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독후감“한글은 아름답다그리고 섬세하다.단, 섬세한 것은 대게 예민하다.”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의 어리석은 차가운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는지, 나의 따뜻한 말로 상대방을 기쁘게 한적이 있는지. 나의 말의 온도는 몇 도인지…“너는 얼굴도 예뻐”, “너는 얼굴만 예뻐”이 유사한 두 문장에서 다른 점은 조사의 차이다. 이 조그마한 조사의 차이가 말의 온도를 결정한다. 한글은 섬세하나 대게 예민하다.“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노래 가사인 이 대목은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까이서 볼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한번쯤은 멀리서 바라보자, 그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당장 사랑이든 일이든 열중하여 앞만보고 나아가면 시야가 좁아지고 주변에서 놓치게 되는 것이 있다. 이렇게 놓치고 지나간 것들은 조금씩 모여서 후회라는 이름의 잔여물을 남기게 된다. 이는 우리가 하던 일이 막히고 사랑에 막히게 되었을 때, 한번쯤은 머리를 비우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작가는 말한다, 때로는 조금 멀리서 바라보자고... 그래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원래 그런 거야” 이는 그동안 살면서 질리도록 많이 들어온 말이다. 이 말은 간단하다, 이 짧은 말로 모든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다. “이걸 왜 이렇게 처리하지?”, “조금 부정한데?” 이렇게 스멀스멀 피어 오는 의구심 따위는 이 말 하나로 상쇄된다. 이게 좋은 걸까? “아 원래 그렇구나, 내가 이상한거구나.” 이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버리는게 좋을 걸까? 부조리는 끝이 없다. 한번 시작된 부조리는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부조리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우리가 쉽게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던 “원래 그런 거야” 라고 대답하는 선생님의 답변에 진절머리가 난건 아닐까?, 어차피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그런 거니까.. 말자.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상대방을 도와준답시고 자기 멋대로 위로를 가장한 조언을 하곤 한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등등. 위와 같은 위로가 상대방에게 정말 도움이 될까?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이 과연 위와 같은 말이었을까?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은 저런 것들이 아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으니 나는 괴로워 할 자격도 없다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상처입은 사람일수록 위로의 깊이가 다르다고, 위로를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불순물을 걸러내고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낸다고. 나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알고 위로할 수 있다. 그들은 알 것이다,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진심이 우러나는 짧은 한 마디, “괜찮아”라는 것을. 만약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오히려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의 말을 경청해주고 눈을 마주치고 공감해 준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에서 주인공은 어릴 적 가정폭력에 피해자였다.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던 그는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양아치가 되었다, 그의 천재성을 본 대학 교수는 심리학 박사를 붙여준다. 주인공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주인공의 진심으로 위로해준 것은 박사의 100마디 길고 긴 상담이 아닌 짧은 한 문장이었다. “It’s not your fault….”“은유” 그 은밀한 고백. 은유는 직설적이지 않다. 그러기에 아름답다. 은유는 수줍은 고백이다. 이는 직설적인 표현보다 몇배는 당사자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말을 은유로 은밀하게 표현한다.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도 은유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당신은 내 마음의 호수요.”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사랑은 메타포로부터 시작된다.”“그냥”, 그 무거운 단어. 사람들은 “그냥”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냥”, 어쩌면 그냥 “별 뜻 없성인이 될 때까지 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이 틀 때 등대로 나가 혹시 그녀가 돌아올 지 모르는 저 먼 바다의 지평선을 응시한다. 이는 어쩌면 조그마한 희망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희망이 그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그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동이 틀 때 등대로 나간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내를 만나게 된다. 만약 그가 진작에 포기하고 등대에 나가는 일을 그만두었다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그마한 희망이 모이고 모여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어른이 된다는 것.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건 뭘 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어른이 되고 싶었다. 무작정 멋있어 보였다. 생각도 깊어 보이고 자유로워 보였다. 작년에 나도 드디어 고대하던 어른이 되었다. 뭐가 바뀐 걸까? 1월 1일 제야의 종이 울리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바뀐 걸까? 잘 모르겠다. 