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 정의와 역사, 그리고 서울시 공공미술 작품 중 하나 선정하여 보고서 쓰기-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앞서 공공 미술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았다. 공공 미술이란 거리, 공원, 광장 따위의 일반에게 공개된 장소에 설치하거나 전시하는 미술을 일컫는 용어이다.이를 토대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공공 미술이라 하면 단순히 지역사회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더불어 지역사회가 소유하는 미술을 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심층적으로 공공 미술의 개념을 살펴본다면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정부에서 시작했던 두 가지 제도, 그중 하나는 ‘미술을 위한 일정 지분투자’이며 다른 하나는 국립예술기금의 ‘공공장소의 미술(Art in Public Place)’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공공 미술의 개념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중 미술을 위한 일정 지분투자 프로그램은 현재까지도 미국의 50개 주 중 약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주와 여러 도시에서 시행 중이다. 이는 신축 공공건물의 건축 예산액을 일정 지분 예치하여 미술품을 제작하는 데에 보태도록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공장소의 미술 프로그램에서는 지역사회 측에서 공공장소에 전시할 미술품을 제작, 의뢰하고 구매하는 데 드는 금전적 지원과 자문을 던져준다.이러한 미술정책과 발맞춰 1960년대 말에 미술의 본질에 대해 많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다수의 미술가가 작업실을 나와 작업실 규모보다 큰 건축적 규모를 요구하는 대지미술과 그 외에 환경 미술 따위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작가들은 복잡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발생하는 도전적인 상황을 겪음으로써 그에 맞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협업하여 공동작업을 실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개인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만 몰두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공공 미술의 역사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자면 그 시초는 1967년 존 윌렛의 입으로부터 언급된 공공 미술은 ‘장소 속의 미술’ 혹은 ‘장소로서의 미술’, 그리고 ‘참여·개입으로서의 미술’을 의미한다. 이는 점진적인 이상향을 제시하였으며 시대적 맥락에 부응하는 단어였다. 제한된 평면 위에서만 펼쳐졌던 일차원적인 기존의 미술 형상에서 사회와 상호적으로 소통하며 자연스럽게 확장된 공공 미술은 기존의 한정된 영역에서 탈피해 더욱 열린 장소로 펼쳐지는 미술의 시초가 되었다. 도시 공간 속에서 어우러지는 미적 연출부터 지역 공동체와의 협업은 물론 나아가 대지 미술까지, 공공 미술은 이처럼 광범위한 개념으로 포괄될 수 있음을 증명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도시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낙후된 지역을 되살리는 명분으로 문화 재생사업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같은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공공 미술의 명확한 개념과 정의를 묻는 목소리가 부상하기도 하였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취하는 것이 공공 미술이 뜻하는 의미 있는 성취라면, 도시개발정책과 의탁한 프로젝트로 인해 지역 거주민을 몰아내는 현상이 생겨나면서 그것이 양날의 논리로서 국가권력에 동조되었음을 명확하게 예시하였다.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공공 미술’과 ‘정부의 주도로 작업이 진행되는 공공 미술’로 이루어진 조형물은 이들의 교집합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성립되어야 했다. 이처럼 문화 저변의 확대를 주장하는 도시정책이 오히려 이윤적인 측면에 기여하는 면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 미술이 남긴 빛과 어둠은 당대의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었다.1990년대 이후에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탄생시켰던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new genre public art)’은 참여하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개념으로 수잔 레이시는 이를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관하여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이라고 정의하였으며 공공 미술이 기존에 처해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도 했다. 매체 수단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 설치와 퍼포먼스, 그리고 개념 미술에서 이용됐던 방법들을 일찍부터 공공 미술에 녹여냄으로써 적극적인 관객들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방식이었던 네모난 좌대 위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설치된 공공 미술은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 여성에 대한 폭력, 검열, 에이즈, 생태학적 피해” 같은 사회적 문제와 직면하며 그 가능성을 폭넓게 확장하였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이 의도한 것은 “관람자들로서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뿐 아니라 가치의 진술”이 되도록 공공 미술의 척도를 전환하였다. 