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를 읽고부은 발을 뜻하는 오이디푸스. 어쩌면 그의 이름은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될 그의 인생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윤리관이 진화함에 따라 근친상간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자리잡게 되었다. 나는 고귀한 아이가 태어난 후 예언을 들었던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던 그의 기분을 상상해본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예언. 이를 들은 후 왕은 자신의 아들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예언이 결국에는 모두 맞게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괴로움이었을까,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묘사하라고 하였을 때 이 예언을 들었던 그들의 얼굴 표정이 꼭 맞게도 해당되지 않나 싶다.오이디푸스는 나쁜 사람인가? 그는 아무도 풀지 못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했던 지혜의 왕이자, 역병을 맞아 힘들어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살인자들을 찾아 벌하겠다는 다짐을 노래로 부른다. 그 노래 중 일부의 구절을 인용하면 이렇다. ‘그대들도 보게 되겠지만, 나는 당연히 이 나라와 신들을 위해 그대들의 복수에 가담할 것이오. 왕을 시해한 자라면 그가 누구든 내게도 그런 손으로 같은 짓을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분을 돕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오.’ 여기서 그 분은 아폴론을 뜻한다. 이 노래를 불렀을 당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미래와 결말에 대해 알지 못했으리라.그는 끝없이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이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겪게 되었다. 이 우화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인 ‘너 자신을 알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찾는 것은 인류가 자아를 탐구하는 기원과도 같은 것으로써, 오이디푸스 혼자만의 간단하고 우연적인 잘못이 아니다. 인류 배후의 세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인식과 경외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호성과 함께 왕위에 올랐던 오이디푸스는 테베인들의 환호성으로 그의 시작을 채운다. 그러나 과부가 된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비극적 운명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잔인한 운명의 여신들은 그의 운명을 바꿔주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위에서 언급했듯, 과연 오이디푸스는 나쁜 사람인가? 그는 악인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선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을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 우화 속의 운명은 절대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는 피하고자 했던 것들을 결국에는 마주하고,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운명은 무엇일까. 내 손에 닿지 않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운명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이 노력하여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섞인 시간들은 그저 ‘그럴 운명이었다’ 하고 끝나게 되는 문장일 뿐이다.신들은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에게 20년의 행복을 허락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호의가 아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크게 다치듯이, 행복이 클수록 이후에 겪을 고통은 수백 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이를 낳는다. 이름들을 간단히 기술하자면, 쌍둥이 아들 에테오 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그리고 쌍둥이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있다. 이들은 오이디푸스의 자식이자 그의 동생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가정이지만, 내부에 근친상간이라는 반윤리적인 행위가 수반되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끝나게 될 시한부 행복이다.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된 후 겪었을 심정은 어땠을까? 마치 길고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나갔지만, 처음부터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아 영원히 풀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운명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아, 영원히 그 굴레 속에서 달려야 하는 그의 인생처럼 말이다.그는 운명으로 인하여 태어나자마자 숲속에 버려졌다. 그러나 결국에 살아남는다. 그리고 돌고 돌아 운명과 맞닥뜨린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그는 자살한 왕비의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푹 찌른다. 피투성이가 된 눈에서 흐르는 피는 수염을 적신다. “이제 나는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엑소도스는 말한다. 테베의 시민들이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었고, 가장 강했던, 그대들이 부러워했던 이가 재난에 쓸린 모습을 보라. 인간은 그 마지막 날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이 마지막 날을 보기 전까지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이 우화에서 등장하는 강력한 운명론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는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이자 아버지이며, 그를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이오.’ 