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1984도서 소개『1984』는 『동물농장』과 함께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전체주의 앞에서의 개인의 저항과 파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당은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를 내세워 독재의 극대화를 꾀하는 한편, 당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당의 통제에 반발을 느끼고 저항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 끝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 '골드스타인'을 만났다고 자백하고, 결국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한다.『1984』는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로, 자주 다시 읽고는 한다. 작가의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우려를 느낄 수 있고, 작중 당이 당원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 좋아하는 작품이다. 특히 언어 통제 부분에 있어서 효과적인 통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신어’를 사용한다. ‘신어’는 다른 언어와 달리 갈수록 낱말의 숫자가 줄 드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당에서 주민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억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예시가 cold이다. 현재 영어에서는 ‘따뜻하다’를 표현할 때, warm을 사용하지만 신어는 uncold를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단어의 수를 줄여 사람들의 생각을 줄여나간다. 단어의 사용은 곧 말하는 이가 얼마나 폭넓게 생각하느냐를 보여준다. 세세한 정도의 차이를 표현할 수 없으니 사람들의 생각 또한 깊지 못하다. 일제가 시행하였던 신문지법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통제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단어를 검열하고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말을 삭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신어’ 사용에 있어서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다.『1984』는 종종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교된다. 통제 방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1984』에서는 억압과 형벌로 억압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쾌락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즉 『1984』에서는 사람들이 공포심에 의해 당의 요구에 순응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은 본질 대신 쾌락을 선택하여 시선을 돌린다. 이것을 보고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통치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명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도서 소개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가장 저명한 영국의 여성 여행 작가 중의 하나였다. 하와이, 로키산맥, 페르시아 등 다양한 여행경력을 소유한 작가로 그는 동아시아를 두 번 여행하였다. 그는 1878년 일본을 여행한 후 『미답의 길(Unbeaten Tracks in Japan)』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890년 초에는 동아시아에서 수년간 머물며 이 시기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낸 후 『조선과 이웃 국가: 최근의 격변과 조선의 지위에 대한 설명을 담은 여행기(Korea and Her Neighbou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를 1898년 발간하였다.요즘 개화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런 작품들을 보면 어느 정도 고증을 통해 표현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가공하여 만든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개항 이후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조선말의 기록이다. 저자가 조선을 4년간 여행하면서 보았던 조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수업에서 배우는 역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 많아 일상생활을 그려보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왕실보다는 농민들과 같은 일반 사람들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농민의 노력과 관계없이 수탈의 대상이 됨을 지적한 저자의 통찰력에 깜짝 놀랐다. 조선말의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이는 농민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조선의 통치 구조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정치적 상황만 해도 어지럽고 복잡한 가운데, 일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비숍은 동아시아 사회가 서구의 지식을 어떻게 수용하여 자신들의 현대화 과정에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론상 그는 유럽이 아시아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영국의 주도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러시아와의 ‘파워 게임’을 인지하여 러시아의 조선 지배를 반대하였고 또한 부상하는 일본의 힘을 우려하였다.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그는 충격을 받으며 “동아시아 지역 문명의 선구자로서의 일본의 명성과 권위가 이보다 더 크게 무너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자적 자유무역의 제국주의’를 토대로 조선의 실질적 독립을 보장하는 한편 영국이 간접적으로 통제할 것을 제안하였다.
