 애원하는 모든 것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약한 부분은 강하게 하겠으니 더이상 주저하지 말고 출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이때 하나님은 모세의 입과 함께 있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가장 행복하고 안전할 것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심입니다. 어린 유아에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사람의 불행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떠나심이고 버리심입니다.특별하게도 하나님의 특사로 가는 모세의 입과 하나님께서는 같이 가시겟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이제 모세에게 요구되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이 필요할 때 화살로 겨냥하듯이 가장 명확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실 것입니다.이때 가르친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베호레티카’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이 ‘야라’인데 즉 이는 화살을 겨냥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에수님께서도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8-20).2.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여러분을 들어서 쓰실 것입니다(출 4:13-17).하나님의 부름에 다섯 번이나 거부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시거나 징벌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보완하여 쓰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데 모세에게 도구가 되어서 순종만 하라고 하였으니 40년간 광야 생활에서 모세는 자신감은 물론 자존감마저 소진된 상태였습니다.이때에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모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론을 돕는 자로 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달변과 능변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미리 준비시켜서 민족을 구원하는 사역에 아론도 쓰임받게 하십니다. 이 엄청난 구원 사역에 형제가 함께 하기에 더욱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이제 모세는 아론의 입에 말을 넣어주고 그 전할 메시지를 아론에게 분명하게 전해주어서 모세의 메신저가 되어서 모세를 대신 말하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것을 받은 아론의 입에도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바로에게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특사로 애굽에서 노에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데 눈에 보이는 준비물은 지팡이 한 개 뿐입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역사하는 도구로 사용하라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고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쟁점들(알렌 입국-일제 치하)*****1.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과 언더우드 입국(1) 알렌의 입국1884년 9월 이승훈이 북경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영세를 받은 때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때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 개신교 첫 선교사로 들어왔다. 1883년 의사자격을 얻은 알렌은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고 1883년 북장로회의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파송지에서의 분란과 아내의 건강문제로 존 더 기후가 따뜻한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겼으면 하던 차에 뉴욕본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공사관의 월급을 받지 않는 의사로 일하던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통해서 조선 왕실과 연결이 되는데, 이를 언더우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술회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수구파의 거두이며 민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의 중한 상처를 알렌은 치료하였고,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알렌는 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궁중의 허가를 얻었고,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개원한지 2주일 만에 제중원으로 바꾸었다.(2) 언더우드의 입국1859년 출생한 언더우드는 1881년 화란 개혁교회 계통의 뉴 브른스윅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2학년때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급우중 하나가 이 기사가 실린 시문을 교실에 붙인 것을 보고서 처음 한국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884년 11월 화란 개혁교회의 뉴 브른스윅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그는 선교사로 나가려고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아직 한국에 지원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부터 “왜 네가 가지 못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북장로교회로부터 1884년 7월 파송을 받은 그는 먼저 1885년 1월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한국말을 배우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주일에 이전에 미국신학교대회에서 만났던 아펜젤러 부부와 동시에 한국땅을 들어오게 된다. 아펜젤러부부는 미국 북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왔기에 따라3년애 조직을 개편하고 위원도 추가하여 성서번역 상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중하고 철저한 심의 과정을 통하여서 1900년에는 신약성경이 완전히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모든 선교회와 각 기관 관계자들이 정동감리교회에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10년에는 드디어 구약이 완역되어서 그 이듬해에 출간되어서 한국어로 된 신구약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성경은 1937년에 와서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이 되었는데 이 개정을 개역성경이라 부르고, 개정되기 이전의 본래의 것을 구역성경이라고 부르고 있다.3.