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젠더 연구 입문 요약000‘개조’의 시대, 가정의 개량: 1920년부터 가정의 개량은 본격화 되었다. 당연시 되어 온 부권주의(남권주의)의 전근대적 가정을 탈피하여 모두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정으로의 변화가 이뤄져왔다. 그리고 이 개량의 문제는 비단 가정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사상적으로 ‘개조’가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 뒤로 1920년부터 한국에서는 각종 매체를 통해 개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구여성의 설움 – 시골 색시 탄식가: 가사는 1900년대 개화 가사라는 변종을 만들어 내고 소멸되었다. 그 중에서 여인네들의 삶을 담은 규방 가사도 존재한다. 이 규방 가사에서 영남 지방의 는 특히 인기가 있었다. 1920년대 경상북도 영덕 부근에 살던 박씨 집안의 며느리, 안동 권씨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가사는 시골 색시의 탄식을 담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총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서울로 유학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로 이 남편이 양복쟁이가 돌아온 날에 자신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 비통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신부인, 신여자, 신여성: 구여성과 신여성이라는 단어는 본래 자립적으로 생긴 말은 아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여성상을 ‘신’으로 나타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전의 여성상을 ‘구여성’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신여성’이란 말에 앞서 ‘신부인’이나 ‘신여자’라는 말이 쓰였지만 1920년대 들어서 ‘신여성’로 통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표준으로는 “신식 교육의 중등 정도를 마친 여자”을 제시하였지만 그런 여성은 극히 드물었다. 공식적으로는 교육 정도를 신여성의 표준으로 삼았을 지 몰라도 실제론 신여성의 외양도 한 몫 하였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신여성의 당당하고 독특한 외양은 실제로 신여성을 나누는 큰 기준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스위트홈의 꿈: 1920년대부터 자유 연애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연애를 통한 결혼이 근대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가족 체제에서 벗어나 부인과 세 네 명의 자식으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족, 흔히 이런 가족을 ‘스위트 홈’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래서 이런 스위트 홈을 이루고 싶은 남성은 조혼으로 생긴 구여성 부인을 버리고 신여성과 연애를 통해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구여성과 이혼하는 것은 근대적인 가정을 이룩하는 데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피해자라고 단순히 치부하였던 것이다. 신여성과의 연애를 통해 스위트 홈을 만들기 위해선 신여성을 못마땅해하는 대가족 하에선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교육 – 구여성의 출구?: 신여성은 어딜 가나 매혹적인 존재였다. 그 때문에 신식 문물을 받아 들인 많은 남성들은 이혼을 결심하게 되고 큰 소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중에는 이혼 동맹이 나타날 정도였다. 하지만 구여성은 철저히 그 생각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남편이 이혼을 고하고도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여도 세상에 이목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런 구여성도 교육을 통해 신여성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몇 있었다. 하지만 과연 구여성이 교육만으로 신여성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의문이 따른다. 구여성과 신여성은 생각 체계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교육을 한다고 쉽게 바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신식 사랑과 신식 가정: 앞서 스위트 홈에서도 연관되어 있지만 전근대적 가정에서는 부부 사이에도 사랑 대신 공경과 분별이 존재하였다. 또한 전근대의 가족 제도에서 아내는 단지 아내 만이 아니라 며느리이고 어머니의 역할도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스위트 홈과 같은 로망을 실현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유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여자들은 사랑이 무엇이기에 남편을 공경하지 않고 이런 말을 쓰느냐” 하고 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10년부터 20년대를 넘어서 신식 사랑과 신식 사랑은 끝없이 발전하게 되었고 모두들 신여성과 함께 스위트 홈을 꾸리길 원했다.독살 미인 김정필의 항변: 조혼이 불러온 참극, 독살 미인 김정필의 사건은 193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20세 여인 김정필은 17세 김호필에게 시집을 갔지만 본래 자기 남편의 외형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하였고 자기와 열두 촌 되는 그 동리 김옥선과 정을 통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다른 이상적인 남편을 찾던 중 ‘랏도링’이라는 쥐약이 사람 목숨도 잡는 약이라는 말을 들어 음식에 그 약을 타 남편에게 주어 살인을 저질렀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표정과 어조를 보아 무죄라고 생각하여 동정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사형이 마땅하다며 연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잔인하게 자신의 남편을 죽여서 화제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모의 여성이어서 또 한번 화제가 되었다.연애, 모두의 것: 김정필 사건은 1923년 강명화 자살 및 1926년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 자살 사건과 함께 1920년대 최대의 연애 사건 이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질서에의 동경이란 점에서 큰 시사점이 있다. 처음에는 신여성과 신남성들만 이런 동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전 계층의 희망과 반발이 생기게 되었다. 