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과학자들 / 과학이 어떻게 범죄를 낳는가이 책을 읽고 난 후 드는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분노’이다. 흑인을, 여성을 실험실 쥐 취급하는 과학자들,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 많은 약물 실험을 한 의사들을 보며 독자들은 분노를 느낀다. 책의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나쁜 과학자들’을 보고 분노하고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쓴 책일 것이다.하지만 이 책 속에는 ‘이유’가 빠져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있지만, 그들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쁜 과학자’ 개인이 왜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나, 왜 사회가 ‘나쁜 과학자들’을 양산하고 때로는 지지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이 책에 나온 ‘나쁜 과학자들’이 저지른 범죄들은 진짜로 ‘나쁜 과학자’ 개인의 범죄일 수도,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범죄일 수도 있다. 가령 인종차별이 당연시 여겨지던 사회에서 과학자 개인이 흑인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낼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사회•정치적 상황을 배제한 채 맨해튼 프로젝트나 나치와 관련한 과학자들만을 비판하는 것 또한 순진한 흑백논리일 수 있다.그렇지만 그들이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이유로, 혹은 과거 사회의 인식과 제도의 한계를 빌어 그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 과학이 범죄를 낳는지에 대한 철저한 탐구,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다시 ‘나쁜 과학자들’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하지만 이 책은 이에 관한 논의를 생략함으로써 윤리냐 기술의 발전이냐, 와 같은 대결 구도로, 혹은 현대 연구 윤리의 우월성과 같은 논점으로 논쟁을 끝낼 여지를 준다. 가령 얕은 관찰을 통해 발견한 ‘윤리와 기술 발전’의 대결 구도는 ‘윤리가 기술보다 중요하다’라는 당연한 명제를 이끌어낼 뿐이다. 물론 이 명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명제가 과학에 의한 범죄를 실제적으로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명제를 알지 못해서 수 많은 ‘나쁜 과학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구도는 윤리를 어긴 것을 기술의 발전으로 포장하는 논리까지도 낳을 수 있다. 이 논리는 현대 사회에도 확장 적용되어 또다시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생명과 권리를 희생시키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과거의 윤리체계가 현대의 윤리체계보다 열등하거나 미개하다는 식의 논리 역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당시 사회의 연구 윤리의 미숙함을 범죄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성숙한 현대의 연구 윤리를 잘 지켜야 한다라는 결론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연구 윤리는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완벽할 수 없으며 언제나 연구를 범죄로 이어지게 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연구 윤리 역시 이 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히 과거의 미숙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떠한 연구 윤리가 미숙했고 왜 그러한 점에서 미숙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가 이루어져야 현대의 연구 윤리 역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과학이 범죄로 이어졌던 원인에 대한 탐구, 비판과 성찰이 없는 논의는 ‘나쁜 과학자들’을 줄이는 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은 과학에서의 윤리를 논하는 책으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그럼에도, 이 책은 ‘과학으로 어떻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과학이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에 희망적이다.
철저한 현실의 기록, 좋은 예술은 모두에게 다른 메시지를 주고 좋은 디자인은 모두에게 같은 메시지를 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은 좋은 예술임에 틀림없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시각으로 읽혀온 희곡이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문제이지만 필자는 셰익스피어는 왜 이 작품을 썼는지, 이를 통해 어떠한 말을 던져주고 싶었는지 분석해보려 한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철저하게 투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의 모티프이자 주제는 현실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어떠한 수식으로도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신데렐라나 콩쥐 같은 선을 대표하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사건들도 마냥 좋고 나쁨으로 구별할 수 없다. 결말에서는 강자가 승리한다. 하지만 약자의 가능성 또한 보여준다. 현실이 그렇다. 모든 사람은 양면적이며 사회 또한 강약의 논리로 돌아가지만 그 논리가 깨질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현실을 철저하게 담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중립적인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에 좀 더 몰두할 수 있게 한다.우선,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적인 인물들이다. 어떠한 인물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긍정적 인물, 부정적 인물로는 더욱이 나눌 수 없다. 작품의 주요인물은 크게 안토니오, 바사니오, 샤일록, 포셔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 인물들을 통해 어떠한 인간도 완전히 선하거나 악할 수 없음을 말하고 인간의 양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먼저 안토니오는 친구인 바사니오를 위해 돈을 갚지 못할 시 자신의 살을 베어가도 좋다는 계약을 한다. “내가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는지 의심하는 건 네가 내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는 것보다 나에게는 더 심한 모욕이야.”라는 눈물 나는 우정을 보여준다. 그는 이처럼 우정, 자비, 관용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 가치들은 오직 그리스도교인들에게만 적용된다. 유대인인 샤일록에게는 구타와 모욕을 일삼는다. 그가 유대인이며 고리대금업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돈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는 자선가이자 전 재산이 바다의 선박에 달려있는 위태로운 자본가이다.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 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치를 부린다.