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61986 독일어과 배기완서양 고대철학 중간고사 대체 과제물: „국가“ ζ 권의 요약 및 그 개괄ζ 권 전반부의 개괄플라톤의 중기 저술의 대표작인 폴리테이아 가운데, ζ 권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 즉 형이상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만약 플라톤의 이 책의 그의 저술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볼 때, 이 권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 말할 수 있으리라.이 장은 철학자가 주로 철학이 존재하는 것 τὰ ὄντα 에 대한 참다운 앎을, 그러니까 각각의 존재하는 것 ἕκαστον τὸ ὄν에 대한 존재 οὐσία를 참답게 탐구하는 한에서, 철학자가 정치가의 역할을 맡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논하는데 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지혜를 좋아하는 영혼을 타고난 자는 존재하는 것의 보임새 τοῦ ὄντος ἰδεα로 쉽게 인도되며, 응당 이런 사람에게만 나라를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해 제기될 수 있을 반론에 맞서 조타수의 비유를 들어 철학자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의 정당성을 옹호한다.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철학적인 혼을 가진 사람은 주위의 만류로 철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게 되고, 철학을 하면 안되는 사람이 허영심으로 그 자리를 꿰차게 되며, 따라서 참다운 철학자이면서 정치를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된다. 오직 소수의 사람, 고귀하고 훌륭한 영혼을 가진 자 가운데 소크라테스처럼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의 계시를 받았거나, 망명자이거나 나랏일을 괄시하는 사람 등만이 참답게 철학과 관계 맺을 수 있다.때문에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호자, 즉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해 어떠한 배움이 필요한지 논하게 된다. 훌륭한 배움을 얻지 못 한다면,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가장 큰 배움τό μέγιστον μάθημα에 대한 논의의 필연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가장 큰 배움 τό μέγιστον μάθημα은 좋음의 보임새 ἡ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 이며, 플라톤은 이를 태양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태양의 비유그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빛은 하늘에 있는 태양 ἥλιος 에서 말미암는 바, 이 태양은 시선도 보이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시선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이다. 이제 플라톤은 가시적 영역에서의 태양과 같은 것을 가지적 영역에서 상정하는데, 그것이 좋음이다.즉 가시적 영역에서 시각이 보이는 것을 볼 때, 태양의 빛이 시각의 가능한 조건인 것처럼, 가지적 영역에서는 지성νοῦς이 지성에게 알려지는 것τὰ νοούμενα을 파악할 때, 이 좋음이 지성과 지성에게 알려지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한에서만, 지성은 지성에게 알려지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좋음의 보임새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 는 인식 ἐπιστήμη도 인식되는 것으로서의 존재 οὐσία 도 아니라, 그 까닭 αἰτία 이 되는 것이다.ἐπέκεινα τῆς οὐσίας지금까지의 논의에 힘입어 소크라테스는 끝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Καὶ 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τοίνυν μὴ μόνον 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 φάναι ὑπὸ τοῦ ἀγαθοῦ παρεῖναι, ἀλλὰ καὶ τὸ εἶναί τε καὶ τὴν οὐσίαν ὑπ' ἐκείνου αὐτοῖς προσεῖναι, οὐκ οὐσίας ὄντος τοῦ ἀγαθοῦ, ἀλλ' ἔτι ἐπέκεινα τῆς οὐσίας πρεσβείᾳ καὶ δυνάμει ὑπερέχοντος""그리하여 또한 나는 말하거니와, 좋음에 의해 인식됨이 인식되는 것에게 가능할 뿐 아니라, 있음εἶναί과 존재οὐσία 또한 저 좋음에 의해 인식되는 것에게 현존할 수 있는 바, 좋음은 존재도 존재함도 아니며, 도리어 힘과 지위로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네"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실로 플로티노스에서 하이데거까지의 철학사에서 이 구절은 «문제» 로서 이해되어왔으며, 때문에 오늘날 몇몇 플라톤 주석자가 이 부분에 대해 함구한 체로 넘어가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ἐπέκεινα τῆς플라톤의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를 ἕν과 결부시켜서 이해한다. 헌데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가 ἕν 이며, 또 이게 ἐπέκεινα τῆς οὐσίας라면, 이는 플라톤이 엘레아 학파의 존재론을 새로운 지평 위에서 재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미 ἕν - πολλά 문제를 형상을 통해 해명하였기 때문에, 제논이 ἕν - πολλά 라는 대립 쌍을 ὄν - οὐκ ὄντα 로 이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플라톤은 ἔν - πολλά 라는 짝을 ἔν - ὄντα 로 이해하는 바, ἕν으로서의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는 ὄντα가 아니라 ὄντα 이전의 어떤 통일성이기에, ὄν이 아니며, 비-존재이자 초-존재로서의 존재의 원리(Seinsprinzip)이다. 이러한 지적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실제로 플라톤이 복수의 οὐσία를 상정하며, 태양의 비유 다음의 이른바 „선분의 비유“에서 모든 것의 시원 ἡ ἀρχή τοῦ παντὸς 라는 정식을 통해 „좋음“을 이해하는 까닭이다.