신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외모가 변변한 것이 아니었고 구여성이라고 해서 폐쇄적인 가족에서 계속 순종적으로만 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연애란 것도 모두에게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 주제 안에서 끊임없이 남성이 여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는 각자 개인의 문제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이해: 기말고사 대체 레포트 – 소수자 문제000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을 보면 소수결 게임이 나온다. 다수결과 반대로 어떤 질문에 Yes 또는 No 로 대답하여 소수가 택한 답이 살아남는 게임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독특하지만 이질감이 드는 게임이란 생각을 했었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가 승리하는 소수결 게임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집단(少數集團), 줄여서 소수자라 부르는 집단은 한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그 특성이 소수에 위치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소수의 위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적으로 밀리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피력되는 의견의 강도가 약한 것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오랫동안 소수자의 입장에 있었다. 여성의 투표 참여 또한 20세기 초 중반에 주어졌을 정도로 여권 신장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말이 많고 여성이 소수자의 입장에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통계상으로 볼 때는 남성이 조금 더 많을 지 몰라도 권리를 가지는 것에 있어서는 남성들이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소수자 문제는 통계상으로 따질 문제는 아니란 것이다. 나는 이번 한국 사회의 이해란 수업을 들으면서 한국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수자 문제가 무엇일 지 고민해보았다. 여성, 흑인(유색인종), 장애인 등 여러 부류가 떠올랐지만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고민을 가장 깊게 한 것 같아 성소수자를 이번 주제로 삼았다. 성소수자는 어떤 사람이고 이 소수자들이 펼치고 있는 권리 신장 운동과 해결 방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성소수자(性少數者), 영어로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는 성적인 면에서 소수자, 즉 성별, 성 정체성, 젠더, 성적 지향, 연애 지향성 등 성 결정 요소 측면에서 소수의 의견에 위치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성소수자들의 상징 깃발은 무지개기인데, 모든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포괄 아닌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의문 상태인 퀘스쳐네리 (Questionary)를 포함한다. 성소수자를 정의할 때는 크게 두 가지,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차이로 나뉜다. 고전적으로 성소수자를 대표하는 LGBT 진영은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소수자들을 말한다. 자신이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성이 동성인지, 이성인지, 없는 지 – 또 그에 따라 자신의 육체적 성과 정신적 성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지 – 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LGBT에서 확산되어 성적 지향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성소수자의 부류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퀘스쳐네리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근친상간, 일부 성도착증 – 페티쉬에 관한, SM플레이, 야외노출, 페도필리아(소아성애)와 같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도 성소수자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한국에서의 성소수자 인식은 상당히 음지에 갇혀있다. 한국인의 절대 다수는 자신 주위에는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수많은 그들은 커밍아웃(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다른 이에게 알리는 행위. 다른 이가 성소수자임을 알리는 것은 아웃팅이라고 함)을 하고 있지 않은 것뿐 이다. 전 세계 성소수자 인구 수는 약 7%를 웃돈다고 한다. 꽤 많은 사람이 성소수자의 위치에 있지만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만약 커밍아웃을 했을 시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지 않은 성소수자는 불이익이 잇따를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성별과 결혼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에선 기독교 단체에서 심한 동성애 혐오 세력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가 살아가기 더 힘든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는 항문성교를 하기 때문에 에이즈 발병률이 높고, 에이즈 치료를 위해 국비가 투입되며 세금 폭탄을 맞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면서 혐오 세력을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호기심의 원천이며 가장 밑바닥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소수자들도 사람의 자신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려는 운동을 서서히 펼치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에서 우리나라는 그 운동이 아주 늦게 시작된 편이다. 인구의 51%가 동성결혼을 찬성한다고 말하는 일본이나 성소수자, 그 중에서도 트렌스젠더에 대해 굉장히 관대한 태국, 아시아에 비하면 젠더 이슈에 대해 상당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유럽과 미주에 비해 우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우리나라에도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다들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 건 불과 30년이 되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냉전이 해소되며 다양한 진보적인 담론들이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PC통신의 발달로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소통이 자유로워 지면서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게이인권모임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연구소’, ‘한국퀴어문화센터’ 등이 속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각 대학교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동아리를 발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숨어서 활동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한국의 초반 성소수자 운동은 주로 익명성에 기대며 암암리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밀레니엄 시대에 도달하면서 한국 사회에 있어서 성소수자 운동도 적극성을 띠게 된다. 