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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제정책(NEP)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변화
    러시아 혁명과 소비엣 연방의 형성 II: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러시아신경제정책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 변화Ⅰ. 머리말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등장시켰다. 제 2차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레닌이 의장으로, 트로츠키가 외무위원으로 하여 새로운 내각이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소비에트정부는 이전에 러시아혁명의 원인이 된 농민문제, 노동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러시아 혁명과 잦은 전쟁으로 확인된 후진성의 충격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소련의 공업화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공업화는 사회주의 사회의 물질적 토대와, 농민, 노동자들의 생계의 문제였고,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공업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공화국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었으며, 이 전에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과 공업화와 관련하여 많은 대립과 논쟁은 피할 수 없다. 초기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농민의 불만, 레닌의 신경제체제에 대한 네프파와 반네프파, 그리고 반네프파의 제거 이후 스탈린과 부하린의 노선갈등 등이 그 예이다.이러한 갈등 속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신경제체제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변화이다. 레닌의 신경제체제가 등장할 당시, 스탈린은 네프파로, 네프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반네프파가 제거되자, 네프파 내부에서 스탈린과 부하린의 노선갈등이 발생하는데, 이후 스탈린이 정권을 쟁취하고, 독재의 길을 걸으며 신경제체제를 중단하고 오히려 반네프파보다 급진적인 정책을 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소련의 공업화의 갈등과 그의 결과로 인한 정책은 단순히 정권 내부의 갈등이 아닌,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의 노선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닌이 이룩한 소비에트정권의 신경제정책에 대해 1928년부터 1953년까지 집권한 독재적 인물인 스탈린이 어떻게 태도를 취해왔는가는 소련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중 운영된 전시공산체제에서, 시장기제에 의존하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는 혼합경제로 전환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합법화된 상거래와 소규모의 사적 제조업, 사적 농업이 존재하나 주요 산업은 국영으로 운영된 경제이다.신경제정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농업 부분에서는 곡물 공출이 고정적 세금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사적 소매의 제한이 철폐되었고 이로 인해 농민은 잉여곡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업과 관련하여 국유화된 중소기업이 매각이나 대여가 되었으며, 대기업의 경유, 공공 소유를 유지하였으나 생산, 가격, 임금의 갈등은 시장의 원리를 따르게 되어있다.NEP의 시행 결과, 경제 전반에서 그 효과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21년-1925년 시기에 소련의 공업은 생산량 부분에서 1913년 혁명 전 수준을 회복한 것이다. 1931년 흉작으로 기근이 극심했으나, 다음 해인 1922년은 농업 생산이 급속히 회복하며, 1926년에는 전전수준을 회복하였고, 1920년 전전의 5분의 1수준이었던 공업 생산도 1925년 말 전전 수준이 근접하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이 경제성장에 있어 긍정적 효과를 보았으나, 몇가지의 부정적 요소 역시 존재하였다. 첫번째로, 생산연합 및 협동 조합인 트러스트가 경제의 이익을 쫓아 가격을 급격히 올렸으며, 두번째, 사회에서는 급격하게 계급 분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NEP에 대한 합리적 효과보다, 투기, 사기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에 노동자의 공산당 지지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적대감을 가지는 농민들이 뚜렷해졌다. NEP의 성공은 한 측면만 본다면, 경제적 성공에, 공산화 성공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다원주의의 가능성이 생겼고, 반혁명조직의 우려 역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NEP에 대한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Ⅲ 신경제정책을 둘러싼, 스탈린과 트로츠키스탈린과 트로츠키의 투쟁은 신경제정책을 둘러싸고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들의 투쟁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계급은 소수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노동계급과 농민이 동맹을 유지하고 함께 농업, 중공업, 소비재 공업 등의 발전을 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레닌이 NEP에서 말한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 아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추구하는 것과 뜻을 같이한다. 