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기 : 문주왕 >478년 8월 5일어제 밤에도 어김없이 악몽이 나를 찾아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가 밝기도 전인 이른 새벽이었고,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잠에 들려고 하였지만 꿈의 내용 때문인지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새벽닭이 울 때 까지 뜬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무력하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악몽은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사건으로 시작한다. 꿈속에서 나는 홀로 허망함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있는데, 내 귀에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굉음이 내 머리를 울린다. 내 뒤에는 고구려와 맞서 싸우기 위해 신라까지 달려가 요청하였던 지원병들이 대열을 맞추어 서있지만, 내 앞에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치열한 전투 현장이 아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도성 속에 고구려 군들의 무자비한 약탈만이 펼쳐진다. 길거리는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하고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 간데도 없다. 난 꿈속에서조차 늦은 것이다. 바뀌지 않는 현실은 매일 같이 악몽으로 나를 찾아왔고, 지난 3년간 난 악몽의 구렁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선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나를 밤에는 악몽들이, 낮에는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이 쉴 틈 없이 괴롭힌다. 만일 하늘이 내게 과거의 과오를 고칠 수 있는,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단 한번이라도 주신다면, 난 주저 없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해로 돌아갈 것이다. 475년, 그 해, 난 나의 모든 것을 잃었다.내가 태어났을 때는 우리의 북쪽에는 고구려가 세력을 키워 나가며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우리나라는 비유왕 때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었고, 이를 통해 우리 백제는 여전히 한강유역을 지키고 있었다. 선왕께서 왕위를 이으셨을 때, 나는 그를 보좌하기 위해 상좌평 자리에 올랐다. 선왕이셨던 개로왕께서는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를 펼치셨다. 나는 왕위에 오르고 당시 상좌평에 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지난 3년 동안 혼란스러운 정국을 다스리려고 부단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고구려의 침략 이후로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과거의 수도인 한성을 본거지로 하였던 부여족 계통의 구귀족들의 지배권력과 내가 새롭게 천도해서 수도로 삼은 웅진의 토착 세력이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갈등은 날로 심해져 간다. 대외적으로 우리 백제를 다시 공격하려고 노리는 나라들이 있는 만큼, 모두 힘을 합쳐서 다시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시점에서 서로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고 싸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니. 참담한 패전의 아픔을 아직 씻지 못한 상황 속에서 난립되는 귀족 파벌들을 조정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혼란스럽기만하다. 오늘 아침도 나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라며 자신의 이기적인 말들을 애써 포장하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보니, 나는 그들의 위선과 가식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오늘 하루가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오늘 아침의 소란스러움을 떠올리게 된다면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진다.일각에서는 귀족들의 파벌싸움에 휘둘리는 나를 보고 우유부단하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인지, 올바른 선택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백성들을 위하고 싶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지만,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미 기우러질 대로 기우러져 버린 나라의 국운과 마주할 때 마다 나의 마음 자꾸 후회만이 가득한, 475년 그 해로 돌아간다.475년, 나의 악몽에 수없이 나오는 그 해를 난 차마 잊을 수 없다. 밥을 먹을 때,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 일상의 순간순간마다 난 선왕의 후회와 다급함이 섞인 그 표정이 떠오르고, 또 함락된 한성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나의 병사들의 모습들이 환영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눈물이 내 눈앞을 가리고 난 그들을 보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 환영들이 더 선명하게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거닐다가 바닥에 돌부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는데, 넘어지면서 디든 손바닥에는 붉은색 피가 맺히기 시작하며 옅은 피비린내가 내 코를 스쳤다. 475년, 한성이 무너졌을 때, 그때도 피비린내가 내 코에서 진동하였다. 당시, 신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왔을 때, 도림을 믿었던 자신의 과거에 막심한 후회를 하던 선왕은 이미 살해된 된 후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반드시 살아서 나라의 왕통을 이으라는 그의 마지막 말을 난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백성들을, 나라를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지기로 결심하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여, 백성들을 위해 좋은 왕이 되기로 결심하였지만, 지금 나의 상황을 보면, 그때의 나의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퇴각한 고구려군 뒤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도성, 포로로 잡혀 사라져버린 한성에 거주하던 8천명의 백성들, 죽은 선왕, 그리고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권력을 위해 싸우는 귀족들이었다. 즉위 후, 삼년산성을 축조하며 옆에서 신라가 압박하고 있었으며 폐허가 된 한성에서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었기에 난 10월, 피난지였던 웅진으로 도망치듯 도읍을 옮겼었다.