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정말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백제를 멸망시킨 것일까?“백제”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의자왕과 삼천궁녀’이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서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문란하고 부정부패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 의자왕과 삼천 궁녀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역사를 배워보고자 알아보았다.의자왕은 의롭고 자애롭다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며,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또한, 즉위 직후에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죄의 경중에 따라 범죄자를 풀어 주기도 하고, 당나라와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등 왕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이를 보면 의자왕이 삼천 궁녀와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우선 7세기 백제보다 강력했던 조선시대 후기의 궁녀 수도 약 500~600명뿐이었는데 의자왕 에게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중국 역사서에서 으레 수많은 궁녀를 지칭할 때 통용해서 쓰던 표현일 뿐이며, 불교에서 삼천대천세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의 세제곱 즉, 10억을 의미하는 것이다.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 보면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의자왕’과 ‘예식’이 함께 항복했다고 적혀 있을까? 어느 날 중국 낙양에서 무덤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이는 예식진의 묘였는데 그 묘지명에는 대당좌위위 대장군이라고 적혀 있었다.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당왕조의 16위 중 하나다. 당나라의 황제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백제 멸망 당시 장군이었던 예식과 당나라 대당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은 무슨 관계일까? 답은 간단하다. 둘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항복한 장수가 당나라의 고위직이 될 수 있었을까? 백제 멸망 직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당시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예식 장군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당 연합군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18만 연합군의 식량이 전투 중에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은 신라로부터의 조달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식량은 백제의 진현성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마저도 그곳에 주둔해 있던 백제군 때문에 불가했다. 이러한 유리한 상황에 의자왕은 도대체 왜 갑자기 항복을 한 걸까? 중국의 어느 역사책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당시 의자왕의 항복을 서술한 부분인데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닌 장군 예식을 주체로 쓰여 있다. 당나라는 개방적인 국가로 이민족이라도 공을 세우면 대우해주고, 공을 자세히 적었는데 예식진은 이상하게도 공적에 대한 부분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고 오직 ‘대당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이라고만 적혀 있다. 그의 공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민족 사학자 신채호는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당의 포로가 되어…’ 여기서 ‘웅진의 수성대장’이란 예식을 말하고, ‘동맥을 끊었다’는 자살을 의미한다. 신채호의 서술을 해석하자면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의자왕은 자살하려고 했다’가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다른 역사서에는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이라 쓰여 있다. 명확하게 해석된 것을 제외하고 ‘장’만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 ‘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장’에는 명사로는 ‘장수’, 동사로는 ‘거느리다, 데리고 가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동사로써 쓰인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을 해석하면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을 했다.’가 된다. 당나라의 식량 보급길까지 막은 백제가 그 유리한 상황에 항복이 웬 말일까? 중국 현지의 역사 전문가는 이 ‘장’의 의미를 ‘사로잡다’로 해석하였고, 이는 대장 예식의 배신을 뜻한다. 대당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의 공적은 “주군을 배신하고 항복 시킨 것”이었다.660년 7월 18일,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항전 중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주군을 배신한 대장 예식진에 의해 항복하게 됐다. 그렇게 678년간 이어져 온 찬란한 백제는 한 장수의 배신에 의해 멸망했다. 의자왕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1300여 년이 넘도록 후대의 사람들에게 조롱 당해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나라를 잃은 것도 서글픈데 지금까지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으로 비난 받는 것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것 같다.문종은 정말로 병약하기만 했을까?(부제: 문종의 병약한 이미지는 왜 만들어졌는가?)조선 5대 왕이자 세종대왕의 장자인 문종은 대중매체에서 흔히 수양대군을 포스 넘치는 악역으로 만들기 위해 문종이 동생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에 아들인 단종을 잘 부탁한다며 힘없이 죽어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단명한 유약한 왕처럼 묘사되곤 한다. 수양대군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즉위 후 말년에 갑자기 등창이 심해져 사망한 건 맞지만 원래부터 병약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종은 체격도 크고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영화 “관상”에서처럼 그리 병약한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문종은 왜 사실과 달리 병약하다고 전해졌을까? 이는 대중매체의 역사왜곡 때문인데, 특히 드라마 ‘왕과 비’, ‘인수대비’가 대표적이다. 예로 들자면, 인수대비의 “여덟 왕자 중 수양이 가장 잘났는데 병약한 금상에게 왕위를 물려주다니…”, 양녕대군의 “효도 빼고 한 게 없다.”, 문종의 “나보단 네가 더 왕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등의 대사들이 있다. 문종이 이룬 업적들이나 문종의 강력했던 정통성을 보면 이런 대사들은 망언에 가까운 궤변이라 할 수 있다.문종의 정통성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 선대왕이 직접 정한 적자이자 정실부인이 낳은 장자였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이 찬탈은 커녕 문종 생전 눈치를 보느라 바빴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실록에 따르면 영화 ‘관상’에서의 포스 넘치는 수양대군의 이미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이 문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기록들이 있다.다음으로는 문종의 업적들을 살펴보겠다. 사실 문종은 명군에 속할 만한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러나 여러 고정 관념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병약한 인상과 함께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는 조선의 왕이다. 문종의 대리청정은 실록에 따르면 세종 24년 7월부터 시작하여 세종 승하 때까지 7년 반 동안 계속되었기에 세종의 치세 후반의 대부분은 사실 문종이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종은 이성계의 증손자 답게 군사적 지식에 조예가 깊었다. 세자 시절부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가장 발달시킨 것이 바로 군사 부문이다.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했으며, 군제를 개편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재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화차 같은 신병기도 직접 설계했으며, 세종 기에 이루어진 화포의 규격화 및 국가적인 법제화, 부대 운영과 인원 수의 결정 등에도 참여했다. 또한,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을 편찬하라 명하였고, 중 진법 또한 문종이 편찬하여 성종 조에 개정했다고 한다. 즉, 문종은 화차를 직접 개발해 그 운영법을 스스로 정하고, 진법을 짜는 방법도 치밀하게 고안해낸 진정한 밀리터리 군주이다. 이 화차를 “문종 화차”라 하는데 이 화차는 후기에 성종 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활약을 한다.마지막으로, 일반인 대다수는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문종은 세자 시절 가뭄을 걱정하여 궐 안에 빗물의 양을 재는 실험용 그릇을 만들었는데, 이 그릇이 바로 측우기의 시초인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때마다문종은 지금도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시대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역사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군으로 통하는 왕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고 말이다. 대중매체의 지나친 역사왜곡으로 폄훼된 문종의 이미지와 위대한 업적들을 열심히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