다시 말하면,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방법으로 1국 사회주의를 주장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부하린의 농공병행 발전형, NEP를 지지한 것이다.신경제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입장스탈린과 부하린에 대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이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NEP는 1921년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부하린의 핵심적인 자본축적의 문제를 회피하며, 공업화의 재원이 농민으로부터 끌어들이며, 노농의 완전한 화합이 성취된 다는 것은 환상에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 NEP파인 이들은 당의 공업화의 가속화를 위해 농민의 희생이 바탕되어야 한다고 급진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트로츠키의 이론은 크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시초 축적에 의한 공화론, 그리고 국제혁명론이다. 전자의 경우 신경제정책이 점진적이고 농공동맹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러시아의 경제가 후진적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국가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농촌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의 수탈로 공업화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후자는 신경제 정책이 전제한 신중한 대외정책이나, 스탈린이 제시한 일국사회주의론을 지양하며,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조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핀 것은 소련 내부의 자원이나 사회적 구성, 그리고 문화 수준만으론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명백히 드러난 것은 1923년 4월에 열린 제 12차 당대회이다. 트로츠키는 제 12차 당대회에서 공업문제의 원인을 중앙계획의 부재로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업에 최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하며, 그 재원은 농촌의 과세 증 위한 곡물 가격의 인하로 농촌에서는 필요한 소비재공업이 축소되었고, 공급이 감소되자, 잉여가 충분하지 않으며, 농민은 곡물을 내놓지 않았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의 결과는 처참하였다. 농민들의 수매 거부로 국가기관의 수매는 목표량을 채워지 못했고, 도시에서는 식량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부하린은 공업화의 목표를 낮추고, 곡물값을 인상하길 요구하였으나, 묵살될 뿐이었다.스탈린은 NEP에 대해 공산독재를 시작한 이후 포기하기 시작하였고, 부하린의 온건노선에 대해 승리하면서 1930년대 말에 공식적으로 NEP를 포기하고 이전의 좌파보다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즉, NEP의 해체는 스탈린의 노선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곡물위기라는 경제적 위기에서 촉발된 것만은 아니며, 스탈린의 권력추구와 이에 따른 이념의 지향이 복합된 것으로 평가된다.스탈린 경제체제와 그 결과스탈린체제의 경제 체제의 핵심은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집단화이다. 반NEP파의 급진적인 공업화와 레닌이 주장한 집단농장을 함께 주장하는 듯해 보이지만, 그 실상을 지켜보면, 이 시기의 스탈린의 경제 정책은 반NEP파에 가까웠다. 즉, 스탈린은 노농동맹을 깨고, 농업, 농민의 희생으로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려고 한 것이다.스탈린이 집권하고 1929년부터 1941년까지 5개년 계획이 실시된다. 이는 중공업, 토목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졌고, 이외에도 새로운 공업들이 탄생되기도 한다. 또한 철도의 노선은 확장되는 등 소련에서의 엄청난 생산력 증대를 가져온 시기가 되었다. 공업의 평균성장률은 10프로를 넘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이 강력한 공업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스탈린이 주장한 농업집단화는, 레닌시기, 볼셰비키가 주장한 집단농장과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집단농장은 비합리적인 소규모 생산을 집단농장을 통해 대규모 기계영농으로 전환하여,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과의 격차를 해소한다는 일종의 장기 목표였다. 앞서 스탈린의 신경제정책 포기과정에서도 다뤘으나, 볼셰비키의 이러한 정책 공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 범죄, 소련사회의 폐쇄성을 가져오게 된다.Ⅴ 맺음말대규모의 전쟁 참여와 러시아혁명이라는 커다란 사건 이후의 소련의 사회는 자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보다 서구에 비해 뒤쳐졌다고 여겨지는 근대화를 조속히 이룩하여야 했고,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로서, 사회주의의 방향성을 다잡아야 했다. 이 두가지의 해결과제가 충돌하며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열리고 난 이후에도, 러시아 내부에서는 많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혁명 이후, 급속한 공업화은 많은 이들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레닌은 이른바 신경제정책을 내걸었다. 신경제정책은 노동동맹 아래의 점진적인 공업화를 이룩하자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이 정책을 둘러싸고 초기에는 NEP파, 반NEP파의 대립, 반 NEP파 제거 이후에도, NEP파 내부에서의 노선갈등이 발생했음을 본 고에서 다뤘고, 그 중심에는 스탈린이 있었다.