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 : 지구에서 만나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2. 자기소개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저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공부에 흥미도 없었던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소위 '꿈 없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때가 돼서야 그래도 대학은 가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제 자신대로 만족할만한 성적을 받았으나 막상 원서를 쓸 날짜가 다 가오는데도 가고 싶은 과가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그러다가 무전공학과를 입학하게 되었고 흥미없는 학교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학기 때 교양필수로 들은 파이썬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학습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고, 결국 2학년 때 컴퓨터공학과로 전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군 복학을 한 뒤에 처음에는 1,2학년의 전공들을 동시에 들으면서 약간은 버겁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우는 과목들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특히 프로그래밍 과목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 2학기에 자바 과목을 배우면서 이 언어가 저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느꼈으며, 더 공부할수록 제가 모르는게 정말로 많다고 느꼈으며,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컴퓨터공학과에 관련한 다양한 진로들을 찾아보았으며, 결국은 백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제 뚜렷한 목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오면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동아리를틈틈이 해 나갈 생각입니다. 19살까지 꿈 없고 미래가 없던 소년, 매일 친구들이랑 생각 없이 노는 걸 좋아하고 게임하기 좋아하는 소년이 이제는 꿈과 목표가 생기고 서서히 목표를 향해서 조금이나마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남은 학교생활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여서 제 목표인 백엔드 개발자라는 꿈을 이루고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3. 자기에게 있는 강점 혹은 장점 3가지와 앞으로 내가 이런점에서 더 갖추어야할 3가지저의 장점 중 하나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편이라는 것입니다.군 생활 중, 휴가를 300일 가까이 나가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저는 운이 좋게 선, 후임 동기들이 모두 웃기고 좋은 사람들이어서 휴가를 못 나가서 힘들다기보다는 이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드는 게 더 즐겁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엄청 빠르게 보냈던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물건을 잃어버린 걸 인지한 상황인데도 긍정적으로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물건을 찾다가 결국 찾은 경험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큰 힘이 됩니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인내력을 기를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것 같습니다.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감사 인사를 하는 습관입니다. 저는 원래 주문한 음식이 나오거나, 어떤 서비스를 받고 나서 인사를 하는 습관이 없었는데 아버지께서 이런 건 기본 예의다. 라고 저에게 말씀하셔서 이제 어디 가서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이런 말을 달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쁜 상황이었어도 괜히 기분이 좋고 힘이 났던 기억이 있어 정말 저에게 있는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마지막으로 제가 소개할 장점은 바로 청소하는 습관입니다. 저는 제 방이나 숙소에 머무를 때에도 청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이를 일상의 중요한 부분으로 시간에 맞춰 일찍 집을 나가야하는데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해 여유를 부리면서 집에서 나가 버스를 놓쳐서 결국엔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고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는거 같습니다.마지막으로 제가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약간 말을 얼버무려서 사람들이 제 말을 잘 못 알아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에서 제가 감사 인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말을 또박또박 하는 버릇을 가져야될거 같습니다.4.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여자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제도,법,생활 양식 등 한가지예전에 집에서 여동생이 생리대가 맞지 않아서 한 동안 고생했던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여자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제도는 생리대의 모든 성분을 인체에 안전한 성분으로만 제조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국가에서는 생리대를 위한 정책으로 생리대 부가세 면제, 생리대 안전성 조사 및 연구 지원, 저소득층 여성들 상대로 생리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바 있지만, 저는 강력한 법을 통해서 유해성분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생리를 사춘기에 시작해 폐경기, 즉 12세부터 55세 사이에 기간 동안 생리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거의 인생의 절반 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고, 생리대는 거의 장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여성의 생식기에 직접적으로 닿는 제품이기 때문에 성분의 안전유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6c40001.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93pixel, 세로 293pixel2018년부터 생리대에 사용되는 모든 성분이 표시되는 ‘전성분 표시제’가 시행되었으나, 정작 생리대의 전성분 표시표를 보면 전문적 용어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표기되어 있어 소비자들이 이 생리대에 사용된 성분들이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모른채로 생리대를 사용할사용하는 여성들은 안심하고 생리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생리대 제조업체들도 인체에 무해한 생리대를 개발하는데 노력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앞으로 생리대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나 의구심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5.이성친구가 성형을 한다면?남녀의 입장에서 기술하시오. (남자가 바라보는 여자 성형,여자가 바라보는 남자 성형-남,녀 모두의 입장에서 서술)남자가 바라보는 여자의 성형남자들은 대체적으로 여자의 성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남자로써 예전에는 성형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고, 성형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쁜 사람이 성형을 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주위 이성 친구들을 보면 중학교 때 쌍꺼풀 수술을 한 이성 친구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 친구들이 나중에 성형을 한 게 더 나은 거 같다고 생각이 든 적이 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제 남자인 친구들에게도 여자의 성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적이 있었는데, 친구들도 너무 성형을 한 티가 나지 않는 이상 성형을 한 게 더 이쁘다면 성형을 했던 말던 별 상관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저도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 뒤로 성형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거 같습니다. 