도서명정조어찰첩도서 소개정조가 심환지에게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편지로,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 그 당시의 정치 상황과 정치 행태 및 현안, 정조와 신하들과의 관계 등등을 두루두루 살펴볼 수 있는 친필 어찰이 총 6첩 297건에 담겨 있다. 또한, 이 어찰첩을 통해 정조의 서예, 글쓰기 방식, 문체 등의 수준을 알 수 있다.어찰첩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시간이 나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정조에 관심이 많아 그의 인간적 면모를 알 수 있는 어찰첩에 기대가 컸다. 1차 사료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이것으로 정조 시대 정치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확실히 어찰첩이 1차 사료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 책에 인물에 대한 대강의 설명만 나와 있어서 전체적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았다. 대략적인 역사적 배경은 알고 있지만 자세하게 인물 하나하나의 정보는 없어서 인터넷으로 찾아가면서 읽었다. 그래서 정조의 정치 성향이 어떠했는가, 어떻게 신하들과 입을 맞추어 여론을 이끌어가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어서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막후정치를 펼치는 정조를 보며 얼마나 그가 꼼꼼하고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많은 지식들이 뒷받침되어야 하구나 알 수 있었다.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정조의 과격한 표현이었다. 정조는 실학자들이 기존 문학과 다르게 새로운 소품체로 글을 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실시하여 고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정조는 신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스럼없이 욕하고 웃음소리에 해당하는 가가(可呵)를 남발하는 게 충격이었다. 정조는 개혁군주인가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개혁 정책을 펼친 것을 맞지만, 그의 의도는 사실 그것이 아니었다. 세계사적 흐름에 맞게 근대를 준비하기보다는 철저한 유학자였던 정조는 오히려 은주시대로 돌아가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봤을 때 과연 정조는 개혁 군주라고 칭할 수 있을까?
전쟁과 전염병의 유기적 상관성: 전쟁에서 전염병의 역할목차1. 전쟁보다 치명적인 전염병2. 전쟁 중 전염병 확산 양상3. 전염병의 역할: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1. 전쟁보다 치명적인 전염병출처: 이근영, ‘‘통계학자’ 나이팅게일의 한계’, 한겨례 칼럼, 2017.10.22.파란색은 전염병에 의한 사망을, 분홍색은 부상에 의한 사망을, 검은색은 그 외 원인으로 의한 사망을 의미한다.현대 이전의 전사자들은 대부분이 전투하기도 전에 감염되어 죽은 병사들이었다. 크림전쟁(1854~1856)의 기록을 보면, 영국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잃은 병사들보다 이질과 발진티푸스로 잃은 병사의 수가 열 배나 더 많았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의 밴다이어그램을 보면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1918년 인플루엔자 때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욱 많았다. 제88사단의 경우, 1918년 10월 26일부터 전선에 배치되어 종전 때까지 싸웠는데 인플루엔자로 444명이 사망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거나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군인은 90명에 불과했다.2. 전쟁 중 전염병 확산 양상전쟁이 발발하면 일반적으로 전염병의 발병률이 따라서 급증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군대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에게서도 모두 일어난다. 전쟁 중 전염병은 군대 내에서 퍼져 국가 간 전염으로까지 이어졌다.군대는 사람이 모여있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염에 취약했다. 매사추세츠 주의 데븐스(Devens) 병영은 미국 내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제76사단과 제12사단이 훈련받고 있었는데, 제12사단은 미국의 참전 이후 첫 승리가 기대된 생 미옐 전투(Battle of Saint-Mihiel)에 투입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신병 유입으로 인한 인구 과잉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1918년 9월 2일 하루 동안 병원을 찾은 병사들이 31명이었던 반면, 2주 후인 9월 18일에는 1,176명이 병원을 찾아 수천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9월 23일 인플루엔자 환자 수는 12,604명이었다.군대가 소집되면 서로가 지닌 질병들도 교환하게 된다. 종전에는 한 지역이나 인구의 한 부분에 국한되었던 질병들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온 병사들은 도시 출신 병사들보다 더 자주 전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중 농촌 출신 병사의 45%가 인플루엔자성 폐렴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도시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홍역, 유행성이하선염, 수두, 디프테리아, 성홍열, 그리고 결핵 등 다양한 전염병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지만, 농촌 지역은 인종이나 민족 구성이 대도시에 비해 훨씬 동질적이었으므로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더 낮았기 때문이다.