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보고서]행동심리학: 비언어적 표현에 대한 이해- 도서‘FBI 행동의심리학’을 기반으로Ⅰ. 들어가며평소 소비자 마케팅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본인은 마케팅과 연관되어있는 ‘행동심리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행동심리학’의 기초적인 지식과 본질을 깨닫기 위해 감상하였던 도서 ‘FBI 행동의 심리학’은 본인에게 기대 이상의 풍부한 지식을 안겨주었다.‘비언어적 표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본인은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언어적 표현’에 대해 유의하며 사람들과 상호작용한 경험이 없었다. 사실 ‘비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도 못했던 본인으로서는 본 도서에서 제시한 ‘비언어적 표현’의 역이용은 참으로 신선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본인은 본인의 흥미를 확장시켜 행동심리학에 대해 알아보고, 효과적인 소비자 마케팅을 다루며 행동심리학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확인해보고자 본 보고서를 작성하는 바이다.Ⅱ. 본론이재오 특임장관의 ‘90도 인사법’이 눈길을 끌고 있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은 최근 자신을 찾은 이 장관이 외견상 겸양의 의미가 분명해 보이는 이 인사법을 선보이자 “너무 많이 숙이면 뭔가 숨겨져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으니 앞으로 인사할 때는 45도만 숙이시라”고 뼈 있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이는 바로 서론에서도 언급하였던 ‘비언어적 표현’의 대표적인 예시로, 본론에서는 ‘비언어적 표현’에 대해 가볍게 다룬 후, 이를 연구하는 행동심리학과 본인이 감상하였던 도서인 ‘FBI 행동심리학’의 내용을 연관지어 다룰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는 효과적인 소비자 마케팅 방안을 제시하며 본론을 마무리해보고자 한다.① 비언어적 표현흔히‘보디랭귀지’로 불리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표정, 제스처, 신체 접촉, 움직임, 자세, 신체 장식(옷, 액세서리, 머리모양 등), 심지어 목소리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보 전달 방법이다. 이러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대인관계 커뮤니케이션의 60~65%를 차지한다. 물론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비언어만으로도 100%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꾸미지 않은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도의 표출이다. 이런 이유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몸의 언어’로 불린다. 행동하는 사람의 진정한 마음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흔히 무의식중에 일어나므로 수십 년에 걸쳐 훈련된 의식적인 언어 표현보다 더 정직할 수밖에 없다.상대방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관찰하면 그 사람의 감정과 의도, 행동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대니얼 골먼같은 연구자들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읽고 해석해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큰 성공을 누린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본인이 읽었던 도서의 목적은 세상을 관찰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주어진 상황에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대인관계의 기술을 향상시키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② 행동심리학행동심리학이란 행동주의에 입각한 심리학. 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객관적일 수 없다고 보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자극에 대한 반응, 곧 행동을 주된 대상으로 다룬다. 미국의 심리학자 왓슨이 제창하였다.③‘FBI행동심리학’과 행동심리학조 내버로와 마빈 칼린스가 함께 쓴 ‘FBI 행동의 심리학’은 바로 이런 무의식적인 비언어적 표현을 해석할 수 있는 요령을 길러주는 책이다. 내버로는 미국연방수사국(FBI)에서 25년간 대적첩보 특별수사관으로 활동하면서 혐의자들의 이런 행동을 면밀히 관찰해 언어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는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 거짓말탐지기’로 불렸다.미국 뇌과학자 폴 매클린은 1952년 인간의 뇌는 파충류 뇌(뇌간), 포유류 뇌(변연계 뇌), 인간의 뇌(신피질)로 구성돼 있다고 발표했다. 특히 생각하고 느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몸의 언어는 변연계 반응으로 나타난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도 변연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변연계는 상황이나 환경에 대해 생각 없이 반사적이고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변연계는 이처럼 진정한 생각과 감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비언어 행동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정직한 뇌’로 불린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흔히 목을 만지거나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여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려도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는 뜻이다. 면접 때 다리를 쓰다듬는 행동도 스트레스가 큼을 보여준다.