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 스코글런드목차1 작가약력2 작품활동 시대적배경3 뉴웨이브 사진4 샌디스코글런드의 사진5 주요작품6. 샌디스코글런드의 작품미학1.샌디스코글런드 약력1946년 보스톤 태생스미스 대학과 아이오와 대학에서 미술 공부 후 일리노이 주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 1972년부터 76년에 걸쳐 하트포드 대학에서 강의했고, 그후 아트가스 대학으로 옮겨 교편을 잡는 동시에 사진 제작 활동을 계속 했다.그녀의 예술 활동은 미술로부터 출발하여 학창시절에 커다란 조류였던 미니멀 아트의 영향을 받고 그 종류의 조각을 제작하였다. 그 후 이번에는 커다란 물결이 된 개념미술에 끌려서 이러한 양식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1976년경부터 이러한 양식의 작품에 거리감을 느껴 미술을 포기하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그녀가 바라던 예술은 아니었으며 이 시점에서 새로이 고안해낸 것이 자신의 출발점인 ‘조작과 필름 만들기‘ 의 절충에서 고안한 현재의 작품 양식이다.1979년 캐스텔리 그래픽 등의 그룹전에 선발되어, 1981년에 같은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때 발표된 가 주목받아 휘트니 미술관의 “비엔날레 81”전에 선정됨과 동시에 같은해 『라이프 사진연감』에 와 두 작품이 게재되었다. 그 후 그녀는 구성사진의 기수로 평가받게 되었다.2. 작품활동 시대적 배경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사진계는 사진사상 보기 드물게 활기를 띠게 된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에 발화한 ‘뉴 웨이브’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의 사진이 커다란 물결을 가지고 번졌지 때문이다. 이 시기는 사진의 전환기인 동시에 하나의 시대가 전환점을 지나서 새로운 지평선을 연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 뉴웨이브의 출현은 사진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들 한 무리의 진지한 사진가들은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의식과 감성을 변혁 시켰다. 지금까지의 사진은 ‘찍는다’ ‘촬영한다’는 것이었으나 뉴 웨이브 의 많은 사진은 ‘만든다’ 라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그들은 종래의 ‘외계를 본다’ 하는 전통적이 사진과 결별하고 조각과 같이 제작하는 사진, 연극과 같이 연출하는 반사진을 창조 하였다.3. 뉴 웨이브 사진뉴 웨이브 사진의 대다수가 구성사진, 무대 사진으로 불리우고 있듯이 무대미술에서처럼 스튜디오 안에 소재를 들여와서 장치를 구성하고, 촬영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이전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순수사진을 제작하는 작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스 크림즈나 듀안 마이클의 연속사진 등은 일종의 무대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진에는 찍혀진 대상의 리얼리티가 살아 있었다. 그런데 뉴 웨이브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리얼리티를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포기하고 있다.이 조류의 사진가들에게 공통되는 특징은 현실세계에 무관심해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촬영하는 대상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허구의 세계이다.종래의 사진이 현실을 도려냄으로써 성립해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진은 반사진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즉 사실과 의사 이벤트의 경계가 소멸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4.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1980 년대의 진지한 사진가들은 우리들의 의식과 감성을 변혁시키고 있다. 샌디 스코글런드는 이 두드러진 특징을 갖춘 대표적인 작가이다.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은 그 밖의 구성사진가에게도 해당되겠지만, 사진과 미술이 교차한 지점에서 그들의 작품이 형성되고 있다.비평가들은 종종 샌디 스코글런드의 설치작품에 대해 ‘상상적 공간 속에 연출한 환영과 허구의 세계’라고 말한다. 환상과 위조의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나아가 우리가 경험해야 할 사건들이 마치 현재진행형처럼 펼쳐져 있다. 이 허구의 세계에는 대상을 통해 바라본 파괴된 자연의 질서와 생명력을 강조하는 상징적 드라마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불안심리 및 현대인의 무분별한 소비문화를 역설적으로 꼬집은 풍자극도 들어있다. 샌디 스코글런드가 연출하는 이 상징적 드라마에 동원된 주역들은 대부분 실물인간과 실물에 가까운 모형들로서 대부분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가장 간명한 언어로서는 사진을, 그리고 가장 훌륭한 형태로서는 조각을 생각했던 스코글런드는 르네 마그리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관계를 상징하는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1980년대 초반부터 제작에 착수했다. 