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20세에 효렴에 추거되어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고, 황건의 난, 군웅의 할거, 황제권 약화 등으로 진유로 가서 모병하여 원소를 맹주로 하는 동탁 토벌 연합에 합류하게 됩니다. 조조는 농민군과 황건을 편입하는 등 세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결정적으로, 장안을 탈출한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으로 맞이하여 정치·군사력을 확대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건안 13년, 승상의 지위에 올라 한조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지만, 적벽에서 손권·유비의 연합군에 참패하고, 건안 21년, 자신을 위왕으로 진작합니다.조조는 후한 말, 농민반란, 이에 대한 통치계급의 진압, 통치계급 내부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여러 정책을 시행함으로서 정세를 안정시킵니다. 그 정책으로는 둔전제, 호조제 · 병호제, 인재 등용제의 개혁 등이 있습니다. 둔전제는 군량 확보, 유민 토착화, 기민 구제, 노동력의 병력 전용의 기능을 하는 다목적 토지경영방법으로 군량문제 해결, 북방 통일, 이탈민을 농민 신분으로 환원, 전란 유민을 정착시켜 사회안정, 파괴된 북방 농업생산 회복에 기여했습니다. 호조제는 한 대의 향촌 지배층을 매개로 하는 조세 징수가 불가능해져 호를 단위로 하는 호조로 개편한 것이고, 병호제는 군병의 항구적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하였습니다. 인재등용제의 경우, 인품이 아닌 재능 본위의 벽소제를 통해 세력을 확대 · 강화해나가, 위 왕조가 안정된 후에는 인품 등 전통 덕목이 포함된 구품관인법을 시행하였습니다. 위 왕조는 조비가 위왕의 지위를 세습한 후 한 헌제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위 문제가 됩니다. 위 문제는 법가 정책을 답습하여 권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위의 선양을 받아 사마 씨 왕조인 서진이 건국되게 됩니다.위나라와 함께 삼국을 구성한 오나라, 촉나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나라의 손오정권은 손견, 손책, 손권으로 이어집니다. 한의 천자를 보필함으로써 정통성을 얻고 거대세력화된 조조와의 대립에서 열세였던 손오정권은 유니다. 이로써 화북 땅은 전장화되었고, 서진은 멸망하여 화북은 호족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이때, 사마의의 후예 사마예와 왕씨 가문은 남하하여 서진 멸망 다음 해인 317년, 사마예가 제위에 올라 동진을 건국합니다.동진 왕조는 왕돈을 비롯해서 오주 집단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강남에서 지배 기구를 구축하고, 지방 군부 · 주진의 장은 북래귀족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의 연속들은 그 지역의 토호들로 충용하였습니다. 남인은 이에 지방 정계 또는 중앙 관계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여김과 동시에 그들의 토착적인 향촌 질서 체제가 국가권력으로부터 공인과 비호를 받아 명분상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돈과 왕도가 동진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자 원제는 측근세력을 통해 이를 견제하려 했고, 이는 왕돈의 난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문벌적 귀족체제의 틀에서 밀려난 강남 토호의 불만으로 인해 벌어진 반란이었습니다. 뒤이어 일어난 소준의 난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치감의 군사력이 도간 군단의 원조를 받아 진압됩니다. 그러나, 효무제 말년 이래로, 민중착취, 회뢰, 매관매작 등 정치의 부패가 만연하여 이는 세족의 반감을 샀고 손은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이에 형주의 유유는 국내에서 환현의 찬탈, 손은 · 노순의 난을 평정하고 저항세력을 타도하였으며, 대외적으로 남연과 후진을 멸망시킴으로서 그의 세력을 강화했습니다. 유유는 스스로 선양의 절차를 진행하여 안제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송 왕조를 수립합니다.유유는 송나라 건국 후 일반적인 권력강화책 외에 토단법과 황제에게 군부지배권 예속 등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토단법은 서민 파악과 재정 수입 증가를 위해 시행하였는데, 동진 대에 강남 토착민(황적)과 북래 유우민(백적) 사이 호적의 문란과 불평등을 시정하여 모든 주민을 호적에 등록하여 황제 권력 강화를 도모하였습니다. 또한, 요지에 설치된 군부의 지배권을 귀족에게서 황제 측으로 옮겨 왕조의 군사적 색채를 짙게 만들었지만, 이는 후에 지방 군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 계급은 취관 · 면역의 특권이 있어 부유한 강남 토착민들은 호족을 위람하여 사류로 편입하였습니다. 이에 국가 재정 수입 등의 문제로 호족 위람 검사를 실시하였으나 제 건원 이래 위람 만을 다루어, 이는 부유한 강남 토착민의 면역특권과 정치적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이와 더불어, 한인, 특히, 남인의 정계 진출과 실권 행사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남제는 곧 내란과 왕족 사이의 칼부림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무제의 뒤를 이은 울림왕 대신 소란이 조정을 전담하다가 스스로 즉위하여 명제가 되었고, 이 뒤를 이어 동혼후 소보권이 제위하였으나, 폭정과 사치로 인해 소연이 거병하여 소보권을 죽이고 선양 형식을 밟아 제위하여 양 왕조를 수립합니다.