나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현실과 타협할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걸까? 순수함을 포기해야 어른이 되는 걸까? 내가 고대하던 자유로움도 1학년인 지금이나 조금 느낄 수 있지, 나이가 들고, 학년이 올라가고, 취업을 하게 될 때가 되면 더 이상 자유로움이 있을까? 항상 어른만을 꿈꿔왔는데, 막상 어른이 되니 나는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 같고, 현실은 더욱 치열해져만 가니 앞으로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하나 고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말했다. 꼭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진정한 나”에 다가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이라고. 진정한 나, 진정한 나는 무엇일까?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나”에 다가가는 걸까? 어쩌면 나는 어른이 되기만을 위해 달려오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꼭 어른이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말고 진짜 나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 꼭 순수함을 잃어야 할까? 꼭 현실에 타협할 필요는 없지는 않을까? 나만의 낭만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책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그런 날이 있다. 똑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반응을 보일 때. 예를 들어 친구가 짓궂은 장난을 칠 때 내가 그날 기분에 따라 재밌게 받아 쳐주기도 하고 때로는 정색하기도 한다. 같은 꽃을 보고도 어느 날은 아무 감흥이 없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한번 더 보기위해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작가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라고 답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 아닌가? 아름다운 걸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낄 수가 있나? 내가 해석하기에 아름다운 것을 보는 당사자가 행복하지 않다면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당사자가 행복하다면 아름다움은 증폭된다. 즉 내가 마음의 여유를 갖고, 대상을 볼 준비를 맞췄을 때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이 말이 즉 자신의 행복을 뜻한다. 이는 연쇄작용처럼 이어져서 만약 마음이 불안정하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살면 아름다운 것도 미워 보일 것이고 미워 보이는 것들은 더욱 더 미워 보일 것이고 세상이 미워질 것이다. 반면 마음의 안정을 갖고 살아가야만 아름다운 것은 더 아름답게 보이고 아름답지 않더라도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마음의 안정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이런 마음의 안정이 당신을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눈에만 눈물이 있는 게 아니다. 눈물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랑하던 사람이 좋아하던 음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던 향기를 맡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녀와 주고받던 편지를 보고도 눈물이 흘릴 수도 있고, 그녀가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또 불현듯 그녀와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이처럼 눈에만 눈물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 모든 기억이 언제 어디서든 눈물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누군가에겐 전부인 사람입를 줬으니 그 정도 괴로움은 겪어야 지난 날에 과오가 씻겨지는 것이다.얼마전에 중학교 때 친하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나는 사진찍는 걸 좋아해서 멀리 춘천까지 사진을 찍으러 둘이 놀라간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가 멀어져서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나니 좋더라. 그때 같이 여행 갔던 일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그때 그랬는데..” 그러면서 즐겁게 대화했다. 그 때는 잠시나마 나를 옥죄 오던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서 조금은 철이 없었던 중학교 2학년의 나로 돌아갔다. 추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추억이 중요한가 보다. 돈 한푼 안들이고 현재에서 벗어나 과거로, 어렸을 때로, 낭만이 넘치던 때로 돌아 갈 수 있으니 말이다.일부 조류들은 비가 오는 날애 집을 짓는다고 한다. 비 오는 날에 집을 지으면 금방 무너 질게 뻔한데 왜 그런 어리석을 짓을 하는 걸까. 어리석은 건 나 자신이었다. 비 오는 날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집이야 말로 그들이 원하는 집인 것이다. 우린 고난, 역경을 두려워하고 피하곤 한다. 우리도 조류들의 집처럼 고난, 역경을 겪을 필요가 있다. 고난, 역경을 겪어온 사람은 더욱 더 단단해져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에 한번도 역경 없이 살아온 사람은 한번의 역경만으로 무너지게 된다. 더욱 더 단단해지자, 어떠한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도록.지옥엔 희망이 없어. 작가는 말한다 일말의 희망도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체념은 지옥이다. 체념의 사전적 뜻은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는 것” 이라고 한다. 체념은 지옥과 같다. 이 말에 공감한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희망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마음 속 조그마한 희망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말자, 체념하지 말자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가슴 속에 조그마한 희망을 품고 살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믿자, 내일이 오늘보다 밝을 거라고.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화가 났을 때 하
