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뿌리깊은 이야기내용정리 및 퀴즈1주차.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 과거의 사실을 대한 역사가가 사관을 가지고 해석한 것.- 역사란 과거의 사실,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 역사란 과거의 기록, 남겨진 과거의 기록이나 흔적- 역사란 해석,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록을 역사가가 연구해서 얻은 결과# 역사학- 과거의 사실을 다룸 : 인간의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시간의 연속성과 인과관계, 객관성과 주관성을 공유)/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 (=인문학)- 시간개념을 내포 : 역사학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성과 인과관계를 중시역사학은 객관성과 주관성을 공유하는 학문* 인과관계 : [ 과거(원인) - 현재(결과) ], [ 현재(원인) - 미래(결과) ]- 주의점 : 모든 역사는 현재사(현재의 관점),과거는 과거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다시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 사관 : 역사를 보는 관점 / 역사 해석의 방법론을 의미함 / 식민사관, 민족사관, 유물사관, 실증사학① 식민사관 ? 타율성론 & 정체성론: 일제에 의한 한반도의 식민통치를 학문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를 강하게 반영시켜 역사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 평가한 한국사 연구 틀.: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해석한 역사 연구 방법론.- 타율성론 : 한국이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해 타율적으로 움직여온 역사라고 강조하는 논리(지리적 결정론, 반도사적 성격론, 기자조선, 위만조선, 임나(가야)일본부설,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 정체성론 : 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정체성의 사회였다는 주장“ 한국이 논농사를 하는 사회였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없었다. ”(중세사회 부재 결여론, 식민지근대화론)② 민족사관 - 타율성론을 반박: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해석: 한국사의 발전을 민족의 정신적 측면에서 설명하려 함“ 한국사의 근원이 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의 업적 계승 / 정치, 경제 등 가장 완비된 제도 갖추게 됨국내성 -> 427 평양성으로 천도 (남쪽으로 이동)백제 서울 한성 함락 -> 백제 개로왕 전사# 고구려의 발전과 변화: 유목민족적인 성격 강했던 고구려가 농경민족화 -> 한반도 중심의 농경문화 국가로 발전: 부여와 같이 영토는 고구려보다 넓었지만 북쪽에 머물렀던 국가들이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망한 것과 크게 대비됨# 고구려 수도 변천 = [ 졸본 -> 국내성 -> 전기평양성 -> 후기평양성(장안성) ] 점점 남쪽으로: 고구려 도성의 특징 :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구조 (평상시 평시성 -> 전란시 산성으로 피신)- 졸본 도읍기: 오녀산성(고구려 초기의 궁성일 것이다)과 하고성자토성- 국내 도읍기 : [ 주거성 = 평지성 국내성 / 유시사 = 산성 산성자산성 ]- 전기 평양성 (장수왕) 도읍기 : [ 주거성 = 평지성 안학궁성 / 배후 = 산성 대성산성 ] ‘이중성’* 왕성인 안학궁성은 매우 방대한 모습, 궁성의 체제 / 강대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줌- 후기 평양성(장안성) 도읍기 :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평산성’* 4성 (북성,내성,중성,외성) 구성 / 삼국시대 성곽중 최대의 규모* 국내성 도읍시기 중국 수나라와 잦은 전쟁으로 평양으로 천도 / 고구려의 남진정책과도 밀접 관계* 6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수’ 가 통일 (589)동양 전체의 국제정세에 긴장이 조성되던 시기--------------------------------------------------------------------------------------퀴즈2) 다음은 고구려 도성에 대한 설명이다.