물론 몇 가지 행동만으로 거짓말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만 이런 행동이 나온다면 행동을 낳은 질문과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다른 누군가가 말하고 있을 때 어깨의 먼지를 털거나 머리를 매만지는 등 자신을 다듬는 것은 상대방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거부의 신호를 담은 무례한 행동이다.다리와 발도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대화 상대가 양손을 두 무릎 위에 얹어 감싸쥐고 있다면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명확한 신호다. 몸통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거나 의자 가장자리로 옮겨 앉아 있다면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상급자라면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리를 엑스자 모양으로 교차하면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이때 갑자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교차하고 있던 다리를 풀게 된다. 다리를 교차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위협에 즉각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연계가 잠재적인 위험을 인식하고 두 발을 가지런히 하도록 명령하기 때문이다.결국 비언어적 표현에 담긴 의미를 알면 역이용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으로 신뢰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이 진심을 드러내고 눈을 피하는 것이 거짓을 감추고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질 나쁜 사기꾼과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일수록 눈을 마주치는 것이 진실성있게 보인다는 것을 역이용해 눈을 의식적으로 맞추는 습성이 있다고 하니 주의할 일이다.④ 소비자 마케팅과 행동심리학▶ 소비자심리학이란?소비자의 심리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심리학 이론들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구매의사 결정과정, 태도형성 및 변화과정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학습한다. 구체적으로 소비자의 행동과 심리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소비자 욕구와 자기개념, 가치관과 성격 등 내적 심리요인과 준거집단, 유행, 문화 등 외적 환경요인에 대해서 알아보는 학문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5가지 마케팅 전략기술과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소비자의 행동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으며, 소비자의 행동이 변하면서 마케팅 전략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소비자의 기대, 관점 및 행동은 소비 트렌드로 나타나며, 이는 마케터가 반드시 익히고 대응해야 할 요소이기에 이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요즘은 브랜드와 고객 간 접점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상호 교류를 제어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존재한다. 결국, 고객이 어떤 방식을 통해 브랜드와 교류하는지에 관계없이 어디서든 일관되게 매력적인 고객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본인은 마케팅에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심리학 원칙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상호성상호성은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았을 때 이런 호의를 되돌려주고 싶은 심리를 뜻한다. 기업들은 상호성을 이용해 고객들에게 무료로 선물을 증정하는 것으로 브랜드 충성도와 호감도를 높일 수 있다.
[탐구 보고서]한일, 그들의 동상이몽- 조선의 아팠던 그 시절을 기반으로Ⅰ. 들어가며Ⅱ. 본론① 경제- 토지조사령② 정치- 신분제 해체- 사유제 확립③ 사회·문화- 교육 제도Ⅲ. 결론①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일제강점기② 맺음말Ⅰ.들어가며한국사 시간,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자본창출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회사령’ 폐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회사령이 폐지된 후 한국인의 기업이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인들이 국내 자본의 9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문화통치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만이었다는 점을 궁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호기심이 생겨 자료 조사를 해보니 실질적인 조선인의 자본 소유량은 1920년 9,146원(천원 단위)에서 25,320원으로 약 3배 정도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일본인들의 자본 소유량이 극단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한국 자본의 90%를 차지했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으나, 조선인들의 자본 증가에도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본인에게 한국사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조선인들의 자본 소유량을 3배 가량 증가시킨 ‘회사령 폐지’를 ‘기만’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생물이 완전하지 않듯이 어떠한 상황에 대해 서술할 때 스스로 유리한 방식에 치우쳐 서술하는 경우가 잦게 발생한다. 