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글쓰기 김** 교수님비평문 쓰기다음 웹툰 : 과연 그들 각자의 욕망은 무사히 완결될 것인가?****과3221**** 나**은 세 주인공의 욕망에 관한 웹툰이다.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가족에 의해 날개가 꺾인 뮤지컬 배우 지망생 ‘은미결’과 그런 그를 알아본 잡지 의 에디터&기자 ‘원유진’, 그리고 전 국민이 사랑하는 천재 스릴러 소설가 ‘선은호’. 유진과 미결은 인터뷰로 안면을 튼 상태에서, 우연히 재회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은호는 유진이 동경하는 작가로, 그 흔한 인터뷰도 하지 않으며 절대 본인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 신비주의이다. 하지만 유진이 쓴 메일이 은호의 흥미를 끌면서 유진은 은호와의 인터뷰에 성공한다. 또 그동안의 ‘선은호 스타일 주인공’과는 ‘완전히 다른 주인공’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편집자의 말을 귀담고 있던 은호는 유진이 인터뷰 도중 언급한 미결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접점이 없어 보였던 셋이 진하게 엮이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여기서 첫 번째, 선은호의 욕망은 ‘신작의 완성’이다. 구체적으로는 ‘신작을 만족스럽게 끝맺은 다음 자살하는(3화)’ 것이 그의 목표다. 선은호는 굉장히 신선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YLLY의 편집장이 유진에게 ‘선은호 작가랑 잤지(21화)?’라며 추궁하는 장면과 투자자가 ‘(선 작가님께)이 말도 전해주십시오. 남자라면 더 큰 야망과 포부가 있는 게 당연하고, …중략… 훌륭한 필력과 재력을 가진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대중은 없을 거라고(52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당연히 남성이라고 여긴다. 중성적인 이름과 문체, 잔인한 묘사와 군인과 관련된 내용 때문이다. 작가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무례함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성과 관련된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이들을 시원하게 비웃는다.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반성하고 내려놓게 한다.선은호는 동시에 한없이 냉혹하고 무서운 ‘악역’이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서늘한 눈빛을 지닌 그는 독설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언제나 냉소적이며 비관적이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예측하며 교묘한 가스라이팅도 서슴지 않는다. 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사람을 도구로 여기고 조종하려 하는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미결 구금 사건(54~60화)’이다. 선은호는 신작 주인공의 모델인 은미결에게 관심을 보이며, 트라우마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미결의 노래를 들으려고 일부러 유진에게 접근하여 점차 미결에게 다가간다. 끝내는 미결을 속여 자신의 집에 데려온 뒤, 수면제를 먹여 가짜 피와 동물 내장, 더미가 가득한 방에 가두고, 그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노래할 것을 강요한다. 미결은 울부짖으며 거부하다가, 무대에서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르고 기절한다. 이는 명백한 범법 행위이며, 윤리적으로도 지탄받을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은호는 이를 알게 된 유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몇 년을 못 한 노래를 했잖니, 결과적으로(60화).’ 타인의 감정을 쉬이 이해하지 못하고, 심각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사다.두 번째, 원유진의 욕망은 ‘은미결’과 ‘선은호’다. 유진은 자신이 알아본 원석인 미결을 사랑한다. 둘은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은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진은 미결을 사랑하는 동시에 선은호와의 관계를 욕망한다. 처음에는 동경이었다. 유진은 은호의 작품을 읽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광팬이고, 은호가 인정할 정도로 그의 소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은호와의 인터뷰가 성사된 날, 유진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인터뷰가 성사되고, 연락처를 공유하고, 은호의 집을 방문하고, 과거 이야기를 듣고, 은호와 키스하고…. 점점 둘은 가까워졌다. 유진의 꿈에 은호가 나오기도 했다. 유진은 자신이 이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과 이렇게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에 우월감과 만족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든 독자가 이해했다. ‘은미결 구금 사건(54~60화)’ 직후 원유진이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한 마디 상의도 없이.’‘어떻게, 작가님이 나를…. 따돌려가면서…!!’ ‘작가님은 씨발 나한테 이러면 안됐어요.’유진은 선은호가 은미결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선 작가님께 가장 특별한 존재(59화)’가 아니라 이용당한 것뿐, 선은호에게는 은미결이 더 필요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걸까? 유진의 대사를 통해 짐작해보았을 때, 후자가 더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처음부터 절대 선(善)으로만 보였던 유진이 은호를 생각보다 더 깊게 욕망했으며, 이미 미결을 배신했었다는 사실(선 작가와 키스했으며 거의 성관계 직전까지 감)은 큰 충격이었다. 유진은 따뜻한 말을 할 줄 알고 항상 미소 짓는 캐릭터였다. 여태 숱하게 봐왔던 영화?드라마?웹툰?소설에서 봐왔던 여주인공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자신의 짙은 욕망을 드러낼 때는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그 모습은 그 누구보다 입체적이다. 작가는 ‘전형적인 착하고 따뜻한 여주인공’이라는 클리셰를 꼬집어 비틂으로써 작품에 재미와 독특함을 더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선은호보다 더 귀추가 주목되는 캐릭터이다.세 번째, 은미결의 욕망은 ‘무대’와 ‘원유진’ 그리고 ‘선은호’이다. 은미결은 ‘그때(처음으로 무대에서 커튼콜을 했을 때)의 벅찬 감정이…. 내 인생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되지 않아요(48화).’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대에 대한 욕망이 큰 캐릭터다. 