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읽고 저자는 글의 제목 그대로 현대 자유주의 배경 속에서 인권의 보편성에 대해 논한다. 저자는 2장에서 인권 담론의 역사를, 3장에서는 롤즈를 중심으로 인권의 보편성의 합리주의적 정당화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다. 4장에서는 다문화적 상황에서 인권의 보편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저자의 주장은 1장과 5장에서 나타난다. 저자는 인권의 보편성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호소한다. 근대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권 개념을 내세웠고 이것이 인권의 철학적 정당화 작업에 출발점이 되었다. 저자 또한 계몽주의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권 사상이 인권 이념의 초석을 닦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시도로만 인권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다원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파시즘과 2차 세계 대전 등 역사적 아픔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감성적 측면과 문화적으로 연대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권 문화’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관점은 나에게 독특하게 다가왔다. 나의 전공도 철학이고, 이 수업도 철학과 전공 수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인권이라는 이슈를 철학적 정당화 작업에만 국한시켜서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철학적 정당화보다는 현실 세계의 문화적·감정적 연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특히 저자가 언급하고 소개한 ‘인권 문화’, ‘감성의 진보’, ‘감성 교육’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인권 정초주의’가 인권의 보편성 논의에서 가지는 위치에 관해서이다. 저자는 정초주의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개념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라면 철학적 정초 없이는 현실세계에서 바로 설 수 없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인권은 진화하는 생물처럼 역사와 시대에 따라 역동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초석을 다지는 작업 없이는 이 또한 탄력을 받기 힘들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닥칠 수 있으며(현재 한국의 상황도 그런 듯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권 이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튼튼한 뿌리는 분명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다문화적 상황에서의 인권의 보편성을 논함에 있어서, 저자는 여전히 서구 중심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계를 보이는 듯하다. 물론, 전통적인 서구 주도하의 인권 운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저자 역시 계몽주의적 태도로 인권이 자리 잡지 못한 국가들에게 절대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의 견해만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 역시 앞서 제기한 철학적 정당화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철학적 정당화 작업이 오히려 서구 일방의 주도적 인권 운동으로 치우칠 수 있음을 경계하지만, 나는 철학적 정초 작업이 함께 이루어질 때 인권 운동이 훨씬 더 바람직하게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저자의 견해에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았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입장이 인권 보편성의 철학적 정당화 작업보다는 현실 세계의 실천적 문제와 관련하여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문화, 감성, 사회적 연대의 키워드는 전 세계의 ‘인권 문화’ 형성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 Ⅰ. 들어가며 칸트는 이전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일체의 도덕의 원리들을 부정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한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자연주의자들, 도덕감정과 같은 것을 내세우는 정감주의자들의 원리들을 거부하며, 오로지 순수 이성에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칸트 철학의 주된 초점이 ‘순수 이성의 가능 근거와 선험적 원리 및 그 작용의 범위를 설정하고자 함’임을 떠올릴 때 이는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는 사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이론이성과 달리 적극적으로 사태에 개입하는 실천이성의 작동원리를 밝힘으로써, 윤리 형이상학을 정초하고자 한다. Ⅱ. 『윤리형이상학 정초』 머리말 머리말에서 칸트는 자신의 작업이 철학에서 어떤 위치에 설 수 있을지 밝히며 출발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은 학문을 논리학과 물리학, 윤리학으로 나누는데. 자신은 지금 윤리학을 다루고 나아가 선험적 원리들만을 탐구하는 순수 철학의 영역인 윤리 형이상학을 정초함을 밝힌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정초 작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를 상당 부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는 경험 철학이 아닌 순수 철학의 영역에서의 형이상학을 다루는 바, 우리의 실천적 도덕의 원리는 모든 경험적인 요소들을 배제한 순전히 선험적인 요소들, 즉 순수 이성의 개념들로 이루어짐을 선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도덕법칙은 보편적으로 절대적 필연성을 가져야하는데, 도무지 경험적 원리들에 의존해서는 이러한 도덕법칙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고한다. 우선 그는 아주 평범한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보통 사람도 인식할 수 있는 윤리적 이성인식을 분석함으로써 윤리 형이상학에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이는 1절과 2절에 해당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종합적인 방법을 취해 이 원리가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 가능한지에 대해 검토할 것을 밝힌다. 