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에서 두드러지는 예술관의 대립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규칙을 고수해야 하는가, 아닌가? 사회적 틀에 맞추어야 하는가 아닌가? 예술과 예술가는 분리될 수 있는가? 첫 질문은 예술의 질 혹은 귀천을 결정짓기도 하고, 두 번째 질문은 예술의 도덕성, 선악을 결정짓기도 한다. 예술관에 따라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의 아름다운 부분을 놓치기도 한다.에서 독일어로 오페라를 쓸 것인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쓸 것인가 언쟁을 하는 부분에서는 ‘독일어는 노래에 적합하지 않은 언어’라고 표현한다. 독일어 오페라를 반대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오페라가 가져야 할 일종의 ‘덕목’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덕목을 갖추지 못한 것은 격 떨어진다고 여기는 듯하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몰랐던 황제가 다른 음악가들을 통해 더듬더듬 꺼냈던 “음표가 너무 많아”라는 말은 정말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위대한 예술’을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서도 비슷한 예술관의 충돌이 일어난다. 영화의 시작부분, 어린 시토가 벽돌로 머리를 깨고 나서 경극 배우는 3류 서커스단 같은 행동을 해선 안된다며 혼나는 장면 역시 특정 기준에 따라 예술의 귀천이 갈리는 부분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경극에 바친 도즈가 시토와 주샨을 향해 ‘건달과 창녀의 연극’은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현대극을 지지하는 서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통 경극과 비교해 의상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 역시 자신이 배운 틀 안에 맞지 않는 경극은 천한 것, 질 떨어지는 것이라는 시선이 드러난다. 이러한 예술관의 배경은 물론 위대한 예술작품들 로부터 왔을 것이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듯이 그 틀의 시작은 위대한 예술에서 온다. 이러한 예술관의 대립은 그 틀을 무시할 것이냐, 참고서로 볼 것이냐, 교과서로 볼 것이냐? 의 문제이다.또 하나의 예술관이 대립되는 이유는 ‘예술을 사회적 틀에 맞추어야 하는가?’의 문제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하렘의 얘기로 오페라를 쓴다고 했을 때의 다른 음악가들의 말도 안된다는 반응, 그리고 발레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그러한 주제와 춤이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한다. 에서는 이 대립이 중국의 휘몰아치는 역사 (특히 문화대혁명의 시기도 포함하는)를 지나고 있어서 더욱 심화되어 표현된다. 샬롯이 도즈에게 “일본놈들 앞에서 춤췄지?”라고 물으며 얼굴에 침을 뱉는 장면에서부터 작은 불씨처럼 드러나는 이 대립은 문화대혁명의 시기에서 더욱 심하게 드러난다. 데이가 재판 장면에서 ‘아오끼 대좌가 살아있었다면 일본에 경극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대답하는 모습은 그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경극을 사랑하고 경극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산주의자들도 까불면 싸우겠다는 말을 했던 샬로는 공산당에게 문초 당하며 이 작은 말 한마디를 후회한다. 경극 예술가들이 목에 푯말을 메고 “민족의 분을 풀자”, “처단하라”는 말과 함께 가해지는 폭력을 받는 모습은 예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강력한 기준으로 그들이 재단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사회가 먼저인가 예술이 먼저인가 질문을 던진다.의 이러한 장면들은 “예술과 예술가가 분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들게 한다. 특히나 데이의 경우,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라는 문장 때문에 수없이 가혹하게 혼나야만 했고 도즈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우희’로서, 경극배우로서만 살아왔다는 점은 이런 질문을 더 강하게 들게 했다. 그리고 스승들은 수도없이 우희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서 모차르트는 자신은 못났을지라도 자신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고 어필한다. 요즈음 대중예술가들에게도 이러한 논란들이 있다. 가수 이수에게는 ‘그의 성기는 미워하되 그의 성대는 미워하지 말라’는 농담을 하기도 하고 배우 이병헌에게는 ‘연기는 참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예술가가 특정 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경우 ‘불매하자’는 목소리도 있다.대중예술을 비난하던 엘리트들 이전에도 예술사에서는 비판과 비난의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고딕,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의 단어는 조롱과 비난에서 출발한 이름이다. 그 이름들은 예술의 ‘규칙’들에 갇혀 그 가치를 몰라본 사람들 덕에 생겨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비판하는 이들이 예술적 재능이나 안목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입체파’라는 이름이 마티스가 브라크의 그림을 비판한데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우희로 살며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던 데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틀’은 위대한 예술로부터 탄생했지만 그것이 정답이긴 힘들다. 성경 속에서 예수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수없이 언쟁을 펼쳤던 것처럼 미시적인 규칙들이 결국 가장 본질적인 것을 흐릴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모든 행동이 선한 것은 아니고, 틀에서 벗어나면서 본질적인 것도 흐리는 것들이 있는 만큼 비판의 목소리가 부재해서도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무엇인가? 너무 궁금하지만 이것을 규정하면 규정할수록 모차르트의 음악은 빗겨갈 것이다. 예술이 사회적 기준에 얼마나 부합해야 하는지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아무 기준도 없어야 할까? 예술의 종류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작품의 주제에 예술가의 정신이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지는 작품이 존재할 수 있고, 그러한 의도는 가지지 않더라도 잘못된 가치관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전무하다고 보긴 힘들다. 예술이 삶과 얼마나 깊게 결부되어 있는지 그 차이에 따라 예술관은 갈린다. 