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주부전에 대한나의 단상별주부전 감상문어리석은 용궁유교 불교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에 인도와 중국에서 내려온 별주부전은 판소리 혹은 소설로 확장된,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이면서 우화소설이다. 이는 고전의 이야기 문화(설화, 소설)과 소리문화(판소리, 창극)이 해당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별주부전 판소리에서의 ’범 내려온다‘ 노래 또한 최근 대중들에게 이목을 끌었다. 이처럼 별주부전은 조선 후기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왔으며 고전문학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별주부전에 대한 단상을 쓰고자 한다.별주부전은 몸이 좋지 않은 용왕이 토끼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토끼의 간을 구해올 자가 없는지 묻는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별주부가 나서서 육지로 올라가게 된다. 육지에 올라가 토끼에게 용궁에 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며 거짓으로 토끼를 데려가지만 토끼는 간을 원하는 용왕을 보고 육지에 간을 빼고 왔다며 꾀를 부려 결국 육지로 다시 돌아가 도망갈 수 있었고 별주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용궁에 돌아가는 내용이다.별주부전은 용왕에 대한 별주부의 충성심과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른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용왕의 탐욕이 잘 나타난 설화로 나는 별주부전을 읽고 조선 후기의 백성들이 지배층 관리들과 왕을 풍자하고자 쓰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용왕과 신하 즉, 관리들의 부정부패 속에서 말주변이 좋고 꾀가 많은 토끼는 그 당시의 서민들을 상징하여 왕과 관리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소망하는 표현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단지 용왕을 위해서가 아닌 벼슬을 욕심내 토끼를 잡아오겠다고 한 별주부가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별주부가 단지 욕심이 많고 비열하다고 생각한다. 토끼에게 꾀를 부려 용왕에게 데려가 토끼의 생명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토끼의 꾀에 당한 별주부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벼슬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런 이득도 없었다면 나서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관리들 또한 충신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기대하는 탐욕적인 관리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나는 별주부전의 “과인은 수국의 천승 임금이요, 너는 산중의 조그만 짐승이라. 과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한 지 오랜지라, 네 간이 약이 된다 함을 듣고 특별히 별주부를 보내어 너를 데려 왔노니, 너는 죽음을 한치 말라.”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이 구절은 용왕은 바다의 임금이고 토끼는 산중의 짐승이라고 하며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용왕의 말처럼 둘은 서로 사는 지역도 다르고 산중의 짐승이 바다의 왕을 위하는 일은 모순적이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았던 지배층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 풍류가 가득한 동궁과 월지 >신라가 잠들어 있는 곳 경주는 고전의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지역이다. 옛날 선덕여왕 드라마 또한 촬영이 될 정도였다. 평소에 나는 줄곧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디서 생활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또한 나는 시 같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궁과 월지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주를 여행하며 고전을 느끼고 그 시대의 풍류를 즐기던 곳을 방문하고 싶은 기대가 있었다. 10월 1일, 나는 친구와 동궁과 월지를 보기 위해 경주에 갔다. 날씨는 마치 여행 가는 우리를 응원하듯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황리단 길을 둘러보고, 박물관과 첨성대를 방문한 뒤 우리의 주 목적지인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동궁과 월지는 생각보다 넓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 비친 건축물들과 작은 섬이 아름다워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질만큼 풍경과 건물은 조화를 이뤘다. 동궁과 월지의 역사를 보자면 동궁과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문무왕때 조성된 궁궐터의 하나이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사용되었다. 나는 친구와 동궁과 월지를 걸어가며 담소를 나눴고 생각보다 동궁과 월지는 넓었다. 작은 폭포와 배수로 같은 것들도 보였다. 내 생각보다 조상들도 생활모습이 현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실제로도 동궁과 월지에는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있는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 등이 발굴되었으며 연회에서 풍류를 즐길 때 사용되었던 주령구 또한 발견되어 당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동궁과 월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한 새소리와 잔잔한 물결만이 있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니 풍류가 절로 나왔을 것 같았다. 과연 귀족들의 연회장소라 할수있었다. 또한 동궁과 월지 연못 안에는 커다란 잉어들이 살고 있었다. 