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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 시기 소련과 독일의 관계
    스탈린 시기 소련과 독일의 관계-목차-1. 서론2. 전간기의 독·소 관계2.1 1920년대 독일과 소련간의 전략적 제휴2.2 파시즘의 성장 및 나치 정권의 등장에 따른 독·소 관계 변화2.3 집단 안보 체제의 분열과 독·소 불가침 조약3. 독·소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제2차 세계 대전4. 종전 후 독일의 분단과 독·소 관계5. 맺음말참고자료1. 서론러시아 역사는 독일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기틀이 잡힌 국가의 성립 이전부터 러시아의 기간 민족인 슬라브 족은 독일의 기간 민족인 게르만 족과 서로 간의 세력을 다투며 자주 부딪혔고, 이후 현재 독일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동프랑크,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서부터 독일 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러시아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우호적 동맹을 맺기도 하며 함께 성장해왔다. 현재 지도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와 독일의 국경 간 거리는 꽤나 먼 편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재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벨라루스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고, 폴란드는 18세기에 행해진 폴란드 분할로 인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독일의 국경은 맞닿아있었기에 두 나라는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승리로 소련이 건설되었고 초대 지도자였던 레닌의 뒤를 이어 스탈린이 집권한다. 나 역시도 이전에 그랬듯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이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것에 집착하고, 미국 등의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으로 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매우 현실적인 인물로 자국 안보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실리 지향적인 정책을 펼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가 펼친 외교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소련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타파하기 위해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보다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 대비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취약성을 인지하고 그들과의 정상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러시아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시키려 했으나 라팔로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의 채무와 독일의 소련에 대한 배상이 상쇄되어 이는 수포로 돌아간다. 이 조약을 통해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과 독일 두 나라는 국제사회에 우호적인 관계의 국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두 나라의 제휴는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경제 발전을 추진 중이었던 소련의 거대한 시장은 패전 후 황폐화된 독일 산업계를 다시금 일으킬 기회였으며 독일은 소련의 시설 제공을 통해 국방군을 비밀리에 재군비할 수 있었고 소련은 반대급부로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양국은 제휴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발언권이 크게 증대되었고, 아울러 이후 열국은 소련 정부의 정식 승인을 고려하게 되었다. 라팔로 조약은 비록 레닌 시기에 체결된 것이지만, 스탈린 때에도 계속해서 이어진 국제적 고립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실용적이고 온건한 외교 정책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의 관계 또한 레닌 때와 동일하게 유지했다. 그렇기에 양국 간의 전략적 협력 관계는 독일에 파시즘과 나치 정권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2.2 파시즘의 성장 및 나치 정권의 등장에 따른 독-소 관계 변화지금은 최고 우호국 사이에서나 가능할법한 정도의 교류 관계를 이어나가던 소련과 독일 사이에 변화가 나타난다. 변화는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 사회는 위기에 봉착한 것을 계기가 되어 일어난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자국 경제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배상금을 부담하게 된 독일은 끊임없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위기에 빠져 민족주의와 파시스트를 외치는 정당들이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급 계획안인 도스안과 미국 자본의 유입을 통해 많이 해소되어 사회는 안정을 찾는 듯 보였고, 민족주의와 파시스트의 지지자들은 빠르게 힘을 잃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모든 상황이 다시 바뀌어버린 것이다. 독일에서는 경제적 위기와 불안정한 내부 정치로 인해 동안 소련의 가장 큰 동맹이었던 독일과의 관계는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이는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최선이었던 듯하다. 그는 앞서도 말했듯 현실적인 인물이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싶어 했고, 소련의 경제 수준과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선택이 민족주의, 파시즘을 바탕으로 팽창 야욕을 보이는 히틀러에게 대항하기 위한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상황변화로 인한 정치적, 군사적 긴장 상황 불구하고, 소련이 서방 국가들과의 집안 안보 체제를 채택한 기간 동안에도 소련과 독일간의 무역은 일시적으로 중단된 시기도 있기는 했지만, 크게 심각한 문제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2.3 집단 안보 체제의 분열과 독·소 불가침 조약1930년대 중후반, 스페인 내전 간여, 오스트리아 합병 등으로 나치 독일의 팽창이 더욱 본격화 되었다. 그에 대한 대응 과정 중 국가 간의 공조가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집단 안보 체제 또한 흔들렸다. 