물론 에서 나왔던 지적들은 일종의 트집에 가까운 것들도 있었지만 예술이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삶에 기여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경극 학원에서 가해지는 학대들을 보면 예술만을 위한 예술의 민낯이 드러나고 예술과 삶이 정말 동떨어져 있어도 되는가 의문을 들게 한다. 도즈는 없고 우희만 있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 좋은 작품과 좋은 무대가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TV라는 매체의 등장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의미했다. ‘대중’이라는 존재가 생겼고, 대중들은 TV프로그램의 소비자였기 때문에 대중이 TV 속 인물들에 부여하는 인기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 해졌다.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구드윈이 차를 구경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드윈은 차를 쓰다듬으며 차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는데, 셀러는 엔진소리보다 라디오 소리가 더 좋다고 말한다. 이는 꼭 산업혁명보다 미디어의 등장이 더 큰 힘을 갖는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21show의 이전 연승자였던 스템펠은 TV는 구텐베르크 이후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한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미디어의 등장을 상징하는 발명품으로, 스템펠이 하는 말을 꼭 미디어라는 종교의 광신도와 같이 느껴진다.TV속 세계에서 힘을 가지는 것, 인기를 가지는 것은 수많은 대중들을 등에 업고 가는 것과 같다. 그 TV의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은 TV산업이 시키는 대로 휘청거린다. 영화 속에서 TV는 마약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TV라는 마약에 중독된 것이다. 스템펠, 밴도런, 엔라이트가 그러하다. 자신에게 하나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인데 그들은 TV속 세계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한다. 하지만, TV의 힘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러한 의사결정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밴도런이 첫 승을 거둔 후에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바로 TV라는 마약의 맛을 처음 본 순간이다. 그는 이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는 문제를 틀리게 답하는 것도 부정이라며 자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계단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는 그 승리의 기쁨에, 상금의 기쁨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인기에 심취해버리고 만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TV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나락으로 떨어져 갇혀버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구드윈이 찰스를 압박해올 때, 찰스는 구드윈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묻자 구드윈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답한다. 그때 찰스는 구드윈에게 “And I would?”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왠지 누군가라도 이러한 TV권력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또한, 구드윈이 집에 들어왔을 때 퀴즈를 풀고 있는 아내에게 TV는 방에 들어갈 수 있지만 담배는 들어갈 수 없냐 말한다. 구드윈의 이러한 대사는 TV가 담배만큼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한국의 많은 TV show들에서도 여전히 21show와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다. ‘과도한 연출’, ‘악마의 편집’등은 시청자들에게 현실과 다른 화면을 보여준다. 물론 그걸 그대로 믿는 시청자들도 있지만, 영화 ‘퀴즈쇼’의 배경이 된 때보다는 시간이 지난 지금이기에 다 조작이라며 의심을 가지는 시청자들도 많다. 1957년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아직까지도 비슷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TV산업의 복잡한 세계 때문이다. 구드윈은 이 문제는 한 명을 잡으면 해결되는 매커시즘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스템펠, 밴도런, 엔라이트가 잡힌다고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영화속에서 “부정한 게 대체 무엇이냐? 피해자는 없었다. 모두가 즐겁지 않았냐”는 대사가 나온다. TV산업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이러한 문제들을 계속해서 발생시키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나 뉴스와 달리 TV show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목적 아래에 탄생했다. 그리고 대중들은 싼 값에 혹은 거의 무료로 TV show를 통해 즐거움을 얻고 그 재밌는 TV show가 굴러 가기 위해서는 광고주의 자본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광고주의 입맛에 맞출 필요가 있다. 또한, 방송국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들은 TV권력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에 출연자들과 연출자들은 이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나 TV라는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은 진부한 것을 싫어하고 쉽게 질리며 새로운 것을 바라기 때문에 TV show는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그러한 조작을 저지른다고 한다. 혹은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TV show가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면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밝혀지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닐까? 영화속에서 TV는 사람들의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는 말이 나온다. 퀴즈쇼가 짜고 치는 방송이라는 걸 안다면 그 긴장감, 긴박함과 짜릿함이 주는 감동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TV show가 영화나 소설 같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만의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조작되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사람들은 일상의 낙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재미는 원했으나 부정을 원하진 않았을 거라는 거다. 