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1) 고구려는 전기 평양성 도읍기에 주거성으로서 평지성인 안학궁성과 배후의 산성으로 대성산성이 있었다.(2) 고구려 도성의 특징은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3) 고구려는 국내 도읍기에 주거성으로 평지성인 국내성과 유사시에 사용하는 산성으로서 산성자산립국가4~7세기에 치열하게 대립함 (삼국인들 사이에 극심한 적대감 = 생존경쟁과 자기 보존의 방편)-> 장기간의 분쟁을 통해 통일을 염원하 : 신라가 삼국통일 (일통삼한) -> 한민족 형성* 일통삼한: 고구려, 백제인이 같은 삼한이라는 뜻으로 ‘동족의식’을 내세움* 일원적으로 지배하기위해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신라인으로 회유, 동화 위한 ‘민족융합정책임’* 단일적인 한국민족 형성하는 계기가 됨- 신라의 삼국통일 문제점 : 고구려 영토의 상실 / (중국 당나라) 외세와의 결탁- 삼국통일 역사적 의의: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실리적인 외교적 승리세 나라 국민을 하나의 국가체제 안에 통합 지배함으로써 하나의 민족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됨단일적인 민족국가의 성립최초의 민족통일의 실현영토상으로 고구려의 중심부는 거의 차지백제인의 대부분과 고구려인의 상당 부분이 산라로 흡수되어 한민족의 틀이 잡혀지게 됨한반도는 비로서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게되는 한민족의 터전이 됨민족문화의 전통이 계승되고 문화적 토착화를 성취 (문화 통일) / 삼국문화는 하나로 융합* 영토의 통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의 통합과 융화 발전6주차. 통일신라와 발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삼국통일과 신라의 시대 구분- 삼국사기 : 상대가 끝나고 중대가 시작 * 구분 기준 = 골품제상대 (1대 박혁거세 ~ 28대 진덕여왕) : 성골왕* 삼국통일중대 (29대 태종무열왕 ~ 36대 혜공왕) : 진골왕 = 성골이 끊어지고, 진골에서 왕하대 (37대 선덕왕 ~ 56대 경순왕) : 귀족들의 왕위쟁탈전- 삼국유사 : 중고가 끝나고 하고가 시작상고 (1대 박혁거세 ~ 22대 지증왕)중고 (23대 법흥왕 ~ 28대 진덕여왕)* 삼국통일하고 (29대 태종무열왕 ~ 56대 경순왕#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왕권의 전제화 (왕권 강해짐)-고 있던 왕건 세력에게 밀려나게 됨--------------------------------------------------------------------------------------< 8-2. 견훤 > : 궁예보다 먼저 나라를 세움# 견훤의 출생과 성장- 경상도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아버지는 아자개 (성 없음)- 아버지 아자개는 농민이었다가 후에 스스로 일어나 장군을 자처함- 견훤의 성이 이씨인데 견으로 바꾸었다고 되어있음. 스스로 성을 바꿈‘견’이 아닌 ‘진’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훤’으로 불렸을 수도 있음- 어려서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군대에 들어가 잠을 잘 때조차 창을 놓지 않는 노력으로 공을 세움* 방수의 공 : 신라를 지키는데 공을 세움 * 창 -> 사졸, 졸병- 비장(장수)이 되어 무진주(광주)로 오게 된다.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를 배경으로 무진주를 군사적 힘으로 장악하여 후백제 건국 = 군진 세력* 광주는 백제 계승 의식 강함 -> “후백제” 이름으로 민심 얻기# 견훤과 호족의 결합: 견훤도 지방의 호족들과 혼인을 통하여 자신의 지배권과 영역을 확대- 호족세력과 혼인을 통하여 결합했다는 기록들ㄴ 『삼국유사』에 구인교혼설화 : 지렁이와 결혼한 설화 / 자의남(붉은 옷의 남자)이 밤에 와서 아침에 사라지자 실을 옷에 꿰었더니 지렁이를 발견하다 / 지렁이 = 토룡 = 땅의 용 = 실패한 왕 / 여자가 임신해 낳은 아이 = 견훤ㄴ 그의 사위인 박영규와 지훤이 모두 호족 출신ㄴ 견훤이 호족세력과 혼인정책을 추구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 짐작 가능- 견훤은 10여 명의 호족의 딸과 결혼함 ( 자신의 지배권과 영역 확대함)# 견훤과 후백제의 정치적 변화 (네 개의 시기): 후백제의 정치적 변동은 대외관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1st. 무진주 시기 : 견훤이 무진주(광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시기 (892~899) / 군진 세력 규합이 시기에 견훤은 ‘스스로 왕 노릇하였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 청년 장군 경대승에게 제거되었다4th. 