하지만 장소에 제한을 두지 않고 관객과의 상호작용에 큰 비중을 두었던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은 지자체의 홍보사업이나 세계화에 따른 문화 자본 교류로 이내 전락해버렸고 정치적인 목소리의 발화도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은 공동체를 중점으로 두며 미술의 물질적인 특성이 아닌 소통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미술 운동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으며 우수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 결과 수동적인 감상대상으로 국한되기만 하였던 관객은 제작과정에서의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공동 작업자이며 작품의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은 “복잡한 시각적 언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배타적 관객들의 개인적인 감상을 위해 저 먼 곳의 미술 전문가들이 생산한 오브제가 아닌, 미술계 밖”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평범한 일들, 즉 미술 외적인 분야까지 뻗어가 이를 주 쟁점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었다. 이는 미술의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급진적인 사고로서 미술사에 많은 반향을 낳았다.대표적으로 밀 래더맨 유켈레스(Mierle Laderman Ukeles)의 〈청소부와 손잡기(Touch Sanitation)〉와 같은 퍼포먼스는 “작업실에서의 작업에서 벗어나 일종의 공동체 작업 과정”을 이루는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위의 내용과 부합한다. 유켈레스는 약 11개월 동안 뉴욕의 다섯 개의 주를 돌며 8,500명의 노동자와 악수를 하는 것을 작업화하였다. 불특정한 장소에서 특정적 행위를 행했는데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의 실질적인 작업은 ‘악수’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은 상품으로서의 미술품의 부적절한 위상에 저항하고, 미술 작품을 미적 오브제로 만드는 관행에서 벗어남으로써 미술 작품이 미술시장의 부속품으로 소속되는 것을 막는 데에 기여하고자 했다.그러나 이미지의 시각적 특성이 지니는 구조를 지나치게 배제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은 미술 본연의 창작 과정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점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켈레스의 사례에서 보았듯 미술에서 작용하는 시각적 요소의 형식은 공공 미술의 확장된 영역을 반추하는 점에서 역시 핵심요소로 상정된다.이를 토대로 본 서울시의 공공 미술은 바로 이화동에 위치한 ‘벽화마을’이다.이화동은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하나였으나 일제 강점기가 찾아오면서 일본인들의 고급 주택단지로 조성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정권을 잡으며 불량주택 개선을 목적으로 국민주택이 조성되기도 하였으나 주택들이 워낙 노후한 터라 2000년대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 이화동의 거주민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노후로 인해 방치된 이화동의 개선을 위해 도시예술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2006년 9월부터 이화동을 비롯한 9 지역의 주민과 예술인, 대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이화마을 곳곳에는 그림과 조형물이 탄생하여 ‘이화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마을의 건물과 돌담, 전봇대, 계단 등을 비롯한 주변 환경 모두가 예술의 일부가 되었다. 한 지역의 상권을 살리기 위해 탄생한 이화 벽화마을은 이후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현대판 연금술사, 소나무 작가 이길래…이길래 작가, 그는 1961년도에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1989년 경희대 미술대학을, 1993년도에 동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작가는 주로 소나무 형태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어느 날 화물트럭 위에 쌓여 있는 동파이프가 벌집, 생명체로 보여 그의 소나무 조각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충북 괴산에서 고된 노동의 연속으로 작품을 완성해 내왔습니다. 마치 가래떡을 썰듯 동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절단한 뒤 양 측면을 눌러 타원형의 고리를 만듭니다. 이렇게 탄생한 수백 수천 개의 고리를 산소 용접을 통해 반복적 형태를 띠도록 이어 붙여 특정한 형상을 만들어 나갑니다. 완성된 형상을 부분적으로 검게 칠하거나 일부를 깎아내면 이길래 작가만의 소나무가 탄생합니다. 동파이프는 내구성이 강해 열에 강하고 녹이 잘 슬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 그가 천년을 바라보는 고송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됩니다.그리하여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노송의 모습이 그 견고한 실체를 드러냅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나무의 표피와 다를 바 없지만, 손을 대는 순간 눈으로 지레짐작했던 소나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대신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파고듭니다. 눈의 질감과 손의 질감 간에 생겨나는 이 괴리감은 그의 작업이 순수한 상상력의 산물임을 증명합니다.이 질감 덕분에 이 오브제가 공간과 맺는 관계 또한 오묘해집니다. 가늘고 짧은 선들이 모여 소나무와 ‘닮은’ 형상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가 만든 이 오브제와 공간의 경계를 규정할 수 있는 윤곽은 매우 모호합니다. 소나무의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이 독특한 구조는 우리가 지금껏 지녀온 소나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소나무를 인식하게끔 합니다.