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학개론 과제 레포트- 속 아동학대에 대하여목차Ⅰ. 서론Ⅱ. 본론1. 아동학대 정의(1) 신체적 학대(2) 정서적 학대(3) 성적 학대(4) 방임 및 유기2. 아동학대 현황3. 아동학대 대책(1) 아동학대 범죄 관련 경찰의 전문성 강화(2)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특별사법경찰권 부여(3) 영유아 및 취학유예 아동의 건강검진제도 의무화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는 실제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한다. 영화 속에서 엄마는 애인과 재혼을 하기 위해 12살인 장남을 비롯해 4명의 아이들을 집에 두고 떠난다. 그렇게 집에 남겨진 아이들은 엄마가 남기고 간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게 되지만, 돈은 곧 바닥나게 되어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된 음식들을 받아와 먹거나 굶으면서 지내게 된다. 전기와 수도도 끊겨 물은 근처공원에서 물을 떠다 먹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다. 아이들의 아빠는 전부 다른 사람이며 장남을 제외하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다. 학교를 가지 않고 낮에 노는 아이를 어른들이 이상하게 여겨 묻지만,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거짓말로 대처한다. 아이들만 있으니 집의 청소를 비롯해 가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집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는 추락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던 아이들은 트렁크에 시신을 담아 공항 근처에 묻어준다.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충격을 준 아동학대 및 사망사건들이 떠올랐다. 아동을 학대하거나 방임하여 사망하게 하는 범죄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등 아동학대 범죄에 대한 처벌이나 형량이 강화되고는 있으나 그보다 예방과 사후관리를 위한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Ⅱ. 본론1. 아동학대 정의아동학대란 개념은 1961년 미국에서 “피해학대 증후군”이란 용어를 통해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아동학대에 대한 기준 및 범위는 신체적 학대만 적용되었다가 이 후 정서적·성적, 방임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아동복지법 제3조 제7항에서 아동학대를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를 하는 것과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아동학대범죄의 개념은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 제4호에서 보호자에 의한 아동학대 행위로서 형법상의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인 상해와 폭행, 유기와 학대, 체포와 감금, 협박과 명예훼손, 약취 및 유인과 인신매매, 강간과 추행, 사기와 공갈을 저지른 경우와 아동복지법 제17조에서 금지행위를 하거나 아동학대 살해 및 치사, 아동학대 중상해, 상습적인 아동학대를 저지른 경우로도 정의하고 있다.따라서 아동학대의 유형을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성적 학대, 방임 및 유기로 분류할 수 있다.(1) 신체적 학대신체적 학대는 아동의 신체에 손상을 주거나 신체의 건강 및 발달을 해치는 행위를 의미하며, 학대의 가장 기본적 행태에 해당한다. 보호자를 포함해 성인의 의도 유무에 상관없이 아동이 신체의 손상이나 부상을 입은 경우에는 신체적 학대로 인정된다. 신체적 학대에는 아동의 연령에 적합하지 않은 일을 시키는 노동착취도 포함된다.신체학대 행위에 대해서도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직접적으로 신체에 가해지는 행위, 도구를 활용해 신체를 가해하는 행위, 완력을 사용해 신체를 위협하는 행위, 유해한 물질을 이용해 신체를 가해하는 행위가 있다.(2) 정서적 학대정서적 학대는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보호자나 양육자가 아동에게 언어적·정서적 위협, 감금·억제, 기타 가학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가리키며, 언어적·정신적·심리적인 학대가 포함된다. 그러나 학대자 또는 가해자의 불행 원인을 아동에게 전가시키는 경우가 있으며, 학대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학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정서적 학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보여 발견이 어렵다.정서적 학대는 직접적 학대와 간접적 학대로 구분할 수 있다. 직접적인 학대는 아동에게 폭언을 내뱉거나 지속적으로 분노하고, 아동을 거부하는 행위 등을 의미한다. 간접적 학대는 아동에게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동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행위, 예를 들어 가정폭력을 목격하게 하거나, 청소년 유해업소와 같은 장소에 아동을 데리고 다니는 행위 등이 간접적인 학대에 해당된다.더불어 부모의 편애로 인한 차별이나 분노의 해소를 위한 대상을 아동으로 삼는 것도 정서적 학대에 포함된다.(3) 성적 학대성적 학대는 아동에게 음란한 행위를 시키거나 이를 매개하는 행위 또는 아동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성희롱 행위를 의미한다. 성인 또는 나이가 많은 아동이 성적인 자극이나 만족을 위해 아동에게 행하는 모든 성적 행위를 말한다.성적 학대는 다른 사람의 성적 만족을 위해 아동을 이용한 성적 착취와 아동을 성적 도구로 이용하는 성적 폭행, 아동을 성적으로 자극하거나 혐오감을 갖게 하는 환경에 처하게 하는 성적 노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적 학대는 다른 학대에 비해 비중이 낮지만, 피해아동에게 우울, 불안 증세를 야기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4) 방임 및 유기방임 및 유기는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의 보호·양육·치료 및 교육을 소홀히 해 아동의 건강 및 복지를 해치고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거나 아동을 유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방임의 유형은 4가지로 구분되며, 물리적 방임, 의료적 방임, 교육적 방임 그리고 유기로 구분할 수 있다.방임행위는 음식과 위생, 난방, 의복과 같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수 있는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위험한 환경에서 아동을 보호하지 않는 행위, 아동의 건강을 위한 의료적 처치나 예방접종을 제공하지 않는 행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거나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행위가 있다. 방임행위는 아동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발육부진이 되거나 제대로 된 건강보호가 이뤄지지 않아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는 위험성을 가진다.2. 