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적 사랑과 무차별적 사랑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사고방식을 지적하며 유가의 인과 묵가의 겸애의 차이점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가의 인에 대하여 차별애라고 말하며 인의 차별성, 특수성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묵가의 겸애 사상에 대하여 무차별애라고 말하며 보편성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유가에도 보편적 이상이 존재한다. 인의 사랑에는 특수적 요소와 보편주의적 요소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편애적 사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친소관계에 따라서 차등적 사랑을 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묵가도 편애를 비난한 것만은 아니다. 부모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는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 때문에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차별의 이상이 현실에 옮겨질 경우, 차별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인은 효를 강조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겸애는 효를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하여 본질적인 차원에서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동을 바라보는 까닭에서의 차이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인은 자연적 감정의 표출이 효의 행위라고 보는 반면, 겸애는 이성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 효라고 보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저자는 “겸애의 의미가 ‘무차별적 사랑’이 아니라 ‘포괄적 내지 통합적 보살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서 별애와 겸애를 대립하여 보여준다. “겸애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침’의 의미이니 겸애에는 ‘자신을 사랑하고, 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과 같은 태도가 함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통합적 보살핌의 한 유형으로서 무차별애를 말할 수 있으며 통합적 보살핌으로서의 겸애와 인은 서로 충돌하거나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겸애는 인을 포섭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겸애와 인이 실제의 행태에서 차이 나는 점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겸애와 인이 대립되는 지점은 이 둘의 도덕적 근거이다. 유가는 인간이 가지는 특수한 감정에 주목하기 때문에 차별적 사랑이라고 규정되어질 수 있고 묵가는 보편적 이성에 주목하기 때문에 무차별애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인은 감정이고 겸애는 이성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은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에만 머물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의 이성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겸애도 단순히 이익계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또한 후기 묵가에 대하여 의도 공리주의의 성격을 띤다고 주장한다. 이는 서구에서 주장하는 결과론적 공리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묵가는 유가와 달리 의도의 강조를 비판한다고 생각하는데, 묵가도 의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유가와 달리 “단순한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 성취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결과만을 가지고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지향하는 의도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와 유가는 이성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묵가의 이성은 계산적이고 도구적 이성이지만 유가의 이성은 목적까지 고려하는 합목적적 이성이다.” 묵가는 달성해야 할 목표를 먼저 세우고 난 후에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에 집중하기 때문에 목표와 수단은 개념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유가는 수단뿐만이 아니라 목적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성적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또한 저자는 칸트의 비판을 예로 들면서 서가 도덕 명령이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흔히 서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행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그들에게 행하지 마라”라고 정의를 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즐기는 것을 주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원하거나 즐기는 것을 주라”라는 명령을 함축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사람들이 마약과 같은 것을 원하는 경우 도덕적 명령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동양, 서양 모두 최종 목표를 구현하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로 사욕을 지목하였는데 맹자는 사욕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감정 조절을 내세운 반면 묵가는 감정을 배제한 지성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맹자가 강조한 사단이나 친친의 감정에 이성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묵가도 도덕의 영역에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둘이 내세운 사욕을 극복하는 방법이 다른 것 같지만 유사성이 많다고 저자는 주장한다.이 책을 읽으며 인과 겸애, 그리고 더 나아가 유가와 묵가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들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저자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지점들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우선, 저자는 겸애를 “포괄적 내지 통합적 보살핌”과 같이 정의하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묵자의 겸애는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과 거리가 멀고 최대 다수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현실적인 개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이유가 공자 사상의 관념성, 추상성에 문제제기를 하며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와 묵자가 각각 왜 그러한 개념들을 주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면 더 명확해진다. 공자가 인을, 그리고 묵자가 겸애를 주장했던 이유는 먼저 유가의 사고 단위와 묵가의 사고 단위를 비교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우선 묵자와 공자는 둘 다 노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묵자의 활동 시기나 살았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없지만 여러 가지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았을 때 묵자가 살았던 시기가 공자와 맹자 사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춘추시대에 살았던 공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씨족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가 지켜온 관습에서 유래되는 것들이 많다. 