하지만 미결의 친동생 ‘은한결’이 미결을 사칭하며 클럽에서 문란한 행동을 일삼았고,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서 트라우마를 얻고 뮤지컬 배우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했던 그를 다시 웃게 한 건 유진이었다. ‘무명 앙상블 배우였던 자신을 알아준 고마운 분’이었던 유진과 재회하면서 사랑에 빠졌다. 유진과 함께 살면서 그는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는 기분을 처음 알았다(29화). 그는 현재 자신보다 유진을 우선시하며 매우 헌신적으로 유진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예술가 선은호. 그의 상처를 헤집고 불편하게 만드는 은호지만, 무시할 수가 없다. 은호와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이 튀어나온다. 마침내 은호는 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미결의 노래를 끌어낸다. 그는 기절 이후 잠든 상태이다. 깨어난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언뜻 보였던 그의 ‘그답지 않은’ 모습들은 무엇이었을까?
20**년도 *학기 기말시험 대체레포트학과(전공)****전공학번3221****성명나**제출기한1. 일본의 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동북공정)의 공통점을 서술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논하시오(A4용지 1페이지)(10점) - 레포트1. 일본의 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동북공정)의 공통점일본의 교과서왜곡의 중심에는 우익 세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우익은 과거의 전쟁과 침략의 책임을 전전 세대에게만 전가하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주변 나라들의 발전과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며 미화하고 있다. 일본 우익 세력은 일본의 언론, 정치, 경제 등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있는데, 전후의 역사 교육이 일본인의 문화, 전통을 잊게 하고 일본인에게 대대로 사죄해야 하는 운명을 걸머지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전후의 역사 교육에 맞서 2001년 후소샤 출판사에서 간행한 『새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이 책에서는 한국사를 타율적이고 정체된 야만적인 역사로 왜곡하였고, 일본의 한국 병합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일본의 지배는 선정이었다고 평가하였다.중국의 역사왜곡의 중심에는 동북공정을 향한 야욕이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에서 2002년부터 추진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에 관련된 연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중국의 동북지역에 위치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후에 혹시라도 한반도가 통일될 때 영토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나라 이후 중국에서 편찬된 역사서에는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은 1998년에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는 중국에서 편찬된 과거의 역사서마저 부정하는 심각한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이와 같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의 원인이자 공통점은 ‘과도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2. 우리의 대응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현재 한국 정부는 이하기 위해 고구려연구재단의 후신인 동북아 역사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다루기 위하여 『동아시아사』라는 고등학교 교과서가 2012년 편찬되기도 하였다. 직접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며 시정을 촉구하였다.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 우선 한반도의 역사인 만큼 남북한이 공동으로 역사를 연구하여 대처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므로 정부 차원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대들을 위한 올바른 역사 교육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동북공정 시도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의 정치?외교적인 강력한 항의와 대처가 따라야 할 것이다.2. 중?러?일의 관점에서 바라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공통점을 분석하고, 이 두 전쟁과 한반도의 이해(利害)관계에 대해 서술하시오.(A4용지 2페이지)(20점) - 기말시험대체레포트1. 중?러?일의 관점에서 바라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공통점청일전쟁의 배경에는 톈진조약이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1884년에도 조선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나라 군사가 이를 3일 만에 진압하였다. 이후 청·일 양국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의 철수를 약속하고 이후 조선에 출병할 때는 알리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였다. 위기에 처한 조선 정부는 또다시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청나라가 파병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동시에 조선에 파병함으로써 세력 만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도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내정을 간섭하는 등 지배권 확보를 도모하였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였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고, 아시아의 패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을 말한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또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나 미국과 대립이 시작되었다.중?러?일의 관점에서 바라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승자가 일본이다. 둘째, 한반도의 영토에서 일어난 우리나라가 참여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셋째, 한반도에서의 이득(주도권, 경제적 이득 등)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2. 