위에 나오는 논리들은 시청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람들이 TV show가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정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엔라이트는 구드윅에게 조작을 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거짓말도 사실이라 믿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즉, 엔라이트는 자신이 TV show를 통해 한 거짓말을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 영향력을 알고 있다는 거다. 또한, 스템펠은 퀴즈쇼에서 유태인들이 항상 기독교도들에게 지고, 연승횟수도 기독교도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TV속 장면들은 분명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픽션인 걸 아는 영화나 드라마도 그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퀴즈쇼에서 그러한 결과가 나온다면 더더욱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엔라이트는 이러한 TV의 영향력도 역시 합리화 수단으로 만든다. 스템펠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서, 찰스는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조작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사람들의 생각과 경향이 TV show에 담길 수도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 혹은 예상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찰스는 그런 의미에서 대중이 원하면서도 개연성을 갖는 진정한 스타였다. 그의 배경은 그에게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21show를 통해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찰스에 대한 기대가 생기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찰스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으며(사실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며) 찰스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자 칭찬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 사건을 파헤치는 구드윅조차 찰스를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론 “발언 이상의 책임은 져야한다.”
우연과 필연은 지난학기 까지 논어와 가톨릭 교리에 매료되어있던 나의 가치관에 새로운 방향성을 주었다. 모노의 시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종교라는 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고, 정말 진리라는 게 존재하는 구나하는 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읽으려 노력했지만 자기방어가 일어난 것인지 지난학기까지 갖고 있던 생각들이 크게 무너지거나 신앙심이 무뎌진 건 아니지만 모노 덕에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고 앞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불변성과 합목적성, 무엇이 우선인가 ]우연과 필연에서는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구분하며 생명체의 속성(합목적성, 불변성, 형태 발생적 메커니즘)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모노는 합목적성을 불변성보다 우선에 두는 생기론과 물활론적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우연과 필연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중요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체는 불변성과 합목적성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생기론, 물활론과 진화론은 불변성이 우선이냐 합목적성이 우선이냐 하는 작은 차이에서 발생해 큰 차이를 만들었다.생기론과 물활론이 합목적성을 불변성보다 더 우선에 두어 온 이유는 인간이 더욱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 불변성보다는 합목적성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과거의 철학들은 합목적성을 강조한 결과 한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불변성을 합목적성보다 우선에 둔 진화론적 관점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 한계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작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철학, 종교들은 합목적성을 우선에 둔 기초적인 가치관을 토대로 여러 이론들과 가설들을 세워왔다. 그러나 과학과 진화론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했다. 그런 면에서 가설 설정에서 가치관의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다. 가설의 방향성은 특정 가치관에서 비롯될 수 있고, 가설의 방향성에 따라 실험들이 이루어진다. 모노가 진화론적 모노는 항체를 예시로 들며 항원은 그저 룰렛게임의 선택권자일 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이라 한다. 그동안 사람들이 갖고 있던 ‘진화’에 대한 생각은 ‘발전’, ‘필연’ 이었고, 인간은 그 진화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존재이며 발전되고 우수한 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모노는 생명체의 변화지향성보다 불변성을 더 강조한다. 사실 진화라는 과정은 ‘우연적 요란’과 ‘자연선택’ 둘 중 무엇 하나가 빠지면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정이다. 또다시 기존의 사람들의 관점과 모노의 관점은 또 어느 것에 중점을 두느냐 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이 ‘진화’와 ‘유기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는 사례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경영학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영학 이론에는 종종 ‘유기체적 특성을 갖는다.’