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과제제목 : 대항해시대기 스페인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결과제출일 : 2017년 11월 22일작성자: 사회복지학부 김근호 (17139633)대항해시대기 스페인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결과1. 서론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이베리아 국가들은 대항해시대에서 서양에서 서세동점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광대한 해외 영토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제국을 경영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고안해냈다" .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는 갑자기 그 추진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유럽의 변두리 국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소논문에서는 어떻게 16세기에 스페인이 강성하게 될 수 있었는지, 또 17세기에 어떻게 그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역사적 흐름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 소논문은 해양 위주보다는 대륙 세력도 위주의 조사가 될 것이다.2.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동군연합15세기, 이베리아에 찬란했던 이슬람 국가들은 레콩키스타에 의해 밀려나 그라나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칼, 나바라 네 카톨릭 국가들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유럽을 놀라게 하는 결혼이 일어나는데, 이는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 이사벨(후에 여왕이 된다)과 아라곤의 계승권자 페르난도의 결혼이다.이들은 국가를 공동운영하며 1492년 이베리아의 마지막 이슬람 국가였던 그라나다를 밀어내어 레콩키스타를 782년만에 완성했으며, 나바라를 공격하여 포르투칼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루어냈고, 이 영토의 국경은 현대 스페인의 국경의 기본형이 된다.그러나 이 시기에서 비롯된 문제도 있었는데, 이 동군연합은 “두 왕국이 이제 동일한 군주를 모시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양국 정부의 지위나 형태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는 점이다. “콜롬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쪽이 아라곤 연합왕국이 아니라 카스티야였기 때문에 카탈루냐인은 아메리카와의 무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자치적으로체였고, 다른 영토의 합병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스페인 왕정의 통일이나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후일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또한 1478년 설치된 종교재판소 또한 문제가 된다. 스페인은 얼마전만해도 이슬람이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는 독실한 기독교주의 강박관념으로 이어졌다. 종교재판소는 1231년 교황이 이단심문관을 유럽 곳곳에 임명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1478년 교황에게서 받아낸 종교재판소 설치 허가령을 통해 만들어졌다. 3세기동안 지속되었던 종교재판소는 결론적으로 자본을 잡고 있던 유대인, 무슬림 등을 추방하거나 사형을 함으로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2.1 문제점 정리동군 연합의 과정에서 비롯된 ‘스페인’ 왕권 상승 및 통일 장애물.종교재판소의 유대인, 무슬림들의 추방으로 이어진 국가 통합 및 자본주의 사회 실현 불가능. 등.3. 합스부르크 왕가로의 편입, 카를 1세막시밀리안 1세가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고 했듯이 합스부르크의 결혼정책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갖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시작된 합스부르크가의 결혼정책은 그의 손자인 카를 5세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물려받은 오스트리아 영토, 할머니 마리 드 브루고뉴로부터 물려받은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외할머니 이사벨 1세로부터 물려받은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영토 등등 수많은 영토가 있다. 카를 5세는 독일 및 신성로마제국의 대리자로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임명했는데,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슐레지엔을 결혼으로 상속받으면서 합스부르크의 영역을 더욱 넓혔다.그러나 이 상속은 스페인 그 자체에 행운이 되지는 못했다.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특히 보편제국의 황제로서 활동했으며 스페인이 집중해야 했던 대서양, 지중해의 이권 다툼에는 등을 돌렸다. 그는 스페인 말은 일절 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고향이었던 부르고뉴의 귀족들이 그의 측근이었다. 카를 5세는 콩키스타의 완료는 곧 그 전쟁에 참여했던 용병들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해 10월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자(그것이 곧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라는 대륙이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셈 치더라도)곧 그 용병들은 배를 사서 서쪽으로 항해하는데 그들이 바로 콩키스타도르로, 스페인어로 정복자라는 뜻이었다. 코르테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무자비하고 교만하게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강제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개종시켰으며, 그곳에 스페인령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이들이 정복한 영토에서 나오는 금과 은으로 스페인에서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고. 