두 전쟁과 한반도의 이해관계두 전쟁은 한반도에 크게 이득이 될 것이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나라가 참여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전쟁과 한반도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서술하겠다.1) 청일전쟁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과 전통적인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간섭과 영향력은 매우 증가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였는데,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게 된다. 이에 고종과 명성 황후가 미국 및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고 일본을 견제하자, 일본은 을미사변(1895)을 일으킨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게 개혁을 강요하여 제1차, 제2차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을미개혁은 아관파천으로 개혁 도중 중단된다.2) 러일전쟁러일전쟁 당시 즈음 대한 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사실상 무시되었다. 일본은 전쟁이 시작된 후, 한일 의정서(체결해 한반도 내에서 군사적 요충지 사용권을 확보하였다. 또 제1차 한일 협약(1904. 8.)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와 정치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7.)과 제2차 영일 동맹(1905. 8.)을 통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열강의 인정을 받게 된다. 러일 전쟁은 포츠머스 조약(1905. 9.)을 체결하면서 끝나게 되는데, 이때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정치?군사?경제 등에 관한 특수 권익)을 갖게 된다.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1905년 11월에는 일본이 대한 제국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 인해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게 된다. 이후로는 한일 신협약(1907. 7.)과 한국 병합 조약(1910. 8.)을 맺어 대한 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당하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대한 제국)에 대한 야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하였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3. 과거의 한?미관계의 이중성을 파헤치고, 미래의 한?미관계의 긍정적인 대안을 찾아보시오(A4용지 2페이지)(20점) - 기말시험대체레포트1. 과거 한?미관계의 이중성1) 1945년 이전한?미관계는 1853년 미국의 포경선이 부산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고, 1882년 한국은 서양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미국과 수교 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1883년에는 미국의 한성(서울)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한국은 미국과 조약을 맺은 이후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수교국인 미국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미국 외교관의 태도가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미관계를 특징짓는 ‘이중성’의 큰 원인이 되었다. 한국은 외교관과 정책 고문, 선교사, 무역업자 등에 의해 미국에게 기대감을 갖고 우방으로 간주했으나, 미국의 공식 입장과 정책은 한국에게 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승인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며 한국에서 최초로 공관을 철수하였다.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고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한국에 대해 무관심 및 냉담으로 일관했다. 이에 많은 한국인이 미국에 반감을 품었으나 한국 내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미국 선교사들은 구한말부터 의료와 교육 면에서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일조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6년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스크랜턴은 오늘날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창설했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이 문을 닫자 허치슨은 이를 이어받아 영어 학교를 개설하며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한국인에게 근대식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였다.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변신한 알렌은 1885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였고, 그곳에서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그는 1886년 한국 최초의 국립 의학교도 창설하여 한국의 의학 교육 및 의료 시설의 근대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기까지 미국 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단 한 번도 지원하지 않았다.2) 1945년 이후한국의 해방과 그 이후에 미국은 한국에 관련하여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나섰다. 실제로 한국의 해방에 미국은 크게 기여하였으나, 이와 동시에 남북 분단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남한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UN과 서양 국가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임을 선언했고, 그렇게 한국의 일시적 분단은 영구적 분단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는 ‘애치슨 라인’을 선언하였고, 5개월 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군을 포함한 많은 UN군이 한국에 파병되었다. 전쟁은 결국 휴전으로 마무리되었고, 한되었다.