제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1절에서 그는 앞서칸트는 우리에게 선악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칙은 그 법칙의 형식으로서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는 어떠한 경험적 요소에도 기대지 않고자 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에게 법칙은 보편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다름 아닌 도덕법칙이자 그 형식인 것이다. 결국, 의무는 이러한 법칙을 존경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원리의 나침반만 있으면 평범한 인간도 쉽게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의지는 이미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갈고 닦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경험적 요소들이 이들을 위협하는 바, 철학적 정초작업을 더 해나갈 수밖에 없다며 제2절로 나아간다. 제2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제2절에서 칸트는 의무 개념을 경험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이를 철저히 순수하고 선험적인 것으로 다져나간다. 그는 도덕의 궁극적 원리, 곧 순수 이성에서 비롯한 윤리형이상학을 정초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경험 세계에서 가져오는 잡다한 개념들은 결코 이 작업에 포함될 수 없다며 이러한 시도들을 강력히 비판한다. 가령, 신의의 경우 친구를 전혀 사귄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성의 이념으로서 선험적으로 알 수 있지만 반면 경험적인 개별사례만 놓고서는 도저히 근본적인 도덕성 개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경험적인 것으로부터는 이성적 존재자 일반들에게 적용시킬 보편적으로 필연적인 법칙은 물론 어떠한 윤리적 개념도 이끌어낼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선험적 원리로 밝혀진 정언명령을 통해 윤리 형이상학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법칙들은 ‘명령’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을 표상하여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인 ‘의지’를 가지고, 이를 통해 이성이 경향성으로부터 독립해 법칙을 따를 수 있는데, 불완전한 존재자인 인간은 이성이 항상 의지를 결정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향성이 배제되혀 새로운 것들을 이 안에서 찾아내서 그것이 행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3절에서 보다 자세히 제시된다. 우선, 정언명령의 형식을 살펴보자. 이 형식은 머리말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로지 법칙으로 기능할 수 있는 보편성만을 말한다. 즉,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B52)는 것이다. 주관이 세운 준칙은 자신이 의욕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지 따져보고 그렇게 허용되는 한에서 그 준칙에 의해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언명령의 제1형식이다. 나아가 제1형식의 변형으로서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같은 곳)가 도출된다. 이는 주관이 세운 준칙이 순수 이성이 가리키는 자연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따져보고 그것이 가능한 경우에만 그 준칙에 의해 행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 원리를 적용시킨 4가지 사례를 통해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를 설명한다. 완전한 의무를 위반 시, 그 준칙은 내적으로 논리적 모순에 처한다. 불완전한 의무를 위반 시, 이러한 내적 모순을 마주하지는 않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 모순된다. 칸트는 제1형식과 제1형식 변형을 통해 제2형식을 도출해 낸다. 그에 따르면, 이성을 통해 자신의 준칙을 보편적 법칙에 알맞게 사용하는 의지를 지닌 이성적 존재자는 그 자체가 실천법칙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는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 법칙수립적 존재자로서 ‘자율성’을 지녔음을 뜻한다. (3절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경향성들은 어떤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기능하지만, 경향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이성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그것이 물건이 아닌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타당한 목적이라면 당연히 실천법칙이 될 수 있는 바, 이것이 바로 ‘네가 너 자신의 인효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성적 존재자는 ‘의지의 자율’, 곧 스스로 법칙을 수립하는 능력을 가질 때, 한낱 의무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존엄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가 수립하는 법칙은 다름 아닌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정언명령은 우리에게 실천을 강요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평범한 인간도 이성적 존재자로서 이러한 능력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칸트는 3절에서 그 답을 한다. 제3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 이성 비판으로 이행 칸트는 우리의 선한 의지가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이 양자를 매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가? 칸트에 따르면, 법칙을 수립하는 이성은 외부의 요소에 영향 받지 않고 그 스스로 행한다. 