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공동체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중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울 때, 특히 일본강점기 시대를 배울 때면 항상 민족주의 사학관에 근간을 두고 배웠다. 가랑비에 젖듯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민족주의적 사학관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족주의는 자기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단결력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동시에 ‘사회·문화’라는 과목에서는 민족주의가 국수주의, 자문화중심주의로 이어지면 타인종과 타민족을 비합리적인 이유로 배척하는 태도이므로 올바르지 않다고 가르친다. 민족주의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을 모두 배웠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에 그칠 뿐, 이에 대한 깊은 성찰, 올바른 문화를 대하는 태도 함양은 부재했다. 따라서 필자는 민족주의, 민족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제목이 곧 주제이자 핵심 주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이라는 것은 상상된 개념이라는 주장이 아주 흥미로웠다.서장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민족주의를 통해 국민들의 엄청난 결속을 유지하고 발전을 이뤄내거나 침략국에 대항하여 국가를 보호하였다. 즉, 민족과 민족주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과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는 빈약하고 ‘민족’이라는 용어는 정의되기 힘들다. 민족주의는 문화 속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는데 이후 정치와 경제, 사회 등 사회 전반에 자리잡게 되었다. 저자는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는지 의문을 가지며 책을 시작한다.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민족’의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민족이란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우선, ‘제한되어 상상된다는 것’은 각 민족들 간에는 서로 구별되는 경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한 개인은 인류 전체와 동일시하면서 그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기 보다는 민족에 포함시켜 자아정체성을 형성한다.다음으로, ‘주권을 가진 것’은 자유의 상징인 주권이 보장되는 국가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음을 의미한다.마지막으로, ‘상상된다’는 것은 민족 구성원들이 완전히 민족 구성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문화와 언어, 역사, 이데올로기 등이 같기 때문에 ‘친교의 이미지’가 생성되어 민족애를 느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이, 신분, 정치적 힘 등의 사회적 요인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같은 민족 구성원이라면 형제애를 느낀다.다음으로 2장의 ‘문화적 기원’에서는 민족이 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는데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국가가 결속이 되어 운영되기 위해서는 삶의 우연과 숙명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르네상스 전인 중세시대에는 신 중심, 왕조국가가 그 존재 자체로 이러한 것들을 적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삶의 우연과 숙명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민족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족이 등장하고 정착된 것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이뤄진 것으로 한 순간에 등장하지 않았다. 아울러 민족의 등장을 ‘종교 공동체’. ‘왕조의 영토’, ‘시간의 이해’ 순으로 상세하게 분석하여 제시를 한다. 종교의 공동체에서는 언어를 신성한 묵어로 보았다. 즉, 언어란 종교적으로 신과 통하는 수단이고 따라서 상위계층에 위치한 고귀한 존재들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유럽세계의 탐험이 이뤄지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과정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언어는 신성한 묵어에서 격하되었다. 왕조의 영토에서 신성군주제의 합법성이 쇠퇴했음을 지적한다. 근대로 들어서기 전에 대부분의 국가통치는 왕조정치였다. 즉,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신성군주제로 국가의 통치가 이뤄졌다. 이들은 절대적인 신의 대리자로 특별한 존재였으며 이들은 경전에 따른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지시나 명령이 곧, 신의 말이었다. 따라서 왕권은 절대적이었고 피지배자는 왕권을 위해서라면 희생되어야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근대로 들어서면서 국가의 성립이 모든 사람들의 평등에 기초하다 보니 신성군주제의 합리성은 격하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이해에서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관의 변화라고 보았다.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에 앞서기 때문에 인간의 시작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 우주 세계의 시작이 동일하다고 보았다. 인간중심적인 시각이었고 따라서 인간중심적으로 시간을 이해하였다. 하지만 근대로 들어오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적인 사유가 가능해지자 자연과 우주의 시간은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시간이 일정하게 흘러감을 알게 되고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관을 바탕으로 18세기 서양에서는 소설과 신문을 통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민족성을 심어주고 단결시켰다. 대중매체가 발전함에 따라 민족 간에 결속은 강화되었다.4장 ‘크리올 선구자들’에서는 아메리카의 크리올 공동체가 유럽 국가들보다 빨리 민족성이 강화된 이유를 알아본다. 저자는 그 이유를 동일 언어 사용이 아니라 16세기부터 유지한 독자적인 행정단위라고 하였다. 