양 왕조는 4대에 걸쳐 55년간 존속했지만, 양 무제가 48년 간 치세했기에 양 무제 치세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무제의 치세 동안 남조 사상 비교적 평화로워 남조 문화의 황금시대라고도 합니다. 무제는 이전 왕조의 혼란을 시정하는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관제개혁입니다. 이 관제개혁의 특징은 청 · 탁 구별의 타파인데, 즉, 문지가 낮아도 귀족적 교양을 갖춘 자라면 등용하였습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정책이 학관을 창설하여 학문을 진흥한 학관 시험 제도 장려입니다. 이처럼 무제의 치세 중 전반기는 전성기라고 불렸으나, 후반기에 들어 정치부패, 불교 숭신 등으로 형전이 해이해지고 기강이 서지 않게 됩니다. 특히, 무제의 소극적 대북정책은 양 왕조 멸망의 직접적 원인인 후경의 난을 촉발시킵니다. 후경의 난은 갈족 후경이 양에게 항복하여 이후 동위의 토벌로 궤멸의 위기에 놓이지만, 양 왕조는 동위와 화친 통교 교섭을 진행하여 이에 후경이 건강을 기습하여 제위에 오른 것입니다. 무제는 후경에게 유폐되어 죽고 여러 왕자의 제위 계승 충돌로 이어집니다. 후경은 상동왕의 부하 왕승변 군과 이에 합류한 진패선 군의 공격으로 죽고, 상동왕이 원제로 제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서위가 남하하여 악양왕 소찰향했고, 호한 이중 체제를 취했지만, 전통 부족 연합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유 씨의 멸망을 도모한 대사공 근준에 의해 한국은 멸망합니다. 이후, 한국 재흥을 선언한 유요에 의해 장안에서 전조가 수립되고, 갈인 석륵은 양국에서 후조를 창건합니다. 전조와 후조는 서로 대립하다가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게 되고, 후조 역시 이후 염민에 의해 멸망됩니다.선비족의 경우, 연국을 수립한 모용부와 북위 왕조를 수립한 탁발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모용부는 전연, 후연, 남연을 건국하였습니다. 모용부는 모용외가 선우가 된 후, 요서에 이주한 후 농업을 주로 하는 정주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모용황은 영토를 확장하여 연국은 대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모용준이 연왕에 즉위했을 때, 전술한 후조국 염민의 쿠데타가 일어나 이를 진압하여 염민 정권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대연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하고, 전진의 부견이 비수에서 패한 뒤, 동족에 의해 같은 이름의 왕조가 이어서 일어나지만, 위 나라를 전연, 이후 나라는 후연 · 서연 · 남연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동족 국가 사이의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과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후연은 모용수가 호족 세력을 결합하여 중산 지역에서 즉위하며 수립되었으며, 초기에 후연의 위세가 미치는 곳은 전연시대보다 넓었습니다. 그러나 모용수 사후, 후연은 혼란스러운 정국 끝에 풍발이 뒤를 이어 북연을 수립하나, 북위 3대 태무제에게 멸망합니다. 남연은 후연이 탁발부의 압박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는 과정에서 모용덕이 수립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모용덕 사후 동진이 토벌을 받아 멸망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선비족의 특징은 기저의 유목 부족의식으로 유목민의 분열과 대립을 야기했다는 것입니다.탁발부는 의이 · 의여 형제 때부터 정치 활동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들은 진조를 후원하고 중원에 출병하여 진조로부터 탁발부 중원 진출의 거점이 되는 구주형북지지를 나누어 받게 됩니다. 의여는 아들 육수족 사대부 등용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부락제는 유목 생산구조에 기초한 선비족의 정치 · 군사적 공동체로, 농업이 우선시되어 붕괴되었습니다. 타 유목민족이 이원적 지배체제를 사용한 것과 달리, 북위는 유목민도 군현제에 편입하며, 부족적 국가에서 한족 전제 국가로 개혁하였습니다. 사민정책은 피정복민을 집단강제 이주시켜, 토지(계구수전), 농구, 경우 등을 빌려주어 농업에 종사토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황무지 개간과 함께 고율의 착취를 가능케하여 전제권력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위가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사대부 등용은 필수정책이었습니다. 한족과 선비족 사이에서 여러 갈등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족 사대부의 등용은 선비족의 한화를 촉진시켰고 이는 한족풍의 귀족제를 형성하였습니다.북위 왕조는 태무제 · 문성제를 거쳐, 헌문제 · 효문제 대로 이어집니다. 특히, 헌문제 대에 문명태후의 수렴청정으로 한족 관료가 정계로 대거 진출하여 호족의 한화가 이루어졌으며, 백성들의 경작 의무화를 통해 농업생산력 향상을 도모합니다. 또한, 백관에 대해 녹봉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를 위해 균전법, 삼장제 등을 실시하여 토지 · 인민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효문제는 한화로 인해 호족의식이 희박하였고 이는 보편적 제국을 지향한 한화정책으로 이어집니다. 문명태후 사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정치를 실현했고, 이는 낙양 천도, 급진적 한화정책 등입니다. 급진적 한화정책은 복제개혁, 선비어 금지, 선비 기타 호족성 금지, 관제개혁, 성족상정 등이 있습니다.북위는 효문제 사후 쇠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화정책으로 부정적 측면까지 모방한 호족은 매관등 부패를 일삼았으며, 권력투쟁도 일어납니다. 게다가 특권이 배제된 중하층 호족의 반발 역시 발생합니다. 그러나 북위 멸망의 중요한 계기는 육진반란이었습니다. 북위가 정복한 땅에 군단을 주둔시키는 곳을 진이라 하였는데, 다른 진들과 다르게 북 · 북서변의 진은 유목민에 대처하기 위해