이는 특히 영국의 수상 체임벌린이 주도한 이른바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과 1938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간에 체결된 뮌헨 협정에 의해 결정적 위기에 봉착한다.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고, 다시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열강들의 뜻에 따라 맺어진 이 협정에서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들을 배제한 채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역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일에 넘겨주는 것에 합의한다. 이것으로 소련을 다시 한 번 유럽 정치에서 고립을 경험했고, 어쩌면 나치를 살려주며 미래의 더 큰 주적인 자신들 소련을 견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또, 이듬해 나치가 영국, 프랑스의 방관 하에 폴란드 및 헝가리를 분할 점령함으로 인해 소련의 영토는 이른바 파시스트 정권의 영향권과 직접 맞닿게 되었다. 이는 소련 안보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된다. 비록 영국, 프랑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당용으로 한 이 조약에서 중앙 유럽을 소련과 독일이 분할하는 비밀의정서가 작성 되었다.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차지하는 대신에 소련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및 라트비아를 차지하며,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을 차지하는 대신에 소련은 그 동쪽을 차지하고, 소련은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를 차지하기로 한 것이 그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비록 이데올로기 보다는 실리를 챙겨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혁명의 배반자로 여기게 되고, 코민테른 활동에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의 참전을 22개월 동안 연기시켰을 뿐 아니라 광대한 영토를 병합해 완충지대를 확보했다.3. 독·소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제2차 세계 대전독·소 불가침 조약하고 며칠 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약속했던 바와 같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고, 통상적으로 이를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으로 본다. 이후, 서로간의 정치적, 이념적 모순을 딛고 이익을 위해 맺어진 소련, 독일 양국 간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금 무너진다. 불가침 조약은 사실상 아주 잠깐의 휴전에 불과했고, 독일은 1941년 소련을 침공했다. 이는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연히 이념적 차이이다. 두 나라가 가진 이념은 서로 모순적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 또한 존재했다. 히틀러는 게르만 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당시 소련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 코카서스의 유전,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는데 그것들은 결국 소련으로부터 빼앗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한, 최종적으로 히틀러는 조약을 통해 얻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불신했고, 소련의 국력이 비교적 약해져있을 때 공격하는 것이 훗날의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와중에 소련이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뛰어난 지휘관들이 처형당하여 부재하자 기회라 여겨 침공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작전명의 전략을 가지고 소련을 침공했다. 이 작전에서 독일의 목표는 보통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서부전선이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가장 많은 수의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전쟁 기간 동안 사상자 비중이 가장 높았던 동부 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판도를 좌지우지한 중요하고 치열한 전장이었다. 소련과 독일 모두 전쟁에 총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전후 패배한 독일의 상황이 좋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소련의 상황 또한 나빴다. 양측의 상대측 민간인과 포로들에 대한 잔학 행위와 전선에서 양측 병사간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인명 손실 문제가 심각했고, 전투로 인해 농경지와 각종 사회 인프라 등이 파괴되었다.4. 종전 후 독일의 분단과 독·소 관계종전 이후 독일에 대한 소련의 외교적 목표는 다시금 소련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독일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것이었다. 종전 직전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형세를 띠자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독일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독일의 항복 이후 분할 통치를 실시했다. 이는 패전국 독일의 무정부 상태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독일의 군대 해산, 나치 지도자들의 체포와 함께 독일의 통치권과 행정권은 모두 연합군이 수행하게 되었다. 합의 내용에 따라 영토를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국이 분할통치 하던 초기와 달리, 서방 연합국들과 소련 사이의 냉전 상황이 고조되기 시작함에 따라 상황이 변화한다. 양측은 1947년에 열린 외상회의에서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합의 결렬로 4개국 합의하의 단일한 독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곧바로 소련을 제외한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만을 따로 묶어 단독으로 국가를 수립하는 새로운 계획이 감지되었고, 1948년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 내 자신들의 통치 구역을 통합시키고 동일한 경제 단위를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항의하며 소련은 연합국 공동 관리 위원회에서 탈퇴했으며, 서베를린에 대한 서방맺는다.