20**년도 *학기 중간시험 대체 레포트학과(전공)****전공학번3221****성명나**제출일시문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민족이 극복해 냈던 주변국가(민족)와의 대립과 항쟁을 개관하여 정리하시오"(40점)우리 한민족은 자랑스러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며, 지금도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런 위기나 갈등·대립·항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위기가 닥쳐왔었고, 그때마다 우리 민족은 특유의 지혜와 노력으로 극복하여 성장해왔다. 따라서 를 제목으로 하고 4개 목차로 구분하여 본 레포트를 서술하려고 한다.1. 선사시대~남북국시대(1) 선사시대우선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거론되는 ‘고조선’에 대하여 서술하려고 한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널리 알려진 환웅과 웅녀, 단군이 등장하는 ‘단군신화’이다. 기원전 3세기경,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연의 침략으로 인해 세력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면서 철기 문화를 수용하고, 중계무역으로 다시 부흥한다. 그렇게 고조선은 한반도의 서북부, 중국의 동북부 일부를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으나, 기원전 108년 중국의 한 무제의 침략으로 인해 멸망하였다. 이후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그리고 삼한과 같은 많은 국가의 흥망성쇄가 이어졌으며 마침내 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가 도래하였다.(2) 삼국시대삼국시대의 한민족의 위기 극복 사례에서 살수대첩과 안시성 전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한 이후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쳐왔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에 복속을 강요하였고,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하자 수나라의 문제가 고구려를 침입했으나 실패하였다. 수 양제가 재침입을 시도하였지만,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이 612년 살수 지역에서 뛰어난 묘책으로 수의 군대를 격퇴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를 살수 대첩이라고 일컫는다. 안시성 전투는 당나라와의 전쟁인데, 건국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일명 남북국시대가 열리게 된다.통일신라는 왕권 약화와 부패, 농민 봉기와 같은 국가적 혼란 속에서 지방의 호족 세력의 성장으로 인하여 후삼국으로 나뉘게 된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인하여 926년 멸망하였으며, 발해 유민들은 고려에 이주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된다.2. 고려시대~조선시대(1) 고려시대개성의 호족 출신인 왕건이 그는 신하들의 추대로 인해 왕위에 올라 918년 국호를 고려로 공표하고, 개성으로 천도하면서부터 고려시대가 시작되었다.고려 전기, 고려는 거란으로부터 3차에 걸친 침입을 당하게 된다. 1차 침입은 거란의 장수 소손녕에 의해 벌어졌으며, 고려의 충신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하여 오히려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였다. 2차 침입에서는 양규 등이 활약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었으며,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 장군이 크게 활약한 1019년의 귀주 대첩-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을 정도로 고려가 대승하였다-을 통하여 거란에 맞섰다. 이후 고려는 압록강에서부터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수비를 보완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여 침입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이후 고려 중후기에는 몽골과의 항쟁이 이어졌다. 몽골이 고려에게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1231년 몽골 사신 피살 사건을 구실로 몽골은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에 최우 장군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으며, 김윤후 장군 등이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등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고려의 지배층이었던 무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고려 정부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게 된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배중손, 김통정 등 일명 삼별초는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도와 제주도를 근거지 삼아 항쟁을 이어나갔으나 결국 진압되었다.삼별초 진압 이후 원의 내정 간섭은 점점 심해졌다. 고려의 지위가 격하되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고 영토를 화복하였으며, 관제를 복구하고, 몽골풍을 금지하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노력을 이어나갔다.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은 고려에 드리워진 멸망의 그림자는 떨치지 못하였다. 고려는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멸망하였고, 마침내 1392년 조선이 건국된다.(2) 조선시대조선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고려 장군 ‘이성계(태조)’를 중심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고려를 멸하고 새로 세운 국가로, 고(古)조선의 원래 이름(조선)을 그대로 가져와 국호로 정하였다. 조선은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 이렇게 몇 대에 걸쳐 체제를 정비하며 성장하였다.그러나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엄청난 전쟁, 임진왜란의 발발(1592)로 인하여 견고했던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조선과의 한정된 교역으로 시작된 일본의 불만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외 침략 정책이 있다. 전쟁 초기 관군(조선군)의 잇따른 패배로 결국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게 되면서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조선의 수군과 곽재우, 유정 등의 의병의 활약으로 왜군에 대항하였다. 수군에서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의 명장이라 불리우는 ‘충무공 이순신’을 들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엄청난 묘책과 전략을 통하여 남해 제해권을 장악해 전라도의 곡창 지대를 지켜내었으며, 황해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려 한 왜군의 작전을 간파하여 저지하였다. 