체험교육이란 사전에서 교실 밖에서 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습. 이론보다 실제 현장에서의 체험 과정을 통해 학습이 이루어진다. 라고 정의합니다. 실제로 체험 교육에 대해 조사해보니 학교 내보다는 학교 외 활동이 많았지만, 학교 내에서의 체험교육도 굉장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학교 내에서 체험교육을 어떻게 녹여내었는지는 15년 개정 교육과정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15년 개정 교육과정에는 창의적 체험활동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15년 개정 교육과정은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개편하고, 교과목 외 모든 활동을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지식교육의 한계를 넘을 새로운 교육영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학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시간으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 활동입니다.
호찌민은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 일본 축출, 베트남 독립을 위해 열강의 지원을 받고자 세계 각지를 떠돌던 중 무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역사교사 보구엔지압과 게릴라부대를 창설하고, ‘베트남독립동맹’을 수립합니다. 당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중, OSS 패티 소령은 정보망 구축, 일본 점령군 작전 교란 · 무력화의 임무를 받고 베트남으로 파견되어 호찌민을 만납니다. 이즈음, 프랑스 정보 제2국 정보장교 소령 생트니도 베트남 재장악 기반 마련을 위해 파견됩니다. 당시 베트남은 일본이 프랑스를 격퇴하고 옛 베트남 황제 바오다이를 대통령으로 세워 직접통치 중이었습니다. 때문에 베트민의 세력 확대를 원치 않았던 프랑스의 생트니, 베트민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려 한 패티 사이에선 일본의 항복 전까지 긴장이 흘렀습니다. 게릴라부대가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베트민 세력 확대 계기를 마련함과 함께, 패티는 최초의 미군 군사작전 ‘사슴 팀’을 시행해 게릴라부대를 도와 일본군과 전투를 치릅니다.일본은 무조건 항복과 함께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이에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호찌민의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아, 포츠담회담에 따라 영국군의 16도선 이남의 베트남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는 프랑스로 넘어갑니다. 이와 맞물려, 중국 국민당 장제스 군대가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아, 베트민 지도부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국, 호찌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하여, 프랑스는 베트남 ‘자유국가’ 승인, 프랑스 군대 철수에 합의합니다. 호찌민은 미국에 지지와 지원을 바랬지만, 당시 미국은 소련의 동맹국 확대 움직임에 대항하여 서방 국가의 단결과 지원을 원했고, 이전에 주장하던 반식민지 압력을 포기함과 동시에 베트남 정부의 공산화를 우려해 프랑스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베트남 내에서 프랑스 정부를 대신하고 있던 프랑스 고등 판무관 다르장리외는 베트남 남부에 코친차이나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당시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 정세는 냉각되어 있었고,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막기 위해 설득합니다. 당시, 디엠 정권은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가족의 주요직책 임명 · 총선거 거부 등을 넘어, 고율의 세금과 국민 억압으로 비난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프랑스의 침략과 미국을 동일시하는 농촌 정치 결사 단체,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됩니다.디엠의 불교 박해는 틱광둑 승려의 분신자살로 이어져 남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디엠 정권을 반대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고 딘 누의 비밀경찰은 권력 남용과 만행 등에 대해 디엠을 압박했지만, 디엠은 누를 옹호합니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장군들이 쿠데타를 지원하여 디엠은 암살되고 디엠 정권은 전복됩니다. 남베트남에는 새로운 군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서로를 축출하며 정치적 혼란을 가중했고, 북베트남은 호찌민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정규군을 남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역시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결정하여 폭격을 계획하고 미군을 배치합니다. 미군은 북베트남에 대해 경고한 후 유인책을 사용하는 ‘채찍과 홍당무’ 전략을 시행합니다. 