진실을 마주하지 않은채 살았더라면, 그는 웃으며 인생을 마무리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운명은 그가 알고 있어야만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희망’의 유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일찍이 자신의 예언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평생 운명에서 도망치며 살아야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이 존재한다 한들, 자신이 모른다면 그것은 과연 운명인가? 이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끔 만든다. 내가 만약 내일 죽을 운명이어도,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나는 남은 하루를 공포가 아닌 행복과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운명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프로이트는 ‘어머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남자아이가 아버지에게 살해 충동을 느끼는 현상’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짓는다. 오이디푸스의 잘못은 과연 무엇일까. 어릴 때 자신을 낳아주었던 부모님과 뜻하지 않게 이별하게 되었고, 이 결과 부모를 모른 채 자라나게 되었다. 우연치 않게 사람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비를 취하였는데 이것이 왜 잘못된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잘못 없던 행동이 비극임을 증명한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자신의 행동이 결국은 잘못된 것임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소원과 기억의 사이지금 판타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여기에 톨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반지의 제왕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장르가 왜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책을 통해 겪으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책 《끝없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욱 흥미로운 판타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이 책의 주인공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아이들에게 늘 놀림감이 되는 소년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이다. 그는 딱히 잘하는 것이 없고-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느낀다-자신을 스스로 혐오하며 갈구하는 아이이다. 그는 칼 콘라드 코레안더 책방에서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훔쳐다가 학교 헛간에서 몰래 읽기 시작한다.책 속의 세계는 절망적이다. 환상세계는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무’ 때문에 어수선하다. ‘무’의 속으로 끌려들어 간 환상세계의 존재는 거짓이 되어버렸다. ‘무’는 환상세계의 존재들을 현실 세계로 보냈기 때문에, 이 존재는 마을을 점점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점차 무화 되어가는 위기에 빠진 환상세계를 구하기 위한 소년 전사 아트레유의 모험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어린 여제는 환상세계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로서, 환상세계의 존속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트레유의 모험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나는 이 어린 여제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환상세계의 그 누구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를 죽여서 먹는 자, 살인을 저지른 자도 모두 같게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편견이 없고 권위를 이용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그녀를 환상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이 책에서 바스티안은 판타지 동화의 요소인 고립된 목숨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며, 학교에서도 낙제하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떠밀리며 지내는 아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잃어버려서 자신이 용기 있는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고립된 목숨이란,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인물들로 판타지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홀로 책 속으로 빠져들기를 좋아하는 바스티안이 이러한 조건을 훌륭히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바스티안은 상상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이후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책을 읽기 전에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였다. 그의 책에 대한 과도한 몰입은, 자기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촉발되었는지도 모른다. 점차 바스티안은 완전히 자신의 현실을 잊고 상상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소망을 하나씩 이룰 때마다 현실의 기억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설정이다.권력자나 정치인들이 높은 위치에 서게 되면 자신을 잊고 변해 가듯이, 바스티안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과도히 사용하고 친구인 아트레유를 배반하게 된다. 그는 왜곡되어버린 영웅으로 환상의 세계를 방황하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현실 기억도, 이름마저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그림들의 광산’으로 향하여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그림을 찾는다. 물론 그것은 실제 아버지의 그림이었지만, 기억을 잃은 그가 알 턱이 없었다.바스티안은 이후 ‘생명의 물’을 얻게 되어 바깥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되찾고자 하는 자신의 진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바스티안과 아버지의 재회와 눈물, 즉 생명의 물의 모습을 비춘다. 생명의 물은 결국 우리가 아름다운 순간에 흘리게 되는 눈물이었던 것이다.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원과 기억 사이에 있다. 