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지하의 시 속 불교적 세계관 내용과 특성김지하의 시 세계는 근본적으로 “농경 공동체의 생명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에는 농경 공동체에 반하는 독재, 억압, 폭력과의 투쟁으로 표현되었고 이후부터는 잠복되었던 농경 공동체 생명의식이 불교적 세계관으로 승화되어 겉으로 표현됩니다.바로「애린」연작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으로 승화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애린」연작은 소를 찾아가는 불교의 「심우도」와 병치관계를 이루는 작품입니다.먼저, 김지하 시인의 초기작품 「황톳길」,「녹두꽃」,「서울역」을 보면 매우 남성적이고 투쟁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삶의 의지가 남성적인 어조로 표현되며 시의 내용에서 붕괴되어가는 농경사회의 비극적인 모습과 1960, 70년대의 공업화 개발 독재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애린」에 이르러서는 남성적인 공격성과 대립이 약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계기는 독재에 맞서 투옥되었던 감옥에서 철장 사이로 피어나는 생명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그 풀씨에서 무궁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존재를 느끼고 자아를 발견합니다. ‘감방’이라는 감금된 폭력과 압박의 현장에서 풀씨라는 생명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며 “감방 vs 나” 라는 대립구조가 아닌 감방 속에서 생명을 틔우는 풀씨가 곧 자아임을 확인하며 그의 세계관은 담과 벽이 없는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게 됩니다.즉, 대립관계에서 나타났던 농경 공동체의 생명의식이 스스로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승화되는 것입니다.이러한 사고는 「애린」연작에서 시작되며, 「애린」연작은 불교의 「심우도」와 병치 관계를 이루며 표현됩니다.시 「애린」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카바이트 불꽃이 애린의 부재를 나타내며 동시에 현존을 암시합니다. 애린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시에서 드러나며 애린연작의 마지막 50에서는 ‘애린 나.’라고 끝을 맺습니다.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헤매던 애린은 결국 ‘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심우도」의 결론과 매우 닮아있습니다.「심우도」는 소로 표현되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목동의 이야기를 그린 곡암선사의 이야기입니다. 「심우도」의 ‘소’는 「애린」연작에서 ‘애린’으로 치환되어 노래됩니다. 심우도에서 목동이 찾아 헤매는 진리는 결국 나 자신인데 여기서 “나”는 있으면서도 없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입니다. 나라는 것은 조상, 그리고 먹고 마시는 물과 공기고 죽어 흙으로 돌아가니 또 그 흙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순간순간의 있음이지 나 자신이 돌덩어리 같은 물건, 실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나, 나의 본성을 표상한 소는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심우도」에서 내 마음속에 있다 답한 것과 같이 김지하의 「애린」연작에서도 동일한 물음과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나라는 존재가 바로 우주의 일부임과 동시에 우주 그 자체, 우주의 주체임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애린」연작을 통해 답을 구하고 김지하 시인의 세계관은 우주 공동체적으로 발전하며 생태적 상상으로 본격화됩니다.이후 작품인 「별밭을 우러르며」,「중심의 괴로움」, 「화개」등으로 생태적 상상력이 전면에 나타납니다.생태적 상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어 상호 의존적이라는, 따라서 상대를 소진하고 파괴하면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법계 연기론”에 입각한 불교 생태학과 뜻을 같이합니다.그의 시 「새봄 8」은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이므로 영원하고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완전한 소멸도 완전한 새로움도 없다는 법계 연기론에 바탕을 둡니다.나는 지구가 있기에 존재하고, 지구는 우주의 폭발로 발생한 것이니 내 나이는 삼십오억 살이고 또 백오십억 살입니다. 또한, 끝임 없이 죽으며 죽지 않는 삶이라 표현하며 나를, 풀 한 포기를 사랑한다 말합니다. 풀이, 공기가, 물이, 지구가 곧 “나”인 것입니다.“법계 연기론”의 세계의식은 김지하 시인의 시적 세계 기반이었던 “농경 공동체 생명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지하 시인은 「애린」연작으로 불교의 법계 연기론에 입각한 생태주의적 상상을 노래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통해 그의 세계관의 근간인 “농경 공동체의 생명의식”이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확대되고 고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목: 감상문1. 조용필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많이 좋아하셨다. 신세대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나에게 조용필의 곡을 몇 곡 추천하시며 가사를 한 번 들어보라고, 얼마나 시적이냐 감탄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저 어른들의 지나간 유행가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최근 조용필이 낸 ‘바운스’라는 곡을 들었을 때 왜 이 사람을 ‘가왕’이라고 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 음악을 해오면서도 감각을 잃지 않는, 그러면서 자신의 색 또한 놓지 않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몹시 고맙게 느껴졌다.그러다가 [대중문화와 영웅신화]에서 조용필 편을 읽고 다시 한 번 그에 대해 감탄 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안목에 대해서도 감탄 했다.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형의 기타에 호기심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다음 1968년에는 미8군 기지의 클럽에서 컨트리 웨스턴 그룹 를 결성해 음악 활동의 조직화에 눈을 떴고, 그 후 라는 유명한 그룹에 스카우트 되어 1년 반 동안 활동했다.그의 집안에는 특별히 음악적 재능을 보인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어른들은 음악 활동에 대한 반대가 심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반대에 대한 반항심이 음악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하지만 단순한 반항심과 호기심에서 멈췄다면 그는 지금의 가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별명 중 하나가 ‘조방범’이라고 하는데, 일할 때 열정적으로 잠을 자지 않는 그를 보고 주변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주변에서 그런 별명을 지어줬다는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가지고 있는 그것이 보통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루 이틀 잠을 자지 않았다고 그러한 별명이 지어질 것 같지는 않다.긴 세월 음악 활동을 하며 낸 곡은 아마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곡을 열 곡 고르라고 하면 참 어렵다고 대답하는데, 거기서 나온 그의 답도 어딘지 모르게 곡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느껴진다.