그의 친구인 바사니오도 마찬가지이다. 포셔가 준 반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죽음과 같다는 맹세를 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빚을 갚아줄 재력 있는 여인을 찾아와 구혼했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재력이 첫 단추였던 것이다. 또한 그가 포셔와 안토니오를 대하는 태도에서 우정과 사랑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면에서는 안토니오와 다르지 않다. 역시 그 또한 엄청난 사치를 부린다. 무엇보다도 포셔를 쟁취한 현명한 남자인 동시에 어리석은 면모를 보인다. 그는 ‘상자 고르기’에 성공하여 그의 지혜를 증명한다. 하지만 재판에서 그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돈을 몇 배 더 주어 안토니오를 살리는 것도 포셔가 처음에 제안한 해결책이며 심지어 그녀가 남장을 해서 재판을 승리로 거의 이끌어 갈 때에도 자신에게 더 유리한 판결이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샤일록이 돈을 3배 받고 그만하겠다고 할 때에 바로 수긍하는 어리석은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적인 샤일록도 이중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돈에만 집착한다. 딸이 없어졌을 때에도 없어진 딸이 아닌 딸이 들고 간 돈에 집착한다. 돈을 갚지 않으면 살을 베어가겠다는 반윤리적인 계약을 체결하는 데에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그 계약을 이행하려고 한다. 돈을 갚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법정에서 “제가 왜 삼천 더커트를 마다하고 일부러 더러운 살 일 파운드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전하께서는 아마도 의아하게 여기실 테지요. (중략) 제가 안토니오를 상대로 이렇게 밑지는 소송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래 묵은 원한과 어떤 증오감 때문이지, 이밖에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저 돈만을 원했다면 3배의 돈을 주겠다고 했을 때 수긍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그건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지. 그래, 유대인은 눈이 없나? 유대인은 손이, 오장이, 육체가, 감각이, 감정이, 정열이 없단 말이냐?”나 “유대인이 그리스도교도를 모욕한 경우 그리스도교도의 관용이란 뭐겠어요? 그건 복수라고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도가 유대인을 모욕했을 때 그들을 본받는다면 유대인은 어떠한 인내를 해야 옳지요? 물론 복수지요. 당신들이 가르쳐 준 악행을 나도 실천할 거요.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교훈 이상으로 철저히 실천할 거요.”와 같은 그의 말 곳곳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는 돈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고리대금업자인 동시에, 유대인 탄압을 비판하는 운동가인 것이다. 또한 돈에 집착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인 동시에 안토니오나 바사니오에 비해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포셔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걸’이자 아름다운 ‘벨몬트’에 사는 친절한 여성으로 표현된다. 나아가 “살아 있는 딸의 의견이 죽은 아버지의 유언에 제한을 받는” 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바사니오에게 간접적으로 힌트를 주어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재산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바람과 달리 자신의 재산을 사랑했던 바사니오에게 넘어간 어리석은 여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혜롭고 재기 넘치는 법관으로서 남성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다. 남편의 친구를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고 주변 사람들을 위하는 장면에서 우정, 사랑, 자비를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정에서의 자비론은 그녀의 자비로움이 매우 부각된다. 그렇지만 자비로운 포셔도 샤일록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유대인인 그에게만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이처럼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안토니오는 자비로우며 잔인하고, 샤일록은 잔인하며 인간적이다. 바사니오는 현명하면서 어리석으며 포셔는 친절하며 잔인하다. 이게 진짜 인간의 모습이다.양면적인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또한 복잡하다. 현실에서는 소수자의 목소리는 묻히고 강자가 승리한다. 사회는 선악이 아닌 강약으로 작동된다. 이 작품 역시 강자인 그리스도교도가 승리한다.앞에서 언급했듯이 샤일록과 안토니오, 바사니오, 포셔 어느 누구에게도 ‘악하다’, ‘선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종교가 최고의 권력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강자인 그리스도교인들과 핍박을 당하던 약자, 유대인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희극은 벨몬트에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행복한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샤일록의 최후는 기록되지도 않는다. 이 모습은 현실과 닮아 있다. 자비와 관용을 중요시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은 약자인 유대인의 자비와 관용에는 관심이 없다. 자비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유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사실 이 극은 그리스도교도와 유대인들 어느 쪽의 편도 들고 있지 않다. 그저 그리스도교가 승리할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어느 쪽이 옳든 현실은 강자가 승리하고 약자가 패배한다. 그리고 약자의 패배는 잘 보이지 않는다.현실에서는 강자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강약의 논리는 언제든지 약자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약자, 소수자의 승리 가능성 또한 담겨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포셔이다. 이 작품은 포셔라는 여걸을 통해 약자의 승리 가능성을 보여준다. 봉건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혼사라는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행동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재판에서 여걸의 재치와 능력은 절정에 달한다. 기존 남성우월주의를 위협할 수 있는 남장여자를 서슴지 않고 재판으로 나간다. 