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중들은 개인적인 목표달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사회적인 참여도가 낮아지고,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조화시킬 수 있는 필요성을 상실해버렸다. 또한 자신의 권리를 사유재산으로 간주하고 그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극단적 개인주의를 말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두 번째로 불평등의 심화이다. 정치적 평등의 가치를 훼손함은 시민 자치에 필요한 공동체 의식의 형성을 저해하고 폭동과 진압의 사회적 악순환을 초래한다. 즉,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폭력과 독재정치를 낳아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셋째로 정치참여의 저조이다. 공공문제에 대한 시민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여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민의 심의를 위한 공간과 제도가 보장되어야 한다. 네 번째로 관객민주주의의 대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당의 주체화, 능동화를 낳는 반면 국민의 수동화, 객체화를 촉진시킨다. 소수의 권력 엘리트에 의한 정치의 일상화, 매스미디어에 의한 대중 조작의 용이성으로 인하여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다섯 번째, 의회의 위상 및 역할저하이다. 이것은 행정부가 강한 대통령제를 이유로 들 수 있다. 행정부의 입법 기관화, 압력 단체의 역할 강화, 강대한 관료기구와 관료정치로 인하여 의회의 역할이 저하된다. 한국에서 점점 청와대 중심의 정치로 거수기 국회라고 흔히 말한다. 행정부의 권한이 점점 강해지면서 삼권분립의 오작동이나타난다. 여섯째로 정당의 기능 정지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당의 존재로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내적, 외적 요인에 의해 정당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어 대의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먼저 내적 요인에는 정당 조직회 확대로 당내 민주주의가 후퇴된다. 당내 규율 강화로 정당의 통일성과 활동의 효율성 높아지지만 당원 개개로의 자유로운 정당 활동이 제한되어 정당이탈, 정당 활동의 의무감이 줄어든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이해관계 반영보다 인물 중심으로 반영하여 간부정당으로 변질해가고 있고 정당은 하향적으로 운영되어 상향식 공천제도의 미발달로 일반당원들의 영향력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 미발달로 의견 수렴절차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당론 결정을 위한 논의장을 쉽게 찾을 수 없어 국가에 도움되는 아이디어, 정책들이 나오지 않고 능력 갖춘 인물 정치에 진출이 어려워지게 된다. 다음으로 정당의 외적 요인에는 국민의 가치관 변화에도 정당의 부적절한 대응, 이익집단의 활성화로 기성정당에 대한 기대감 저하, 당원의 감소가 있다. 정당이 유권자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정당 내지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고 권력만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밀실정치와 음모를 일삼아 국민의 기대와 신뢰감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의 기능과 역할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일곱 번째, 의미를 상실한 선거이다. 오늘날, 선거는 특수 이익집단과 부유한 사람들이 선거운동 및 과정을 지배하는 경향, 선거 캠페인은 이미지 조작의 장으로 변질되어 공공정책을 둘러싼 심의 불가능, 선거결과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중요성 상실로 낮은 투표율과 높은 사표율을 가져온다.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민운동인 매니페스토가 등장하였다. 이는 유권자의 감시활동이 필수적이고 정책 선택의 선거전을 유도하며 선거 후 정책 공약의 이행 여부를 검증한다. 여덟 번째로 행정국가의 대두이다. 이는 행정부의 역할확대와 조직의 비대화, 입법국가의 행정국가화, 행정부와 유력한 이익집단의 결합에 의한 정책 결정 시스템인 코포라티즘의 대두를 말한다. 결국 정책 결정과정에서 의회와 정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홉 번째, 포퓰리즘의 대두이다. 포퓰리즘은 특권 엘리트와 대립되는 보통 인민의 이해관심, 문화적 특성, 자발적 감성 등을 조장하는 정치적 운동이다. 이의 정치방식은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와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이다. 합리적인 절차 대신에 이미지와 인기에 호소하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편승하여 대중을 동원하고자 한다. 이에 바람의 정치라고 불리며 지속적이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정치적인 현상으로 끝난다. 또한 포퓰리즘은 선악이원론에 의한 문제설정과 반대세력을 공격하는 분노의 정치를 하고, 위로부터의 정치적 지지를 동원한다. 이러한 정치가 반복되면 인민 주권이 어려워지고 탈정치화가 초래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해관계의 정치이지만 포퓰리즘의 만연이 의회 정치 수준에서의 정당의 미작동을 낳는다. 즉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부터 민주주의가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강의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이 강의를 듣는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첫째로 인민의 지배를 핵심사상으로 한다. 민주주의의 어원적 정의를 살펴보면 demos(인민) + kratia(지배,권력)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에서는 인민의 지배가 가장 중요한 핵심사상이다. 인민의 지배는 인민이 최고의 권력을 소유하고 인민의 의지에 기초하여 통치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민이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변경하는 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그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인민의 지배가 실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패러독스 즉, 인민이 정치권력의 주체인 동시에 지배의 대상이라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 민주주의는 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인민주권), 인민이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참여할 수 있다(인민의 정치 관여 보장), 인민의 의지와 이익과 관련하여 통치자는 인민에게 책임을 져야한다(인민의 의사 및 이익 보호)는 내용을 포함한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개념을 정리하였으나 민주주의에 대한 적용범위의 광범위성과 내용의 모호성 때문에 과거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놓고 많은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의 본질에 관한 논쟁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도 및 절차로 파악할 것인가와 이념 및 내용으로 파악할 것인가로 나뉘었다. 