군대가 한 곳에 계속 그대로 주둔해 있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군대는 국가 간 질병 전파의 통로가 됐다. 공성전이나 참호전 같이 군대가 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에도, 신병들은 끊임없이 뽑혀서 전방으로 보내지고 병든 병사들은 후방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전염병은 사방으로 퍼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18년 인플루엔자가 유럽에서 처음 발생한 지역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 근처 병영이었는데, 이곳은 미국 해외파견군이 도착하는 항구 중 하나였다.전쟁으로 인한 혼란도 전염병을 심화시켰다. 이 현상은 특히 전쟁에 패배한 측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전쟁은 많은 경우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로 이어졌다. 농작물들은 실수 혹은 고의적으로 파괴됐고, 군대에 약탈당했다. 영양 결핍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피난민의 이동은 진드기, 이, 벼룩 등 기생충과 쥐의 이동을 일으켰고 전염병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3. 전염병의 역할전염병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였다. 1918년 인플루엔자가 미국 해외파견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 AEF)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전염병이 군대의 전투 능력을 어떻게 저하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전염병의 확산과 뫼즈-아르곤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엄청난 환자들이 발생했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수의 병사들이 격리되었고, 이는 대체 병력 없이 전투를 지속해야 함을 의미했다. 공격이 개시되자 모든 사단은 더는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지 않도록 단기간의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9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제91사단은 5,000명의 대체 병력 없이 전투에 참여했다.더욱 문제가 되었던 점은 부상한 병사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일이었다. 전사자는 전쟁 수행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건강한 사람이 독감에 걸려 돌봐야 할 환자가 되면 그것은 걸림돌이 되었다. 전시 후송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뫼즈-아르곤 전투로 미군 제1대대에서 9만 3,16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사상자들은 끝없는 정체 속에서 후방으로 이송됐다.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 대부분은 독감이나 폐렴, 기관지염 같은 합병증을 앓았다. 전선에서 40도 이상의 고열로 신음하는 동료보다 더 성가신 것은 없었다.야전병원에서는 환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환자가 병원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고, 의료진은 독감 바이러스에 취약해졌다. 부상자와 달리 인플루엔자 환자들은 전염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급차 운전병과 의료진은 늘 환자와 부상자를 격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피로에 지친 이들은 나중에 감염 여부를 걱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빈자리가 생기면 어디든 환자를 들여보냈다. 1918년 제5모바일 병원의 의사였던 조지 워싱턴 크릴 박사의 10월 17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모든 것이 환자와 함께 넘쳐난다. 우리 구역에는 폭격으로 인한 부상자들이 가득하다. 비가 내리고, 진흙투성이며, ‘독감’과 폐렴이 공존한다. 일부 병원들에는 환자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일할 수조차 없다. 수백 명의 폐렴 환자가 있지만, 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 (…) 온갖 종류의 감염 환자가 있고, 이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모여있었다. 안과 의사가 죽어가는 절망적인 수백 명의 폐렴 환자를 책임지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12시간을 수술한 뒤 교대한다. 오늘 아침에는 120명의 환자가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에 60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았다.전염병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사례는 16세기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천연두도 있다. 천연두는 1518년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서인도 제도)섬에서부터 무섭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은 천연두가 큰 역할을 했다. 아즈텍의 황제인 몬테수마가 살해되고 아즈텍군이 스페인군을 반격하려는 순간, 천연두가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후퇴하는 스페인군을 쫓아간 지 몇 시간 만에 아즈텍의 지도자는 수많은 부하와 함께 사망했다. 이들이 천연두 때문에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 스페인 사람들을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천연두 유행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이들은 공격을 중지했고 따라서 아르난 코르테스는 전열을 재정비해서 다시 수도로 포위하고 아즈텍 제국을 완전히 괴멸시킬 수 있었다.
