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한 엘리자베스 1세-아르마다 해전을 중심으로-차 례Ⅰ. 머리말Ⅱ. 대항해시대Ⅲ. 아르마다 해전ⅰ) 전쟁과정ⅱ) 전쟁결과Ⅳ. 맺음말Ⅰ. 머리말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잡지인 뉴욕 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 가장 뛰어났던 지도자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를 지목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튜더(Tudor) 왕조의 가문을 잇는 황제로서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5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최초의 여왕이다. 그녀는 기존의 남성주의적 정치체제에서 탈피하여 당시 영국의 낮은 여성 인권 속에서도 탁월한 정치와 외교를 한 위대한 여왕으로 남아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물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여성의 신분으로 혼란하기 그지없는 영국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재위 초반에 국민의 큰 우려를 샀지만, 그녀는 많은 한계 속에서도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했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스페인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프랑스의 알랑송 공작을 이용한 결혼정책을 펼쳤고 침체 된 경제를 구빈법, 화폐개혁, 도제법 등으로 다시 바로잡아 국민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 이후 영국 선진화에 기틀을 잡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도 그녀가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녀가 즉위하기 전인 16세기 초반만 해도 영국은 열강들의 위협, 어려운 경제 사정,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으며 막대한 부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당시 영국은 유럽의 후진국이었다. 이러한 영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의 기틀을 잡고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은 지도자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처녀 여왕(The VirginQueen)”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늘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독신주의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녀가 권위를 유지해 영국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게 하였다. 이 글은 이처럼 능력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쉽을 강력한 선진국이었던 스페인을 상대로 한 전쟁인 아르마다 해전의 모습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Ⅱ. 대항해시대아르마다 해전의 과정을 보기 위해선 먼저 그 배경이 되었던 대항해시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대항해시대란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가는 항로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고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는 등 다양한 지리상의 발견을 이룩한 시대를 말한다. 이때 아르마다 해전의 주인공인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신항로 개척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이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이끈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로 두는 유럽 최강의 국가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펠리페 2세는 해외 식민지를 유지하고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지중해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건설하였다. 이 무적함대는 후에 아르마다 해전에서 활약하게 된다.스페인과 영국 전쟁의 서막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에 엘리자베스 1세가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사략선을 이용해 스페인의 해상교통을 교란했다. 당시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상을 통해 지상군과 무기를 수송해야 했는데, 그 해상교통로가 바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국해협과 도버해협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사략선은 스페인의 보급선들을 수시로 약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였고 보급선 교란에 그치지 않으며 전투함을 통해 스페인 수송선까지 약탈해 스페인 식민지의 금과 은을 약탈하였다. 이는 스페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그렇지 않아도 종교적인 갈등을 겪고 있던 양국의 사이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1585년,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가장 큰 원인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엘리자베스 1세가 해적 출신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주며 7천여 명의 병력을 통한 카리브 해 일대의 스페인 영토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경(Sir)의 작위를 받은 드레이크는 29척의 함선과 23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신대륙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를 약탈하였고 정부는 군대를 네덜란드에 파병하여 네덜란드 독립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였다. 더욱이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는 모습까지 보이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지속적인 통치와 영국에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할 목적으로 무적함대를 동원해 영국을 직접 공격하였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 살펴볼 ‘아르마다 해전’이다.Ⅲ. 아르마다 해전ⅰ) 전쟁과정필리페 2세는 먼저 여러 차례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고 레판토 해전에도 참여했었던 산타크루즈 제독을 무적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펠리페 2세는 산타크루스 제독에게 영국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을 요구했고 19,000명의 병력을 수송한 무적함대가 영국으로 출항하였다. 하지만 무적함대가 출발하기 전 산타크루즈 제독이 사망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어쩔 수 없이 산타크루즈 제독보다 해상경험이 적고 무계획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으로 무적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메디나 시도니아는 1588년 5월 23일 총 130척의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나섰다. 무적함대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굉장한 수와 공격력을 자랑했는데 전함 127척, 수병 8,000명, 육군 1만 9000명을 갖고 있었다. 이와 맞서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함대는 그 수가 스페인에 비교해 아주 적었다. 따라서 전쟁 전 영국은 스페인에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었고 모두가 스페인의 승리를 예상했다.무적함대는 8월 6일 스페인 네덜란드의 주지사였던 파르마 공작의 4만 명의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중립항구인 프랑스의 칼레 해변에 정박하였다. 이때를 틈타 8월 7일 영국이 투묘 중이던 무적함대를 8척의 화공선을 통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오래전부터 유명한 이탈리아 화공선 기술자를 고용했다고 선전했던 영국의 화공선 공격 소식은 스페인군에게 완전한 공포였다. 사실 이 화공선은 그냥 평범한 화공선에 불과하였지만, 스페인은 영국의 심리전에 완전히 말려들었고, 많은 함장이 도망가면서 무적함대의 전열이 난장판이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함장 한 명을 교수형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함선을 제대로 통제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영국 함대는 전열이 무너진 스페인 함선의 코앞까지 다가와 공격하는 접근전을 펼쳤고 스페인은 속수무책으로 공격에 당하였다. 이 전투는 영국 함대의 탄약이 다 떨어져 철수하게 되면서 종결되었고 메디나 시도니아는 브리튼 섬을 한 바퀴 도는 경로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기습으로 약해진 함선 때문에 식량과 물이 상하게 되었고 기아와 갈증, 전염병을 겪게 되었다. 또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함선이 난파하는 등 별다른 전투 없이도 스페인은 계속해서 약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무적함대는 130척 중 44척을 상실한 모습으로 9월 말에 스페인에 귀환하였다. 귀환한 함선도 대부분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때를 노린 영국은 1588년 드레이크의 지휘 아래 83척의 전투함과 60척의 수송선, 그리고 19,000명의 병력과 함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자 출항하였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포르투갈을 스페인에서 분리하려는 대규모 원정으로 전개되면서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후에 수리를 마친 무적함대가 1596년과 1597년에 두 차례 영국에 출항하였지만 모두 폭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ⅱ) 전쟁결과1604년에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무적함대의 엄청난 손상으로 스페인은 국위가 실추되었고 국력은 점차 약해져 이후의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한다. 더욱이 30년 전쟁 이후 네덜란드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유럽의 최강국이던 스페인이 그 위치에서 내려온 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영제국을 형성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또한 바다와 해외에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영국은 기존의 전투방식을 버리고 배를 이용한 전투에 투자하였고 그것이 성공하여 결국 국가적 번영을 얻어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영국은 상업자본을 매개로 하여 중세 교황권 체제에서 국가의 3요소를 갖춘 근대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