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태에서 서민들의 입교와 지식층의 입교 비교(1) 서민들의 입교전도형태를 비교해본다면, 천주교는 “위에서 아래로”의 전도형태를 취했다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하였다. 언더우드는 그의 선교 초기부터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행하였다. 이는 소위 관리나 양반들이 여러 가지 제약들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없이 살고, 고통당하는 상황인지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새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언더우드의 선교전략에 대하여 육영공원 교사 길모어는 비판하였다. 그러나 후일 역사는 이러한 언더우드의 전도가 주효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돌봐주고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그당시 서민들니 확실한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입신한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 이익에 급급하여 그랬던 것으로 볼수도 있다. 특히 통계상으로도 국난, 역질, 흉년 등의 재난시에 교회로 몰려오는 군중들이 많았다.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을사 조약, 1907년 정미조약, 1910년 한일합방 등의 시기에 교인수가 급증하였다.(2) 지식층의 입교지식층들의 입신 동기는 선교사들의 도움이나 물질적 이득 혹은 그들의 입교를 한 것은 아니고, 먼저 기독교를 통한 국가의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하였고, 우리 교회가 틍을잡가면서 성장하돌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4. 1907년 대 부흥운동에서 그 운동의 결과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과 교회형성에 지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첫째,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부흥운동으로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령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결단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언더우드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장로교회의 경우 1906년 교인수 54, 987명에서 1907년에는 73, 844명으로 증가하여 34%가 증가한 셈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의 증가도 가져왔기에 그만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늘어났고,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3.1운동이 촉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셋째,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는 결과가 이어졌다.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어 오면서 한국교회의 성장과 영적인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고 철야 기도가 시작되어서 기독교가 더 이상 서양의 종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넷째, 에큐메니칼 정신의 구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었으며, 교파를 초월하여서 사경회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나타나고, 두 교회는 서로 강단을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과 반대하여 부정적인 측면을 논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로 하여금 비정치화하게 하였고, 몰역사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들, 특히 정치적인 면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부흥 운동이 끝나고 나서부터 한국교회의 항일 운동이 희박해지고, 교인들이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게 되는 결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난 이것은 부흥운동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결과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38면, 한군인 장로 40면, 도합 78명이 모여 창립 노회를 개최하여 첫 노회장에 마펫 선교사가, 부회장에 방기창 목사가 선출되었다. 노회는 교회가 견지해야 하는 신앙고백인 신조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때 인도 자유교회가 1904년에 창립하면서 채택한 12신조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2신조는 철저하게 칼빈주의 신학입장을 따른 신조로서, 정통적인 장로교회의 신조로서 흠이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 주도의 틀을 아직은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선교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말에 따라서 노회는 전도부를 설립하고 첫아업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고, 최관흠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걍에 보내었다. 노회는 전국을 7대리회로 구분하여서 노회의 위임 사항을 처리하게 하였다. 이때 선교사들의 소고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노회는 그들의 징계와 임명은 종전대로 그들을 파송한 모교회와 동 선교부에 속한다고 유보함으롰거, 일종의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6. 교회의 친일 행각일제는 1939년에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교회에 대한 압박에 도를 더해 갔다. 각 도시에는 한 개의 교회만의 존립을 허가하였고, 가미다나 설치, 궁성요배, 삼사참배, 각종 헌금과 공출 등 수많은 수탈과 부역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41년 일제가 미국을 향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을 때, 교회도 친일적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교회는 1939년 3월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장로회연맹를 조직하였고, 중장상치위원회를 설립하여 순 일본적 교회로 만들것과 국가 시책에 맞지않는 찬송가 등의 자구까지 고치었다. 감리교회도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는 사상지도, 교육개혁, 군지원, 기구통일책 등의 친일적 경향의 개혁안을 내놓는다. 1940년 구세군도 순 일본적 기구 조성을 선언하고, 성공회도 좌담회 들을 개최하며 친일적 작태를 보인다. 특히 1942년 10월 평양 서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와“저리로서 산자외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나.”