생명의 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현실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환상세계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생명의 물이란 기억과 소원 사이에 있는 곳이었고 바스티안은 그 틈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그리고 책의 글자색 또한 이런 판타지의 요건을 충족시켜주는 데 한몫을 한다. 바스티안이 있는 현실 세계의 이야기는 붉은 글씨로, 바스티안이 읽는 책 ‘끝없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푸른 글씨로 쓰여 있는데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환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감마저 상실하여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만큼 구성이 치밀하고 짜임새 있다는 것이다.다른 판타지 작품들처럼 이 동화에도 인간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라는 두 개의 분리된 세계가 존재한다. 책 속의 이야기는 책 밖에서 읽고 있는 바스티안의 세계와 조금씩 맞물리며 이어지는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두 세계의 만남이 조금씩 확장된다. 그리고 바스타안을 통해 조금씩 두 세계의 조화가 이루어진다.이 끝없는 이야기에는 정말로 많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식암종, 파파할멈 모를라, 이그라물, 그라오그라만 등등 작가의 상상력이 총 동원된 끝없는 이야기는 이런 개성 있고 독특한 등장인물들로 인해 길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힐 수 있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도 사고의 범위를 넓혀 주어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게 해 주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유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책의 표지에 두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 있는 아우린을 그려놓아 책의 내용을 가볍게 담아내는 동시에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동시에 이 얽혀 있는 뱀들은 시작과 끝의 맞물림을 뜻하는 것 같다. 기억으로부터 소원은 시작하며, 그 소원은 언젠가는 기억이 되어 끝난다. 이 두 가지 대립적 요소들의 순환성은 독자들이 많은 생각을 할 여지를 남겨준다.
교육 관련 연구물 조사보고서-교육 기회 분배에 대하여차례1. 들어가며 (3p)2. 논문 조사보고서 (4~7p)-「생애 초기 교육 기회와 불평등: 취학 전 교육 및 보육 경험의 사회 계층 간 격차」 (4p)-「교육 기회균등에서 벗어나 있는 현행 학제」 (5p)-「교육 소외와 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복지정책의 과제」 (6~7p)3. 마치며 (8p)Ⅰ. 들어가며나는 현재의 교육 기회가 모든 학습자 집단에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모든 면은 상대적인지라 누군가는 이 의견에 반기를 들 수도 있지만, 내가 겪어왔고 보아왔던 대한민국의 교육 현주소가 그렇게 보인다.때문에, 이번 연구물 조사 활동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탐구했다. 첫 번째는 어떻게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나타나게 되는지, 두 번째는 현재의 학제가 교육 기회균등에 어떤 장애물로 작용하는지, 마지막으로 이러한 교육 기회 불균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과제를 다루게 되었다.첫 번째와 두 번째의 연구물은 유아기의 교육 기회 불평등 문제를 다룬다. 공교육 이전에 야기된 교육 불평등의 영향이 공교육 이후에도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아기의 교육 불평등을 시발점으로 삼아 연구를 전개했다. 가정의 영향, 학제의 영향을 문제점으로 다루고, 해결 방안으로써 유치원의 공교육화 추진을 제시한다. 격차가 일어나는 계기, 문제 현황, 해결 방안의 순차적인 흐름을 담는다.세 번째의 연구물은 유아기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교육 기회 불평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다룬다. 유아기에 처음으로 촉발되는 불평등적인 요인이 있지만, 이후 초등·중등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교육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이후의 격차 해소에 관한 내용도 연구에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Ⅱ. 논문 조사보고서1. 논문명 : 「생애 초기 교육 기회와 불평등: 취학 전 교육 및 보육 경험의 사회 계층 간 격차」(1) 논문 선정 이유불이 나면 화재의 시작점을 찾듯이, 불평등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현상이 일어나는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생애 초기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아기에 학습되는 많은 것들은 개인의 인생에 있어 아주 큰 영향을 차지한다. 그러나 가정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유아들은 각자 다른 교육 노출 빈도, 학습의 질 차이를 갖는다. 이는 이후에 분명 유의미한 차이와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해당 논문을 선정하게 되었다.(2) 논문의 요약 및 결론이 연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생애 초기의 교육 기회가 가족 배경에 따라 어떤 양상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한국 노동 패널조사(KLIPS)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유치원 취원 여부와 초등 전 사교육 경험 여부에 미치는 가족 배경의 영향은 매우 크고 뚜렷하였는데, 지난 시기 동안 교육 경험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교육 수준으로 측정된 가족 배경의 영향은 감소하지 않고 유지되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반면 어린이집 경험 여부에 미치는 가족 배경의 영향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은 결과를 보여 주었다. 유치원과 사교육 경험 여부에 대해서도 가족 배경의 영향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가구소득과의 연관성에 관련된 조사에서는 2002년까지 효과가 발견되다가 2004년 이후 유의미한 차이가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교육 및 보육비 지원을 비롯하여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적극적인 재정적 투자를 시작한 시점과 일치하며 최소한 취학 전 교육 및 보육 경험 여부 차원에서 사회 계층 간 격차는 확인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이 연구는 추후 연구과제로 경험 여부로 측정되는 양적 차별화에서 영어 유치원 등 이용하는 교육 및 보육시설의 질적 차별화에 대한 사회 계층 간 격차 분석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3) 논문에 대한 의견가족 배경에 따른 교육 기회의 차이 발생에 주목했다는 점이 좋았다. 