전쟁에서 전염병의 역할목차1. 전쟁 중 전염병 확산 양상가. 군대 내 전염나. 국가 간 전염2. 전쟁에서 전염병의 역할가.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나. 전쟁 조기 종식3. 참고문헌1. 전쟁 중 전염병 확산 양상현대 이전의 전사자들은 대부분이 전투하기도 전에 감염되어 죽은 병사들이었다. 1800년경 이전에 이뤄졌던 여러 추산에 의하면, 전쟁 중에 군인들은 상대편 군사들에게보다는 전염병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출처: 이근영, ‘‘통계학자’ 나이팅게일의 한계’, 한겨례 칼럼, 2017.10.22.파란색은 전염병에 의한 사망을, 분홍색은 부상에 의한 사망을, 검은색은 그 외 원인으로 의한 사망을 의미한다.크림전쟁(1854~1856)의 기록을 보면, 영국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잃은 병사들보다 이질과 발진티푸스로 잃은 병사의 수가 열 배나 더 많았다. 정확한 숫자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마침내 군부가 질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야전병원의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전 세계를 위협하던 콜레라가 전장에서도 기승을 부렸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의 밴다이어그램을 보면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를 통해 깨끗한 위생 상태가 사람을 살린다는 증거를 보여주었고, 이를 근거로 청소, 세탁, 급식 상황을 개선해나갔다. 위생 위원회를 설립해 하수구를 수리하고 급수 시설과 깨끗한 침대 보급에 힘썼다. 그 결과 야전병원의 사망률이 42%에서 6개월 후 2.2%까지 감소했다. 이에 남아프리카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군과 네덜란드 출신 정착민들이 충돌한 보어전쟁(1899~1902) 무렵에는, 적에게 죽은 병사가 한 명이면 병으로 죽은 병사가 다섯 명 정도까지 비율이 감소했다.질병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은 병사가 사망한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은 1904~1906년에 일어난 러-일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로 전염병의 발병률이 따라서 급증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군대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에게서도 모두 일어난다. 전쟁 중 전염병은 군대 내에서 퍼져 국가 간 전염으로까지 이어졌다.가. 군대 내 전염군대는 사람이 모여있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염에 취약했다. 군대는 서로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며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런 밀집된 상황은 질병이 퍼지는 데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위생 상태는 나쁘다. 병사들은 막사, 병영, 혹은 참호 안에서 서로 북적이게 된다. 해군은 전함 안에 가득 채워져 생활한다. 군인 수송선에는 병사들이 꽉 들어차 있다. 역사 초기에는 군대들의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지만, 비교적 군대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질병에 특히 취약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군대의 규모가 커지자, 군대는 전염병이 퍼지는 데 점점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게 되었다.매사추세츠 주의 데븐스(Devens) 병영은 미국 내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제76사단과 제12사단이 훈련받고 있었는데, 제12사단은 미국의 참전 이후 첫 승리가 기대된 생 미옐 전투(Battle of Saint-Mihiel)에 투입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신병 유입으로 인한 인구 과잉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1918년 9월 2일 하루 동안 병원을 찾은 병사들이 31명이었던 반면, 2주 후인 9월 18일에는 1,176명이 병원을 찾아 수천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9월 23일 인플루엔자 환자 수는 12,604명이었다.군대가 소집되면, 신병들은 국가나 제국 전역의 여러 다른 지역들로부터 모여들게 된다. 신병들이 서로 섞여들면서, 서로가 지닌 질병들도 교환하게 된다. 종전에는 한 지역이나 인구의 한 부분에 국한되었던 질병들이 이제는 공유되게 된다. 농촌에서 온 병사들은 도시 출신 병사들보다 더 자주 전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중 농촌 출신 병사의 45%가 인플루엔자성 폐렴 대한 면역력이 더 낮았다. 따라서 다양한 인구 집단들이 섞였을 때 농촌 출신 병사들은 훨씬 더 질병에 취약했다.나. 국가 간 전염군대가 한 곳에 계속 그대로 주둔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군대는 질병을 함께 몰고 다닌다. 육군은 땅 위로 질병을 운반하고, 해군은 바다를 건너 질병을 운반한다. 심지어 공성전이나 참호전 같이 군대가 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에도, 신병들은 끊임없이 뽑혀서 전방으로 보내지고 병든 병사들은 후방으로 물러난다. 포로들은 한 군대에서 다른 군대로 질병을 전파하며, 탈영병들은 그들이 몸을 피해 도망가는 모든 곳으로 질병도 가지고 간다. 전염병은 군대의 이동 경로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퍼진다. 여기에 더해, 전쟁은 자주 많은 수의 민간인 피난민들이 고향을 떠나게 만드는데, 그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개별적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게 된다. 진드기, 이, 벼룩 등 기생충들도 그들이 붙어살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같이 이동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은 또한 쥐들도 원래 서식지를 떠나게 만들어, 이들 또한 몸에 붙어사는 벼룩 등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실제로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럽에서 처음 발생한 지역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 근처 병영이었는데, 이곳은 미국 해외파견군이 도착하는 항구 중 하나였다.전쟁으로 인한 혼란도 전염병을 심화시킨다. 