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 아버지의 자화상: 한국현대사의 발자취답사보고서교 수 명 :소 속 :제 출 자 :제 출 일 : 2018년 6월 5일연 락 처 :1. 답사 지역 선정 이유나는 답사 지역으로 서대문형무소, 경교장, 경찰청 인권센터를 다녀왔다. 답사 지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려되었던 요소는 답사지까지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갔던 친구들의 목표는 오후 5시 전까지 답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곳의 답사지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을 선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서대문형무소가 가장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을 기준으로 삼은 뒤, 이동 시간이 20분 내로 소요되는 경교장과 경찰청 인권센터를 선택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이전에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가보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에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없었고 역사관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옥고와 희생을 알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를 먼저 선정하게 되었다.2. 답사지 이동 경로 및 위치5월 19일 토요일, 나와 동기는 오전 10시 40분 경에 경희대학교 정문에서 만나 후 회기역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회기역에서 1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했다. 우리는 독립문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인천에서 온 다른 동기 한 명을 만난 후, 출구 앞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 2분 정도 걸어 오전 11시 30분에 서대문형무소 정문(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도착했다. 20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관람장소 중에서 담장, 화장실 같은 시설을 제외하고 10개 이상의 시설을 구경했다.그곳에서 두 시간 정도 관람한 후 경교장으로 가기 위해 독립문역 버스정류소에서 702A번을 타고 서대문역 정류장에 하차하였다. 다음 답사지로 가기 전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경기대학교 근처로 가서 골목 안에 있는 일식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지도를 보며 10분 정도를 걸어가 강북삼성병원 응급실 쪽에 있는 경교장(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 독재정권기에는 민주화를 이루고자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희생당한 현장이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불굴의 의지로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바로 그 저력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는 현장이다.우리는 서대문형무소의 입구로 들어갔을 때 가장 가까이 보이는 구 보안과청사 건물인 전시관에 들어갔다. 전시관 1층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변화 과정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운용실태, 해방 이후 독재정권의 민주화 인사 탄압실태를 전시하고, 관련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하였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고 순국하였다.-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1930년대에는 초기보다 약 30여 배 이상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는 독립운동에 따른 사상범의 급증 때문이었다. 개소 초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주로 수감되었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 3,000여 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었다. 이후 1945년 광복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비밀결사, 각종 의열투쟁, 해외 무장투쟁,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의 활동을 펼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순국하여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서대문형무소와 민주화운동1945년 광복으로 서대문형무소는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고, 대한민국 정부의 교도 기능을 수행하였다.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좌 위해 사용된 벽관, 수갑, 못상자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 등 수감자의 고통을 알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곳에는 그림자 영상 체험실이 있어 자신의 얼굴을 촬영하면 영상으로 최조와 수감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있었다.전시관을 나와서 우리는 중앙사로 가서 수감생활을 재현하고 있는 인형들과 수감자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의식주 전시를 보았다. 수감자들이 입었던 옷과 신발, 사용했던 식기들은 간수들의 깨끗한 것들과는 달랐고, 수감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알 수 있었다.이후에 우리는 수감자들이 노동했던 공작사,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지은 한센병사, 사형이 집행되었던 사형장, 여성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었던 여옥사, 수감자들이 운동하고 격벽을 했던 격벽장 등의 시설을 둘러보았다.2)경교장우리는 경교장에 들어가서 지하부터 지상2층까지 순서대로 관람했다. 경교장의 원래 명칭은 죽첨장으로,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최창학에 의해 1938년 건립되었다. 최창학은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준비를 위해 조직된 임시정부환국봉영회에서 경교장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가 환국한 후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및 김구 들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1945년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1948년까지 3년 동안 경교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 및 남북통일운동의 추진 무대가 되었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서거할 때까지 경교장에서 그들은 해방 후의 혼란정국을 수습하였다. 이후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 미군 시설, 월남대사관, 고려병원으로 사용되었고, 2010년 경교장이 복원되었다.