가족은 유아가 처음으로 만나는 사회적 집단이고, 그만큼 중요도가 가장 높다. 더욱이 의무 교육과정을 시작하기 전 단계라면 더욱이 교육 정도의 차이 양상이 다양할 것으로 생각했다. 논문에 등장한 연구들과 발견 내용은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차이를 구체화한 지표로 나에게 보여 주었다.가구소득과 교육 격차 간의 연관성이 2004년 이후 줄어들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보조 정책의 역할이 전체 지표에 유의미한 차이를 줄 정도의 중요성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정부의 재정적 지원의 형태로 이뤄지는 보조는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기에는 한계점이 있다. 양적인 차별화에서 질적인 차별화가 야기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 배경의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질적 차별화를 해결할 방안의 마련이 필요하다.2. 논문명 : 「교육 기회균등에서 벗어나 있는 현행 학제」(1) 논문 선정 이유1의 논문에서 지적하였듯이, 유아기에 가정의 영향으로 시작되는 교육 기회 불균등은 교육 및 보육시설의 질적 차별화로 연관된다. 모든 가정의 경제적, 배경적 차이는 필연적이므로 해결을 위해서는 교육·보육 시설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유치원의 공교육화를 주장하는 해당 논문을 선택했다.(2) 논문의 요약 및 결론이 논문에서는 공교육의 기본이념이자 원리인 교육 기회균등에 비추어 봤을 때, 유아교육이 없는 현행 학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유치원이 학제로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치원의 변화과정을 통계 연보를 중심으로 초등학교 및 보육시설과 비교, 분석하였다.1980년 이후 유치원의 양적 규모가 급팽창하였고, 여기에 1990년대 이후 보육시설이 팽창하며 오늘날 많은 유아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제도교육을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된 현실 속 민주주의 교육이념인 교육 기회균등을 구현하겠다는 명분으로 미 군정기에 제정된 6-3-3-4는 유아들의 교육 기회균등을 전혀 보장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학제가 되었다.국가의 일관성 없고 근시안적인 유아교육·보육 정책의 결과로, 유·보 이원화는 더 고착화되었고, 사교육 시장은 방대해질 대로 방대해져서 유아교육은 부모(가정)의 사회·경제력에 따라 구매되는 ‘상품’으로 변질하여 가장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하루빨리 유아교육은 정상화되어야 한다. 정상화의 지름길이자 가장 최선의 길은 유치원이 학제로 포함되어 공교육이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력 배경에 따라 교육이 결정되는 부당한 작동방식을 최소화하고, 유아의 교육 기회균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치화하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국가가, 그리고 전문가를 포함한 우리가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이다.(3) 논문에 대한 의견선정 이유에서도 암시했듯, 유치원의 공교육화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유아 교육 공간의 변화가 가정에서 기관으로 이뤄지니만큼 이러한 기관의 교육을 보장받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의 학제인 6-3-3-4 과정은 유아교육이 척박했던 시절에 제정된 것이다. 현대의 상황이 많이 변화한 만큼 교육 기회 평등을 위한 학제의 개편도 필수불가결하다.유치원이 공교육으로 변모된다면 부모의 배경에 따라 교육이 결정되는 부당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유아의 교육 기회균등을 실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끝으로 인상 깊었던 논문의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논문은 유치원이 학제로 들어가냐 안 들어가냐 식의 논의는 무가치하며, ‘유치원이 학제로 들어갈 때 어린이집을 비롯한 많은 민간보육시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무하고 있는 각종 사설학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점들은 이후 학제 개혁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3. 논문명 : 「교육 소외와 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복지정책의 과제」(1) 논문 선정 이유Ⅰ의 후반부에서 언급했듯 유아기에 촉발된 교육 기회의 불균등은 초등·중등 교육을 거쳐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을 포함하고 싶었다.내가 이 논문에서 주목한 부분은 단순히 해결 방안을 언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해결 방안에서 문제점을 도출하고 이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이다.비전문가인 나는 현재의 교육 기회 불균등 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내놓을 정도까지만 수행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의 제도와 현상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의의가 컸다. 이 때문에 해당 논문을 선정하게 되었다.(2) 논문의 요약 및 결론정부와 국회의 교육복지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 소외, 교육 격차 문제는 쉽게 해소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의 교육복지정책은 교육소외와 격차의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 대응을 하고 있으나, 정책추진체제의 실태를 분석한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교육복지정책 추진에 있어 기관 간, 사업 간, 서비스 간의 통합 연계의 부족, 지역교육복지 인프라의 지역 간 불균형 및 지역 지도력 구축을 위한