난 웅진으로 천도한 그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웅진은 주변의 강과 산으로 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내가 왕좌에 앉은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룬 것이 웅진으로 천도한 것 밖에 없다는 것에, 나는 좋은 왕이 되고자 하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최근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귀족들의 권력에 맞서 왕권을 높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병관좌평 해구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나의 즉위 때부터 어느 정도의 힘이 있었지만 그의 힘은 그가 병관좌평에 임명되면서부터 막강하게 커졌고, 이제 그의 세력은 나의 통제를 벗어났다. 해구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군사력을 장악하였고, 그가 군사력을 가지자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더 커지며 그가 조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무너져 내린 왕권을 올리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나의 부단한 노력을 그는 나의 측근세력인 목협만치를 권력 다툼을 통해 정계에서 축출하며 무너뜨렸다. 해구가 목협만치를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놀란 나는 해구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왕족인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지만 저번 달, 더웠던 7월에, 그는 해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난 듣게 되었다. 곤지마저 제가한 해구는 이제 나의 통제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가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갈수록 나를 지지해주던, 내가 의지할 수 있던 이들이 죽어간다. 근 몇 년간 내 주변의 수많은 이들은 죽어 갔고 난 이제 느낄 수 있다. 나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오늘 밤, 창밖을 보면 온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이 은은히 창을 통해 들어온다. 나의 마음은 혼란스럽게 짝이 없는데, 자연은 참 평온하다. 오늘 밤에도 나에게는 다시 악몽이 찾아올 것이고, 내일 아침에는 나의 편 하나 없는 조정에서, 나의 의견을 묵살해버리며 나를 위협해오는 해구에 의해 난 다시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위한 좋은 왕이 되고 싶었지만,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내가 만일 죽으면, 그때야 비로소 나의 마음에도 평온이 찾아오지 않을까.
영화 박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인 박열의 일제 강점기 당시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실화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나키스트인 박열이 어떻게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박열은 독립운동가로, 일본 히로히토 왕세자의 암살을 계획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1926년 받는다. 그의 법정에서의 기행은 당시 일본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조선일보다 1930년까지 전한 박열의 소식에 따르면, 박열은 법정에서 그의 동거인이자 옥중에서 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판결을 듣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일본 재판장에서 욕설을 퍼부었다고 왜곡 보도되었다. 영화 속 박열은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심각해진 일본 민심에 일제가 조작한 사건의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 그려진다. 조선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조작된 사건에서 박열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제 생각을 알리는 방법으로 사용한다.영화를 보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연결해준 사상인 아나키스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아나키스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 혹은 이야기가 거의 실려있지 않거나 짤막한 문장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만큼, 나는 해당 사상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상태였다. 내게 아나키즘 운동은 단순히 모든 정부와 체제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수업을 들으며, 아나키즘 운동은 단순히 무정부주의를 외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나키즘은 모든 강권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한 자유 추구 운동이었으며, 상당히 구체적인 사상적 체계를 가진 사상이었다. 아나키즘은 그리스어 anarchos에서 유래하였는데, 정당한 국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내게 ‘무정부주의’와 같이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데에는 일본의 번역에 영향이 있다. 당시 일본은 천황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던 만큼, 혼란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상당히 강조한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인간은 강권이 없는 무 강권의 상태에서 개인들끼리 자유롭게 연대하며 마치 유교의 대동 사회와 같은 유토피아를 구상할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다. 인위적인 제도, 즉 국가,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강권은 오히려 혼란한 상황을 일으킨다고 믿었으며, 권력의 분산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였다.우리나라에도 다수의 아나키스트 단체가 있었는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외에도 대표적인 예시로는 의열단이 있다.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에도 아나키스트의 행동의 주 방법인 테러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조선에서 받아들인 아나키스트는 독립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민중을 각성시키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테러를 선택하였고, 테러를 통해 민중이 각성할 경우, 민중이 직접 행동하여 결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즉 일제를 타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박열은 일본에서 아나키즘 사상 단체인 흑우회와 불량사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실제로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연기한다. 다만, 영화 속에서 표현되어 있듯, 그는 ‘비밀결사 불령사에 의한 조선인 폭동 계획’이라는 조작된 혐의로 인해 투옥되는 아나키스트 운동가이다.