아동학대 현황보건복지부의 2020년 아동학대 주요통계에 따르면, 2020년에 아동학대 신고접수 건수는 총 42,251건이다. 2019년에 41,389건이 접수된 것과 비교하면 약 2.1%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의 2015년부터 2020년까지의 보건복지부 아동학대 주요통계를 살펴보면 아동학대 신고건수와 의심사례건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고건수 증가는 단순히 아동학대 발생수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아동학대는 중요범죄라는 인식 개선과 신고 의무 부과로 인해 아동학대가 전보다 용이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것도 있다.2020년 아동학대사례 건수는 30,905건으로 2019년 30,045건이었던 것에 비해 2.9%가 증가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 수는 71개소로 전년도와 비교해 4개소가 증가하였다.2020년 아동학대로 판단된 사례들에서 아동 학대행위자와 피해아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부모가 25,380건으로 전체의 82.1%를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는 대리양육자 2,930건, 친인척 1,661건, 타인 565건, 기타 369건이다.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사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43.6%는 친부에 의해 발생한 13,471건이다. 그 다음으로 친모 10,945건, 계부 578건, 계모 312건 순으로 높다. 대리양육자 총 2,930건 중에서는 초·중·고 교직원에 의해 발생한 882건이 제일 높았다.아동학대 발생장소는 가정 내에서 발생한 사례 26,996건이 전체 87.4%를 차지하며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중 피해아동의 가정 내에서 발생한 사례는 26,249건으로 가정 내 발생사례의 84.8%였다. 그 외 학교, 어린이집, 아동복지시설, 유치원, 기타복지시설 순으로 높게 발생하였다.아동학대범죄 유형은 아동 재학대사례가 14,934건으로 가장 높다. 정서적 학대는 8,732건, 신체적 학대는 3,897건, 유기 및 방임행위는 2,737건, 성적 학대는 695건 발생하였다.통계를 살펴봤을 때 아동학대는 가정 내 부모에 의해 발생한 사례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는 가정 내에서 은밀히 행해진다는 점에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피해아동이 사망하거나 중상해 등 심한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만 사회적으로 쟁점화 되거나 형사처벌 등이 논의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가정 내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3. 아동학대 대책(1) 아동학대 범죄 관련 경찰의 전문성 강화아동학대 범죄사건에서 경찰의 소극적이고 미흡한 대처로 인해 아동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은 일들이 발생한다. 아동학대 의심신고를 받고 출동하거나 접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학대의 혐의점을 찾지 못하여 내사종결하거나 학대혐의자인 부모를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범죄사건에 대응하는 경찰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동학대 범죄 대응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동학대 의심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아동학대 정황을 발견하고 포착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은 피해아동에게 벌어질 더 심각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특별사법경찰권 부여
중국미술사 레포트-하·상·주시대 청동기의 특징, 제작기법, 변천과정에 대하여Ⅰ. 서론중국에서 청동기는 기원전 3000-2000년경 신석기시대 후기인 용산문화기에서 최초로 출현하였다. 당시의 청동기는 간단한 청동도구에 그치지만, 용산문화기를 계승한 기원전 2000-1500년경의 하대 이리두문화에서는 보다 발달된 청동기가 나타나 청동기문화를 갖추게 된다. 이 글에서는 하·상·주 시대에 나타나는 청동기의 특징을 시대별로 살펴보고, 시대가 흐르며 변하는 청동기의 용도 및 성격, 문양 등의 변천과정과 제작기법에 대해서 작성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하하왕조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이름은 이리두문화인데 이는 대표유적인 하남성 언사시 이리두유적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리두문화는 신석기후기의 용산문화를 계승하여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보인다. 신석기시대에는 토기로 제작한 예기를 사용하였으나 하대부터 청동으로 제작한 예기를 사용하게 되며 이리두문화에서 최초의 청동예기가 등장한다. 하대의 청동예기로는 솥의 형태인 정, 술잔인 작과 가, 술 담는 용기인 화 이렇게 4종류의 기형이 확인된다. 청동예기는 당시의 제사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당시 제사는 통치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를 통해 하왕조에는 통치권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하대의 청동기문화가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초기청동기의 단계로 다소 미숙한 기술로 인한 특징들을 보인다. 먼저, 청동합금의 비율이 아직은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동기의 색깔이 매우 옅다. 두 번째로는 기벽이 얇고 가볍다. 세 번째는 청동기의 다리가 원추형으로 뾰족한 형태를 가지거나 얇게 제작되어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네 번째는 청동기에 문양이 거의 시문되지 않는다. 청동기에 문양을 시문하는 것은 보다 발전된 기술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청동삼각문정과 청동술잔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청동삼각문정의 표면에 격자문이 시문되어있으나 토기에서 나타나는 격자문보다 매우 간략하게 시문되었다. 청동삼각문정과 청동술잔 모두 기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데 두 시기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나타난다. 상대 청동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도철문과 매미문이 시문되고, 청동기 표면의 전체에 여백 없이 빽빽하게 소용돌이문양이 시문되는 것이다. 상대의 대표적인 기형으로는 정과 궤가 있는데 식기로 이용되었다.상대에 유행하는 도철문은 양저문화 옥기에 나타나는 수면문 도상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눈과 코, 눈 아래의 원형돌기 형태를 볼 때 상대 도철문이 용산문화기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상대 후기의 청동기는 전기보다 완숙된 형태를 갖는데 두께, 기형, 문양 등 전반적으로 다채롭게 나타난다. 