가장 유명한 운동으로는 ‘퀴어문화축제’가 있다. 퀴어(Queer)는 본래는 ‘이상한, 기묘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이 의미를 대립적으로 받아들이며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그래. 나 이상하다. 그래서 어쩌라고?”란 식의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퀴어라는 용어를 전면으로 내세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펼쳤다. 한국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인 퀴어문화축제는 한국퀴어문화축제 (Kor!”로 결정되었고 5월 23일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여혐이냐 정신병이냐의 문제로 극심했던 젠더 대립이 이번 페스티벌에도 보이게 되었다. 성소수자 문제에서 여혐(여성혐오)문제가 직접적 관계가 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성소수자 문제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초반에 여성의 권리 신장이라는 목표에서 점차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소수자 문제에서는 육체적 성과 정신적 성을 구분하며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명확하게 소유하려는 데서 내·외부에서 갈등을 빚는다. 이런 젠더의 구분은 역시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중요한 핵심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같이 가는 경향을 띤다. 그래서 이번 5월의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은 후 한 달 뒤인 퀴어축제는 전년도에 비해 관심과 주목을 많이 받게 되었다. 작년에 이어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와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핀란드, 독일 대사관 관계자들이 한국퀴어문화축제를 관람하며 관계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한국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들의 권리 신장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고 성소수자 권리 신장을 공론화 하는데 상당히 큰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축제에서도 성소수자의 부모님들이 나와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모습이 SNS 상에서 화제가 되면서 자신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반성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두운 면도 분명 존재하였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까진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 지자체에게 페스티벌을 허가 받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트러블들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공론화되는 문제는 ‘퀴어축제 노출 논란’이다. 한국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대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일 년에 딱 한 번, 페스티벌에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공공연하게 홍보하고 다닌다 (물론 이 의미는 이 축제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것에서 모자라 엉덩이가 훤히 다 보이는 바지를 입고 다니거나 성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행동들을 퍼포먼스라고 하며 공공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곳곳에서 보이고 언론에서는 이런 자극적인 컨텐츠만 다루기 때문에 ‘퀴어축제는 이상한 축제’라는 인식이 박혀버린 경우도 꽤 있다. 검찰은 “누구든지 여러 사람의 눈에 띄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드러내거나 과한 노출을 할 경우에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하여 검거하거나 기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소수자들을 탄압하기보단 노출 행위가 법을 어기는 수준까지 이르러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에 당연히 막아야 하는 퍼포먼스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퀴어축제에서 노출은 계속 진행 중이며 그들은 ‘강력한 저항을 드러내는 표현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암암리에 하는 성소수자 운동은 축제라는 이름을 내걸며 점점 진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선 성소수자들의 인권 신장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활동들이란 생각이 든다. 동성애나 양성애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 내 친구의 일이라고 여기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이런 캠페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내 주위에 퀴어축제를 갔다 온 친구가 있다. 퀴어축제를 다녀오고 나서 그 친구는 성소수자가 외계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단지 우리와 성적 취향이나 성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상당히 몰상식한 생각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속으로는 그들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나도 100% 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은 못 할 것 같다. 아직 그런 사람을 접한 경험도 없거니와 이건 결국 차이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지를 깊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인 나를 레즈비언 여자가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나도 레즈비언 그녀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정상이문이다.
