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의 비평-형식주의 비평을 중심으로-목차1. 서론1. 개요12. 비평 방법22. 본론1. 형식주의적 관점에서의 해석과 접근(1) 희곡의 구성과 구조 3(2) 플롯 속 모티브와 동기 부여 4(3) 희곡 속 낯설게 하기와 소격 효과 62.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표상과 주제의식(1) 각 표상의 의미와 보편성 8(2) 순환되는 서사 구조와 작품의 주제 의식 93. 결론 11참고문헌12서론1. 개요은 1974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강백의 희곡이다. 무대에서 상영하기 위한 연극이며 극의 규모와 분량은 적은 수준으로 단막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전반적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이리떼의 습격을 감시하기 위해 황야에 지어진 망루에서는 매일같이 이리떼가 나타나면 양철북을 치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마을에 경고한다. 신입 파수꾼 ‘다’는 선임 파수꾼들의 북치는 소리와 이리떼가 왔다는 외침을 듣고 두려워 하지만, 어느 날 망루에 올라갔다 이리떼는 존재하지 않고 흰 구름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려 한다. 그러나 마을의 촌장은 파수꾼 ‘다’를 회유하고 위협하고 결국 이에 굴복한 파수꾼 ‘다’는 마을 주민들 앞에서 이리떼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결국 이리떼와 망루에 관한 진실은 영영 감춰지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1970년대 이강백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알레고리적인성격이며, 두 번째는 사회비판적이다. 희곡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공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물들 또한 구체적인 이름보다는 단순화된 명칭으로 불려진다. 알레고리적 성격은 사회비판적 성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상의 내용을 통한 우의적인 전달 방식은 1970년대 독재 권력의 횡포와 이에 굴종하는 군중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본 작품은 그러한 성향이 드러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알레고리의 활용이 사용된 이유는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의 실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외에도 당대에 만연했던 검열 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희곡의 극본을 분석할 때는 인물의 대사와 극의 지시, 나레이션 등의 텍스트만을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실제 무대에서 상연되었을 때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해석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평의 방향은 대체로 무대에서 상연되었을 때 극의 연출이 어떤 역할을 하며 서사상의 모티프가 어떤지 탐구하는 데 초점을 둔다.한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평은 형식주의의 영역에서 극의 구성과 형식을 이해한 다음 단계에서 수행한다. 앞 단계에서 살펴본 여러 형식들과 구성들은 이 단계에서 극 중의 여러 상징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의미를 형성하며, 어떤 주제의식을 형성하고 있는지 해석하는데 쓰인다. 구조주의적 비평에서 을 비평할 때 분석하는 과정은 다음의 단계를 따른다. 먼저 극 중의 인물들이 대변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이해한다. 그 다음으로는 극 중의 여러 표상과 상징들이 무엇이 있는지 탐색한다. 비평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상징들이 형상화하고 있는 재제들을 바탕으로 희곡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해석한다. 작품 해석에 있어 구조주의적 비평을 같이 활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알레고리적인 성향이 강하다. 극 속의 여러 인물들과 배경에는 여러 은유가 내포되어 있으며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형식주의적 측면에서만 작품을 접근한다면 본질적인 주제의식에 접근하기 힘들다. 한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알레고리는 지금까지 당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속성으로만 읽혀져 왔다. 따라서 알레고리와 표상을 이해할 때는 당대 현실 상황을 배제한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가치를 살펴볼 것이다.정리하자면, 을 비평함에 있어서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희곡으로서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야기의 구성과 형식을 파악하고, 상징이 가지고 있는 시대를 뛰어넘은 보편적인 의미를 파악하여 작품의 이면에 내포된 메시지를 해석하고자 한다.본론1. 형식주의적 관점에서의 해석과 접근(1) 희곡의 또한, 갈등의 양상도 표면상으로는 진실을 드러내려는 시도와 감추려는 입장의 대립일 뿐 플롯의 내부에서 다른 갈등 양상은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평면적이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역설적으로 극의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 파수꾼 '다'인 이유를 설명한다. 파수꾼 '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입체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이 같은 성격은 극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사건의 원동력을 제공한다.