누가 관리하는지 연못들은 깨끗했고 다양한 색의 잉어들로 인해 한층 더 눈이 즐거운 계기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나의 하루두 개의 선택지1,2차 산업혁명과 IT기술을 통해 생산의 자동화가 시작된 3차 산업혁명이 지나고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로 1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사물과 디지털의 융합으로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사물의 분석, 활용 등 4차 산업혁명의 기술적 변화를 통해 인간의 활동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는 평소에 구매했던 상품들을 기반으로 빅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상품을 추천받으며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다. 나는 오늘도 빅데이터가 추천해 준 옷 한 벌을 구매했다. 빅데이터가 추천해 주는 상품이 나의 취향에 적합해서 미워할 수가 없는 시스템인 것 같다.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옷을 구매한 뒤 미세먼지와 기온을 알려주는 AI로 새벽을 맞이했다. “2031년 6월 1일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습니다.” 나는 마스크를 챙긴 뒤 평소와 같이 로봇청소기를 작동시키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새벽 5시임에도 도로는 벌떼처럼 달리는 차들로 가득 차있었다. 10년 전의 새벽 5시라면 한적한 도로였을 텐데 자율 주행이 도입되고 나서부터 대중교통이 24시간 운행되다 보니 새벽에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늘었다.“세상이 많이 편해졌어”나는 자율 주행 대중교통을 지나서 미리 폰으로 호출해놨던 자율 주행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를 입력한 후 자동차에 몸을 맡겨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떴고 피로가 풀린 나는 차에서 내렸다. 편하게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생각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나는 오늘 오랜만에 친구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던 터라 들뜬 마음으로 24시간 무인으로 운영되는 카페 입구로 갔다. 그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저 아저씨 또 저기 있네.”“그러게 매일 있던데.”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아저씨를 쳐다봤지만 곧바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는 이미 카페에 앉아있었고 나는 휴대폰으로 미리 주문해놓은 음료를 받아 친구와 이야기를 시작했다.“민수 넌 요즘 어떻게 지내냐”기운이 없는 말투로 ‘늘 똑같지 뭐’ 라는 말만 내뱉고 커피를 마시는 민수. 민수가 기운이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의사였던 민수는 4차 산업혁명이 의료산업에 도입된 후 일자리를 잃었고, 지금은 단기 알바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기운이 없는 민수가 한 술 더 뜨며 말했다.“이럴 수는 없어 로봇이 사람을 치료한다니..”“하지만 로봇이 치료하면 회복하는데 더 수월하잖아?”“그래 기계 오작동이 없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과연 시스템 상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수를 쳐다보는 내게 민수는 욱한 목소리로 물어봤다.“만약 네가 의사이고 임산부를 수술하던 중에 아이와 산모 중 한 명만 살려야 하는 상황이야 그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할래?”민수의 말을 듣고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눈이 동글해진 내 얼굴을 보고 민수는 이제야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물론 보호자의 의견에 따르겠지만 보호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람을 치료한다는 시스템이 입력되어 있는 인공지능이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궁금하다는 거야 산모를 살릴 것인지 아이를 살릴 것인지..”민수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무겁게 느껴졌다. 분명 인공지능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 뒤로 숨겨진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있는 어깨가 늘어진 아저씨는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그 순간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발걸음은 벤치에 앉아있는 아저씨에게 향했다. 아저씨 옆에 앉아 가방에 있는 음료를 꺼내 건네드리며 무슨 일이 있는지 여쭤봤고 그 아저씨는 분노하는 목소리로 대답하셨다.“버스를 몰던 나는 저 빌어먹을 자율 주행 버스에게서 일자리를 잃었어 이건 말도 안돼 저런 고물덩어리에 일자리를 잃다니 세상도 참 가혹하지 ”24시간 운행되는 버스가 편하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아저씨에게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그저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믿었던 편한 세상에 숨겨진 현실을 직시하니 머리가 지끈 아파졌고 몸을 비틀비틀 하며 벽에 기댔다. 심박수가 올라갔다며 손목에서 경고음을 뿜어대는 스마트워치를 보고 죄책감만 들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자기합리화가 생겨났다.“4차 산업 덕분에 스마트워치로 실시간 건강도 확인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야 건강을 챙기는 게 더 좋은 거 아냐?”마음을 진정시킨 뒤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안내문이 뜬 스마트워치를 보고 공원으로 향했고 공원을 몇 바퀴 돌았을까 목이 너무 말라 근처의 무인 편의점으로 들어가 물을 샀다.“일자리 문제로 인공지능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편리한 시스템이잖아 인공지능이 문제가 많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어두운 현실이라며 죄책감이 들었던 나를 반성하고 기분이 들떠 괜히 편의점 기계를 쓰담쓰담 거리며 흐뭇하게 웃었다.운동을 끝내고 집에 가기 위해 나는 폰으로 자동차를 호출한 뒤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곧 차가 도착했다. 차에 앉으니 오늘 하루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으로 목적지를 선택하고 곧이어 차가 출발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 구경을 하며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목적지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둔탁하고 큰 소리가 들렸고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교통사고 났나봐”“뭐? 아니 자율 주행 자동차가 사람을 치는 게 말이 돼?”