독자적 행정단위는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차별에 대항하면서 생긴 동료의식과 인쇄문화이다.5장 ‘구언어, 신모형’에서는 유럽에서 ‘민족 활자어(national print-language)’로 민족성이 발달했음을 이야기한다. 지방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 학자들은 책을 편찬함으로써 민족성을 부각하였고 이들의 민족적 사상관이 그대로 독서계층과 그들에게 전해듣는 일반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더 많이 문자가 보급되자 민중들의 선동을 불러일으켰고 민중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격상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공동체를 상상하였다.6장 ‘관 주도 민주주의 제국주의’에서 19세기의 민족주의를 설명한다. 19세기 후반의 문헌학의 혁명과 사전편찬 혁명으로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언어가 보급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으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민족에 속하고 자율적 위치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민족의 개념이 자리잡았다고 해서 왕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정체성으로 삼아 그들 스스로에 대한 시대에 알맞는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왕조의 귀환은 관 주도 민주주의로 이어졌다. 즉, 관 주도 민주주의는 왕조와 민족의 합작물이라고 볼 수 있다. 관 주도 민주주의는 제국의 중심 민족이 아니라면 높은 계층으로 나아갈 수 없게끔 하여 중세시대처럼 차별을 고착화시켰다.7장 ‘마지막 물결’에서 서양과 유럽이 아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에 대하여 말한다. 열강국의 제국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식민통치에 반대하면서도 통치국가의 민족이 되고 싶은 니즈를 이용한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다. 통치국가는 식민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통치받는 국가 혈통의 지식인, 관리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들을 양성하는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반발심으로 기대효과를 낳지 못하자 식민지의 수도에 최종 교육관을 설치하여 새로운 순례를 만들었다.8장 ‘애국심과 인종주의’에서 사람들은 민족됨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본다. 즉,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민족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언어는 세대를 거듭하여 민족을 묶어주는 기능을 하므로 결속성이 더 자연스럽게 단단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본다.
책 제목 : 20 vs 80의 사회(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저자 : 리처드 리브스출판 : 민음사발행 : 2019.08.23.서론이전에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으면서 가족은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마라톤 경주에서 함께 달리는 팀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에서는 복지를 가족 단위가 아닌 개별단위로 개편함을 해결책으로 내세웠지만 자유시장에서는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아무리 정책과 제도를 통해 해결을 하려고 자본주의체제가 유지되는 한 가족주의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가족주의 문제를 비롯해 모든 사회문제의 원인은 경제이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시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문제인식을 올바르게 해야한다. 문제의 원인만 찾으면 해결방법을 세우기는 비교적 쉽다. 많은 사회 문제들은 경제의 어느 부분에서 비롯되기 쉬웠을까? 필자는 계층 간에 불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실태와 원인을 파악하고 글쓴이가 제시하는 해결방안을 들어보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다.본론저자는 미국의 사회 불평등의 현사태를 중점적으로 서술했다. 일반적으로 가구당 벌어들이는 소득을 기준으로 계층을 분류할 때, 상위 1%와 나머지 99%로 나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상위 1%는 상위 20%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생의 황금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머무르는 사람의 거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상위 20%와 나머지 80%로 계층을 나눠봐야 한다. 상위 1%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상위 1%에 속하지 않으므로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동떨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상위 20%라고 하면 5명 중에 한 명이므로 ‘우리’가 포함이 될 수 있다. 내가 될 수도 있고 친척이 여기 포함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임감을 느끼고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상위 20%한다. 물론 그것은 80%의 자녀에게는 유리천장이다. 유리바닥은 도덕적인 기준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올바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인 ‘기회사재기’이다. 먼저 중상류층은 대게 본인과 같은 계층인 중상류층 배우자를 만난다. 고소득층이면서 고학력인 중상류층은 한 가정에 고소득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에 가구 당 소득이 훨씬 많아진다. 또한 확률적으로 아이에게 뛰어난 두뇌를 물려준다. 또한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관리를 하거나 부모가 될 준비를 충분히 하고 난 뒤에 아이를 가진다. 비교적 시간과 자본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육아에 많은 힘을 쏟을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비싼 사립학교를 보내거나 우수한 공립학교를 보낸다. 공립학교라고 하더라도 훌륭한 교사들이 있으면 중상류층이 모여들어 인근 집값이 비싸진다. 학교에는 자연스레 중상류층의 자녀의 비율이 높아지고 중상류층의 학부모들은 학교에 더 좋은 학습을 위해 많은 모금을 조성한다. 즉, 이로써 교육의 품질은 더 좋아지는 것이다. 