남자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우정만 운운하고 있는 사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며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재판 후의 반지를 빼앗는 장면은 남성의 힘을 여성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반지를 빼앗고 돌려주는 장면들에서 남자에게 순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남자를 조종하고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물론 마지막에는 반지를 돌려주기는 하지만 그녀의 말과 태도 속에서 앞으로도 그저 순종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약자인 여성이 강자인 남성을 뛰어 넘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샤일록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최후도 기록되지 않은 채 그는 패배했지만 그는 법률 해석의 문제만 아니었어도 그리스교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재판의 결과와 윤리성을 별개로, 그에게는 자신을 멸시하던 그리스교도들을 불합리한 계약까지 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능력이 있었기에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는 빚을 안고 사는 바사니오나 안토니오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다. 결국 그 또한 강자를 이길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강자가 승리하지만 약자가 승리할 가능성도 늘 지니고 있다.결론적으로 작가의 모티프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이 희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현실은 권선징악이라는 원리에 의해 돌아가지 않는다. 권선징악이라는 논리가 적용되기 이전에 현실에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어떠한 인물도 ‘절대선’, ‘절대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희극의 인물들은 매우 양면적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강자에 의해 지배되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강자가 약자, 소수자에게 휘둘린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은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현실과 인간의 모습을 담은 철저한 현실고발극인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현실보다 현실 같은 희곡 속에서 현실을 보며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길 바랐을 것이다.
상상력에 기인한 범죄를 상상력으로 속죄할 수 있을까Briony의 속죄(atonement)의 방식과 그 정당성에 관하여는 Briony가 13살 때 저지르게 되는 ‘범죄’와, 그에 대한 속죄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Briony가 택한 속죄의 방법은 간호사가 되는 것과 이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이 두 방법은 Briony가 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속죄의 방법이었다.Briony의 속죄의 정당성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Briony가 Robbie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Briony의 어떠한 면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는지를 규명해야만 속죄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Briony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녀의 상상력이었다. 그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13살 어린 아이였다. 영국의 시골에 있는 대저택에서 서재의 책을 읽으며 자라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글을 쓰며 작품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상상한다.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가 아픈 상태에서 그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넓은 저택에서 자유롭게 상상할 뿐이다.그녀의 상상력의 기저에는 그녀의 ‘주체 중심적 사유’가 있다. Briony는 뚜렷한 자신만의 도덕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기준대로 정렬되어야 한다. 일정한 모습으로 흐트러짐 없이 정렬해 둔 model farm과 질서 있게 정돈된 방에서도 그녀의 욕구가 드러나지만, 그녀가 쓰는 작품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녀는 글 속에서 자신의 논리대로 세상을 정렬하려고 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녀의 “A love of order”(Part One, Section One, 7)는 “unruly world”(Part One, Section One, 7)에 “the principles of justice”(Part One, Section One, 7)를 적용함으로써 구현된다. 가령, Briony는 결혼을 일종의 ‘reward’로 정의하고 보상 받을 자격이 있는 태 속 주체 중심적 사유와 상상력이 과잉될 경우, 현실에 대한 왜곡을 낳고 자기중심적인 사유로 나아간다. 사실 ‘주체’, ‘이성’, 그리고 ‘계몽’은 근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적인 힘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이 ‘주체’와 ‘이성’은 현실을 파괴하고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 미성숙한 상태의 ‘주체적 자아’는 현실에 대한 왜곡과 자기중심적 사유를 낳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체’의 개념이 권력과 결합될 경우, 권력을 정당화하며 고착화시키는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가진 자보다 ‘이성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것이고, 그렇기에 나아가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는 더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권력자들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때 권력자들의 논리가 미성숙하다고 해도 권력이 없고, ‘비이성’적인 약자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이성’이라는 개념은 만들어 낸 환상일 수 있는 것이다.Briony의 오해는 결국 과도한 상상력과 주체 중심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랑과 성의 세계를 선과 악의 세계로 해석하려고 한다. 분수가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의 문제를 Briony는 Robbie가 Cecilia를 ‘threat’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일순간 어른의 세계로 엿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그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 비논리적인 상황일 뿐이다. 낯선 세계를 만났을 때의 불편함과 충격 속에서 그녀는 그 세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방어적, 확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Robbie가 Cecilia에게 보내는 편지를 훔쳐보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며 그녀는 그녀의 해석을 더욱 굳건히 할 뿐이다. Cecilia를 연약한 피해자로, 로비를 언니를 위협하는 ‘demon’으로 몰아세운다. Cecilia와 달리 Briony는 성과 사랑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Briony는 자신의 이성과 상상력으로 이 낯선 세계를 해석한 것이었다.