결국 실천 이성, 곧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자유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경험적으로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오직 선험적으로, 이념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이로써 주관의 의지가 그것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밝혀졌으나, 여전히 왜 그 원리에 복종해야함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칸트는 적어도 ‘이해관심’은 이러한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는 오로지 의무로부터가 아닌, 그 때 그 때 다른 상황적 맥락 속에서 다른 것들을 욕구하게 함으로써 정언명령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념으로 주어진 자유가 그것이 실재하는지, 객관적으로 필연적인지를 그 자체로 증명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칸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는 증명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를 증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무엇 때문에 도덕법칙이 타당해지고 그것에 복종해야하는지는 밝혀질 수 없다. 도대체 왜 쾌락과 고통에 따라 행동하면 안 되고, 왜 도덕법칙을 따를 때에만 인간은 인격적일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논의에서, 칸트는 이 문제에 관해 일종의 ‘순환론’의 의혹이 있음을 인식은 이 원인성으로서의 물자체에까지 다다를 수 없다. 가령, 내가 내 앞의 책상을 인식할 때 어떤 X가 그저 책상으로서 다가오는 것일 뿐이지 그 X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신이 봤을 때 그 X는 의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감성세계와 예지세계는 구분된다. 감성세계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자연세계, 즉 현상계이다. 그러나 예지세계는 우리의 감각 너머에 있는, 초월적 세계로, 다시 말해 인식할 수는 없으나 상정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당연히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감성세계는 물리적 자연법칙이 지배한다. 즉, 외부적 요인에 의한 타율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지세계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이성 스스로 수립한 법칙, 곧 자율이 지배한다. 즉,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할 때 도저히 감성세계에서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지만, 예지세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이 자유 개념을 구출하기 위해 예지세계는 상정된 것이다. 이로써 칸트는 자유 개념을 사태에 대한 관점을 달리 취하면서, 즉 예지계라는 초월세계를 상정하고 초월적 이념인 자유를 요청함으로써 순환론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칸트의 결론이다. 인간은 감성세계에 속하기도 하고 예지세계에 속하는 이중적 존재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욕구들과 경향성에 따르는 감성세계에 속한다. 이러한 인간은 자연세계의 한 존재자일 따름이고 따라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스스로 법칙을 수립하는 예지세계의 성원으로서는 이러한 욕구와 경향성을 극복하고 도덕법칙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다른 존재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성을 지닌, 나아가 경험과 완전히 분리된 순수 이성을 지닌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예지세계로의 참여는 자유의 이념을 통해 가능함을 확인하였고 더불어 정언 명령이 가능해 진다. 결국 인간은 감성세계와 예지세계 둘 다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법칙을 수립했어도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도덕법칙을 조건 없이 행함으로 끊임없이
주희와 육구연의 태극·무극논쟁의 비판적 검토1. 들어가며『주희의 후기 철학』은 이불의 『주자만년전론』(북경, 중화서국, 2000)을 번역한 것으로, 주희의 편지글들과 함께 이불의 견해가 덧붙여져 있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이 가운데서 필자는 주희와 육자정의 태극과 무극에 관한 논쟁에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이 논쟁의 이면에는 각자의 철학적 입장이 전제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의 충돌 지점을 잘 들여다봄으로써, 이들 고유의 주장을 파악할 수 있다.먼저 서신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치열하게 행했던 논쟁의 내용들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들의 기본적 철학적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논쟁의 원인에 대해서 파악해볼 것이다. 그리고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서 논쟁의 분석과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2. 태극·무극 논쟁의 내용주희는 육구연과 논쟁을 하기 이전, 이미 육구연의 형인 육구소와 한바탕 논쟁을 치렀었다. 논쟁이 과열되어 주희가 육구소를 감정적으로 대하자, 육구소는 주희를 외면하고, 형의 입장을 지지했던 육구연 본인이 직접 나서서 주희와 논쟁을 펼치기 시작한다.2.1 육구연이 주희에게 (pp.102-114)육구연은 먼저 무극은 논쟁의 발생지인 『태극도설』을 주돈이가 쓴 것이 아니라는 육구소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주희에 대한 반론으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첫째, ‘태극’만으로도 만물의 이치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무극’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육구연은 “태극은 진실로 스스로 있는데, 노형께서는 말하고 또 말해서 더욱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무극을 말하건 말하지 않건, 태극은 그 자체로서 모든 변화의 근본으로 작동하고 있으므로 무극을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또한, 『역대전』을 인용하여 ‘형이상=도=일음일양’의 도식을 내세우며, 일음일양이 이미 형이상이니 태극 또한 형이상이고, 따라서 더더욱 무극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둘째, ‘극(極)’을 ‘형(形)’으로 풀이한 주희의 입장을 비판하고, 대개 ‘극(極)’은 ‘중(함을 다 들어도 이것에 더할 수가 없는 것”으로서, “단지 지극을 가리킬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극’을 ‘중’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북극’, ‘옥극’, ‘황극’을 든다. 둘째, 『통서』「이성명」장에서 ‘강선’, ‘강악’, ‘유선’, ‘유악’의 다섯 가지 성을 태극이라 여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주돈이의 업적을 높이 사고 있다. 