공자 사상은 씨족공동체에 기초해서 연대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익명의 사람들이 아닌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같이 사는 공동체에서 효와 공손함을 배웠고 이것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나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묵자가 활동했던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사람들은 기존의 생활 근거지를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씨족공동체가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에 공자 사상의 한계가 드러나며 문제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묵자가 이를 지적한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묵자가 생각하는 사고 단위는 유가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묵자는 물질, 경제와 같이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이와 동떨어진 관념과 도덕을 거부하며 어떻게 하면 통치 체계와 사회 체계를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과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즉, 묵자는 공정한 재분배와 모든 사회구성원의 기초적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국가라는 정치 단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 시스템을 이용하여 모든 인민이 최소한 삶의 안전성을 누리도록 보장하는 것이 바로 겸애에 해당한다.또한 서가 하나의 도덕적 명령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와 다르게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서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즐기는 것을 주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원하거나 즐기는 것을 주라”라는 명령을 함축하는 것과 같고 그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원하는 경우에 도덕적 명령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서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명령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타성이란 보상과 상관없이 타인을 도우려고 하는 심리적 특성을 일컫는 말인데, 흔히 서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행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타인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명령으로 삼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저자는 묵자 사상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묵가가 몰락했던 이유는 묵자 사상이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지 현실성이 떨어져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승리자보다 패배자가 더 많다. 그리고 승리자도 자신이 언제 패배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에 떨며 산다. 비공과 겸애가 오히려 현실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만 가지고 있던 특수성 덕분에 묵자 사상이 생겨날 수 있었다. 전국시대 때는 전쟁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급변하였다. 전쟁이 일상화되었고 따라서 비공과 통일을 주장하는 묵자의 사상이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전쟁으로 인한 무질서함이 하층민들을 괴롭게 만들었으며 그 사람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묵자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통일 제국 시대가 생겨나면서 무질서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이 살아남을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영어영문학과 합격 자소서1.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경험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원서와 한국어 번역본의 뉘앙스 차이가 왜 중요할까?’라는 질문은 저의 학업 과정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우리말로 읽었을 때는 ‘4대비극이라 불릴 만큼 슬픈 내용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원서를 접하며 다른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렇게까지 언어의 뉘앙스 차이가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감정 전달 차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직접 번역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어문계열 진로 탐색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부활'과 ’앵무새 죽이기' 등 유명한 영문학 도서를 번역해보았습니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화자 스카웃은 6살 소녀로서 복잡한 인종문제에 얽혀 있는 마을이야기를 끊임없이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이러한 미묘한 감정선을 담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원어민 선생님을 찾아가 번역한 부분에 대한 평을 부탁하였는데 어색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번역에만 급급했기에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그래서 먼저 작품의 내용과 주인공들의 발화 의도를 온전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스카웃의 대사를 저만의 노트를 만들어 그대로 적어보기도 하고 현재와 다른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며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어린 화자는 다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저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지하였습니다. 동심의 눈으로만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화자 옥희와 비교하며 작가가 사회의 부정과 모순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인물로 설정한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을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을 통해서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했던 과정에서 원서와 번역본의 뉘앙스 차이를 줄일 수 있었고 이러한 탐구적인 노력은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의 성적 향상과도 직결되었습니다.2.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의미 있던 교내 활동(3개 이내)를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서술해주시기 바랍니다.‘반영론적 관점’을 통한 문학 읽기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같은 사건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1 문학시간에 배웠던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해석하기 어려웠지만 국어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일제강점기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여 읽어보니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문학을 해석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을 가져다주었고 더 많은 작품을 접해보고 싶어 교내에서 하는 ‘123 책읽기 활동’에 3년간 참여하였습니다.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읽어보며 ‘시대적 배경에 따라 같은 사건도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6.25전쟁 직후에 출간된 ‘오발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관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것에 반해 1970년에 출간된 ‘나목’은 주인공이 아픔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보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이러한 ‘반영론적 관점’을 통한 읽기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한 층 더 높여주었습니다.