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정할 수 있는 곡이 다르다 향기를 뿜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그가 말하는 좋은 가수의 조건도 매우 인상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창력, 그다음으로는 음악성 그리고 ‘행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가요계의 흐름을 보면 가창력이 뒷전인 가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수에게는 가창력이 으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묻고 따질 필요도 없는 사실인데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는 현재가 좀 안타깝다. 다음으로 필요한 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을 한다면 음악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갖추더라도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큰 빛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앞의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추지 않은 채 ‘행운’에만 의지한다면 그 빛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그래 왔다. 오래 기억되고 사랑받는 가수들은 ‘행운’에 의해 눈에 띄지만, 가창력과 음악성으로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조용필이 직접 ‘행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자기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노력을 과대하게 포장하려 애쓰고 때로는 거만하기까지 하다. 마치 자기 자신의 노력과 피와 땀만으로 불행도 이겨내며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실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해도 될 위치의 사람이 ‘행운’을 말하다니! 역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나 보다.최근 ‘바운스’로 큰 인기를 일으킨 조용필을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들은 조용필의 원조 ‘오빠 부대’를 언급했다. 그리고 팬들을 대하는 조용필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극찬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인데 나를 사랑해 준다고 하대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그의 마음은 참으로 곱고 둥글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도 조용필이 팬들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고마움을 넘어선 동지애까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오랜 세월 그의 팬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악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의 가음악을 배운다고 한다. 클래식에 관심이 생겨 관련 악기를 배우고 끊임없이 공부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이미지로 먹고살기보다는공연이라는 현장에서 음악가로 사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최고의 자리를 오랜 기간 유지하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아버지 세대에서 나까지 어쩌면 내 자식에게까지 ‘가왕’으로 남을 인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2. 임권택내가 임권택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축제’였다. 한참 영화에 관심이 들기 시작하였을 때, 일요일마다 하는 이라는 것을 빼놓지 않고 챙겨 보았는데, 거기서 장례를 하나의 축제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 사람들이 접하고 경험하는 것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 독특하고 관심이 갔다.물론 ‘축제’ 이전에도 임권택 감독의 작품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작품을 만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드문드문 소개되는 ‘서편제’의 감독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10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니, 나의 아주 어린 기억 속에 남겨진 ‘서편제’가 (그의 표현을 빌자면) 10년 동안 괴발개발 만들었던 50편 이후에 나온 영화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생존 수단으로 찍었던 영화들도 흥행에 성공했다니 어쩌면 그는 감독으로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싶다.그의 성장배경이나 가족사를 보면 틀림없이 아픔이 있지만, 물론 그 아픔이 그의 작품에 녹아내리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낼 어떤 계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영화 잡부로 시작해 어깨너머로 보던 것을 ‘흉내’ 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작품’을 빗어 놓았다는 것은 그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영화감독으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물론 그가 이토록 체계적이고 예술성과 흥행성 모두를 이룬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데에는 ‘소설탐독’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소설은 영상과 달리을 읽으며 그는 머릿속으로 많은 그림을 그려왔을 것이고 덕분에 영화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대본 없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소설 덕분이라고 했는데, 독서는 대본이 없는 영화의 완성뿐 아니라 아주 많은 것에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그의 작품에서 ‘서편제’는 빼놓을 수 없는 명작 중 하나일 것이다. 서편제가 개봉하고 몇 년이 (어쩌면 10년이 넘게) 지난 후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한국의 정서인 ‘한’을 그 누가 그렇게 명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판소리라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중요한 소재였지만 그가 그러낸 한국적인 것은 한복도, 판소리도 아닌 ‘한’이 아니었나 싶다.별다른 대본 없이 그런 명작을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중경상림’으로 유명했던 왕가위 감독이 대본 없이 영화를 만들어 영화배우들조차 영화의 내용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몇십 년 동안 영화 공부를 해온 사람들도 대본이 없는 영화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잡일부터 시작해 배운 그가 그렇게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3. 류시화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전해의 IMF 영향으로 우리 집은 말할 수 없이 힘이 들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상업 고등학교에 갔으면 하는 부모님을 바람을 모른 체 하고 나는 그래도 공부를 하겠다고 인문계에 진학했으나 어려운 형편에 아르바이트하며 공부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초반에는 진도도 잘 따라가고 성적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일상 대부분을 공부에 할애하고 학원과 과외로 무장한 친구들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학교 자체를 관둘까 하는 고민도 들었지만, 학교 백일장에서 시 한 편으로 장원을 하고 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었다. 