The Vitalization of K-League000IntroductionIn 2002 Korea & Japan WorldCup, all of Korean shouted victory of Korea soccer. They called themselves to the "Red devil". This WorldCup showed Korean's passion for the WorldCup into the world. According to the Samsung Economic Research Institution (SERI), the Europe, China and Japan estimated the image of Korea to "great power of unity" and "Korean's fervor for the soccer" (Min Seong-hong, 2004: 122).Image 1: The occupancy rate of seat in the domestic pro-sport (Data by 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But the occupancy rate of seat in the soccer is the lowest which is compared with the baseball, basketball and volleyball. Many Korean have a lot of interests only in the WorldCup game. They have no or a little interests in the K-League games. Usually, they don't know where their cities' main stadiums are or which names of their cities' leagues are. They just have fanatical about the playing the soccer in the WorldCup. Gang Hyo-min sa such as Bak Ji-seong or Yi Yeong-pyo.The K-League also has quite complicated problems. On August 6 in 2014, there was a soccer game between FC Seoul and Ulsan Hyundai at Seoul WorldCup stadium. Originally it was no problem to play a soccer game in the Seoul WorldCup stadium because that stadium was the main stadium of FC Seoul. But the concert, 'Hyundai card 2014 citybreak concert' borrowed part of the stadium so that spectators who were going to watch the K-League game and had bought seats in section E of the stadium were unable to be seated. In addition, there has been other incidents such as the case of ruling about suits of the corruption and this has impacted all of the teams in the K-League. Using the interest in soccer and honest marketing, the K-League has to improve its reputation and clear away any hint of corruption so that soccer can be a successful cultural goods of Korea.Section 1: Problems between the K-League and the Soccer PlayersMany Korean boys have dreamed of becom promoting players in the K-league.Section 2: Problems of Marketing and Sponsor in the K-LeagueThe Bundesliga, the Primier League, the Primera División, the Chinese Super League and the J League Division. There are top 5 leagues which have the highest average number of audiences. According to the KFA statics for 'The Present Condition of Soccer Spectators before and after the WorldCup', the average number of audiences in the K-League are 15,839 after the 2002 Korea & Japan WorldCup. But the average number of audiences in 2013 are just 7,818. The number of men who are enjoy to watch the K-League games is markedly lower than before. The marketing structure is the biggest problem to reduce the audiences of the K-League. In order to organize normal marketing structure, the K-League should change firstly dependence relation with the sponsors.On August 6 in 2014, the "Seoul WorldCup Stadium Affair" is suggestive for the K-League. Because of safety hazard, the Seoul Facilities Management Corpted an arrest warrant being suspected of the accepting bribery from foreign players' agent. After a year, the nine players participated match-fixing in a game of the Sangju Sangmu FC. This team was arrested on a suspicion in 2011. Lately in 2014, the Bucheon FC accepted bribery from the players so that this team changed their coaches and five players in the Bucheon FC who participated the illegal gambling were suspended for six months. These corruptions in the K-League suggest improvement points. These teams remain in the lower ranks of the K-League. The Daegu FC and the Bucheon FC are in the K-League Challenge and the Sangmu Sangju FC is the lowest team of the K-League Classic. Differently to the other teams to have the sponsorship with big conglomerates, cohesion and inner power of three teams aren't advanced. They have no choice but to become trivial teams. This is reality that the teams which have no sponsorship are regressing into the K-League ranking. Graham Brooks, Yi Ju-rak ande corruptions. The K-League didn't regain the equality from the KFA. But the K-League showed their try to improve their power from the "Promotion and relegation" system. Still, this system don't settle down the K-League