이후 관군의 재정비와 명의 지원군이 도착함에 따라 연합군의 반격을 통하여 평양성을 되찾고, 왜군을 경상도의 해안까지 밀어내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됐으나 결렬되고, 이후 왜군이 재침입하였다(정유재란, 1597년). 이때 직산 전투와 명량 해전에서 왜군을 격퇴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철수하였다. 명량 해전, 즉 명량 대첩 당시 이순신은 13척이라는 터무니없는 숫자의 배를 이끌고 스스로 ‘천행이었다’라고 표현할 만큼의 엄청난 이 고조된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이를 구실로 프랑스는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의 항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프랑스는 강화도의 중요한 문화재인 의궤를 포함한 외규장각 도서와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고 철수하였다.프랑스에 이어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미국은 함대를 보내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며,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이에 조선의 어재연 부대가 항전하여 미군은 철수하였고, 흥선 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해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조선은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1876),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2),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 농민 운동 그리고 청일 전쟁 등으로 인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갑오·을미개혁을 거쳐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3. 대한제국~일제강점기(1) 대한제국1897년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이후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2) 일제의 국권 침탈한반도를 둘러싼 러·일 대립이 격화되고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하면서, 일본의 기습 선제 공격으로 러일 전쟁이 시작된다. 이로 인해 조선은 한일 의정서(1904. 2.), 제1차 한일 협약(1904. 8.)을 동의해야 했으며, 이는 일제의 국권 침탈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러일 전쟁 종결 이후 일본은 무력을 동원해 위협하며 강제적, 불법적으로 을사늑약(1905. 11.)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민영환 등이 자결하였으며,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게재하였고, 나철 등 을사오적 암살 시도, 스티븐스 저격(1908),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1909)과 같은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가 이어졌다. 특히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이 주도한 을사의병을 통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을사늑약을 전후로 보안회, 헌정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의 최고 기구인 조선 총독부는 경복궁을 크게 훼손하고 그 자리에 설치되었다. 일제는 무단 통치, 문화 통치에 이어 민족 말살 통치를 펼쳤다. 또한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해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여러 물자를 수탈하였으며, 지원병제, 징병제로 청년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하였고, 국민 징용령과 여자 정신 근로령을 내려 노동력을 수탈했으며,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를 위해 여성을 강제 동원하였다.대한제국 국민들은 끊임없이 의병 투쟁을 이어나갔으며, 독립 의군부·대한 광복회와 같은 비밀결사 단체를 결성, 활동하였다. 국외에서는 중광단, 북로 군정서, 신흥 무관 학교, 명동 학교,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 의회, 서로 군정서, 대한인 국민회, 대조선 국민 군단 등을 결성 및 설립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에 격렬히 저항하였다.레닌의 약소민족 해방 운동 지원 선언과 민족 자결주의의 대두, 국외 민족 운동 등을 배경으로 고종의 서거일에 맞춰 계획된 비폭력적 만세 시위인 3·1 운동(1919)이 전개되었다. 3·1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운동 중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으로,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열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잔인하고 끔찍한 행적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일제는 3·1 운동의 열기와 독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한민족의 기개에 크게 당황하여 통치 방식을 기존의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돼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였다. 한편 민족주의 계열에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며 여러 분야에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문맹 퇴치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다.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 연대의 계기로 꼽히는 6·10 만세 운동(1926)은 순종었다.