「불안의 징후」 시리즈인 80년대 설치작품들은 이미 1979년에 제작된 3점의 인스톨레이션 작품인 와 그리고와는 내용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이들 3점이 우리 주변의 친숙한 생활도구들을 이용하여 현대인의 부정적 삶의 행태를 상징하고 있다면, 80년대 초반의 작품들인 나 는 혹시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인간의 비극적 드라마라고 하겠다.5.주요작품해설방사성 고양이-이 작품은 인간이 제조한 핵 방사능에 오염되어 유전자가 변한 광폭한 고양이들이 노부부의 노후를 공격하는 가상적 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그 이기심의 피해자인 자연과의 대립, 즉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부정적 관계를 초현실적으로 묘사한 이 설치작품에는 인간의 암울한 미래가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스코글런드가 설정한 무대공간을 보면 실내라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열려진 현실공간이다. 비록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시나리오에 의해 세트된 무대일지라도 시간을 초월하는 현실공간이라고 하는 데는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이 과거와 현재이고, 그 메시지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 무대는 노부부가 살고 있는 현실공간이다. 그렇지만 고양이의 방사능 오염은 노부부가 젊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고양이들의 적개심은 미래에 대한 경고의 상징으로 해석된다.금붕어의 복수-환경 생태계 문제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인스톨레이션 리얼리티‘ 의 대표적 예이다. 청색과 녹색으로 칠해진 밀폐된 실내에는 오렌지색의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방 가운데 위치한 침대 위에는 모자 관계인 한 여인이 누워있고 가장자리에 소년이 걸터 앉아있는 무대가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의 함정은 물 속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구성이다. 물 속에서 금붕어들은 자유자재로 헤엄치거나 부유하고, 또한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고 있지만 인간은 잠 못 이루는 고통에 빠져 있다. 이 작품은 오염된 환경에 의해 고통받았던 금붕어들이 오염되지 않은 물 속에서 인간에게 복수하는 것이 주된 메시지이다.이렇게 샌디 스코글런드의 설치 작품은 리얼리티를 위해 설정된 비현실적 상황들, 이를테면 모사와 기호에 의한 사회풍자와 유머, 아이러니와 역설, 편집광, 부조리와 어리석음, 진부함과 이기심, 그리고 생명경시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6.샌디 스코글런드 작품의 미학스코글런드의 설치작품의 미학적 카테고리는 일차적으로 ‘주관주의’이다. 이는 미학적 접근방식의 한가지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개인적인 아이디어와 표현의 독자성이다. 또한 스코글런드의 주관주의 특징은 이즘이나 이론이 아닌 열려진 예술표현 방식이다. 스코글런드의 설치작품의 주관주의적 접근태도는 당시 사진과 회화 사이의 해묵은 대결국면이나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소멸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스코글런드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연기자 그리고 연기자와 관객 사이에서 교감되는 몇 가지 중요한 주관주의적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첫째, 작가와 연기자 사이의 침묵스코글런드는 무대에서 침묵을 연출하고 있다. 침묵은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가장 애호되는 표현형태 중 하나로서 긴장과 불안을 암시한다. 이것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 이 있다.
목차1)결성 동기 및 과정2)초기 - 초반 인기와 상업적 목적에 치중한 활동3)중기 - 초기적 성향에서 서서히 조금씩 변화를 하게 된 과정4)후기 - 인기추구에서 아티스트??로의 전환된 시기공식앨범해체 후 그들의 활동1)존 +(오노 요코)2)폴3)조지4)링고비틀즈비틀즈(The Beatles)는 존 레넌(John Lennon), 폴 메카트니(Paul Mccartney),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링고 스타(Ringo Starr)로 구성된 4인조 대중음악 그룹이다.1) 그룹의 결성존 레논(John Lennon)은 사춘기 시절 쿼리맨(Quarrymen)이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당시 쿼리멘은 결혼식장이나 친구들의 파티에서 연주하는 정도의 밴드였다. 그러다 이들이 1957년 7월 리버풀의 한 교회에서 공연을 갖게 되는데, 존 레논은 친구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처음 만나게 되고 폴 매카트니가 쿼리멘에 가입하면서 그와 존 레논은 함께 습작을 해나가며 실력을 쌓아간다. 그 다음해에는 폴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1년 후배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그룹에 가입하면서 그룹은 트리오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50년대 후반에 걸쳐 그룹명을 여러 번 바꾸다가 1960년, '실버 비틀스(Silver Beatles)'라는 이름을 갖는다. 