    인문/어학| 2021.12.01| 8페이지| 3,000원| 조회(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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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관이란 무엇인가
    사관이란 무엇인가목차I.머리말II.대표적인 사관 4가지에 대한 소개1.역사주의 사관2.실증주의 사관3.유물사관4.식민사관III.사관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IV.결론V.참고자료I. 머리말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말하길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그렇기에 과거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왔고 그러한 기록물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적과 유물 등이 함께 남았다. 현재의 우리는 남겨진 사료들을 통해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그 원인을 규명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역사는 보통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기술의 두 가지 의미로 정의된다. 객관적 사실은 역사가 레오폴드 폰 랑케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한 것에서, 주관적 기술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가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한 것으로부터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둘 중 한계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주관적 기술의 영역이다. 역사는 앞서 말했듯 직접 경험하는 것이 불가한 지나간 과거이기에 연구자의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해석의 차이를 다르게 말하면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관이란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견해로, 역사에 대한 역사가의 이해, 해석 원리, 가치관, 관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관은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가의 가치관이나 그가 살고 있는 사회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발전되어 온 만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본 글에서는 여러 사관들 중 가장 대표적인 역사주의 사관, 실증주의 사관, 유물사관 그리고 식민사관에 대해 알아보고, 사관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II. 대표적인 사관 4가지에 대한 소개1. 역사주의 사관먼저 역사주의 사관은 현실 자체가 하나의 방대한 역사 과정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은 역사발전 과정에 있다고 전제한다. 이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1차적으로 시간적 변화 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관점으로, 역사의 세계가 주어진 세계임과 동시에 만들어져 가는 세계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사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의 일관된 흐름이었던 자연법사상에서 벗어난 역사관이었다. 역사주의는 인간을 일정불변의 자연적 원리에 매어두고 획일적인 법칙에 순종하고 생기 없고 개성 없는 인간상을 만든 합리주의를 거부했다. 즉, 역사주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인간 생활에 대해 친밀감을 갖고 그것을 생동하는 상태 그대로 파악하려 하고 역사를 정지된 순간순간의 누적물로서가 아닌 변화와 생성, 관계와 연속의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관점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과 사회 및 지식가지도 역사화하려는 사고방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항상 시간적 변화 속에서 인식하려하는 극단적인 시간 중심적 세계관이라고도 볼 수 있다.2. 실증주의 사관실증주의 사관은 과거의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만을 역사로 인식하는 사관이다.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고 동시에 사료의 내용을 편견이나 선입견, 기타 종교관 등에 사로잡히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엄격한 사료 비판과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강조한다. 즉,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실증적 방법에 의해 증명된 근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해 최종적 평가,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실증주의 사관이 생겨난 초창기인 19세기의 실증주의자들은 역사를 일반적으로 진보의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 과정이 일정한 규칙과 법칙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재구성하려는 점에서 역사주의와 공통성을 지니며 이 사관이 생겨남에 있어서도 역사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개별성의 독자적 가치와 의미를 존중하고 법칙성을 배제하려 한 점에서 실증주의 사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20세기 이후의 현대적 실증 사관은 실증적으로 동원되는 모든 근거를 갖고 행해지는 역사 연구 방법이란 뜻으로 흔히 사용된다. 오늘날 극소수의 사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관에 있어서 실증주의를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채택하기 때문에 독립된 또는 특수한 사관을 일컫는 말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3. 유물사관유물사관은 경제 현상이 기타의 모든 역사 사실들을 결정하고 설명하는 이론으로, 역사 해석의 모든 인과적 요인 중에서 물질적 생산력을 가장 중시한다. 즉,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이 아닌 물질적 생산양식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물사관은 생산 기술의 발달 단계를 중요시하며, 인간이 생산에 참가할 때 사회적이게 되며 일정한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이때 생산관계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사회관계로 주로 그 사회의 주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의 계급관계로 표현된다. 유물사관을 주창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인류가 계급이나 빈부의 차이가 없던 원시 공산제 시기로부터 고대 노예 사회, 중세 봉건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왔으며, 이후에는 공산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고대 노예 사회에서부터 근대 자본주의 사회까지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나뉘어 계급 대립이 존재한다는 점을 두고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인식하는 갈등론적 관점을 보였다. 유물사관은 계속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비롯해서 계급적 모순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변증법적 역사 해석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1950년대에 공산권의 모순 논쟁에서는 모순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아니라, 모순의 지양이나 통일 단결이 그 원동력이라고 주장해 체제 내의 반목·비판의 여지를 주지 않고 공산당의 권위를 지키는 방향으로 유물사관이 대폭 수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물사관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고 현재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4. 