그렇지만, 이러한 크래머의 지적이 좋음의 보임새의 존재론적 위치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해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튀빙엔 학파의 채색에 힘입어 좋음의 이데아를 ἔν으로 보는 것이, 튀빙엔 학파의 아그라파 도그마타 재해석에 대한 설득력을 높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러한 난제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을지는 실로 의심스럽다. 만약 물어져야 할 바가 „좋음의 이데아는 무엇을 넘어서는가?“ 라는 물음의 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말이다.이제 좋음의 보임새가 무엇을 넘어서는지, 또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물어져야 한다. 만약 좋음이 οὐσία를 넘어선다면, 좋음은 비존재 τὸ μή ὄν 인가? 어쩌면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비존재가 단순히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부정이 아니라면 말이다.플라톤은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좋음의 보임새를 세 가지 서 파생된 명사이며, τὸ ὄν 이라는 분사participium은 εἶναί 에서 비롯된 바, εἶναί 자체가 아니라 εἶναί에 참여하는 사태를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플라톤은 좋음이 εἶναί 가 아님을 주장하는 셈이다.헌데, 대관절 플라톤은 왜 좋음의 보임새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는 εἶναί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앞서 한스 크래머의 논의를 통해 살펴봤던 바와 같이 신플라톤주의나 튀빙엔 학파에서 해석했던 것처럼 플라톤에게서 ἰδέα τοῦ ἀγαθοῦ를 ἕν으로 이해할 소지는 충분함을 감안할 때, 이 ἕν을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ἕν과 결부시켜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τῶι πάντ’ ὄνομα ἔσται,ὅσσα βροτοὶ κατέθεντο πεποιθότες εἶναι ἀληθῆ,γίγνεσθαί τε καὶ ὄλλυσθαι, εἶναι τε καὶ οὐχί,καὶ τόπον ἀλλάσσειν διά τε χρόα φανὸν ἀμείβειν.“„그리하여 모든 것은 이름일 지언데,죽을 자들이 참이라 확신하면서 정립하는 저 모든 것이 그렇거니와,생겨남과 사라짐, 있음과 아니,또 자리의 뒤바뀜과 빛깔에 따른 색의 변화.“주지하는 바와 같이 „생겨남“과 „사라짐“을 부정하는 이 구절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단지 생겨남과 사라짐만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εἶναι τε καὶ οὐχί“ 이다. DK 28 B2 에서 „ἔστιν“ 이 디케 여신이 언급한 „진리를 따르는 확신의 길“ 임을 염두에 둔다면, „있음과 아니“가 한낱 이름ὄνομ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적인 진술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데, DK 28 B2 에서 볼 수 있듯이 파르메니데스가 이해하는 존재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 까닭이식능력을 통해 파악하기 이전의 존재가 우리가 인식능력을 통해 파악한 존재οὐσία와 있음εἶναί을 단적으로 초월하며, 인식능력을 통해 파악한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좋음의 이데아는 Natorp가 초월 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틀 속에서 해석했던 것처럼 존재와 사유를 가능케 하는 어떤 법칙(Gesetz)가 아니라, 도리어 사유의 법칙이 개입하기 이전의 순수한 차원의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이른바 «선분의 비유»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태양의 비유는 헬라스 철학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Ζ권을 제외한다면, 가장 문제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때문에 좋음을 설명하면서,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 이외에도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덧붙이는데 그게 바로 이른바 «선분의 비유» 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는 «비유» 라기 보다는 좋음의 이데아와 그 밖의 여러 앎 사이의 유비 관계를 도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여기서 플라톤은 우선 눈에 보이는 부류τὸ ὁρωμενον γένος와 지성에 알려지는 부류 τὸ νοουμενον γένος가 상이한 인식 영역을 차지함을 지적하며, 양자를 경계 짓는다. 그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부류를 상 εἰκών과 이러한 상과 닮은 것 ἔοικεν으로 나누며, 양자의 관계와 의견이 되는 것 τὸ δοξαστόν과 인식되는 것 τὸ γνωστόν 사이의 관계를 유비적 관계로서 이해한다.마찬가지로 지성에 알려지는 부류 또한 두 단계로 나누는데, 이는 각각 기하학 내지 기하학과 근친적인 학예 아래에 놓이는 것 τὸ ὑπὸ ταῖς γεωμετρίαις τε καὶ ταῖς ταύτης ἀδελφαῖς τέχναις 과 꼴εἶδος에 상응한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네 가지로 나누었던 앎의 단계에 이르는 방식을 거꾸로 나열한다. 꼴εἶδος에 상응하는 앎은 직관νόησις이며 기하학 내지 기하학과 근친적인 학예 아래에 놓이는 것 τὸ.