프역문 과제 총정리2주차 과제1. 바이킹의 출몰 역사‘바이킹’은 고국 땅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덴마크에 걸쳐 많이 있는 협강(vik)에서 유래한 말로 ‘협강에서 온 자’라는 뜻이다. 전투(vig), 성채화된 숙영지(wik), 해적 (viking)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이 무렵 그들이 각지에 진출한 원인은 인구증가에 의한 토지의 협소화 때문이며,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감행한 민족대이동이라 할 수 있다.당시의 노르만족은 씨족 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이행하여 국가형성기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부족 간의 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족장이 부족민을 인솔하여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과 배 건조 기술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촉진하였다.그들은 무자치한 침입/싸움/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민족 이동 뿐 아니라 전투.정복.탐험.식민.무역 등 다양한 활동을 초래하였다. 최근 유적.유물의 발굴과 조사 및 여러 연구로 인하여 파괴적, 부정적인식이 상당히 수정되어, 중세 유럽사의 전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장대한 운동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2. 노르만 공국의 성립과 영국 정복2-1. 노르만 공국의 성립노르만 공국은 노르만 족에 의하여 세워졌다. 노르만 족이란, 프랑스 북부 또는 프랑크 왕국에 자리잡았던 바이킹 족과 그들의 후예를 말한다. 노르만 족(어원-북쪽 사람이라는 뜻의 Nortmanni)은 원래 8세기 유럽 해안 지방을 습격하여 파괴적인 약탈을 시작한 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 출신의 야만적인 이교도 해적들이었다.읻르은 8세기 말부터 프랑크를 침입하기 시작하나, 카를대제(샤를마뉴대제)에 의해 격퇴되었다. 대제가 죽은 뒤 센강과 루아르강 하구에 기지를 건설하고, 9세기에는 3차례나 파리를 점령하여 내륙의 여러 도시를 약탈하였다. 루아르강 유역에서는 일찍이 철수하였지만, 센강부는 듀랜트 백작과 그의 두 아들이 지배하며, 살아남은 색슨족은 끝없는 공포 속에서 지낸다. 잉글랜드 정복 이후 혼란했던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3. 십자군 전쟁 역사십자군 전쟁이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을 말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참전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 영주오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구 등 잡다한 도익가 신앙적 광기와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 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200년 가까이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은 더이상 교황과 교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영주와 기사들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왕과 상인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또 지중해를 통해 동방 세계와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도시가 생겨났다.fidelite (모든 백성들/충성)devoir (의무)[중세의 대표적 기사도 문학]질문 3. 중세의 대표적 기사도 문학 4가지1. 프랑크 왕국의 왕 카를루스 대제의 12기사 이야기 중 2.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 출신의 로드리고아스 데 비바르의 일대기 3. 부르군트 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4. 브리튼 영웅인 아서 왕을 배경으로 한 전설 [과제1] 줄거리 - 10줄 요약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 출신의 로드리고디아스 비바르의 일대기이다. 이 작품은 엘 시드의 불운과 비참함으로 시작한다. 알폰소 왕이 부당하게 그를 추방했기 때문이다. 엘 시드가 산초 왕을 모실 때 알폰소 왕과는 싸우기도 했지만, 산초 왕이 죽고 난 후 알폰소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도 알폰소 왕은 엘시드의 모든 재산ㅇ르 몰수하고 왕국 밖으로 그를 내쫓았다. 엘시드는 자기를 따르는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먹고 살 일이 막막해졌다. 그는 먹고 살기위해 무어인들 또는 기독교인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승리로 극복되고, 비참함에서 힘 있는 자로 나아가면서 발렌시아를 정복해 그의 영광은 극에 다다른다. 군사상의 영광을 얻고 왕과 다시 화해하지만 이제 그 불행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가족에게로 떨어진다. 카리온 왕자들로부터 딸들이 모욕을 당한 것이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톨레도 의회와 결투, 그리고 딸들을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과 결혼시켜 그의 명예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과제2] 줄거리 - 10줄 요약니벨룽겐족의 알베리히는 라인강에서 황금을 지키고 있는 세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단념한 자가 강 밑에 있는 황금으로 반지를 만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알베리히는 황금을 빼앗아 반지를 만들지만 신들의 왕 보탄에게 강탈당한다. 이에 분노한 그는 반지에 반지를 갖는 자는 모두 파멸할 것이라는 저주를 건다. 보탄은 반지를 발할라 신전을 지어준 거인 형제에게 대가로 주고, 형제는 서로 반지를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형이 죽고 만다. 욕망을 버리지 못한 보이야기(왕은 때로는 그리퐁이 끄는 나무배를 타고 공중에 날아오르기도 함, 때로는 기괴한 괴물들을 물리침), 브르타뉴 설화 계통의 이야기(브르타뉴의 하프타는 사람들이 북부 프랑스에 퍼뜨린 이야기들, 그들의 영웅들(트리스탕과 이죄/아르튀르와 그니에브르/랑슬로/이뱅/페르스발)이 겪는 신기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브르타뉴 설화와 프랑스 문학]질문 1. 브르타뉴 설화를 소재로 한 연애시를 켈트의 단시로 제작한 프랑스 여성 작가?마리 드 프랑스질문 2.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중 연애소설의 소재가 된 인물이 있다. 관련 작품 두 편 질문 3. 기사도 문학에서 여성은 어떤 영향력을 발휘?이전까지는 남성이 멸시하는 ‘하녀’ 취급을 받던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상승하게 된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여성과의 사랑/연애를 위하여 복종하며 서비스를 다하는 모습이 고착화되었다.[과제1] 줄거리 - 10줄 요약로누아의 왕자 트리스탄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콘월의 왕인 백부 마르크 밑에서 지용을 겸비한 젊은 기사로 성장한 그는 아일랜드의 거인 몰오르트를 쓰러뜨리고 국난을 구한다. 백부의 아내가 될 미녀를 찾아 아일랜드에 가서 용을 퇴치하고 왕녀 이졸데를 데리고 개선하는 도중, 시녀의 실수로 마르크와 이졸데가 마셔야 할 ‘사랑의 음료’를 마심으로써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사랑과 죽음의 음료로, 이를 마신 자들은 하루를 못 만나면 병이 나고 사흘을 못 만나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졸데는 마르크왕의 왕비가 되었으나 연인 트리스탄과 항상 만나고 있었다.어느 날 이 일이 발각되고, 두 사람은 처형을 피해 깊은 숲 속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3년 뒤 왕과의 화해가 성립돼 이졸데는 궁정으로 돌아오고 트리스탄은 추방된다. 