주돈이가 무극을 말함으로써, “태극의 신비함이 있음과 없음에 속하지 않고 장소와 형체에 귀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끔 하였다”고 한다. 이 주장은 주돈이에 대한 후한 평가만 있고 논쟁에서의 역할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일음일양’ 자체가 형이상일 수 없고 ‘일음일양’의 ‘이유’가 바로 ‘도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일음일양은 형이하이고 그것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 형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일음일양의 논리적 근거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 태극으로서 모든 현상의 근거가 되는데, 육구연처럼 그저 일음일양의 현상적 모습만을 두고 형이상이라 하면 태극이 마치 시공간에 얽매여 있는 사물처럼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하여, 주돈이가 무극을 말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자신이 이전에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서 모든 변화의 근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적함에 빠져서 모든 변화의 근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독자들이 ‘있다’와 ‘없다’의 언어적 표현을 현상적 존재 유무로 받아들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한다. 여섯 번째, 다섯 번째에서와 같은 맥락으로서, 육구연이 『역전』에 태극이 ‘있다’고 했는데 ‘무’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반박하고 있다. 일곱 번째, 무극은 노자에게서 최초로 등장하므로 무극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육구연의 주장에, 주돈이는 노자와 다른 뜻으로 무극을 언급하고 있다고 반박한다.2.3 육구연이 주희에게 (pp.125-139)다시 육구연의 반박이 이어진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셋째, ‘극(極)’도 리이고 ‘중(中)’도 리이며, 한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극을 중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자신의 이전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넷째, 『역』의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였고, 땅의 도를 세워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하였고, 사람의 도를 세워 인과 의라 하였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일음일양이 형이하자라는 주희의 입장을 반박하며, ‘일음일양=도=형이상자’의 도식을 고수한다. 이 외에도 여러 주장들을 펼치고 있으나 논쟁의 쟁점과는 벗어난 부분이 많아 생략하도록 한다.2.4 주희가 육구연에게 (pp.142-157)주희는 육구연의 주장을 여러 대목으로 쪼개어 해당 부분마다 반론을 한다. 여기서는 중요한 몇 가지 반론들만 제시하도록 하겠다. 첫째, 태극을 ‘극(極)’을 ‘중(中)’으로 풀이한 것에 대해, 태극이 치우침이 없다는 ‘표준’의 의미를 가지지만, 처음부터 ‘중’으로 불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신뢰할만한 책인『이아』에서도 “‘극’을 ‘지’로 해석하고, ‘은제’를 ‘중’이라고 해석”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극’을 ‘형’으로 풀이한 적도 없다고 덧붙인다. 둘째, 음양을 형이상이라 여기면 도대체 어떤 것이 형이하가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기가 되는 이유의 이치로서의 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3. 주희와 육구연의 철학위의 논쟁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나버린다. 어찌 보면 이런 허무한 결말은 예고된 것이었다. 그들의 철학적 입장이 애초에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장이 동일했다면, 태극·무극 논쟁은 전혀 ‘논쟁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기본입장이 어떻게 달랐기에 이러한 논쟁이 발생했던 것일까?주희는 기본적으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원적 시각을 견지하였다. 형이상과 형이하를 각각 인정하고 이를 구분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는 ‘성체심용’으로 나타난다. 즉, 미발(성체) 과 이발(심용)이 각각 존재한다. 여기서 주희가 주목하는 곳은 바이 함께 길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상보적이다. 의지가 있더라도 규범을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규범을 알더라도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 이러한 주희의 철학은 ‘성즉리’로 명명된다.육구연은 형이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에게 현상계에 질서를 부여하거나 객관적 사회규범으로서의 ‘리’는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육구연이 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리는 다름 아닌 각 개인들의 마음이고 이 마음은 우주의 마음으로서 ‘보편적인 자아’이다. 이것이 곧 ‘심즉리’이다. 이는 주희의 이론이 객관적인 규범을 너무 강조하여 주체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따라서 욕망과 편견만 떨쳐낸다면, 마음의 주체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 육구연의 결론이다. 이에 대한 수양법으로서 육구연은 ‘도문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마음의 청명함을 회복하기만 하면 도에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4. 논쟁의 비판적 검토4.1 논쟁의 분석이제 다시 태극·무극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무극은, 오늘날 종합적인 시각에서 검토한다면, 형이상학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주희는 무극을 긍정하고, 육구연은 이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주희는 객관적 규범을 강조하고 육구연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무극에 대한 입장을 달리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희는 형이상을 긍정하고 육구연은 부정한다는 도식만으로는 태극·무극 논쟁의 세부적인 부분과 다 들어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들이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주관적 해석의 틀로 바라보아 왜곡된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다. 