32161986 독일어과 배기완철학상담 과제주제: 하이데거에게서 왜 인간은 Dasein인가?들어가는 말하이데거는 „Sein und Zeit“ 로 대변되는 이른바 „전기“ 철학에서 토마스, 둔스 스코투스, 프란치스코 수아레즈를 위시한 스콜라철학과 칸트의 초월철학적 유산에 힘입어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문제시되며, 그런 한에서 존재 일반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기에, 존재론 일반의 근거가 되는 어떤 특수한 존재자, 즉 현존재Dasein의 존재방식을 해명하는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을 제시하는 바, 그런 연유로 Dasein은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해명을 기도하는 전기 하이데거에게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사료되거니와, 이는 전적으로 현존재분석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만,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이 빠진 함정, 즉 존재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제한규정함과 더불어 존재Sein의 의미를 존재하는 것 Seiendes과 혼동하는 오류를 답습할지도 모를 위험성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의 의미를 온전하게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고로, 하이데거 전기 철학을 이해함에 Dasein 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을 터이다.헌데, 하이데거가 Dasein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지칭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왜 하필 그가 Dasein 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규정하는지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인가? 어쩌면, 그가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한 많은 새로운 개념어가 그렇듯이 어쩌면 Dasein 역시 임의적으로 규정된 개념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한 판단은 유보될 필요가 있으리라 사료되거니와, 이는 종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의 Dasein과 하이데거의 terminus technicus인 Dasein 개념 사이의 상관관계가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연원힌다. 만약 스콜라철학, 양자 사이의 실재적 구별을 주창하는 철학을 일반적으로 „실존주의“ (existentialisim)라 일컫는다. 이렇게 본질과 대비되어 이해되는 실존exsistentia 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주요한 형이상학적 특질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있는 것τὸ ὄν의 일차적인 의미가 실체οὐσία로 이해되는 바, 그가 실체의 의미를 “있음이 무엇인지“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로 규정함과 더불어 존재의 의미가 본질로서 규정됨으로써, 존재와 본질 사이의 사실상의 일치가 성립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실존주의적“ 존재론은 있음(esse)과 본질(essentia) 사이의 실재적 구별을 주장하는까닭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헌데 모든 본질 내지 무엇임은 그 있음(esse)에 대해 어떤 것이 인식되지 않더라도 인식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나 불사조가 사물의 본성상(in rerum natura) 있음(esse)을 가지는지 여부를 알 수 없더라도, 그게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인간이나 불사조 같은 피조물의 경우 그 본질이 있음(esse)를 포함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개념적으로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인 바, 그런 연유로 토마스는 있음(esse)과 본질(essentia) 사이의 실재적인 구별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있음(esse)과 본질(essentia)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자의 경우, 즉 그 본질이 있음 자체(esse ipsum)인 존재자인 경우, 우리는 그 비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바, 있음(esse)과 본질(essentia)이 분리되지 않는데, 토마스에 따르면, 이렇게 있음과 본질이 구별되지 않는 존재자는 있음 자체(esse ipsum)인 하느님(Deus)이다.그렇지만, 비록 토마스가 esse를 essentia 와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즉 모종의 개념적인 대립쌍으로서 이해함으로써, 본질 개념에 대립되는 실존적인 개념을 상정하고 있을지라도, 아 바, 이 개념은 비단 essentia 개념과 대비되는 개념일 뿐 아니라, 있음esse 개념과도 상이한 개념인 바, 실존이라는 개념은 esse 자체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esse의 한 양태로서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것(ens in natura) 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ens actuale)으로서의 존재개념에 국한되는 개념이며, 그런 한에서 우리는 실존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ens을 상정할 수 있거니와, 앞서 언급했던 불사조의 본질과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하이데거에게서 무Nichts와 현존재Dasein앞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Dasein 이라는 개념이 라전어 existentia의 번역어라면,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Dasein 개념 역시 스콜라철학의 existentia 개념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터, 주지하는 바와 같이 existentia 개념이 esse 자체는 아니며, 또 existentia 라는 개념이 esse 개념 가운데 어떤 제한된 영역인 ens in natura 의 영역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Dasein 역시 Sein 자체와는 상이한, 현실적인 유한성을 지닌 존재자의 존재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이러한 차이는 어떤 중요성을 낳는가?