perfectly. If the K-League gains the financial power, it can fix their residence into the K-League.The most important point to rescue the K-League is the proper financial structure. As the case of the corruption, the corrected financial structure isn't flawless answer. But these capital and profit structure don't deteriorate the situation more badly. A well-ordered sport can become the cultural goods and business representing Korea. I assure that independent financial structure must increase the audiences for the K-League and vitalize of the K-League.BibliographyBrooks, Graham and Lee, Julak [Yi, Ju Rak] and Kim, Hakkyong [Gim, Hak Gyeong]. "Match-Fixing in Korean Football: Corruption in the K-League and the Importance of Maintaining Sporting Integrity." International J14).
서평: Eurocentrism과 Orientalism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아시아000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동아시아사를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사라는 용어가 생소할 지라도 중등기본교육을 이수한 자라면 ‘국사’라는 과목으로 배운 내용이 동아시아사에 대부분 적용이 될 것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근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 몰락하는 청의 시대와 새로운 중국의 탄생. 이것이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동아시아사의 큰 뼈대이다.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 또한 그 것이 동아시아사의 대부분인 것인 냥 여겨왔다. 하지만 미야지마 히로시의 라는 동아시아사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서구 중심의 근대중심중의로 동아시아사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비판을 내놓았다. 동아시아사를 단순히 ‘전근대적’인 역사적 아픔으로 치부할 것이 아닌 상호교류와 트랜스내셔널한 관점으로 관통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1부에서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동아시아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고 1부에서 제시한 방향을 토대로 2부는 연동하는 동아시아 관계를, 3부는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개념인 ‘유교’에 대한 언급을 마지막 4부에서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자치운동과 같은 비교사의 동아시아사가 저술 되어 있다.우리는 ‘전근대적’이라는 말을 역사에서 자주 사용한다. ‘전근대’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상대적인 ‘근대’라는 개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본 다는 것은 의미한다. 근대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얼마 지나지 않은 가까운 시대’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인 의미로서는 ‘봉건시대가 끝난 다음에 전개되는 시대. 그리고 1) 공동체에 대한 ‘나’라는 개인의식의 성립이나 개인존중 등의 개인 우월 사상을 내세워 따지게 되는 시기 2) 자본주의의 형성이나 시민사회의 성립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근대’라는 개념이 성립되기 시작한 곳이 서구이며 이러한 ‘서구중심주의(Eurocentrism)’은 곧 근대에 의한 전근대의 식민화인 ‘근대중심주의(Moderncentrism)’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15~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로 개인의식의 성립과 개인존중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 이후 17~18세기 이후로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가가 탄생하게 되며 자본이 활발히 융통되며 시민사회가 성립되게 된다. 더 이상 귀족 혈통이 아닌 자본가가 힘을 얻게 되며 자유시장이 형성되며 사람들의 개인의식과 가치 정립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근대’라는 개념은 18세기에 들어서는 역사가들에게 ‘더 낫다’라는 심화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단순히 ‘고대’와 대비되는 ‘현재’라는 의미를 넘어서게 되고 ‘중세’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중세는 근대보다 덜 발전된 시대’로 포지셔닝 되었다. 무지의 시대인 ‘중세’을 타자화 하며 근대-전근대를 이항대립적으로 편성하면서 ‘근대’는 완전히 색다른 세계로 여겨졌다. ‘근대’로 나아가는 것은 곧 성공적인 사회로의 발돋움이었고 서구는 그 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이런 서구중심주의는 동아시아사 역사연구에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애초에 ‘근대’라는 개념이 서구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서구적 근대가 만들어 낸 표준적인 발전론(목적론)의 역사인식과 시간관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의 ‘근대’는 19세기 중반 ‘서구의 충격’ 이후 형성된 것으로 바라본다. 능력에 기반을 둔 관료제와 과거 제도,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특권이 통하지 않는 토지소유구조, 당시로선 가장 개명한 합리적 사상이었던 주자학 등, 서구에서는 근대 이후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이 서구적 근대를 접하기 전에도 동아시아에서는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구적 근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서구의 충격’ 이전과 이후로 동아시아의 근대는 나뉘게 되며 ‘근대’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발전의 측면에 부합하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특성들은 무시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국사 시간에 배운 ‘근대의 조선, 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아시아사는 최근 20년 전까지 이와 같은 관점으로 쓰여왔고 서구 근대적 시각으로 쓰여진 동아시아사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 들여왔다.