그리고 본인은 ‘한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제강점기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객관’은 부조화를 이루는 관계임이 분명하지만, 본인은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자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일제강점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본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일제강점기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입장을 서술할 때,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의견 차이는 ‘근대화’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실시된 수많은 제도 및 중공업의 발전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예’, ‘아니오’로 극명하게 나진 지배 계급과 경작권의 소유자인 농민은 다같이 그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특히 토지가 공동체의 소유인 경우에는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자기의 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현상은 우리 상호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일본인에게는 곤란한 일이었으니 토지를 사려해도 소유자가 명확치 않아 누구를 상대해야 할지를 몰랐고, 더욱이 소유를 증명할 문서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면적의 단위와 경계선도 명백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애매하고 혼란한 재래의 토지 소유의 관계를 정리·개편함은 일본이 한국에서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필수조건이었다.식민지 수탈론자들은 신고제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신고기간이 짧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한다는 부담감에 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신고하지 못해 조선총독부에게 강제로 공출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토지조사사업을 ‘강제 창출’이라고 부르며, 일본인들은 토지에 사유권 외에도 농민층의 각종 권리가 토지에 부착되어 있어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장애요소가 되기에 이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각종 권리를 모두 배제해 토지매매를 더 자유롭게 하고, 지세수입을 증대시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세수입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역토와 둔토 등 각종 관전의 궁장토를 조사한 것 또한 국유지를 창출해 조선총독부에서 점유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지주가 되어 지세와 소작료를 수취해 재정수입을 보충하려는 목적이기에 이는 일본의 강제적인 ‘수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위에서 언급하였듯 복잡한 절차의 신고제로 인한 농민들의 사유지 강제 창출에 대한 반감이 가장 두드러진다.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서울대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최근 학계 연구에 의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어느 정도의 사유가 충족되면 농민들의 사유지로 인정하는데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전국 사유지 484만 정보의 땅 중 471.3만 정보 즉, 97.4%가 사유지로 인정되었다는 사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은 여전히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도 봉건적 신분제가 이어져 호적에 백정을 뜻하는 '도한(屠漢)'이라 적혔다. 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결혼이나 취업 등에서 심한 차별에 시달렸다고 한다.또한 일본 메이지대학에 다니던 장지필이란 인물도 조선총독부 취직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가 호적에 '도한'이 찍힌 것을 보고 취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또 경남 진주의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 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부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정의 아들이란 사실이 들통나서 학교에서 쫒겨나기 일쑤였다. 분노에 찬 이들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저울(衡, 형)처럼 공평(平, 평)한 사회를 만들자"라며 '조선 형평사'를 결성했다.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제도는 고대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신분의 실질적인 폐지를 결코 이룩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 온 박씨 양반가는 어느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저 을사 이후에 양반과 이속들이 겁탕당하고 궁민과 평민이 때를 만났는지라. 동리의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칭하고 옛날 호칭은 간데없고 다툴 때는 호이호군(呼爾呼君)하니(하략)”(《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93쪽). 이는 곧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 마을의 상놈들이 양반을 업신여기는 사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한때 조선의 양반은 ‘국가의 간성’이라고 하여 임금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나, 일본인에게 있어 조선의 신분 차별제도는 본인들의 동화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과도 같았기에 양반의 권위를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신작로를 닦는 식의 마을 주민 노력 동원에서 양반가의 자제들이라고 부역에서 면제되는 일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반복은 평민의 양반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사민평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을사조약에 대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으나, 이 사유재산은 조선과 조선인을 위한 사유재산이 아닌 일본을 위한 사유재산이었기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한편, 사유제 확립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다양한 입장을 제시한다. 