피가로의 결혼 개요, 감상문오페라 개요피가로의 결혼은 4막, 오버추어, 28번으로 구성된 로렌조 다 폰테의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만들어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오페라이다. 1785년 여름과 1786년 4월 28일 사이에 작곡되었고, 1786년 5월 1일 비엔나의 부르테아터에서 모차르트 지휘에 의해 초연되었다. 공연 시각은 약 2시간 50분 정도 소요되었다.오케스트라는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기, 콘티뉴오로 구성되었다. 국내에서는 Complete Mozart Edition Vol.40 Mozart Le Nozze Di Figaro Colin Davis(C), Universal(P), Philips(L)라는 이름으로 음반이 발매되었다.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와 대본가 다 폰테의 첫 성공적인 협력이였다. 그들은 이후로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로 성공을 이어간다. 1768년, 12살의 모차르트가 자신의 첫 오페라 부파 를 작곡했을 때, 이 오페라는 기존의 부파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1775년, 모차르트의 두 번째 작품 가짜 여정원사에서 그는 기존의 오페라 부파 형식에 자신만의 색깔을 조금씩 집어넣기 시작했고, 마침내 피가로의 결혼에서, 모차르트는 전통적인 부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극적이고 음악적인 특성을 발전시켰다.이 작품의 원작인 보마르셰의 무모한 하루(황당한 하루)(la Folle Journee) 혹은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는 파리에서의 초연을 이후로 2년 동안이나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유럽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에,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매우 자극적인 작품이다. 그렇기에, 황제 조세프 2세는 국립극장에서 이 작품을 독일어로 상영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결국,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역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6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백작, 수잔나, 돈 바질리오의 3중창에서 돈 바질리오에게 cosi fan tutte(“여자는 다 그래”)라는 대사가 있다. 오스트리아 국왕이, 이 대사에 영감을 받아 모차르트에게 오페라를 의뢰하였고, 이렇게 작곡한 오페라가 Cosi Fan Tutte이다.등장인물과 요약은 아래와 같다.Il Conte di Almaviva 알마비바 백작(Baritono) – 초야권을 부활시키려 한다. 수잔나를 유혹한다.La Contessa di Almaviva 알마비바 백작부인(Soprano) – 백작의 마음을 다시 얻고자 한다.Susanna 수잔나(Soprano) - 백작부인의 하녀, 피가로의 약혼녀Figaro 피가로(Baritono) - 백작의 하인, 수잔나의 약혼자, 과거 백작과 백작 부인의 결혼을 도와줌Cherubino 캐루비노(Mezzosoprano) - 사랑에 죽고 사는 젊은 귀족, 순수하면서도 정열적이다.Bartolo 바르똘로(Basso) - 의사, 피가로의 친아버지Marcellina 마르첼리나(Mezzosoprano) - 피가로와 계약을 맺은 하녀장, 피가로의 친어머니Basilio 바질리오(Tenore) - 수잔나의 음악선생, 백작의 명령을 따른다감상문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하며, 등장인물의 심리상태, 생각 등이 잘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몇 장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내가 생각한 바를 서술하였다.피가로와 수잔나가 결혼 이후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있다. 피가로는 수잔나에게 자신의 주인 바로 옆의 집에 살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백작이 수잔나를 노리고 유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인 옆에서 사는 건 수잔나는 원치 않을 것 같다. 주인이 부르면 세 발자국 안에 달려갈 것이라는 피가로의 백작을 향한 충성심이 백작이 수잔나를 노린다는 사실에 바로 무너지는 단편적인 장면을 보고, 피가로가 수잔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입이 닳도록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단편적인 변화 하나만으로 그의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수잔나에게 치근덕거리는 캐루비노는 어떤 여자도 가리지 않고 유혹하려 한다. 캐루비노의 아리아에서 “불덩이가 되었다가, 얼음장이 되는 나”,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이 나를 채우내”라는 가사를 보면 그가 돈 조반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기에, 순간 불덩이가 되었다가, 또 얼음장이 되는 것이고,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은 바로 자신에게 있는 욕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아 전체에서, 캐루비노는 사랑을 갈구한다. 아무도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사랑을 속삭인다고 한다.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캐루비노에게 있어서, 사랑이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다. 이는 여자가 자신의 인생의 전부인 돈 조반니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이처럼 캐루비노는 돈 조반니와 비슷한 인물이지만, 표현하기에 따라서 돈 조반니는 자신만의 정의를 가진 악인처럼 보이고, 캐루비노는 순수하고 명랑해 보인다. 내 생각에, 이 여자, 저 여자 모두에게 들이대는 캐루비노를 순수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캐루비노에게 바지역할을 맡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에게 젊은 귀족이라는 역할을 부여한 데도 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캐루비노가 좀 더 진중하고, 남성적인 카사노바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면, 오페라 전체의 익살스러움이 한층 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익살스러움이 낮아지면, 귀족에 대한 비판이 한층 두드러져 보일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오페라 부파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의도를 숨기려고 한 것 같다. 