는 부분이 각각 일본의 신도 설화에 위배되고, 천화의 영원한 계속사상을 파괴한다고 금지시켰다. 1943년 부터는 주일아침에배외 모든 집회를 금지시켰고, 징발한 예배당은 군수품 공장이 되고 말았다. 천주교회와 성공회, 성결교, 구세단, 안식교 등 군소교단들도 친일부역을 하는 데 예외가 아니었다. 1942년 조선에 징병제가 시작되자, 군소교단들도 일제의 환심을 사려고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기독교회 파괴공작을 총헤서 1943년 5월 재람사상 강조을 이유로 성결교회를 해체하였다. 또한. 침례교회와 안식교회도 같은 이유로 해산되고 말았다.7. 문선명과 박태선 계열 (한국교회의 이단 황국주 측면에서)1) 문선명 계열(가) 통일교(세계평화통일 가정연합)가) 기원: 1920년내 평양에 있었던 황국주의 영체교환운동에서 그 기원으로 본다. 황국주의 자신의 피를 받아야 깨끗해진다는 피가름 운동의 혼음파 교리를 채택하였다. 월남해서 부산에서 ’원리강론‘을 쓰고 1970년 한국종교협의회에 가입하였다.나) 이단 신학-성경은 시대에 뒤진 하나의 성문서로 성경이 진리가 되는 것은 원리강론의 빛으로 해석되었을 경우라 주장한다. 원리강론의 핵심 교리는 파주에 기도처를 두었던 김백문의 창도, 차락, 복귀원리에 기인한다.-통일교의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보는데 이는 동양의 음양설에서 빌어온 것이다. 통일교는 성경의 삼위일체로 삼신론이라고 비판하며, 새로운 삼위일체로 하나님과 문선명 그리고 그의 아내를 주장한다.-통일교의 창조론은 유신교적 진화론과 가깝고, 하나님은 남성, 세계는 여성으로 보는 것에는 섹스모티브가 있으며, 동양 역학의 음양설을 성경에 억지로 짜맞춘 것이다.-통일교에서 타락은 하와와 사탄의 성적인 관계로 사탄의 피를 행음이었고 죄의 뿌리는 음란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최초의 인간 타락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떠먹은 불순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통일교는 예수님의)
가. 옥중 서신의 배경바울은 주님께 선교명령을 받고 그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3차 선교여행을 마칠 무렵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소원하였다(행 19:21). 이를 위해 이방인 교회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고 로마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의 오해와 시기로 죄수의 몸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인해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되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이주한 것같이 바울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가이사의 궁내에서, 자기를 파수하는 군인들에게, 그리고 찾아 온 무리들에게 구두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다른 한편으로는 귀중한 말씀을 기록함으로써 기독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때 기록한 말씀이 에베소서, 빌리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며 이를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이 서신들은 단지 장소와 시기상으로만 공통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관련성이 많다. 이 네권의 말씀은 공통성과 더불어 각각의 특이성도 뚜렷하다.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교리적인 말씀으로써, 에베소서는 교회론을, 골로새서는 기독론을 논하고 있다. 반면에 빌립보서는 실제적인 말씀으로서, 교회 생활을 다루고 있다.나. 옥중 서신이 주는 교훈들먼저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투옥의 시련이나, 고통, 원수들의 적대 행위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는 주 안에서의 기쁨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기쁨을 소유하였기에 짧은 서신 가운데 기쁨이란 단어를 16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삶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복음이라는 말도 빌립보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알려지기만 한다면 원수, 심지어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받는다 할 지라도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과 함께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교제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오는데. 이는 같은 고, 하나님의 언약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부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윤리에 관한 것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4:1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강조하는 에베소서의 두 부분 사이에 있는 연결 구절 역할을 한다.1-3장1-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믿는 자들을 축복하셨는지에 관해서 교리적인 주의를 집중시킬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의 세 장(1-3장)은 믿는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거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매우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강조하면서 크리스챤 윤리의 교리적 토대를 구축한다.1장1:1-2 인사1:3-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촛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와 어떻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시느냐에 있다.1:15-23 기도와 감사의 부분/바울의 기도핵심은 믿는 자들을 위해서 더 큰 지혜와 통찰을 위한 필요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특별히, 에베소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던 일과 그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더 큰 통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기도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Ⅰ. 주요 기원(간구)(1:17-18)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너희 마음눈을 밝히사)Ⅱ. 기원(간구)의 요소들(=너희들이 알기를)A.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1:18)B.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1:18)C.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이냐(1:19)Ⅲ. 그의 힘의 세가지의 나타남(1:20-22)A.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1:20)B.