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전시유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확인하는 한국 박물관의 제도 구축의 필요성;일제강점기 형성된 박람회, 박물관을 중심으로역사문화학과Ⅰ. 서론1. 들어가는 말Ⅱ. 본론1. 서구 박물관 형성의 역사-1. 전근대 박물관의 형성과 변천-2. 근대적 박물관의 등장과 만국박람회의 영향력2. 한국 박물관 형성의 역사-1. 일제강점기 박람회의 개최과정과 문제점-2. 한국 근대박물관 형성과 문제점-3. 서구 박물관 운영과 한국의 박물관의 차이점; 행정중심 업무에서의 탈피가 필요한 이유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박물관의 전시공간은 매체이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하나의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소장품의 확보와 보존, 연구, 전시 및 교육 기능이 요구된다. 이 글은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박물관의 역사와 한국의 박물관 역사를 분석하고, 이들이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1장에서는 서구 박물관의 시초와 발전을 살피고, 19세기 만국박람회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박물관의 설립 목적과 사례를 확인한다. 2장에서는 일제강점기 개최된 박람회와 목적, 특성을 조사하여 박람회의 목적과 특징을 탐구한다. 그리고, 이왕가 박물관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박물관 역사를 추적하여, 서구의 근대박물관 형성과의 차이점을 분석 조사하고, 서구의 박물관 제도와 한국의 제도가 지닌 차이점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박물관의 발전을 예측해 볼 것이다.Ⅱ. 본론(1) 서구 박물관의 역사1. 전근대 박물관의 형성과 변천-르네상스 시대의 유사 박물관서구 박물관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의 포지오와 니콜로 니콜리, 알퐁소 디 아리고나, 그리고 코시모 데 메디치 같은 후원자들은 고대 유물과 동시대 예술품을 함께 수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성된 ‘유사 박물관’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대(Antico)’는 당시 예술가와 주문자가 예술을 바라보는 공통된 미적 가치로 공유되었으며 큰 영향력을 미쳤다.르네상스 시대 이러한 ‘박물관’이란 단어가 사용된 실례는 인문학자 파울로 조비오가 공간이란 인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예시로는 카파톨리니 박물관의 ‘알바니 추기경의 흉상 그룹’ 사례로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알바니 추기경이 빌라 알비니 건축 비용 부족으로 1728년 폴란드의 왕에게 수집품 일부를 팔았고, 1733년에도 수집품 일부를 처분하려 하자, 교황 클레멘테 12세가 미술품의 유출을 막기 위해 흉상 조각 여러 점을 사들여 카파톨리니 박물관에 기증한 사건이다. 이 사례는 당시 사람들에게 박물관이 ‘작품을 보관, 전시하기에 적합한 제도적 공간’이라고 인식하였고, 전시공간에 대한 의식이 컬렉터의 관점에서 방문자의 입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전시공간에 대한 기획자-예술품-관람자 형태의 사고방식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방문자를 상정한,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이 등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작품의 전시기준이 시각적 유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클레멘테 14세는 바티칸 도서관과 카피톨리니 박물관의 전시공간이 부족해지자 조각 갤러리와 팔각 중정을 건축하였고, 피오 6세는 추가적으로 조각 갤러리의 동쪽에 로마의 고대 건축물, 판테온과 목욕탕의 구조를 모티브로 새 전시공간을 기획하였다. 이 박물관을 건설하면서부터, 컬렉터에 대한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큐레이터와 기획자로서의 건축가가 협력하였고, 큐레이터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이 완성된 후 관장의 임무를 수행하던 바티스티 비스콘티가 당시의 큐레이터이다.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은 컬렉션 보존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닌, ‘공중’에게 수집품을 보여줄 목적으로 새로이 공간을 기획한 박물관이었다. 당시의 박물관은 특정 특권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지식 추구의 공간이었으나, 개인의 소장품에서 공공의 전시품으로 변화함으로써 전시품이 공공의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지닌다.2. 근대적 박물관의 등장과 만국박람회의 영향력-근대적 박물관의 등장과 정치적 영향력전시공간의 사회적 용도가 ‘기획자-예술품-관람자’로서 확립되었기 때문에, 박물관은 정치성을 지닐 수 있게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산업 문명과 최신 기술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기회였다. 역사적·예술적 우월성을 과시할 공간이었고, 새로운 물건의 판매하는 경제적 영향력을 지녔으며, 모든 계층을 망라한 관람객들에게는 교육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계몽하는 수단이었다.박람회의 대성공은, ‘예술품이 정치적 메시지 전달에 유용하다’라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이 인식을 기반으로 유럽에서는 시립 박물관과 민속지 박물관, 산업 미술 박물관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미국은 유럽의 박물관들을 통해 시의 공공 얼굴로서 문화발전과 예술 취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국의 문화시설이 턱없이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자연사박물관 등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반면, 산업혁명과 박람회의 개최로 인해 다양한 오브제가 대량생산을 통해 빠르게 생산되고 내레이션을 통해 각국의 정치성을 표출하는 역할로서 소비되면서 공예품의 질적, 예술적 수준이 크게 저하하는 상황이 초래하게 되었다. 과거의 가내수공업 공예품을 보존할 필요성은 빅토리아 앤 길버트 뮤지엄의 설립 이유가 되었다.