이처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두 인물이지만, 묘사하는 방법에 따라 돈 조반니가 될 수 있고, 캐루비노가 될 수도 있었다.돈 바질리오, 백작, 수잔나의 3중창에서, 그 유명한 Cosi Fan Tutte(“여자는 다 똑같아”)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이 대사로부터 모차르트의 오페라 Cosi Fan Tutte가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대사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피가로의 결혼 전체 흐름에서 “Cosi Fan Tutte”라고 할 만한 장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인이 있음에도 수잔나를 유혹하려는 백작의 모습이 비판적으로 보여 진다. 이 작품에서는 수잔나와 백작 부인이 전체적인 스토리를 끌고가고, 인상적인 감정선도 모두 여성들에게서 나온다. 아리아 역시 부인과 수잔나의 아리아가 가장 아름답다. 따라서, 오히려 이 작품은 여성 진취적인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귀족 비판적이고 여성 진취적인 피가로의 결혼을 보면, 당시에 모차르트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백작부인에게 연심을 품은 것이 들켜, 군대로 추방된 캐루비노는 기회가 주어지자, 다시 백작 부인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랑을 고백하는 아리아를 부른다. 유부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 순수해 보인다. 백작 부인을 위해서, 창문 밖으로 띄어 내리는 캐루비노의 모습을 보다 보니, 어느새 캐루비노를 응원하게 된다. 순수한 그의 모습에, 그가 하고 있는 행위가 불륜이라는 사실마저 망각해버렸다.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가 마르첼리나와 바르똘로 사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나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스토리를 억지로 잇기 위해서 넣은 어색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느낄 수 있지만, 지금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 부분이 피가로의 결혼의 유일한 오점으로 받아들여졌다.백작부인과 수잔나의 아리아는 내가 가장 아름답고 슬프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노래의 음과 가사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듣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때 백작 부인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백작부인이 쓴 아름다운 편지는 수잔나가 백작에게 전달할 것이고, 백작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잔나는 자신의 하녀이다. 이 슬픈 상황과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가 상충되어 슬픔과 아름다움을 증폭시키는 것만 같다. 과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던 백작의 모습과 현재 상황에 대조되어 자신의 처지가 더욱 더 비참하게 느껴질 것이다.수잔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착각하는 장면에서, 피가로는 분노에 빠진다. 이 장면에 앞서, 백작이 백작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때 백작 역시 분노에 빠진다. 하지만 이 두 분노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피가로의 분노는 수잔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절망감에서 기인한 슬픈 분노이고, 백작의 분노는 ‘네가 감히?’라는 자신의 체면으로부터 기인한 분노라고 생각한다. 오페라의 마지막에서,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백작이 백작 부인에게 달려가 사죄하게 되는데, 이때 역시 체면을 지키고자 한 사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작 부인이 백작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오페라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백작에게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이 않을까? 하는 찝찝함 비슷한 걱정만이 내 마음을 채운다.피가로의 결혼은, 내가 제대로 감상한 첫번째 오페라이다. 어렸을 때, 안산 예술의전당에 가서 오페라를 한번 본 적 있지만, 사실 기억에 없다. 오페라라고 하면, 원어로 상영되는,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편견 때문에, 영화, 뮤지컬은 매우 자주 즐겨보는 나지만, 오페라는 나와 늘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나에게 피가로의 결혼은, 내가 오페라에게 갖고 있던 편견을 깨부순 작품이 되었다. 스토리를 이해하고, 사전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니, 이보다 더 재밌을 수는 없었다. 뮤지컬과 달리, 아리아가 아닌 일반 대사에도 음이 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 부분이 없었다. 나는 이 이후에 오페라에 재미를 붙였다. 종강을 앞두고, 나는 드디어 오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궤도에 올라섰다.참고문헌Marie Christine VILA. 「라투스 오페라사전」. 삼호뮤직.Ron David. 「오페라 아는 척 하기」. 팬덤북스.