전자를 주장하는 견해는 인민의 정치에의 관여를 주장하고, 후자를 주장하는 견해는 인민의 의사 및 이익의 보호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견해에서 서로 주장하는 것이 인민의 지배 내용 중의 요소들이다. 즉,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내용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도 및 절차로 파악하는 경우와 이념 및 내용으로 파악하는 경우에서 어느 한 쪽을 부정할 수 없다. 제도와 절차, 이념과 내용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불가분의 요소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를 논리적으로 파악할 것인가와 역사적 변화에 따라 파악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펼쳐졌다. 전자에서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부형태, 제도적 장치 그리고 가치와 이데올로기로서 파악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민주주의는 방어적 민주주의, 발전적 민주주의, 균형적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의 순으로 역사적 변천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놓고 많은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자유의 관념을 절대시하는 견해와 평등의 관념을 절대시하는 견해로 나뉘었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소극적 자유와 자신의 자율적, 자각적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적극적 자유가 있고, 평등은 인종, 성별, 신조, 사회적 신분의 차이 등으로 인한 차별을 배제하는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이 있다. 라스키 학자가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유를 실현할 수 없고, 어느 정도의 자유가 없으면 평등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였듯이 자유는 평등에 의존하고 평등은 자유에 의존하므로 자유와 평등을 상대적인 관념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도 대립관계가 존재한다. 여기서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역사적 대립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적 사회질서와 절대주의적 정치질서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저항 과정에서 소유권의 보장과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계약의 보장을 요구하면서 나타난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는 시민사회 내부의 계급대립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도전은 자본주의 발달로 노동자계급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의 대립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자유와 평등,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대립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양립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많은 국가들이 1970년대~1980년대에 걸쳐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속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자유화와 민주화라는 두 축을 사용하여 독재, 자유화된 독재체제, 제한된 정치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 순으로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화의 이행 과정 속의 조건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세력 간의 합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통해 평화로운 민주화 이행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여론의 형성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전에는 많은 후보자들이 TV나 신문, 라디오, 잡지 등 많은 영역에서 선거유세가 바탕이 되는 여론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 여론을 통해 정치의 현 상황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매스미디어는 이처럼 여론형성에 강력하고 우리의 사고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앞으로 서평을 쓰면서 많이 나올 용어가 바로 매스미디어이다. 많은 국가들이 정치에 매스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데 그 중 일본에서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정치전략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한 총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를 포퓰리즘 이라는 분석틀을 통해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기법, 정치전개, 지지동원, 그리고 성공요인 등을 간략하게 정리하겠다.고이즈미의 정치는 자민당 정치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속 위기감을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대중들의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 및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된 불만에 기인하여 개혁자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서서 포퓰리즘 이라는 정치기법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절차 대신 이미지 및 인기에 호소하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편승하여 대중을 동원하는 동시에 선악이원론에 의한 문제설정과 기득권층을 저항하면서 적대세력을 공격하는 분노의 정치에 기초하였다. 