-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경교장1945년 12월 3일, 환국 후 최초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경교장에서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의 각료들과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인 이승만도 출석하여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앞으로 임시정부전개하였다. 1947년 하반기 신탁통치안이 폐기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상정되자, 김구는 남북협상·남북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기 수립되었다. 이후 김구는 통일독립촉진회를 조직하고 유엔 감시 하의 남북총선거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운동을 추구했다.-백범 김구의 삶백범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인 1893년,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수난에 직면했을 때 동학에 입문하여 황해도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에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일본인 스치다를 처단하고 사형이 확정되지만 고종의 특사로 감형된다. 이때 옥중에서 산지식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열정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40년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환국 후의 국가 구상에 전념하였다.1945년 11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김구는 자주 독립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1949년 6월 26일, 민족통일을 위한 최후의 노력을 전개하던 중 김구는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였다.1층과 2층에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을 복원해놓은 곳이다. 응접실과 귀빈식당, 침실, 사무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임시정부 요의 대공분실구 남영동 대공분실은 시대를 대표한 건축가인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건물에 검은 벽돌을 사용했다. 푸른색 철문을 통과하면 뒷면에 짙은색 전용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후, 피의자들이 조사받을 5층으로 가게 된다.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좁은 사각의 공간, 그리고 다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주치게 되는 비좁은 엘리베이터와 짙은색 처레 나선형 계단, 누군가 ‘피의자’ 신분으로 이 곳에 왔을 때. 처음 마주치게 되는 냉기와 공포감,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은 여기서부터 만들어진다.-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박종철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하지만 1월 15일 석간신문에 사망 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ㄴ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에 의해 고문에 의한 사망가능성이 제기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였으나, 박종철의 연행 시간과 사망 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3명의 경찰이 추가 구속되었다.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범인 조피죄로 구속되었다.또한 박종철을 부검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2일 경찰이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였다고 폭로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직권남용 및 직무 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2000년 12월에는 국가가 유족
critic-영화(2002, 이창동 감독)-영화(2003, 이누도 잇신 감독)장애여성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길거리에서 장애여성과 비장애남성 또는 장애남성과 있는 모습을 봐도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연인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장애인의 모습이 만들어진 방식이 무엇인지, 이런 인식이 언제부터 내 머릿 속에 존재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장애여성의 사랑은 말해지지 않았다.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다룬 미디어는 장애를 서사에서 갈등을 불러오는 요인으로 사용하거나 감동을 극단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했다. 그런 과정에서 장애인을 규정하는 지식과 개념이 생겨났을 것이다. 내가 사회에서 배운, 미디어에서 배운 장애인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 힘들고, 사회성이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영화 속 공주와 조제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일 것이다. 동시에 비장애인과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장애인이 비장애인들이 하는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공주와 조제는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랑을 한다. 공주의 사랑은 이상하게 시작해서 정상적으로 끝난 것이고, 조제의 사랑은 정상적으로 시작해서 정상적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주의 사랑은 범죄자와의 이상한 사랑이 우리사회가 생각하는 장애인의 인식을 보여주며 끝나는 것이고, 조제의 사랑은 장애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츠네오의 정상적인 사랑이 장애인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능력과 어린 나이와 같이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게 된 것이다. 에서는 장애가 모든 서사에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며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공주는 비장애인과 비교되면서 편견을 재현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심지어 공주의 상대역인 종두마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닌 범죄자인 설정을 가진다. 참여연대의 장애여성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 이 설정은 눈에 거슬리는 설정이 되었다. 