돈 조반니 개요, 감상문오페라 개요돈 조반니는 2막, 오버추어와 24번으로 구성된 드라마 지오코소이다. 드라마 지오코소라는 명칭은 다 폰테의 대본을 지칭한다고 한다. 돈 조반니는 모차르트에 의해 1787년 3월부터 비엔나에서 작곡되었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의 국립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돈 조반니의 오케스트라 구성은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럼펫 2, 트럼본 3, 팀파니, 만돌린, 현악기, 콘티뉴오이다. 형식은 ‘오페라 부파’ + ‘오페라 세리아’이다. 모차르트의 기록을 참조하자면, 빌리자면 돈 조반니는 “방탕한 이야기 혹은 돈 조반니, 2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부파”라고 한다.으로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둔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 극장장이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는 모차르트에게 의 주제를 제안하게 된다. 현대적인 전작 와 달리 당시 라는 주제는 흔한 주제였다고 한다. 대본은 베르타티의 를 근간으로 쓰여 졌다, 또한 티르소 드 몰리나(Tirso de Molina)의 나 몰리에르(Moliere)의 와 같은 작품에서 조금씩 차용해왔다. 이렇게 모차르트의 가 탄생하게 되었다. 작곡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이며, ‘장슈필’,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와 같은 오페라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다.등장인물은 아래와 같다.Don Giovanni ( 돈 조반니 ) -Basso / Baritono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Donna Anna ( 돈나 안나 ) -Soprano 돈 옥따비오의 약혼녀인 귀족. 아버지가 돈 조반니에 의해 살해당한다.Don Ottavio ( 돈 옥타비오 ) -Tenore 돈나 안나의 약혼자인 귀족. 정열적이다.Il commendatore ( 기사장 ) -Basso 돈나 안나의 아버지. 돈 조반니에 의해 살해당한다.Donna Elvira ( 돈나 엘비라 ) -Mezzosoprano 돈 세리아 형식을 섞어 두었기 때문에, 익살적인 역할(돈 조반니, 레포렐로, 체를리나, 마젯또)와 진중한 역할(돈나 안나, 돈나 옥타비오, 기사장)으로 구분하였다. 목소리에 따른 배역 분배는 대체적으로 전통을 따른다. 돈 조반니는 경험 많고 남성적인 바리톤이다. 다만, 마젯또는 돈 조반니와 같은 바리톤인데, 대신 저음 바리톤으로 마젯또의 어리숙함을 표현한다.감상문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닌다. 타인에게 자신의 진실된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살아간다. 우리 인류가 끝나지 않는 가면무도회를 개장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을 괴짜라고 치부하며 그들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자신과는 맞지 않은 이상적인 인물을 표방하며 거짓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오페라 속 돈 조반니는 그렇지 않았다.돈조반니를 감상하며, 등장인물의 심리상태, 생각 등이 잘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몇 장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내가 생각한 바를 서술하였다. 돈 조반니의 돈조 안나 겁탈이 미수로 그치고, 돈 조반니는 돈조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과 결투를 하게되는데, 돈 조반니는 그와 싸우기 싫어한다. 하지만, 기사장이 자신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투하게 되고 끝내 그를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돈조반니는 자신의 살해 행위에 대해 부끄럼, 후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와의 전투가 불공정하지 않았고 애초에 그는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서도 기사장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은 떳떳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지막에 돈 조반니가 기사장에게 사과하지 않는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정말로 떳떳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돈조반니는 과거에 그가 버리고 도망친 돈나 엘비나를 마주하게 된다. 돈나 엘비나는 레프렐로부터 돈 조반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화려한 과사랑했기에, 그에 대한 진실을 알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를 계속 쫓아다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체를리나를 유혹하는 돈 조반니를 방해하는 행위는, 돈 조반니로부터 체를리나를 구원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돈 조반니를 사랑하기에 질투심에 그들을 방해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나 엘비나의 이런 맹목적인 사랑은 마젯또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마젯또는 결혼식을 앞둔 자신의 약혼녀가 돈 조반니의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젯또가 자신을 배신한 체를리니를 끝끝내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단지 단순하고 우유부단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체를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체를리나의 애교에 못이기는 척 그녀를 용서할 수 있던 것이다. 결혼을 앞둔 자신의 약혼자가 딴 남자에게 흔들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못이기는 척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마젯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는 그녀의 애교에 화가 풀린 듯 보였지만, 사실은 큰 절망감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시간이 지나 돈나 안나가 돈 조반니에 대한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약혼자인 돈 옥타비오는 그녀에게 생긴 일이, 자신의 일처럼, 그녀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인 것처럼 그녀의 복수를 다짐한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한다. 반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페라 전체에서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대목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복수를 이루고자 한다. 