최근 뉴스 룸에 등장한 손석희 앵커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색깔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 레드벨벳의 ‘빨간 맛’이 평양에서 공연된다는 점에 대해 불안감을 내비치는 일부 국민을 향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위험과 한반도를 나눈 38도선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 한편을 불안감으로 짓누르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아직 수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의 빨간색은 손석희 앵커가 주장하는, 정렬과 강렬함 보다는 갈라진 이념을 상징하는 핏빛의 전쟁,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념대립은 단순히 글이나 문헌만이 아닌,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이는 조지오웰의 을 향한 대중들의 평가와 시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조지오웰의 에 대한 가장 만연한 평가는 바로 영국인인 오웰이 소련의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우화를 통해 표현하였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에 대한 명백하게 그릇된 판단이다. 오웰의 은 단순한 반공주의적 소설로만으로는 포장되기 어렵다. 이는 우선적으로 작가 오웰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게 된다면 결코 적절치 않은 판단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그 누구보다 열망했던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활동을 하며 자본주의의 허구성에 환멸을 느꼈던 이였으며, 자신이 이러한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였다. 그는 결국 경찰로서의 미래를 포기하게 되고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이러한 오웰의 행보와 심경은 그의 수필 [코끼리를 쏘다] 와 [버마시절]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다만, 오웰이 열망하던 사회주의의 모습은 책 속 클로버가 생각하던, 계급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모습이었기에, 그는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의 등극으로 인해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흘러감에 실망하였고, 결국 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절망을 에 녹여내었던 것이다. 결국 작가가 이 소설의 모델을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에 빗대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소설을 단순히 소련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냉전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조장한 작품으로 바라보기에는 어렵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이 단순히 반사회주의적인 우화로 소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나라의 1940년대의 상황을 분석하여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한국에서 반공주의 소설의 표본으로 인식을 얻은 데에는 이 소설이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 직후, 전체주의가 확산되는 시점에서 번역되어 발간된 이 소설을 자연스럽게 정치적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특히 1948년에는 공산주의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점이 부각되어 집단세력의 집권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즉, 오웰의 작품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해석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오웰의 은 매너농장의 가장 나이가 많은 돼지, 메이저 영감의 연설로 시작한다. 그의 신념, 즉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며, 인간과 인간의 모든 방식에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메이저 영감의 죽음 이후, 스노우볼과 나폴레옹에 의해 로 재탄생하게 된다. 동물들은 더 나은 삶을 바라보며 반란을 일으켜 존스씨를 내쫓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한 농장을 세우지만, 결국 농장은 돼지들을 중심으로 한 특정 엘리트 사회로 변질되며, 스노볼의 추방과 나폴레옹의 독재로 결말을 맺게 된다. 오웰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동물농장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를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돼지를 한 번 보고, 번갈아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존스씨,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비판하며 혁명의 중심에 섰던 돼지들은 결국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이 되어버린 것이다.앞서 말하였듯, 은 단순한 반공주의적 소설로 단순화되어 표현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데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책의 서사구조의 특이성이다. 