하지만 최근 20년 전부터 ‘새로운 세계사’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전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중국의 영향이 크다. 처음 중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은 동아시아사의 전반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의 저자인 훙호펑과 이 책의 저자는 ‘전근대’ 동아시아 또는 중국의 역사상을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 간의 유기적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일찍이 미야지마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근세’를 ‘소농사회론’으로 파악한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했었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특질을 서구(유럽)적인 기준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성에 기반을 두고 이해함으로써 서구와 다른 동아시아사의 독자적 모델을 형성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서구와 달리 동아시아의 개성적이고 독특한 정치 형태 (과거제도와 집권적 국가), 사상 (주자학), 경제 (집약적 벼농사), 사회 (종법제도)적 역사 경험을 상호유기적으로 관련 지어 이해하려고 한 점은 그들이 동아시아사를 색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난 이 중에서 훙호펑이 언급한 ‘중국의 초기 근대와 근현대의 연결’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훙은 1740년부터 1839년에 이르는 ‘초기 근대’ 중국 저항운동의 형태나 내용이 서구 사회과학자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서구의 단선적 발전 과정을 추종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서구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전근대시대의 저항과 반란은 대부분 반동적이고 퇴행적이며 국지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초기부터 중앙집권국가와 자본이 부상하며 광역적이고 계획적인 저항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 시기의 저항은 단순한 국가 권력의 거부가 아닌 협상의 문제로 새롭고 보편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런 일련의 저항운동의 순서가 비서구 후발국에서 동일하게 반복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훙의 주장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의 중국의 저항운동은 세 가지의 물결로 볼 수 있으며 첫 번째 물결은 가부장적인 지방과 중앙권력에 충성하는 백성, 두 번째 물결은 아주 반대로 중앙권력에 저항하는 백성,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물결은 지방정부에게는 적대적이지만 중앙정부에게는 호의적인 백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서구 사회의 저항과 반란의 순서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구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저항과 반란의 공식’과 같이 전근대-근대로 이어지는 저항운동에 중국의 저항 역사가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중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저항 운동이 그에 맞춰 성격이 변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이처럼 훙과 미야지마는 동아시아의 중국을 예로 들어 서구 근대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사’를 써야한다고 이야기한다.이처럼 중국을 선두로 한 동아시아사의 새로운 관점에 관한 문제는 중국-일본-한국, 이 삼국을 담아내는 동아시아사로 이어지게 된다. ‘서구의 충격’ 이전의 동아시아 전반에 대해 역사 연구 방향과 관련된 시사점을 주는 일들이 역사학계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시아에 비해 유럽이 우월하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반박하는 구디(Jack Goody)의 최근 연구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 자유, 휴머니즘, 개인주의, 낭만적 사랑 등의 키워드가 서구에 근원을 두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길 “고대는 반드시 봉건제에 선행하고, 봉건제는 유럽의 자본주의에 불가결하였지만 이러한 경로는 (주로 기독교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유럽의 버전”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서 최근까지도 이어져오던 한국사학계의 서구 근대중심주의에 대해 자각할 수 있었고 단순히 ‘서구의 충격’이라는 부분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바라봐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사학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고 나오는데 특히 ‘중국 중심주의’에서 바라보는 한국사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한국사학자 던컨(John Duncan)은 이 문제에 대하여 “현재 더 많은 사람이 한국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중국에 대한 연구가 한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제공할 것이라는 견해를 종종 접하곤 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동아시아사의 대부분 쟁점사항은 중국에 관한 역사이다. 따라서 중국 중심적 인식이 생겨나게 되며 중국 역사와는 비슷하지만 또 다르게 걸어온 한국의 역사에 대해 외면 받게 되는 상황도 초래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의 토지소유권은 서구의 중세와 달리 ‘근대적’ 내지 ‘일물일권적·배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나 일본의 경우 지주제 역시 배타적 소유권이 확립된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달리 조선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적 질서와 무관한 ‘전근대’에 발생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들은“조선사회가 비근대 사회였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여 소유권도 비근대성을 띠고 있었다.”거나, 대한제국기를 포함하여 조선 왕조는 어디까지나 전근대적 범주에 속하였다고 단정함으로써 기껏 발견한 조선사회의 주요한 특성을 서구와 근대중심주의의 인식 틀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배운 동아시아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다른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은 ‘재정립’이라고 단순히 말하기엔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우리의 근대는 시작되었다고 단순 서술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동아시아의 유교적 질서, 복잡한 국가 질서 관계, 서구보다 더 앞선 경제 및 각종 토지 제도 등 동아시아적 문화 가치가 등한시 될 수 있다. 내용을 한 참 읽다 보니 책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동아시아가 지금 몇 시인지 묻는 것은 서구 중심의 근대적 사유관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통합적이고 여러 나라를 관통하는 시대사상적 배경이 결합된 역사관으로 동아시아사를 바라볼 때 그때야 비로소 동아시아의 시계 바늘이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000 서평 과제