거울이 아닌 유리창에 두는 시선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하고, 논쟁해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여러 사회 현상과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왔으며 그중 하나는 윤리에 대한 것이다.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 이를 이분적으로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나? 아직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의 대답은 없다.그런데도, 아직 철학자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 윤리에 대한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2천 년 전의 영국으로 돌아가 천천히 살펴보자. 그 현장에는 공리주의가 있다. 그렇다면 공리주의가 주장했던 도덕의 밑바탕은 어떤 것일까?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공리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공리주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효용과 행복의 증진에 두었던 고전적인 규범 윤리 이론 중의 하나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어는 지나치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반대의 개념인 불행은 쾌락 없음과 고통이다. 가볍게 보면 쾌락만을 좇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으나, 공리주의자는 이런 오해를 아주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이 주장한 공리가 무엇인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펼친 책이 「공리주의」이다.이 책은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1. 총론, 2.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3. 공리의 원리의 궁극적 체재에 대하여, 4. 공리의 원리는 어떤 증명을 내놓을 수 있는가? 5. 정의와 공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다룬다. 어려운 내용일 것이라 지레 겁을 먹었는데 추가적인 설명이 많았고 문장도 꽤 읽기 좋게 풀어써져 있어서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반론에 대한 반박과 오해에 대한 해명도 함께 기술되어 있었다.2장의 불만족한 소크라테스와 만족하는 바보 부분에서는 품위에 관해 이야기한다. 있다. 분명 상위의 기능을 누리는 것은 고통을 감내한 만큼의 더 큰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노력이 행복을 희생시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밀은 이에 대해서 행복과 만족의 차이점을 들며 반박한다. 우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보다 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은 그가 찾고 있는 행복이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까지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불완전함에 대해 참는 방법을 알아내고, 그런 불완전함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욕망에 충실한 저급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나는 내가 밀이 설명하는 품위를 가진 뛰어난 재능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나보다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끔은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런 지성인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만족한 돼지 그 자체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은 학교보다 우선시하더라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남들보다 입시를 더 길게 했다. 가까이에 있는 쾌락만을 좇아서 지냈던 시간에 대한 벌을 받으면서 공부를 했고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난 그 시간을 지나며 하루하루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얻어낸 결과에 만족한다. 이전보다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이야기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가 밀이 말하는 품위의 개념과 조금은 상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이상 하루하루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 지성인은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인간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앞으로 살아가면서 고민해볼 것은, 밀이 말하는 지성인의 조건 중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밀은 이렇게 품위를 선호하는 태도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이(바보나 돼지라고 표현했다) 문제를 자기들의 입장이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게 된다. 밀은 쾌락의 질에 대한 판결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고 답을 내놓는다. 고상한 기능에서 나오는 쾌락은 동물적 본성으로 느끼는 쾌락보다는, 그 종류에 있어서 더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개인의 성찰과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고 공동체의 일체감을 강조한다. 3장의 내용 중 현대 사회에서 도움이 될 구절이 있었다. 도덕적 성품을 형성시키는 영향력(교육, 여론)이 행동의 결과를 장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원칙마저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교육에 의한 성품 향상을 통하여, 사람들의 성품 속 동료들에 대한 일체감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일체감이 우리 본성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 완전히 체득시켜야 하며,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범죄를 혐오하듯이 이웃에 대한 일체감을 자신의 고유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독한 개인주의가 되어가는 지금의 사회에서, 이러한 구절은 어린 청년세대인 나에게 와닿는다. 조금씩 피부로 느껴지고 있는 현대의 사회는 차갑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 바보가 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을 불사한다.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개인들의 양심 온도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인간의 정신이 점점 향상되며 각 개인 속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신경 쓰는 경향이 생겼다. 