‘반영론적 관점’을 통한 읽기는 우리나라 문학에서 더 나아가 영미문학에까지 적용해볼 수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을 접하며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세계사 시간에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배우며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르네상스 격변기의 시대의 시기가 겹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 상황이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이 강했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4대 비극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난이 만연했던 제임스 1세 시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처럼 직접 의문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노력과 다양한 학문 간의 연계는 영문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영어토론동아리에서의 경험은 한 문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토론주제는 난민 수용에 관한 토론이었습니다. 처음 주제가 주어졌을 때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편에 의견이 쏠리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였습니다.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친구들은 IS 테러분자가 난민으로 위장해 있을 가능성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통해 난민 수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에서만 바라보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이는 편협한 관점에서만 사회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닌, 다방면에서의 사고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또한 난민 수용의 찬성 편에서 입론을 준비하다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용어가 널리 퍼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슬람’과 ‘포비아(phobia)'를 합쳐 이슬람에 대해 극도의 공포감과 증오감을 표현한 이 단어는 인권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였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3. 배려, 나눔, 협력, 갈등관리 실천사례를 기술해주시기 바랍니다.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증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발달장애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기르고 싶어 2년간 기쁨이 싹트는 나무에서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아이는 언어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정원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정원이와 함께 한 활동 중 정원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그림을 그리고 퍼즐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퍼즐을 맞출 때면 ‘이렇게 하는 거 맞아?’라고 물어보며 활동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에 격려를 하며 활동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정원이가 갑작스럽게 울거나 짜증을 낼 때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며 공감해주었습니다. 이는 아이들도 자신만의 고민이 있으며 그에 걸맞은 의사소통 방식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정원이가 한글을 읽고 동화책들을 혼자서 읽게 된다면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한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스케치북에 글을 써가며 가르쳐주었습니다. 정원이의 눈높이에 맞게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집중을 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는 정원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제 생각대로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집에 가서 언어 발달 장애 교육 자료들을 찾아보며 어떻게 하면 정원이에게 재미있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정원이는 학문적인 학습보다는 신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활동들을 좋아하여 발달장애인들도 쉽게 직접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한글을 가르쳐주는 콘텐츠가 없을까 찾아보았는데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들은 많이 없어 정원이에게 한글을 알려주는 데에 있어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또한 정원이가 심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문학 작품 영상도 찾아보았지만 발달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위한 영상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적 약자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덜어주고 싶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비교를 중심으로목차1. 서론2. 본론가. 유물론과 관념론나. 변증법과 형이상학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헤겔과의 비교마.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바.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한계와 의의3. 결론1. 서론역사란 무엇인가 수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배우며,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 개념을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대해서 배우면서 산업화 전후 시기의 노동자들의 삶을 주제로 한 역사학을 펼쳤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마르크스가 어떠한 내용을 주장했는지 잘 모르면서 마르크스를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보고 나쁘게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영국 BBC 방송에서 “공산주의를 창시한 19세기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뽑혔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하여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비판만 가하고 있다.마르크스주의 역사는 크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으로 나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다루기에 앞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개념들에 대해 다룬 후, 관념론적 변증법을 주장했던 헤겔과의 비교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2. 본론가. 유물론과 관념론유물론과 관념론은 세상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 정반대되는 답을 내놓는데, 유물론은 세상의 근원이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관념론은 세상의 근원이 ‘정신(관념)’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물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의식과 정신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간 외부에 물질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감각 정보를 통해서 그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관념론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분리해 정신세계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라고 보는” 것이며 인간은 불완전한 감각 정보를 얻기 때문에 외부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은 신이 먼저 존재하고 신이 물질을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나. 