한국현대사 서평; 유신정권 박정희와 그를 통해 보는 현재 한국 정치00010월 27일, 국회에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 감사에 관한 뉴스를 최근에 보았다. 이 국정감사에는 방송문화진흥회 (MBC 대주주) 이사장인 고영주가 참석하였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재인이 공산주의자고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는 적화(통일)가 되는 게 시간문제다” 라고 고영주가 언급한 내용을 제시하며 “대통령이 되었으니 지금 적화되고 있는 과정입니까?”라는 질문을 그에게 하였다. 고영주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자신의 소신대로 계속 밀고 갔으면 지금 적화 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고 답하였다. 그의 주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방문할 것이고 사드 배치를 안 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을 기반으로 문 대통령이 반미와 친북 좌파의 성향을 크게 띄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그의 답을 듣고 박 의원은 비상식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언행이라 지적하며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방문진(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자격이 없다며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이 짧은 국정감사의 모습이 현재 한국의 역사와 정치의 축소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한다.좌파 성향의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의 발언과 우파 성향의 방문진 고영주 이사장, 사실 어느 쪽이 맞다고 이야기 힘든 일이다. 의 서문처럼 한국 현대사는 아직까지 치열한 ‘역사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현재 기득권 세력들은 상대와의 논쟁과 경쟁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건 지금의 여당이 야당인 시절이었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역사 책은 여당의 입맛에 맞게 다시 쓰여졌다. 책에서 언급되는 ‘국정교과서’ 문제도 위의 내용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례이다. 하지만 ‘국정교과서’의 문제가 박근혜 정권, 극우파의 문제만은 아니다. 민주당 또한 그 시초는 ‘한국민주당’이라 불리는 친일파 정당이었다. 그들의 떠한 정치적 사항에 대해서 ‘나는 우파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현 정권에 대해 늘 비판적이어야 돼’ 혹은 ‘나는 좌파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북한의 공조에 대해서 늘 찬성해야 돼’와 같은 맹목적인 동조는 하지 말아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은 현 정치를 보는 안목을 선사한다. 역사가 책 안에 갇혀 있지 않고 현재 정치와 대부분 연관성을 가진다. 비록 현대사라는 것 자체가 현재 정치와 관련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 ‘국정교과서 문제’, ‘최순실 게이트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와의 관계’, ‘과거의 미군정의 입장으로 보는 사드배치 문제’와 같이 일제시기 이후로부터 87체제까지의 현대사 문제와 현 정치 사항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 지에 대해 연관을 잘 지어 논 책이다. 나는 그 중에서 유신 정권이라 불리는 박정희 정권에 관한 부분을 자세히 논하려고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한 박정희, 그리고 유신 체제가 현 정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그의 일생을 통해 유신 정권의 전반적인 사건을 알아보려 한다. 박정희는 1917년에 태어나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가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만주군관학교의 교장은 “모든 조선의 젊은이들은 다카키 마사오를 본받아라”고 말했다 한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젊은이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그이다. 그 이후 남조선노동당에 들어가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 총책으로 일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극우의 박정희가 아닌 공산주의자 박정희의 모습이다. 그는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업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하였다.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은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남한의 국군에 침투하게 되면서 결국 여수 14연대 반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 때 적발된 공산주의자들은 대거 숙청되었지만 박정희는 같은 만주국 출신인 백선엽 다. 그는 이러한 미국의 상황에 힘입어 확실한 경제 개발과 국제 사회와 발 맞춘 적절한 평화통일 언급 등으로 계속하여 정권을 유지해왔다.그는 지독한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구•경북 지역에서 반 우상화 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장경제체제는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면 우리도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올 때가 바로 유신 정권 시기다. 