대부분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근간은 민족의식이다. 박물관은 민족적, 국가적으로 중요한 오브제를 통해 그들의 문화유산을 전시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대중을 교육, 계몽시킨다. 그들의 소장품은 국가의 유산이자 역사적 지속성을 증명하는 증거와 같다. 국립 박물관이 수집하고 표출하는 유산의 힘은 현대사회에서도 국가적 가치와 문화를 분명히 드러내며, ‘역사를 객관적으로 담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매체로써 인식되어, 국민의 총체적인 표현으로서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영미권에서는 민족성 구축을 위한 박물관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걷는 박물관이 등장했다. 이미지의 정치적 사용이 일반 대중에게 더 보편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였다는 인식을 토대로, 이미지의 유제국주의적 면모를 해석할 수 있다. 인종차별적인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여 ‘인간 동물원’과 같은 비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전시의 주요대상이 ‘식민지 전리품’이었다는 점을 보아 인종적 편견을 세계적으로 퍼트리는 등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온상이기도 하였다.모든 사물은 어떤 시간적, 공간적 상황이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다. 박물관의 유물들도 공통의 기준에 따라 공적인 공간에 저장되면, 사적인 공간에서 사용되던 의미를 상실하고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맥락 속에 ‘전시 가치’로써 재편될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8세기 유럽에서 지배체제를 정당화한 오리엔탈리즘이 ‘박물학적 시선’ 통해 제도화되었다고 말한다. 대항해 시대부터 박물학의 시대로, 수 세기를 통해 확장한 이 시선 속에서 유럽은 언제나 관조자로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식민지 시기의 박물관은 대중교화의 장치로써, 이면에 주도권을 갖고 있었고, 식민지 정책에 상응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공개적 전시공간에 날조된 역사를 전시함으로 전시 내용을 구성하였다.우리나라에서 개최된 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으로, 조선총독부청사 건립을 위한 사전 정치작업이었다. 전시관은 재래 건물은 제거해 각종 진열관을 새로 지어 사용하고,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을 회장의 일부로 사용한 행위는 한 국가의 주요 궁궐을 훼손하는 식민지적 폭력성이 드러난다. 또한, 기술적 영역만이 아니라, 전시 방식에서도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내재하여 있다. 식민지배 이후 조선의 정신적, 물질적 방면에서의 개발된 실황을 가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되었고, 식민지 지배 이전과 이후를 비교, 대조함으로써 비참한 식민지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해 ‘살기 좋은 현실 공간’을 강조한 출품선정과 배열방식으로 전시공간을 연출했다.조선총독부는 이 박람회를 통해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조선의 식민지배 당위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당시 미술에 대한 심사평에는 ‘일본화 중, 조선인의 작품은 반도 고유의 예술이 퇴폐한 시기에서 벗어나 장차 행되어 왕실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발생시켰다.공공 기관화 초기 서구의 박물관에서는 수집된 자료의 분류와 카탈로그 제작에 있어 작가와 제작연대를 밝혀줄 전문 인력이 필수적이었다. 박물관 대부분이 소장품 수집 과정에서 출처나 제작자, 제작연대 등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매입되거나 전쟁에 의한 약탈로 취득된 경우가 적지 않아, 소장품의 작가와 제작연대를 밝히는 일이 필수적이었다.이로써 중시된 전문 인력의 채용을 법적으로 제정한 사례는 대영 박물관법이 대표적이다. 대영박물관은 한스 슬론 경이 자신의 소장품을 국가에 헐값으로 매각할 것을 제안하면서부터 의회에서 설립 논의가 진행되었다. 설립 준비과정에서 먼저 중요한 원칙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대영 박물관법’이다. 영국 정부는 전문가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사들로 박물관 설립 이사회를 구성, 개관을 준비하였고, 소장품이 매각되는 일 없이 온전히 보존되어야 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정규직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구성하였다. 또한, 설립 초부터 무료입장 정책을 펼쳤는데, 이 조치는 박물관이 공공기관이라는 인식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설립 초기부터 학예 연구를 담당하는 직원의 활동 보장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 데에 반하여, 이왕가 박물관은 이러한 직책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이왕직 직원록에 의하면 이왕가박물관의 직원은 모두 7명으로서 박물관의 관리뿐 아니라 동물원, 식물원도 같이 관리하였으며 설립 30주년이 되기까지 관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의 큐레이터와 같은 소장품 연구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 왕실 사무 담당 부서인 이왕직은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 소속이었으나 통감 정치하에서 몇 차례 부서가 변경된 후 서무과의 한 사무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러한 조치로서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형식적인 관리만을 하였고, 중요성을 괄시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3. 서구 박물관 제도와 한국의 박물관의 차이점; 행정 중심 업무에서의 탈피가 필요한 이유박물관에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