변증법과 형이상학형이상학은 세상이 고정불변하다고 본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변화가 일어나거나 기존의 틀로는 해석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의 인식 틀과 현실 세계의 괴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헤겔은 모든 사물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보는 변증법을 제창한다. 변증법에서는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원인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그 원인이 바로 모순이다. 예를 들어, 봉건 사회에서 상업이 발전하면서 부르주아지라는 신흥계급이 등장했는데, 이러한 신흥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기존의 봉건적 질서가 걸림돌이 되었고 봉건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본가 계급에 위협을 느껴 이러한 모순과 갈등이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즉, 모순과 대립을 근본원리로 해서 정, 반, 합의 3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정'은 어떤 것이 기존부터 유지되어 오던 상태를 말한다. 이 '정'을 부정하며 새로운 상태를 제시하는 것을 '반'이라 한다.” 이 두 가지가 투쟁하며 이를 반복하다 보면 ‘합’에 가까워진다.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변증법을 제창한 헤겔은 관념론자로서 모든 것의 근원을 정신적 존재에게서 찾았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론이라는 토대 위에 변증법 철학을 세운다. 헤겔은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인류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을 “시대정신이 끊임없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주창하게 된 배경은 그가 살아온 시대를 보면 알 수 있다. 헤겔이 살았던 18~19세기에 독일의 시대정신은 ‘계몽’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시민 혁명을 통해 이성적인 시민사회를 건설하였지만 독일은 비이성적인 봉건적 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에 헤겔의 시대정신은 계몽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칸트의 계몽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철학 이론을 전개해나갔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가 점차 이성을 실현하고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보았다.” “역사는 이성의 힘에 의해 진보하며,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헤겔과의 비교우선 헤겔과의 공통점은 “마르크스는 분명 헤겔로부터 모순개념을 받아들이며, 그 경우 그는 모순을 존재론화시킨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순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입각하여 헤겔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과학적(유물론)으로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신이나 절대정신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비판한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실천’을 진리를 인식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언급한다.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들이 관념의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물질과 상호작용을 해야하며 이것이 ‘실천’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절대적 진리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헤겔이 주장했던 관념론은 정신이 물질에 우선한다고 보므로 정신을 탐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으로 흐르거나 신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마.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성에 주목하였다. 그들은 공장과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는 이들이 해방되면 모든 인간이 해방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회주의 사상을 결합해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역사철학 이론을 펼친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 산업사회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적게 임금 받고 하는 현실을 보며 분노했다. 노동자들이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삶을 사는데, 이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 해방을 달성하고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를 없애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하부구조를 물질로, 상부구조를 학문, 예술, 법, 정치, 종교, 철학과 같은 사상으로 보았으며 사회는 하부구조 위에 놓인 상부구조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때, 하부구조는 생산양식이고, 이는 생산관계와 생산관계를 결정하는 생산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생산관계는 생산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때, 새로운 생산력(상공업)과 낡은 생산관계(영주-농노)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서 나타난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나 관념보다 경제적 토대라는 물질적 조건을 역사 진보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역사의 원동력에 대해서 헤겔과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성’과 ‘절대정신’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헤겔과 달리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물질적 생산 활동으로 보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하지만 그 결정권은 하부구조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하부구조는 물질적 토대를 말하는 것이고 상부구조는 관념적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이 관념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주인과 노예, 영주와 농노,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벌어진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하며 이러한 계급투쟁은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이에 따라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한다. “1단계는 원시 공동사회, 2단계는 고대 노예사회, 3단계는 중세봉건사회, 4단계는 자본주의사회, 5단계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다시 도래한다고 보는 공산주의 역사관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들의 노동 착취로 인하여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중 일부만 노동의 대가로 주며 나머지는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가로챈다. 이러한 경우,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며 빈곤을 벗어날 수 없고 그에 따라 수요가 위축되고 이는 경제공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확대되면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바.