천민 출신의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다--------------------------------------------------------------------------------------< 10-2. 최씨 무신정권 >2) 무신정권의 확립기 (1196 ~ 1258)- 최씨 무신정권 : 최충헌과 그의 자손들이 정권을 유지했던 시기-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안정시킴.: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라도 제거함 / 친동생인 최충수나 조카 박진재 등 제거: 최충헌은 자신의 모든 적대세력을 차례로 제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 왕위는 최충헌의 수중에 있었던 것 : 무신들에 의해 왕 즉위, 폐위: 최충헌은 일대 동안 명종과 희종 두 왕을 폐하였다 / 신종,희종,강종,고종의 네왕을 옹립하였다- 최충헌은 사실상 정권을 혼자서 좌지우지하면서도 왕권은 존속시켰다.하지만 최충헌은 왕실의 외척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 왕실의 힘 빌리지 X오직 자신의 실력(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음 (사실상 왕보다 높은 권력)* 군사력 = 사병 : 도방 & 삼별초(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최충헌의 집권 이후 최씨 무신정권은 최충헌의 아들 최이(최우), 손자 최항, 증손자 최의에 걸치는 4대60년간 이어졌다. 이는 무신정권의 확립을 의미* 국가기관 흥녕부 ? 개인기관 도방, 정방, 서방 강화의 실천은 주전파인 무신정권 타도와 밀접하게 연결- 최의가 1258년 (고종 45년) 문신 유경과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살해됨 = 최씨 무신정권 끝남3) 무신정권의 붕괴기 (1258 ~ 1270)- 최씨 무신정권이 끝난 이후 무신정권의 마지막 시기- 최이가 죽고 정권이 국왕에게 돌아감 / 몽골과 강화가 결정됨- 무신들은 강화를 반겨하지 않음 / 무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강화에 대한 반대를 노골화임연은 친몽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폐하고 정권 잡음- 무신정권의 유지와 항몽정책의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을 복위- 임연이 죽은 뒤 그의 아치기구
한국근대사, 감춰진 이야기내용정리 및 퀴즈감춰진 근대사 1주차. “근대사” - 일본 식민사관 ? 대원군, 고종, 민비# 3(삼)시대 구분법 : 고대 - 중세 - 근대- 고대 : 철저한 신분제 사회 => 신라 골품제- 중세 :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 +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신분 상승할 기회가 존재/ 신분제 + 능력 중시 => 고려&조선 과거제- 근대 : 신분제가 없어지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 (근대의 시작 = 서양) (정치적 : 프랑스혁명) (경제적 :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정치적)- 3대 이념 :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3색기 블루 화이트 레드)-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인간은 신분제가 철폐되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대를 열었다# 산업혁명 (경제적) (in 영국)-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인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체제로 나가게 됨# 근대의 보편적 특징 (4가지)1) 정치적 근대 [프랑스혁명] : 입헌제, 대의제, 권력분립제를 조직 원리로 하는 민주 정체 성립=> 민주주의 정치체제2) 경제적 근대 [산업혁명] : 기업 생산과 시장 유통=> 자본주의 경제체제3) 사회적 근대 [신분제 철폐] : 분업발달, 생득적 속성에서 개인이 해방됨4) 문화적 근대 [인간중심주의] : 세속적, 인간적 특징과 과학 기술 산업과 관련된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 경향# (19C 중엽 조선) 근대 한국의 시대적 과제- 체제 내적 = 대내적 : 신분사회 -> “ 반봉건 근대화 ”- 채제 외적 = 대외적 : 서구 자본주의 열강 침입 -> “ 반외세 자주화 ”: 거대한 사회적 압력이 체제 내에 분절되어 들어가서 발생시킨 것* 체제 내적 과제 = 반봉건 근대화: 종래의 신분 