것이다. 이에 대해 적절한 것이 ‘간호사’의 일이었다. 간호사의 세계에서 Briony는 ‘Briony’가 아닌 ‘Nurse Talise’라고 불린다. Briony라는 주체가 일시적으로 삭제되는 공간인 것이다. Briony에게 그렇게 중요하고 그녀를 지탱하는 중심이었던 자아와 상상력은 discipline의 과정을 통해 통제된다. 여기서 Briony는 자신에게 중요한 자아가 삭제당하는 과정을 통하여, 처음에는 다소 부당하고 불만을 가지기도 하지만 성장해나간다. 나아가 하루에도 수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의 위대성이나 우월성이 아닌 취약함을 배운다. 인간의 육체는 쉽게 무너지며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 앞에서 너무나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로비의 삶이 그녀의 오해 하나로 인해 뒤바뀐 것처럼, 인간과 삶은 이성과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 나간다. 나아가 뤽 병사를 만나며 Briony는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삭제되는 경험을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 있는 뤽 병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뤽 병사와 깊은 공감을 하며 그녀는 다시 ‘Briony’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Briony는 1부의 Briony와는 다르다. 타인과의 공감, 그것도 깊은 존재적 공감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Briony’의 자아는 다시 나오지만, 이때의 자아는 통제된 자아이다. 타인과의 공감은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삭제하고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 경험은 그녀를 엄청나게 성장시킨다. 이것은 소설을 통한 속죄의 정당성의 근거로도 이어진다.간호사의 일도 물론 Briony의 속죄의 방식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주된 속죄의 방법은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 소설 전체가 그녀의 속죄인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속죄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소설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공감이란 자신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상대방의 인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주체 중심적다고 말한다. 나아가 "other people are as real as you. And only in a story could you enter these different minds and show how they had an equal value"(p. 38)라고, 오직 소설을 통해서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하지만, 허구로서 속죄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낳는다. Briony의 상상력 과잉이 낳은 현실 왜곡이 바로 이 비극의 원인이었는데 어떻게 상상력으로 그 속죄가 가능한 것일까? 이는 상상력의 양면성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을 왜곡시키고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는 큰 위험을 안고 있지만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또 상상력이다. 자아를 삭제하고 타인과의 깊은 공감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나아가 소설가인 Briony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이기도 했다. 이미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들이 죽은 상태에서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침묵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상 속 로비가 말한 세 가지 방법은 의미가 없다. 그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죽었음에도 굳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범죄이다. 그것이 과거의 일이더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이오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범죄의 가해자들을 기소하는 방법으로서 소설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은폐되어있던 진실을 밝히는 것이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범죄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소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일종의 기소문에 해피엔딩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의 정당성은 무엇일까?Briony는 이것은 도피나 자기 위안이 아닌 소설가로서 그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일부 독자는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인해 Briony의 죄가 덜어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기 위안이라며 비판한다. 여기서 리곳이 없으며 신이 용서를 해줄 수 있지만 속죄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 또한 그 작품 안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본래 소설은 작가가 창작해나가는 세계이며 작가의 상상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의도적으로 리얼리즘을 어기고 해피엔딩을 만들어준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을 쓰는 과정은 Briony 자신의 자아를 삭제하고 로비와 세실리아의 내면에 깊이 공감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Briony는 그들이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평화를 기원했는지 공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해피엔딩은 그 강렬한 열망의 표현이다. 오히려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한 것은 Briony가 그들의 비극의 무게를 절절히 체감하기 때문이라고 불 수 있다. 이는 소설가로서 할 수 있는 강렬한 바램의 표현이다.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의 삶이 파국으로 치 닫은 것을 보고 상상하고 공감하며 Briony는 거대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Briony의 거대한 죄책감과 슬픔까지도 엿볼 수 있다. Briony 역시 그들 셋의 열망은 이미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소설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허구에서라도 그 열망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비극이며 열망이 구현되지 못하지만 소설은 허구에서라도 그 열망의 구현을 통해 그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다. 자기 위안이라기보다 이 결말은 어긋난 그들의 삶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다. 그것이 현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은 두 사람을 만나게 만들 수 없다. 오직 소설에서만이 그 둘이 살아있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닌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소설은 현실에서 쟁취되지 못하는 욕망, 꿈, 이상을 담는 매개체일 수 있다. 결국 해피엔딩은 ‘사실이 아니지만’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는 Briony의 반성문이자 기소문이며 바램이다.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그녀는 로비와 세실리아의 다.