먼저 논쟁의 핵심이 되는 ‘태극’의 개념을 보자. 주희와 육구연은 공통적으로 태극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들이 인정한 태극은 엄밀히 따지면 같은 의미에서의 태극이 아니었다. 태극이라 여긴다. 따라서, 육구연이 형이상을 부정하는 입장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에서 그가 ‘일음일양=도=형이상자’의 도식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육구연은 실제적으로 형이상을 부정하지만 자신은 형이상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주희는 미발의 측면만을 형이상이라 보고 있는 반면, 육구연은 미발의 측면을 부정하고 이발 안(주관의 의지)에서 다시 형이상과 형이하를 나누고 이때의 형이상에 일음일양과 도를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희가 일음일양하는 것이 형이상이면 형이하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육구연에게 반문한 것이기도 하다.다음으로 무극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따져보자. 논쟁의 발단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문장, 곧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 대한 해석이었다. 결론적으로 주희는 ‘무극=태극=리’의 도식을 가진다. 무극은 분수리의 근거점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육구연도 이러한 도식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육구연은 주희식의 형이상을 부정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형이상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무극=태극=리’의 도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서신에 나타난 표현, “포개진 침상의 침상이며 얽은 집 아래의 집”에서 침상에 ‘동일하게’ 침상이, 집 아래 ‘동일하게’ 집이 있게 되는 것처럼 위의 도식의 내용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육구연은 무극이 곧 태극이니 굳이 무극을 말해서 혼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식으로 주희를 공격한다. 덧붙여, 그렇게 무극을 얘기하고 싶다면 ‘무극’이란 명사 대신 태극에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무성무취無聲無臭)’는 수식어를 사용하라고 한다. 이에 대해 주희는 무극을 언급할 필요성만을 강조하며 다시 이를 반박하고 있고 이러한 과정은 한 번 더 반복된다.계속해서 논란이 됐던 ‘극(極)’의 풀이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주희에게 있어서 극은 ‘지극한 이치’일 따름이지 이를 형이나 중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구연에게 태극은 현상계, 형이의 평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1. 들어가며 《자유론》은 자유주의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 개념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공한다.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자유’ 혹은 ‘자유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나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유에 대한 밑바탕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나, 그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때 우리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 개념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 고전, 밀의 《자유론》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의 영역에 자유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나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유론》 제1장 서론에서부터 밀은 자유를 ‘시민자유’ 혹은 ‘사회자유’라고 못 박는다. 이는 ‘의지의 자유’ 나아가 ‘자율성’ 등의 개념을 통해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개인을 강조한 칸트와 달리 밀은 좀 더 개인과 개인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 안에서의 자유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단순한 구분은 적절하지 못할 수 있지만 분명한 점은 밀이 보다 사회적 맥락에서의 자유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개인과 개인 사이 그리고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자유의 한계 내지는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밀은 ‘자유’ 자체는 무조건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문제는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모습을 지닌 자유가 얼마만큼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밀에 따르면, 자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개인 내면의 고유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자유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나 신학적 자유에 이에 속한다. 이는 의견을 발표하고 출판하는 표현의 자유까지 확대된다. 둘째, 기호의 자유와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 구속받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의 선호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개성 또한 얼마든지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결사의 자유이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성인이라면 개인과 개인은 단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유는 이처럼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밀은 이러한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자유와 관련하여, 그 근거로 진리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밀은 우선 권력에 의한 도그마를 경계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아직 최종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그 누구도 무오류를 가정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진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어느 의견이나 사상도 자유롭게 개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론의 장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물론 꼭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마치 정신의 도정을 정반합으로 설명하는 헤겔의 ‘변증법’이나 반증 가능한 명제만을 유의미하다고 보는 포퍼의 ‘열린사회’와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두 번째 자유와 관련하여, ‘개별성’을 강조한다. 