이 현상은 특히 전쟁에 패배한 측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전쟁은 많은 경우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로 이어진다. 농작물들은 실수 혹은 고의적으로 파괴되고, 군대에 약탈당한다. 영양 결핍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후퇴 중인 군대와 민간인 피난민들 사이에서 위생 조건은 계속해서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전염병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2. 전쟁에서 전염병의 역할가.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1) 스페인 독감미국 해외파견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 AEF)에서 발생한 일들을 보면, 전염병이 군대의 전투 능력을 어떻게 저하하는지 잘 알 수 있 더욱 악화된 문제는 전쟁에서 부상한 병사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전시 후송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으며 뫼즈-아르곤 전투로 미군 제1대대에서 9만 3,16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들은 진흙길을 따라 끝없는 정체 속에서 후방으로 이송됐다. 그들 대부분은 독감이나 폐렴, 기관지염 같은 합병증을 앓았다. 제1대대는 스페인 독감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독감 환자 전용 병원을 세웠지만, 규모가 작아 환자 이동이 잦았고 각 사단이 빈번하게 이동했기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전염병의 확산과 뫼즈-아르곤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엄청난 환자들이 발생했다. 야전병원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전염병이 확산되었다. 환자가 병원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고, 병원 관계자들은 독감 바이러스에 취약해졌다. 1918년 제5모바일 병원의 의사였던 조지 워싱턴 크릴 박사의 10월 17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모든 것이 환자와 함께 넘쳐난다. 우리 구역에는 폭격으로 인한 부상자들이 가득하다. 비가 내리고, 진흙투성이며, ‘독감’과 폐렴이 공존한다. 일부 병원들에는 환자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일할 수조차 없다. 수백 명의 폐렴 환자가 있지만, 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 (…) 온갖 종류의 감염 환자가 있고, 이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모여있었다. 안과 의사가 죽어가는 절망적인 수백 명의 폐렴 환자를 책임지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12시간을 수술한 뒤 교대한다. 오늘 아침에는 120명의 환자가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에 60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았다.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보급선 또한 엉망으로 만들었고, 전진과 후퇴를 더욱 힘들게 했다.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 독감은 죽음 그 자체보다 군사력에 더 나쁜 영향을 미쳤다. 전사자는 전쟁 수행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건강한 사람이 독감에 걸려 돌봐야 할 환자가 되면 그것은 걸림돌이 되었다. 전선에서 40도 이상의세계의 원주민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침입해온 외래인들에게 옮겨줄 수 있는 미지의 전염병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과 아프리카 사람들이 4,000년 이상 오랜 문명의 역사를 통해 체험해온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은 급격한 인구감소를 초래하는 재앙을 입었다.스페인 사람들의 정복 직전 원주민 총수는 약 1억 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2,500~3,000만 명이 멕시코의 문명중심지에 살았고 안데스 문명권에도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그 이후 이들이 겪은 인구감소는 거의 파멸적이었다. 코르테즈에 의해 유럽인들과 원주민 간에 질병을 위시한 각종 상호교류가 시작된 후 50년도 되지 않은 1568년에 멕시코 중앙부의 인구는 300만으로 줄었다. 코르테즈가 상륙한 당시에 비해 1/10 수준이었다. 그리고 속도는 느려졌지만, 그 후에도 50년에 걸쳐 이런 인구감소가 계속되어, 1620년에는 약 160만으로 줄었으며, 그 후에도 30년 동안 인구수는 회복되지 못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이 지역의 인구는 완만하게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전염병은 1518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해서 천연두가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서인도 제도)섬에서 발생하고, 원주민들에게 무섭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바르톨레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에 따르면 이 천연두 유행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천 명쯤이었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섬으로부터 1520년에 코르테즈를 돕기 위해 온 증원부대와 함께 천연두는 멕시코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거의 좌절될 뻔한 스페인 사람들의 신세계 정복은 이 천연두를 통해 성공했다. 몬테즈마가 살해되고, 아즈텍의 군사들이 스페인군을 반격하려는 순간 천연두가 테노치트란에 들어왔던 것이다.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도로부터 후퇴한 스페인군을 쫓아간지 몇 시간 만에 반군의 지도자는 수많은 부하들과 함께 사망했다. 이들이 천연두 때문에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 서전의 승리를 그대로 밀고 나가 스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