좋은 고등학교에서 품질 좋은 교육을 받은 학생은 좋은 대학을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명문대를 졸업한 학생일수록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는 많고 확률은 높아진다. 그들은 평생 시장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충분히 길렀기 때문이다. 미국은 출신이 아닌 능력으로 인정을 받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 과연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 정말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교육은 평등을 실현시키는 공정한 도구로 보는데 오늘날에 정말 이 교육이 평등을 실현시키는가? 교육이 평등함을 실현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모든 계층에게 동일한 질의 교육이 실시되었을 때이다. 하지만 상위 20%가 교육을 점령하는 순간 교육은 그들의 계층을 대물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는 현재 진행중이다. 돌아와서, 이렇게 중상류층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안된다. 하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 이상의 것을 해주어서는 안된다.책에서는 경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기회를 얻는 것을 ‘기회 사재기’라고 한다. 기회 사재기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분배이다. 기회는 제로섬 게임처럼 누군가에게 더해지면 누군가는 기회를 의도치 않게 빼앗기게 된다. 분명 계층 대물림에 기여를 하고 있지만 피해자, 가해자, 피해 사실이 명확하지 않고 소수로 발생하고 그로 인한 영향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 않아 굳이 고쳐야 하냐는 의견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잘못된 관행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지 용도 규제는 본래 부유층의 집값, 주거지를 배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특히 좋은 학교가 있어서 집값이 비싼 동네는 80%의 계층이 유입하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은 벽을 세운다. 따라서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경제 불평등을 강화한다. 토지 용도 규제 뿐만아니라 역진세의 성격을 보이는 조세제도도 중상류층에게 너그럽게 적용되어 그들의 계층을 안정화시킨다. 토지 용도 규제는 지역권을 강화하느냐와 계층의 이동성이 중요하느냐의 가치 논쟁으로 이어진다. 지역권 강화는 민주적 문화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불공정한 사재기 현상을 발생시키므로 주 정부가 개입을 하여 조치를 취해야 한다. 두 번째로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이다. 바로 인맥에 의해 이루어지는 입학이다. 선발 과정에서 실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동문의 자녀이기 때문에, 후원자의 자녀이기 때문에 특별 입학을 허용하는 것이다. 또한 장학금 지원 절차가 복잡한 것과 ‘Z리스트’가 입학을 보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분배이다. 미국은 절반은 일자리를 가족이나 친구 등 지인을 통해 얻기 때문에 학업은 물론이고 타고나는 배경 자체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연줄로 얻게 된 인턴 기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 미국에서는 기회사재기가 남아있고 이것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다. 미국은 자유로운 경쟁을 추구하지만 기회사재기가 있다. 과연 경쟁적인가?따라서 저자는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첫 번째는 경쟁준비과정을 더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계획에 없는 임신을 줄이고 육아의 격차를 좁히고 열학한 환경일수록 더 좋은 교사가 일하도록 만들고 대학 학자금 지원을 실질적으로 공정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회사재기를 줄이는 것이다. 이는 배타적 토지 용도 규제를 없애고 대학 입학 자격을 확대하고 인턴 제도를 공정한 제도로 개혁하는 것을 포함한다. 저자는 정책의 방향만 제시를 해줬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마지막으로 중상류층은 사회 불평등 문제에 본인이 어느 정도 가담했음 인정하고 책임의식을 느껴서 사고방식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전문직에 종사하기 때문에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활용해 ‘여론 권력’을 형성하여 계층 간에 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노력해야한다고 본다.결론책을 읽으면서 인식이 전환되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사회계층을 중상류층 20퍼센트와 이에 속하지 않는 80퍼센트로 나누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1%의 사람들이 사회의자본을 장악하고 있다고 접해왔기 때문에 필자는 스스로를 사회계층의 불평등에 일조를 하지 않은, 오히려 피해자라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빈민층, 최상류층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이 대게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 해결을 정부에 요구하면서도 개별적으로 문제해결에 직접 나서지 않아 불평등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부류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20퍼센트에 속하지만 불평등 심화에 일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20퍼센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자신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합리화하고 불평등 심화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력, 부, 사회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인식개선을 물론이고 사회불평등 개선에 참여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부류는 80퍼센트에는 속하지만 빈곤층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20퍼센트의 사람들의 인식개선에만 치중해 있다. 