이는 그들이 좋아하던 '버디 홀리와 딱정 벌레들(Buddy Holly & The Crickets)'에서 착상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단어인 'Beat'를 결합한 것이다. 그리고 베이시스트로 존 레논 의 친구인 스튜어트 셔트클리프(Stuart Sutcliffe)와 드러머 피터 베스트(Pete Best)를 영입하여 5인조 체제를 갖추게 된다.2) 함부르크 시절5인조 체제를 갖추게 된 비틀스는 독일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하루 8시간 이상의 연주를 하는 등의 강행군을 통해 실력을 쌓아갔다. 함부르크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결코 편안한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훗날 그들의 저력을 다지는 중요한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소위 ‘비틀즈 룩(Beatles Look)’으로 불리는 하나의 패션 경향이 된다.3) 비틀즈의 성장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캐번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1961년 레코드 매장 사장이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은 우연한 사건으로 비틀즈가 연주하던 클럽을 찾아가게 되고 비틀스의 재능을 알아 본 그는 비틀즈에게 레코딩 계약을 체결해 주기 위해 많은 레코드사를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당시 EMI 산하의 레이블 팔로폰(Parlophone)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만나게 된다. 당시 클래식 앨범만을 제작하던 팔로폰에서 코미디 레코드 등을 제작하고 있던 조지 마틴은 비틀즈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 마침내 비틀즈의 앨범이 발매되기에 이른 것. 그러던 중 62년 8월에는 드러머 링고 스타(Ringo Starr)가 비틀즈에 가입, 이로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비틀즈 4인조가 완성된다비틀즈의 매니저가 된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효율적으로 또한 솜씨 있게, 지저분하고 버릇 없는 청년들이었던 비틀즈를 우수하고 전문적인 연주자들로 바꾸어 놓았다.이들은 62년 9월, EMI의 애비로드(Abbey Road) 스튜디오에서 그들의 자작곡 'Love Me Do'를 녹음, 이 싱글은 영국 차트 20위권까지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후 1963년 2월 발표한 'Please Please Me'가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비틀스의 성공 시대는 본격적으로 막을 열게 된다. 앨범 [Please Please Me]가 30주간, 뒤이어 발매한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 21주간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비틀스는 가장 성공적인 밴드가 됐다. 비틀매니아(Beatlemania)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영국 내에서 비틀스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미국에서 비틀스는 여전히 무명 밴드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규모 레이블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틴 아이돌 스타로서의 비틀스가 아닌 음악인으로서의 비틀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단순한 곡 구성에서 벗어나 보다 발전된 하모니와 다양한 창법, 그리고 인도의 전통 악기 시타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변모를 이뤄낸다.4) 변화하는 비틀즈1966년에 접어들어 [Revolver]를 발표할 당시 열악한 라이브 기술과 음악적으로 무의미한 공연에 회의를 느끼게 된 비틀스는 라이브 공연을 자제하게 된다. 엔터테이너로서의 활동을 자제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이들은 각각 개인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존 레논은 'How I Won The War'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폴 매카트니는 영화 'Family Way'의 영화 음악을 맡았으며, 조지 해리슨은 인도 음악과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1967년 이들은 새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모이게 된다. 몹탑(Mop-Top) 스타일(더벅머리에 정장차림)에서 벗어나 머리를 기르는 등 이미지 변신을 꾀한 비틀스는 더 이상 틴 아이돌 스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변화는 그들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탄생시켰다.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평가되는 이 앨범은 그 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보다 깊이 있는 주제와 발전된 음향 효과, 다양화된 악기를 도입하는 등 실험적인 면모를 보여줬다.