이에 국제감시위원회의 시본이 파견되지만, 팜 반 동 수상은 베트남 문제 해결과 국제적 협조를 통해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밝혔으며, 미국의 임시조건이나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관심 부재와 의사 표명 지연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미국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폭격 계획을 발진시켜 항구 · 유류 저장 시설 등을 폭파함으로써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은 폭격이 확전 방지수단이라고 생각했지만, 북베트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민들의 공습 대피 훈련을 하는 등 침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남하시켜 남베트남 정규군을 궤멸시켰고 미군 기지도 기습공격을 했기에, 미국은 2차 폭격 및 확전 여부를 결단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북베트남 최대 병력 집결지 동호이를 공습하고 2차 공습을 통해 북쪽의 수송 시설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이어질 베트남의 보복에 대비하여 기지 방어 목적으로 해병대를생합니다. 포위가 아닌 수색과 섬멸 전략은 게릴라 관할 혹은 지원 지역으로 알려진 마을을 한마디의 명령으로 파괴할 수 있어, 당시 게릴라군과 같은 검은 파자마를 입은 젊은 농민들이 학살되었고, 이는 비난과 함께 많은 난민을 사태를 불러옵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이러한 수색 전략을 꿰뚫고 있어 지뢰 등을 설치하였고, 미군은 적 발견도 못한 채 중상을 입거나 사망합니다. 전면전이 없는 상태에서 미군은 높은 전사율을 기록하게 되고, 검열 없이 대중매체로 공개되어 민간인들 사이에서 확대 재생산되던 불만과 좌절감으로 이어졌습니다.미군은 베트남전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전쟁 자금을 선집행 후결재하여 이는 미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헬기로 모든 장비, 병력을 공수하여 병사들은 수동적으로 변하고, 북베트남 게릴라군이 땅굴에 숨으면 수색이 불가하여 무의미한 사격을 지속합니다. 필요 이상의 장비 운반과 소규모 게릴라부대 대상 수색 및 공격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복잡한 운영체계와 환경 부적응을 지닌 미군은 게릴라군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에 미군은 폭격이 전쟁 억제책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애틀버러’작전을 시행합니다. 이는 북베트남의 땅굴을 파괴하는 전략이었고, 전투의 승리로 이어졌으나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미군은 결국 추가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전쟁 반대를 외치기 시작한 국민의 납득과 동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사자 수를 부풀려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휘관들은 전사자 수를 기준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이는 정치적으로도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전투가 끝나면 미군은 항상 이겨있었으나, 이러한 미군의 행보는 여러 문제점 은폐 및 승리에 대한 갈증의 반증이었습니다.미군은 호찌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비용을 들여 공습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제이슨 팀에게 근본적 해결책을 요구하게 되고, 제이슨 팀은 전자전 연구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 결과, 진동 · 타협적 태도를 보이던 클리퍼드는 대통령에게 즉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원로 고문들을 모아 브리핑을 진행하였는데, 병력의 추가 지원 중지와 협상을 권유합니다. 존슨 대통령은 웨스트멀랜드 장군을 복귀시킴으로써 소모전략 ‘수색과 섬멸’을 포기하고, 대국민 성명을 통해 현 수준의 미군 동결, 공습 제한, 평화협상 모색을 발표합니다.미군 병사들의 주검과 부상병들이 귀국함에 따라 반전운동 여론이 확산됩니다. 그러나 마치 전선이 미국으로 확산된 듯 민주당을 위시한 반전운동은 극단적 분열과 호전성을 통해 무질서와 혼란으로 번져 경찰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일반인과 기자에게도 곤봉을 휘둘렀습니다. 과거, 반전운동가 델린저는 하노이에 가서 호찌민을 만나고, 미군이 인명 살상을 위해 군사 시설을 넘어 마을까지 폭격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이 방문을 통해 반전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어, 대학에서 시작된 반전운동은 외부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징병제 또한 반전운동 내 하나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백인 대학생은 징병을 연기하고, 대학에 못가는 가난한 사람이나 유색인종은 징병되었습니다. 게다가, 국방비로 예산이 쏟아부어지자, 인권, 복지 예산이 삭감되어 빈민가, 흑인을 옹호하는 민주당원들이 반전 세력에 가담합니다. 귀국한 참전용사들도 미국 내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해 반전 대열에 참여합니다. 반전운동단체는 그 세력이 점점 거대해졌고, 우방 국가의 국민들도 반전을 외치게 됩니다.1969년 들어 양국은 어느 정도 정치적 양보를 했고, 북베트남 인민들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동안의 위장, 다리 부설, 도로 및 철도 보수, 여성들의 역할 등 북베트남 인민들의 대응 자세(자급자족 · 자경제도)는 미국에도 전해졌지만, 당시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북베트남 인민들은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치단결하여 전쟁을 치렀습니다. 