서사의 구조와 평면적인 다수의 인물상 때문에 본 작품의 희곡 형식은 단순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외적인 면에서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줄거리의 흐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이렇게 단순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알레고리적 성격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극 중 등장인물들과 배경의 재제들을 수단으로 활용하여 우의적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작품이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다면 은유를 통해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희곡은 소설과 달리 시간에 구애받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객에게 공연 시간 내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구성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그렇다면 서사 속의 각 요소들이 플롯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은유에 대해 파악해보기 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모티브이다.(2) 플롯 속 모티브와 동기 부여모티브(motif)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제시한 용어로,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어나 문장, 혹은 재제들이다. 플롯을 이해할 때 있어 그것을 구성하는 모티프들을 파악하고 그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작품의 전체 의미와 개별적인 전개 양식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물을 중심으로 분석해보았을 때 의 플롯을 구성하는 모티프들은 다음과 같다.이리떼, 망루, 양철북, 흰 구름, 산딸기, 도끼이들의 역할은 크게 한정 모티프와 자유 모티프로모티프와 정적 모티프로 나누어진다. 이 기준에 따라 모티프들을 분류할 경우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동적 모티프정적 모티프흰 구름, 도끼, 산딸기이리떼, 망루, 양철북이리떼와 망루, 양철북은 정적 모티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들 모티프들은 사건의 계기를 제공하고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그것 자체로는 파수꾼 '다'라는 인물의 태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흰 구름’이다. 진실이 밝혀지는 시점부터 플롯의 구조는 위기 단계로 진입하며, 인물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여겨져 왔던 망루와 양철북, 더 나아가 파수 행위 자체에 대해 의문을 드러낸다. 이러한 변화를 다시 비틀어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도끼와 산딸기다. 촌장은 두 모티프들을 통해 협박과 회유를 행하여 파수꾼 '다'의 진실을 밝히려는 행동을 막는다.지금까지 여러 모티프들과 그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흰 구름’이다. 서사적인 측면에서 흰 구름은 망루와 같은 전반부의 한정 모티프와 대립되는 양상에 놓여 있다. 공포와 거짓을 상징하는 세 소재와는 달리 흰 구름은 진실을 나타낸다. 작품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 모티프들은 동일한 한정 모티프로 볼 수 있지만, 흰 구름의 존재는 극 중에서 등장하자마자 파수꾼 ‘다’의 정서와 행동에 변화를 주는 동적 모티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망루와 흰 구름은 양자가 의미의 측면에서나 모티프의 구성에서나 대립되는 위치에 놓여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하나의 동기 부여를 위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동기 부여는 모티프들이 어째서 플롯을 구성할 때 그 위치와 자리에 사용되는지를 정의한다. 이러한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첫째는 구성적 동기 부여이다. 이것은 서사나 극의 구성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도입된 모티프이다. 두 번째는 사실적 동기 부여이다. 여기서 모티프는 작품의 사실적인 분위기를 형상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세 번째는 예술적 동기 부는 순간 무대와 객석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며, 객석의 관객은 일시적으로 무대에 재연된 가상의 공간 속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배우가 직접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관객에게 무대에서 상연되는 것이 연극이라고 명확히 주지시키는 순간 분리되어 있던 공간이 합쳐지고, 이른바 ‘제 4의 벽’이 무너진다. 관객은 더 이상 극에 몰입할 수 없게 되며, 무대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이 기법은 형식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낯설게 하기’ 이론에서 기원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란, 기존의 단어나 표현 방식을 생소하게 느껴지게 하며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각을 제시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제시한 러시아 형식주의 관점에서 문학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강하게 인식될 수 있도록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여 전혀 다른 느낌이 들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독자에게 새로운 관점과 의미를 제시할 수 있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낯설게 하기는 언어의 활용이나 서사의 지연 혹은 연장을 통해 기존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용하지만, 직접 무대에서 상연하는 희곡은 낯설게 하는 기법을 관객에게 직접 연극이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연극에 몰입하거나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극 속의 내용을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본 작품에서 소격 효과가 사용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작품의 풍자극으로서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독자가 극중에 정서적으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희곡을 바라본다면 본 작품은 단순히 촌장과 파수꾼 ‘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실패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의 결과는 관객에게 분노나 허탈함, 혹은 좌절된 폭로에 대한 슬픔과 같은 정서가 우선된다. 이 과정에서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보다 내적인 의미 전달은 관객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해 뒤로 밀려나게 된다. 해설자가 직접 관같다.