수단의 평화 이태석 신부요즘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기부하는 등 공동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마음이 따뜻해진다. 최근 대학교에서 공동선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공동선을 실천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는데 유독 수단이라는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신 이태석 신부님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래서일까 인성 캠프의 과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6권의 책들 중 이태석 신부님 수단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실린 책 가 머릿속에 들어왔다.이태석 신부의 직업은 의사이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는 의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버리고 가장 가난한 나라 ‘수단’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선교활동을 하였다. 신부님은 가난과 질병에 빠진 마을을 위해 의료봉사활동 및 교육 활동에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음악 활동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이태석 신부는 결국 대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하여 더 이상 선교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병이 나아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결국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 하늘나라로 떠났다.이태석 신부는 의료 봉사활동 및 교육 활동 외에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음악 활동도 아끼지 않았다고 했는데, 활동을 하던 아이들이 “총과 칼들을 녹여 그것으로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면 좋겠다.”(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p.21)라고 한 말이 인상 깊었다. 수단은 전쟁으로 잦은 나라였기에 수십 년간 울려 퍼지던 총성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겨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음악 활동으로 인해 아이들의 귀에 더 이상 총성이 들리지 않고 노래라는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아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구절이었다.이 책을 읽는 내내 교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콜레라 병을 단순한 병으로 생각하여 집에서 변을 당하는 수단 사람들을 보고 “현대 사회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가 물질주의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병 자체가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가 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p.38) 라고 말했다. 콜레라 병에 무지했던 수단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처럼 우리 현대 사회는 자신의 물질주의에 무지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직업인 의사가 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땀을 흘린다. 이태석 신부 또한 의사가 되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질병이 끊이지 않는 수단의 선교활동을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발 벗고 나선 모습을 보는 몇몇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의 배가 불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자신의 직업을 앞세우기보다는 이태석 신부처럼 이웃을 도우며 이웃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웃을 돕기 위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후원을 함으로써 작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먼저 손을 내밀어 작은 도움을 준다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태석 신부의 선교활동을 통해 총성이 가득했던 마을에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이태석 신부의 수단 선교활동은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태석 신부는 이 책을 통해 소외된 이웃과 친구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작은 손길을 내밀어 보는 것이 어떨까.
?독서와 토론? ( 26 )분반 독서 노트작성자이름: 학과: 학번:책 제목논어저 자공자의 제자들로 추측독서 부분제 1편 학이독서 일자2020-10-02구 분내 용키워드효도와 공경이라는 것은 바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주요 내용배우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이 군자답고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들 중에는 인한 이가 드물다.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은 없는가 반성하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에게 공경스러운 것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며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인상적인 구절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국어선생님께서 수업태도가 바르지 않은 친구에게 똑바로 앉으라며 혼을 냈더니 그 친구가 선생님께 짜증을 내는 말투로 대들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 종이 쳐서 선생님께서 나가셨는데 나가자마자 그 친구는 반 친구들 앞에서 비속어를 사용하며 선생님을 욕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가 윗사람에게 공경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2.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스러우면서 윗사람 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윗사람 해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질서를 어지럽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는 것이니, 근본이 확립되면 따라야 할 올바른 도리가 생겨난다. 효도와 공경이라는 것은 바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니라!”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처럼 윗사람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인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의 경험을 토대로 보면 그 친구의 행동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안 좋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윗사람에게 공경하는 것은 자신의 첫인상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 같다질문?의문점1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라는 구절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과연 우리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해도 괜찮을까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좋기만 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 끝내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관심을 안 가진다면 앞으로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있다. 흔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반응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이 반응을 해주지 않고 무관심하다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또한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사람들 중에는 인(仁) 한 이가 드물다.” 하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적절한 가식적인 반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직장 상사를 가리키는 말로 꼰대라는 은어가 생긴 것처럼 실제로 사회 속에서는 수많은 꼰대 즉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식적인 반응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