트리스탄은 여전히 이졸데를 사모하여 브르타뉴에서 이졸데와 같은 이름의 아내를 얻었으나, 연인을 잊을 수 없어 병상에 눕게 된다. 연인을 데리고 올 사자를 보감동을 끌어낼 줄 알았던 시인으로 주목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 , 및 우화시 시사시 파블리오 서정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 주문에 응해서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많다.질문 5. 는 어떤 작품? (3-5줄)는 풍유적 꿈의 형식을 빌려 쓰여진 13세기의 시적 소설이다. 총 2만 2천행이며 8음절 대구 형식이다. 또한 최고도로 우의적인 작품이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이 모태가 되었다. 는 두 작가(교므 드 로리스, 장 드 묑)가 약 40년 간격으로 쓴 전혀 다른 두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과제1] 관련 우화 작품 줄거리 1편을 10줄로 요약옛날 옛적 어느 날 숲 속의 여우는 어떤 먹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우의 아내와 아기 여우들도 며칠 동안 굶어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상인들은 정말 인색하고 오만하다! 내가 여우 중에서 가장 똑똑한지 알지 못하고 있군!” 여우는 생각했습니다.여우는 재빨리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여우는 오랫동안 길가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이 길을 지나가는 수레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던 수레가 가까이 오자 신선한 생선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여우는 길 위에 배를 깔고 길게 뻗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레가 여우 가까이에 도달하자, 상인들 중 한 명이 여우를 신중히 바라보았습니다. “경사 났군! 이거 죽은 여우 같은데.” “여우 모피 덕분에 공돈이 생기겠는데! 생선 바구니 옆에 던져 놓게.” 여우를 실은 두 상인은 휘파람을 불며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그러나 여우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우는 뒤에서 생선을 실컷 즐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위해 생선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아, 너희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줄 아니? 큰 몇 마리 물고기는 내가 가져 갈게. 그래도 너희들을 위해 생선을 많이 남겨 두었어.” 화가 난 상인은 있는 힘을 다해 여우를 쫓았지만 여우가 훨씬 빨랐습니다.여우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자식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준비했고, 여우 가름은?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과 해결방안 -드라마 의 사례를 중심으로- ***대학 ****전공 3221**** 나** Ⅰ. 서론 Ⅱ. 본론 1.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의 문제점 1) 잘못된 역사 인식 형성 2)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3) 동북공정에 대한 우려 2.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의 해결방안 1) 방송통신심의위원회 2) 시청자의 역할 3) 방송업계의 책임 Ⅲ. 결론 ※ 참고문헌 Ⅰ. 서론 , 과 같은 팩션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로 떠올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서 ‘팩션’이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써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하지만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으로 인한 잘못된 역사 인식 형성,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등과 같은 문제점도 같이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드라마 를 들 수 있다. 는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및 폄하 논란에 휩싸였고, 방영 이후에는 시청자들의 거센 반발로 결국 2회 만에 조기 종영 및 제작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재미만 있으면 됐지, 뭘 그렇게까지 하냐”, “팩션 드라마가 원래 그런거지”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를 보이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이 많은 현실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드라마 의 사례를 중심으로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이 초래하는 여러 문제점을 서술한 후, 해결방안을 모색하려고 한다. Ⅱ. 본론 1.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의 문제점 1) 잘못된 역사 인식 형성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은 시청자가 잘못된 역사 인식이 형성되도록 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미디어에게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예로 인터넷 밈(meme)으로 쓰일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를 들 수 있다. 는 명대사 “내가 조선의 국모다.”로 유명한 드라마이다. 드라마는 주인공을 ‘화려한 외교술과 뛰어난 지략, 조선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으로 묘사하였다. 이를 본 많은 시청자도 명성황후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임오군란 당시 분노한 구식 군인들의 타겟이 명성황후와 명성황후의 친척이었을 만큼, 그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인물이었다. 드라마가 해외로 많이 수출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국내 시청자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 시청자도 왜곡된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역사가 이렇구나”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 큰 영향을 주므로, 방송업계는 이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고증에 임해야 할 것이다. 2)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팩션 드라마에서는 실존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드라마 를 들 수 있다. 