우선적으로 경제 성장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경제성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그들은 식민지기와 같은 체제의 전환기에 확립된 사유재산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이다.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해 있지 않다면 저축이 활성화되지 않으며, 이는 투자에도 적용된다. 투자의 과실이 본인의 것이 된다는 확신과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오늘날 아프리카나 남미의 여러 나라가 좀처럼 경제성장의 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도 사유재산제도의 미비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두루 여행한 저명한 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Isabrlla B. Bishop) 여사는 당시의 지배계급 양반을 가리켜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곧 당시 민중들이 양반관료의 자의적 수탈의 대상으로 무방비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2년 조선에 일본의 민법이 이식되었다. 재산권에 관한 근대 민법의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다. 소유권은 절대적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둘째, ‘계약자유의 원칙’이다. 이는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 있어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재산권은 국가가 지정한 법에 따라 등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이에 맞춰 1912년에 ‘조선부동산등기령’이 공포된다. 그렇게 조선을 자본주의국으로 이끈 사유재산제도는 일제강점기하에 이룩하였다는 것이다.③ 사회·문화▶ 교육 제도한·중·일 3국의 전근대 교육은 상류층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거나 사회풍속을 바로잡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했다. 이들은 옛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역력은 자생적인 사립학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미션계 학교들을 견제했으며, 결국 조선의 교육제도 전체를 일본식으로 탈바꿈시킬 것을 기도하게 됐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교육적인 면에 있어 중시되어야할 한국어가 1943년에는 교육과정에서 제외되었다. 공식적으로 식민지 교육의 기본적 이념은 일본의 ‘교육에 관한 천황칙어’에 터하고 있었던 바, 이는 1911년의 교육법령에 명기됐듯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식민지민을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비공식적으로 총독부 교육정책의 숨겨진 목적은, ‘내선일체’ 또는 ‘황국신민화’ 등의 구호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의 일본화였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조선의 어린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학교교육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일본인화’라는 이념적 교화의 대상이 되어, 경직되고 군국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등을 강요받았다. 또한 전시에는 강제노역이나 징집 등을 통해 전쟁 지원을 강요받았다. 한편 다수의 민족 사학들은 총독부의 끊임없는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의 교육 기회가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펴나가는 데 필요한 만큼으로 한정되었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교육에 일관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식민지 지배정책에 동화되어 가는 인구가 증가해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식민지 수탈론자들은 이를 과연 근대적 교육의 실시라고 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그러나 ‘학구열’에 집중하면 입장은 또 달라진다. 우선 일제강점기에 실시한 조선교육령으로 인해 사립학교는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된다. 1910년에 미션 학교의 수는 800개에 이르렀으며 자생적 사립학교는 전국적으로 3,000을 넘어섰고, 일제가 의도했던 아니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식민지 교육체제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지식이 조선인들에게 처음으로 대폭적으로 전달됐다. 동시에 강점기의 교육팽창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홀대받았던 한글이 적어도 강점기 다.