와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고, 기업을 환경에 맞추어 변화해야 하고 환경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러한 면에서 진화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우연적 요란’보다 ‘자연선택’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언어의 선천성과 후천성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언어는 선천적인 능력(생물학적 능력)과 후천적인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혹자는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다하고 혹자는 후천적 교육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능력은 발현되지 못하므로 후천성이 더 중요하다 한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언어에 대한 연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솔직히 중요성을 따지는 논의들의 결론은 ‘둘 다 중요하다’일 수도 있다. 서양철학의 뿌리가 되는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생각해보자. 둘 다 자신들이 마주한 현상을 보고 각자 나름대로 탐구한 후 나온 결과일 것이고 사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관점(불변성 추구)을 따르고 부분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점(변화하는 모습)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또 둘 다 맞는데 무엇이 더 벗어나 우연과 필연을 읽으면서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시점의 차이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일들을 보다 우연적이라 느끼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보다 필연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특정한 일에 대한 이유나 과정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일의 발생에 대해 더욱 당연하다고 납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오해가 발생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예시를 들어보자. 철수가 과 친구인 영희와 사귀게 되었다. 철수와 영희가 사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철수와 영희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사귀기 위해서는 철수와 영희가 ‘같은 나이여야 하고, 같은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비슷한 학습능력을 가져야 하고), 같은 과에 입학해야 하고(비슷한 진로를 생각해야 하고), 호감이 생길만한 개인적 교류를 가져야 한다.’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호감 형성의 유무’이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필연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우연적인 불씨일 수 있다. 이렇듯 우연과 필연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연장선상에 존재할 수 있고, 관점에 따라 우연으로도 필연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우연과 필연은 주관적 영역이냐 객관적 영역인지에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주관성이 더 개입되는 개인적인 일의 경우 사람들은 그 일을 더 필연적이라 착각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한 문제였기에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인간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했다.다행히 ‘우연 : 완전히 독립적인 두 사건이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에서 맞아떨어지는 확률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경우’ 라는 우연이란 단어에 부여된 정의 덕에 모노는 돌연변이의 출현이 ‘우연’이라 설득할 수 있었고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합목적성보다 불변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에 매몰되어 그 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노는 우주에 생명체의 출현은 유일무이 한중요한 점은 인간과 그 외 동물간의 차이점에 중점을 둘 것이냐, 공통점에 중점을 둘 것이냐, 차이점이 얼마나 커야 크다고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경계선은 어디인지, 경계선이 필요한지가 핵심이다. 인간은 당연히 로봇과, 동물과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기존에 받아들여지던 인간의 특성을 로봇이 갖게 되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다. 단지 로봇이 옆집 철수에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를 크게 느끼는 이유 또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경계선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이러한 논의는 정확한 사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설정된 경계선의 토대가 되는 ‘밈’의 영향을 꽤나 받는다고 생각한다.)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개인적 견해를 밝히자면 나는 인간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경계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경계선이라는 게 사실 어차피 인간인 우리의 기준에서 세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인간이 아닌 동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선을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인간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영역에서 벗어난 문화의 진화를 겪어왔다. 생물학적인 영향아래에만 놓여있는 다른 동물과 다르게 문화, 밈의 영향아래에도 놓여있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같게 보고 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깊은 간극이 있다는 생각에서는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점선 같은 경계선을 설정해 두어야 한다.인간과 다른 동물이 인지적인 면에서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다면 인간과 AI는 물리적인 면에서 경계선이 있다. 「채피」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은 인간과 AI(여기서 AI의 인지능력과 감성은 인간 그 이상이다) 사이의함께 논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AI를 더 가까운 존재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러한 문제는 생명권의 경계에 적용될 수 있는데, 생명권 또한 제1원리들로부터 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권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도 사실 과학적 사실만을 기반으로 논의하긴 힘들다. 