유목민족과 정주민족의 역학관계와 흥망-북위와 송나라의 쇠퇴와 이민족의 중흥을 중심으로-서론:유목민족의 기원 ?????????????????????????????????????????????????????????????1본론:유목민족과 한족 왕조와의 ??????????????????????????????????????????????21.흉노와 한나라, 그리고 영가의 난 ??????????????????????????????????????????????21-1 흉노와 전한 ????????????????????????????????????????????????????????????????21-2 팔왕의 난과 이민족의 개입 ?????????????????????????????????????????????42.송과 금, 그리고 몽골 ??????????????????????????????????????????????????????????????52-1 북송과 금나라 ???????????????????????????????????????????????????????????????52-2 몽골의 침략과 남송의 멸망 ???????????????????????????????????????????????72-3 원나라의 몰락 ???????????????????????????????????????????????????????????????8결론:유목민족과 정주민족의 관계 ?????????????????????????????????????????9서론:유목민족의 기원유목민족은 목축을 업으로 삼아 시기와 계절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옮겨다니는 민족이다. 가축에게 먹이로 삼을 목초와 식수를 구하기 위해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 이동하므로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정주민족과는 구분되는 특성을 지닌다.지리적으로 유목민족의 주된 활동 지역은 몽골 지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사하라 사막 일대까지 동서 방향으로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에서 활동한다. 한 곳에 머여 유목 국가의 약점-정주민족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구심점과 안정성-을 공략해 분열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을 취하여 북방으로의 위험요소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결과적으로 유목민족과 정주민족의 관계는 방랑하는 유목민족이 일방적으로 정주민족을 공격해 약탈하는 침략자 대 방어자의 관계가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는 경쟁자 대 경쟁자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그렇다면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은 중국 대륙의 한족이라고 칭해지는 정주민족 국가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대륙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주민족과 유목민족간 힘의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본론:유목민족과 한족 왕조와의 관계1.흉노와 한나라, 그리고 영가의 난1-1 흉노와 전한흉노는 고대 중국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목민족 제국이며 오호십육국 이후까지 중국사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흉노의 기원은 기원전 9세기에서 8세기 사이 중국에서 험윤(??), 혹은 훈육이나 호(胡)라고 칭해진 이민족들로 주로 중국 서북쪽의 북부 산서와 북부 하북 오르도스 지역에서 활동했다. 사마천이 그의 저서 [사기]에 남긴 기록에 따른다면, 흉노가 본격적으로 중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 후반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흉노에는 선우單于 라고 부르던 강력한 군주가 흉노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공교롭게도, 흉노가 본격적으로 대륙을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궐기한 상황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마찬가지로 통일에 성공하고 높은 기세를 자랑하던 진나라였다. 시황제의 통일부터 진이 멸망할 때까지, 흉노의 대규모 위협이 없었던 이유는 진나라가 통일 이후 15년만에 빠르게 몰락했던 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흉노를 경계하고 빈틈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황제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황제는 우선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진나라의 공세에 흉노는 제한을 둔다면 물자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경지대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침략 행위는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기 위한 단순한 도적질과는 거리가 멀었고, 정주민족 국가를 협박해 안정적인 물자를 제공받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교역을 다짐받기 위한 협박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흉노가 화친 조약의 내용에 한나라 상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하는 시장인 ‘관시’를 열게 하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 그 근거이다.당시 한나라의 내부적인 상황은 앞서 언급했던 진나라 멸망 시기의 황폐화된 경제 상황과 내부 세력들간의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외부의 적대적인 유목국가를 상대로 투사해야 할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북방 이민족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것은 손실이 너무 컸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유목민족은 뒤에 얼마든지 물러날 공간이 존재한다. 