만약 이런 일체감이 온전한 것이라면 그 개인은 남들의 이익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거나 욕망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공리주의 도덕의 지지자들은 일체감을 강한 구속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의 목적과 이웃들의 목적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그가 이웃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즉, 그들의 이익)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익을 촉진 시켜준다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일체감을 가진 개인의 목적은 분명 타인에게 피면화한다면 사익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지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알아야 할 사실 중 하나는 타인의 이익이 개인의 손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를 도와주더라도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풀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작은 부분부터 알아가고 공리를 위한 행위를 습관화하는 것이 공익과 사익의 양립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한다.이 확신은 최대 행복 도덕의 궁극적 제재가 되어주며, 이것으로 인해 사회적 감정이 잘 발달한 사람이 남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외부적 동기를 거스르지 않고 높은 협력 수준을 보여주게 된다. 이런 흐름은 한 개인이 오로지 자신의 사익과 관련될 때만 남에게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방지해주는 효과가 있다.4장에서 이야기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의지가 욕망의 자식이며, 습관의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의지는 습관의 지시에 따르며, 우리가 그 자체로 욕망 또는 갈망하지 않는 것임에도 습관 때문에 의지를 표명하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인 우리가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욕망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의지의 출발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고통을 밀어내는 것이나 쾌락을 끌어당기는 것 모두이다. 여기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올바른 일을 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과, 미덕의 의지가 다소 허약하여 유혹에 무너질 수 있어서 전적으로 신용하기 어려운 사람이다.사실 대부분은 후자일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어서 옳다고 알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것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때문에,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잘 개발되어서 독립적인 습관이 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교육의 중요성이 한 번 더 부각 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발전하고, 선조들이 옳다고 생각해온 것을 후손에게 전한다. 물론 세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며 많은 규범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올바른 쪽을 바라보려는 의지이다. 이 의지는 후천적으로 학습된다. 학습된다는 말은, 학습자와 교육자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학교가 이행동을 보상으로 쾌락과 연결하는 방법도 있다. 첫 번째 방식은 처벌받는 대상이 반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과 그 이유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처벌의 정당성을 처벌받는 사람이 인지하고, 미덕의 방향으로 걸을 수 있게끔 올바르게 지도하는 것도 공동체의 역할이라 말할 수 있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공동체의 대다수 일원이 미덕을 갈망하고 있다면 이외의 구성원도 같은 방향을 갈망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교육자가 되었을 때, 이러한 도덕적 갈망과 관련하여 사회를 위해 공헌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도덕적 갈망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을까? 무엇이 공리를 위하는 방안일까? 물론 나부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옳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남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법, 별을 보고 달이라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도덕적 갈망을 가지고 올바른 습관과 의지를 지닐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해야 한다. 왜 옳은 일인지와 왜 그른 일인지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내면화되도록 끊임없이 동기부여와 칭찬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주안점은 앞에도 기술했듯 아이가 스스로 자신이 한 행동이 옳지 않을 경우, 그게 왜 그런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고민하다가, 고통이 쾌락과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옳지 않은 행위를 한 학생은 체벌의 형태로 고통을 겪을 것인데, 개선된 모습을 보였을 때 칭찬이나 상점, 물질적 보상, 또래 집단의 인정 등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칭찬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사실 인간이라는 종은 칭찬에 매우 약하다. 무섭게 혼내기만 하는 방법보다 인정해주면 더 뛰어난 개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례를 통해 깨달았다. 칭찬 상을 주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등학생 또래의 아이들은 상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화려한 저택과 매일 밤의 향락,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 언뜻 보면 이게 무슨 삼류 소설인가 싶겠지만, 이 책의 배경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있기도 하다. ‘재즈의 시대’였던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그려낸 것이다.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 이 책의 배경에 대해 좀 더 말해보려 한다.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온갖 사치와 향락이 난무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당시의 모습이 투영된 다양한 인물 군상을 등장시켰다. 