후에, 그의 청혼을 거절할 때도, 그녀는 분명 그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나에게 청혼을 한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에 복수를 빌미로 결혼을 미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사랑에 열중할 수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돈조 안나에게 헌신적이던 돈 옥타죄를 뒤집어 씌운다.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을 바르톨로이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바르톨로는 돈조반니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물론 돈조반니가 바르톨로에게 돈을 주기도 했지만, 이것이 바르톨로가 돈조반니를 떠나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돈조반니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돈조반니를 내심 부러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살아가는 바르톨로에게 있어, 자신의 욕망에 한없이 솔직한 돈조반니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그와 같이 지내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바르톨로와 닮았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을 보고, 혀를 차면서 비판하지만, 내심 그들의 솔직함에 부러움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돈나 엘비니가 돈조반니의 유혹에 넘어가 그를 용서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돈 조반니로부터 야기된 그녀의 마음의 상처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돈조반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가 떠났을 때도 매우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상처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상처가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빈 공간을 다시 사랑으로 메꾸기 위해서 블랙홀처럼 사랑을 갈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빈 공간을 채워서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 작은 유혹에도 크게 흔들리며 결국 그를 용서하고 받아드린 것이다. 후에, 그녀는 그에게 다시 한번 버림받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저주하기는커녕 그에게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하고 그를 연민한다. 이 오페라를 통 틀어서 아니, 돈 조반니의 인생을 통 틀어서 그를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돈나 엘비나일 것이다. 자신을 두번이나 배신한 돈 조반니를 변호하는 돈나 엘비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끝내 자신이 미련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돈 못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념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돈 조반니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 중에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신념 어긋나는 거짓말을 강요받았을 때, 강요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내 신념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돈 조반니의 일관성이 참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었다.오페라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 못하는 척 나 같은 솔직함을 욕하지” 라는 대사에서 엿볼 수 있는 돈 조반니의 확고한 철학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사회의 통념과 어긋나는 생각, 신념, 욕망을 모두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사회가 원하는, 사회가 받아드리는 인물상을 표방하는 아주 잘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이 가면은 아주 범용적이라, 어느 집단에 들어가더라도 모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집단에 동화될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뭐가 가면인지 뭐가 내 진짜 얼굴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가면을 쓰다 보니, 우리는 우리만의 개성을 잃고 모두 똑같은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는 돈 조반니는 분명 엄청나게 주목받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부류를 비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과 다른 돈 조반니를 비판할 것이다. 나도 역시도 돈 조반니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고, 돈 조반니를 괴짜라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내심 그의 욕망에 대한 솔직함을 부러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깊은 생각 끝에, 나는 돈 조반니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가면 속에 숨어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학교폭력 해결책에 대한 고찰우리는 모두 고통받는다. 그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누구는 스쳐 지나갈 정도의 고통을 겪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나도 큰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이때, 고통의 총량은 유지된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행복, 쾌락은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그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여야 한다. 최소 인원의 최소 고통을 이룩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인식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우린 낙원을 향한 아주 멋진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우리가 돌아봐야 할, 도와줘야 하는 고통받는 인간은 주변에 수없이 많다. 