여기에서 괄목해야 할 사실은 존재Sein/esse 개념 자체에서는 어떤 무Nichts/nihil도 성립할 수 없는 반면, 현존Dasein/existentia 에서는 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거니와, 만약 존재개념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즉 사유된 존재자ens rationis와 실재적 존재자ens reale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이해된다면, 사유될 수 있는 것 일반은 있는 것이며, 또한 존재 자체에는 어떤 무도 개입할 수 없는 반면, 현존Dasein 의 경우, 어떤 특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유한한 자리(Da-)와 결합되는 한에서만 가능한 존재(Sein)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재한다는 사태 자체에는 어떤 무도 불가능하지만, 현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존재 자체는 현 또 무(Nichts)를 문제삼는 어떤 존재자, 다시 말해 무의 자리지기(der Platzhalter des Nichts)인 인간에게서 그 기원을 갖는데, 왜냐하면 현존이라는 이 특수한 존재개념은 무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역설적으로 현존재(Dasein)에 내포된 이러한 무(Nichts)의 가능성은 존재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존재자에 대한 우위로 귀결될 수 있으리라 사료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인간이 무의 자리지기인 한에서, 이러 저러한 존재자의 존재(das Sein des Seienden)를 초월해서 존재 자체(das Sein selbst)로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거니와, 이는 불안(Angst)이라는 근본기분(Grundstimmung)에 의해 촉발되는 바, 불안은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로 만들며, 현존재의 이러한 무에 붙들려 있음은 존재자 전체를 넘어섬(das Übersteigen des Seienden im Ganzen), 즉 초월(die Transzendenz)이다. 이렇듯 불안이라는 무의 밝은 밤(die Helle Nacht des Nichts) 속에서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한 초월이 드러날 때, 무는 존재하는 것의 반대 개념,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의 논리적 부정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의 존재(das Sein des Seienden)으로 이해되는 바, 존재와 무는 공속하거니와, 이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즉 무규정성과 무매개성이라는 두 가지 계기에서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 본질상 유한하며, 무로 빠져나가는 현존재의 초월 속에서만 드러나는 까닭이거니와, 만약 우리가 존재(Sein)는 존재하는 것(Seiendes)이 아니라는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다.„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와 무는 공속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하는 것 전체를 초월하는 까닭이다. 이는 단순한 사유의 짖궃은 역리나 말장난 같은 것이 아았다면 그렇다. 즉, 현존재Dasein의 Da-는 일차적으로 인간이 지닌 유한한 지평으로서의 Da를 의미하지만, 반어적으로 이러한 유한성의 계기가 존재Sein 자체와의 만남을 함축하고 있다. 어떻게 유한한 Da-가 존재 자체와 만날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Da-는 존재 자체와 공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한한 Da-를 넘어서는, 즉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는 무Nichts와의 만남이 현존재의 이러한 유한성(Da-)에 의거해서만 가능하며, 그런 한에서 현존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개방성을 획득하는 셈이다.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존재방식을 탈-존(Existenz)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그가 Dasein을 Existenz로 규정하는 것은 독일 강단철학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실존existentia이라는 낱말의 어원적 의미, 다시 말해 밖으로 나와ex 서 있음sistere 이라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그는 현존재(Dasein)의 존재방식을 탈-존(Ex-istenz)로 규정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존재는 존재자 전체 바깥에(ex) 서 있는(sistere)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 바깥에 서 있다는 사태가 현존재를 무의 자리지기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무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드러내는 초월론적 지평이기도 하다.이상의 논의에서 분명해진 바와 같이,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Dasein)라는 낱말로 규정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어법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Dasein이라는 낱말의 어원적 의미뿐만 아니라, 그 형이상학적 의미 역시 염두에 두고, 인간을 Dasein으로 규정했으리라 사료된다.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은, 무가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며, 그런 한에서 무의 자리지기(der Platzhalter des Nichts)이다. 그리고 무(Nichts)는 (그것이 결여적 무nihil privativum든, 아니면 사유된 존재물ens rationis이든) 존재Sein 자체가 아닌, 현존재(Dasein).