이 책은 미국의 192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개츠비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로만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받는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가 계급이라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추락하도록 만들어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에서 모린 코리건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 책을 다시 읽게 된다. 마지막 여섯 페이지 반, 특히 마지막 두 단락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화자인 닉 케러웨이는 여러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모습을 한결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부르주아들로 그려낸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예외인데, 바로 개츠비이다. 비록 외양은 허식으로 치장되어 있을지언정, 꿈 그리고 환상을 간직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개츠비는, 제목처럼, ‘위대하다’개츠비는 선과 악으로 분간할 수 있는 인물일까? 그는 개츠비의 주변 인물들로 그려지는 이들과는 확연히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데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자 마이어 울프심 등과 어울리며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 만약, 개츠비의 주변인들이 사치스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면 그는 악인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과 악의 기준은 항상 상대적이므로, 당시의 향락과 사치에 빠져있는 사회 속의 그는 꽤나 멀쩡한 인물로 비춰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이는 피츠제럴드의 당시 삶과도 연관된다. 그는 이 작품을 구상할 때 롱아일랜드의 흥청망청한 삶에 빠져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집필에 들어가며 그의 이런 생활은 변화하게 되었는데, 생활 태도에 대한 반성과 회의 같은 것이 등을 떠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곳을 떠나 유럽으로 간다. 그는 자신에게서 출세했지만 천박한 속물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후회와 비판의 의미로 개츠비를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존재한다.소설 속의 인물들을 더 이야기해보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이 닳고 닳은 속물들이라고 망설임 없이 표현할 수 있다. 가정이 있으나 바람을 피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킨 톰, 경기 중 부정을 저지른 조던, 도박으로 돈을 버는 울프심,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쫓고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데이지까지. 모두가 '물질'만을 쫓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위에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아무리 사랑을 위해서였다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벌어 막대한 부를 쌓고자 하였던 개츠비까지 말이다.하지만 작가가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차별점은, 바로 개츠비는 그럼에도 마지막엔 물질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순수한 목적, 그리고 '희망'을 쫓아 계속해서 달려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개츠비는 자신과 다른 계층의 부유한 여성인 데이지를 사랑하였지만, 자신의 가난함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데이지는 시카고의 부호인 톰과 결혼해버리게 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에도 개츠비는 끝내 데이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온갖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데이지를 다시 찾아 사랑을 고백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도 끝까지 순수한 사랑을 위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개츠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부자가 되기 위해 취했던 수단과 방법에 집중하지 않고,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도록 만든다.개츠비는 5년 전 사랑으로 취해 있었던 그 때로 현실을 되돌리려 한다. 주인공인 닉은 머틀이 죽은 다음 날 아침 개츠비를 향해 말한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보다 휼륭합니다" 꿈과 이상을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려는 개츠비는 이러한 점에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피츠제럴드는 낭만적 이상을 통해 삶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개츠비에 투영시켰을 것이다. 이상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는 당시 시대상을 잘 그려낸 것이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개츠비가 저질렀던 일들, 이를테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것, 이미 결혼한 데이지를 유혹했던 것 등 그의 만행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작가가 이 작품을 쓰던 시기의 사회는 혼란하고,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던 곳이었을지도 모른다.사회의 좋은 면만 담는 작품보다는 이렇게 비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이유도 동일하다. 현대사회는 착한 일만을 한다고 해서 보상 받는 시대가 아니기에, 우리들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질만능주의자들이 되어버렸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타인에게 무정해지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에 급급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잘못된 일을 해온 개츠비를 향해 마냥 비판만을 던질 수 있을까? 소설의 맨처음에 나왔던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땐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좋은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