사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구조와 유형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실현을 요구하는 근본적인 사회 체제 개혁의* 체제 외적 과제 = 반외세 자주화: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도전 체제 개혁의--------------------- 세력- 임오군변 이후 반청 세력은 개화파의 분화를 초래, 가시화# 4개 세력- (왕권 강화 + 척사) : 흥선대원군 세력- (신권 강화 + 척사) : 반원군 세력 = 안동김씨 & 노론 세도정치- (왕권 강화 + 개화) : 동도개화파 = 고종 중심 왕권개화파- (신권 강화 + 개화) : 신권 개화파* 신권세력 (안동김씨, 노론 세력) vs 왕권강화 (흥선대원군) 지향 세력* 왕조 질서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 (변법개화파) 세력 vs 전통적 왕권의 위상 유지 세력* 외세의 왕건 견제 시도 vs 대항하려는 세력# 친청세력 (반청세력 : 임오군변으로 개화 세력 분화)- 시무 개화파 (온건 개화파) : 친중 * 시무&변법 개화파의 공통점 : (개화 주체 = 신하) 신권 강조- 변법 개화파 (급진 개화파) : 친일- 동도 개화파 : 왕 중심 개화 추진① “ 시무개화파 ” = 온건개화파 : 시대 흐름에 따라 점진적 개화 주장- 영선사로 중국 다녀온 김윤식 어윤중 등- 친청세력 / 친청개화파 / 사대당 : 임오군변 당시 청나라 세력을 끌어들임- 청나라의 양무운동(서양 문물, 기술 받아들임) 본받아 점진적 개혁 추진- 중국에 치우친 것을 빗대어 “ 사대당 ” 이라고 부름* 김윤식 : 중국의 속국이며, 중국 간섭 받는 것이 이로워 독립과 자주는 불필요하다* 어윤중 : 중국으로부터 독립은 불필요, 자주는 필요② “ 변법개화파 ” = 급진개화파 : 반청 세력 / 근본적 제도 개혁-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세력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 갑신정변- 친일세력 / 친일개화파 / 독립당 / 일본당 : 반청 자주 독립 / 급진적 개혁-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개화)의 모델로일본 협력을 통한 근본적 제도의 개혁 “변법”조선을 서구형 근대국가로 급진적 개혁③ “ 동도개화파 ” : 국왕의 측근 세력들 / 고종을 도와 국왕 중심의 개화를 추진- 동도서기론적 입장------------------------------------------------------------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 고종과 민비의 강력한 친러정책 : 러시아가 전제군주제 국가이기 떄문에 러시아만이 조선을 보호해줄 수 있다1) 궁내부의 체제를 대폭 확충 = 왕권강화 -> 친일적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2) 고종은 훈련병대를 해산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3) 고종은 왕실경비를 확보하고 탁지부로 이관된 궁중소유재산을 환수하는 작업에 몰두4) 아울러 탁지부 실무진을 고종 세력으로 교체함으로써 왕실에서 국가경제를 주관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냄=> 일본의 영향력 약화되기 시작=> 일본 : 약화된 세력 만회하려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 / “인아거일책 주도자는 명성황후다”--------------------------------------------------------------------------------------< 8-3.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과 3차 갑오개혁 >: 2차 갑오개혁 이후 약회되었던 왕권이 고종의 노력에 의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 일본 : 인아거일책 중단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개혁을 계속해서 추진하려 명성황후시해사건 일으킴-> 3차 갑오개혁의 추진으로 일본에게 유리한 정국을 만들고자 함# 명성황후시해사건 (을미사변): 반일적 정국을 이끌고 있던 인물로 명성황후 민비를 지목하고 그녀를 제거1) 원인 :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고종과 민비가 인아거일책으로 반일적 내각을 수립하자 세력을 만회하고자 비상수단을 강구하면서 발생2) 경과- 주모자 : (이노우에 가오루 = 일본 정계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 = 일본 정부가 개입되었음- 실행 : (미우라 고로 = 일본 육군 중장 출신, 외교에 문외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전 주한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한국에 