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한국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사람마다 말하는 버릇이 있고 다 다르게 말한다. 말이란 것은 생각의 표현이고 생각은 사유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은 간단 명료하게 말하는 한편 어떤 사람은 주저리 주저리 말을 길게 한다. 요즘 같은 비주얼의 시대-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 같은 영화가 다양한 볼거리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 잡는 시대-에 비포시리즈-비포선라이즈, 비포미드나잇, 비포 선셋-같은 상영 시간 내내 지루한 말들만 계속 오가는 영화가 있듯이 말이다.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일단 그 페이지 수에 놀랐고 두 번째로 첫 장부터 시작되는 외우기조차 힘든 이탈리아 이름들에 놀랐다. 사실 막상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은 책을 다 읽고 덮었음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논문도 아닌 책에 달린 수많은 주석들도 책을 덮기 딱 좋을 정도였다. 이런 책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고 현대판 고전이 될 수 있을까. 일단은 적어도 ‘마블’류의 소설은 아닌 게 확실하다. ‘비포시리즈 류인가’ 라고 생각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소설의 첫 장부터 에코는 자신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에 대해 과시하듯 풀어놓는다. 그리고 모든 이름과 모든 상황에 대해서 정말 세세하게 하나씩 하나씩 빠짐없이 기록한다. 이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모든 구성품들과 그 관계에 대해서 현란할 정도로 늘어놓는다. 중세에 대한 경험이 없고 서양 문물에 대한 도는 천주교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몇 장을 더 읽어보니 정말 스포가 있으면 스포를 보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내용들을 계속해서 이어진다. 에코는 그렇게 모든 정보들을 늘어놓으며 이 이야기가 얽힌 세계 자체를 완벽하게 그려놓고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물론 에코의 머릿속을 따라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 수십 번을 다시 읽으며 도표를 만들고 관계도를 만들어서 온 방안에 붙여놓지 않고서는 사실상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수십 번도 더 앞의 장을 다시 찾아 읽어야 했다. 이름이 헷갈리고 누가 누구였는지 어디였는지 이 사람은 어느 편이었는지 머릿속을 계속 정리하고 정리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결국 실패했다.에코는 정말 공 들여서 소설 속의 모든 것들이 개연성이 있음을 서술한다. 이게 실제 있었던 일인지 소설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다 읽고 나서야 여기 나오는 인물들 중 일부가 실제 존재했었던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뒤섞어 놓음으로써 에코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내용이 실제인지 허구인지조차도 분간을 못하도록 이끌어 간다. 더군다나 종교와 철학과 정치와 역사까지 아우르는 스토리에 점차 숨이 막히게 된다.기호학자였던 에코에게는 아마도 소설 속의 인물들의 이름이나 말들에 굉장히 공을 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중점으로 내세웠던 대사들 속에는 인간과 신의 고뇌, 인류의 근간과 영속적인 문제까지 아우른다. 그러나 역시 그 모든 정체되고 고정된 것들을 에코의 입장에서는 터부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감춘다고 진실이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우리가 익히 배운 역사나 사실 등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라거나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라는 식의 스토리가 에코 이후에야 비로소 한국 문학에 나타났다거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미의 이름≫전에 나온 황석영의 ‘장길산’을 보면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장길산이라는 광대 출신의 도적을 주인공으로 해 조선조의 부패 상황과 민초들의 어려움, 그리고 이상 정치의 구현, 인간 삶의 의미 같은 것으로 확대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형식의 소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장미의 이름≫처럼 추리 소설의 기법을 써서 사건을 조사하고 거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방식의 소설들은 그 이후 한국 문학과 영화 등에 자주 차용되는 기법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즘 ‘미드’들에서 한없이 커져가는 세계관을 보면 좀 황당한 경우도 있다.≪장미의 이름≫과 많이 비교되기도 하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그 형식이 추리소설 형식을 가지고 소설의 구성도 차용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내포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SF, 《새로운 아틀란티스》작년 말에야 나는 뒤늦게 SF라는 문학 장르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내가 SF라는 장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방팔방에서 주워들은 온갖 오해와 편견들밖에 없었다. 