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舊約 이스라엘史① 북이스라엘의 역사(931-721 B.C.E.)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19명 의 왕이 통치하였는데,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 비교적 짧은 통치 기간으로 마감하고 있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등 비교적 안정되지 않은 파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로보암 왕조와 바사왕조(931-884 B.C.E.)통일 왕국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동맹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여로보암 1세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왕상12:25), 즉각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왕상12:27-30). 그는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왕상12:31-33). 이러한 종교 정책은 유다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 왔으며(왕상14:25,926년 B.C.E.), 다마스커스의 아랍족과의 전쟁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남쪽 유다와의 관계는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의 마무리가 있었다. 여로보암과 바사 왕조는 모두 단기간 통치하다가 구테타에 의해 타도 되었다.㈏ 오므리 왕조(880-841 B.C.E.)군사 구테타의 산물로 정권을 장악한 오므리는 4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왕상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였으며(왕상16:24),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왕하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bait hmuri 민중들에 뿌리를 박고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에 비추어 왕과 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몰고 간 인물들이었다.㈐ 예후 왕조(841-752 B.C.E.)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아람 사람들로 받은 굴욕적인 경험의 시기와 8세기 초 앗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 날 수 있던 시기로 크게 나누어 진다.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으며, 백성들의 불만이 계속 번져 나갔다. 특히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통하여 라못 길르앗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왕하9:1-3). 예후는 곧 혁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쪽 유다의 왕 아하시아를 처형하고(왕하9:14-29), 또 아합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왕하9:30-10:11).이러한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며, 아하시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는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해로울 수 밖에 없었다.예후는 이러한 혁명을 저질러 놓고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나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였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살룸에게 암살 당함으로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 당하는등 매우 불안정한 말기 현상을 노출 시키고 있었다.예후 왕조는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신전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왕하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 뽑았다"(왕하10:28). 그러나 외형반을 경험한 호세아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여로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745-737년 B.C.E.)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베가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호9:11-17;13:9-13).드디어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왕 때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V세의 공격을 받고 3년 동안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721년 B.C.E.에 함락되고 말았다(왕하17:1-6).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 갔으며, 이 지역은 앗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앗수르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면서 혼혈 정책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이 말살 되어 갔다.다윗과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경은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의 신을 섬겨 야훼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7:7-18). 그리고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cf.호2:14-15).② 남왕국 유다의 역사(931-586 B.C.E.)㈎ 남북 분열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중앙 집권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19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왕가를 계승해 나아갔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 종교적 관점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 사회적 측면에 관한 사실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대에 활동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이집트를 신뢰하는 것을 격력하게 반대하였으며(사20장), 유다가 즉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점차 유다는 기울어져 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왕이 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715-687 B.C.E.)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바알과 아세라 신상들을 부수고 불 살랐으며, 사르곤에 이어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하자 히스기야는 분명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 났다(왕하18:1-8). 히스기야 제14년, 즉 701년 B.C.E.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704-681 B.C.E.)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였다. 라기스(Lachish)를 점령하고(왕하18:13-16)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헤립의 군대를 진멸하고 말았다(왕하19:1-35).