또한,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성형 수술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상대방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성형 사실을 알기 어려워졌습니다. 제 여동생도 성형 수술을 하고 인상이 훨씬 나아졌고, 동생의 친구들 사이에도 성형은 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자들의 성형에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성형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남자의 성형에 대해서 별 반감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성 친구들에게 남자의 성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남자들은 너무 안 꾸미고 다닌다면서 차라리 성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했으며, 저도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이쁜 여자들은 많이 보는거 같은데 잘생긴 남성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을 회복하고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형이 자신감, 자존감을 높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성형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당사자의 생각을 존중해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형에 대한 인식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 흐름은 저희가 순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친구 중에서 남자든 여자든 계속 성형을 하려고 한다면 말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서 티가 안난다고 해도 여러 번 하다 보면 티가 나는 것은 물론 부작용의 위험성과 이에 따른 성형 중독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고, 결국에는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6. 남, 여 핸드폰 사용의 차이저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휴대전화 사용 용도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남자들은 게임을 자주 하면서 웹툰을 봅니다.또 한 문자보다는 전화로 용건을 간단히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며, 휴대전화 설정을 거의 변경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 여자들은 휴대전화를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고 게임보다는 SNS 앱이나 사진 앱 등을 주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시절에는 LG, 갤럭시, 아이폰 등 휴대전화의 종류가 고르게 분포했으며, 여자들이 주로 아이폰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이 어떤 기종을 사용하든 신경 쓰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전체적으로 핸드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기술이 매우 발전함에 따라서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아졌고 지금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SNS 앱을 주로 즐기고 무선 이어폰의 발달로 어디서나 음악 앱을 통해서 음악 감상을 즐기며, YouTube Shorts나 인스타그램 릴스 등 가볍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용도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으며, 사용 기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니다.
한국사 속 인물의 조사 및 재평가목차(1)서론-.의자왕을 선정한 이유(2)본론- 의자왕 집권 전 삼국의 상황- 의자왕 생애(3)결론-의자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반박-의자왕에 대한 나의 평가-출처- 의자왕을 선정한 이유제가 생각하는 한국사 속 인물 중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의자왕입니다.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의자왕을 재평가되어야 하는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의자왕의 시대에 고구려와 여제동맹을 결성하여 신라를 거세게 밀어붙였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닌 귀족 중심 사회였던 백제에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년에 초반과 다른 인물이 되어 망국의 군주가 되었기도 하지만 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망국의 군주였던 의자왕에 대한 기록이 안 좋게 기록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저에게는 흥미로워서 의자왕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평가하기 위해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7세기 삼국의 상황우선 의자왕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7세기의 삼국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합니다.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신라와 백제는 힘을 합쳐 고구려를 한강에서 몰아냅니다. 또한 진흥왕 시기에 고구려를 공격해 함경도까지 진출해 진흥왕 순수비(마운령비)를 세우는 등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가지게 되면서도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라는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에 고구려, 백제를 상대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후에도 중국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하는 계기가 됩니다.고구려는 중국 통일 왕조인 수나라에 맞서 고수 전쟁을 통해 크게 승리(살수 대첩 등)해 수나라가 당나라로 바뀌는데 큰 영향을 주었지만, 다시 당나라가 등장하고 돌궐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고구려와 마주하게 되자 천리장성 축조 등 중국 쪽에 신경을 더 기울기게 됩니다. 하지만 온건파인 영류왕이 강경파인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고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실세로써 통치하게 되면서 고구려와 당은 긴장관계에 빠져들게 됩니다태를 보여 후에 당나라가 백제가 아닌 신라와 손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를 살펴보면 신라는 나라가 시달리자 한강 유역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여가는 시기였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뒤 중국에게 강경한 자세로 나갔으며 이는 당나라의 계속되는 고구려 정벌의 시작이였습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뺏긴 뒤로 삼국 중에 가장 열세에 있었지만 신라를 계속 압박해가면서도 중국과는 척을지지 않으면서도 이용하기도 하는 등 자연스럽게 신라,당 vs 고구려,백제 구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의자왕 생애와 통치의자왕은 백제 제30대 무왕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동설화의 미륵사 사리봉안기의 기록을 통해 선화공주 혹은 사택적덕의 딸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의자왕은 632년에 태자로 책봉됩니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아들의 나이로 추정해봤을 때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641년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고, 역사적 기록을 볼 때 4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즉위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왕이 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아우 왕자의 자식인 교기를 비롯해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으로 보아 세자 때부터 권력에 대한 다툼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642년 7월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다음 달인 8월에는 윤충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켜 훗날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을 죽이게 되고 이는 김춘추가 고구려, 당나라, 왜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외교를 하면서 당나라와 연합하는 결과를 낳게됩니다.