가만히 손을 얹고 노송의 표면을 훑어보면, 파이프 구멍 사이 사이로 가느다란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데, 과연 ‘우리는 이 공기의 촉감마저도 오브제라 규정할 것인가?’라낄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꾸준히 재료를 응집하고 끊임없이 시간을 집적하는 그는 혹자에게 ‘현대판 연금술사’라 불립니다.최근 그는 충북 괴산에서 경기도 여주로 작업실을 옮겼습니다. 작가의 새 작업실은 건물 외벽부터 실내 공간까지 어느 한 부분도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작업실 앞마당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키고 서 있는 그의 대표작 소나무 시리즈부터 안뜰에 자리한 그의 구작까지, 생명을 담은 이 오브제들이 제각각 공간을 차지하는 모양새가 다채롭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외부 공간이 주는 인상에 반해 막상 작업실 내부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탁 트인 작업장에는 꼭 필요한 연장들과 기계들만이 새로운 상상력을 구현해 주기 위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실제로 그의 작업은 내용 면에서도 지극히 상상적입니다. 그의 소나무 시리즈에서는 ‘삼지송’이라는 작품이 종종 눈에 띄는데, 세 개의 뿌리가 마치 동물의 발인 양 땅을 딛고 몸체를 지탱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세 개의 뿌리는, 동양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하지만 까마귀의 발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그 뿌리의 양감이 남성적인 근육을 닮아 있어 혹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 켄타우로스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켄타우로스는 동물의 하체가 상징하는 감각계의 저열한 본능을 미개하게 생각한 인간의 정신을 상반신에 결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길래의 삼지송은 이 상상적 형상을 뒤틀어, 켄타우로스의 하반신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또는 인간의 상반신 대신 짐승의 목덜미를 형상화하여 또 따른 상상적 유기체를 선보였다는 이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소위 인간의 고귀한 정신계는 사실상 감각적 현실을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이길래는 조각이 오롯이 감각적 현실로부터 파생되어 생동하는 자연을 ‘직관’적으로 끌어낼 것을 주문합니다.인간 문명의 이기적 면모가 드러나면서 자연은 한낱 도구로 남았습니다. 그저 자원으로서 형상을 다시 캐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시간이 만들어 내는 땅의 우연적인 형태 변화뿐만 아니라, 흙이 갖고 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질감, 그리고 작가가 땅속에 집어넣은 재료, 형상과 땅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의 부산물들이 그 인고의 시간을 통해 자연스레 스며들었음을 증명합니다. 혹자는 이를 고고학적 발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땅을 파낼수록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그저 기억이 만들어 낸, 우연성에 의존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체된 역사’입니다. 아무도 그 형상을 단순한 시각적인 차원에서 서사적으로 혹은 예시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비결정적인 덩어리가 눈앞에 드러난 것입니다.최근 들어 작가는 이와 같은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개념적 비틀기 작업, 그리고 최근 지속적으로 제작해 온 소나무 시리즈, 이 두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대표작 못지않게 자신의 초기작 혹은 구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남다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소나무 시리즈의 하단부에 마치 좌대처럼 과거의 고고학적 발굴 덩어리가 결합한 형태가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를 담은 비결정적 덩어리 위에 작가만의 상상력 매개체로서의 소나무를 닮은 형상이 뻗어 나옵니다. 인간의 무의식적 차원과 자연의 본질이 맞닿은 지점에서 어쩌면 이러한 이질적인 두 개념의 공존이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돈하여 개념을 분석하고 정립하기보다는 그저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듯한 형태를 통해 직관적인 감각의 차원을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지속해 온 작업 세계 전반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이한 두 형상 간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한 감각적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작가의 조각은 조각이라기보다는 회화에 가깝습니다. 그의 작업은 조각의 기본적 요소인 공간과 물성, 질량을 채워나가는 내부로 흘려버려 그 너머로 도달시킵니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한 시선에 내어줌과 동시에 그 전체의 모습과 그것을 이루는 단위들을 동시에 공존시킵니다. 작은 단위와 그것이 이룬 전체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이 평등함은 부분이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거나 소멸하는 것을 막습니다. 때문에 이 조각은 부분과 전체가 공평하고 동일합니다. 작가는 작고 작은 단위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자라야만 커다란 나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자연과 생명체의 마땅한 순리가 결코 생략되거나 간과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그의 조각은 기존의 물리적 공간을 최적화하는 조각적 방법론보다는 실제 식물이 자라나고 생장하는 과정과 그 시간적 추이를 유사하게 닮아갑니다. 