단편적으로 보면 스탈린이 신경제정책에 대해 우유부단한 인물인가? 로 보여질 수도 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 아래에서 NEP파에 입장에 섰고, ‘농공병행론’ 이라는 부하린의 주장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와 극명한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트로츠키가 제거된 이후에는 경제상황이 신경제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며, 스탈린은 빠르게 부하린과 대립하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의 스탈린의 정책은 신경제정책을 포기하고, 트로츠키보다 더 급진적인 스탈린체제를 이어간다.그러나 스탈린의 이러한 태도변화를 살펴보면, 스탈린의 일관된 몇 가지 사항을 찾을 수 있었다. 첫번째, 1국 사회주의라는 기조 아래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자체 역량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 것. 두번째, 서구가 몇 백년간 이룩한 근대화를 몇 십년안에 따라잡아, 후진성을 극복할 것. 세번째, 소비에트 연방 내에 권력을 쟁취할 것. 이다. 스탈린이 소련 자체의 향상을 우선으로 하였는가, 본인의 권력투쟁을 우선으로 하였는가의 개인적 심리의 문제는 본 고에서 다루지 않는다.276
    인문/어학| 2021.12.23| 10페이지| 2,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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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근대사, 로베스피에르의 자유, 프랑스혁명의 가치
    서양근대사 소논문로베스피에르의 ‘자유’,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높이다.Ⅰ. 서론19세기 ‘프랑스가 기침을 하면 전 유럽이 감기에 걸린다’ 라는 속설이 있다. 그만큼 18세기 말부터 약 1세기동안 프랑스는 혁명의 수도였다. 프랑스혁명이 오늘날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프랑스혁명이 이룩한 성과만 봐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진정한 근대의 전과 후를 가른 분수령이었다. 프랑스혁명이 근대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혁명을 통해 근대의 구체성이 획득되었다. 이른바 인권선언, 기본권, 자유, 혁명, 주권 등 이러한 것은 근대세계의 본질적 요소였으며 프랑스혁명이 낳은 평등, 자유, 인권의 메시지는 오늘날에 여전히 그 가치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랑스혁명에서 말하는 시민혁명은 유산계급 즉, 부르주아의 혁명이었다. 자유, 평등, 인권을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며 유산 계급의 이익 중심이었다. 물론 전제왕정을 타도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신분적 불평등을 타파했다는 점에 있어 그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짧은 시간안에 완벽한 혁명을 이뤄내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한다.그러나 프랑스혁명에서 부르주아적 혁명이 아닌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내걸며 색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이 있다. 바로 로베스피에르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인물로 프랑스혁명의 ‘명’과 공포정치의 ‘암’이라는 양 면을 가지고 있다. 공포정치라는 그의 ‘암’은 그가 내건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며 그의 사상들 역시 프랑스혁명에서 잊혀 졌다. 그러나 필자는 로베스피에르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에 대한 사상은 프랑스혁명 기간내에 제시된 어떤 인권선언과 헌법보다 가장 민주적이며 오늘날의 인권과 가깝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프랑스혁명은 인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1789년의 인권선언만을 강조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1793년의 인권선언서도 고대 국가의 직접민주주의를 언급한 것은 루소의 고대 국가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루소는 근대 시민사회를 비판하며 유럽의 근대 정치가들은 미풍양속과 시민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하다고 강조하였다.루소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단순히 사적 소유나, 외부의 방해 없이 행할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고대의 공화주의적, 민주적 시민의 자유를 의미하였는데 정부는 공공의 업무를 관장할 뿐, 정부를 재산 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루소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사적 개인이나 자연 상태의 자유로운 개인도 아닌 본성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에서는 근대 부르주아적 질서 속 살아가는 개인은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존재하며 공적시민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스파르타와 로마 공화정의 시민들의 덕성과 미덕을 본받을 것을 호소하였다.루소가 고대 국가를 이상사회로 보는 것은 그의 덕의 사상과도 관련있다. 루소는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악덕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스파르타 사회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덕은 무엇인가? 루소의 덕은 이나 , 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주제이다. 