또한 하나의 청동기 안에 다양한 동물문양이 나타나는 특징도 갖는데, 이에 대해 장광직 교수는 “상이 주변의 다른 부족들을 무력이나 또 다른 방식으로 복속시키면서 그 부족이 모셨던 토템신이나 동물정령을 상이 제사지내는 제기에 표현함으로써 복속된 부족간의 결속을 다지기도 하고, 그 부족의 신이 상이 섬겨야 할 신이 된 것. 그럼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한 것”이라고 해석한다.우수문방정에는 도철문에 소의 뿔이 합쳐진 듯한 모습의 우수문과 도철문, 기룡문 등 다양한 소재의 문양들이 나타난다. 상대 전기의 귀면문방정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우수문방정이 훨씬 정교하고 견고하게 제작되며 문양에서도 훨씬 다채로운 소재가 나타난다. 우수문방정은 높이 73cm, 구경 45.4X64.1cm, 무게 110.4kg으로 매우 거대하고 무거운 청동기이다. 다리는 매우 두꺼운 원통형으로 동물의 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도철문청동궤는 청동기 중앙에 도철문이 크게 시문되었고 표면전체에 빈 부분없이 빽빽하게 소용돌이문양이 시문되었다. 구연부에는 삼각형 형태의 매미문, 받침부분에는 기룡문이 나타난다. 이 청동궤에는 “자개”라는 명문이 시문된 것이 눈에 띄는 점인데 청동기를 소유했던 소유주나 제의대상이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 명문은 상대 후기 갑골문자 이외에도 청동기에 문자명문이 새겨져 나타난 최초의 사저문화에서 나타나는 신의 얼굴과 동물정령이 결합된 문양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양은 제사장인 샤먼이 제사를 지내면서 하늘과 소통했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인데 동물정령(샤먼의 조수)의 힘을 빌어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모습이다. 제기로 술잔이 등장하는 이유도 술을 소통의 매개체로 사용하기 때문에 술을 담는 용기와 술잔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문양은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문양으로 볼 수 있다.상대 후기 유적들 가운데에서도 삼성퇴유적은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유물들이 발견되는 곳이다. 금으로 만들어진 금면인두상이 삼성퇴출토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이긴 하지만 청동기로 만들어진 것만 논하자면 입인상과 청동신수를 대표유물로 들 수 있다.입인상은 사람의 전신이 서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상으로 신상으로도 추정된다. 이 상의 얼굴은 동일한 유적지에서 출토된 금면인두상과 매우 흡사한데 눈과 귀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기이한 형태를 띤다. 손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나무 또는 청동막대와 같은 무기를 들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높이는 262cm로 매우 큰데 큰 크기와 무기를 지녔던 것을 보아 이 상은 신전 입구에 세워져 신전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청동신수는 청동으로 된 신성한 나무를 뜻하는데 높이가 거의 4m에 달하는 384cm로 매우 거대하다. 형태를 살펴보면 나뭇가지의 끝에 열매가 달려 있고 열매 옆에는 칼이 매달려 있다. 나무에는 칼 말고도 새가 올라앉은 모습도 보이는데 매우 독특한 조형감을 보인다. 이러한 나무상은 사천성에서만 나타나며, 상대 후 약 1,000년 뒤 한대에 요전수가 제작된다. 삼성퇴문화는 갑자기 사라진 문화이며 한나라 요전수 제작까지의 시간차가 1,000년이 나기 때문에 두 문화 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천성에서만 나타나는 나무상이기에 아마 사천성이라는 고립된 지역에서는 나무를 숭배하는 신앙이 오래 지속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3. 주주나라는 견융족의 침입으로 직접적으로 부착된 돌출장식이 나타나는 특징을 갖는다.기룡문정은 높이 122cm, 구경 83cm, 무게 226kg의 매우 거대한 크기이다. 기룡문정은 앞서 서술했듯이 서주시대에 유행하였던 원형의 정, 동물의 다리형태를 갖추고 있어 상대의 우수문방정과 비교했을 때 변화된 정의 모습을 알 수 있다.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 달린 용을 가리켜 기룡이라 하는데 기룡문정의 표면에 대칭으로 두 마리의 기룡이 시문되었다. 양쪽에 위치한 기룡은 중앙으로 만나는 모습인데 이러한 문양이 도철문을 연상시키며 상대에도 유행하였던 문양 중 하나로, 상대 사부신유에서 이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사부신유와는 시문된 문양이 다르지만 서주시대에 같은 기형인 봉황문유가 있다. 봉황문유는 이름처럼 봉황문이 시문된 청동기인데, 서주 중기에 제작되어 시문되는 방식이 서주 초기와는 다르다. 서주 초기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들이 시문되었지만 중기가 되면 굉장히 형식적인 묘사와 정돈된 형태, 좌우대칭으로 문양이 간결하게 시문된다.도철문준은 술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는데 청동기의 모서리에 날카로운 장식물이 부착된 것을 볼 수 있다. 수형준은 동물의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동물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에 ‘수형’이라 명칭이 붙여졌다. 수형준에는 서주시대에 유행한 문양인 기봉문이 시문되는 것이 아니라 조형으로 부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조형으로 굉장히 독특하면서 화려한 형태를 보인다. 수형준의 몸체에는 도철문이 시문되어 나타나는데 이전시기의 도철문들과는 달리 표현감이 약화되어 도식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조형개부편평화는 수형준처럼 청동기 자체에 동물조각이 직접적으로 부착되어 장식된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화’는 하대의 이리두문화에서부터 나타나는 기형으로 상대에도 인면용신문화와 같은 화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상대의 화와 서주 후기의 화는 차이점을 보인다. 상대에는 기형이 복잡하고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며 청동기 표면에 소용돌이문양이 빽빽하게 시문된 것이 특징이라면 서주 후기에는 깔끔한 기형이고 청동기 표면에는 문양이에 왕실, 가문, 본인의 순서로 내용이 전개된다. 사장은 자신의 행적 및 제작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명문을 길게 새겨 제작한 것이다.서주에서는 청동기를 제작하는데 쓰였던 토제주형틀도 발견되는데 흙으로 만든 거푸집으로 도범이라고도 부른다. 도범을 이용해 청동기 제작하는 기법을 범주법이라 하는데 도범은 외범과 내범으로 구성되어있다. 외범의 내면에 청동기문양이 새겨져 있어 제작방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제작방법을 요약해보자면 먼저 진흙으로 속심을 만들어 그 표면에 문양을 조각한다. 조각된 속심의 표면에 진흙을 붙여서 눌러찍어 외범을 만들어내는데, 외범은 주조할 때 겉틀이 된다. 눌러 찍어낸 외범에는 내측 표면에 문양이 나타나게 되고, 속심은 한 겹 더 얇게 깎아 내범으로 활용된다. 외범과 내범을 합쳐 넣었을 때 생기는 두께차가 곧 청동기의 두께가 된다. 내범과 외범을 합쳐서 청동용액을 주입하고, 냉각이 되면 외범을 부숴서 내범을 꺼낸다. 이 과정에서 동액이 내범과 외범 밖으로 흘러나올 경우 금을 형성하게 되는 데 이러한 금을 ‘범흔’이라 하여 청동기의 진위여부를 가릴 때 중요한 역할로 작용한다. 조형이 복잡한 청동기일 경우 한 번에 동액을 주입하여 완성하기가 불가능하여 이차주조법으로 제작된다. 이는 손잡이 등의 작은 부속품을 먼저 주조한 후에 주조하려는 청동기의 범에 부속품들을 박아 넣고 다시 동액을 주입해 기물의 몸체와 고정시키거나 일체로 주조하는 방법이다.2) 동주동주시대를 통틀어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르는데 동주 전기는 춘추시대, 동주 후기를 전국시대라고 일컫는다.동주 전기 즉, 춘추시대에는 서주시대에 이어 의례용 예기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지만 실용적인 식기, 장식품, 악기 등의 청동예술이 발달된다. 춘추시대 청동기는 파곡문, 절곡문, 반리문 등의 문양이 유행하여 보편적으로 이러한 문양들이 시문되어 나타나며 실납법으로 제작된다. 서주시대까지는 범주법으로 청동기를 제작하였으나 실납법과 같은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정교하고 복잡한 청동기형 다.