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한계와 의의마르크스는 인간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경쟁하는 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경쟁 속에서 사회는 발전하며 진보할 수 있었는데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에서는 개인들의 경쟁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생산성과 능률은 떨어지며 이러한 비효율성 때문에 사회주의가 건설되더라도 다시 붕괴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이상향적 사회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방식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고 노동자 운동에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으며 노동의 소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Nicholas Hilliard20210169 노선아Nicholas Hilliard was best known for his portrait miniatures. He was born in 1547 as the son of Richard Hilliard, a goldsmith, and died in 1619. In the 16th century, it was turbulent due to the Reformation, which was the spread of Protestantism. His father, a supporter of the Reformed religion, sent him to Geneva to escape British persecution. He returned to England around 1559. His first attempt at miniature painting was made in 1560. When he was 13, he painted a portrait of himself, and his talent began to emerge from then on. He was apprenticed to the Queen’s personal jeweler and painted many portraits of her and her court leaders. Hilliard continued to succeed as an artist and was sponsored continuously, but he had financial problems for 45 years due to his poor financial insight. He painted a variety of works, from small oval miniatures to larger cabinet miniatures. His famous works are and . The portrait, , was painted in 1575. Elizabeth, who was born to Henry VIII and Anne, the second queen, was criticized by nobles for her lack of marriage. She needed a portrait to show her strength and dignity. Hilliard revealed her power, authority, and wealth in her portrait. The red rose in her right hand is a symbol of her family, the Tudor Dynasty. At that time, these detailed paintings were mainly used as a sign of support for the monarchy. In fact, Elizabeth I's wealthy servants held portraits as a sign of loyalty to the throne. James I, who became king in 1603, also used portrait as a tool for propaganda. The work, , was painted in 1587. At that time, people gave miniatures as a sign of respect or prohibited enthusiasm, and they often contained secret messages. In this miniature, the young man wears black and white, which were Elizabeth's personal colors. The roses in this miniature also symbolized Queen Tudor. This man in the painting is believed to be Robert Devereux, the second Earl of Essex, and is seeking the love of Elizabeth I. This painting is one of the most famous miniature paintings of the court, and the young man's hand on his chest and his posture served as a symbol of the Elizabethan romance. Hilliard also wrote a treatise on miniature painting called The Art of Limning. Hilliard received a lot of respect from people and gained reputation. For example, the poet John Donne praises Hilliard’s work in the poem called The Storm (1597). He was also a teacher of outstanding later miniature painters. Even after his death, he had a great influence on British portrait miniatures.
제목: 일본의 우경화의 배경과 영향, 그리고 이에 따른 문제점목차1. 서론2. 본론가. 우경화의 배경나. 우경화의 영향1. 일본군 위안부2. 야스쿠니 신사 참배3. 독도다. 우경화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사상1. 삼한정벌설과 정한론2. 천황제의 문제점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경제적,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 위안부, 독도 문제 등에 대해 좁혀지지 않는 의견과 이로 인한 한일 갈등에 문제의식을 가졌고,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전일보에서도 현재 일본이 “새 역사 교과서의 과거사 왜곡, 고이즈미 (전)수상의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강행에 대한 한국층의 비난을 외교적 내정간섭으로 치부하면서 과거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현실과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질적 지배를 일본 영토에 대한 불법점거 라고 주장”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의한 결과라고 말한다. 또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우경화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역사 수정주의란 “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과거 침략 전쟁을 일으켰던 역사들을 반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우경화 경향에 따라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외교에서의 갈등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실제로 매일경제에 따르면, “일본이 이들 전쟁으로 피해를 안긴 주변국에 사죄를 했는지에 대해선 절대다수인 84%가 '충분히'(31%) 또는 '어느 정도'(53%) 사죄했다는 선택지를 골라 반대 의견을 고른 응답 비율(14%)을 크게 웃돌았다”고 한다. 이는 일본 국민의 다수에게 과거 침략에서는 먼저 우경화의 배경에 대해 언급한 후 일본 위안부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와 같이 현재 일본과 우리나라가 갈등을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그 후에는 우경화가 왜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삼한정벌설과 정한론 그리고 천황제 폐지로 나누어서 쓸 것이다.2. 본론가. 우경화의 배경우경화란 “일본 내 보수·극우 세력들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현상으로, 사회적 기류가 보수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식량난이 심해졌으며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의 경제는 1950년대에 약 20년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전후 일본국민들은 국군주의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전쟁의 패배를 극복하고 고도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일본은 1980년대 버블 붕괴로 인하여 저성장 시대를 맞이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침체, 기업의 채산성 악화 등으로 인해 20년간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에 일본 국민들은 실망감과 불안의식을 느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주의 성향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해졌고 이는 우익세력에게 힘을 실어줬다.” 과거의 일본 역사들을 미화하며 다시금 패권국으로서의 일본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는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거나 사죄하지 않고 침략 전쟁을 미화한 역사 교과서를 쓰며 일본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등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주장하여 한, 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나. 우경화의 영향1. 