Flannery O’Conner의 와 레프 톨스토이의 에서 드러나는 종교관에 대하여수많은 문학 작품은 각자의 문제의식을 각자의 방법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 중에는 특정한 종교관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드러내는 작품들도 있다. 그것이 바로 Flannery O’Conner의 와 레프 톨스토이의 이다. 작품의 길이부터 쓰인 언어까지 많은 측면에서 상이한 두 작품이지만 작품의 주제가 특정한 종교관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 두 소설은 작품과 무관해 보이는 사건 전개 끝에 결말 부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종교관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각 작품에서 드러나는 종교관과 그 가치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에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에 입각하여 각 작품에서 작품의 핵심인 종교관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논해보려고 한다.우선, Flannery O’Conner의 는 표면적으로는 ‘Good’이라는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종교적 구원과 원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good’의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독자는 ‘good man’에 집중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작품 속에서 ‘good man’이라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good man’을 끊임없이 말하고 강조하는 할머니가 ‘good’이라는 윤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살인자 Misfit을 만나 결국은 죽음을 당하는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할머니와 Misfit의 대비를 통해 독자들은 ‘good’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Good man’에 집착하는 할머니는 사실 ‘good’의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지만 사실 ‘lady’나 ‘gentleman’, 외면적인 모습에 집착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전개시키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Red Sammy나 무자비한 Misfit에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상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good’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고 그저 ‘no pleasure but meanness’만을 추구하며 살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말로만 ‘good’에 대해 이야기하는 할머니보다 훨씬 깊이 ‘good’과 종교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신념을,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다. 그 모습에서 독자들은 무자비한 살인자로만 여겨졌던 그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이처럼 두 캐릭터들의 대비는 독자로 하여금 ‘good’의 의미에 대한 색다른 성찰을 하게끔 만든다.하지만 ‘good’에 대한 정의는 이 소설 전체를 대변하는 충분한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결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good’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는 이 갑작스러운 결말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Misfit, 두 캐릭터의 대비가 둘의 대화를 통해 계속되다가 급작스럽게 할머니는 “Why you’re one of my babies. You’re one of my own children!”(p.663)이라고 말하며 Misfit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다. 이에 Misfit은 뱀에 물린 것 마냥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쏴 죽인다.‘good’에 대한 논의와 전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이 급작스러운 전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은총의 개념이 필요하다. 본래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에 영적 존재의 갑작스러운 드러남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결말에서 ‘good’이라는 가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쯤으로만 이용하며 피상적으로 종교를 믿는 할머니는 Epiphany의 순간을, 그리고 범죄를 무자비하게 저지르는 Misfit은 할머니를 통해 갑작스러운 기독교적 은총을 경험한 것이다.그렇다면 왜 Misfit과 할머니는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Misfit이 심도 깊은 성찰을 통해 신념을 얻고 그 man’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할머니와 Misfit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 모두 ‘good’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적 은총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인간의 시각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칭해지든 칭해지지 않던 신은 모두에게 기회를 부여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 원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에게는 모두가 동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Misfit과 할머니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만약에 ‘good’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다면 굳이 종교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good’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 보다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저 할머니와 Misfit 모두 ‘good’하지 않다는 것까지만 제시할 뿐이다.