[탐구보고서]한국고전과중국고전의 심층 비교분석-‘금오신화’와 ‘전등신화’를 기반으로Ⅰ. 들어가며3학년 자율 시간에 ‘Made in China 상표’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평소 사람들이 ‘Made in China’ 상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편향된 반응에 호기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반응은 중국에 대한 편견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것인데, 이는 중국의 ‘모방 문화’가 주된 원인이었다. 이러한 반감을 줄이고자 본인은 성공적인 중국기업에 대한 소개와 덧붙여 각 기업의 독특한 마케팅 방식에 소개하였다. 발표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아이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반감은 쉽게 줄지 않으며, 인식을 변화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감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영향이다. 문학 분야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추천 도서의 목록을 보면 일본과 서양의 도서는 많이 존재하지만, 중국과 대만의 도서는 상당히적은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 현재 한국 내에서 저평가받고 있는 중국고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조사함과 더불어 한국고전문학과 중국고전문학의 비교분석을 통한 상호관계분석을 위해 본 보고서를 작성하고자 한다.Ⅱ. 본론‘금오신화’, ‘기재기이’, ‘구운몽’이 유명한 소설들의 공통점은 바로 한문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한문이 고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한 언어이듯 한국고전문학과 중국고전문학의 비교분석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은 실질적인 분석에 앞서 한문과 한문학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① 한문의 정의 및 의의한문은 고대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문어(글말)이자,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했던 공통 서면언어다. 학술적인 명칭은 고전 중국어(Classical Chinese)이며, 국가마다 부르는 표현이 약간씩 달라서,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고문(古文) 혹은 문언문(文言文), 한국과 일본에서는 한문(漢文), 베트남에서는 고문(古文, c? v?n) 또는 문언(文言, v?n ngon)이라 한다.한문이 동아시아 문화에 미친 영향은 크기 때문에, 사어이지만 한중일 삼국 모두 여전히 한문을 교육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한문이 '국어' 과목의 일부로 들어와 있다. 이는 현재 한문을 배우는 것이 고전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쓰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한다.② 한문학의 정의 및 의의한문학은 근대 이전 우리 조상들이 한자(漢字)를 사용한 한문(漢文)으로 기록한 일체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현재 한문은 고전을 해독하기 위해 하나의 과목으로 전향되었다.한문학은 중세 동아시아의 공용 문어였던 한문으로 창작된 문학이다. 중세에 우리 민족이 세계와 교류함에 있어 한문학은 필수적인 수단이었던 바, 한국한문학은 그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문학과 부단히 교섭하면서 발전해 왔다. 한문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그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학과의 관련 양상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③ 조선에 미친 중국의 영향조선 후기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고 영향 관계도 한층 긴밀해졌다. 양국 관계가 이전 시기에 비해 더욱 밀접해지게 된 데에는 임진왜란의 발발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은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조류에 의해 촉발되어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에 심대한 충격을 준 전쟁이다. 7년간에 걸친 동아시아의 대전란 속에서 조선과 명국은 연합군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긴밀하게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에 조선과 명의 인적/문화적 교류는 이전 시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상대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깊어졌다.임진왜란 이후 중국은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대변모를 겪었다 조선은 왕조의 교체까지는 아니지만, 체제의 모순이 노정되면서 극심한 사회 변동이 진행되었다. 근대로 이행해 가는 이 시기에 양국의 역사적 처지는 유사한 점이 많았던 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되던 19~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공히 체제 내의 모순을 해결하고 대외적인 침략에 대응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봉착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처지가 비슷했던 양국은 한층 상대의 동향에 유의하며 시대에 대응하는 문학의 자양분을 섭취하고자 했다.또한, 갑오개혁 이후 한국고전문학은 주로 인접한 중국문학과의 교류로 그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심지어는 그 사상, 감정 및 수사어구, 조사법, 그리고 「모티브」와 「플로트」에 있어서까지 온통 그 영향하에 지배되는 경우가 흔하게 엿보인다.고려왕조의 경기체가는 한시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으며, 『용비어천가』는 중국의 고시체를 본떠서 지은 악장이다. 또한, 한국 고대소설의 효시인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중국명조시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를 모방한 것이다. 본 보고서가 ‘한문’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문학의 비교분석에 목적의식을 두고 있기에 본인은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전등신화』를 중심적으로 다루어보려고 한다.④‘금오신화’와 ‘전등신화’▶ 금오신화란?