이런 부분은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제헌헌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제헌헌법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작성되어 있던 관련 헌법문서들을 참조하여 40여 일이라는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정통성을 뒷받침할 근간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제헌헌법에는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국가 설립이 완벽히 되지 않은 터라 ‘시장경제’ 개념이 수립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은 “주요기업은 국유•공영으로 하고 국방 또는 국민생활상 필요할 경우 사영기업을 국•공유로 한다”고 쓰여져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사회주의 정신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과 5•16 쿠데타를 거쳐 1963년 헌법에서 ‘임시정부’을 헌법에서 삭제한다. 그 대신 4•19와 5•16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문구를 헌법 전문에 넣게 된다. “개인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는 조항이 추가된다. 그리고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경제상 이용 할 수 있는 자연력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채취, 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할 수 있다.”로 수정된다. 앞선 제헌헌법 제85조에서는 국유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서 시장경제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 이러한 법적 “팔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팔아 외화를 걷어들여라”고 말할 정도로 수출에 힘을 쏟았다. 그로 인해 1963년 약 8천 달러로 기록 된 국가 수출액이 1년 사이에 1억 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초기 금융 억압으로 인해 대기업 양성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기 금융 억압은 국가가 금융 자본을 통제하여 기업 대출에 직접 관여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데 시중 금리보다 훨씬 낮은 금리를 국가가 설정하면서 시장에서는 고금리 대출 체제를 유지하는 대신 국가에서 관리하는 기업 대출은 그보다 낮은 금리로 이용하게 하여 기업의 자본 대출에도 관여하고 국가 재정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금융 억압에 대해서는 성공한 사례라고 보기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초기 금융 억압은 원래 시장경제체제에서 정부 실패로 보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 없이 초기 금융 억압의 부작용이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IMF 사태를 일으키는 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 금융 억압으로 확실한 대기업을 양성하고 대기업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국가 경제를 순환시키는 틀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정부 주도의 경제계획으로 자리 잡았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제3세계 국가에서 국가 발전의 성공적 사례 모델로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하지만 경제 부흥의 측면으로만 그를 바라볼 수 없다. 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게 된다면 막연히 본받을 대통령이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겐 민주주의적 방식이 거의 무의미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위원 2400여명을 모아 놓고 한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무효 2표를 제외하고 99.9%의 지지율로 당선하게 된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 수치를 보고 그들은 ‘민주주의’라 말하였다. 박정희는 삼권분립을 무시하였으며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고 비례대표를 없애 버리기 까지 한다. 신문사, 방송사의 정치부장 혹은 부국장, 논설위원들을 국회위 대중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1973년 서울대 문리대 데모와 같은 학생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학생들은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위의 서명운동으로 시작된 학생운동은 유신 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며 계속되게 된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10월 26일 박정희를 사살하고 유신 정권을 끝내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라는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며 사형을 당한다. 그가 박정희를 사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최태민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박근혜를 등에 업은 영세교 교주 최태민을 처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방치하게 된다. 박근혜에 대한 아비 된 마음의 연민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김재규는 더 이상 박정희가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그를 사살하였다. 그렇게 유신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으면 이야기가 안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 영향이라는 것이 새마을 운동과 같은 긍정적인 영향도 있고 군사 쿠데타로 인한 무력 진압, 탈민주주의 성향을 띤다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그의 현대사 측면의 일생을 되짚어 본 것은 그를 찬양하거나 비판하자는 의미는 사실 없다. 단지 박정희를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들고 그것이 현재 한국 정치와 같은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정희는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의 삶을 살았고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시장경제체제를 진흥 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겐 칭송 받는 영웅이었지만 학생들에겐 둘도 없는 독재자였다. 박정희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녀는 ‘최순실 게이트’라는 희대의 사건에 직접 가담하여 결국 대통령직 파면에 이르렀다. 최순실과의 인연은 유신 정권의 최태민 교주로부터 이어진다. 유신의 역사가 박근혜를 통해 아직까지 현재 한국 정치에서 재현되고 있다.많은 사람들의 박정희를 독재자나 영웅으로 정의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한단어로 정의하지 말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