밀에 따르면, 우리는 굳어진 관습과 기존 체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하여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그저 원숭이와 같이 타인을 모방하며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하지도 못한다. 이는 전혀 자유로운 삶이 아니다. 각자가 최대한의 자유를 가지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재능을 계발하여 개성을 발휘하게 될 때 사회는 유용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가지고 변화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자유에는 어떤 조건이 가해져야 하는 것일까? 밀은 타인에게 해악을 주지 않는 것을 그 조건으로 삼고 있다. 즉 타인에게 해악만 주지 않는 다는 조건만 만족한다면, 얼마든지 위에서 언급한 자유는 주장될 수 있고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자유를 오로지 자신과 관계하는 것과 타인의 이익과 관계하는 것으로 나누어 보면, 전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자유가 보장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여론에 의해서나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 계급, 인종, 성별을 막론하고 어떠한 개인도 같은 자유를 지닌다. 이때에도 유일하게 한 개인의 자유가 간섭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그 목적이 오로지 자기 방어일 경우로만 한정된다. 《자유론》에 나타난 밀의 입장을 정리하면, 자유를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전제하고, 의견과 사상의 자유와 개인의 선호에 따른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진리 탐구에 기여할 수 있고, 후자는 사회의 유용성과 진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자유가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건 없이도 허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건적으로 제한되는데 만일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면 처벌을 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끝까지 자유의 최대한의 보장을 주장하며 권력과 사회의 개입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사회의 진보를 방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폐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제제기 《자유론》은 약 150년 전에 저술된 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밀이 겨눈 칼날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지점으로 날카롭게 향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 사회를 포함한 다수의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개인의 개성은 점점 쇠퇴하여 많은 이들이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민주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수의 횡포’ 또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자유론》은 현재에도 읽혀질 고전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의문이 생기는 바, 이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공리주의와 자유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 《자유론》에서 밀은 사회적 맥락에서 자유를 논했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나 도덕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오히려 그의 또 다른 저서 《공리주의》에서 주제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와 《자유론》에서 다루어지는 자유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밀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계하는 자유는 무조건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만일 그것이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사회 전체의 효용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밀의 주장은 모순된 것이다. 여기서 밀은 그 행위가 오로지 그 개인과만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개인 역시 명백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전체 효용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애초에 밀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 역시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밀이 내세우는 원칙 내지 원리는 정교하지 못한 측면이 엿보인다.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밀은 다양한 예시를 통해 그 설득력을 높이고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몇 몇 단편적인 사례에 국한시켜 그 원리의 적용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그 원칙의 탁월함 및 적용방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당연히 어떤 원리를 내세울 때 이해를 돕기 위한 사례는 제시될 수 있고 그렇다고 모든 사례를 끌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로 제한되어 제시될 수밖에 없다.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른 어떤 원리 없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한 가지 원리만이 복잡한 현실에서 적용된다면 많은 논란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각론의 차원에서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총론의 차원에서 기본 원리를 뒷받침해주는 원리들이 좀 더 제시되었다면 보다 탄탄한 주장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1) 김형철 옮김, 서광사, 1992