《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시인, 작가, 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금오산(金鰲山)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이다.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로 인정되고 있다. 완본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등 5편이 수록되어있다.▶ 전등신화란?중국 명대에 저술된 괴이소설집이다. 전 40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4권만이 남아 있다. 본래 《전등록》(剪燈錄)이라고도 하였다. 전21편을 수록하고 있으며, 홍무 11년(1378년)경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금오신화’와 ‘전등신화’ 비교분석전등신화는 중국 명대 소설이지만, 조선조 초에 이미 유입되어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줄곧 읽힌 책이다. 김시습은 전등신화를 읽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내놓는다. 즉, 한국 최초의 소설작품집인 금오신화의 탄생과 고선소설의 형성 및 발전에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두 작품의 유사성은 크게 용궁이야기, 지옥이야기 그리고 인귀교환과 사랑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15~17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에서는 공통적으로 용궁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는 전기소설의 전통을 잇는 하나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금오신화는 전기소설집으로 용궁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금오신화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본인이 수업 중에 배운 ‘구운몽’에도 동정 용왕을 찾아가는 성진의 이야기를 작품 첫머리에 배치하고 있으며, 성진이 환생한 양소유가 동정호용왕 둘째 딸과 혼인하게 되는 이야기는 전등신화의 용궁이야기인 수궁경회록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에는 지옥이야기가 등장한다. 내용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보자면, 경주에 사는 박생은 꿈을 통해 남염부에 가게 된다. 박생이 묘사하고 있는 지옥은 넓은 바다에 홀로 솟아있는 섬이고, 나무와 풀이 살지 못하고 쇠와 구리로 둘러 쌓여 있는 공간이다. 쇠로 둘러진 성벽 그리고 성안에 있는 집들도 하나같이 쇠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지옥 염부의 묘사는 전등신화 영호생명몽록의 영호선이 지옥에 끌려갔을 때, 철옹성이 우뚝 솟아 있고 구리 기둥에 남녀가 묶여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탐구보고서]한국의 넛 크래커 현상에 대한탐구 보고서-관계적 위치를 기반으로Ⅰ. 넛 크래커란?‘넛 크래커(Nut-cracker)‘는 호두 껍질을 양면에서 눌러 까는 기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경제학 용어로 사용될 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중간에 위치한 국가가 선진국에 비해서는 기술과 품질의 경쟁에서, 개발도상국에 비해서는 가격 및 비용 경쟁에서 밀려서 위기를 겪게 되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넛 크래커’는 한국의 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미국의 컨설팅 회사 중 하나인 부즈앨런&해밀턴 사가 한국에 대한 컨설팅 보고서에서 ‘넛 크래커’라는 표현을 한국에 빗대어 사용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보고서에는 “한국은 저렴한 비용의 중국과 높은 기술과 효율성을 지닌 일본의 협공으로 마치 넛 크래커 속에 끼인 호두처럼 되고 있다.”고 적혀있었는데, 사실상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빈정거림의 의미가 깔려있었다고 해석된다. 즉,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난처한 상황을 나타내는 경제용어로 ‘넛 크래커’가 일반화 되었다. ‘넛 크래커’와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또 경제 용어로는 ‘샌드위치 효과’가 있다.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기술경쟁력을 강화한 데다 환율 급등으로 가격경쟁력까지 갖추게 되었고, 특히 정보기술(IT) 분야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역(逆) 넛 크래커’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역(逆) 넛 크래커’라는 용어는 넛 크래커와 정반대의 의미로, 한국이 가격경쟁력 외에도 IT 분야에서 중국과 일본을 역전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한편, 시간이 흐름이 따라 시장은 변화하면서 과거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고 ‘신(新) 넛 크래커’라는 용어 또한 생겨났다. ‘신(新) 넛 크래커’는 중국의 높은 기술력, 일본의 강력한 엔저 정책을 바탕으로 한 수출경쟁력 사이에서 국내 산업의 위기감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중국 기업은 과거 저가 상품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 뛰어들었으나 정부 지원을 통해 고부가 첨단 사업의 연구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기술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일본은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반면 정치 불안, 구조조정 등으로 주춤했으나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화가치 절하로 수출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생겼다. 넛 크래커에서는 가격, 원천기술, 품질 등이 경쟁력 변수였으나 신 넛 크래커에서는 환율, 연구개발 투자, 비관세장벽 등이 중요하다.Ⅱ. 넛 크래커의 예시① 경제적 ‘넛크래커’현재 중국이 세계 시장에 내놓는 수출품들은 기본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다. 