에서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았다. 공화주의자 파브리키우스는 루소의 덕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파브리키우스가 말한 덕은 로마시민들의 애국심이었다.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덕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는 덕,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군사적인 덕이었다. 루소는 ‘덕’의 힘을 믿으며, 루소의 전 저작에서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로 돌아가자’라고 말한다. 다시 루소의 고대 국가의 동경을 살펴보면, 루소가 말한 이상사회인 스파르타는 자연적이고 반문명적이며 전투적이다. 스파르타의 덕은 군사적이며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루소는 세상의 덕은 모든 악덕과 싸우며 도시나 인공, 문명, 상업은 악덕이고, 자연, 절제, 농업, 문화는 덕이라고 설명한다. 루소가 이렇게 강조하는 ‘덕’은 입법가의 존재로 실현할 수 있다 자유에 대해서는 명백한 범죄사실이 있지 않다면 개인의 안전을 침해하는 가택수색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는 일반시민이 가택수색을 당하는 순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시민들의 신체의 자유를 위해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방어권을 옹호하였다. 앙리 4세 지구의 치안판사가 세명의 의원을 무단으로 체포하고 심문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영국을 예시로 들며, 영국에서는 치안관이 자신의 자유를 침범하면 치안관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는 법이 있다고 말한다. 영국의 이 법은 인간이 자신의 안전을 보존하기 위한 자연권의 결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법을 설명하며 인신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인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법으로 시민 스스로 치안관을 선출하게 하며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시민들이 자신의 자유를 한 사람의 의지에 종속될 때는, 최소한 그들이 치안관을 선출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만, 치안관은 최소한의 권한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헌의회가 헌병대 장교에서 형사재판의 권한을 부여할 때에도 로베스피에르는 헌병대 장교는 혐의자 수색의 법 집행자일 뿐,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헌병대가 다른 기능을 가지면 개인의 안전은 위협되며, 평화로운 시민의 자유를 해칠 것이기에 허락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로베스피에르의 자유는 그 어떤 자유보다 생존의 자유가 우선이었다. 사회의 이익을 요구하는 치안의 조치는 재산권의 침해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지며 시민들의 생계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사회의 권리이고 의무라고 설명한다. 한 예로 거래의 자유에서 밀과 면화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나, 도매상이 사치를 위해 혹은 높은 가격에 되팔기 위해 보관할 수 있으나, 기근으로 죽어가는 시민 곁에 밀 포대를 쌓아둘 권리가 없다며, 식량에 대한 투기를 자유 혹은 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로베스피에르의 이러한 사적 자유는 1789년 인권선언의 기본정신이었으며, 그에게 법은 인간의 능력 발전을 보장하는 것일 뿐 구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이른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주장할 의무에 의해 제한받는다.제 9항 위와 같은 원칙을 위반한 거래나 재산의 점유는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며 불법이다.제 14항 주권은 민중에게 있다. 정부는 민중의 산물이고 민중의 재산이며, 공무원은 민중을 위해 일한다. 민중이 원한다면 정부를 바꿀 수 있고, 대리인을 해산시킬 수 있다.제 17항 법은 사회에 해가 되는 것만 금지시킬 수 있고, 사회에 유용한 것만 명령할 수 있다.제 22항 모든 시민은 민중의 대리인을 선임하고 법 제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가진다.제 29항 압제에 대한 저항은 인간과 시민에게 부여된 또 다른 권리의 부산물이다.우선 주권, 민주주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 1789년 인권선언과 1793년 인권선언은 달랐다. 1789년 인권선언 제 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라는 규정과 달리 1793년 인권선언에서는 인민의 주권을 선언하였다. 1793년 인권선언 14조에서 인민은 주권자이며 정부는 시민의 소산이고, 인민의 소유물이며 공직자는 인민의 수임자로 규정한다.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의 차이는 정부의 권위와 국민의 자발적 권력의 구별에 있다. 1789년 인권선언에서는 인민의 주권보다 국가의 권리가 앞서 있다. 주권자는 오직 국가기구에 구성된 국민인 것이다. 반면 1793년 선언은 인민의 자발적인 정치권력과 정치의사의 형성을 보장한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표명할 권리를 가진다. 로베스피에르는 국가에서 인민의 존재를 규범질서의 중심으로 삼았다. 특히 1793년 선언 제 19조, 2문에서는 인민은 선량하고 집권자는 부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제도는 사악한 제도라고 말한다.주권에 대한 차이는 대표제에 대한 차이를 가져온다. 1789년 인권선언은 제한적 간접선거, 유삱 중심의 제한적 대표제를 염두한 것인 반면, 1793년 인권선언에서는 보통선거, 보편적 선거를 선언하였다. 