식민사관마지막으로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배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조작한 사관을 말한다. 이는 한국에서는 보통 민족사학과 반대되는 의미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에 대한 통치의 용이함을 위해 정책적, 조직적으로 조작한 역사관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식민이라 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식민 운동은 근현대의 식민주의와 달리 중심과 주변부가 서로 정치, 경제적인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6~17세기의 국가들의 팽창과 연결돼 점차 침략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달, 제국주의 발전, 민족주의적 야망 등과 결합되어 19세기에 극에 달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세계사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의 특징이자 배경이 되었다. 오늘날은 식민지의 존재가 형식적으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국제정치가 강대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상 우리 사회는 아직 식민주의 사관의 기만적인 논리와 그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III. 사관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위와 같이 여러 사관들 중 대표적인 넷에 대해 알아보았다. 앞서도 말했듯 사관의 종류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사관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사관은 부정적, 긍정적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먼저 사관은 그 자체가 준비되어있는 하나의 틀이며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시야가 결정된다. 사관이 그 수준과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경험이나 사실에 비춰 입증 가능한 논리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관은 경험이나 사실에 의한 입증과는 거리가 있단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해당 사관이 경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세워졌다고 해도 사실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처리 되거나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관을 수립한 학자가 더 중요한 사실과 덜 중요한 사실을 제 기준대로 선택하여 역사적 전후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같은 가치를 지닌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의 요인을 각별히 강조해 그것이 역사의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문제로도 이어진다. 인과관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공식이나 법칙으로 단순화 시켜 역사 설명에 있어 우월적인 요소로 내세우는 것이다. 사관은 또한 역사 연구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관을 수립한 학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역사철학의 분야에서 벗어나 종교, 윤리, 정치를 설명하거나 선전하는데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슈펭글러의 나치즘이 전체주의를 선전하는데 사용된 것이 하나의 예이다. 사관과 관련하여 이러한 부정적 측면이 존재하고, 위와 같은 점만 살펴보면 사관은 타당성과 논리성을 갖추지 못한 조잡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 느껴질 수도 있다.
    인문/어학| 2021.12.01| 4페이지| 1,000원| 조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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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혁명,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을 중심으로
    시민혁명 ?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을 중심으로목차I.머리말II.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1.프랑스 혁명2.러시아 혁명III.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비교IV.결론V.참고자료I. 머리말중세 시대의 봉건제와 절대 왕정 아래에서 억압받았던 시민들이 사회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 법률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계급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시민혁명이라 부른다. 현재 소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근대의 시민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에서부터 시작해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시민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이 주로 주장한 내용은 시민에 의한 정부 권력 형성과 운영, 세습적 전제 군주제를 깨뜨리는 것 등이었다. 각국의 시민혁명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회구조와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따라 그 성격과 내용이 조금씩 달랐지만, 각자의 상황에 적합한 정치제도들을 발전시키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즉,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구축해가는 과정이었다. 일반적으로 시민혁명에 대해 말할 때 앞서 언급된 세 혁명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다. 그런데 이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으며 그중에는 혁명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비슷하지만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대조적인 결과를 가지고 온 러시아 혁명이 있다. 본 글에서는 시민혁명의 전형이라 여겨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이와는 대조되는 결과를 낳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각각 소개한 후 비교 분석해 보려고 한다.II.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1. 프랑스 혁명루이 14세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 하에서 프랑스 왕권은 국왕친정과 신권이론을 받들었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했다. 이러한 신정왕권 하에 모든 국민들은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18세기 프랑스 농민과 시민의 생활은 처참했다. 귀족, 성직자 등과 같은 사회 특권 계층들은 넓은 토지와 관직을 독차지하고 면세의 혜택을 누렸으나, 이에 반해 농민이나 상공 시민들은 봉건적 속박과 세금에 얽매여 있었으며 빈곤한 생활을 했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시민 계층은 미국의 독립과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불합리한 구식 제도를 타파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한편, 18세기 말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혔고 정부는 세금을 늘리고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으로만 이를 메꿀 뿐 실질적인 해결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에 민중은 더욱 심각한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시민의 압력에 굴복한 국왕 루이 16세는 1789년에 교회와 귀족과 평민 등 3개 신분의 대표를 소집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열었다. 