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 관객들에게 호평을 얻으며 높은 관객 수를 자랑하고 있다. 은 여론을 조작하여 대중들을 기만하는 권력층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자세히 짚어보면, 영화 속에서는 언론사 논설위원(권력층)은 신문이라는 미디어 무기를 이용하여 대중들의 시선이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조작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한다. 이 영화는 수많은 사회 부조리에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미디어가 말하는 ‘진실’에 대해 파헤쳐보고자 한다.사실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의미한다. 사실이란 그 양이 너무도 방대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실을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미디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시대의 조상들은 우리 촌락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 또는 나라에서 전하는 소식이 전부였겠지만, 미디어의 발달로 현대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서 일어난 일도 터치 몇 번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만을 원했고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보의 확장을 원했다. 이 흐름에 발맞추어 대중들은 ‘진실-거짓없는 사실’을 알기 원했다.‘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기자, PD들은 그 진실에 맞는 프레임을 구성하여 사실을 구성한다. 이 프레임은 기자의 주관적 생각으로 기자 스스로가 옳다고 믿으며 대중들에게 알려야만 한다는 정의감으로 형성된다. 오늘날 대중이 접하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기자와 PD의 주관적 시선으로 재단된 사실들이다. ‘진실’은 사실의 넘어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진실’은 고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사실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서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사실’을 구성한다면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도 있다.‘조선일보’와 ‘한겨례신문’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정반대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래서 어떤 신문을 보는지가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반증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실’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게, 사회전체에 주어지기도 한다.필자는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보여준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면서 미디어는 모두 조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재단된 사실’에 대한 ‘진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미디어는 중립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사실’과 일대일로 직면하여 사실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사실’이 누군가에 의하여 전달되는 이상 ‘사실’은 ‘사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의 논설위원과 같은 사람들은 ‘진실’위한 프레임을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언론과 방송은 대중들의 규탄을 받는다.
최근 총선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다. TV, 인터넷, 신문 등 다수의 미디어는 총선에 관련된 기사들을 끊임없이 배포하고 있다. 그 기사들의 내용 대부분은 국회의원들의 공천과 공약에 관련된 내용으로 소위 작가가 말한 ‘권력 있는 사람들의 말’들이다. 국가의 중대사인 총선을 배제하여도 국회의원들의 발언은 언제나 쟁점이 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곧 작가가 주장하는 ‘의사소통의 민주주의’를 대변해주는 듯 보인다.진짜 작가의 주장처럼 말을 통해서 권력을 확보할 수 있고 권력을 통해서 말의 정당성을 확보 의사소통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갑’들의 권력이 어디서부터 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으로부터 나옴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 1조는 수많은 권력의 가분성을 통해서 국민주권이 형성되며 이렇게 형성된 국민주권은 타인에 양도할 수 없는 불가양성의 성질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채택했고, 국민은 민주주의 아래 선거(대의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주권을 확인한다.물론 정치적 ‘갑’뿐만 아니라 한국 시장경제 민주주의의 ‘경제적 갑’ 또한 국가의 도움과 정치권력의 도움-정경유착-을 통해 부정당한 방법으로 성장했다. 현재의 한국기업은 국민주권을 대표하는 국가와 정치인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국의 ‘갑’들은 국민주권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현대사회를 살펴보면 ‘갑들’은 이미 거대해져 그들 자신이 국민주권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망각한 듯 보인다.권력을 가진 자들의 언행이 일반 국민보다 더 많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더 많은 변화를 끌어 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미디어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국민의 경향을 이용하는 권력자들이 있다. 그 권력자들의 횡포로 국민은 불안해했고, 삶에 대한 불만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을 잡고 있지 않아 쉽게 불만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은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투표를 했고 권력자들은 투표자들의 지지를 받으려 노력했다. 권력자들은 진실 된 모습만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자들의 인식이 서서히 바뀌어 미디어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였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주권을 대표하는 권력들의 언행을 진보한 미디어를 통해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20대 국회선거가 증명했듯이 불통의 대통령과 진보하지 못한 보수는 국민들에게 심판받았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것이며 언제들이 변화할 수 있음을 국민은 보여주었다.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권력을 가진 몇 명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의 의식이 연대하였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3.15혁명, 4.19혁명, 6월 항쟁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과거 대학교를 진리의 상아탑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교가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대학교에서는 학문과 진리를 탐구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대학교는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단어 대신 취업으로 가는 관문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장소가 되었다. 수많은 기사는 대학교가 취업으로 가는 관문임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기사글 인용) 나 또한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선배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놀지말고 토익 점수나 따놔라였다. 대학교의 순위가 대학생들의 취업률로 평가되는 현실을 앞에 두고 대학생이 되었다. 진리의 상아탑은 낡고 고루한 단어에 지나지 않는가, 시대가 바뀌었듯이 취업으로 가는 관문&의 대학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입생인 나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 보려한다.대학교가 취업으로 가는 관문이 된 첫 번째 이유는 실업난 때문이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만큼 우리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주요 미디어들은 앞다투어 청년실업에 대해 보도한다. 이와 동시에 실업률이 적을수록 좋은 대학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일류 대학을 지향하는 모든 대학교들은 실업률 제로를 슬로건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더 급해진 학교들은 학생들의 고유한 권리인 수학권 침범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험을 몇 자 적어본다면, 전공필수 과목들과 교양 필수 과목으로 1학기 시간표를 세우다 보면 내가 듣고 싶거나 관심있는 과목의 교양과목들은 학점이 부족하여 들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처럼 짜여진 시간표를 그대로 이행하는 학생이 대학생은 아니다. 대학교는 학생이 듣고 싶은 과목을 직접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으면 안된다. 좋게 생각하면 전문적인 전공지식을 더 많이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하지만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이 어필되는 이 시기에 하나의 전공과목만 고수하며 교양과목도 필수적인 것만 들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대학교의 커리큘럼은 너무나 일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