정치현상에서 포퓰리즘을 정의 내리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퓰리즘이란 정치지도자가 의회제도 및 절차를 우회하여 대중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그들을 직접 조종하거나 동원하는 정치방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포퓰리즘의 정의에서 그렇듯이 고이즈미는 총재 당선 전,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기성 정치에 반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또한 포퓰리즘에서 정치와의 본질적 결합에서 없어서는 안될 매스미디어를 활용하여 홍보하는 전략, 반자민?반파벌 정치를 표방하는 선거 전략, 기성의 자민당 이익정치에 대한 과감한 비판 이러한 전략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어 고이즈미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될 수 있었다.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 이후 반자민 정치를 위해 자민당의 체질개선을 위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먼저 파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자민당 조직원리에 대한 도전을 보이고, 경제재정자문회의를 활용하여 정책결정의 주도권을 종래의 정무조사회와 족의원으로부터 관저와 내각으로 가져와 총리주도체제를 확립하고, 또한 국회에서 기성의 상식을 뒤집는 답변방식, 방송 및 편집을 고려한 매스미디어에 대한 대응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2001년 5월 7일 고이즈미는 소신표명연설에서 구조개혁 없이 경기 회복 없음을 표방하며 구조개혁 추진으로 최우선적인 과제인 우정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참의원에서 총리의 권력 강화에 대한 반대세력의 불안과 자민당 국회의원에 대한 다이주의 회의 압력, 참의원의 존재가치 저하에 대한 반발로 부결되었다. 그 이후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단행하였고 제 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퇴진하겠다는 우정공사의 민영화에 대한 불퇴전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2005년 9월 11일 제 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게 되어 자민당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에 자민당 단독지배 체제의 기반을 재구축하였다. 총선거에서 고이즈미는 기성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대중과 무당파층의 기분에 동조한 개혁자의 이미지, 매스미디어를 통해 호소력 있는 이미지 전달, 정치쟁점의 단순화(선악이원론)와 양극화,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홍보 전략 등으로 자민당의 당선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이즈미가 이러한 과정을 밟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당 밖의 힘이었다. 국민, 무당파 층, 그리고 매스미디어의 힘...고이즈미는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매스미디어에 대한 호소였다. 고이즈미는 매스미디어를 정치와 동일시하고 매스미디어의 힘을 권력의 부양력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고이즈미가 이처럼 매스미디어를 활용하면서 긍정적인 기폭제가 되는 장점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쇼-비지니스화를 초래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직설적 표현에 있어서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는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 제공이 아닌 아는 듯한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이즈미는 개혁의 시작이 우정공사의 민영화라고 주장하면서 대중들이 자주 보는 미디어를 통해 우정공사의 민영화를 둘러싼 정치쟁점과 본질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지가 단순화되고 편향된 사실에 기초하고 있으며 대중의 사고정지와 정치적 쟁점의 맹목화를 초래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이즈미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겉으로만 보았을 때 고이즈미는 우리 사회에서도 필요한 개혁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개념을 바탕을 둔 유권자의 능동적인 정치의 참여를 방해하고 대중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매스미디어에서 도출된 이미지와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동적인 정치에 이끌리게 된다. 이를 흔히 극장 민주주의라고 불리운다. 점차 미디어가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정치의 참여가 필요하다. 요즘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매스미디어에서 한 층 발전된 소셜미디어를 활용하여 즉, SNS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으로 뉴스를 말하거나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에 그 뉴스만 보더라도 정치의 모든 면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한 사람의 관점이 나의 사고형성에 영향을 주어 더 이상 정치의 주도적인 참여자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속한 대중들은 정치가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셈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죄수처럼 말이다. 벽의 그림자를 실재라고 생각하고 그림자의 본체를 보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림자쪽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화면 뒤에는 어제도, 오늘도, 방금 몇 시간 전에도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지만 그의 깊은 뜻을 깨닫고 우리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정말로 유권자들을 대표하여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그것을 정치에 반영하여 기본권 보장, 공공이익 증진, 부정부패 방지, 독재화 방지의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오늘날 시대가 발전할수록 우리에게는 많은 과제가 남겨지고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충족되어야 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올바른 유권자의 역할이다.
