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란 무엇인가[1] 소감문정의(正義)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단어이다. 주로 정치권을 더불어 어떠한 목적을 갖고 결집된 다수가 내세우는 대의명분에서 ‘정의’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만, 혹자가 ‘당신이 말하는 그 정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정의의 사전적 정의(定義)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고,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을 의미하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인지라 해석하기 참으로 막연하다. 가령, 일부 문화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명예살인의 경우,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구성원을 죽이는 행위를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 또한 정의일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정의에 대한 해석은 크게 상이할 수 있고, 그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하여 또는 하고 난 뒤에 ‘정당화를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는 허울 좋은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의라는 중요한 가치가 마냥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정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정의에 관하여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한 여러 사상과 사례를 이 책은 제시한다.이 책에서 먼저 접하는 정의 사상은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공리주의’이다. 이 사상의 핵심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서, 집단의 쾌락 총량을 끌어낼 수 있는 행동은 정의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집단에서 의견을 결정할 때 흔히 행해지는 다수결이나 선거 등이 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언제나 공리주의를 논할 때 재기되는 반론은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더 나아가 인권을 유린할 수 있는 사상이 어찌 정의라고 할 수 있겠냐는 반론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본인이 다수에 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쉽사리 단정짓지만, 막상 본인이 소수의 입장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자면 이는 분명히 공리주의의 한계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은 공리 추구라는 잣대를 적용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적잖이 있다. 고통과 쾌락같이 정량화할 수 없는 대상을 두고 저울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편리를 좇다 형성된 착각에 불과하다. 강도 3명이 어떤 사람의 돈을 빼앗아 분배하여 가졌을 때, 돈을 빼앗긴 사람의 고통과 강도 3명이 얻은 쾌락을 정량화하여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주장이든 추상적이고 모호할 뿐이다. 오히려 3명이 얻은 쾌락의 총량이 더 크니 정당한 행위라는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를 변호하기 위해 두 쾌락이 존재할 때 절대다수가 선호하는 쪽이 고급적인 쾌락이라고 제시하며 쾌락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방식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공리주의는 태생적으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부도덕적인 관념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리주의의 전반적인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무엇 하나를 결정하기 어려울 때, 보다 더 공리적인 근거를 갖는 주장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상술했던 선거나 다수결이 그러한 경우이며, 다소 불만은 나올지라도 대부분 이에 합의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다만, 이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의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으므로 최선의 방식은 될 수 없지만, 보완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구비하여 현실에 적용하기 용이한 수단 정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자유지상주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도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치로 추구할 수 있는 상태를 정의라고 칭한다. 제시되는 주요 논점 중 하나는 ‘부의 재분배’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고수익을 얻는 부유층에 높은 과세를 부여하고 이로 빈곤층을 돕는 행위를 약탈과 같은 부당한 것으로 취급한다. 정당한 노동으로 얻어낸 결과물의 일부를 빼앗는 것은 보수없는 노동을 강요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노예제의 연장선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한 생각을 쓰자면, 정의를 논한다기보다 다소 경제관점 측면의 발언일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 구조상 축적된 자본은 더 큰 자본을 불러모은다. 부유층에 높은 과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부의 편중화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은 자명하고,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그 격차를 도저히 줄일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노동자들은 의욕을 상실하며 불만이 축적되어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한 이유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타인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유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 폐를 끼치는 정도의 계산은 ‘직접적인 영향’만 고려할 뿐, ‘간접적인 영향’은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잦다. 책에 든 예시 중 미숙련 의사에게 싼 값의 비용을 지불하고 수술을 받고 싶어하는 고객의 수요도 존재하므로 의무적으로 면허를 취득해야 하는 것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부당하게 여긴다만, 그렇게 법을 개정했을 시, 기존에 받을 수 있던 면허 취득자의 서비스를 미취득자와 차별화한다는 명목으로 그 비용이 비싸질 수도 있고, ‘면허 미취득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것이 가성비가 좋다.‘라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어 의료 사고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경우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즉, 자유라는 가치는 분명히 삶의 행복 요소에 필수불가결하지만, 개인이 양보하지 않고 각자 추구하는 자유를 가감없이 사회에 적용하려 한다면 결국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그것이 겉보기엔 타인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깊게 파고들면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모두 고려하여 개인이 최선의 자유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 판단을 각자에 맡기어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 추구라는 것은 이데아적인 조건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이고, 이것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았을 시 오히려 잘못 이해하여 자유 추구라는 명목하에 온갖 기행이 벌어지는 참극이 일어날 수 있다. 결국 자유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좋은 가치이지만, 역시 정의라는 기준이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존 롤스가 제안한 ‘무지의 장막’이라는 사고 실험은 실로 매력적이었다. 어떠한 원칙을 결정하려 할 때, 아무리 우리가 평등과 공정을 추구하려 하더라도 결정 속에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은연 중에 가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무지의 장막 속에서는 장막을 들추고 나왔을 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일지 알 수 없으므로 특정 집단에 불이익을 가하는 합의는 피하게 된다. 이 장막 속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는 누구에게 편중되지 않은 보편적인 원칙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정의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데 꽤 적합해 보인다. 다만, 이 장막 속에서 우리가 보편적인 합의를 추구하는 이유는 행여 우리가 특정 집단을 박해하는 원칙을 마련했을 때 자신이 그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 원칙이 진정으로 옳고 그르다를 사고하기 보다 두려움에 기반한 정의 수립이 과연 이상적인 정의 결정 방식인 것이냐는 시원찮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경우를 이 사고 실험에 대입할 경우 장막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이 ‘지하실에 갇힌 아이 1명’이 될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므로, 마을 전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지하실에 아이 1명을 가두어두는 원칙을 수립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어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칸트는 자유라는 개념을 보다 까다롭게 정의했다. 어떠한 행동을 취할 선택의 자유를 전제하더라도, 그 선택이 욕구에 종속된다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사회적 관습에 따라 형성된 욕구가 아닌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이고, 이러한 자율은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뒤에 따라오는 특정한 목적에 초점을 두어 행하였다면 그것은 옳지 않고, 선한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옳은 일이라는 사고에 근거하여 행하였다면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행동없는 선보다는 위선이 낫다.’라는 문구를 기만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이 접근법이 꽤나 흥미로웠다. 칸트는 이성의 명령법을 조건이 붙는 ‘가언 명령’과 조건이 없는 ‘정언 명령’으로 구분하였고, 동기와 목적 없이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인 정언 명령을 따르면 누구나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하여 공통된 도덕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각 개인의 자율이 결국 공통된 도덕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나도 성선설에 기반한 사고인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