합리론 철학과 실체론 -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중심으로 - - 글의 목적 - 합리론 철학의 과제와 그 해결 방법으로서의 실체론의 역할을 알아본다. 또한, 형이상학을 토대로 인식론과 윤리학을 동시에 정당화하기 위한 세 명의 철학자를 통해 실체론의 발전과정을 되짚어 본다. - 목 차 - Ⅰ. 합리론 철학의 주요 과제와 실체론의 역할 Ⅱ. 실체론의 발전과정 (1)데카르트 (2)스피노자 (3)라이프니츠 1. 합리론 철학의 주요 과제와 실체론의 역할 철학은 그 시대와 사회의 현실 문제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근대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근대사회에는 ‘시민사회’라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사회가 등장했다. 이 시민사회는 근대사회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그 근간에는 ‘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도덕법칙을 설정함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근대 이전의 신 중심 사회에서는 신이 부여한 법칙이 곧바로 도덕법칙이 되었으나 이성을 중시한 근대사회에서는 무작정 신을 따르기보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적 체계가 필요하였다. 여기서 윤리학 및 시민사회를 정당화하는 것이 근대철학의 주요과제 중 하나가 된다. 또한,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것과 같이 당시에 자연과학이 급격히 발전하며 여러 자연현상들, 특히 물리학을 정당화 하는 것이 주요과제 중 하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친 후, 이들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즉, 자연현상은 자연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인 반면 도덕의 세계는 이러한 자연 필연성을 거스르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자들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그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없고 자연 필연성에 지배되는 존재라면, 우리는 신이 예정한대로 다른 자연물들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사고하며 행위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자유는 물론 도덕은 도무지 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이 둘의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환을 볼 수 있다. 이전의 철학적 입장과 달리, 이들은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나눈다. 그리고 예지계에 신과 신이 창조한 실체가 존재하고, 현상계에 이 실체를 반영하는 현상 혹은 지각대상이 존재하며 이것의 관념이 인간주관에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 실체론적 관점이다. 여기서 실체란, 참으로 존재하는 것 내지 그 존재를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체의 정의에 있어서 그 내포와 외연은 철학자들마다 그 내용을 달리한다. 2. 실체론의 발전과정 (1) 데카르트 데카르트 철학의 과제는 첫째, 확실한 인식의 추구였고 둘째, 과학과 도덕의 정당화였다. 데카르트는 첫 번째 과제 해결 방법으로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두 번째 과제 해결 방법으로 실체론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먼저 확실한 인식의 추구에 있어서,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사유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는 공리에서부터 여러 정리들을 이끌어 내어 정신으로서의 나와 신의 존재 그리고 물체의 존재까지 증명한다.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진 정신으로서의 나와 신, 즉 정신과 물체가 데카르트가 말하는 실체의 외연이 된다. 어떻게 정신과 육체가 실체의 외연이 되는 것일까? 그는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내포적 정의를 내린다. 이는 존재의 독립성, 인식의 독립성, 양태의 독립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독립성에서, 다른 원인으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자기원인인 신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또한 현존의 독립성이라는 측면에서 신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부터의 독립적인 유한한 실체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또한 다른 것 없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의 독립성으로부터 그의 이원론적 실체론은 정당화된다. 물체, 즉 육체 없이도 정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의 본질, 즉 속성은 ‘사유’이고 물체의 속성은 ‘연장성’이다. 사유와 연장성은 앞서 기하학적 방법으로 정신으로서의 나와 물체의 존재를 증서의 정신과 연장성으로서의 속성의 존재를 통해 그 담지자인 물체적 실체를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밝혀진 실체를 통해 그는 자연과학을 정당화한다. 신이 실체로서의 물체에 운동과 자연법칙을 부여한 것이다.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는 직관적으로 통찰되지만 신의 예정과 대립된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의 자유가 더욱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부정할 수 없다고 여긴다. 