당시 북베트남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면, 폭격이 휩쓸고 간 시가지나 도시는 철주민 무장, 성 중심지 병력 배치, 경자유전 등 개혁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피닉스’ 조직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재정 원조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그들이 공포감 조성, 불법 활동, 보복적 차원의 지역주민 처형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평화공세는 이후 북베트남 최후의 공격으로 사라집니다.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은 전쟁 위험과 참전에 대한 조롱이라는 이중고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살아서 돌아가더라도 신체적 · 정신적 후유증을 얻어서 귀국하는 병사도 많았습니다. 하극상을 포함한 군부대 내에 분쟁과 폭력 사건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지휘관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비무장 민간인 500명을 무차별 살해한 미라이 양민 학살사건입니다. 병사들의 훈련에서도 베트남 인민에 대한 불신을 키웠습니다. 단계적 철수 발표로 허탈함이 의욕을 낮췄고, 이는 높아지는 전상자 비율, 마약, 탈영 등으로 나타났습니다.닉슨은 베트남 평화를 약속하고 당선되지만, 확전이 평화협상을 이끌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라 판단하여 취임 초기부터 확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 레어드는 미군 철수와 무기만 지원할 것을 주장하고, 징병제도를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미국은 메뉴작전을 통해 북베트남군의 남쪽 본부가 위치한 캄보디아를 공습하여,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미국 내 대규모 반전시위가 발생했고, 켄트주립대학교에서 시위하던 소녀가 실탄을 맞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는 전국 450개 대학의 휴업으로 이어졌고, 백악관으로의 항의 방문과 행진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캄보디아 침공은 북베트남 역시 비밀협상 철회라는 강경한 태도로 바꾸고 호찌민루트로 병력을 투입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어서 라오스 침공을 승인하고, 이에 미국에서 폭탄테러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미국은 중국 · 소련과 관계를 개선했으며 베트남과 파리비밀협상을 이어나갔고, 6개월 내에 모든 미군 철수, 유엔 국제감시단의 감독하에 선거 실시라
영화의 주인공,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의 수도 랑군에서 아웅산 장군과 킨 치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에서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옥스퍼드에서 영국인 옥스퍼드 대학 교수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가진 아내이자 엄마가 됩니다.그녀의 고향,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티크나무와 흑단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이 있었고, 사파이어와 루비가 많이 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24년 영국이 쳐들어와 미얀마는 영국령 식민지가 되었고 매우 가난해졌습니다. 이후, 아웅산 장군이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947년 랑군의 회의실에서 독립 국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역설하던 도중 암살당하였습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을 이뤄냈지만, 독립 직후 혼란스러운 국가의 상황은 반란과 내전으로 이어졌고, 1962년, 네윈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군부 독재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서 시위대는 철권통치 군부 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며 시위했습니다.1988년, 네윈 군부의 지배와 정책에 반대하여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네윈 군부 지배 사상 유례가 없던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군부의 사령관인 네윈 장군이 장수를 위해 자신의 행운의 숫자인 45, 90 등 9의 배수를 선호해 9의 배수가 아닌 화폐 사용을 금지하는 등 화폐개혁을 추진하였고, 학생들은 대학에서 급식을 먹지 못하게 되어 반정부시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고, 아웅산 수치는 어머니를 뵙기 위해 미얀마행 비행기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가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미얀마의 모습은 처참하였습니다. 남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빨간 스카프를 한 정부군은 인야 호수에서 열린 평화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학살하고 병원의 병실은 대학살의 사상자로 가득하였습니다. 