중국미술사 레포트- 중국 오대~명대 산수화의 발전과 특징에 대하여Ⅰ. 서론중국회화에서 산수화는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까지 산수화는 인물에 종속된 배경으로만 등장하였고, 수대에 이르러서야 독립된 화목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대에 이르면 산수화가 유행하게 되는데 청록산수로 불리는 채색산수화가 주종을 이루고, 수묵화의 대가라고 칭해지는 왕유가 등장하면서 수묵산수화가 출현하게 된다. 그 후 오대를 거쳐 명대까지 산수화는 꾸준히 그려지게 된다. 중국회화를 대표하는 화목으로 여겨지는 산수화가 오대-송-요-금-원-명까지 어떠한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했는지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오대에는 황실의 후원으로 회화가 활성화되는데, 특히 수묵산수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오대 수묵산수화는 화북산수화와 강남산수화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나며, 지역풍토에 기인한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화북산수화는 높고 험준한 산수를 주로 그리며 형호가 개척하고, 관동과 범관에 의해 계승된다. 형호의 대표작인 를 살펴보면 화북산수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을 보면 중앙에 우뚝 솟은 큰 산이 배치되고 그 좌우에 크고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그야말로 화북산수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웅장한 자연을 화폭에 담고 삼원법이 그대로 드러나는 특징이 드러난다. 오대의 산수화에는 삼원법이 표현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인데, 아래에서 높은 산을 바라보면 보통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마치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산봉우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는 고원과 산들의 사이에 보이는 골짜기로 깊이감을 표현하는 심원, 낮게 펼쳐진 평원을 통해 거리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오대에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라 관념적인 산수화가 유행하는데, 이 작품도 실제 형호가 광려산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광려산을 자연의 웅장함을 담아 관념적으로 그린 것이다. 때문에 사실상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구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그림은 감상자가 방 안에 걸어두고 그림 속 산길을 따라 산 속 의해 계승된다. 동원의 를 살펴보면, 마를 풀어서 늘어뜨린 것 같은 구불구불한 선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선들은 피마준이라고 하는데 산의 부피감과 질량감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된다. 동원은 거연과 함께 강남의 안개자욱한 강과 호수풍경을 표현하는데 아주 탁월했으며 그러한 풍경에 어울리는 여유와 습윤한 회화기법을 만들어내어 강남산수화의 시조라고 불리게 된다. 이 작품은 축으로 그려졌지만, 강남의 넓은 수면과 나지막한 토산을 보여주기에는 권이 적합하여 권으로 그려진 작품들도 있다.오대의 수묵산수화는 북송대가 되면 완벽하게 정착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화북산수화가 크게 성행한다. 북송대 화북산수화를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 이성, 범관, 곽희, 허도녕이 있는데 그 중 이성은 화북산수화의 전형을 만든 화가이다. 이성의 전칭작인 에서 중앙에 우뚝 솟은 험준하고 높은 봉우리,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 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전경의 나무배치 등 화북산수화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점준법과 해조묘법과 같은 준법의 사용도 확인할 수 있다. 우점준법은 바위나 산의 표면 질감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데 빗줄기같은 점들로 괴량감을 표현하고 있어서 우점준법이라고 부른다. 해조묘법은 나뭇가지들이 마치 게의 발톱처럼 뾰족뾰족한 표현을 가리킨다. 곽희의 를 보면, 기본적으로 화북산수화의 특징을 잘 따르고 있으며 삼원법도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새로운 준법이 나타나는데 산봉우리와 바위가 구름의 머리부분을 닮았다. 구름의 머리형태를 닮았다하여 운두준법이라 하며 이러한 준법은 꿈틀거리는 듯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이성과 곽희는 이곽파라는 화풍을 결성하는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치며, 우리나라의 조선초기 그림인 안견 에도 이곽파의 화풍이 나타나게 된다.이성, 범관, 곽희와는 다르게 허도녕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출한 인물로, 대표작으로 가 전해진다. 역시 고원, 평원, 심원으로 구성된 삼원법이 잘 반영돼있고, 화북산수화의 요소를 청록산수화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북송대의 청록산수화는 수묵화의 발전으로 훨씬 자연스러우면서 괴량감있는 자연경관을 보여주며, 특히 는 화려한 청색과 녹색의 채색이 가해져 훨씬 극적으로 보이는 율동감을 느낄 수 있다.북송대의 화북산수는 이성, 범관, 곽희, 허도녕을 거치면서 양식화·체계화되었으나, 북송 말부터 문인산수화가 발전하게 되면서 서서히 퇴조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미불이 쌀알과 같은 미점을 사용한 미법산수화를 창안하게 되는데 후에 남송에서 아들인 미운이 미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다.요대에는 무덤벽화와 풍속도가 유행하여 산수화는 소수만 전해지고 있다. 법고현 엽무대 7호묘에서 출토된 는 요대 초기 작품으로 채색화에서 수묵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초기 화북산수화의 특징인 중앙의 높은 산봉우리, 그 주변을 에워싸는 낮은 산들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오대의 화풍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남송시대에는 이당에 의해 새로운 산수화가 시작된다. 