만일 오웰이 을 통해 단순히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비판을 서술하고 싶었다면, 그의 소설 속에는 독재자 나폴레옹, 그리고 그 아래 억압 받는 동물들의 삶에 대해서 상세한 서술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을 반공주의소설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매너농장의 동물들이 혁명 이후, 동물주의의 수칙에 따라 바르게 살지만, 이 사상의 근본적인 모순점과 실패로 인해 모두가 굶주려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을 기술하며 동물주의, 더 나아가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이어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의 서사의 핵심은 다른 반공주의적 소설들과는 다르게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즉, 오웰은 소설을 통해서 사회주의라는 사상 자체의 비판이 아닌,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책에서의 나폴레옹, 그리고 그를 엄호하며 다른 동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선사하는 위협적인 개들을 등장시킴을 통해 러시아의 스탈린과 비밀경찰들, 그리고 혁명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들의 부패한 권력에 대해 비판하였다. 결국, 단순히 사회주의 또는 아름답고 바람직한 이상이어도, 자연적인 본능인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의해 계급 없는 사회는 불가능함을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은 출간된 1944년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고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은 단순히 러시아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한정짓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 동물농장은, 즉 독재정권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그 얼굴을 보였고, 현재까지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의 모습 역시 동물농장의 모습과 사뭇 비슷하였다. 소설과 역사의 장면들이 일치하는 순간들을 몇 개 살펴보자면, 우선적으로 소설 속 돼지들은 다른 동물들이 반발하거나, 어떠한 결정사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때 마다 “그러니까 동무들, 여러분 중에 설마 존스씨가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라는 질문으로 논란을 잠재우며, 나폴레옹의 집권을 정당화 시킨다. 이는 1960년대 수많은 집권자들이 민중들에게 “빨갱이가 쳐들어온다.”, “우리가 빨갱이로부터 너희를 지켜주겠다.”와 같은 표어를 내세우며, 북한을 적대시화하며 독재를 정당화한 방법과 비슷하다. 북한이 우리나라 보수의 강경 노선을 이용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체제 안정을 도모하였던 것과 같이, 대한민국의 보수층 역시 북한의 강경 노선을 이용해 정권 획득을 노렸던 것이다. 두 번째는 나폴레옹이 동물들의 존스씨에 대한 반감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았듯, 1960년대의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정권 역시 빨갱이로 속칭하는 북한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기초로, 자신의 장기집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오웰은 소설 속 개들과 더불어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선전대, 즉 양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다른 동물들이 나폴레옹에게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할 때 마다 를 외치며 토론을 방해한다. 이는 군부독재시절 엄격하였던 언론통제, 그리고 군부를 찬양하는 글만 내보냈던 당시 1960년대의 언론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외에도 196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부정권이 주도하며 사람들을 위협에 물들였던 사복경찰들은 나폴레옹에게서는 개들로, 동물들의 관심사를 끌기 위해 계속되어 이루어졌던 풍차건설은 박정희정권 시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그리고 이후 전두환 정권이 한국프로야구를 창립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스퀼러가 나폴레옹의 독재를 정당시키기 위해 7계명을 고치며, 소설의 후반부에서 7계명이 삭제되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로 바뀌게 되는 장면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과 동일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은 오웰의 상상 속 동물농장과 다를 바가 없는 사회였던 것이다.
In a general sense, the water potential is the tendency of water to diffuse from one area to another in a given set of parameters. Water potential is used to predict the direction off water diffusion in living plant tissues since it is hard to predict the movement of water in plant tissues simply based on knowledge of relative solute concentrations between the two sides of the plant cell wall. Water potential is expressed in bars, which is a metric unit of pressure equal to about 1 atmosphere.