병원은 들어오는 환자들로 인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하였고, 정부군은 병원까지 쳐들어와 의사를 죽이거나 학생들을 수색·폭행하고 강제 연행해갔습니다.아웅산 수치의 귀국은 군부에게도 대중에게도 중대한 소식이었습니다. 군부는 미얀마를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시킨 민족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를 감시하며 동시에 다시 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8888항쟁에 대하여 ‘정부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더는 묵과할 수 없어 책임을 느껴 사퇴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어 국민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도록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랑군대 역사학계 교수들이 아웅산 수치에게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고 그녀가 수락하게 되며 정부의 계획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군부는 민주화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대중을 통제·지배하기 위해 극렬분자들의 거점을 파악하여 모두 체포하고, 모든 공개집회도 막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아웅산 수치와 그녀의 지지자가 서로 만나거나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아웅산 수치는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으로 대중 앞에서 짧지만 강렬한 연설을 했습니다. 남편 마이클은 영국 대사관의 복사기를 이용하여 그녀가 지지자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독재 종식을 위해 창당한 당, ‘국민 민주 연맹(NLD :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선전물을 복사했습니다. 비록 두 아들은 안전과 학업을 위하여 영국으로 돌려보냈지만, 아웅산 수치와 마이클, 또 그녀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대중들을 만나고 국민 민주 연맹을 홍보했습니다. 이러한 아웅산 수치의 활동을 곱게 볼 리 없던 군부는 아웅산 수치의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남편 마이클의 비자를 취소시키고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남편을 강제로 귀국시켰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는 무너지지 않고 진정한 미얀마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전국을 돌며 소수민족을 방문하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그러던 중, 아웅산 수치의 어머니, 킨 치 여사가 사망합니다. 군부는 사무실을 잠그거나 병가를 거부하는 등 공무원들의 장례식 참여를 방해했지만, 쿠데타 이후 최대 인파인 약 10만 명 이상의 대중이 모였습니다. 또한, 아웅산 수치가 무너질 기회라고 생각하여 국민 민주 연맹의 당 본부에 쳐들어가거나, 아웅산 수치의 활동을 가로막고 총을 겨눈 채 위협을 하는 등 그녀의 활동을 지속해서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겨눈 총을 눈앞에 두고 침착하게 피격위기를 대처한 아웅산 수치와 아웅산 수치에게 총을 겨눈 군부의 행동은 대중들에게 삽시간에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군부는 공개적으로 아웅산 수치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탄압하는 것이 여론의 흐름을 바꾸거나 아웅산 수치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에 있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통제방법으로서 아웅산 수치가 연설 등의 활동을 위해 방문한 지역에 군인을 풀어 대중들을 체포하여 끌고 갔습니다. 군부는 이들의 일부를 국경의 정글을 통해 무기와 약품을 운반하는 강제 노역을 시켰고, 일부는 한데 모아 지뢰와 총기를 이용해 잔인하게 사살했습니다. 또한, 군부는 아웅산 수치와 지지자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해 군인을 풀어 아웅산 수치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고, 그녀에게 가택연금 명령을 내립니다. 또한, 그녀의 지지자들을 전부 체포하여 집을 수색하고 바마의 최대 감옥인 인세인 감옥 내에 개들과 함께 개 철창에 가두게 됩니다.강제 귀국 조치된 마이클은 군부 독재 정부 하에서 투쟁하는 아웅산 수치의 안전을 염려하여 그녀의 국제적 인지도를 확대하기 위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그녀의 이름을 올리려 합니다. 이를 위해 아웅산 수치의 옛 논문, 그의 아버지와 식민지 미얀마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정리하여 노벨 평화상 위원회에 제출합니다. 이후 미얀마에 도착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어 가택연금 중인 아웅산 수치와 같은 제약을 받게 되어 대사관, 정치적 인물과 연락이 금지됩니다.이에 아웅산 수치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의 처우 개선 및 석방을 위해 가택연금된 채 단식 투쟁을 시작합니다. 아웅산 수치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마이클은 아웅산 수치를 위해 군 수뇌부를 만나, 아웅산 수치가 동료의 처우를 개선해주면 단식을 그만할 용이가 있음을 전달합니다. 마이클의 제안은 수락되어 그녀 동료들의 처우는 개선되었고, 아웅 산 수지는 단식 투쟁을 멈추었습니다.1990년 5월, 군부에서 약속했던 5월 총선거가 치러집니다. 선거결과는 가택연금 중이던 아웅산 수치가 이끌고 있던 국민 민주 연맹 392석, 군부 10석으로 국민 민주 연맹의 압도적인 승리로 선거가 이뤄집니다. 