의회제 민주주의에서 국민대중의 정당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가 직접적으로 표명되는 것이 선거이고, 그 결과는 정당 및 정당체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선거제도는 정당 득표의 급격한 변화와 정당체계 재편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따라서 선거제도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정당들에 있어 유리함과 불리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지금부터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선거제도가 정당체계에 어떤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와 일본의 세가지 중의원 선거제도의 성립과 개혁동향을 시계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선거제도와 정당체계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첫 번째로 듀베르제는 소선거구제가 양당제와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비례대표제는 정당분립과 정치적 불안을 조장한다고 말하면서 선거제도는 정당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역으로 립셋과 로칸은 정당의 등장배경과 배열구조 또한 어떤 쟁점을 두고 다른 정당과 경쟁하는 것인가 하는 정당에 대해 거시적 초점을 바탕으로 선거제도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셋째로 보그다노는 로칸을 비롯한 분석을 비판하며 사회변동에 따라 선거제도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선거제도라도 사회변동에 의해 전혀 상이한 정당체계가 초래되는 경향이 있고 시대와 개별국가마다 선거제도가 미치는 영향은 다르다고 논의한다. 이들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선거제도와 정당체계 사이에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존재하여 어떠한 인과관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다.다음으로 일본의 중의원 선거제도의 성립과 개혁동향에 대해 살펴보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GHQ(연합국총사령부)에 의해 채택된 대선거구제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1947년 GHQ는 불간섭의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이에 자유당 의원 제안에 의한 중선거구제 안이 제출되었고 야당의 반대에 맞서 자유?진보?연립여당에 의해 3월 31일 중선거구제 안이 가결되었다. 중선거구제는 대표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고 한 정당으로의 과도한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는데 적합한 제도이다. 그러나 자민당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초래하는 요인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중선거구제는 네가지 부정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이 선거제도는 한 선거구에서 3~5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한 정당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기 위해 후보자를 복수로 공천할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해 동일정당 내 경쟁이 파벌 형성과 파벌 대립을 가져온다. 둘째로 중선거구제는 정당정책에 대한 지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 개인으로 하여금 정부 보조금 획득에 의한 집표행위를 불가피하게 하여 선거에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다. 이는 정치부패의 일상화를 가져온다. 셋째로 당 중앙 권력의 분산화를 초래한다. 자당 후보와의 경쟁이 더 치열한 중선거구제 하에서 대다수 후보들이 자신의 선거기반을 상당 정도 독자적으로 확립함으로써 자민당 내 권력구조는 상당히 분산적인 경향을 보였다. 넷째로 여야당 간 정권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중선거구제 하에서 야당은 많은 득표를 하더라도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만큼의 후보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선거제도는 1993년까지 중선거구제였지만 1993년 8월 성립한 호소카와 모리히로 연립내각과 자민당 간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1994년 1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을 잠시보면 자민당은 비례대표제가 항상 불안정한 정권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와 소선거구 비례대표 연용제의 도입을 거부해왔다. 중간에 도입을 추진하였어도 자당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내 격렬한 대립을 무릅쓰고 진행된 것이다. 제40회 총선거를 거치면서 사키가케?일본신당은 자민당, 비자민 5당과 거리를 두면서 정권형성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는데 사키가케?일본신당은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변경하는 것으로 사회당과 자민당의 결단을 요구하였고 이에 사회당은 자민당과의 대결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민당은 승인하였지만 호소카와는 자민당과의 연립정권 형성을 반대하여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이후로 자민당과 호소카와 연립내각의 타협으로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변경된 것이다. 이 후에도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선거제도 개혁에 관해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맞서고 있었지만 타협을 통해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함에 있어서 각 정당에겐 커다란 희생이 요구되어 진다. 이처럼 중의원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개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정치개혁 관련4법안의 성립과 관련하여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새로운 선거제도는 법안의 핵심부분에서 자민당의 분열을 우려하여 자민당 안에 양보한 것이 되었다. 이로 자민당에게 유리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새로운 선거제도 개혁을 둘러싼 사회당 내 분열과 딜레마였다. 사회당은 소선거구제와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의 도입에 반대했지만 연립여당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였다. 