의자왕은 즉위 후 펼친 외교를 보면 백제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왜 와도 지속적으로 교류한 흔적도 일본서기 등에 남아있는 것을 보아 의자왕은 왜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대중외교로는 처음에는 계속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구려가 백제를 막아주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고구려 정책을 취하게 되고 이를 이용해 신라를 고립시켜 신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을 것입니다.또한 의자왕은 집권 초기에 유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의자’라는 이름 자체가 유교적 색체가 짙은 이름이며 신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영토를 순찰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등 유교적 정치를 바탕으로 민심을 수습하였습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의자왕은 나라 내부에서는 온건한 통치를 바탕으로 민심을 얻고 나라 밖으로는 원수인 신라를 정벌하여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왕권 강화에 힘을 썻습니다.643년에 고구려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를 갚기 위해 군사를 요청한 신라의 김춘추를 내치고 백제와 전면 화친을 맺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요충지인 당항성을 공격을 시도하는데 당의 개입으로 실패하지만 이때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여제동맹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때도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등 국제관계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후 655년에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성을 함락하는 등 주도권을 가지고 신라를 압박했습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고 맙니다 이 이후로도 의자왕 시대에는 신라와는 끊임없이 전쟁을 지속하게 됩니다. 의자왕 재위기간에 백제는 신라를 낙동강 동쪽으로 몰아내고 소백산 넘어서까지 영토를 넓히게 됩니다. 의자왕이 신라를 대차게 압박한 이유는 아마도 상술하였듯이 원래 백제와 신라가 합해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었지만 신라가 배신하여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어 이 부분에서 엄청난 반감을 일으켜 압박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645년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나라 황제 당 태종은 당시 동맹을 맺고 있던 백제와 신라에게 동시에 고구려 침공을 도와줄 병력을 요청하고, 신라는 이에 응답해 고구려를 공격한 반면에 의자왕은 당의 요구를 무시하환하라고 요구합니다. 이후 백제는 당의 관계를 거의 끊고 아예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됩니다. 선대 왕들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할 때 와는 다른 행보였습니다. 아마 이것은 상술 한 것처럼당나라가 고구려의 존재 이유로 백제에게 직접 개입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 이유였을 것입니다.이후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는데 이것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침공이었습니다. 백제 내부에서는 방어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의자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유배 중이던 좌평 흥수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이때 흥수는 백강과 탄현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하지만 신하들은 흥수의 충정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당 연합군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난 뒤 였습니다. 의자왕은 급한 데로 계백으로 결사대 5천을 이끌고 신라군을 상대하도록 했는데, 이 전투가 바로 황산벌 전투입니다. 황산발 전투에서 계백은 4번 싸워 4번 이기지만 결국 패배했고 기벌포 에서는 백제군의 주력이 당나라 군과 상대했는데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결국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었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의자왕은 최고위 관료와 왕자들을 내보내 사죄하고 회군을 바랬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의자왕은 사비성을 왕자들에게 맡기고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피신해 계속 저항하려 했으나 웅진성주 예식진이 의자왕을 나당 연합군에 항복시킴으로써 500년 역사 백제는 멸망하고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게 됩니다. 사비성도 결국 왕자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당에 항복하고 맙니다. 항복을 한 후 나당 연합군이 전승을 기념하는 대연회에서 의자왕은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했다고 합니다. 왕후와 아들들 그리고 백성들과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당 고종에게 꾸짖음을 들은 후 사면을 받았으나, 의자왕은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하여 심한 충격을 받아 괴로워하면서 며칠 만에 당나라 장안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 연도가 백제가 멸망한 660년입니다. 백제가 이렇게 한 순간에 멸망한 이유로는 10만이 넘는 대군들이 쳐들어온 의자왕은 현대에 와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 삼천 궁녀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저희 또래 사이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남자애들을 놀릴 때 의자왕이라는 표현을 썻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우선 가장 잘못알고 있는 삼천 궁녀 설화는 궁녀들이 많이 있었다는 문학적인 비유에 가깝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 내용이 존재하지 않고, ‘삼국유사’에도 후궁이라는 표현과 타사암이라는 지명만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아서 삼천 궁녀 설화는 실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 인구가 약 5만 명 내외로 추정되는데 고대 국가에서 3000명의 궁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전체 인구 중 궁녀의 비율을 ㄸㆍ져 보면 5만 명 중 여성이 2만 5천, 2만 5천의 여성 중 아이와 노인을 제외 한 젊은 여성을 어림잡아 만 오천 명이라고 생각하면 도성 인구의 20%가 궁녀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사비성의 규모로 보았을 때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막장 임금 충혜왕이 전국의 미녀들을 모아 100명 정도의 궁녀를 채웠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에서는 영조 시기에 서술된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가 680명 남짓이고 고종 실록에는 480명의 궁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에도 평균 600명 정도의 궁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오래전 국가이면서 영토, 인구도 적었던 백제가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거느렸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어불성설입니다.의자왕이 좋지않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전에 비해 중국에 소홀해진 외교 노선이 멸망을 불러왔다는 의견인데, 이는 의자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 당나라와 합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만약 앞서 말한대로 백제와 신라가 당 태종의 요구에 응해서 고구려를 침공한 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자리에 중국 통일 왕조가 들어선다면 그때는 뒤늦게 신라와 합친다고 한들 금방 당나라에게 흡수되었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