저자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상위 20퍼센트의 인식개선만을 요구했지만 저자는 그에 속하지 않는 80퍼센트 사람들의 인식도 개선도 필요함을 말하고자 한다. 미국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80퍼센트 사람들이 20퍼센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유경제 시스템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깊게 박혀있다. 국가는 개별 국민의 삶보다는 국가의 성장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개별 국민은 개인의 노력, 재능으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따라서 상위계층을 올라가지 못하는 현실의 원인을 사회구조적 모순은 간과한 채, 개인의 노력과 재능의 부족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한국인들의 80퍼센트는 그렇게 합리화되어왔다. 본인이 20퍼센트에 속하지 못한 이유를 개인의 노력과 재능 부족의 탓으로 돌리며 노력을 충분히 한다며 20퍼센트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꾸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옹호하고 있다. 즉, 그들 스스로를 예비 20퍼센트로 바라보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세 부류는 같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 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하여 구조적 모순이 발생하였으므로 더 이상 완전히 공정한 경쟁은 없다. 공정하다고 치부하는 이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둘째, 최대한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상위 20퍼센트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들이 공정한 경쟁에 저해하는 것들을 자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입시컨설턴트를 이용, 자소서 대필, 지인을 통한 비교과활동 등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식이다. 공적인 강제력으로 제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국민들의 인식만큼 위력이 강한 것은 없다고 생각이다.
책 제목 : 이상한 정상가족저자 : 김희경출판사 : 동아시아평소에 많은 사회적 문제가 한국의 가족주의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보면 가족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이슈인 여성권리 문제, 동성애 문제도 가족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 가족주의 문제 실태를 알아보고 가족주의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한국에서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가족 문제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바로 한국의 ‘가족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가족주의란 ‘가족이라는 집단을 가족 구성원보다 중시하는 주의’이다.한국의 가족주의는 가족 내부적으로 개별성을, 외부적으로 다양성을 무시한다. 가족 구성원으로 개별성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에 지나친 책임, 헌신, 희생을 은근히 강요하며 가족에 얽메이게 한다. 이는 가족을 평생 지고 갈 큰 짐덩어리로 인식시킨다.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혼인율과 출산률의 감소, 고령화 가속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바라보며 자아혼란을 겪는다. 반면에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로 간주되어 부정적인 자아를 형성한다. 가족주의로 인해 자녀를 소유물로 취급하는 구체적인 문제 상황들이 있다.첫째,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체벌을 하는 상황이다. 체벌은 분명한 학대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세계 시민이 어느 정도의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본인도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고 스스로도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는 아이를 다루는 방식이 사회를 드러낸다고 본다. 이제 한국은 여성, 부하직원을 폭행하는 것을 누구나 처벌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아직도 아동 체벌에 있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폭력을 정당화한다. 훈육을 위한 체벌은 오히려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키우며 자존감을 하락시키고 아이들에게 폭력이 정당하다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알려준다. 은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가치와 권리를 지닌 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신체적 폭력과 비신체적 폭력을 근절시키려 한다. 우리나라도 현재 제5조 제2항에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되어있지만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민법에 징계권이 포함되어 있고 ‘처벌금지’라고 법에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체벌을 허용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가족 사생활 문제를 법, 국가가 너무 침범한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역시 이런 시각 자체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에서 비롯되었다. 부모는 아이를 양육할 ‘의무’를 가졌지 마음대로 할 ‘권리’를 가지진 않았다. 또한 법은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확산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욱 법ㅇㄹ 아동 체벌 금지를 법으로 명시해야 한다.둘째, 부모가 자녀를 방임하거나 과보호하는 상황이다. 먼저 ‘부모의 방임이 왜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거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군거가 책에 충분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뒷부분에서 따로 설명을 하고자 한다. 부모의 방임으로 미성년자들이 사망하기도 하고 부모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를 하더라도 가정의 문제는 사생활로 간주하여 심각한 형사처벌급이 아니면 국가가 개입하기 힘들다. 