이당은 북송의 화원화가로 활동하다가 북송이 멸망한 뒤에는 남송의 고종을 따라 남하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를 보면, 중앙에 높이 솟은 산과 주변에 높낮이가 다른 산들을 배치한 것에서 화북산수화로 느껴질 수 있지만 산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들을 통해 화북산수화하고는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또한, 화북산수화보다 가까운 근거리의 자연을 펼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의 산등성이는 마치 도끼로 나무를 찍어낸 듯한 표현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준법을 부벽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벽준 중에서도 아주 작은 형태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소부벽준법이라고도 한다. 부벽준법은 후에 마하파가 즐겨 사용하는 준법이 된다. 남송대에 또다른 화풍으로 마하파가 등장하게 된다. 마하파는 마원과 하규의 화풍을 따르는데, 마원의 대표작인 를 보면 화북산수화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압도적인 화북산수화와 달리 서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남송산수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또다른 창시자 하규의 를 보면, 남송시대에 양식화된 그림인 소상팔경도를 확인할 수 있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수가 만나는 지점의 아름다운 경치를 8장면으로 묘사한 그림을 가리키며, 각 그림은 편파구도로 각 계절마다 한 쌍이 마주보는 세트관계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마하파 화풍과 소상팔경도 구성은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때 유행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조백구와 조백숙의 활약으로 청록산수화가 부활하게 된다. 마하파는 소경산수처럼 작은 경치를 보여주었다면 청록산수화는 대관산수로 굽이치는 장대한 화면을 보여 마하파의 산수화풍과는 다른 화풍을 보인다. 조백구의 를 보면, 북송대 왕희맹이 발전시킨 청록산수화를 계승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 마하파에 의해 전경이 강조되다보니 북송시대 청록산수화보다 전경이 강조된 청록산수화로 그려졌다. 이 작품을 통해 남송시대 청록산수화는 북송시대 청록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남송의 시대성을 반영하여 발전시켜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원대는 문인화의 전성시대라 일컫어지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한족 문인들이 관리로 등용되지 않고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은거하거나 서화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원대에는 화원이 육성되지 않아 화원화가에 의한 창작활동이 이뤄지지 않고 대신 유민화가들이 크게 활동하게 된다.원대 문인화의 선구적인 화가로 전선과 조맹부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오흥출신이지만 송 멸망 후의 행보에 차이가 있다. 전선은 오흥의 관리로 지내다가 송 멸망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생활을 한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은거했던 부옥산의 경치를 그린 에는 복고적인 특징들이 나타난다. 원근감과 비례감의 무시와 같은 고졸한 양식을 보여 송대에 유행했던 산수화에 비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교적인 그림을 탈피하고 원시적인 산수화로 돌아가려는 전선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청록산수화를 채용하여 복고적인 화풍을 보임과 동시에 신비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산의 모습에서는 새로운 경향을 경향을 보여준다. 전선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복고적인 경향과 의도적인 고졸함, 비현실성은 이민족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전선의 심상을 조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전선과 다르게 조맹부는 원의 조정에 나아가서 벼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선의 복고적인 문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게 되고, , 와 같은 작품을 남긴다. 조맹부의 는 사실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산수풍경을 보이는데 평화로운 문인의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며, 이러한 청록의 문인화풍 채색산수는 원대 문인산수화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게 된다.조맹부 이후의 원대 화단은 크게 이곽파 화풍과 동거파 화풍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곽파 화풍은 화북산수화를 보다 선호하는 경향으로, 중앙의 높은 산, 전경의 나무, 해조묘법, 우점준, 운두준법의 사용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화가로 당채, 주덕윤, 조지백이 있다. 동거파 화풍은 조맹부가 창안한 복고적 경향의 화풍을 따르며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한다. 이 화풍의 대표적인 화가로 오진, 예찬, 황공망, 왕몽이 있는데 원사대가라고 불리며, 원말에 활동했기 때문에 원말사대가라고도 불린다. 원말기에 이르게 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강한 표현성, 의도적인 불안정감, 반추상화적 화면구성이 그 특징이다. 대표적인 화가로 왕몽을 비롯한 조원, 서분, 방종이 있는데 이들은 명초 홍무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원말의 새로운 사조는 단절되게 된다.명대에 강남지역 문인들이 대거 숙청당하여 원말의 주요한 화가들의 전통이 끊기면서, 이후 명대회화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사회전반에 걸쳐서 복고주의가 나타나고 송대로의 복고사업의 일환으로 화원이 부활하게 된다.명대 전기 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석예와 이재가 있는데, 이들은 북송과 남송의 산수화를 복고하는 화풍을 지닌다. 이재의 대표작인 에서 화면 중앙에 운두준법으로 표현된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해조묘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북송대 이곽파의 특징이나 공간처리에서다.