나는 그 중 학교폭력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에 대해 소개할 것이다. 학교폭력이 다른 고통들 보다도 더 치명적인데, 그 이유는 고통을 겪는 주체가 학생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은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중요한 시기로서, 그 시기에 발생하는 많은 일들이, 학생들의 자아 형성에 여러가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시기에 동반되는 학교폭력은 학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어린시절에 당한 학교폭력은 어른이 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은 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상처를 남겨, 나는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인 학창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야 할 학창시절이 끔찍한 악몽이 되어 피해자들을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다. 또한 학교폭력은 단순한 폭행과 달리,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는 빠지고 싶다고 빠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고통의 회피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통이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 고통은 크나큰 문제로 야기된다. 고통의 특성 때문인데, 우리는 거대한 고통 속, 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되면, 고통받고 있는 초라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나를 마주하며, 결국 피해자들은 학교폭력의 정당성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내가 이러니까 학교폭력을 당하지.” 라며 말이다. 학교폭력이 정당화될 수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나날 속 초라한 자신과 마주보며, 고통의 이유를 찾다 보면 슬프게도 어느 순간 나 자신에게서 고통의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찾아야만 그 죄 없는 억울한 고통으로부터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교폭력은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학교폭력의 처벌 수위를 높이고, 학교에 경찰관을 배치하고, 가해자들에게 대학 진학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 등 여러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학교폭력을 막을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단기간에 학교 폭력을 줄이는데 효과적이지만, 근본적인 해결법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고통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우리는 피해자가 겪고 있는 거대한 고통에 대해 연민하고 공감해야 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달랜다고 그의 고통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만으로 피해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피해자들에 대해 공감해준다면, 그들은 용기를 얻고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해 타인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면, 더이상의 학교폭력은 없는 것이다. 만약 피해자가 그 정도의 용기까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방관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나의 말을 들어주는, 나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피해자는 큰 위로를 받고 하루를 견딜 힘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공감이 반 전체로 퍼지게 된다면, 학교폭력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만약 학생 모두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면, 애초에 가해자 역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그를 괴롭히는 건 모순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영위하는 행복이 타인의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고통받는 인간은 우리보다 못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희생한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가해자가 생길 수 없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학교폭력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공감 능력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인문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인문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공감의 중요성과 방법을 가르친다면 그 학교는 진정한 왕따 없는 학교, 폭력 없는 학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에 상담사를 배치하는 방법도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개인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통의 공개적이 되려는 특성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공개하려고 한다. 이렇게 고통을 남에게 공개하고, 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더라도 피해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가끔 학교폭력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학교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내 마음 속에 숨겨두어 혼자 끙끙 앓다가 그런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들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런 비극을 없었을 것이다.