국어 담당이셨던 담임선생님은 나의 재능을 칭찬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고 글로써 나는 그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갔었다.그때 내 마음을 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류시화지는 것이든 신에게 가지는 것이든 [사랑]이라는 감정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의 사고의 폭을 많이 넓혀준 시였다.“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어떤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그 대상이 되는 것, 내가 바로 그 대상 속에 포함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해석했고 그것은 굳이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그것은 문학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이 대담에서는 소금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그래도 류시화 시인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어 좋고, 경희대학교 동문회처럼 대화 드문드문 친밀한 공기가 느껴져 책 속의 대담 중 가장 많이 웃으며 읽었던 것 같다.그는 시를 마음속의 새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시인답고 아름다운 표현이다. 내가 시를 쓰지 않게 된 것은 내 시를 감정의 배설물로 인식했을 무렵부터 이다. 그것은 감정의 찌꺼기 같았고, 그래서 내보이기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류시화는 그것을 ‘마음속의 새‘ 라고 표현한다. 역시 이것이 일반인과 시인의 차이인가 보다.그의 시집이 많이 팔리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어 평가가 저하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참 속상하다. 대중문화가 생각보다 저급한 것이 많은 것이 불편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모든 것이 질이 낮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가 연애시정도로 치부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하고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해석되어 남겨진다는 것은 그만큼 수용의 폭이 넓은 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중이 어려워하고 평론가들이 인정하는 문학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사실 나는 전처럼 시에 깊은 관심이 있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시에 대한 사랑은 이상과 김지하를 거쳐 류시화로 끝이 났지만 그렇게 시를 사랑했던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에 내 삶의 많은 것을 다듬고
윤대녕의 [대설주의보] 비평1. 정신분석 비평주인공 수경은 몹시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인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낮은 자부심과 함께 주변 누구와도 친밀해지기를 거부한다.이는 남자친구 ‘준호’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준호는 그녀를 결혼상대로까지 생각하지만, 수경은 거리 두고 때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한다. 이는 가난한 자신이 유복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자란 준호에게 언젠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수경은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먼저 준호에게 큰 상처를 준다. 준호의 먼 친척이자 학교 선배인, 가깝지는 않지만 준호가 좋아하는 ‘그’를 유혹하고 그것을 준호에게 모두 말하는 것이 그러하다.이후 수경은 매해 청명, 온천에서 그를 만나왔다. 온천에 내려갈 때마다 들르는 식당에 혼자 갔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알은체를 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만 냉랭하게 대한다. 수경은 타인과 친밀해지기를 거부한다.또한, 낮은 자부심을 보이는데, 왜 자신을 보고 싶어 했느냐는 그의 질문에 ‘어리석고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경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낮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사랑을 온전한 모양으로 표현할 수 없도록 한다. 사실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매월 돈을 보내달라고 했고, 덕분에 수경의 사랑은 왜곡된 형태로 규정된다.이후 수경은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가야 했다. 하지만 진료예약 날짜를 몇 번씩 바꾸고, 결국 병원에 가 데스크에 접수를 완료한 후에도 진료를 받지 않고, 그에 대한 생각에 가득 차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수경은 병원 데스크에 접수를 시키고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동안 그에게 야속하고 서운한 감정에 가득 차 원망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보고 싶어 청명이 오지 않았나 달력을 본다. 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에 ‘암’이라는 큰 문제가 닥치자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미루는 것으로 보이며 그 와중에도 그에게 밖에 의지할 수 없는 수경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수경은 잘못된 억압으로 인한 오이디푸스적 고착으로 아버지에게 얻지 못한 사랑을 유부남인 그에게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주지 않음을 원망하고 또 그를 간절히 바라며, 심적으로 그에게 크게 기대지만 바라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지는 못한다. 이는 가난과 결합하여 낮은 자부심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왜곡하고 타인에게 상처받을까 두려워 거리를 둔다. 또한,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 주며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다.마지막에 수경은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어떤 무의식의 압박이 해결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그녀는 병에 걸려 자신의 죗값을 치렀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에게 갈구했던 사랑을(비록 그것이 변질되었더라도) 받고 있음에 억압된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2.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소설의 중심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 묘사나 주인공들이 상황에 대처하는 사소한 부분에서, 그러니까 소설의 중심내용과는 벗어난 묘사 등에서 자본주의적 사고를 지닌 시선이 나타나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에서 비평해 볼 수 있다.