일본군 위안부일본 위안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예전부터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졌지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었으며 강간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낙인찍는 사회 분위기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숨어버리도록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한국 민주화 운동과 여성 운동이 만들어낸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범죄로”의 성폭력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대부분 극심하게 가난한 삶을 살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일본에게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일본에서는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유엔에 제출하는 등 우리나라와 대립되고 있다.이처럼 바뀐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었다. 우리의 인식의 변화가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도를 고안하고 실행시킨 것이 타국민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고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2015년 12월 28일에 이루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민들과 피해자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이루어졌으며 보상의 형식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소송을 통해서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역사적 정의인데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사과는커녕 자신이 행해온 역사적 행위들을 부정하고자 하며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형식적인 측면을 당사자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형식적 측면을 강조하는 합의를 하여 원망을 샀다. 우리는 일본에게 배상을 받고 이 사건을 종결시킬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야 하며 일본에서도 위안부 사건을 사실에 입각해서 제대로 가리키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진실을 바로 알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2. 야스쿠니 신사 참배일제강점기 때 조선에는 마을마다 신사가 있었고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로 하여금 신사에 강제로 절을 하게 만들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1853년 이후 일으켰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등에서 사망한 246만 명의 넋을 기리고, 그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태평양전쟁 A급 한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며 침략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을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이다. 전사자의 죽음을 숭고한 죽음으로 바꾸어서 아시아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이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이 이에 항의하자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의 관계자들은 전사자들이 일본인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등의 주장을 펼친다. 또한 일본의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과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고 전쟁에 동원되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대부분 있기 때문에 군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 야스쿠니 문제는 일본과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이용하여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다시 필요에 따르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강대한 일본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인권, 평화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까지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문제와 실상을 알려야 한다.3. 독도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동아시아 영토분쟁도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익 세력은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통해 독자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를 자유롭게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전의 교과서는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조성하기 위하여 밝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일본의 침략 전쟁과 팽창 전쟁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였다. 더욱이 독도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토라고 일본이 독도를 교과서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면, “초등학교 5, 6학년 사회 교과서와 중학교의 모든 지리(4종)와 공민 교과서 (6종)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일본 외무성이 운영하고 있는 독도 홈페이지에서 한국을 불법 행위자이자 가해자로 설정하고 있다. 독도와 관련된 한일 문제는 왜곡된 과거사 청산의 문제이다. 정부는 영유권에 대한 법적입장을 굳건하게 지켜야 하며 우리는 일본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의도는 부국강병이었으며 이를 위해 외적으로는 서구를 모방하고 내부적으로는 국권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어내서 부국강병에 성공한다. 이 기간에는 제국주의 논리와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었기에 식민지를 확보해 국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요구가 생겼다. 이것이 정한론의 시작이었으며 삼한 정벌설이 부활한 것이다. 즉 “삼한 정벌설을 인용한 조선 멸시론과 침략론이 모두 요시다 쇼인에 의해 집대성되어서 체계적인 정한론으로 결실을 맺은 것을 볼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시대에 문명론을 펼친 근대 사상가였다. 그는 “과거 스승과 같았던 조선도 오늘날 문명화가 진행 중인 일본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고 하며 그 이유로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등 조선을 멸시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자 교육가로서 이러한 사상을 국민에게 강조하고 주입시켰다.삼한 정벌설부터 시작하여 정한론까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전부터 침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아시아를 멸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하며 아시아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처럼 제국일본의 범죄적 과거사에 큰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1만엔권을 장식하고 있으며 아베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라는 것을 보면 일본이 과거 자신의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천황제의 문제점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연합국에 의해 지배당한다.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헌법 개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미국은 천황제의 존속을 이용하면 일본이 미국을 추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추궁했을 때 일어날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천황을 존속시켰다. 천황의 정치 실권은 박탈하였지만 상징으로서의 천황은 남겨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청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전쟁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