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1:20)C.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1:22)2장2:1-11에서 바울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서 그들을 부르시고, 어떻게 리고 조화를 요구한다.신자들 사이에서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바울은 신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크리스챤의 믿음과 경험의 일곱 가지 측면을 언급한다. 이 일곱 가지 목록은 물론 철저하지는 않지만,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주장과 발표의 필요성과 조화된다.일곱가지는 다음과 같다.One Body(몸이 하나)One Spirit(성령이 하나)One hope(소망이 하나)One Lord(주도 하나)One faith(믿음도 하나)One baptism(세례도 하나)One God(하나님도 하나)4장4:7-16바울은 에베소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믿음과 경험의 일곱가지를 강조한 후,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갖추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선물들) 사이에서 고난이 있다(항상 있을 것이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고난은 교리적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이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은사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신앙의 통일성(4:13-14)을 가지기를 원한다. 교회에 이러한 은사들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단지 가능했다. 왜냐하면 그가 최종적으로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는 시기가 바로 그 때였기 때문이다(cf.121-23).4:11-12에서 바울은 교회에 주어지는 은사를 다섯가지 구체적인 직위를 언급한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의 예는 엡4장의 목록이 철저하게 의도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해 준다. 오히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목록처럼, 이러한 목록은 바울의 주장의 특별한 필요성에 맞추어진 것이다. 바울의 즉각적인(당면한) 관심은 “모든 교훈의 풍조”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요동함”(4:14)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문맥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직위는 가르치는 것과 건전한 교리(sound doctrine)에 연결되어 진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직위는 고전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과는 달리 가르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다섯 가지 직위:Ap한다(6:19 또 나를 위하여).6:21-24바울은 그의 동역자 두기고를 언급하며 에베소교인들에게 평화와 사랑의 간구를 하며 편지를 종결짓는다.라. 빌립보서의 개관사도행전 16:12에서 누가는 빌립보에 대해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부르고 있다. 빌립보를 ‘첫 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첫째가는 도시’라는 말로서 로마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도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게도냐의 빌립2세가 거주지가 있는 이 지역을 합병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바꿔 빌립보라고 하였다. 빌립보는 약 2세기 이후에(기원전 168-167년경) 로마인들에 의해 정복되어 마게도니아에 속해 있던 4개의 속국 중에서 첫 번째로 로마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행16:12). 빌립보가 중요한 도시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마케도니아 동북부, 곧 네압볼리와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입구에 접해 있어 로마와 동방을 이어주는 중요한 육로(에그나티아 도로)의 주변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가 비옥한 평원 위에 건설되었음에도 주변의 산에서는 풍부한 양질의 금속이 채굴되었기에 빌립보의 경제적 가치는 더욱 증대되었다.기원전 42년에 이중 전쟁의 최종 승리자인 아우구스투스는 빌립보를 재건하여 로마인들을 식민시키기 시작했고 계속 로마의 퇴역 군인을 배치하여 그곳을 거류지로 만들었다. 본질적으로 로마의 전진기지가 된 빌립보는 로마의 지방도시들 중 가장 명예스러운 도시에만 해당된 소위 ‘이탈리아 법’(lex Italicum)의 특별지배를 받았다. 이는 로마 본토의 법적 자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로마의 속국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었다. 따라서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 시민과 동등한 자유민으로서, 재산을 구입, 소유 또는 이전시킬 수 있었으며, 민사소송권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인두세와 토지세도 감면받았다.바울은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을 본 후 빌립보로 향하게 되었다. 바울되도록 석방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Ⅴ. 권면1:27-2:18바울 사도는 많은 자질들이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1.굳게섬1:27-30빌립보 사람들은 성령의 하나 되심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일심으로 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2.하나됨2:12,2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하나 됨은 너무도 중요하여 특별히 강조하여 반복되고 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3.겸손2:3-11예수님의 마음이 기독교인의 겸손의 규범이 되며, 이것은 교리와 권면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고전적인 기독론적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은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4.순종과성결2:12-18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불평을 삼가며 흠없이 살아 그리스도의 날에 바울이 그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Ⅵ.디모데 와에바브로디도2:19-30바울에 대한 디모데의 신실함이 언급되고 있으며,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보아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려 하고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서를 지니고 빌립보로 가며 바울은 그의 사역에 대한 감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병들자 바울은 그를 돌려보낼 결심을 한다. 