아마도 작가는 오랜 시간동안 자연에서 살아가면서 세밀하게 관찰한 생명체의 생장과 변화과정을 조각적으로 응용해보고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연대상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생명 법칙을 순응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그의 작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그의 조각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들과 나무처럼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서히 성장하고 번식되어 나갑니다. 작은 동 조각을 용접해 붙여나가는 그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이 그대로 식물의 생장 주기와 유사하고 작은 단위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렇게 작가는 엄청난 숫자의 동 파이프 단면들과 조각들을 연결해 소나무를 만들었고 기이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나무를 선택한 이유를 작가 노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이자 우리 문화의 고고성뿐만 아니라 친근한 매력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생활을 아우르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나무를 좋아하고, 정신적으로는 사유의 대상이자 서민들에게는 놀이터의 역할까지 겸하는 매우 중층적인 상징의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역사성도 깃들어 있고, 자유분방한 형태, 한 그루 나무에서 우러나오는 뻗어 또 다른 형상을 만나며 어쩌면 소나무가 인간과 대등한 생명체인 양 느껴지기도 합니다.작가의 옛 인터뷰 중 “예술가는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라는 신념 어린 한 마디를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행을 좇아 갈대처럼 휘청이는 젊은 작가들의 방황을 염려하는 그의 걱정이 묻어납니다. 혹자의 눈에는 자연, 근원, 원형, 형상 같은 이 모든 추상어가 철 지난 유행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한 예술가로서 묵묵히 자신의 길만을 고집해 온 뒤에야, 오랜 기간 갈고 닦아 온 그 인고의 시간이 지닌 당위성과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작가는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고 우직하게 작업에만 매달립니다. 액자가 있는 벽걸이 작품을 찾는 애호가들도 많지만, 판매를 하지 않는 미술관 전시를 선호합니다. 그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수시로 떠오르지만 한 길을 가다 보면 뭔가 이루어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면서 “예술은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인생의 마라톤과 같다”고 강조했습니다.작업실 한구석 벽면을 빼곡히 채운 작가의 빛바랜 드로잉과 소품들은 그가 우직하게 걸어온 그 길이 전혀 헛되지 않음을, 그리고 그가 발굴해 내는 자신이 고집해 온 그 역사의 길이 그 무엇보다 빛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이길래 작가 노트 중 “생명이나 물체가 분해되면 그 기능이 소멸하듯이, 세포나 파편이 응집되면 유기체적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수많은 동 파이프 단면들이 물성화 과정을 통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소나무를 만들고, 나는 이 땅 위에 그것을 식수해 나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그 일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에 경의를 표한다.” (이길래의 작가 노트 중)는 내용이 있습니다.작가의 이러한 확신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은 세상이 끝나도 그곳에 서 있을 불로장생의 소나무를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입니다.참고문헌 및 출처-나무, 인간을 닮다. - 이길래展: Sculpture http://g-op001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앞서 나는 현대조각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았다. 현대 조각이란 조각이 최초로 작품으로서의 독립성을 인정받았던 로댕 이후의 조각작품을 일컫는다고 한다.이전의 조각작품들과는 달리 로댕의 작품은 신전과 광장에서 벗어나 독립된 공간 속에 등장하였다. 18세기 이전 오랜 시간 동안 건축물의 장식으로만 여겨졌던 조각은 로댕의 등장으로 생명력과 감정이 더해지고, 예술 분야에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현대조각의 특징인 보이지 않는 불안감을 추상으로 해소한다는 ‘추상의 전개’와 작품 속 작가의 ‘자의식 반영’, 그리고 표현의 중심대상이 사물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아이디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항목에 부합한다.이 중에서도 특히 로댕의 작품에서는 현대 시민사회의 미의식이 도드라졌으며 로댕 이후 등장한 두 작가, 앙투안 부르델과 아리스티드 마욜은 로댕의 작품 감성을 각각 신고전주의, 인체 조각으로 확산시켜 현대조각의 역사를 이어나갔다.그들의 작은 변화를 시초로 조각계의 카테고리가 현대조각에 접어들게 되면서 작품의 표현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예로부터 조각 작품이란 대부분 신이나 권력자, 군주들을 예배 혹은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함이며 또한 그에 걸맞은 거대한 크기가 요구되었다. 특히 19세기에는 국가의 원수나 정치인, 군인, 위인 등을 칭송하는 기념비 조각이 광장을 비롯한 도처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숭배를 강압하는 사회 분위기가 저조해졌으며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공적인 성격이 강했던 조각작품의 존재 의미에 변화를 주었다.