부모의 방임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담당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이것도 학대에 포함되기 때문에 학대 사례를 분석하여 이런 조짐이 보이는 ‘취약가정’을 선정하고 이들을 제3자의 눈에 띄도록 가시화 해야 한다. 다음으로 부모의 과보호의 경우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부모는 좋은 성적이 곧 일류 대학이고 인생 성공으로 여겨서 자녀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치부한다. 성적에 집착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처벌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자녀는 우울증에 빠지거나 거절에 대한 두려음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놀이가 학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사회성을 기르고 정서적 안정에 기여를 하는 긍정적 부분을 무시해버리고 놀 권리를 박탈시킨다. 부모라도 아이의 놀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가족주의는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본다. 그래서 한국은 체벌을 교육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부모와 방임, 과보호를 사생활의 영역이라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국가가 가족의 사생활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 간의 결속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웨덴의 사례를 보면 오히려 국가의 개입이 가족 문제를 해결하여 결속을 강화시킴을 알게된다. 스웨덴은 한국과 반대로 ‘삶은 개인주의적, 해법은 집단주의적’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동맹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도가 집단보다는 개인에 집중하여 개인의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여 가족의 의존도를 낮추고 개인화를 진전시켰다. 국가는 가족이 지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어 사회적으로 문제였던 가족 문제를 해결하였다.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는 성평등을 강조하여 가족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가족 중요도는 감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고 있다. 스웨덴이 살기 좋은 나라이긴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우리나라에서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다.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주의를 완화하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국에 알맞은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한국 가족주의는 외부적으로 다양성을 무시한다. ‘정상가족’을 부모와 그들의 친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으로 정의를 내리고 이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를 ‘비정상가족’으로 낙인찍고 차별한다. 책에서는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가정으로 미혼모 가정과 다문화 가정만을 다루었다. 이러한 사회인식 때문에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려는 현상이 더 발생한다. 원가족의 냉대로 인해 상처받은 미혼모들이 많으며 완전히 연을 끊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한다. 또한 부모의 지위가 곧 자녀의 지위로 여겨져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살기 좋은 사회는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다음으로 다문화 가정도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혐오발언을 듣고 차별을 당한다. 한국도 다른 나라 못지 않게 인종차별이 심해서 외집단을 배척하고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비정상 가족을 사회의 하위계층으로 여겨 멸시하고 혐오한다.따라서 한국의 가족문제는 가족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가족주의로 가족들 간에 건강하지 못한 유대감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타인을 혐오하고 자신을 치켜세운다. 가족주의로 끈끈한 애착은 형성될 수는 있지만 문제 상황을 짚어봤을 때는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한국은 어떻게 가족주의가 발생하고 고착화 되었을까?첫째, 가족을 공동운명체로 보는 유교의 잔재이다. 유교에서 가족 구성원의 개별성보다는 가족이라는 집단의 이익,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고 칭송하며 은근히 강요했다. 이런 사상이 남아 있어서 가족 단위의 경쟁을 지속하고 제도도 가족 단위를 전제로 만들고 있다.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개인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가족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50년간 급속도로 근대화를 진행했는데 1987년 민주화 대항쟁 전까지만 해도 사회보험제도가 제한적으로 있긴 했지만 거의 부재했다. 생활 지원 공공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가족이 그 역할을 하여 ‘선 성장, 후 분배’를 주장하는 경쟁사회에서 가족단위로 경을 하게 되었고 생존이 목표가 되었으며 가족 구성원의 개별성은 자연스레 박탈되었다.셋째, 가족주의 확대로 배타적 태도가 굳어져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1987년 민주 대항쟁 이후로 사회적 보호제도가 도입됐지만 이미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가족주의적 신념이 한국사회에 만연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이외의 타인들과 사회는 배척해야 하는 존재이고 신뢰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태도는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나누고 비정상 가족으로 극단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는 현상을 발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