1793년 선언의 제 20조에서는 인민의 어느 일부분도 인민전체의 권력을 하는 감정을 갖는다. “로베스피에르이 공포정치는 탐욕스러운 정치가의 결과로 보기 보단, 절대적 자유에 대한 신봉과 루소의 덕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합쳐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와 덕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로베스피에르가 말한 덕이 무엇이기에 공포정치로 나아간 것일까?로베스피에르의 덕은 루소의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주의적 덕성에 열광한 것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스파르타인과 로마인들이 자유인이었고, 덕이 있는 모범이었으며 이상적 시민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국민 공회의 회의에서 민주주의적 정부나 인민의 정부의 기본원리는 덕이라고 규정하였다. 덕이야 말로 그리스와 로마의 원천이며 프랑스가 앞으로 추구할 원칙이라고 주장한다.덕의 정치란 정치에 공적 도덕을 적용한 것을 말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정과 전제정을 덕의 적용에 따라 구분하였다. 따라서 덕은 공화국의 본질이며, 도덕은 전제정의 기초이었다. 덕을 고양하면 전제정의 모든 악덕이나 어리석음을 공화정의 덕에 대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공적도덕이란 윤리적 도덕이 아닌, 인민의 권리와 의무인 공공의 이성이며, 공화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구성하는 애국심과 평등을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공적 도덕은 평등과 정의를 가지고 있는 공화주의 적 권리와 의무인 것이다.로베스피에르가 덕의 정치에 집한 것은 루소의 덕의 정치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는 독재는 자신을 예찬하고 자유를 끔직스러운 것으로 만들며, 동료 시민과 자유를 공유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고 비판하며 입법자들의 자유의 마지막 보루로서 공적 도덕을 주장하였다. 즉 그가 반복적으로 주장한 절대적 자유는 공적 도덕을 전제로 한 것이다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국가는 주권자 인민이 자신의 법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고, 없는 것을 정하는 것이며,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법안) 대리인을 통해 하는 국가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의 민주주의 본질은 인민주권에 있으며 이러한 민주정은 오직 덕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html
    인문/어학| 2021.12.23| 15페이지| 2,0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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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과 수업지도안 약안(명의 발전과 국제질서재편)
    역사과 수업지도안단원명2.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변화3)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와 국제관계의 다원화(4) 명의 발전과 국제 질서의 재편주제14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지도교사역사과 본시 수업 지도안대상차시4/4장소온라인지도교생대단원2.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변화중단원3.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와 국제관계의 다변화소단원4. 명의 발전과 국제 질서의 재편교과서 p79-80성취기준조공, 책봉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다양한 외교 형식이 끼친 영향과 의미를 상호적 관점에서 해석한다.학습목표1. 원의 쇠퇴 이후 변화된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 특징을 분석할 수 있다.2. 15세기 전반 동아시아 세계가 명 중심의 조공, 책봉관계로 성립되었음을 설명할 수 있다.3. 명, 조선, 일본의 각 국간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학습단계학습과정교수-학습활동교사시간비고도입시작준비(4분)전시학습- 전시 학습 상기*몽골제국의 지도를 살펴보며, 대외관계를 간단하게 언급동기유발- 그림 를 제시하고 기린이 명나라 그림에 나타난 이유를 정화의 항해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발문하여 호기심을 자극한다.*명나라에 없던 기린이 명나라그림이 나타난 이유를 정화의 항해를 두고 설명하며, 정화가 항해를 나선 이유와 왜 방문한 나라들이 명나라에 공물을 받쳤을까 발문을 던진다.학습목표제시- 학습목표를 제시한다.전개수업진행안내- 이번 차시 수업 구성을 간단하게 안내*원의 멸망과 명의 발전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14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해 볼 것을 설명*제공된 학습지에 빈칸을 채울 것을 지도(2분)수업진행(강의식)- 14세기 이후 원나라의 쇠퇴 원인을 설명- 원의 쇠퇴 이후, 명, 조선, 일본의 정치적 변화를 설명- 명을 중심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조공책봉관계를 설명- 여러분이 명, 조선, 일본의 사신이 되어, 타 국가의 황제 혹은 왕에게 서신을 보내봅시다.
    교육학| 2021.12.23| 3페이지| 1,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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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7일 일요일
AI 챗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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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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