빌립보로 돌아갔을 때 바울을 우해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을 인해 영접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Ⅶ.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3:1-4:11)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가르침 :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들을 풍자적으로 ‘손할례당’ 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특권들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를 스스로 포기했음을 강변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있으며 그의 가장 큰 욕망을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아는 것이다. 바울은 여전히 더 위대한 것들을 향해 전진을 계속 하고 있다 (3:1-6)2) 자유주의자에 대한 가르침 : 바울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한국 교회사 (언더우드 입국 전의 쟁점들)***1. 한국 교회사의 대표적인 사관 정리(선교사관/민족사관/민중사관/실증사관/주체적 수용사관/구속사관)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史觀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사의 대표적인 사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선교 사관입니다.백낙준 교수의 『한국 개신교사(1832-1910)』는 선교 사관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한국에 선교가 시작된 때로부터 연대적으로, 그리고 선교사별로 잘 정리하였습니다. 본서는 한국 교회사 서술로는 제일 먼저 서술된 것으로서 1927년 백낙준이 예일대학 라토렛 교수에게 박사 학위 논문을 사사 받은 것입니다.둘째, 민족사관입니다.민경배 교수가 1972년에 저술한 『한국기독교회사』는 민족교회의 확립이라는 민족사관에 의해서 서술된 책입니다. 저자는 종래의 교회사가 모두 선교 사관에 의해서 써진 것을 비판하며, 외국의 선교 팽창주의를 탈피하고자 민족의 주체성을 찾고자 민족교회의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사로서 토착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족사관은 교회사 분야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史觀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판 없이 수용한 것으로서 신학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지적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민족의 감정을 너무 내세우다 보니 외국 선교회를 그저 민족교회 설립의 저해 요소로 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또한, 1970년대 유신 정권에 의해서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도출된 시기에 나타난 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셋째, 민중 사관입니다.안병무 교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적 민중 신학입니다. 이는 기독교 복음이 역사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권력층에 억눌리고, 지배받아 온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발전한 정치 신학입니다. 이는 20세기 중후반에 라틴 아메리카의 구티 엘레츠 신부가 주장한 해방신학과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 사관은 사회 경제적인 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꿈과 희망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또한, 민중 사관은 민중이 배제된 엘리트 중심주의라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주재용 교수).넷째, 실증주의 사관입니다.이만열 교수를 중심으로 주장된 史觀으로 확실한 역사적 사료 즉 증거에 기반하여 서술하려는 입장입니다. 이만열 교수는 그의 저서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2”에서 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다섯째, 주체적 수용 사관입니다.숭실대 김영선 교수의 주장으로 “고백과 증언”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서술하고자 하는 사관을 말합니다. 숭실대에는 기독교 박물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박물관은 김영선 교수의 부인과 차녀가 북한에 소장 되어 있는 귀중품을 가져오기 위해서38선을 3번 넘나들다가 해주 앞바다에서 총에 맞아 피격되어 가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6.25때 소실된 박물관을 김 교수가 다시 정리하여 개관하였습니다.여섯째, 구속과 섭리 사관입니다.신주권 사상으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민족과 교회를 이끄시며, 우리 민족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섭리와 구속의 사역을 조명하여 서술하는 사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적 서술이 가장 보편타당한 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 카톨릭 선교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 가능성에 있어서1) 경교와 동양 선교 2) 경교의 한국선교 가능성 3) 고려 시대 기독교와 접촉 가능성1) 경교와 동양 선교경교는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교회 회의(공의회)에서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던 것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어머니”리고 부를 때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씨릴이 네스토리우스를 질투하여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고 문제를 제기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네스토리우는 이집트로 추방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페르시아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양성하였는데, 당 태종 9년인 635년 선포하여 경교는 당나라에서 더 이상 종속할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멸되게 되었습니다. 1625년 장안에서 발견된 “대진경교유행 중국비”의 비문을 살펴본다면, 경교가 중국에서 성행한 역사와 교리의 윤곽을 알 수가 있습니다.2) 경교의 한국 선교 가능성668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이후에 신라는 당나라와 여러 면에서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잦은 교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나라에서 널리 유행하였던 경교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추측되고 있습니다. 