이는 5명 이상의 집회가 불허되는 나라에서 군부 종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대중들이 이뤄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투표에 불복하여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하지 않아 아웅산 수치는 선거에서 승리를 이뤄냈지만 신임 수상으로서의 역할을 맡지 못합니다. 군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두시위에 합류하는 승려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원을 급습하거나 국민 민주 연맹 지도부를 체포하고 대중들을 강제 해산시킴으로서 정권을 이어나갔으며, 영국에 있는 마이클에게 옥스퍼드로의 빠른 귀국을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면 마이클의 미얀마 입국을 허가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라고도 불리는 모한다스.K.간디는 20세기 인도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로,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이끈 인물입니다. 그는 비폭력·평화로운 비협조를 통해 영국으로부터 투쟁하였고, 인도인들은 그를 ‘바푸’(아버지)라 부르며, 그가 연설하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종교적 갈등과 영국의 지배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인도는 그의 지도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간디는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법과 대학에 진학한 후 영국 대법관청 소속 변호사가 됩니다. 이후 1983년, 남아프리카에서 사건 변호를 위해 기차를 타고 이동 중이던 간디는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습니다. 그는 승무원에게 제값을 주고 산 일등석 표를 제시했지만, 피부색을 이유로 삼등석으로 이동하라는 승무원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차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다른 인도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인도인들이 겪는 다른 차별, 이를테면 ‘인도인들은 기독교인들과 같이 걸을 수 없다’ 등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에 간디는 일부 인도인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남아프리카 당국 언론에 인도인들의 차별에 대한 부당함을 제보하고, 남아프리카 내에 인도인들의 의회를 설립합니다. 간디는 의회 연설에서 권리를 찾기 위한 비폭력·평화적 투쟁을 주장했고, 유럽인들에게는 필요 없는 신분이 적힌 통행증을 불태움으로써 차별 대우의 상징적·물리적 고리를 끊으려 합니다. 그곳에 모인 인도인들은 이에 동조하여 통행증을 태우려 하지만, 영국 경찰의 제지로 실패합니다. 이 사건은 남아프리카 ‘데일리 메일’지에 보도됩니다.인도에서 인도인들을 돕던 영국인 성직자 찰리 앤드류가 간디를 돕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오게 됩니다. 그는 고탈 교수의 지시로 간디를 찾아간 것이었지만, 이후 간디가 영국의 지배로 혼란스러운 인도를 이끌어나갈 때 옆에서 지지해주는 든든한 친구가 됩니다. 또, 간디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취재하기 위해 뉴욕타임스의 기자 워커도 남아프리카에 오게 됩니다.남아프리카에서는 인도인에 관한 법 조항에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그 법에는 ‘모든 인도인은 지문을 찍어야 한다.’,‘남녀 결혼 시 기독교도가 아니면 인정이 안 된다.’,‘경찰은 인도인 거처에 함부로 들어와서 여성들에게 통행증을 요구할 수 있다.’ 등 인도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자유를 핍박하는 법 조항들이었습니다. 간디는 이에 인도인들을 모은 뒤, 이 법의 문제점을 연설합니다. 간디는 이 법들에 대해 저항할 것임을 밝히며, 저항 과정에서 폭력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인도인들은 거리로 나와 ‘We are citizens of the empire’,‘ONE KING ONE LAW’ 등의 강령을 내걸고 시위·행진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 경찰은 시위 중인 인도인들에게 광산에 가서 일하라고 지시하지만, 그들의 거부로 그들은 모두 체포됩니다. 이 사건으로 일할 사람이 사라지자 인도인들의 생각지 못한 저항에 정부는 당황하게 되고, 당시 남아프리카 영국군 지휘관은 수감 중인 간디를 호출하게 됩니다. 지휘관은 간디가 언급했던 위 법 조항들의 폐지 건의와 24시간 이내에 모든 인도인을 석방할 것을 약속합니다.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간디는 조국인 인도로 갑니다. 간디는 당 총재이며 이슬람교 연맹 대표인 지나, 찰리를 간디에게 보냈던 고탈 교수 등 인도 정치 운동가들을 만납니다. 고탈 교수는 간디에게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며, 인도의 문제를 파악하고 인도를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간디는 기차를 타고 다니며 인도에 대해 배우려 합니다. 그러던 중 간디는 열차를 탈선시키고 영국군을 죽인 폭도들을 발견합니다. 간디는 그 모습을 보며 인도가 행하고 있는 해방 운동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느끼게 됩니다.전쟁이 끝나고, 인도 국민회의파(Indian National Congress)는 전당대회를 열게 됩니다. 