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터널을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 들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였으며(왕하20:20;대하32:30), 예루살렘 성벽 확장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사22:10).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때 예루살렘은 구약시대 가운데 가장 큰 예루살렘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 후 북쪽 주민들의 상당 수가 남으로 이주해 온 결과로 여겨진다.㈐ 므나쎄(686-642 B.C.E.)히스기아의 뒤를 이어 20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하면서 그에 의존하였다. 사실상 앗시리아의 예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앗시리아의 문화와 종교 제의들을 받아 들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앞 마당에는 앗시리아의 하늘의 여왕인 이스타르의 상징과 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왕하21:1-9). 야훼 신앙은 사라지고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앗시리아의 종교가 혼합된 종교형태가 극심하게 번져 나갔던 시대였다.㈑ 요시아(641-609 B.C.E.)국내적으로 외부 종교와의 극심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왕하24:1-7).뒤를 이어 받은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겨우 3개월 간의 통치의 끝을 맺게 되었다(왕하24:8-12).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는 589년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왕과 백성에게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지 할 것과, 결국 예루살렘 이 멸망하여 모든 유다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과, 얼마 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대응은 신속하였으며, 그의 군대가 588년 1월 예루살렘을 봉쇄하고(왕하25:1;렘52:4. cf.렘21:3-7), 이듬해 여름까지 완강하게 버틴 예루살렘은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성벽이 뚫리며 불 탔고, 페허가 되고 말았다(왕하25:1-12;렘39:1-10;52:4-16).여리고 부근에서 붙잡힌 시드기야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시드기야왕의 아들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처형 되었으며, 그 자신도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왕하25:6f.;렘52:9-11). 대부분의 귀족들과 주민들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미스바를 그 수도로 정하였다(렘40-44장.cf.왕하25:22-24).이로써 586년 B.C.E. 남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된 신앙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이방인의 노예로, 방랑자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의 시작은 제2의 탈출을 꿈꾸는 새로운 희망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해 주었다.(6) 분열왕국의 남북관계① 분열 초기의 남북관계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제목: 신론?인죄론 서평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의 입장은 신론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의 입장은 인죄론이다. 전통적 정통 복음 진리를 보전, 전파, 변호, 수호하는 일은 우리의 지상적 과제일 것이다. 지금은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한 말세지이며, 기독교 내의 자유주의자들의 비성경적 연합운동(Un-Biblical Ecumenical Movement), 비진리와 타협하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성령은사 운동(신오순절 운동, Neo-Pentecostal Movement), 세속적 교회 음악(Secular Music in the Church), 사이비 이단사조들, 인본주의 사상, 육신의 부패성 등이 우리의 고귀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 흑암의 시대에 앞서 간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열조들을 통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전통적 정통 복음 진리를 보전, 전파, 변호, 수호하는 일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요 특권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유 3절; 벧전 5:4)고 하신 권면과 약속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 건강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우리 주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한다. 그리고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모든 은총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사용해야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고귀한 신앙을 지금 사용하지 않으면 이것마저도 빼앗기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역사적 교훈일 것이다."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 15:58). 이 인죄론 부분을 대부분의 주경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로 나누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서 강해하려고 합니다. 1) 1:18-32 자연인의 타락 2) 2:1-16 양심인의 타락 3) 2:17-3:8 종교인의 타락 4) 3:9-20 전인류의 타락 이제 그 첫부분인 자연인의 타락을 논하면서 갑자기 벼락을 치듯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많고 많은 말 가운데 왜 본론을 시작하면서 우뢰같은 소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고 있을까요? 사전에서는 진노를 '손해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생기는 불쾌하고 강한 적대 감정'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함은 우선 인간의 불완전하고 죄악에 젖어있는 성품에서 나오는 분노와는 다른 성질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분노는 그것이 의분(義憤)이라 할지라도 죄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나 하나님의 진노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모순되는 것에 대한 반격입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이를 더 자세히 말한다면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거나 가로채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이 다른 곳으로 흐를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출 20:5, 34:14, 신 4:24, 6:15, 수 24:19, 겔 23:25, 나 1:2, 약 4:5).