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독서세미나실업, 과연 개인의 문제인가?개인이 사회속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직업은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택이다. 그러나 충분한 고민이 없거나 사회적 제도가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직업을 선택할 경우도 생긴다. 또한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해 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고, 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을 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간다. 청년 실업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취업전쟁의 사회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한국사회 이해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취업전쟁에서 승리하고 미래의 직업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복잡하고 다양한 미래의 직업을 위해 개인이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찾고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며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책에서는 ‘자신의 적성과 조건을 고려해서 더 이상 불러주지 않는 소명을 직접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라며 개인이 노력하면 직업을 구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사회적 방안을 다루고 있지 않다.그러나 처음에 ‘실업의 문제는 근대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현상.’이라고 언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개인의 실업은 개인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생존 그자 체를 위협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사회의 생산력 또한 증가하고, 개인의 삶의 만족도가 증가해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 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와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업은 개인 혼자서 해결방안을 찾아 실행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뒷받침 도 함께 주어져야 한다.사람들은 진지하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하고싶은 일을 결정해도 결정하지 모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더라도 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하는 경우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지만 사회에서의 인식, 경제적 여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직업이라면 사람들은 피하기 마련이고 그로인해 현대사회에서는 안정적인 직업이 선호되고, 사람들의 흥미가 모두 같지는 않을텐데도 선호하는 직업이 비슷해 취업전쟁이 일어나게 되는것이다. 만약 제도적으로 모든 직업의 여건을 지원해준다면 취업전쟁도 완화되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수 있게 될 것이다.
교양독서세미나중용-중용을 통해 생각해 본 유아교육관몇 년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기교육 열풍이 불면서 아직까지도 조기교육이 옳은지 그른지에 찬반이 계속 되고 있다.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도 끊임없이 변한다. 유아교수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다양화 되고 있지만 이러한 흐름속에서 우리는 ‘중용’이라는 동양철학사상을 통해 다시금 유아교육을 재조명 해볼 필요가 있다.‘중용이란 단순히 중간을 취하는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용에서 중은 가운데라는 뜻도 있고 들어맞는 다는 뜻도 있다. 중은 중인까닭에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다. 동시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용이란 평상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과도 통하는 중용을 현대유아교육에 어떻게 적용시킬수 있을까?아이를 일등으로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학원에 보내고 우리나라 말을 다 익히기도 전에 세계화에 대비한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덜된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중용은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교육하는것이 지나쳐서 중용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 적당히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의문점을 낳게 하고 중용을 자신의 아이를 교육하는데 있어서는 필요없는 철학이라고 간주해버리게 한다. 그러나 중용을 단순히 중간으로 오해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중용은 교육에 있어서 기본 철학으로 자리매김 할수 있다.중용에서는 ‘군자는 어울리면서 휩쓸리지 않나니 강하구나 꿋꿋함이여. 중심에 서서 기울어지지 않나니 강하구나 꿋꿋함이여’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부모들은 이런저런 열풍에 휩쓸려 다닌다. 아이를 교육하는데도 유행에 따라 다른사람이 하는것이면 무조건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아이와 자기아이를 비교하며 더 나은 아이로 만들기위해 비교하고 경쟁심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도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면서도 각자 개성을 지킬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곧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 단순히 그 아이가 평범함 속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영재도 아니도 둔재도 아닌 중간정도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어쩌면 아이를 개성이 없고 세상을 따라 흔들리는 자주성 없는 아이로 성장시킬 가능성이 있다. 중용은 아이 개인에 맞는 교육방법을 택하고 바깥사정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한결같이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발표문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에 대하여1. 작가의 삶과 시대소포클레스(Sophokles, 기원전 495~406)-부유한 기사계급출신의 무기제조없자인 소필로스의 아들-아테네 근처 콜로노스(Kolonos)에서 태어남-사회적으로 상층계급에 속했음-기원전 463년, 비극시인으로 등단-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국이 기울어져 가는 시대를 겪었음.-대표작: 《안티고네》《오이디푸스》《아이아스》《엘렉트라》《트라리아의 여인들》《필로크테레스》《뒤쫓는 사람들》 등등.2. 작품소개-인간은 운명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그 지배를 받게 된다는 입장에서 쓰여진 희곡(운명극)-탄탈로스가의 저주를 배경으로 쓰여짐3. 작품의 의미와 평가이 두 작품을 통해 소포클레스는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 속에서 운명에 굴하는 인간상 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러내고 운명에 대처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다.운명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또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이 정해준 운명앞에 허수아비일 뿐일까. 