먼저 이도흠 교수는 ‘이사부’라는 책을 써서 경교의 한국 전파 가능성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고든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 등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자신의 연구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산 장안사에 대진경교중국유행비의 모조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의 개척가였던 김양선 목사는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마리아를 닮았다는 관음상, 전남 해남 대흥사의 동십자가를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의 증거로 제시하였습니다.3) 고려 시대 기독교와 접촉 가능성징기스칸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이라는 이름으로 국호를 정하고 서쪽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페르시아를 위시하여 폴란드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로마교황청은 이슬람의 세력을 척결해 버릴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1245년 교황 인노센트 4세는 몽고와의 화친을 위한 사절단과 선교를 위한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 이후 1253년 두 번째 사절로 몽고에 온 프린시스칸 수도사 루브룩이압록강 변까지 오게 되고 그가 쓴 여행기에서 강 건너에 있는 나라를 까울레라고 적고 있었고, 이 여행기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이름이 ‘코리아’로 불려지고 서구 세계에 한국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294년 원의 황제 성종이 코르비노 신부에게 호의를 보이며, 선교를 허락하여, 1305년 북경에는 성당이 두 곳이 생겼으며, 수세자는 6천명이.3. 초기 천주교회의 배교자들한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천주교회는 아직 확실한 교회의 교리도 모르고, 지도해줄 성직자들도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뿌리 깊은 신앙를 가지기 힘들었습니다. 조정과 사회 일각에서 이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가 시작되었고, 유생들의 규탄의 목소리가 드높아 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손길 속에서 초기의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하나씩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먼저 맨 처음 영세를 받아서 한국 천주교의 여명을 열었던 이승훈이 그의 동생 치훈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서 결국 1791년 척사문인 벽이문을 쓰고 배교를 선언하였다. 이승훈은 후에 자기의 행위를 뉘우치고 주문모 신부에게 다시 성사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1년 2월 신유교난 시에 배교한 상태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다음으로 정약용은 1797년에 자명소를 지어서 자신의 배교를 입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벽은 이승훈이 배교하던 때보다도 4년이나 앞서 기독교를 버리지 않으면 목을 메어 죽겠다는 부친을 보고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고는 번민에 빠졌다가 3일 만에 급사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선각자들이 배교의 길을 간 것을 앞으로 천주교의 박해를 견디어 나아갈 교우들의 고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4. 황사영의 백서-선교 방법론 문제황사영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사위로서 주문모 신부에게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받고 영세를 받은 신자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토굴 속에 숨어있다가, 친구 황심과 함께 천주교의 극심한 핍박을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고하여 이 박해를 면해보고자 폭 62 Cm, 길이 380 Cm의 흰 비단에 장장 1만 3천자의 놀라운 ‘백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심이 청국으로 가기 전 황해도에서 체포되고, 황사영도 체포되었는데, 그 때 공개된 백서의 내용이 경악을 급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백서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조선은 서양제국의 동정을 얻어서 聖敎을 만들어가고 필요한 자본을 얻으려 한다.둘째, 조선은 청나라, 비록 조선은 전멸한들 聖敎의 겉모양에 해로울 것이 없다.이러한 글은 조선의 조정이나 백성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의 글이 되고, 선교 방법론을 가늠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속담인 ‘성서를 읽기 위해서 양초를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는 경구처럼 목적이 선해도 그 방법이 비도덕적이거나 비복음적이면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선교는 복음의 방법으로만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1894년 서울 교구 주교였던 뮤텔 주교가 입수하여서 보관하고 있다가, 1925년 7월 로마에서 조선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 될 때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쳐졌습니다. 지금은 교황청 지하 고문서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5. 토마스 목사 순교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 지방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회보다는 선교의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불행하게도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한국에서의 천주교 박해를 알게 된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기회를 찾고 있던 그는 미국인 프레스톤 소유 상선 제네랄 셔먼호를 1866년 7월 그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게 되고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타게 됩니다. 셔먼호는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동강 상류로 올라와서 병졸들과 성민들과의 충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좌초하여서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고, 헤엄쳐 나오던 토마스 목사는 병졸 박춘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에 토마스 목사는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다가 집으로 가지고 갔고, 후에 안주 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