아시아청년문화 조사-일본 윤리적 소비문화윤리적 소비란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할 때 단순히 개인적 욕구 충족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소비가 환경과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의식하면서 이루어지는 절제된 소비행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윤리적 소비는 소비자가 시장에서 타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제품을 구매하거나,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제품 구매를 거부해 자신의 소비를 통제하는 소비이다. 윤리적 소비는 환경, 인간, 동물의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해 환경은 그린소비, 녹색소비 등 환경의 오염과 자원소모를 최소화하는 친환경 윤리소비이고, 인간은 지속가능한 사회, 공정거래, 로컬구매, 불매운동, 노동인권, 저작권보호와 같은 동시대 인류 및 사회적 책임을 위한 윤리소비이며, 동물관련 윤리소비는 동물복지, 크루얼티프리·비건제품 소비와 같은 동물권을 위한 윤리소비로 분류할 수 있다.윤리적 소비가 이뤄지고, 또 문화로 나타나는 이유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설을 통해 설명된다. 과거 소비자들은 기본적 욕구만 충족되면 끝이었지만 소비환경이 풍요로워지면서 더 높은 차원의 욕구를 추구하도록 변화된 것이다. 소비에서의 욕구를 구분할 때. 기본적 욕구는 합리적 소비이며 높은 차원의 욕구는 윤리적 소비로 설명가능하다. 즉, 소비자는 합리적 소비를 할 때보다 윤리적 소비를 할 때 보다 긍정적인 자아이미지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비사회의 성숙을 통해 나타난다. 과거에 소비자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시작을 지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소비자도 책임 있는 소비, 윤리적 소비행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단순히 가격이나 품질에서의 합리적인 면만을 고려한 선택이 아니라 환경,인권, 동물권 등 윤리적인 면을 고려하는 윤리적 소비를 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대중매체의 관심을 들 수 있다. 최근 TV, 인터넷 뉴스기사 등의 매체들에서 윤리적 소비의 일환인 동물복지 제품 소비, 친환경적 제품 소비, 기부참여 등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이러한 대중매체를 통해 윤리적 소비를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이유로는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의 병폐로 나타난다. 일본정부와 기업은 경제성장에 치중해오면서 환경오염, 빈부격차 등 다양한 사회적 폐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를 지적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재활용 및 절약, 친환경 녹색소비, 지역생산물 소비, 제3세계 생산자를 고려하는 공정무역 제품 소비 등이 제시되었다.이러한 윤리적 소비문화에서 그 주체는 밀레니얼 세대, 즉 청년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어릴 때부터 TV, 컴퓨터,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쉽게 접근하고 사용하며 성장해왔다. 인터넷 사용도가 높은 이들은 그만큼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전달도 많이 이뤄지고, 사회이슈에 대한 노출빈도도 높다. 이러한 배경으로 다른 세대들보다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정보 및 이슈를 더 많이 접하며 윤리적 소비 인식 수준도 높아지게 되어 윤리적 소비의 주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배경과 관련해 관련 정보를 많이 접하고 지식수준이 높을수록 윤리적 소비 인식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실증되기도 했다.일본 청년들에게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배경 말고도 특수한 상황적 배경을 더 갖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일본 내에서는 환경문제, 방사능 노출 식품 안정성 등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윤리적 소비문화가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국민 내에서도 20대의 경우 사회참여에 한창 관심이 높았던 시기에 대지진을 겪었고, 재해지역 봉사활동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환경을 생각하는 윤리적 소비 열풍이 시작된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해석이 있다.일본의 윤리적 소비를 살펴보며 의문점이 들었던 부분은 일본의 문화적 배경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윤리적 소비는 물질주의 성향과 이타주의 성향이 요인으로 작용된다. 그런데 일본은 집단주의 사회이지만 강조되는 집단의 단위가 가족이나 작은 소집단이 아닌 국가나 사회여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은 매우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고, 소비시장에서 양극화, 고급지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성향이 반영되어 윤리적 소비에서 작용되는 이타주의와 반대되는 물질주의적, 개인주의적 소비자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본 대학생의 소비문화와 소비가치에 관한 연구에서, 일본 대학생들이 중요시하는 소비가치로 경제성과 함께 자연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실용성을 시사하는 경제성과 자연과의 조화인 자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비가치 연구에서도 일본 청년들은 소비가치 중 제품의 기본적 기능의 우수성과 내구성, 안정성 등 품질과 관련된 기능적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리적 가치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 또는 그 정신을 나타내는 단어인 ‘모노츠쿠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장인정신에 대해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윤리적 공정을 거친 생산인지 여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합리적인 가격지불을 중요시하지만, 윤리적 공정을 거친 생산인지의 여부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기본 품질의 우수성, 내구성과 자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성향 및 소비가치로, 일본 소비자들은 유행이 지난 제품이더라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면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는 일이 적다. 우수성과 내구성이 부족한 제품은 품질이 낮다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중고라 하더라도 우수성이 높은 브랜드 제품, 장인제품의 수요도가 높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재활용상품을 파는 다양한 유통시장이 매우 발달되어 있고 재활용품 구매에 대한 거부감도 적은 편이다. 이로 인해 환경에 대한 윤리적 소비도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이 이루어짐으로써 청년소비자들에게 환경 및 사회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향상되고 있고, 이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면서 윤리적 소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과거의 소비자들이 스스로의 당위성만을 고려한 소비를 했다면 최근에는 타인을 위한 정당성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윤리적 소비를 선택하고 있다. 