여기에 최근 기술력까지 좋아지면서 압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2015년 2월 펴낸 ‘세계 수출시장 1위 품목으로 본 우리 수출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수출시장 전체 품목 5,052개 중 점유율 1위 품목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1,538개(30.4%)를 보유한 중국이었다. 이는 733개를 보유한 2위 독일의 수치의 2배가 넘는 수치였다. 현재 2018년에도 중국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며 스타트업의 중심지인 미국의 실리콘벨리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병기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중국의 엄청난 성장세의 원인으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투자 활동과 잠재력을 눈여겨본 외국인들의 투자를 내세웠다. 또한, 중국이 선진 기술을 이전받거나 모방하면서 기술력을 높였기 때문이라고도 분석했다.반면 한국은 점유율 1위 품목 수가 65개에 불과해 12위라는 아쉬운 기록을 차지했다. 그 중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한 14개 품목은 중국과 점유율 격차가 5%포인트 이하였고 폴리에스테르 섬유, 철·비합금강 평판압연제품 등 7개 품목은 차이가 2%포인트 이내였다. 한국은 2012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 1위였던 19개 품목을 중국(3개), 독일(2개), 일본(2개)에게 추월당했다. 새로 1위에 진입한 품목은 21개다. 즉 1위 품목의 3분의 1 가량이 매년 엎치락뒤치락할 정도로 경쟁이 심하다는 뜻이다.이 경쟁구도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일본의 경쟁 중심에 위치하고 있던 한국의 ‘넛크래커’ 현상에서 일본이라는 대상이 중국으로 바뀌어 되풀이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② 정치적 ‘넛크래커’급진적으로 성장중인 중국과 관련한 ‘넛크래커’ 현상은 정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 배치가 현실화되자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가 마치 패착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한국에 대한 노골적인 압력을 다층적으로, 정교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주한 중국대사 추궈훙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전면적 협력동반관계’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기시감을 준 외교적 겁박을 한국에게 보내왔다.화이질서(華夷秩序)의 구조와 규범에 익숙한 중국의 눈에는 한국의 '사드 배치'가 전통적 중화의 질서에 도전하는 외교·군사적 행위로 비춰졌을 것이며, 미국의 힘을 차용하였다고는 해도 한국은 중국 전통적 질서에 대한 명백한 배반을 한 것이다.이 상황은 쇠락하던 청조와 패권의 꿈을 지니고서 거칠 것 없이 달리던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풍전등화에 놓인 구한말 백성들이 품었을 깊은 번민을 이제는 패권국 미국과 굴기의 중국 사이에서 또다시 느끼게 해준다.지정학적으로도 한반도가 중국에게는 목을 겨누는 '단검'에 비유되었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사드 배치로 촉발된 '광분의 중국' 현상은 그래서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종속변수로 놓인 한국의 전략적 번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깊은 시름에 빠져 있기 보다는 이참에 25년이 지난 한중 관계의 장을 새롭게 여는 신호로, 변곡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Ⅱ. 넛 크래커의 해결 방안중국이 세계 시장에 내놓는 수출품들은 기본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다. 여기에 최근 기술력까지 좋아지면서 압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한국의 주력 제품들과 격차를 상당히 좁히고 시장을 위협하고 있어 ‘넛 크래커(nut cracker)’ 현상을 극복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전문가들은 2012년 유럽의 재정위기 이후 세계 무역에서 중간재 교역이 줄어들고, 소비재 비중이 늘어나는 트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망한 소비재들을 집중적으로 발굴하라는 뜻이다. 문병기 수석연구원은 기업이 단기 트렌드를 쫓기보다는 장기적 안목을 갖고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인공지능로봇이나 3D프린터처럼 자신 있게 내세울만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제품의 고부가가치화 및 차별화 전략을 강조했다. 한국이 중국 성장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자국의 ICT 산업 내부의 경쟁력 약화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제거하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핀란드의 중소·벤처기업 기술지원 및 사업화 정책을 벤치마킹해 혁신기술 개발 지원을 강화하는 등 ICT 산업환경 변화에 걸맞은 체질 개선도 요구된다. 한국인터넷진흥원 안인회 팀장은 사물인터넷(IoT), 웨어러블 등 ICT 신산업 분야에 대한 선제적 연구개발을 통해 한국이 기술우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적·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기술력이 높은 중국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조인트벤처 등 실질적인 성과창출이 가능하도록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심화보고서]신해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한 탐구보고서- 도서 과 을 기반으로Ⅰ. 들어가며중국문화 시간에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루쉰에 대한 발표를 진행하며, 루쉰의 작품인 ‘아Q정전’과 ‘광인일기’를 접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작품에는 작가 루쉰이 당시 중국의 부패하고, 불평등한 정치와 시민들의 우매함에 대한 뚜렷한 관점과 견해, 가치관이 나타나있어 나에게 당시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탐구할만한 흥미를 제공하였다. 