[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미국 차트 정상에 오르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동안 1967년 8월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약물 과용으로 사망한다. 그 뒤 비틀스는 결속력이나 비지니스적인 면에서까지 점차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 폴 매카트니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리더쉽을 발휘 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욱 악화돼 갔다. 그는 TV영화 'Magical Mystery Tour'를 위해 직접 각본에서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으로 나서기도Be]가 뒤늦게 발매됐다. 그 후 녹음과정과 리허설 및 애플 빌딩 옥상에서 가진 실황을 묶은 "Let it be"라는 영화가 마이클 린제이 감독 연출로 제작되었다.비틀즈가 활동한약 7년간 67곡의 싱글과 26장의 앨범을 발매 했다그중 공식앨범은 13장이다.1집 Please Please Me (1963년 3월)데뷔이 전의 음악과 그 이후의 음악을 연결해주는 과도기적인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미국의 초기 Rock'n Roll과 R&B계열의 아티스트들을 모방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작곡과 보컬스타일을 터득했고 클럽무대에서 강렬한 Beat를 강조하고 있다.2집 With The Beatles (1963년 11월)1963년의 가장 잘 팔린 앨범이다.3집 A Hard Day's Night (1964년)비틀즈의 첫 번째 영화였던 "A HARD DAY'S NIGHT"는 최고의 비틀즈 영화로 꼽히고 있 고 특히 사운드트랙 앨범의 수록곡들은 모두 명곡들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비틀즈 팬들에 게 더욱 사랑받고 있는 앨범이다.4집 Beatles For Sale (1964년 12월)5집 Help! (1965년 8월)비틀즈의 음악이 반체제적이다, 소음에 불과하다, 등의 편견을 잠재운 앨범이다.6집 Rubber Soul (1965년 12월)대중음악에서 말하는 아트(art)단계로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앨범이다7집 Revolver (1966년 8월)'본격적인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자리바꿈을 한 앨범이다. 수록된 노래들을 하나의 주제 속에 엮어 앨범에 통일성을 부여한 것도 이 "Rubber soul"에서부터였다.8집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6월)비틀즈를 ‘예술가‘로 만든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로 대학에 대중음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설립되어 대중음악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동기를 마련하게 된다.9집 Magical Mystery Tour (1967년 12월)10집 White Album (1968년 11월)비틀즈로서의 통일성은 잃어버렸지만]를, 1971년 가을 [Imagine]을 속속 발매하며 특유의 강한 정치적(반체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레논 특유의 흡인력에 힘입어 이 앨범들은 묵직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높은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었으나, 1972년 레논의 미국 비자 연장이 거부되는 바람에 그는 미국에서 쫓겨나게 되고 만다 (기각사유는 1968년에 있었던 마리화나 소지사건이었다고 한다). 레논은 곧바로 더블앨범 [Some Time In New York City]를 내놓으며 미국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지만, 이 앨범의 상업적 성과는 매우 부진하였다.게다가 레논은 이즈음 요코와도 헤어지는 상황을 맞으며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Mind Games](1973), [Walls And Bridges](1974) 등의 앨범들이 큰 인기를 끌고, 1974년에는 싱글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이 빌보드 1위에 오르며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된다. 1975년 리메이크 앨범 [Rock 'N' Roll]을 발표한 레논은, 이 작품을 끝으로 한동안 음악계를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요코와 재결합하였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아내 요코와 아들 숀(Sean)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976년에는 그런 레논에게 미국정부가 드디어 영주권을 발급하기도 했다.1980년 11월에 [Double Fantasy]를 출반하는데. 앨범 커버는 레논과 요코의 행복한 순간을 담고 있었다. 비극적이게도, 이 행복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해 12월 8일, 존 레논은 뉴욕 자신의 집 앞에서 마크 채프먼(Mark Chapman)이란 인물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만다.존 레논의 사망 소식은 곧 전 세계 레논 팬(및 비틀즈 팬)들에게 전해졌고, 그 해 12월 14일 뉴욕 센트럴파크(Central Park)에 모인 10만여 명의 팬들은 존 레논을 위한 10분간의 묵념을 가졌다. 앨범 [Double Fantasy]와 싱글 ‘(Just Like) Star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