유목 군대의 영역으로 지나치게 깊이 들어간다면 순간 화살을 쏘고 도망가는 유목민의 전술에 전력이 서서히 감소하다 기습에 전멸당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한 고조가 직접 친정한 전투에서 역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흉노에 대한 보복 시도는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무제 이전까지 한나라 조정에서 흉노에 대한 토벌을 시도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기세등등하던 흉노의 위세는 한 무제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 고조 시절과 달리 무제 의 한나라는 선대부터 시행해온 제후왕에 대한 억제 정책을 계승하여 군국제 체제의 지배질서를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확립한 상황이었다. 내치가 안정되자 한 제국은 과거부터 안보에 위협이 되던 북방의 흉노를 몰아내기로 결심한다. 기원전 129년 마읍에서 있었던 흉노의 침투를 격퇴한 것을 시작으로, 124년 위청이 흉노의 침공을 격퇴하고 121년에는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이 감숙-현재의 양주, 감주, 과주 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낸다. 119년 이어진 원정에서는 외몽골 지역까지 쳐들어가 흉노를 제압하고 몽골 고원의 정주민족과 융합되어 한족이라는 넓은 정체성 안으로 포함된 상태다.당시 이민족 왕조들은 한족과 지배민족 사이에 차등을 두었지만, 호족 국가가 한족을 포용하는 중국의 왕조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부족-혈연체계를 탈피한 보편적 통치원리에 기반한 국가 체제를 세워야 했다. 오호 중 하나인 선비족은 이를 극복하고 호족과 한족의 구별을 두지 않고 중국의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지향하였다. 유목 봉건 체제가 아니라 관료 체제를 도입했고 부족 체제를 포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세워진 북위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후 선비족은 중화의 체제 안으로 동화된 모습을 보인다. 북위 이후 등장한 수나라를 건국한 수 문제 양견의 비 문경황후가 선비족 대 귀족의 출신인 것이 그 예가 되겠다.북방 이민족은 단순한 외부의 이물질로서 적대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에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부정적 교류와 갈등 속에서 한족 국가의 문화와 유목 국가의 문화와 의식이 융합되며 ‘한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의 개념을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대시켰다.2.송과 금, 그리고 몽골2-1 북송과 금나라유목민족과 정주국가와의 관계를 다룰 때 또 주목해야 할 관계의 국가가 바로 송나라다. 이 글에서 송나라를 한나라 다음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송나라가 서로 다르지만 유목 민족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여러 외적의 위협에 시달렸다는 점이다.또 하나는 송나라가 그러한 외부의 위협으로 두 번이나 몰락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두 번의 실패와 제국의 멸망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며 정주 민족 국가가 이민족의 침공에 어떻게, 멸망하는지 파악할 것이다.송나라는 당나라의 멸망 이후 짧은 혼란기를 거친 뒤에 건국되었다. 태조 조광윤과 이후의 송 황제들은 문신 관료들을 주축으로 한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중앙통치력을 강화했다. 특히 무관에 대한 강한 견제가 존재했다. 송의 건국 이후 이루어진 정책은 중앙의 금군 통수권을 황제에게 집중했고, 군대와 각 지방의 실권자는 전부 문런 상황에서 금나라를 다시 한번 공격하겠다는 이이제이 전략은 불안정했다. 거란 잔존세력은 1125년 완전히 몰락하고, 천조제가 붙잡히며 결국 동맹이 들통난다. 이를 빌미로 금나라는 북송을 재침공했고 휘종은 당시 어린 아이였던 흠종을 황제로 세우고 도주했다. 결국 북송은 멸망하고 휘종과 흠종 이하 황족들과 많은 귀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북송이 몰락한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휘종의 외교적 실책은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겨나게 만든 치명적인 실패였지만, 지도자 개인의 역량 부족과 실수 이전에 국가의 체제 자체가 외적의 침입에 너무 취약했다. 우선 문관을 군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체제는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북방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송나라가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군사에 대해 문외한인 인사를 배치했기에 지휘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황제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군 통제권도 그러한 문제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제대로 싸워야 할 군대가 명령에 과도하게 통제되어 경직되기 때문이다. 보병 위주의 편제도 문제가 되었다. 기병 위주의 거란, 여진과 싸울 때 기동력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왕안석은 민간에서 군마를 사육하게 하는 보마법을 시행하여 기병을 육성할 말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렇게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외교적 대처에 있다. 송나라는 수-당과 달리 외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고 이것은 북부 내륙지방에 대한 외교적 견제와 교류의 부재로 이어졌다. 그래서 유목민족의 행동에 정보도, 위기의식도 부족했다. 