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다. 피해자를 지키기 위해 가해자와 정면으로 맞서라는 것도 아니요, 팻말을 들고 학생들을 모아 학교 폭력 단절 운동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지금 영위하는 행복은 모두 타인의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된다. 고통받는 인간을 돕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무시하지 말고,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듯 공감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이 행위는 꼭 학교폭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범주를 넓힌다면 우리는 학교폭력 근절을 넘어 언젠간 최소 인원의 최소 고통을 향한 유토피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고찰모든 인간은 고통을 당한다. 고통은 만인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고통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임과 동시에 인간의 한계성을 대변한다. 따라서 고통은 인간 실존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고통을 제외하고 인간을 논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우리는 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즉 구원을 소망한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해결하거나, 고통에 대해 이해하고 고통과 함께 살아가곤 한다. 우리는 고통, 쾌락 등 여러가지를 느끼고 경험하고 지각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고통의 경험을 가장 절실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쾌락과 고통은 모두 원초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 원초적인 경험을 통해, 나쁜 것과 좋은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 둘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행복감은 지속될 수 없다. 지금 당신이 행복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행복감이 지속되고 반복되면, 행복의 역치 값이 올라가서, 행복에 무뎌지고,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은 다르다. 고통은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더라도 무뎌지지않고 오히려 더 악화된다. 수용하는 입장에서도 차이가 있다. 우리는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쾌락을 찾을 수 있지만, 고통에 있어서는, 우리는 항상 고통을 당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쾌락을 찾기 보다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이처럼 우리는 고통을 쾌락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행동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보다는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을 지향한다. 선과 악의 기준이 쾌락이 아닌 고통인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통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다. 고통은 남에게 줄 수도, 남에게 받을 수도 없다. 고통은 오로지 본인의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통을 통해 나를 인식할 수 있다. 즉 “나는 아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행복 속에서, 우린 가끔 자신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고통의 경우에는,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마주치는건 자신의 내면 속, 고통받는 ‘나’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인식하게 되고, 이 고통받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처럼 고통은 홀로 당하는 것이고, 항상 ‘나’만의 고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고통을 남에게 공개하고 싶어한다. ‘나’와 대화하는 ‘너’를 통해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나약해서, 혼자서 이 고통을 마주하기엔 나에게 너무 고된 일이었기에, 우리는 남에게 이 고통을 공개하곤 한다. 이처럼 사적인 고통은 공개적이 되려고 한다.사람들은 행복보다 고통의 해소를 더 중요시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통을 행복보다 더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행복이 아닌, 고통이 인간 실존의 핵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의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수능을 마치고, 새로운 컴퓨터를 사고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 컴퓨터는 내 일상이 되어버렸고, 더 이상 과거의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반면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무뎌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이미 해결된 것 같던 과거의 고통도, 문득문득 떠올라서, 나를 괴롭혔다. 그 고통이라는 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예리해지고, 내 몸의 상처 역시 더욱 깊어 갔다. 내 몸의 남은 흉터들을 확인하며, 나는 고통받던 ‘나’, 고통받는 ‘나’를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깨닫게 되었다. 행복은 무뎌지고, 고통은 견고해진다. 우리는 행복을 쟁취하기 보다는, 고통을 회피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슬프지만, 고통이 인간 실존의 핵심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