직접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무시했던 SF에 뒤늦게야 발을 들이게 되고, 지금처럼 즐기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전공 시간에 읽은 켄 리우 소설가의 글이 아주 재밌었다. 둘째로, SF는 한국에서 흔히 공상과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명칭을 실제 SF작가들이 매우 불쾌해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공상에서 공은 空(빌 공)자를 쓰는데, SF는 비어있는 상상, 비어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이 얘기를 듣기 전 갓 읽은 켄 리우 소설가의 글은 결코 비어있는, 허황된 글이 아니었다.현재 한국 출판계에서 SF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학과지성사에선 아주 최근에《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라는 제목의 SF 단편 앤솔로지를 내놓았고 김초엽 소설가 SF 소설집《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은 처음 출판된 지 일 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다양한 독자에게 인기를 쌓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수많은 독자들은 왜 SF라는 장르에 열광하기 시작한 걸까? SF라는 장르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나는 문학에 대한 고찰이 곧 이 시대에 대한, 이 시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찰로 이어짐을 안다. 어떤 때는 이어짐을 넘어서 하나이기도 하다. 강의 교재인 《초예측》을 읽고 나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초예측》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혹은 마주할 가능성이 큰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말한다. 반면 프랜시스 베이컨의《새로운 아틀란티스》속 그려지는 유토피아에는 심각한 문제라는 게 없어 보인다. 나는《새로운 아틀란티스》란 프랜시스 베이컨이 남긴 아주 낙관적인 SF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 글 속에서 내가 앞서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내가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 제대로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시절 시간표에 있던 윤리와 사상 수업시간 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이컨에 대해서는 이름만 기억하는 상태로 대학에 오게 되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라는 책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 두께가 얼마나 될지 걱정이 되었는데, 실제로 도서관에서 마주한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내 우려와는 다르게 얇았다. 게다가 베이컨이 쓴 본문은 책의 반밖에 차지하지 않았다. 본문 전 베이컨의 제자가 실어둔 글을 읽으니 얼마나 머리 아픈 내용일지 다시 걱정이 되었지만, 막상 읽은 베이컨의 글은 머리 아픈 내용과는 거리가 먼, 그가 꿈꾼 유토피아에 대해 쉽게 쓰인 글이었다.글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는 대목에서 묘사되는 무궁한 과학 발전이 이뤄진 세계에 대한 묘사는,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찰리의 초콜릿 공장》이나 영화 《해리포터》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이 중 어떤 것은 지금 현실에서 가능한데, 그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선으로 읽으니 생경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소개할 것이 많다보니 모든 것이 짧고 빠르게 지나가는데, 다음 문장을 읽기를 멈추고 하나씩 상상하며 읽으니 즐거웠다. 그리고 동시에 베이컨도 이 대목을 쓰며 참 재밌어했겠다 생각이 들었다.본문이 끝나고 이어지는 해설에선 프랜시스 베이컨이란 인물에 대한 설명과 그가 그린 유토피아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현재에 사는 나는 베이컨의 글보단 이 해설을 더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황당한 죽음에 대해 다룰 때 프란시스 베이컨의 죽음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그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삶을 보냈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유언장에 그에 대한 언급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대목에선 내가 괜히 서운했다.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은 사실 노르만인에 의해 1000년경 처음 이루어졌지만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관심을 불어 일으키지 못한 것이라는 대목에선 꽤 놀랐다. 전공에서 르네상스에 대해 거의 매 학기 다뤄지긴 하지만 그런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문학 작품, 예술 작품을 통해 두루뭉술하게 알았던 르네상스에 대한 정보들이 세밀한 것들로 메우어지는 느낌이었다.