또한 전통적인 조각기법에는 크게 돌이나 나무 등을 쪼개고, 깎아내는 감산법과 점토 등을 이용해 살을 붙여가는 가산법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방식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대미술로 넘어오게 되면서 그간 유례없던 기법, 재료 등이 등장해 조각작품의 형태를 다양화했다. 예를 들어 찰흙을 사용해 소조의 형식을 띠면서도, 살을 밖에서부터 조금씩 떼는 '살 떼임 기법'을 활용했던 자코메티, 기성품에 서명을 남겨 ‘레디메이트’를 탄생시킨 뒤샹, 텔레비전을 활용해 작품 시각적 공연과 같은 작품을 구상해내 ‘미디어 아트’를 선보인 백남준 등 지금껏 수많은 조각 작가들이 저마다의 획기적이고 기발한 표현 방식으로 새로운 조각 역사를 써왔던 계기가 되었다.나는 현대 조각이라 불리는 지금의 조각 형태에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으며,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 작품 속 여성은 쇼핑 카트를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가 아닌, 초콜릿, 쿠키, 진공 포장된 고기와 같은 공산품들로 가득 채웠다. 듬직한 체구에 편안한 신발을 신고 슈퍼마켓으로 쇼핑을 나온 미국의 평범한 주부의 모습처럼 보인다. 팽팽한 치마와 머리에 두른 스카프와 헤어롤, 입에 물고 있는 담배까지, 여인의 호탕한 기질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이 작품(Supermarket lady)은 미국의 극심한 불경기였던 6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다. 이때 최초의 슈퍼마켓이 등장했고, 이에 사람들은 한 건물 내에서 많은 물건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를 계기로 기성 식품을 대량 구매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바람에 가정집에서 직접 식자재를 이용해 요리하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고, 외식업 역시 기성 식품 가공 산업에 밀려나 버렸다.핸슨의 눈에 이러한 현상들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본인들의 과소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그는 당시 미국인들의 지나친 소비와 잘못된 생활 방식을 비난하고자 그의 작품 속 표정들을 대부분 우울하고 지친 모습으로 나타냈다. 극사실적인 모습과는 대비되는 마치 영혼이 부재한 듯한 핸슨의 작품들은, 당대 사회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끝없이 소비생활을 일삼았던 현대인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하이퍼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던 듀안 핸슨은 살아있는 인물로부터 주형을 직접 떠내는 방식인 ‘라이프 캐스팅’ 기법으로 인체를 작업한다. 우선 폴리에스테르수지로 대상을 본뜬 후에 그 위에 정교한 채색을 거치면, 인체의 세밀한 굴곡은 물론 솜털, 땀구멍까지 그대로 작품 위에 드러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대상을 더 관찰하여, 작품의 자세, 표정 등을 수정하고,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는 등 기가 막히게 실제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를 재현해낸다. 이로써 그는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평균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며, 그의 작품을 통해 미국인들을 대변하고자 한다.듀안 핸슨은 1965년부터 1970년경까지는 주로 정치적인 사건 또는 범죄 현장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당시 미국인들이 일상 속에서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잡아냈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소외 문제를 다루고자 미국 대도시 곳곳에서 보이는 노숙자들, 은퇴 후 경제력을 상실해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노인들, 저임금으로 고된 일을 겪게 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작품화하곤 했다. 그는 이들을 통해서 미국 사회에 살아있는 경제력에 따른 위계질서와 당국의 비교적 낮은 계급에 위치한 경제적 약자들을 경시하는 부당한 사회 측면을 고발했다. 이후에 핸슨은 필요에 의한 합리적 소비가 아닌, 부적절한 소비를 통해 더욱 우월한 물질적 가치만 추구하는 인물들을 작품화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정형화된 미의 기준에 관심을 두거나 혹은 이상적인 미를 위해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미국인들을 작품으로 표현했으므로, 미국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를 지적했다. 이처럼 당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미국 사회의 오류들은 핸슨의 작품표현 방식으로 인해 더욱 호소력 있게 보는 이들에게 전달되었다.그의 작품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회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대중들에게 교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직접적으로 사회문제를 끄집어내 작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히 평범한 모습을 이용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직접 깨닫게끔 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나의 작품 생활에 있어서 핸슨의 그런 면모를 닮아가면 어떻겠나 라는 생각이 들어 핸슨의 작품표현방식에 대해 더 배워보고자 했다. 핸슨은 리얼리즘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일상 속의 오브제를 예술작품의 일부분으로 승화시키며, 그의 작품을 대중들의 실제 삶의 공간 속에 두는 독창적인 방식을 통해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여줬다. 이처럼 그가 미술계에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