32161986 독일어과 배기완서양 고대철학 과제주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에서 ὕλη 개념 – 변화의 문제와 실체 문제를 중심으로.서론: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 개념을 일차적으로 그 도입의 필요성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때문에, 밑감 개념 일반의 여러 복잡하고 다채로운 국면을 하나하나 상세히 다룰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또 이렇게 제한된 주제 설정 탓에 본고는 „가능태-현실태“ 개념쌍과 결부되는 의미에서의 „밑감-꼴“ 이라는 개념쌍을 다루는데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앞서 지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철학이 개념의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라면, 이 개념은 언제나 역사적 맥락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짚고 넘어감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 밑감 개념의 전사에 대해 살펴볼 것이며, 밑감 개념의 도입이 어떤 철학적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었는지 또한 이를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그 다음으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밑감을 도입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변화의 문제를 다루는 „자연학“ A 권 7장에서 그가 휘포케이메논을 어떤 맥락에서 도입하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 후에 „형이상학“ Z 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하는 밑감을 „자연학“ 에서 다루었던 밑감과는 상이한 층위의 밑감으로서 이해할 것이다.그러고 나서 „형이상학“ Z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밑감을 실체의 후보로서 배제하지만, 그 뒤에 H 권에서 다시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로서 인정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것이며,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실체론이 지닌 복잡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마지막으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밑감 개념의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볼 것이다.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에서 수용자ὑποδοχή 개념의 도입아리스토텔레스의 ὕλη 개념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이 개념의 전사를 살펴 봐야할 필요가 있는 바, 멀리는 탈레스까지 소급되는 이 개념을, 일차적으로 플라톤에게서 살펴봐야 할 필연 것(κατὰ ταὐτὰ ὄν)이며, 다른 하나는 저 본을 따르는 버금가는 것이며, 생겨남을 가지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세 번째 것을 구별하지 않았는데, 둘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던 탓입니다. 이제 논의(λόγος)가 이 어렵고 모호한 형태의 것을 논구함으로서 밝히도록 강요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실로 이것이 어떤 능력과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모든 생겨나는 것의 수용자(ὑποδοχή)자체로서, 유모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해야 합니다.“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에 의한 창조를 다루는 이 대목에서, 창조라는 작업에 본(παράδειγμα)과 본을 따르는 버금가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구성 요소인 이른바 4원소 사이에서도 부단한 상호 침투와 변화가 발생하는 바, 이러한 4원소 사이에서도 생겨남, 즉 변화가 성립한다면, 이러한 변화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서, 또는 이러한 4원소 간의 변화가 성립하기 이전의 어떤 것으로서, 지성에게 알려지는 것도,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도 아닌 제 3의 무언가가 필요한 까닭이다. 플라톤은 이를 금에 비유한다. „만약 혹자가 금으로 모든 형태를 만들고, 저마다의 것을 오만 것으로 형태를 바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누군가 이것 가운데 하나를 가리켜 무엇인지 묻는다면, 금이라 말하는 것이 참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한 대답일 것입니다“.플라톤은 이러한 4원소 이전의 생겨남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지닌 이 어떤 것을 „수용자“(ὑποδοχή) 라는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 „수용자“(ὑποδοχή) 라는 개념이 나타내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분분하지만, 여하튼 어떤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그런 한에서 변화의 기저를 이루는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해 보이지는 않으며, 그런 한에서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으뜸 밑감“ ὕλη πρώτη과 유사한 무언가로 이해하는 것 역시 온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플라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 개념이 도입되어야 할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변화의 문제를 다루면서 휘포케이메논을 도입하는데, 이를테면 „음악적이지 않은 사람“이 „음악적인 사람“이 될 때, 이러한 변화에서 어떤 것은 존속하는 반면, 다른 어떤 것은 존속하지 않는다. 즉 „음악적이지 않은 사람“은 „음악적이지 않은“과 „사람“으로 나뉠 수 있는 복합체이며, „음악적인 사람“은 „음악적인“과 „사람“으로 나뉠 수 있는 복합체인 바, „음악적이지 않은 사람“이 „음악적인 사람“이 될 때, „사람“ 이라는 부분은 존속하는 반면, „음악적이지 않은“ 이라는 부분은 존속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변화에서도 존속하지 않는 부분과 존속하는 부분이, 다시 말해 실체적 부분과 부수적 부분이 있으며,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화하려면 그러한 변화에서 실체적 부분이 부수적 부분으로 하여금 다른 부분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변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변화는 본질적으로 실체적인 것이 변하는게 아니라 실체적인 것에 딸려 있는 부수적인 것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나는 모든 것이 그 바탕에 놓여있는 것에서 말미암음에 분명하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휘포케이메논 내지 휠레는 자연의 변화와 생겨남, 사라짐을 해명하기 위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되는 개념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으리라.