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조금도 용납치 못하시는 그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나타나는 죄에 대한 반응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죄에 대한 그의 거룩한 반응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용납치 않으시며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19:22에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에게 죄가 가까이 가면 그는 즉시 진노로 반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1:13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라고 한 대로 하나님은 죄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거룩한 성품 때문에 즉각 민감하게 진노로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진노는 그의 거룩한 성품의 표출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그의 진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형벌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진노를 발하시고 징계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잠언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하였고 히브리서 12: 7-8에서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본론의 시작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사랑의 하나님을 좋아하지 진노하는 하나님을 좋아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신학자들 가운데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없다고 둥글게만 생각하는 분들이 없지 않으니 이 세상 사람이야 오죽 할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선호에 따라 하나님의 표출되는 성품이 취사선택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분에 상관없이 성경이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는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즉각적으로, 둘째는 오래 참으시다가, 셋째는 아예 내버려두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서평 : 도전하는 현대무신론The Battle For the Mind▼ 저자소개팀 라하이박사는 목사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이고, 카운슬러로 활동하고 있다. 가족상담과 성서예언 전문가로서 'Family Life Seminars'를 설립, 회장을 맡고 있고 대학교의 총장이기도하다. 한국에 소개된 저서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 ‘성령으로 사는 여성’, ‘성령으로 변화된 기질’, ‘성경공부의 비결’, ‘성령으로 사는 가정’, ‘요한계시록 해설’, ‘아름다운 애정생활’, ‘남성의 성격과 체질의 이해’, ‘우울증의 원인과 치료’, ‘사후의 생명’, ‘어린이의 성격과 체질은 고칠 수 있다’ 등이 있다. , , 등 47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Left Behind」시리즈는 기독교 신앙소설로 전 세계에 오천만 부 이상 판매된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서 평오늘의 시대를 특징 짓는다면 어떤 세계라 할 수 있을까?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시대는 종교이후 시대, 기독교 이후시대, 종교 다양화 시대, 탈신앙시대, 등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미 20세기 후반기 시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여졌던 것들이다.지난 세기와 구별되고 오늘의 새 시대를 특징 짓는 말이 있을까? 아마도 '무신론'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단적인 이유는 오늘의 많은 사람들 - 많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 이 '신 없이도 또는 신의 존재 여부에 관계 없이도' 이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고 실제로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희랍의 철인 프라토(Plato)는 무신론을 아주 혹평하여 '무신론은 지식이나 이해의 오해이기 이전에 영혼의 질병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과연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를 마치 어떤 몹쓸 질병에 걸린 것 같이 대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기독교가 내 세워왔던 종교 신앙과 일정한 세계관과 상반되고 적대적이라고 하여 무신론과의 적대와 '전투적' 대결의 대상으로 삼고 무신론에 대하여 벽만을 높이 쌓아 올려왔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20 세기에 와서 카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서로 적대해 왔던 동방 정교회, 루터 교회 등과의 만남과 대화를 시작하였고 기독교와 유다교, 기독교와 불교 간의 만남과 대화,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막스주의 간에도 전통적인 대결과 적대의 관계 대신에 활발한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상호 인정과 평화적 공존은 물론 교섭, 교류, 협력 관계로 전환하여 많은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지금은 동구권이 몰락하였지만, 그 이전에 동.서 이데올로기 간의 대화와 교류, 평화적인 공존 등이 기독교에 의해 추진되고 성공적으로 실현되기도 했다.구체적으로 '무신론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이해에 편견이 없지 않는 것 같다. 흔히 무신론이란 가장 간단히 말하여 유신론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일수이다. 그러나 무신론은 단순히 소위 유신론의 반대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유신론은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철학의 한 분야일 뿐이지만, 무신론은 단순한 신의 존재 부정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철학적으로 말하여 무신론이란 "신의 존재 또는 신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의 부인," 또는 "신화적으로, 신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이해했던지 간에 하느님이나 어떤 신적 실재(divine reality)나 간에 이의 부인(否認)"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무신론은 신앙의 반대요 적대라고 생각하고 이 둘 사이에 확연한 구별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다.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시인.부인에 따라서 기계론적으로 사람들을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로 나눈다는 것은 문제가 있음은 물론 무신론이란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구약성서에서는 무신론자들을 '바보' 또는 '어리석은 자'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와 관계를 생각할 때 다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근대 무신론의 아버지라는 포이엘밧하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숙고해야 한다. 그는 "내가 무신론자란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사람을 분류하고 규정하기를 좋아하며 어떤 잣대를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닐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