르네상스에 대한 설명에 뒤이어 모어의 유토피아, 베이컨의 유토피아에 대한 비교가 펼쳐지는데, (해설)저자의 생각에 따라 베이컨의 유토피아를 비판적으로 보다가도 또 어떤 면에서는 베이컨의 상상이 충분히 수긍이 되었다. 두 유토피아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둘 중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가슴은〈토랄 리콜〉(1990)을 본 후 내가 가장 경악한 건 쿠아토의 충격적인 비주얼도,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는 리치터의 인성도 아닌 화성의 창녀촌이었다. 먼저 도대체 왜 화성까지 놀러가서 창녀촌에 갈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이 1차로 들었다. 그리고 90년대 미국 남성들의 사고가 저 정도라면 90년대 한국 남성들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2차로 들었다. 전세계 암시장을 분석하는 미국 기업 하복스코프가 2015년 발표한 결과를 보면, 한국은 전세계 성매매 시장 규모에서 6위를 차지한다. 한국의 몇 배로 큰 국토와 인구를 가진 미국의 바로 다음이다.화성의 창녀촌 장면 속에서도 내 기억에 가장 남았던 인물을 꼽자면, 가슴이 세 개 달린 창녀다. 저건 대체 누구의 판타지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토털 사이트의 리뷰창에서 ‘삼젖녀’라는 단어를 찾아내는 건 쉬웠다. 리메이크한 2012년 작에도 다시 한 번 등장한다는 걸 보니, 그 인기가 전 세계에서 대단했던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더욱 불쾌해졌다. 쿠웨이드에게 가슴을 열어보이며 ‘삼젖녀’는 말한다, “손이 세 개였길 바라게 만들어줄게.” 이건 대체 누구의 판타지일까. 남성에게 여성의 가슴은 대체 무슨 존재일까.며칠 전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은 상의 탈의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6일 단체 회원들이 ‘월경 페스티벌’ 행사에서 찍은 여성 상의 탈의 사진이 페북코리아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남성 상의 탈의 사진에는 아무런 제제를 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몸에만 ‘야하고 성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냐고 주장했다. 우리는 한여름 길거리에서 상의를 탈의한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상의를 탈의한 게 여자라면?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가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에는 아이돌그룹 에프엑스로 활동했던 설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노브라 사진들이 큰 화제였다. 온스타일 ‘뜨거운 사이다’에서 이지혜 기자는 말했다. “여자의 가슴이 관음적인 대상이었을 때는 거기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가 유하다. 여자가 스스로 가슴을 드러낸 사진을 올렸을 때는 감히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갑자기 미풍양속을 해치다니 라며 이중잣대가 심하다.” 한해가 지났고 페미니즘의 물결이 더욱 세지고 있음에도 ‘여성의 가슴’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잣대는 여전하다.한국이 참으로 이상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자인 친구들과 동기들이 서로 속옷끈이 보인다고 말해줄 때 특히 그렇다. 여성에게 유방이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들은 유방을 숨겨야 한다. 유방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나이부터 죽기 전까지 매일 브래지어를 착용한다. 그리고 그 브래지어 끈조차 숨겨야한다. 모두가 존재하는 걸 알고 있으나 온힘을 다해 숨겨야 하는 여성의 가슴이란,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 영화의 역사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 발명부터 지금까지과목 :학과 :학번 :이름 :제출일 :[목차]I. 서론II. 프랑스 영화의 역사1. 뤼미에르 형제에서 유성영화의 탄생2.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3. 누벨바그와 현대 영화 운동4. 포스트 누벨바그부터 지금까지III. 결론I. 서론얼마 전 넷플릭스를 보다가 어느 한국 영화의 제목이 인 걸 보았다. 2016년에 나온 영화인데, 리뷰를 찾아보니 역시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제목을 납득하는 사람도 있었고, 납득 되지 않는다며 감독이 프랑스 영화를 몇 개 안 본 거 아니냐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이따금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 생각했다. ‘프랑스 영화 같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프랑스 영화가 대화만 가득 찬 심심한 영화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프랑스 영화를 몇 개 보지도 않았는데 어디에서 주워듣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만 가득한 영화들은 영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는 엄마의 취향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 영화 같다’는 말의 의미가 좀 바뀌었다. 성에 대해 과감하게 다루며,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영화들을 ‘프랑스 영화 같다’고 표현했다. 이 역시 어디서 주워듣고는 따라했던 게 분명하다.