스페인은 강성한 부국이 되었다. “1503년부터 1660년까지 160여년 사이에 약 600만 킬로그램의 은이 세비야에 도착했고 이는 당시 유럽에 존재했던 은의 총 보유량의 세배가 넘는 것이었다.“ 다만 명백히 말하자면 잉카나 아즈텍과 같은 원주민 제국은 멸망한게 맞지만, 그 제국에 편입되지 않은 특히 마푸체와 같은 부족들은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유순하게 조절해나가면서 대부분 19세기까지 살아남았다. 따라서 지도만 봤을때는 굉장히 넓은 지역을 스페인이 가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지점과 지점을 잇는 주요 도시만 차지했을 뿐이다.3.1 문제점 정리카를 1세의 신성로마제국 선출, 지도자의 성공이 스페인의 번영으로 이어지지 못함.아메리카의 정복-> 사실은 점과 점 사이를 이은 영토로, 완벽한 정복을 하지 못함.4. 펠리페 2세, 스페인의 최전성기와 몰락.카를 5세는 독일 제후들의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지지로 인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및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영토 상속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상속권만은 유지할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베리아 반도를 위한 정치를 피게 되었다.펠리페 2세는 스페인 문화권의 스페인 사람으로서 스페인어밖에 몰랐다. 스페인은 카를 5세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유지 정도로 사용되었지만, 펠리페 2세 치세에서 비로소 스페인 끊어진 포르투갈의 왕위를 겸하여 60여년간 이베리아를 통일하는데 이른다.물론 이런 빛나는 전쟁과 승리들은 많은 부분 스페인의 이득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적을 만들고 국고를 축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빛나는 승리인 레판토 해전도 이후 오스만의 바르바리 해적 후원으로 인해 지중해의 무역 이득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레판토 해전에 사용한 자금 때문에 한차례 파산하게 된 것도 문제가 된다. 포르투갈에게서 얻은 식민지도 오히려 유지비가 더 많이 들었다.특히 중대한 오점은 네덜란드에서의 실정으로 80년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무역력과 부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은 전쟁 이후 독립된 네덜란드가 해상 패권을 주도한 것만 해도 명백했다. 이를 잃고 80년간 국력을 소모하게 된 것은 굉장히 큰 문제였다. 펠리페 2세 치하 동안 4번 이상의 파산을 겪었으니 후대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수많은 빚더미를 남기게 되었다. 특히 영국과의 칼레 해전에서 믿을 수 없는 패전을 했을 때엔 도저히 국가 재정이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가장 큰 문제는 식민지에서 드러났다. 아메리카 식민지와 스페인 사이의 무역은 기본적으로 스페인 내에서 생성되는 와인, 곡물 등을 아메리카 식민지에 내다 팔고 은을 가져오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정작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그 생산품들을 생산하고 있었으니, 도저히 경제가 돌아갈 수가 없었다.또한 펠리페 2세는 즉위하자마자 ‘순혈령’을 반포하는데, 이는 사회에 계급제를 핏줄로 인해 더욱 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종한 유태인, 무어인마저도 퇴출했으며, 가문 내에 종교 재판으로 한번이라도 기소된 사람 또한 기사단 입단이나 신부가 될 수 없었다. 순혈령은 스페인 사회 내에 고발자를 계속해서 만들어 사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1558년에는 출판 검열을 강화하고 스페인 학생들의 외국 유학 자체를 금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외국 서적의 유입도 금지됐다.” 이는 스페인을 폐쇄된 사회, 발전할 수 없는 사회로 만들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봤을세의 열성적인 자식 농사는 이후 역사를 보면 완전한 실패로 보인다. 근친혼의 폐해인지, 아니면 단지 운이 없었는지 잘 모르겠다. 첫째 부인에게서 얻은 돈 카를로스는 정신적 문제로 인해 일찍이 유폐되었고. 세 번째 아내는 두 딸만을 낳은 채 사망해버렸고, 마지막으로 펠리페 2세의 조카딸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에게서 얻은 펠리페 3세만이 후계를 이을수 있었다.국정에 별 관심이 없던 펠리페 3세는 레르마 공작에게 대부분의 것을 위임했다. “레르마 공작은 펠리페 3세가 즉위하자마자 선왕 펠리페 2세의 수석대신을 리스본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삼촌을 톨레도 대주교로 앉히는 등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했다.”,“레르마 공작은 게으른 인물로 복잡한 정책보다는 무난하고 손쉬운 일처리를 원했으며 그의 체제하에서 펠리페 3세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기느라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또한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 “발렌시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명, 아라곤에서 7만명, 안달루시아에서 8만명, 카스티야에서 3만명 총 3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스페인에서 빠져나갔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는 인력 손실로 이어졌다.사실 펠리페 3세 치세 동안 국가가 회복될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따라서 재정을 회복하고 사회 시스템을 재구축했더라면 이라는 가능성이 남는다. 그러나 펠리페 3세는 암군이었으며, 레르마 공작은 탐욕을 위해 움직이는 간신배였다.이후 펠리페 4세는 후대에 청렴하다고 평가받는 올리바레스 공작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재기를 꿈꿨다. 내정을 공고히 하여 재정 확충을 시도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와의 휴전조약이 끝나자마자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스페인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에 네덜란드 전쟁이 교묘하게 끼어들어가고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강력해진 프랑스가 신교 측, 즉 네덜란드 측에 가담하고 다른 국가도 선전포고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