이는 사회당 내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셋째로 각 정당은 각자에게 유리한 선거제도를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새로운 선거제도의 도입에 찬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시대의 열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일본의 선거제도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두가지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집권정당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경우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추진한 두 흐름이 있었다. 자당에게 유리한 선거제도로 개혁하기 위해 다른 정당과 대립할 수 밖에 없으며 당 내에서도 파벌간의 대립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제주도 4,3사건은 미군정하에서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주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었다는 점은,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된 사실이고, 또한 정부도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해 4,3사건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을 볼 때에서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그 당시 기록만을 보더라도 4,3사건 전 과정을 통해 사망한 군인119명, 경찰 122명임에 반하여 제주도 주민은 1만 5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희생자수에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다. 그것은 우월한 물리력을 바탕으로 한 어느 일방에 의한 대량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주한미군 사령부의 ‘제주도 사건 종합보고서’를 보더라도 앞에서 말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당시 상황을 초기에 파악하고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군정은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찰도 사건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릴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다가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토초작전에 끼어든 군 수뇌부들까지도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풀어가려고 생각치 않고 각자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폭동진압의 책임자들은 같은 민족인 제주도민을 상대로 인간으로선 감히 행할 수 없는 잔학한 살상에 주력했다.우리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살아 온 발자취이며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 역사에는 희열과 비탄, 평화와 시련이 얽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난날의 영화를 감상적으로 즐기고 시련을 생각하여 분개하고자 함에 있지 않다.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함에 있다 할 것이다. 즉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바르게 처리할 능실정과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경찰의 부정부패 행위는 도민들의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고, 끝내 ‘3?1 발포사건’과 ‘3?10 관민총파업’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과 군정경찰은 실정과 실책에 대한 유감 표명 없이 도민의 일련의 저항들을 폭동시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응원경찰과 서청단원들을 대거 투입해 도민들에게 백색테러를 가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약 2천 5백 명이 구금되었고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것은 백색테러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따라서 무장자위대의 봉기는 도민들을 국가폭력과 테러단에 의한 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김익렬 9연대장 또한 ‘밀수 피의자들과 그 가족들이 경찰에 구치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한 실력 행동인 동시에 원한에 대한 보복’으로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김익렬, 1994b: 297).그리고 이 사건은 ‘피의자 가족 구출과 원한에 대한 보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선?단정 반대와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열망을 선언하기 위해 면밀한 계획 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일시에 11개 지서를 습격하고 ‘호소문’을 미리 준비한 점, 4월 15일 제주도당부대회에서 ‘4?3’을 단선?단정반대 투쟁으로 규정하고,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모색하면서 기존의 무장자위대 체제를 ‘인민유격대’로 재편한 점 등은 제주 4?3 사건이 조직적으로 주도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주체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급진적인 강경 소장파였다. 양정심(1995)과 강정구(1999), 서중석(1999)의 연구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한 1948년 ‘2월 회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연구들과 자료들을 검토하면 당시 강경 소장파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무장투쟁을 결정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도와 이에 호응한 도민들이 분단을 가져오는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가 곧 남한을 거부하고 북한을 었는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공식적인 역사관은 북한→남로당 중앙당→남로당 제주도위원회→무장투쟁의 도식으로 ‘4?3’을 친북적인 ‘공산폭동’으로 조작?왜곡했기 때문이다. 만일 제주도위원회의 독자감행설이 진실이라면, ‘4?3’은 ‘공산폭동’이 아니라 앞서 밝힌 ‘4?3’의 복잡한 원인과 배경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과 결합되어 자발적으로 전개된 ‘억압에 저항하는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1990년대 한국현대사의 연구 성과들은 ‘4?3’이 북한의 사주는 고사하고 남로당 중앙의 지령설조차 거짓된 사실이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냈다. 