또한,중국 문화와 관련지어 감상한 도서인 ‘당신들의 중국’에서는 중국과 대만 즉, 양안관계를 다루고, 이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로 중국이 대만에게 무자비한 이기주의를 펼치고 있다고 서술하였기에 양안관계의 시초인 신해혁명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였고, 연구를 위해 본 보고서를 작성하였다.Ⅱ. 본론① 신해혁명의 정의신해혁명이란 1911년인 신해년에 일어나 좁게 보면 1912년까지, 넓게 보면 1915년까지 일어난 혁명으로, 이로 인하여 276년 지속된 청나라, 나아가 진시황 이래 2200년 이상 존속된 천자제도가 종말을 고하고,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②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1368년부터 1635년까지 농민에 의해 건국되고 농민에 의해 멸망한 국가이자 한족의 마지막 통일 왕조인 명나라는 청나라 성립 이전의 국가이다. 신해혁명의 계기는 이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성립된 청나라 때 발생한다. 청나라는 1635년 10월 13일, 만주에서 발원한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꿔 세운 유라시아 육상 제국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정복 왕조로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1년 후인 1912년에 멸망하게 된다.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삼은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들을 실망시켰다. 황족이 아닌 한족은 헌정 내각 내 13명 중 4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만주족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이었으며 이는 개혁파와 한족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이 당시 열강의 의견을 따르고,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성선회가 부패한 정치를 주도하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선회는 부패한 정치만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시켜 그걸 담보로 삼아 열강에게 차관을 얻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철도 국유화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배우나 거지들의 푼돈까지도 모인 민족 자본을 기반한 철도 부설과 정면충돌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따라 철도 국유화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보로 운동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도 잇달았다. 특히, 성선회 제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당년 9월 쓰촨성에서 10만명이 넘는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이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 정부에서는 군대를 보내 민중 봉기가 극심한 쓰촨성을 제압하는데 힘썼고, 이로서 후베이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의 군대가 비게 되어 우창 내 혁명파가 1911년 10월 10일 봉기를 일으켜, 하루만에 우창을 점령하고 쑨원의 이름을 걸어 중화민국의 성립 선언을 시도한다. 혁명파의 신정부 수립은 백성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혁명의 이념은 10월 22일 후난성과 섬서성을 시작으로 불과 1개월여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청나라 정부는 이를 제어하기 위해 막강한 북양군벌을 거느린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위안스카이의 활약 덕에 청나라 내 혁명 봉기는 대부분 제어되었다. 이에 따라 11월 1일에 경친왕의 사임으로 위안스카이는 총리대신의 직위를 수여받았으나, 위안스카이는 황제 자리를 갈망하였다.권력을 원하는 위안스카이와 삼민주의의 슬로건으로 채택된 쑨원이 대표하는 중화민국임시정부는 결국 서로 적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쑨원은 예상치 못했던 급속한 정국 급변과 위안스카이의 막대한 군사력에 중화민국 1대 임시 대총통으로서 막후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의 대총통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함과 동시에 중국에 중화민국의 정치체제를 적용시키는 것을 제안했고, 위안스카이는 이에 합의하며 협상이 재개된다.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주목적인 협상의 제안 즉, 중화민국의 정치체제 적용 및 유지를 어기고,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중국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결국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의의를 달성하지 못했다.또한 신해혁명의 영향은 지속되어 1949년 두 세력간의 경쟁으로 인해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피난을 가게된 후, 대만의 독립과 함께 대만과 중국의 심리적 대립이 아직도 전개되고 있다. 이의 극단적인 예로는 키리바시와의 외교관계를 들 수 있는데, 키리바시섬은 UN협회에 등록되어 투표권을 지니고 있는 국가로, 대만이 그들의 투표권을 위해 거액의 돈을 제공하며 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국에서는 키리바시에게 단교를 요청하며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위협했다. 키리바시는 자생력의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적게 받아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본 사건으로 인해 중국이 대만을 적대하는 태도만은 뚜렷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