중요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할 권리를 얻게 된 평민 대표들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서로 모여 의논 하였으며 자신들을 국민회의라 불렀다. 교회나 귀족 중에서도 계몽되어 자유사상을 지닌 이들도 이에 가담했다. 커지는 이들의 세력을 두려워한 국왕과 귀족들은 군을 이용해 이들을 억누르려 했으나,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국왕의 군대와 싸워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절대 왕정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퍼져나갔고 프랑스 내에는 혁명의 물결이 번져나갔다.이후 국민회의는 인간 해방 이념을 담은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계몽되지 못한 국왕은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인권선언을 인정했다. 국왕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의회의 여러 개혁 추진에 대해 못마땅함과 동시에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의 망명 계획을 세워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왕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국민을 배신한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군주정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국들은 이에 당황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부의 공격은 시민들이 어렵게 얻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다시금 위협했기에 프랑스인들은 자진하여 전장에 나가 싸웠고 조국을 구했다. 프랑스 혁명은 사상혁명으로 시민혁명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랑스 혁명은 영국, 미국과는 달리 온전히 민중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또 왕을 끌어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한 불평등, 불합리적 법과 제도의 제정까지 확실히 이루어내어 시민 중심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해냈다.2.러시아 혁명러시아 또한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군주제 하에 통치가 이뤄졌고, 군주의 주도로 근대화 개혁을 이어나가면서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제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는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제국 내 근본적인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 계획을 가지고 그에 방해가 되는 일본과 전쟁을 치렀으나 패배한다. 같은 해에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평화와 빵, 노동조합의 설립과 근로조건의 향상을 황제에게 요구했으나 황제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고,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 개선에 맞서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민중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러시아 민중은 민중운동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했고 이것은 러시아력으로 2월에 일어난 혁명의 시초가 된다. 혁명은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이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위에는 같은 처지의 노동자 8만명이 가담했으며 시위는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여기에 또한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가담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 병사대표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황제는 군대를 보내 진압토록 했으나 군인들마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고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그러나 임시 정부는 민중들의 의견을 외면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한계를 보였고, 동시에 경제 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2월 혁명이 끝난 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가져야 하며, 전쟁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시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었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무너뜨렸다. 새롭게 수립된 혁명 정부는 '평화에 대한 포고'와 '토지에 대한 포고'를 발표하여 전쟁 중지와 토지 사유의 폐지를 선언했다. 이로써 '노동자·농민의 정부'를 내세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III.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비교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는 모두 식민지 상태를 경험하지 않은 부유하며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국가였다. 이들은 내부적으로 전제정이라는 구체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 주변의 경제적으로 보다 발달되어있는 주변의 군사적 경쟁국들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위기는 내부의 구조적 조건 등과 결합되어 국가 내의 여러 가지 변혁을 이끌어냈다. 군주제의 권위는 외부의 위협이나 심화된 경쟁으로 인해 분노한 민중에 굴복해 구체제의 중앙 국가 기구는 그 능력을 상실했다. 그렇게 구체제와 그들의 중앙 집권화 되어있던 행정부 그리고 늘 군주에게 충성했던 군대는 분열되었으며, 그 결과 아래로부터의 폭동에 의해 시작되는 사회적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으로 두 나라는 모두 지주에 대한 농민 폭동으로 농업적 계급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고, 군주의 능력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던 전제 국가에서 관료적이고 대중을 포용한 민족국가로 변모했다.두 나라의 혁명은 위와 같은 공통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혁명의 결과를 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 전형적인 부르주아 자본주의 또는 자유 민주적인 성격의 20세기 이전 유럽의 혁명이었다. 이에 반해 러시아의 혁명은 반절대주의적이고 국가지상주의적인 발전혁명인 동시에 무산자 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혁명의 결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제의 완전한 출현이 보장되었다. 이는 집권화 되고 행정적인 틀로서의 국가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이전과는 달리 국가 경제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장 질서에 따라 유도 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전체 국민의 경제를 통제하고 모든 국가 조직들은 당에 의해 주도되었다. 관료제도가 정비되고 확고한 행정적 틀을 갖춘 국가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프랑스와 같지만 경제와 국가 행정,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중요한 일들은 공산당의 고위 지도자들과 그들의 비밀경찰들에 의해 주도되고 통제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소비에트 체제는 공산당에 의해 행해지는 독재적이고 강압적인 정치적 통제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아용하는 공식적 위계질서를 따르는 직업 관료 행정이 혼합되어있었다.
    인문/어학| 2021.12.01| 4페이지| 1,000원| 조회(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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