과학적 사실만을 근거로 한다면 생명권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생명권은 기존의 전통적으로 생명체라 받아들여지던 생물들은 포함해야 하고, 인지능력을 가진 AI 또한 생명권에 대한 이해와 논의가 가능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형태일 수 있어도 생명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권이 생명체에 특별함을 부여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개념일 수 있지만 생명권을 폐기하긴 아직 이르다고 보기에 흐려진 경계에 맞춰 생명권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중심적 환상 (혹은 물활론적 가치관) vs 과학 그리고 우리의 미래 ]난 스스로 인간중심적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영향아래 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인간중심적 환상 아래 만들어진 가치체계와 규범 등에 뼈 속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 그런 객관적이지 못한 ‘밈’으로 인한 폭력적인 잣대가 생겨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기에 ‘지식의 윤리’와 같이 최대한 객관적인 방향의 가치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개인적 가치관을 내려놓고 읽으려 애썼고, 모노의 주장을 받아들여보려 애썼다. 사실 이런 시도는 현재의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정당성을 얻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 갖고 있는 가치체계들은 모노가 비판한 물활론적 태도, 옛날의 결속들에서 출발한 것이 대부분이며 그 기반은 이제 썩은 동아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인간은 물활론적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현재의 여러 가치들의 토대가 되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쉽게 버려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윤.
힘을 내서 버텨내야 할까, 용기를 내서 나만의 길을 가야 할까? 근데 내 직장은 어디로 사라졌지? 는 눈치보지 않고 힘을 내서 나만의 길을 갈 때의 뻥 뚫리는 행복감을 간접체험 시켜준다. 정리해고 담당 상사는 우습게 그려지고, 상상이 현실이 된 월터는 영웅처럼 그려진다. 이 영화는 사람들 내면 깊숙한 곳에 들어있을 모험심 넘치고 자유로운 영혼을 꺼내어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영화 밖에 놓인 우리가 느끼는 이 청량감은 월터가 상상을 할 때의 청량감과 비슷하다. 월터는 모험심 넘치는 소년이었으나 현실의 팍팍함에 놓이고 난 후 그 모험심은 상상안에 갇히고 말았다. 영화 속 장면들을 패러디한 것 같은 월터의 상상들은 그가 그 영화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팍팍한 현실을 거세당한 상태로 버텨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월터는 이러한 LIFE지의 목적을 믿고 이해한 직원으로서 숀 오코넬을 찾아 나서는 여정에서 이 모토를 온전히 실천하고, 자신의 욕구가 만들어 낸 상상을 현실화한다. 하지만 그 상상이 현실이 되도록 한 것 또한 25번 사진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물론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월터의 직업의식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숀 오코넬의 애정이 담긴 장난은 월터의 부하직원 보프에게서는 ‘선배가 당장 안 나타나면 날 자르겠대요’라는 말을 나오게 만들었다. 영화는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용기를 가지라고 말해주지만, 실상 월터의 가계부에 적힌 그린란드 항공료는 올라올 뻔한 용기를 거세하게 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실상은 구조조정의 위험에 처해있지만 월터가 느끼고 있는 자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틈틈이 걸려오는 토드의 전화는 맥을 끊는 일명 ‘맥커터’마냥 자연의 웅장함에서 벗어나 자꾸 현실을 인식시켜준다. 월터의 현실은 나의 상상이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항공료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영웅이 되어야 한다.월터가 LIFE지 표지를 장식하는 모습은 LIFE지의 주인공, 그리고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노동자들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LIFE지 표지를 장식한 숭고해 보이는 노동자 월터는 구조조정 당한 대상이다. 노동자들은 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사람들인데 객체가 되는 모습, 그들의 숙련은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모습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이러한 숭고한 노동자들에 위로를 건네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씁쓸함을 내포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 숭고한 노동자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월터의 현실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국 월터처럼 소중한 피아노를 팔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가족들이 이를 두고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현실에서 월터의 현실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 삶에 있어서 쳇바퀴 굴러가는 직장생활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아름답다 하지만 피아노를 팔아야 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현실의 노동자들은 부당해고 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테드 헨드릭스 같은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며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보프의 문자를 받고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를 보면, 또한 월터 미티의 상상도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월터의 현실을 지속하기란 녹록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생계의 문제란 생각보다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공자 또한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낭만적이기만 한 영화들은 생계의 중요성을 삭제하기도 하지만 삶의 안정과 생계가 없는 삶은 불안한 방황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이러한 무력감을 없다고 얘기하진 않는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월터의 가계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압박은 에서 지적했던 예술가들이 동시에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일맥상통한다.