이미 충분히 장애여성을 왜곡되며 편견을 그대로 실천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놓고, 그 상대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신분을 가진 소수자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연출이 장애여성에 대한 부정적 모습을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은 조제의 상대역으로 또래이면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대학생을 설정하고, 조제가 전여자친구의 질투를 받으면서 같은 선상에 선 인물로 장애여성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와는 장애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히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와 은 장애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분명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지식과 개념을 우리가 학습하고, 기준을 세우고, 불특정다수가 말하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을 전형화하고 담론화한다. 일본에서의 장애인의 대한 인식을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몰라서 쉽게 말할 수는 없겠으나, 한국에서 나타나는 장애인의 대한 인식은 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있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계속 말해질 것이며 사회구성원들을 학습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말하기 불편한 주제는 소외된다. 우리가 장애여성의 성을 말하지 않는 이유도 성에 대해서는 조심히 말해질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과의 비교를 통해 그들의 성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푸코는 기준이 되는 성이 만들어지고 성에 대한 규제가 많아질수록 성적 도착, 비정상적인 성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기준이 되지 않는 성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으로 이름 붙여지고 범죄화되거나 말해지지 않고, 갈등이 되거나 희화화되기도 한다. 유교 정신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성은 주로 뒤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장애여성의 성은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기준의 외의 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성을 이야기했을 때, 비장애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성이 주류 담론에서 이야기되었던 적도 처럼 누군가 억지로 그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때일 것이다. 그마저도 일시적으로 논의되어 기준과 구분되는 것들을 강조할 뿐, 다시 사회의 뒷면으로 들어가버린다. 장애인을 규정하는 담론들, 소수자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그들을 정상적인 것들과 비교하여 이름지어버리고 불특정다수를 교육시켜버린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권력에 의해 성이 통제된다면 왜 이것을 기준 외의 성으로 규정해버렸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동시에 왜 주류 미디어에서 이것을 많이 다루지 않는지, 이것이 사회적 논의에서 왜 소외되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해답을 찾으려면 장애인을 격리시키고 장애인 차별이 존재하게 된 역사적, 문화적 맥락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담론이 시작된 시점을 알고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1922, flaherty) 크리틱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했던 영화산업은 식민지 정책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다. 장기간의 식민지 정책을 이어오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문화적 포용을 병행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화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식민지의 원시성을 문명화시키고 미개한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서사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서사는 탐험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바탕이 되었다. 영화 역시 이러한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어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에스키모인들은 이미 백화점을 가고 공산품을 구매하고 라디오를 들을 정도로 근대화,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앞뒤 맥락 없이 카메라를 보며 웃는 나누크의 클로즈업 장면, 축음기와 피마자 기름을 보며 신기해하는 장면은 그들의 전통방식을 기록하려한다는 목적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장면일 것이다.또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찾을 수 있다. 플라허티는 ‘나는 백인이 토착민들에게 행한 것을 영화로 만들 생각이 없다.’(Barnouw, 1993/2009)라고 했지만, 에스키모인들에게 카메라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고 필름에 불을 붙이는 행동 등을 통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도 타민족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옛날 방식의 사냥과 반쪽짜리 이글루에서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에스키모인들이 더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전통을 기록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하지만 이 제국주의 가치관을 반영하였는가에 대해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쉽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에스키모인들이 영화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점과 외부인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전통 방식을 보여주려고 했던 플라허티의 의도, 그 결과 에스키모인들의 전통을 기록한 인류학적으로 좋은 영상 사료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의의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타이틀에서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의의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다큐멘터리에 익숙한 내가 을 처음 보았을 때는 생각보다 현대 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었다. 다양한 샷과 섬세한 편집, 열악한 자연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지금의 다큐멘터리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기술로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가져야할 사실성,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가 아닌 연출된 장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화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렸다. 