문제를 인지하고 행동하려는 시점에서는 너무 늦어서 통합된 부족들이 공격해오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정보의 부재는 어설픈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의 실패로 이어졌다.2-2 몽골의 침략과 남송의 멸망금나라로 물러난 남송은 비록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었지만, 강남 지방의 농업 생산량은 충분했기에 국가를 유지하고 꾸려나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지속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중흥영화 ‘300’을 시작으로 여러 매체에서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재조명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들 사이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같은 여러 도시국가들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이와 정반대로 전쟁 당시 그리스의 맞수였던 페르시아에 대한 인식은 협소한 상태에 머물러있다. 그 이유로는 페르시아가 위치했던 현 중동 지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이슬람, 테러리즘, 내전 등)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은 고유의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지녔으며 광대한 영토와 긴 역사를 가진 대국이었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살펴볼 때 있어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페르시아 제국의 기원은 이르면 기원전 9세기경 현재의 이란 고원에 정착한 메디아인들의 부족연합에서 시작된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6개의 부족들로 구성된 메디아 연합은 그들이 오기 전부터 위세를 떨치던 아시리아 제국 그리고 스키타이인들과 지역의 패권을 두고 싸웠다. 결국 메디아는 키악사레스라는 통치자의 지도 아래 바빌로니아와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제국을 건설했다. 비록 메디아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시조가 되는 아케메네스가 건설한 페르시아 왕국에 의해 기원전 557년 멸망하지만 제국의 통치원리와 제도는 후대의 지도자들에게 차용되어 페르시아의 일부가 되었다.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는 메디아의 통치제도와 메디아 관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보였고, 정복한 국가의 피정복민과 지배층을 관대하게 대했으며, 페르시아의 종교와 언어를 강조하지 않고 공존했다. 바빌로니아에서 노예처럼 지내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가 수많은 민족과 영토를 다스리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페르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통해 광대한 영역을 통치했다. 다리우스 1세 시절 세워진 수많은 도로망과 역참은 지방 총독들의 일탈을 감시하고 왕의 통치력을 제국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홍해와 나일강을 연결해 운하를 건설해서 수많은 물자가 오가게 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거둔 수많은 부는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의 복합적인 양식이 혼합된 화려한 페르시아 문화를 꽃피우는 양분이 되었다.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부터 479년까지 3차례에 거쳐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지만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퇴하고 만다. 패배의 원인은 좋은 장비를 갖추고 훈련도가 높은 그리스 군사들의 강력함도 있었지만, 페르시아군이 언어도 지역도 서로 다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혼성부대였기에 단합력이 부족했던 점도 있었다. 페르시아를 번영하게 했던 다양성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렇지만 침략자를 격퇴한 그리스의 미래는 그리 좋지 못했다. 도시국가 특유의 편협한 시각을 갖추고 있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의 이익을 두고 다시 전쟁을 벌였고, 결국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 페르시아도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가 죽고 아케메네스 왕조는 종말을 맞이했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과 현실적 접근기원 전 1250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사이에서 벌어진 트로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절정에 해당하는 서사시이기도 했다. 여러 신들과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트로이와 그리스라는 두 나라 사이에서 10년 동안 벌어진 대전쟁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분량을 차지한다.호메로스의 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계기는 불화의 여신이 던지고 간 황금 사과가 그리스의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일으킨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황금 사과를 얻기 위한 경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맡은 심판으로 이어졌다. 이 때 파리스는 ‘최고의 미녀를 주겠다는’ 포상에 설득되어 황금사과의 주인으로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 약속은 지켜졌지만, 하필이면 그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였다. 격분한 메넬라오스는 그의 형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필두로 한 그리스 영웅들과 연합군을 결성해 침공했고, 10년간의 전쟁 끝에 트로이는 그리스의 목마에 속아 패배하고 멸망했다. 서사시의 내용대로라면 전쟁의 원인은 파리스의 헬레네 납치, 더 나아가 황금사과에서 기원한다.그렇다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신화와 서사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며, 신과 영웅들의 존재는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본래의 이야기에 덧입혀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쟁 행위는 현실 문제이다.