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결말을 통해 개연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종교적 구원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라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죄를 지닌 인간은 ‘good man’이 쉽게 될 수 없으며, 절대적 존재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톨스토이의 는 앞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절대적 선의 존재’라는 종교관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이야기가 중심인 것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결말에서 종교적 가치를 좋은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한 점에서 이는 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종교관은 위 소설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비논리적이며 갑작스러운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위의 소설과 달리 에서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선의 존재’를 이야기 한다. 또한 갑작스러운 종교적 구원으로 마무리를 지을 뿐 직접적으로 종교관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와 달리 는 끈질기게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레빈의 가치관의 변화관이라고 생각했으며 여기서는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종교관에 대한 논의가 핵심이므로 이 부분에 한정시켜 논할 것이다.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질문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작가의 좋은 삶에 대한 성찰은 레빈이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레빈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 이야기와 병치되는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고민은 작품 내내 지속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고뇌 과정에 작품 전개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특히 마지막 8부에서는 레빈의 가치관이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안나의 죽음에 대한 짧은 부분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레빈은 사랑하는 형의 죽음과 자신의 아이의 탄생을 마주한 후 삶을 두려워하게 된다. 삶에 대해 탐구할수록 자신의 삶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는 그를 두렵게 했다. 그가 평생을 연구한 사상과 신념도 무지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다. 신앙에서 오는 해답을 믿지 않으면 어떠한 해답을 믿어야 하는지 고뇌했다. 그는 각종 책, 지식, 사람들 사이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발버둥 쳤다. 그는 과학, 유물론, 철학, 사랑과 같은 수많은 분야를 탐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은 ‘말로 빚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던 그가 키티의 분만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게 된 경험은 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삶에 대한 무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려고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신이 왜 그토록 열심히 자신의 생활을 지키고 견디는 지에 대한 물음을 그칠 수는 없었다.그러던 그는 “그런데 포카느이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3』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09 479)라는 말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답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깨닫는다. 애초에 그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삶의 목적에는 자신의 생존 이외 신앙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그는 모든 관계에 있어 노여워하지 않고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레빈은 어느새 마부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고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고 논쟁을 시작해버렸다. 또한 그가 받아들인 신앙, 어째서 그 계시는 기독교 교회에만 한정되어 있는지에 대한 답을 할 수도 없었다.그러다가 별의 움직임을 보며 자신이 여전히 이성과 말로 지식을 탐구하고 있던 것을 깨닫는다. 그는 지구가 회전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별의 움직임에만 집중해 지구의 회전을 밝혀내지 못했던 천문학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에게는 ‘신앙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권리와 능력은 없지만’(박형규 520, 재인용) 절대적 선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진심으로 깨닫는다.이러한 깨달음은 그에게 행복이나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앞으로도 자신은 화를 내기도 하고 논쟁을 하고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일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박형규 522, 재인용), 절대적 선의 존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결국 레빈이 마지막에 터득한 종교관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톨스토이는 이 문제의식을 자신의 삶의 목표와 존재 이유라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레빈이라는 인물의 긴 고찰 과정을 통하여 도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이 제시하는 종교관에 대해 논리성과 설득력을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 가치관에 대해 공감하게끔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독자들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절대적 선’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기에 독자의 해석의 여지는 비교적 줄어든다.결론적으로 Flannery O’Conner의 와 레프 톨스토이의 는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종교관을 드러내고 있다. 작품과 무관해 보이는 사건 전개 끝에 결말 부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종교관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는 개연성이 떨어져 이다.