부임하게 됨 =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함 / 한국에 와서 한 일은 불경 읽기, 1895.08.20 대원군과 훈련대를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모아 경복궁 난입, 는 서구 열강의 중국 분할에 길을 터준 동시에 한반도에서의 러일 대립을 촉발시키고, 동아시아의 세력 관계를 크게 변화시킴-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 경쟁, 경합하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침략과 팽창의 발길을 옮겼다--------------------------------------------------------------------------------------< 10-2. 러일전쟁과 한반도 ># 러일전쟁 :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해양 세력인 일본이 벌인 전쟁# 러일전쟁의 배경- 의화단 운동으로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이 출병한 사이에 1900년 7월 러시아는 만주파병을 시작10월에는 만주 전 지역을 점령-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의 중립화를 제안 = 한국에서 일본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 일본은 즉각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서 철수할 때까지 한국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겠다는 입장* 두 파로 나뉜 일본 정부 : 주전론 (전쟁)=영일동맹론 vs 주화론 (화친, 협상)=러일협상론* 주화론 = 러일협상론 : 일본이 러시아와 군사력으로는 맞설 수 없으므로 외교 협상을 통해 한국과 만주에 대한 양측의 이권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 만한교환론 : 만주는 러시아에 넘겨주고 한반도는 일본이 가지자* 주전론 = 영일동맹론 :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극동에서 영국의 이익을 직접 위협하므로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다- 러일 협상 = 러일 교섭 (1903년 8월 일본의 제안) :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수와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 승인을 주장 / 러시아는 만주 철병을 거부하는 동시에 일본이 한국을 군략상의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해준다는 것과 북위 39도 이북의 한반도를 러일간의 중립 지역으로 정할 것을 제의. 러시아의 군부는 한국 포기를 반대하며 일본의 소위 만한교환 요구를 완전히 거부- 일본은 달리 근대식 군사훈련과 무기체계에 익숙한 정규군 출신들이 참여함으로써 의병전쟁은 한 단계 발전도니 3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 /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거의 그대로 의병으로 전환됨- 1907년 8월 1일 서울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의 자결로 비롯된 군인들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감- 제3단계 의병전쟁의 최고조기였던 1908년 전후에는 전국 곳곳에 의병이 활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 호남 지역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하자 그동안 각기 독자적 활동을 벌이던 여러 의병 부대 사이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방안이 모색 : (지역적, 분산적 -> 연합적) / 전력 극대화의 필요성- 서울 진공을 목표로 1907년 12월 십삼도 창의군(의병연합군) 결성 * 13개의 도 - 의병 연합- 십삼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 : 사람을 각국 영사관에 보내어 의병 부대를 국제 공법상의전쟁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 = 국가에 준하는 단체로 인정해달라-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 전국에 흩어짐 (이인영 아버지 돌아가심 ? 