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저서 에서 ‘전쟁은 한 국가의 정치적인 의지를 타 국가에 강제로 강요하기 위한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전쟁은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로이를 공격했던 그리스 연합군의 입장에서 전쟁의 동기와 목적, 정치적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우선 전쟁의 계기가 된 헬레네의 납치 사건은 전쟁의 명분으로서는 훌륭하게 기능한다. 타국 지도자의 배우자를 납치하는 행위는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 간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물며 개인이나 가문의 명예를 목숨만큼이나 중시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문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사건을 겪는다면, 전쟁은 치욕을 갚기 위한 당연한 수단이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전쟁의 동기가 되었을지언정 전쟁의 목적이 되었던 욕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전쟁을 유발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트로이의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었다. 트로이의 위치는 고대 동서지역의 주된 교역로였던 에게 해와 흑해 사이를 이어주는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경제적으로 트로이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로서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동서간의 뱃길을 통제할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둔 고대의 무역은 곡류, 기름, 포도주 등의 식료품, 향신료와 장신구 같은 사치품, 무엇보다 청동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아연이 거래되었다. 청동기 시절 청동은 주로 갑옷과 무기를 만들 때 사용된 중요한 전략자원이었다. 그 가치는 현대 사회의 석유나 우라늄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 때문에 트로이 정복을 꿈꾸는 국가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예방과 세계평화 실천에 대한 고찰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고대 이래로 사람들은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살았고, 개인과 사회, 그리고 사회와 사회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다. 개인 간의 사적인 갈등은 단순한 폭언에서 시작해 폭행으로, 끝내 살인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폭력을 수반했다. 그리고 이 범위는 개인-집단-사회-국가로 넓게 확대됐다. 정리하자면 전쟁은 인간의 폭력이 가장 거대하게 확대된 국가 간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이는 정치적-윤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소재이기에 쉽게 다룰 수 없다. 또한 21세기 현대사회는 경제 교류를 통해 국가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전쟁을 하는 것보다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전쟁의 예방에만 집중하려 한다.전쟁을 막는 방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평화주의와 반전주의에 입각한 전통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바로 모든 국가와 사회가 비폭력을 표방하며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 논리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이 선택은 언제든지 배신당할 위험이 있다. 게임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두 사람이 합의하는 것보다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배신하는 것이 더 큰 점수를 얻을 때 배신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다. 배신을 막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다음 회차에서 보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력한 평화노선은 보복의 선택지를 배제한다. 결국 연속되는 침략을 막을 방법이 없다. 실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강제로 병합하려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1차 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전쟁을 꺼려했다. 결국 그해 9월 30일 뮌헨 협정을 통해 전쟁은 피했지만 독일이 체코의 영토를 병합하는 것을 사실상 방조했다. ‘우리 시대의 평화’라 선전하던 협정은 이듬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가 6주 만에 함락당해 전 유럽이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며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나치 독일을 거꾸러트린 것은 평화주의적 이상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군대였고, 그 동맹이었던 일본 제국은 원자폭탄을 2발이나 맞고서 고개를 숙였다.그렇다면 현실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전쟁을 막는 방법은 간단할 지도 모른다. 현재-미래의 적국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대전 이후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핵무기다. 냉전 시기는 대규모 확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전 세계가 핵의 참화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었다. 폰 노이만이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라고 이름붙인, 공멸의 위험성을 기반으로 한 군사전략은 냉전시기 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막았다. 그러나 냉전 시기 우발적 핵전쟁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용어의 약자인 MAD(‘미쳤다’)의 의미가 암시하듯이, 백척간두 위에 놓인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