으뜸 밑감으로서의 휠레헌데 주지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밑감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변화나 운동의 근거로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 플라톤의 „수용자“ 개념에 대해 논의하면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의 바탕에 놓인 것으로서의 휘포케이메논 뿐 아니라, „으뜸 밑감“ 이라는 의미에서의 휠레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의 Ζ 권에서 실체οὐσία의 네 가지 후보로서 무엇임τὸ τί ἦν εἶναι, 보편자τὸ καθόλου, 유γένος, ...] 그리하여 종국적인 것은 그 자체로 어떤 것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실로 그 부정도 아니다“.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밑감“은 앞서 „자연학“에서 생겨남과 사라짐이라는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바탕에 놓인 것“ 과는 어느정도 공통점 또한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상이한 맥락을 가짐에 분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밑감은 „바탕에 놓인 것“의 가장 추상적인 상태로, 즉 더 이상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술어화 될 수 없는 것으로서 유γένος 또한 넘어서는 어떤 가정된 순전한 개념으로서의 무규정자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는게 타당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오직 그런 한에서만 최근류와 종차로 이루어지는 „정의“를 넘어서서 말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밑감은 이른바 „으뜸 밑감“ ὕλη πρώτη 이다.헌데 우리의 철학사적 상식과는 달리, 이러한 밑감은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 로서 이해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밑감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담지하고 있지 않기에 이를 통해서는 개별화가 성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밑감“이 개별화의 원리라면 이러한 으뜸 밑감materia prima가 아닌, 지정된 밑감materia signata으로 보는게 온당하리라.밑감과 꼴, 실체.우리는 앞서 „형이상학“ Z 권을 원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실체론의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그런데 „형이상학“ Z 권이 실체의 문제를 가장 „문제적으로“ 다루는 텍스트이며, 실체의 후보로서 „바탕에 놓인 것“, 그러니까 밑감이 언급된 한에서, 밑감과 실체 사이의 상관관계 또한 문제로서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제 밑감과 실체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논해보고자 한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체οὐσία의 네 가지 후보로서 무엇임τὸ τί ἦν εἶναι, 보편자τὸ καθόλου, 유γένος, 그리고 바탕에서 지금은 이 정도의 크기로 있지만 다시 더 작아지거나 커지는게 있고, 변이라는 차원에서는 지금은 건강하지만, 다시 쇠약하게 되는게 있거니와, 이와 비슷하게도 실체라는 차원에서도 지금은 생겨나지만 다시 사라지는게 있고, 또 지금은 ‚이것‘과 같은 바탕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다시 결여적 의미에서의 바탕에 놓인 것이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근본적으로는 „자연학“ A권 7장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논점은 „변화의 근거“라는 의미에서의, „이것“ 이라는 의미에서의 바탕에 놓인 것과 결여적 의미에서의, 다시 말해 „이것“을 추상해냈다는 의미에서의 바탕에 놓인 것이 있으며, 전자인 한에서 밑감은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밑감은 여전히 실체의 표징으로서 „이것“ 이라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에 분명한 까닭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꼴 뿐만 아니라 밑감 역시 제한적인 의미에서는 실체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관점에서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다.결론우리는 지금까지 밑감 개념의 전사를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 에서 „수용자“ 개념을 도입하는 맥락을 살펴보았고(2.) 그 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에서 밑감을 도입하는 맥락을 살펴보았으며, 그 다음에는 „자연학“ A권 7장 에서의 밑감 이해와 구별되는 „형이상학“ Z 권 에서의 밑감 규정과 밑감을 두 가지 상이한 층위를 살펴보았다(3). 그리고 밑감이 실체인지 아닌지 여부를 논하면서 „형이상학“ Z권과 H 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4).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밑감은 오직 „가능적인 실체“ 라는 의미에서만 실체이다. 또 „현실적인 실체“ 라는 의미에서의 실체는 형상이며, 이는 밑감과 꼴이라는 개념쌍이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쌍에 상응하는 것과 모종의 유비적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정상 본고에서 이를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밑감이 이전 철학, 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