청년들은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를 구축해 나가는 주요 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향후 높은 사회적 위치와 더 많은 비율을 갖게 되는 시기에는 윤리적 소비행동의 영향과 파급력은 더욱 커질 것이고, 기업과 정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도도 더 높아질 것이다.최근 한국 내에서도 VEGAN 키워드와 윤리적 소비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소수의 문화와 작은 규모의 시장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비건 및 윤리적 제품시장은 점차 성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풀무원, 오뚜기, 롯데와 같은 대기업에서는 윤리적 소비와 관련한 광고 및 식품을 연이어 기획·출시하고 있으며, 국내 화장품 업계 내에서도 크루얼티프리·동물성 원료 비첨가한 화장품을 출시하는 등 윤리적 소비자를 겨냥한 시장이 최근 1년 사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또한,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활성화되면서 직접적인 기부가 아니더라도 후원기부형태의 윤리적 소비도 늘어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은 후원의 대가로 리워드를 제공받기에 경제적인 부담이 훨씬 적게 다가와 청년세대에서의 참여도가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국내 동향을 보았을 때,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에서의 윤리적 소비와 다소 차이점을 보이지만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유적 답사 레포트- 『삼국유사』를 통해 본 경주 분황사목차Ⅰ. 서론Ⅱ. 본론1. 분황사 연혁2. 분황사 가람배치3. 분황사 조형물(1) 금동약사여래상(2) 원효 소조초상조각(3) 천수대비상 벽화(4) 분황사석정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경주 분황사는 신라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사찰이다. 현재 사찰 경내에는 모전석탑, 약사여래입상, 화쟁국사비부, 석정 등이 남겨져 있고, 경외 남쪽에는 분황사 유구로 알려진 구황동당간지주가 있다.경주 분황사와 관련된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왕 3년(634)에 분황사가 완성되었다는 내용과 열전에 솔거가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상을 그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분황사가 완성된 시기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분황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보다 더 많은 내용이 남겨져 있어서 분황사에 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기본사료로 여겨질 만큼 다양한 내용이 기록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분황사 관련 내용들과 함께 분황사의 연혁과 가람배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조형물들을 파악하고자 한다.Ⅱ. 본론1. 분황사 연혁분황사 창건시기에 관해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조와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아도기라조에서 등장하는데, 두 사료의 내용이 동일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왕 3년(634) 정월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했다“고 기록하였고, 『삼국유사』에서도 “분황사는 전불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서 용궁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덕왕대 갑오년(634)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왕 3년(6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분황사 창건 이후에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승려 자장과 원효가 차례로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자장정률조에서 “정관 17년(643), 선덕왕은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자장을 돌아오게 하여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을 구하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강연토록 한 다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스님들의 모든 규범에 관한 사항을 위임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효불기조에서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등을 지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 진용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그대로 있다”고 한다.분황사에 당대 고승들이 주석하였다는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자장은 왕명으로 주석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분황사가 왕실사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당시 드높았던 분황사의 위상도 확인할 수 있다.신라시대 이후에 분황사와 관련된 기록들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에서도 등장하는데 그 내용들을 종합하여 요약해보면 이렇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왕 3년에 창건되어, 신라의 고승인 자장과 원효가 주석하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다. 그 후 경덕왕 14년에는 약사여래동상을 주성하고, 고려 숙종부터 명종대에는 석탑을 중수하고 원효를 기리는 화쟁국사비를 건립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석탑이 허물어지는 등 사세가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폐사에 이르게 된다. 그 후 17세기 초에는 보광전을 건립하였으나 전성기에 비해 축소된 소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에는 석탑을 보수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 1916년에는 보광전을 보수하였고, 1998년에는 보광전의 해체수리가 실시되었다.2. 