In Republic Book1, Socrates and Thrasymachus are having argument about ‘what is justice’. This paper will critically evaluate the argument between two. Since this conversation takes long, I will narrow the focus of this paper to the part where they talked about ‘craft(skill)’. Even though I mostly agree with Socrates’ idea, there were some unclear parts about ‘craft’. So this essay will raise arguments about it and anticipate some possible counterarguments and defend my thesis against them.First of all, Socrates argued that “No kind of knowledge seeks or orders what is advantageous to itself, them, but what is advantageous to the weaker, which is subject to it. (342.d)” According to this idea, there is no deficiency or error in any craft, and craft is advantageous for the subject of craft, not for craft itself. Therefore, Socrates argues “no one in any position of rule, insofar as he is a ruler, seeks or orders what is advantageous to himself, but what is advantageous to his subjects. cteristic craftsman distinguishes the use of craft from craft itself. Craftsman is not a machine. Machine just conducts directly what is entered or ordered unless it is broken, but craftsman could not use the craft as craft itself. For example, there is no deficiency in craft of medicine itself. However, when craft is used by doctor, he might not use the craft at all because he does not want to. Medicine accidents are the example of misuse the craft. Even some doctors use the craft of medicine to kill someone whom he hates a lot. Here, there is no problem with the assumption that craft itself has no deficiency because I am talking about the use of craft. Before the use of craft, craft itself is perfect. However, at the moment craft is used by human, craft becomes deficient. The craft can 1) not be used at all or, not used fully by human, 2) misused 3) abused.1) First of all, craftsman might not use craft at all, or do not fully use it even though he has craft. It is because he does notbout craft of wage-earning, not the craft itself. Therefore they still have no motive to use craft for the subjects. In case of ruling, rulers will only concern on how to earn their wage.Then what are ‘wage’ and ‘craft of wage-earning’? To know about ‘craft of wage-earning’, we should know about ‘wage’ first. ‘Wage’ is consisted of two characteristic; it should be offered by someone or something, and it is benefit for the craftsman.First, if there is wage, there should be the giver. In the case of ruling, Socrates mentioned 3 kinds of wages; money, honor, and punishment. Money and honor is given by the subjects, the weaker, and punishment is given by the situation that ruled by someone worse if ruler does not rule. In the case of punishment, wage is earned by ruling itself. That is, craft of wage-earning means craft of ruling. That is why Socrates thought this case is the most desirable. However, in case of money, or honor, craft of earning wage does not mean the craft of ruling. Craftse he already earned much. That is, the effectiveness of wage depends on the situation. So does honor as a wage. This is also another reason why Socrates thought good people will be willing to rule because of compulsion or punishment. In this case, the effectiveness of wage does not change. If they rule, they get it, and if they do not, they could not achieve it.If all rulers move by compulsion, there will be no problem but in reality, most of rulers want money or honor for wage. That is why rulers are concerned about craft of wage earning and do not use craft for subjects at all or fully. Therefore, craft could not be used fully by craftsman. In the same vein, some rulers do not use craft of ruling fully, which is for the weaker.If so, rulers in Thrasymachus’s argument can be the typical example of rulers only concerned about craft of earning wage and want money or honor for their wage. However, his argument is only part of some bad rulers, not all rulers. That is why his definition oerror. This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with Socrates’ argument; “rulers in all cities infallible(339.c)”.However, Socrates will refute this argument by claiming that the aim of using craft is important. In this case, ruler misuses the craft not on purpose. He originally wanted to use craft which gives benefit to the weaker. That intention only matters to the definition of justice. Misuse of craft not in purpose is a matter of realization of justice, not the definition.Lastly, craftsman might abuse the craft. (Actually, abuse includes the misuse and the use in bad purpose, but as we already mentioned about misuse, let me use abuse as the use for a bad purpose in this paper.) However, this argument can be countered easily by the definition of craft by Socrates. According to Socrates, craft is for the subject. Then, can we abuse the craft that is advantageous for the subject? Even though the use of craft and craft is different, to use something badly, it should harm subject.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