2007년, 전국을 뜨겁게 달군 논쟁에는 2009년 새롭게 한국은행에서 발행될 고액권의 주인공이 누구냐였다. 결과적으로 10만 원권의 주인공은 백범 김구, 5만 원권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이었다. 주로 조선 시대 성씨가 ‘이’인 남자들이 지폐에 다수 등장하였던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5만 원권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많은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5만 원권의 후보로 거론되었던 이는 주로 유관순 열사와 신사임당이었다. 고문받기 전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찾기 어려워 5만 원권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주인공으로 유관순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유관순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영화 항거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어떻게 만세운동을 이끌게 되었는지 과정을 보여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만세운동 이후 서대문 감옥에 갇혀 지낸 1년여간의 세월을 집중하여 조명하고 있다. 영화를 보며 가장 충격받았던 장면은 바로 영화 초입에서 유관순이 지낼 옥사인 8호실의 문이 열려있을 때였다. 과거 서대문 형무소 견학 당시 감옥에 들어가 보며 해설사 선생님께 그 좁은 공간에 30~40명 정도가 지낸다고 들었을 때, 그 말이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의 인원수를 가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냥 비좁은 공간이었구나! 정도의 생각으로 넘겼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본 8호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한 풍경이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올 정도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는데, 모두 앉거나 누울 공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며,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25일의 기간에 조선 전체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약 9,059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1919년 5월경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된 수감자가 3,319명이었는데, 1918년 서대문 감옥이 1년 동안 약 3,948명의 죄인을 취급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단 한 달 동안의 수감자가 거의 1년의 총인원과 엇비슷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특히 서 있는 사람들이 다리가 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속 노래를 부르며 감옥을 빙글빙글 도는 장면은 무언가 마음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며, 아이의 탄생을 모두 기뻐하거나 농담을 하는 장면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8호실에 투옥된 수많은 사람을 보며,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왜 우리는 3.1운동의 주역을 유관순으로 기억하게 된 것일까. 자세히 생각해보게 된다면, 3.1운동은 서울 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에 산발적으로 퍼지며 약 한 달 동안 이어진 만세 시위를 통칭하여 이르는 단어이다. 이때 유관순은 3.1운동을 서울에서 목도하고 이를 자신의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한 참가자이다. 물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버린 것은 매우 존경받아야 마땅할 만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유관순 신화로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 받을 정도의 행동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어렵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학생, 사람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유관순이 3.1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직후이다. 북한 사회에서 3.1운동 역사 서술에서 유관순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며, 해방 전 유관순에 관한 기록이 샌프란시스코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에만 짧게 남아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해방 직후 각 건국 세력들이 건국 주체로 활동하며 3.1운동의 기억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화 출신으로 국가에 헌신한 유관순은 당시 이화여중 교장인 신봉조와 이화학당의 교사 박인덕에 의해 발굴된다. 당시 박인덕과 신봉조는 친일, 즉 체제 협력의 혐의가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며 해방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권위이자 자격이 필요하였는데, 그러한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위로 유관순은 활용 가능한 인물이었다. 유관순의 여러 조건은 정치적인 효용성을 만족시켰다. 우선, 어린 소녀 즉 여성이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식민경험을 주로 한 나라들이 그 당시의 혹독함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 수난의 이야기 전개를 다수 빌리는데, 유관순이 순수한 소녀라는 특징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두 번째는 박인덕과 신봉조가 찾던 조건인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점이다. 당시 이화학당에 다녔다는 것은 사회의 엘리트를 의미하였다. 세 번째는 가족사의 비극성이었는데, 아우내 장터에서 부모님이 바로 돌아가시며 오빠 역시 투옥이 되었다는 점이 비극성을 강조시킨다. 마지막 특징은 바로 감옥에서 투옥 중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사실이다. 위 네 가지 조건 모두 유관순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한층 더 극적으로 만드는 요소로 기능하였다. 3.1운동의 일반 참가자로 법정과 감옥에서 강한 투쟁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3.1운동 속 일제의 가혹한 탄압, 참가자들의 큰 투쟁 의식과 희생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즉, 민족주의와 기독교적인 순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관순의 삶은 서구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해방기 정부의 핵심 가치와 일치하며, 정치적 상징으로 적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