연출된 장면들을 알고 영화를 다시 봤을 때는 처음봤을 때 느꼈던 추운 북극의 생생한 삶이 아닌, 실수 없이 깔끔하고 과정없이 보여주기식의 장면들이 보였고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되어있었다. 그만큼 다큐멘터리 장르에서는 사실성과 현장감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로베르트 비네) 크리틱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였고, 독일 사회는 실업난, 초인플레이션 등의 경제문제를 겪고 정치적 우경화가 진행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표현주의 영화가 등장하였다. 표현주의 영화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느끼는 주관적인 경험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고정된 카메라 사용이 아니라 작가가 주관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했고, 기승전결의 전개가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이나 전쟁에 대한 분위기를 강렬하게 나타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 이다.을 보면서 처음 가졌던 생각은 ‘기괴하다’였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초록빛의 강한 명암대비와 배우들의 진한 화장, 직선이 없는 배경들은 영화의 ‘기괴함’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 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모든 도구들과 배경들이 현실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배경이 일그러져 있는 이유는 전쟁경험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방향상실로 인해 일그러진 독일인들의 마음의 공간(임정택, 2001)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2차원적인 그림 세트와 높은 의자, 과장된 원근감의 공간들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주의 작품으로서 작가의 주관적 정서를 반영한 현실의 재창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low key 조명 역시 배우들의 표정과 몸동작을 더 과장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며 주관적 재구성을 표현해준다.내용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의 두드러지는 부분은 액자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영화는 중반부까지 관객들이 프란시스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도록 한다. 그러다가 후반부에서는 프란시스의 관점에 의구심을 들게 하며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다. 만약 액자구조가 없었다면 캐릭터의 특성이 180도로 바뀌게 될 것이다. 액자구조가 없다면 칼리가리는 정신 이상자이고, 프란시스는 살인사건을 막고 진실을 파헤치는 지성인이고, 세자르는 칼리가리에게 세뇌당하고 이용 당하는 약한 자이다. 액자구조가 있음으로써 캐릭터들은 바뀌게 된다. 칼리가리와 병원장이 동일성이 없다는 가정 하에서 칼리가리는 권위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고, 프란시스는 정신이상자, 세자르는 칼리가리의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액자구조가 삽입되면서 영화의 현실비판적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프란시스(저항하는 지식인의 상징)의 저항은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으로 폄하되었고 칼리가리 박사는 우매한 민중을 이끌고 치료하는 권위자가 되었다.(kracauer, 1947)
(1929, 지가 베르토프) 크리틱1920년대 소련은 잇따른 내전과 기근, 질병을 겪으며 혼란스러운 사회였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전부터 뉴스영화를 만들면서 편집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삼인회의를 결성해 영화에 대한 뜻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키노 프라우다’라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 프라우다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주장한 듯하다. 또한 그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영화는 의미 있는 효과를 전달하기 위하여 현실의 모습이라는 진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베르토프의 영화 제작 원직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Barnouw, 1993/2009) 이러한 가치관은 ‘시네마 아이(Cinema-Eyes)’라는 단체의 선언문에서 연결된다. 그는 선언문에서 카메라의 초현실적인인 능력과 편집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베르토프가 가진 가치관을 확인해볼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배우의 연기나 대사, 스토리텔링과 같은 극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와 편집으로만 가능한 장면들의 나열만이 있을 뿐이다. 시네마 아이는 카메라가 인간의 눈보다 정확하며,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편집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본다. 역시 이러한 점을 보여준다. 소련 사람들의 일상과 기계들의 움직임이 교차편집되는 리드미컬한 장면에서, 인간의 눈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과 한 공간에서는 보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서의 숏들을 보여주며 어떠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숏들의 속도를 느리게 하거나 빠르게 하는 장면에서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들에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인물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는 장면은 카메라의 능력을 한껏 뽐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 세계가 모든 사물과 동물들이 움직이는 연속성을 가진 세계라면 카메라가 보는 세계는 얼마든지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을 끊어내고 하나의 숏만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카메라의 눈은 현실세계를 더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것은 편집자가 어떤 기법으로, 어떤 숏들을 편집해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들은 인간이 전혀 알지 못했던 의미들을 보여준다. 마차와 전차의 바퀴가 굴러가고, 기계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수많은 장면들의 의미, 결혼-출산-죽음-이혼 장면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의미 등을 쿨레쇼프 효과, 몽타주적 편집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편집을 통해 카메라와 삼각대가 혼자서 움직이고, 거대한 카메라맨이 군중 위에 서있는 장면 등에서 다양한 편집기술의 발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