분황사 가람배치분황사 창건과 관련된 사료로는 창건 연대만 기록되어 있기에 창건 당시 가람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분황사의 발굴조사를 시행하기 전까지 분황사 가람배치에 대해 일탑가람, 좌전우탑, 탑원과 금당으로 구성된 양원가람 등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1990년부터 8차에 걸친 발굴조사내용을 수록한 발굴조사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창건당시의 가람배치 및 변천과정, 규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분황사 석탑 북쪽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중복된 금당지 유구가 밝혀지는데, 이것으로 금당의 변천과정에 대한 파악이 가능해졌다. 분황사의 가람배치는 창건 이후 3차례에 걸쳐 변천되었는데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에 두고 그 북쪽에 品자형 삼금당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배치였다. 1차중건 가람에서는 창건 삼금당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대형 일금당을 배치하여 1탑1금당식으로 바뀌었다. 2차중건 이후에는 금당의 방향이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고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었다. 분황사 경외의 남쪽에 있는 구황동당간지주는 분황사 전성기의 유구로, 경역이 축소된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분황사 창건가람은 탑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 서쪽에 1개씩 법당을 배치한 옛 고구려지역의 品자형 가람배치와 비슷한 1탑3금당 형식이다. 발굴조사에서 3금당과 석탑을 제외하고는 창건과 관련된 전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분황사지 발굴조사보고서 Ⅱ』에서는 분황사 창건가람은 석탑과 삼금당만 건립한 미완성 가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덕왕대 분황사에 주석한 자장과 문무왕대 분황사에서 화엄소를 지었던 원효는 금당과 석탑 이외에 아무런 부대시설이 없었던 미완성된 가람에서 주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1차중건 가람에서는 기존의 금당을 해체하고 새롭게 대형 금당을 조성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황룡사종·분황사약사·봉덕사종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경덕왕 14년(755)에 “본피부의 강고내말이 무게 30만6천7백근의 약사여래 동상을 주성하였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 거대한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금당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기존의 금당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금당을 중건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을 통해 品자형의 3금당은 창건 이후 경덕왕 14년 이전까지 존속하고 1차중건 금당은 경덕왕 14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유구상 금당 이외에도 강당, 중문, 남회랑 등이 건립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경역을 대폭 확장하여 가람배치의 전모를 갖추게 되었다.유구상으로 2차중건 가람에서 보이는 금당은 면적이 1차중건 면적의 22%수준으로 대폭 축소되고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어 건립된다. 이러한 가람배치 형식의 급변에 대해 『분황사 발굴조사보고서 Ⅱ』에서는 대형금당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건물 방향까지 바뀌었다는 것은 어떠한 사유에 의하여 폐사에 버금갈 정도로 법등의 공백이 장기화된 이후, 기존 분황사 가람과는 그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소규모 금당을 중건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현재의 분황사 금당은 변천과정상 3차중건 가람에 해당한다. 2차중건 금당에서 3차중건 금당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도 금당 규모의 축소 등 사세가 약해지는 경향을 보이지만, 건물의 방향과 중심축은 이전 가람과 동일하게 유지하는 선에서 규모만 줄여 중건하였다.3. 분황사의 조형물『삼국유사』에는 금동약사여래상, 원효의 소조초상조각, 솔거가 그렸다고 하는 좌전 북벽의 천수대비상 벽화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분황사의 창건가람에 모전석탑이 존재하였으나 이와 관련된 사료가 나타나지 않아 제외하였다.(1) 금동약사여래상경덕왕 14년(755)에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상이 조성되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1차중건 가람에서 살펴본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황룡사종·분황사약사·봉덕사종조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기록을 통해 약사상 주조에 30여만 근에 달하는 동이 소요되었고, 불상을 제작한 장인의 이름이 본피부 강고내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약사여래상에 사용된 동의 무게는 황룡사 장육존상 제작에 사용한 양의 9배에 달할 정도로 매우 거대한 불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금당보다 더 큰 규모의 금당이 건립되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동·서 두 법당이 중앙법당으로 흡수된 1차중건 가람이 나타난 것이다. 30여만 근에 달하는 동으로 제작한 거대한 크기의 약사상을 조성하게 된 배경 또한 흥미를 자아내는데 이 상이 조성되던 경덕왕 14년 봄에 기근과 전염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조성배경에 어려운 상황을 약사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 불상은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고,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입상과는 다른 불상이다.(2) 원효 소조초상조각앞서 분황사 연혁에서 언급하였던 『삼국유사』 「의해」 제5 원효불기조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원효 사후에 아들인 설총은 화장한 원효의 유해와 흙을 섞어서 소조상을 만들었다. 승려가 입적하면 화장하여 그 유해를 흙과 섞어 초상조각을 만드는 것은 중국에서 행해지던 관습이었는데, 이와 같은 초상조각 기법이 신라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에 봉안되어 있던 원효의 소조초상은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홀연히 고개를 돌렸다하여 ‘회고상’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 상이 13세기 말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까지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분황에서 봉안되었던 원효의 초상은 원효가 생전에 파계하여 거사의 신분으로 살다가 입적한 점을 고려할 때 거사가 된 원효를 표현한 거사형 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의 초상조각기법이 나타난 것을 보아 중국 남북조시대 이래 유행했던 유마거사상의 이미지를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