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프랑스 영화들을 좀 보았다. 뱅상 카셀, 레아 세이두에 빠지기도 했고 레오 까락스의 를 보고 오랜 우울증에서 벗어날 해답을 찾기도 했다. 지금은 이자벨 위페르를 계속 좋아하고 있다. 불어권의 사회와 문화라는 수업을 수강해야겠다는 마음을 만든 것도 사실 내가 본 프랑스 영화들, 프랑스 배우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프랑스 영화 같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제는 그게 얼마나 건방진 말인지 안다.그래서 이번 기회에서 프랑스 영화의 역사를 정리해서 프랑스 영화의 특징이란 게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II. 프랑스 영화의 역사1그랑 카페에서 자신들이 만든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와 (1895)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실재를 그대로 담은 일종의 기록 영화’였다. 최초의 극영화이자 SF영화인 (1902)은 그로부터 7년 뒤 조르쥬 멜리에스가 선보인다. 합성화면, 디졸브(한 화면이 사라지는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 같은 그 당시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대담한 편집방법을 이용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영화는 현실에 대한 단순한 기록에서 벗어나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독창적인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된다.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의 영화를 발판으로 프랑스는 영화사 초기의 세계 영화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 프랑스의 유명 영화사 파테와 고몽이 창립된다. 1900년에서 1910년까지 두 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 편수는 ‘한동안 미국 영화 전체의 영화 편수의 두 배를 넘을 정도였다.’한편 ‘당시 지식인들이나 문화엘리트들은 영화를 단지 저급한 대중적 오락거리로만 치부했고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파테와 고몽에서 만들어지던 영화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순한 내용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지나친 상업화에 맞서 1908년, 재력가인 피에르 라피트는 파테의 자본을 끌어다 ‘예술영화사’를 창립한다. (1908), (1908), (1908) 같은 수준 높은 예술영화들이 이때 만들어진다. 당시 주류였던 코미디나 황당한 모험이야기, 성서의 일화를 벗어나 진지하고 상징적인, 역사적인 주제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들은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 공인받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프랑스 영화산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대부분의 영화제삭사가 전쟁기계 공장으로 바뀐다. ‘반면,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미국의 영화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에디슨의 권력이’ 무너지며 당시 ‘할리우드’라는 변방에 모여 있던 독립영화사(위너 브라더스와 폭스 영화사가 이들 중 하나다904)은 고전주의 영화로,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다. 유럽영화계는 그리피스의 새롭고 뛰어난 연출기법과 제작기술을 빠르게 수용하지만, 동시에 이런 모범답안을 거부하는 새로운 움직임도 일어난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예술 영화들이 1920년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다. 이 영화들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된다. 초현실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 인상주의 영화다.‘그러나 192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불꽃처럼 타올랐던 실험적 예술 영화들의 열기는 1930년대에 들어와 갑작스럽게 사그라든다.’ ‘유성 영화’의 등장이 그 주요 원인이다.2.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유성 영화의 등장 이후 ‘시적 리얼리즘’이 1930년대부터 1940년대 프랑스 영화계를 주도하게 된다. ‘문예 영화’라고도 불렸던 이 경향은 ‘당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리얼리즘적 의지와 서정적인 대사 및 영상을 통해 몽환적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시적 소망’이 합쳐진 걸 뜻한다. 이는 쉽게 양립되기 힘들지만, ‘시적 리얼리즘’을 통해 프랑스 영화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그러나 이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점차 사그라든다. 전쟁 시작 후 유명한 시적 리얼리즘 작가들의 활동이 현저히 줄어들며 부진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야 이 같은 침체기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문예 영화의 전통에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한다.3. 