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와 105인사건목차 1. 당시 시대상 2. 신민회 2-1. 신민회 창립 2-2. 신민회 대표적인 활동 3. 105인 사건 3-1. 105인 사건의 경위 3-2. 105인 사건의 진행 과정 3-3. 105인 사건의 결말 4. 평가 5. 참고문헌당시 시대상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 하기 위하여 19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다양한 조약들을 맺기 시작함 190 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 1907년 7월 정미 7조약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7년 국가를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중요한 힘인 군대마저 일본에 의해 해산되는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고 외교나 국방, 산업 등 많은 방면에서 조선은 주체성을 상실한 상황 이러한 국권 피탈의 위기감 속에서 백성을 계몽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신민회가 창립됨신민회의 창립 대한 매일신보 상동교 회 서북 및 서울 신흥 시민세력 무 관 출신 미 주 공립협회 5개 의 집단 세력은 애국계몽을 위해서는 이 단체를 미주에서 창립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일본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국내에서 안창호 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창립함. 신민회신민회의 창립 1907년 4월 20일 경 언론계, 기독교계, 실업계, 무관 출신 등 사회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의 7인 발기인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구성원 대부분 서북 지방 기독교인들이었음 국가가 망해도 계속적으로 국민의식 계몽과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깨워내야 마침내 국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단체신민회의 활동 - 애국계몽과 교육 1) 교육구국운동 오산학교, 대성학교, 경성학교, 보창학교 등 전국 방방곡곡에 신식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학교들은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과 사범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였고,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다시금 전국 각지로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교육이 전국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2) 계몽강연, 학회운동 애국주의, 국권 회복, 민권사상, 구습 타파, 신사상 신지식 신산업의 계몽을 주장하며 계몽 강연 및 학회 활동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3) 민족산업진흥운동 평양자기주식회사, 협성동사, 상무동사, 조선실업회사 등 민족 자본이 취약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신민회 회원들이 출자하여 민족자본을 통해 민 민족 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다.신민회의 활동 - 무장투쟁운동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국외 독립기지 건설 단순히 기존 애국계몽단체들이 주장하는 국권회복의 수단과는 별개로 민족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여 무력적 수단을 강구함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의 산실로써 역할을 수행함105인사건 의 경위 조선 총독부측 주장 : “우연히 암살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1910년 8월 중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 지방 사찰에 나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 외국인 선교사들이 다수 관련되어 있고 암살 계획을 사주 및 지휘함 신민회 중앙간부인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이 총독 암살계획을 모의 이러한 내용들을 때마침 강도사건으로 붙잡힌 이재윤이 자백하여 “우연히 알게 됨”105인사건 의 진행 과정 황해도 지역 독립운동 자금 모집 중 발각되어 안명근 체포 (안악사건) 데라우 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관련자 6,700여 명 체포 (105인 사건) 1910 년 10월 27일 1911 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신민회 간부 및 회원들이 다수 검거되어 신민회가 추진하고 있었던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등 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되기 시작 1909년 남한대토벌 이후 의병 문제를 해결한 일본은 국내에 남아있는 애국계몽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 사립학교령, 학회령, 출판법, 보안법 등을 제정 비밀결사였던 신민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음105인사건 의 진행 과정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 관련 기소자 123명에 대한 재판 실시 최 초 신문자 신효범의 신문과정에서 105인사건의 허구성 폭로 재판장 : 총독 암살을 주도한 것이 신민회의 목적이며 이 단체의 회장이 윤치호인가? 신효범 : 전혀 아는 바 없다 재판장 : 그러면 왜 경찰 신문과 검사정에서 이 모든 사실을 시인했는가? 신효범 :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음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고 재판은 불리하게 진행되었으나 안태국의 주장으로 인해 재판의 흐름이 바뀜 신효범 의 증언을 시작으로 이후 피의자들은 하나같이 잔인한 고문 과정을 낱낱이 밝히며 해당 사건이 조작된 사건임을 주장함105인사건 의 진행 과정 총독 암살을 계획한 바로 전날인 1910년 12월 26일 평양에서 하루 자고 27일 정주에서 동지 60명을 인솔하여 새벽 6시에 선천역으로 갔다”는 기소장 내용과 다르게 나는 서울 명월관에서 위로회 모임을 주선하였고, 그 증거로 요리대금 영수증과 우체국 전보문을 제시한다. 또한 그 날 정주역에 하차한 승객 숫자를 확인 해 달라. 영수증과 전보문의 진위가 확인 + 당시 정주역에서 하차한 승객은 9명 이러한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되자 재판장은 술렁이고 결국 재판 심리가 중단105인사건 의 진행 과정 체포되어 이송되는 105인 사건 관련 민족운동가들105인사건 의 결말 영수증 과 전보문 등 명확한 증거물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된 123명 중 18인을 제외한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 105인사건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 일본의 종교정책과 마찰을 빚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을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사건이라고 인식, 105인 사건의 전모를 선교본부와 미국정부, 언론에까지 알리고 대규모 변호인단을 조성하여 재판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력 제2심 공판에서 105인 사건 자체가 날조된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하였으나 105인 중 99인이 무죄 판결 최종심에서 “피고 등이 다른 결사의 동지를 구하여 범죄를 실행코자 하였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따라서 피고 등이 범죄행위를 수행코자 하였지만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 판결함으로써 사실상 재판상 승리 주모자인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임치정 5인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는 것으로 사건 종결역사적 평가 신민회는 구한말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써 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음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을 통해 강제로 해산되었을지언정 애국계몽운동이 신민회에서 그 맥이 끊기지 않았고 오히려 민족적 실력양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 신민회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외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이를 통해 많은 독립군을 양성해 냈고, 이는 1920년대 무장투쟁운동의 산실이 되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과를 냄 일제의 날조 사건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떳떳하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등 민족의 정신은 꺾을 수 없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참고문헌 김성욱(Kim, Sung Wook).(2012). 1907년에 대한 한국교회사적 의미. 개혁논총, 22(): 265-2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74)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100 code=kc_age_40 ) 사진자료) 역사채널e “105인 사건의 진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