먼저, 주인공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 대한민국의 중산층에 속한다. 그는 미국의 중산층 계급이라 판단되는 괜찮은 집과 차가 있고 자녀를 키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자격을 갖추고, 대한민국의 중산층 자격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주인공은 10년 만에 연락이 온 친구의 작품 전시회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방문하는데, 친구의 후줄근한 옷차림과 작가 파일 속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친구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음을 추측한다. 또한, 주인공은 친구와의 추억에 반가움을 표시하기보다 현재 이 친구가 사회적으로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를 먼저 추측하고 관찰한다. 그리고 친구와의 대화에는 자연스럽게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을 던진다.주인공의 아내 역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중산층 계급에 속해있다. 그러기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속한 계급에 대한 판단은 끝났을 것이다. 친구가 커피를 타며 지갑 속의 명함을 스푼 대신 사용하는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데, 중산층 계급이 갖춰야 하는 품위에 어울리게 불쾌한 티를 대놓고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시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아이를 데리고 쇼핑에 나선다. 만약 친구가 유명한 작가로 부와 명예를 가진 상대였다면 그렇게 장시간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친구는 가난한 미술가들에게 무상으로 공간을 임대해 주는 곳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그곳은 가난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예술가인 친구는 전시회장이 위치한 그 가난한 동네 자체가 거대한 미술품인 것 같다 말하며 ‘기억’, ‘빈집’, ‘그림자’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난’, ‘소외’, ‘어둠’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고,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나 부를 지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손님에게 대접하는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사온 것이라고 말하며 생색을 낸다.주인공과 아내, 예술가 친구는 모두 자본주의 세계에 물들어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은 친구의 작품이나 과거 소중했던 기억의 가치보다는 친구의 생활환경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 역시 친구를 크게 존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친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난 소외된 것들에 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산물인 브랜드의 커피를 대접하며 굳이 그 브랜드를 입에 올리는 것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고 그들과 같은 문화를 즐기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뒤의 내용에는 ‘수연’이 등장하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 소설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관점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첫 대면에서 주인공이 어떤 가치를 두고 상대를 대하는지를 알 수 있는 소설이다.3. 정신분석 비평이 소설의 주인공은 윤수와 혜란이다. 이 둘은 어딘가 결여되어 있고 불안정함을 안고 살아간다. 윤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직업이 불안정하다.’라는 사회적 인식을 같이한다. 따라서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여자에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없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소한 것으로 불같이 화를 낸다.윤수와 혜란은 오해로 인해 헤어진 사이인데, 오해는 해란의 친구 오경서 때문에 발생했다. 오경서는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으로, 윤수를 유혹한다. 유혹의 이유가 자신보다 못난 해란이 행복한 척하는 게 싫어서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관계나 연애 등으로 두며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자존감을 가지지 못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윤수는 오경서의 유혹에 응하지 않지만, 오경서는 집을 나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해란에게 전화해 죽을죄를 지었노라고 짐짓 울먹이기까지 한다.오경서는 해란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해란이 자신보다 행복한 것을 지켜볼 수 없어 한다. 그것은 대상이 해란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러할 것으로 보인다.이후 경서는 결혼하고 또 이혼하여 고향에 내려간다. 그곳에서 술집을 차렸다고 하는데 10년이 지난 후 술에 취해 윤수에게 전화에 늦은 사과를 한다. 또 해란이 지난 가을 자살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해란의 불행이 곧 자신의 행복은 아님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해란은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며 그것에 대한 회피로 윤수에게 전화하고 윤수를 찾는다. 해란은 윤수를 사랑한다기보다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줄 대안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수는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윤수가 그녀의 불안과 외로움을 해결해 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해란은 결국 죽음충동을 보인다.윤수는 해란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책임감과 같은 감정으로 보이고, 그것마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해란 역시 윤수를 원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먼저 마음을 꺼내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윤수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둘은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리를 둔다.이렇듯 주인공들은 다들 정서적인 문제를 껴안고 있으며 이것을 타인과의 거리 두기, 죽음충동, 상처 주기 등으로 표출해 낸다.소설의 마지막에는 궂은 날씨에도 무리해 그녀를 찾아가는 윤수와 그를 찾아 내려오는 해란이 결국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만나지만, 각자의 생활에서 서로의 영역을 마련해 놓지 않은 상태이다.열린 결말로 최후의 판단은 결국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틀림없이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주인공들이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있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