누벨바그와 현대 영화 운동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1950년 후반에 시작된 프랑스의 영화 운동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작가주의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작가주의란, 누벨바그의 대표적 감독이기도 한 프랑수와 트뤼포가 비평가 시절 영화 잡지에 기고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전 세대 프랑스의 품질 영화 및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 비판의 말기에는 ‘영화 전체의 제작과정을 지휘하고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의 작가가 필요하며 작가에 의한 작가 영화만이 진정한감독이라고 했다.이때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최초의 누벨바그 영화 (1958)를 제작한 클로드 샤브롤, 자신의 비평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1959)를 제작한 프랑수와 트뤼포, (1960)의 감독 장 뤽 고다르 등 유명한 감독들이 모두 누벨바그 작가들이다.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내보인다.[1] 인물은 당돌하고 비전통적이며 대체로 감상을 배제하여 다룬다.[2] 구성은 느슨하고 사실적이며 혁신적이다.[3] 경량 장비의 사용. 소형 촬영기와 장비를 사용하여 우연적이고 사실적인 영상과 음향을 얻어낸다.[4] 현지 촬영과 야외 촬영의 선호.[5] 생략 편집을 활용하여 이미지들의 연관, 이미지와 음향, 그리고 매체 자체에 대한 주의를 상기시킨다.[6] 영화적 공간과 시간에 관한 실험.[7] 초창기 영화들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전통의 지속과 단절을 짚어내고 특정 작품이 품고 있는 영화적 자의식에 관해 언급하며 특정 감독이나 영화에 경의를 표한다.[8] 인간과 우주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존주의적 감각을 갖고 있다.한편, 누벨바그 감독으로 분명하게 분류되지는 않았으나 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프랑스 영화를 발전시킨 영화인들이 있다. 소위 ‘좌안파’라고 불렸던 (1959)의 감독 알랭 래네, 올해에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발표한,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성 감독 아네스 바르다, 인류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장 루슈 같은 이들은 누벨바그 감독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중도우파의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누벨바그와 다르게 좌안파는 급진적인 좌익으로 다큐멘터리 같은 실험적인 영화와 사회성을 띈 영화를 만들었다.4. 포스트 누벨바그부터 지금까지누벨바그와 68혁명 이후 프랑스 영화는 오랜 침체기를 겪는다. 누벨바그 영화들이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이후 TV시대의 도래와 함께 극심한 위기의 상황으로까지 추락한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 상황 속에서도 간혈르가 코미디 영화와 범죄 영화다. 그리고 이와 같이 프랑스 영화를 특징짓는 또 다른 대표적 장르가 정치 영화다. 68혁명 이후 다양한 정치 영화들이 만들어진다.‘1980년대에 들어 프랑스 영화의 위기는 더욱 가중된다. 위기의 원인으로 TV의 지배, 비디오 시장의 확산, 미국 영화의 대중주의, 혹은 프랑스 정부의 과도한 제작비 지원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실마리가 풀리지 않은 채 1990년대 중반까지 침체의 상황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도 대규모 제작 시스템의 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 중에 ‘아예 헐리우드 영화의 모방을 선언한 뤽 베송의 영화들과 값싼 코미디 영화만이 유일하게 성공을 이룬다.’이런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묶여 하나의 그룹, 소위 ‘네오 바로크’나 ‘누벨 이마주’라고 불렸던 이들이 있었다. (1986)의 감독 장 자크 베네, 한국에서 아직도 인기를 얻고 있는 (1994)의 감독 뤽 베송, , , 레오 까락스가 이에 속한다.그러나 이들도 점점 각자의 한계에 부딪히며 프랑스 영화는 결국 긴 침체기에 빠져들고 만다.‘따라서 네오 바로크 계열의 감독들보다는, 차라리 일정 수준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꾸준히 이어갔던 중견감독들이 작업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프랑스 영화를 특정 짓는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지 모른다.’ 앞서 말했던 아네스 바르다나 클로드 샤브롤이 이 그룹에 속한다. 이 ‘중견감독들의 작품들은 모두 평단의 높은 점수를 받으면서 동시에 꾸준한 관객동원에도 성공해, 프랑스 영화의 명맥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 추세가 이어지다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드디어 이런 신, 구의 영화 미학을 적절히 합쳐낸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한다. 프랑스의 국민 배우 뱅상 카셀 주연의 (1995)가 그 중 하나다. 동시대 사회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실험적인 영상 탐구를 병행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중견감독들의 꾸준한 활약과 1990년대 중반부터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들로 프랑스 영화의 오랜 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