저자는 사람들을 형태와 상관없이 개인으로서 대중과 소수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대중은 특별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으며 매순간 물결을 따라 표류하고 일반적 유형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범함’의 권리를 당차게 주장하며, 자신이 완벽하다 생각하고 ‘완전’해지려 노력하지 않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 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와 달리 소수는 특별한 자격을 갖췄으며, 자신에게 더 많은 어려움과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며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대중들이 소수가 누리던 것들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군중의 충만이 일어났다 말하고, 군중을 위한 자리가 아닌 것을 군중이 차지하기 때문에 자리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에는 적어도 소수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전문활동에 종사했으나 지금은 대중임을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회가 귀족적일 수밖에 없으며 비귀족화는 즉 사회임을 포기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평준화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현재는 거대함의 시대이며, 대중의 난폭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평등권에 대해 언급하며 평등권이 이상에서 현실이 되었음을 얘기하며 대중지배를 두려움없이 수용하는 게 왜 문제인지 설명한다. 그는 지적인 폐쇄주의로 인해 대중이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느끼며 지적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근거 없이 견해를 강요하는 태도로 인해 토론의 중지가 일어나고, 폭력이 제일의 이성이 되는 ‘직접행동’이 대중의 개입으로 공식 승인되었다고 말한다.그의 이러한 주장은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환상을 깨 준다. 어떤 사회도 완벽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기에 당연히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문제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책이 쓰이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대중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는, 중요한 걸 생각하지 않는 편협한 태도를 꼬집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대중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느껴지고 때때로 비하적인 태도를 보이며 대중의 반역이 어느 시대의 문제보다 심각하다는 듯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의 글 곳곳에서는 대중을 위축시킬 수 있는 문장들이 보인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물론 그도 그렇게 주장하진 않는다.) 그는 대중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지적하는데, 상층과 하층이 분리되어 있던 과거에는 교양 있는 사기꾼들이나 책상물림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거 다른 형태의 사회에서도 집단의 시각에 갇혀 진리와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부류들은 존재해왔다. 그러나 대중은 ‘무근거’로도 무분별한 발언의 기회를 가진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발언의 기회가 없는 사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상층과 하층이 분리된 사회에서는 하층의 의견이 배제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아예 들을 수 없다.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시끄럽긴 하지만 모두가 자격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는 이것이 진리를 위협한다고 말했지만, 대중이 지배하지 않던 시대에서도 진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은 존재해왔고 대중의 쉽고 간편한 소리들은 때때로 현실과 가장 맞닿은 소리들이며 진리의 틀 밖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것이 평범함이 무기가 될 때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 생각한다.그러나 존중과 경청의 태도가 없는 것이 문제라는 건 깊이 공감한다. 대중으로서 우리는 근거,자격,경청,존중의 태도를 가지는 ‘소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것에 표류되어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인정한다. 대중이 소수를 배척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대중(그가 정의 내린 대중의 의미가 아닌)이 지배하는 사회를 좀 더 믿고 싶다. 그의 말처럼 사회는 귀족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이 소수로 즉 귀족으로 변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 자리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귀족이 될 수도 있다. 상층과 하층이 분리되었던 과거와 달리 엎치락뒤치락하며 대중과 소수가 섞여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소수의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대중의 무분별한 소리들을 듣고 교양 있게 힘을 실어주거나 교양 있게 지적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도래했기에, 대중의 반역이라는 것이 정말 전무후무한 문제일 수 있다. 그 어느때보다 조화를 이루고 살기 힘든 사회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누군가가 배제되는 형태의 사회가 더 조화로워 보인다고 해서 더 우월하지는 않다. 대중의 반역이 우리 사회를 과거의 사회보다 더 큰 위기로 빠트릴 것이라는 건 어찌 보면 대중과 구분 짓고 싶어하는 일종의 배타성을 갖는 엘리트들의 시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군중을 위한 자리가 아닌데 군중이 차지한다는 것에는 별로 공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환상을 깨 주고, 대중들이 그가 말하는 ‘대중’에서 벗어나 ‘소수’로서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데에서 이 글은 큰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