성리학 효)# 고조기 의병의 특징- 의병의 주도층과 참여 신분층이 다양해졌다: 전 신분층이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 거의 모든 신분층이 의병에 참여 = 국민전쟁의 성격-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참가 인원수와 일본국과의 전투 횟수에 있어서 그 규모가 급격히 증가- (1906년에서 1911년 6년 사이에 참가 의병의 연인원수는 약 14만 명 / 해산 당시의 대한제국 정부군은 8천8백 명) = 전국적, 다수의 의병- 1,2단계 의병전쟁 : 한 사람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하는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단위부대 중심의 전쟁/ 3단계 의병전쟁 : 같은 지방의 의병부대들이 횡적인 연결을 가지고 합동작전을 펼침- 1909년 전국 의병의 연합전선에 의한 서울진공작전 : 외국 영사관에 대해 국제공법 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사
Report과 목 명:내연기관학 과:기계공학과학 번:이 름:담당교수:1. 기술배경1) 기존 내연기관(가솔린 엔진, 디젤 엔진)의 Emission 문제 심화2) 배기가스 규제 강화 : 온실가스와 NOx, SOx등의 배출 제한3) 화석연료의 유한성에 따른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 개발의 필요성-> 본 기술은 암모니아 혼합물 연료를 가솔린 엔진에 적용함으로써가실린 엔진의 유해생성물인 CO, NOx, HC 저감이 목적이다.:SI-IDI 엔진에 암모니아 연료를 적용한 혼소 기술2. 기술동향-암모니아 동력 기술의 개발 동향개발 시기개발자특이사항19C 후반루돌프 디젤증기기관의 증기 대신 가열한 암모니아 증기를 이용한열효율 상승 효과 연구 (안전, 비용 문제로 좌절됨)1933년노르웨이암모니아를 연료로 쓰는 트럭 개발1943년세계2차대전벨기에암모니아-석탄 가스 엔진을 적용한 버스 개발2000년대오하이오 주립대암모니아-디젤, 암모니아-DME 연료의 혼소시스템이적용된 압축식 점화 엔진 연구2007년미시간 대학암모니아-가솔린 혼소엔진을 적용한 차량 개발(디트로이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행한 사례)2013년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암모니아와 가솔린을 흡기 매니폴드에 액상으로 분사하는암모니아-가솔린 혼소 자동차 ‘암비(AmVeh)’ 개발(연료의 70%를 액상 암모니아로 대체)3. 핵심이론(1) 엔진/연료 공급 시스템- 기본 엔진: LPG-gasoline Bi-fuel engine (LPG/가솔린 Bi-Fuel 엔진)- 암모니아의 플라스틱과 고무, 구리에 반응을 하여 부식시키는 특성- LPG에 비해 발열량이 낮은 암모니아 특성 (인젝터의 분사량 증가 필요)(2) 연소 특성: 가솔린 전부하(full-load)를 기준으로 최적의 암모니아 분사시기와 분사량을 적용한암모니아-가솔린 혼소 특성을 가솔린 연소 시와 비교① 암모니아 혼소 비율 증가에 따라 점화시기는 진각되어야 함.- 암모니아의 연소속도는 가솔린의 1/6 정도 느린 연소 특성→가솔린 단독 연소보다 최대연소압력 발생지점이 늦게 나타남. 연소 또한 오래 지속됨.- 점화시기 진각을 통해 연소시작점을 가솔린 단독 연소보다 빠르게 함.② 토크- (암모니아-가솔린) 혼소비율 0.6~0.7 구간까지의 토크는 가솔린 연소 시와 비슷- 혼소비율 0.7 이상에서 급격한 토크 감소→암모니아의 연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주어진 시간 내에 연소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③ 연소압력- 혼소 비율 증가→연소압력의 피크점은 상대적으로 점차 감소(느린 연소특성으로 인한 연소실 내부 온도의 하락으로 인한 결과로 추론)- 조기점화→최대연소압력이 나타나는 시기 진각(3) 배기 특성: 암모니아는 탄소원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무탄소원료→암모니아 혼소율이 증가할수록 이산화탄소 발생량 감소→가솔린 사용량 감소에 따라 탄화수소 배출가스의 감소① 배기 배출량에 따른 (혼소비율 0.7 기준)- 탄화수소(CxHy) : 약 절반가량 감소- 이산화탄소 (CO2) : 감소- 일산화탄소 (CO) : 감소- 질소산화물 (NOx) : 가솔린 연소 시와 유사한 배출량② 엔진 부하 특성에 따른- 엔진 부하가 작은 경우→암모니아 분사량 증과와 무관하게 일정한 암모니아 배출- 엔진 부하가 증가하는 경우→암모니아의 연소율이 떨어져 암모니아 슬립 증가→암모니아의 분사량 증가 = 배기되는 암모니아도 증가4. 결론-암모니아의 연료 특성(1) 장점-무탄소 에너지원: 연소 생성물로 물, 질소산화물만을 배출: 암모니아 혼소율이 증가할수록 CO2, 탄화수소 배출가스 감소-수송과 저장 용이: 이미 갖춰진 암모니아 연료 생산, 저장 이송 인프라 (지속적인 생산과 보급 가능): 가솔린보다 낮은 폭팔성, 액화 가능(2) 단점, 연구과제-고무류, 플라스틱, 구리와 반응하여 부식시킴: 연료라인을 테플론과 스테인레스 재질로 교체할 필요가 있음-가솔린 대비 느린 화염전파속도-가솔린 대비 낮은 발열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