드라마 에서는 태종을 악령으로 인한 환각 및 환청으로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는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였다. 작중 충녕대군의 대사에도 문제가 있었다. “6대조인 목조께서도 기생 때문에 삼척으로 야반도주하셨던 분이셨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느냐.” 이 대사 속 목조는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이씨 왕조의 조상이다. 결국 자신의 조상을 비하하는 것이 되는 이 대사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왕자이자 훗날 성군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대사로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듯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 이루어지자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나서서 의 즉각 방영 중지를 요청하였다. 3) 동북공정에 대한 우려 역사 왜곡 팩션 드라마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에서 만주 지방의 지리, 역사, 민족 문제 따위를 연구하는 국가 연구 사업으로, ‘동북 변강사 여 현장 계열 연구 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여 이르는 말로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하여 2002년부터 추진하였다. 에서도 동북공정의 시도로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충녕대군이 서양인 사제를 기생집에서 접대하는 장면이다. 엄연한 조선 영토(의주 근방)임에도 기생집의 실내 장식, 배경음악 모두 중국식이었고, 식탁 위에는 중국 전통 음식인 월병, 피단, 중국식 만두, 중국식 술병을 소품으로 올려두었다. 이에 대해 SBS측은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소품을 준비했다’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라고 해도 세트부터 소품까지 모두 중국식으로 준비한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이러한 해명은 역효과만 낳았다. 이에 의 역사 자문을 맡은 이규철 박사의 인터뷰를 통해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했으나 반영되지 않았음이 밝혀져 더 논란이 되었다. 2.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의 해결방안 1)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처음에는 법적제재를 가하는 방향으로 조사하였으나, 「방송법」 제4조에 따르면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특히 창작물에 대한 직접 개입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어, 역사 왜곡으로 인한 법적제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나친 역사 왜곡과 같은 방송의 공적 책임을 저해하거나, 심의 규정을 위반하는 방송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심의 대상이 된다. 방심위의 심의 결과 징계 대상이 되면 징계를 받게 된다. 방심위의 징계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첫째, 방심위가 제5기 위원회 출범 지연으로 석 달 넘게 공백 상태이며, 둘째, 방심위가 활동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방송 중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방심위에서 시청 등급 조정을 요구하고, 여러 방법으로 경고할 수는 있지만, 방송을 중단할 것인지, 수정하여 계속할 것인지는 결국 방송사에 달려있다. 2) 시청자의 역할 이번 의 경우 시청자들이 나서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민청원과 방심위에 민원을 제기하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는 등, 여러 움직임을 통해 방송 중단과 제작 중단이라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한 명의 시청자로서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할 때 재미를 추구하되, 올바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인지 체크하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3) 방송업계의 책임 방송업계에서는 방송과 미디어의 영향력을 인지한 상태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좋은 선례와 성공 사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방송업계에서 고증을 소홀히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력 및 예산 부족인 만큼, 고증이 잘 된 드라마에는 정부 지원이 들어간다거나 하는 정책이 뒤따른다면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의 사례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Ⅲ. 결론 지금까지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과 해결방안에 대해 알아보았다.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은 잘못된 역사 인식 형성, 실존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동북공정에 대한 우려 등 여러 문제점이 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먼저 방심위의 징계 절차를 설명하고 방심위가 현재 공백 상태이며, 활동하더라도 징계 수위에 한계가 있음을 서술하였다. 다음으로는 시청자의 역할의 중요성과 방송업계의 책임이 막중함을 강조하였다. 팩션 드라마 속 역사 왜곡이 더는 일어나지 않고, 앞으로 잘 만들어진 팩션 드라마가 많이 제작되면 하는 바람이다. ※ 참고문헌 「팩션」, 『두산백과』, , 검색일 2021.06.03. 「명성황후」, 『KBS 드라마』, , 검색일 2021.06.04. 조유경, 「전주 이씨 종친회 “역사왜곡하는 ‘조선구마사’ 방영 중지하라”」, 『동아닷컴』, (21.03.25), , 검색일 21.06.02. 「동북공정」, 『네이버 국어사전』, , 검색일 21.06.02. 이유진, 「'조선구마사' 측 "중국풍 술상, 명나라 국경지라 상상력 가미한 것" [공식]」, 『스포츠경향』, , 검색일 21.06.05. 권혜림, 최연수, 「국민 분노케한 '조선구마사'…역사자문 박사도 "강한 우려 표했다"」, 『중앙일보』, , 검색일 21.06.02. 1) 「팩션」, 『두산백과』, , 검색일 2021.06.03. 2) 「명성황후」, 『KBS 드라마』, , 검색일 2021.06.04. 3) 조유경, 「전주 이씨 종친회 “역사왜곡하는 ‘조선구마사’ 방영 중지하라”」, 『동아닷컴』, (21.03.25), , 검색일 21.06.02. 4) 「동북공정」, 『네이버 국어사전』, , 검색일 21.06.02. 5) 이유진, 「'조선구마사' 측 "중국풍 술상, 명나라 국경지라 상상력 가미한 것" [공식]」, 『스포츠경향』, , 검색일 21.06.05. 6) 권혜림, 최연수, 「국민 분노케한 '조선구마사'…역사자문 박사도 "강한 우려 표했다"」, 『중앙일보』, , 검색일 2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