그곳에서 지나는 인도의 자치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고, 간디는 민중과 연대하지 않으면 이 당은 인도를 대표할 수도, 영국에 대항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민중과 단결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간디가 인도를 위해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연설하던 중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인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인도 대부분 마을에서는 영국인 지주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한 마을을 예로 들면, 영국인 지주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천을 염색하기 위해 인디고 나무만을 재배토록 하고 농작물을 소작료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영국제 옷을 사서 입기 시작하며 인디고는 팔리지 않았고, 지주들은 소작료를 현금으로 가져가기 시작해 마을 사람들은 나날이 궁핍해져 갔습니다. 영국의 인도 총독부는 사냥비 때문에 소작료를 인상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에게 폭행, 불법감금, 무임금노동, 식수 미지급 등 비인격적 대우를 일삼았습니다. 간디가 마을들의 상황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들을 다니던 중 경찰에게 체포를 당하게 되고 민중선동죄를 죄목으로 하는 간디의 공판이 열리게 됩니다. 찰리는 이에 총독과 언론에 전보를 쳐서 공판에는 전 세계의 기자들이 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간디는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석방 처분을 받습니다. 간디는 총독부에 ‘소작료 인하’, ‘농작물을 맘대로 심게 할 것’, ‘위원회의 반을 인도인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이는 총독부에 의해 수용됩니다.이후, 인도에서 새 법안이 4월 6일에 발효 예정이었는데, 인도의 국민회의파 지도부는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새 법안의 내용은 간디의 글을 포함한 불온 문서를 소지할 시 영장 없이 체포·구속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도부는 적극적·도발적 저항을 통한 폭력적 대응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다른 의미의 적극적·도발적 저항을 주장하며, 4월 6일에 인도 국민 다 같이 금식기도를 하자고 주장합니다. 당원들은 델리와 봄베이의 신문에도 알리는 등 홍보를 하게 되고, 법안 발효 당일 인도 전역에 모든 인도인이 금식기도를 하며 일을 하지 않아, 버스, 기차, 공장, 행정 모든 것들이 정지됩니다. 이에 영국의 인도 총독은 간디를 체포하게 됩니다.그러나 간디 체포 후, 인도 전역에서 폭동이 일고 영국인들이 살해됩니다. 영국 총독부는 간디에게 비폭력을 주장하면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하는 한편, 군대를 이용하여 시위·집회·폭동을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이어 장군의 지시로 비폭력을 주장하던 대규모 민중 집회에서 영국 군인들의 비무장 대중들을 향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자·어린아이 할 것 없이 도망도 못간 채 죽었고, 1,516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이는 총독부에서도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고, 위원회에서 영국은 인도 지도부에게 새로운 법안 발의를 통해 타협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이번 학살 및 영국에 대한 불법적인 인도 지배는 법 이전의 문제로서 근본적 모욕임을 주장했으며, 영국 총독부는 3억 5천 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의 비폭력·평화로운 비협조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간디는 인도 국민을 모아놓고 민중대회를 개최합니다. 그곳에서 간디는 독립을 위해 힌두교·이슬람교의 단결, 모든 인도인은 존중되어야 함, 영국에게 저항해야 함 등을 역설합니다. 특히, 영국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수단으로써 영국제 옷을 모두 태워버리기를 주장하고, 영국제 옷을 태우는 불길은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또 한 명의 영국인, 간디의 기사를 쓰는 영국 제독의 딸 슬레이트가 인도를 찾게 됩니다. 그녀는 간디가 직접 지어준 이름 ‘미라벤’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간디는 영국제 옷을 입지 않고 자국의 옷을 입자는 의미에서 물레질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간디에게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폭동은 나날이 거세어져 결국 어느 날, 시위 중인 인도인들은 인도인을 폭행한 영국인 경찰을 쫓아가 경찰서를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무차별 폭행하여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간디는 참회의 의미로 시위가 중단될 때까지 금식하기로 하였고, 이내 모든 지역에서 시위가 없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거리에서 경찰과 군인들에게 꽃을 주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영국 경찰은 금식을 그만둔 회복 중인 간디를 선동죄라는 이유로 체포합니다. 간디는 공판에 서게 되고, 비협조의 목적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기에 선동죄로 판단되어 6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