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신탁이 이루어졌음을 알게되고 절망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에서 크레온 왕 또한 안티고네를 처형하려고 결정한 후에 듣게된“왕에게서 태어난 자가 왕 때문에 시체에는 시체로 갚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안티고네도 자신의 가족이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 두 작품속의 등장인물 모두 정해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이처럼 만약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을 운명이라 한다면 인간은 운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다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그렇지만 이 작품 속에서 우리는 운명앞에서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 인간상만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먼저 부터 다시 살펴보면, 오이디푸스의 삶이 신탁대로 이루어진 것을 아는 순간 그가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절망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직접 자신의 눈을 찌르고 ‘나의 이 쓰라리고 쓰라린 불행을 일으킨 건 아폴론이다. 그러나 내 눈을 찌른 것은 바로 내손, 이 불쌍한 놈의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을 운명에 돌리지 않고 신의 굴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독립적 인간으로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용감함을 보인다. 즉 신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사실을 은폐하여 왕위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 스스로 움직여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양독서세미나서민귀족17세기 신흥세력으로 떠올랐던 부르주아세력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은 돈은 많지만 지위가 떨어지는 부자의 신분 상승 노력을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과거의 혈통중심, 귀속적 지위가 중요시되는 사회가 아닌 자신의 노력, 성취적 지위가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쥬르뎅의 신분상승노력이 더 이상 조소거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서민귀족 쥬르뎅을 옹호하고 쥬르뎅과 같은 인간형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우선, 쥬르뎅은 대대로 옷감장사를 해 서민에서 귀족으로의 지위상승을 꿈꾸었던 성취지향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업종과 관련 있는 옷에 대한 식견과 애정을 갖고 있던 전문직 종사자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당시의 귀족들이 단순히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아 귀족적 생활을 했었던 것과는 다르게 쥬르뎅은 스스로 부를 축척했으며, 다른 서민들처럼 자신의 생활에 안주해 살아가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꿀 줄 알았다. 그래서 쥬르뎅은 계속해서 배우려고 노력했는데, 배움의 자세 또한 그 당시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 당시 귀족들은 음악, 무용, 철학, 검술등을 귀족의 교과서처럼 정해놓고 교양이라며 무조건적으로 배우고자 했다면, 그는 우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철자법과 태음력을 먼저 배우고자 했다. 그리고 옷감장사를 했던 쥬르뎅은 계속해서 상황에 맞게 옷을 갈아입고 귀족의 옷을 걸치는 행동을 보이는데, 이는 단지 귀족생활의 모방이 아니라 그가 평생 가까이 했던 옷감으로 자신의 삶의 변화 욕구를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가 만약 요리사였다면 요리를 통해 변화 욕구를 표현했을 것이며, 예술가였다면 예술적 행위들을 통해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타냈을 것이다.속에서 쥬르뎅이 마마무쉬가 되고, 도랑뜨 백작에세 계속해서 속는 모습은 그의 어리석음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쥬르뎅이 아니다. 이렇게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된 이유는 쥬르뎅이 귀족적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갖고 귀족이 되려했던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쉽게 믿는 쥬르뎅을 속이고 쥬르뎅에게 아첨했던 도랑뜨 백작을 비롯한 주위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도랑뜨는 쥬르뎅을 골탕먹이는 인물로 쥬르뎅을 어리석게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도랑뜨야말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사람을 이용하며, 돈있는 자에게 아첨하고, 자신의 형편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교양독서세미나-이방인에서 볼 수 있는 도덕과 사회제도의 폭력성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태도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한 답은 어느 누구도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구성해 나갈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사회의 관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상한 사람, 사회에 적응 못 할 인간이 되어버린다. 속에서 뫼르소 또한 의식이 부재하는 부조리한 인간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방인적인 모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뫼르소를 억압하는 사회제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 뫼르소의 이방인적인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작품 속에서 뫼르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기의 삶을 이끌어나감으로 인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식이 결여되고, 복잡한 감정과 사고가 결여된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뫼르소의 태도가 재판과정에서 타인에 의해 평가되고, 사형을 언도받게 한다. 그렇지만, 뫼르소의 죄를 평가하는 기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과정이 도덕에서의 폭력성, 사회구조와 관습이 개인을 억압하는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다. 뫼르소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은 재판소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쏴 죽인 것에 대해 끊임없이 추궁하고 그에게서 어떤 죄책감을 발견하려 하지만, 뫼르소 자신은 살인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고, 사람들이 강요하는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뫼르소의 모습이 사람들의 질책을 샀고 뫼르소가 유죄가 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 건 그가 살인 했다는 자체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체제에 기반을 두고 이와 같은 가치를 갖지 않는것도 비도덕으로 규정해버리고 개인에게 폭력을 가한다.반면에, 뫼르소의 삶은 이처럼 모두가 획일적인 관념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에서 기존 질서나 관념을 거부하는 반항아, 이방인으로서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는 살인의 이유를 단지 태양으로 말함으로 살인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며, 재판 과정속에서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음으로서 일종의 가식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생의 마지막에서 ‘나는 행복했었고 또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사형이 집행 되는 날 구경꾼 들이 많이 와서 나를 증오에 찬 고함소리로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만 남아 있다.’ 며 그의 관습에 거부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함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모두가 yes 라고 말하는 시대에 no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나오는 광고처럼, 대중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인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