여기서 자연필연성은 물체의 세계이고 의지자유는 정신의 세계에 속하는데, 이 둘은 독립적인 서로 다른 실체에서 각각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실체론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상호 밀접하다는 우리의 직관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자 인간은 예외라며 뇌화수체와 같은 송과선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심신상호작용설’을 내세우게 된다. (2) 스피노자 스피노자 철학의 과제 역시 도덕과 과학을 정당화하여 조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일한 실체가 신이자 자연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고, 심신상호관계 문제 등 데카르트 철학의 난점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방법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방법과 실체론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그는 실체의 존재를 밝히고, 정신과 물체를 실체의 양태로 보고, 이 둘의 심신상호관계를 밝힌 뒤 과학과 도덕을 정당화 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는 실체를 “자신 안에 있으면서 자신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원인, 다시 말해 오직 ‘신’만이 실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공리에서 정리를 도출해내는 기하학적 방법이 아닌 결과를 전제한 뒤 원인을 도출하는 ‘최선의 설명에 의한 추론’을 가지고 논변을 펼치고, 이어 그는 동일한 속성을 가지는 실체는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신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 역시 신이 무한한 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신이 모든 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에 그 타출되는데, 가령 S와 T라는 실체에 a라는 공통적 속성이 존재하면 S에 포함되어 있는a는 S의 본질을 표현하고 T에 포함되어 있는 a도 S의 본질을 표현하므로 S와 T는 동일한 것이 되어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 스피노자는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고, 존재자는 실체이거나 속성이거나 양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정신과 물체는 유일한 실체의 양태이고, 정신과 물체의 총체는 자연이라는 데에서 신은 자연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이와 같은 주장을 근거로, 심신상호관계 문제에 있어 ‘심신평행론’ 내지 ‘심신동일론’을 내세운다. 이는 정신과 물체는 하나의 실체인 신의 서로 다른 양태이므로, 하나의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똑같이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심신상호작용설의 문제점을 해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는 결국 이원론을 일원론화 시켰다는 점에서 ‘해소’되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결국 스피노자는 신의 ‘능력potentia’에 의해 운동이 부여되고 신의 본성에 의해 자연법칙이 필연적으로 결정되게 된다. 그는 자유개념을 강제로부터의 자유로만 정의함으로써 신만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의 경우는 강제로부터의 자유만 인정하고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는 부정하는 ‘결정론’을 취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과학과 도덕이 대립되지 않고 자연히 일치하게 됨으로써 이 둘의 조화를 꾀할 필요가 없는, 역시 문제의 ‘해소’에 그치고 만다. (3)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의 철학의 목적은 앞의 두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도덕을 동시에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실체론을 그 방법으로 삼았다. 그는 먼저 내포논리학을 통해 그의 단자론 이론의 기틀을 마련하고, ‘모나드’라는 단자들로 세계가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세계를 신이 구성하였다는 창조론을 통해 과학과 도덕을 동시에 정당화하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웠던 외연논리학과 달리 내포논리학을 주로 사용하였다. 외연논리학은 말 그대로 주어 개념의 외연집합과 술어 개념의 외연집합과의 포함 관계를 나이해할 수 있는, 단순개념이 무수히 존재하면, 완전개념의 수도 무한히 많아지게 된다. 즉, 신은 하나라도 다른 단순개념을 지니면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완전개념들을 단순개념들의 결합을 통해 창조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을 보완해, 존재가 본질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신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모나드를 통한 창조론을 주장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가능적 실체로서의 모나드들을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창조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다양한 세계가 형성되어진다. 끝으로 구성원은 다양하고 법칙은 단순한 ‘완전성의 원리’를 기준으로 하나의 세계를 선택하여, 존재를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 가지 차원의 ‘예정조화’가 이루어진다. 첫째, 모나드의 내부지각은 잠재적으로 내재되어지고 이 모나드의 외부 모나드들의 배열은 이 내부지각에 상응하도록 되어있다. 둘째, 모나드와 모나드간의 조화로, 모나드 간에는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신이 서로 조화되는 모나드들을 인접하게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심신상호 관계에 있어서 ‘기회원인설’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켜 태초에 영혼과 육체가 상응하도록 미리 설정해놓았다는 주장을 한다. 넷째, 도덕의 왕국과 자연의 왕국의 조화에 있어서, 이성을 가진 모나드들의 행복을 위해 자연의 왕국이 도덕의 왕국을 섬기도록 하였다. 그는 이러한 창조론을 통해 우주는 모나드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모나드는 비물질이기 때문에 물체는 현상 내지 관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또 운동의 근원은 앞서 스피노자의 ‘능력potentia'과 유사한 개념인 ‘능동적 근원력'에서 온다고 보고, 자연법칙은 신의 이성에 기인하고 이는 인간이 연역적인 도출로 인식 가능하지만 그 유한성 때문에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물리학을 정당화 한다. 도덕의 정당화에 있어서, 우리는 예정조화설을 근거로 필연으로부터의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이에 그는 신이 모나드를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