박명림(1988)과 메릴은 석사학위 논문에서 4월 3일의 봉기가 제주도위원회의 주도하에 독자적으로 감행되었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메릴은 제민일보 4?3 취재반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조사 결론으로는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고 명백하게 밝혔다. 관변 자료를 제외하고 ‘남로당 중앙의 지령설’을 주장한 문건은 유일하게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이 쓴 박헌영 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 2쪽에 걸쳐 ‘4?3’을 다루고 있고, 근거 없는 오류가 일곱 개나 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박갑동을 직접 취재한 결과 ‘중앙지령설’은 잘못 기술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 당시 남로당의 노선이 전면적인 비합법 무력투쟁 단계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제민일보 4?3 취재반, 1994b: 45~8, 389~404).그렇다면 왜 당시 토벌대측이나 관변 자료에서는 계속 ‘중앙지령설’을 유포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과잉진압으로 빚어진 수많은 인명피해와 참혹한 학살 실상을 덮기 위해 ‘중앙지령설’과 ‘국제공산주의 사주설’을 유포해 초점을 흐리게 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Ⅲ.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인식제주주민들은 여러 방식으로 제주 4?3사건을 설명하고 있었다. ‘의견형’, ‘역사평가형’, ‘원인분석형’, ‘희생론’, ‘가해피해론’, ‘이념?갈등형’, ‘대립형’, ‘과정형’ 등으로 이 사건을 기억었지만, 체험자들의 사건 경험과 그 이후의 삶이 다음 세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무엇보다 체험자들이 오랫동안 되새겨왔던 억눌린 기억들을 더 표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전달되어 기억의 재생과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억의 복원은 주민들이 사건을 더 잘 이해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그리고 체험자나 일반인 등 보통사람들의 기억들을 역사화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주민들은 역사가와 다르게 사건을 정의하고 있고, 역사로 선택되지 않는 내용들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기억방식과 내용들이 역사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4?3 기념공원이나 박물관을 건립할 때 주민들의 기억들이 기억을 넘어 역사나 기념의 차원으로 전환되도록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러한 기억의 복원과 역사화 작업과 동시에 기억의 전파도 필요하다. 제주 4?3사건은 제주주민만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지역사가 아니라 냉전시대의 국가폭력으로서 우리나라 전 지역의 과거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대해 공식사과하고, 또 진상보고서가 승인되어 새로운 공식역사가 탄생되고 있다. 4?3사건이 더 이상 제주주민만의 고통이나 저항의 역사로 남을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과 젊은 세대에게도 ‘기억할 만한’ 사건으로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Ⅳ.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특별법‘4?3’ 특별법은 제정 당시부터 매우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수구집단의 집요한 훼방에 의해 그 법조차도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도 않다.이제 민주주의를 한 단계 제고시키는 새로운 참여정부가 탄생되었다. 그에 걸맞게 새 정부는 ‘4?3’의 진실을 밝히고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우선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했던 사항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 3’이라는 역사기호에는 생존권 수호를 위한 방어적 저항운동으로서의 의미와 반민주?반통일 세력에 의한 반인륜적 양민학살 사건이라는 두 가지 뜻이 함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본래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인권과 평화운동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하는 운동이기도 하였다.‘4?3’ 진상규명 운동은 숨겨지고 왜곡된 반인륜적인 국가범죄를 고발하고 진실을 밝힘으로써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인권과 생명은 지고한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인권과 평화운동이라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획을 그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질을 한 단계 제고시켰다고 할 수 있다.제주는 자타가 인정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조그마한 한 지역 안에 너그럽고 포근하게 보이는 높은 산이 있고 검푸른 바다가 있다. 올망졸망한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으며 나지막한 집들이 평화스럽게 안좌하여 있다. 또한 자연과 더불어 상생하는 온순한 사람들이 있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 엄청난 불행과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왜곡되고 굴절된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몸으로 가슴으로 제주인은 평화를 갈망하고 그 정신을 체득하여 왔다. 전쟁과 폭력, 억압과 살상을 거부하면서 과거의 불행과 고통을 평화의 패러다임으로 승화시켜 가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들은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드러날까 하여 혹은 거짓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이 두려운지, 아니면 자그마한 변방의 섬 제주가 만만하게 생각되어서인지 ‘4?3’을 타깃으로 삼아 집요하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업을 훼방 놓으면서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누군가가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보다 그 후에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잘못된 세상에서 특권을 누려 왔던 자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역사의 추를 거꾸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특별법의 제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 인권신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