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경계 확장의 욕망 : 16세기 여성 이숙희 이야기를 읽고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교섭하며 자아 정체성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시대적 상황과 특정 사회에 속해있는 한 개인으로서 성, 인종, 계층 등의 이유로 우리의 행동과 세계가 제약될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숙희라는 여성 역시 16세기 유교사회속의 한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행동을 펼치고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인물로 볼 수 있다. 여성의 행동과 권리가 매우 제한된 세계 속에서 그녀는 고립되고 제한적인 공간인 하가에서 살아가며 학문과 공적세계와 연관되는 상당의 세계를 쉽게 접하지 못하였으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정한 교과과정을 밟았던 남성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배움의 길을 선택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숙희가 자신의 삶의 세계를 확장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공부’를 선택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이 이숙희의 ‘주도적인 의지와 욕망’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의 유배지인 성주에서 태어나 6살인 어린 나이에서부터 언문 공부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총명한 인물로 이후 천자문, 삼강행실도, 소학 등을 공부하였다. 혼사를 치루고 난 이후에도 여유가 생기면 바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숙희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도대체 어떤 것이 그녀를 배움의 길로 이끈 것일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숙희는 완전한 고립은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제한된 생활반경 속에서 지냈으며 하가의 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일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또한 무능한 남편 탓에 시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의 주체로서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하가의 어른으로서 집안 경영을 책임지는 할머니 김돈이의 모습 그리고 권위 있고 고을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그들과 소통하는 할아버지 이문건의 모습을 제 나름대로 지켜보며 주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 세상과 교섭하고자 하는 욕망을 키웠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숙희가 처한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일과 공부 두 가지였고 공부를 통해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숙희는 공부를 통해 자신이 주체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고 공부에서 오는 성취감과 자기 향상의 만족을 경험했으며 이는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더불어 유교지식을 갖춘 남편과의 불안정한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 소양을 갖추고자 함으로써 남편과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삶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이러한 그녀의 도전과 시도가 오히려 그녀 자신을 경계 속으로 다시 가두게 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이 글을 읽고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공부를 자신의 삶에 의미 있게 녹여내어 ‘살아있는 공부’를 펼친 이숙희의 모습에 대한 감탄과 경의이다.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공부를 해왔었지만 내가 과연 이숙희와 같이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진정한 의미의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공부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에 학창시절 스스로가 공부를 좀 했다고 자부했던 내 자신에게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험만을 강조하고 결과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교육방식 속에서 흔히들 말하는 배움의 진정한 목적 즉, 개인의 완성과 긍정적인 자아실현을 경험하며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움의 가치를 실제로 느껴가며 공부를 하는 학생들보단 그저 시험을 잘 보기 위하여, 대학에 잘 들어가기 위하여 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정해진 정답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현 모습은 살아있는 교육이 아니라 죽은 교육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나 숙희의 할아버지 이문건이 삼강행실도를 교재로 선택해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효자도와 열녀도만을 숙희에게 가르친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교육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매우 안타까웠다. 우리나라는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를 편찬하며 교사는 교과서에 따라 수업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이다. 즉, 국가는 국가에 복종할만한 인간,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찬하며 이에 따라 학생들은 활동과 내용은 조금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가치와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도덕 교과서를 예로 들어 부연 설명하자면, 우리는 국민이 국가에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배워왔을 뿐 국가가 국민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적게 접하였으며 이에 따라 우리 대부분은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배워왔을 뿐 다른 방향의 길은 접해보지 못한 것이다. 최근 비판적 사고가 강조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업에 있어서 교사의 자율권이 높지 않아 그것을 실제로 수업에 녹여내어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교과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이다.
『미국의 공교육 개혁, 그 빛과 그림자』를 읽고흔히들 아는 보드게임 중 ‘젠가’라는 게임이 있다. 길쭉한 모양의 직사각형 나무토막을 직육면체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 나무토막을 하나씩 빼는 게임이다. 재미를 위한 단순한 게임이지만 필자는 이를 미국 공교육 개혁의 이상과 현실에 비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교육에 있어서 개혁이란 시대적·사회적 요청에 부응하고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교육운영의 모든 국면을 변혁하는 일이다. 즉, 미국은 신자유주의라는 큰 흐름에 맞추어 이를 교육에도 반영하였으며 그 결과 학교선택제, 학업성취도 검사, 학업낙오자 방지법, 차터스쿨 등 몇 가지의 혁신적인 제도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미국이 그린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과 이를 반영한 제도들은 겉보기엔 어디에도 빈틈이 없어 보이는 튼튼한 직육면체 같아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으며 제도들의 문제점은 서서히 드러나 완벽해보였던 직육면체의 빈틈을 내보이게 되었다. 결국 지탱하던 나무토막들이 없어져 위태롭던 미국의 공교육은 끝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역대 미국 정부가 제시하였던 교육정책들은 출발점에 있어서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을 보장한다.’, ‘어떠한 학생도 학업에서 낙오되는 일이 없게 한다.’는 등의 그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경쟁중심주의, 성과 중심주의가 교육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변질되었는데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을 보장해주고, 책무성의 이름으로 학교의 성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공교육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학교는 교육의 본질적인 모습과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인 학업성취도 검사의 점수를 잘 내기 위해 학교는 성적이 낮은 학생의 학업성취도 검사의 참여율을 낮추거나 시험의 난이도 자체를 낮추는 등 각종 편법을 꾀하였으며, 심지어는 학업 진전도를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히스패닉을 특수교육 대상자로 집어넣는 등 학생들의 교육 교육과정의 개발, 동등한 배움의 기회 제공,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 확보, 경제적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임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는 우리로 하여금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한국의 교육 개혁 운동이 현재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준다.이 책을 읽은 이라면 대부분은 미국의 공교육 현실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우리나라가 미국의 공교육 붕괴 노선을 밟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교육 시스템을 지탱해주는 나무토막들이 떨어져 나가 언젠가 붕괴될 것을 기다리며 흔들거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작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교육은 교육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아이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뿐더러, 6년 연속 OECD국가 중 아동 행복지수가 꼴찌이며, 하루에 1.5명의 아이가 자살을 하는 현실까지 내닫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회 현실의 모든 원인을 교육으로 돌릴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가중시킨 일제고사의 부활과 입시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중·고등학교의 교육, 학생의 성장이 아니라 오로지 성적과 줄 세우기에만 몰두하는 학교가 수능 전 날 학생들을 자살로 내몰고 아이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폭력을 일삼는 학부모를 만들었다는 것은 반박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또한 이는 공교육 붕괴의 실상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필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역대 한국정부가 내세워왔던 교육정책인 일제고사의 부활과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의 확대 그리고 수월성 교육에 대해 되돌아보고자 하며 이러한 제도들에 대한 문제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지 짚어보고자 한다.우선, ‘경쟁’의 개념이 과도하게 교스트레스와 학업부담을 안겨주었다. 최근 조정래 작가가 발표한 소설 에서 보듯이 학생들은 시험이 끝날 때마다 게시판에 붙는 성적에 스트레스를 표하며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반문을 제기한다. 오직 소설속의 교장만이 성적을 공개하고 학생들끼리 경쟁을 붙이는 것이 학생들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것이 곧 명문학교로 거듭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필자가 거듭했던 생각은 도대체 ‘좋은 성적을 내는 것’과 ‘명문학교로 거듭나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며,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과 자신만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자신과 가족 나아가 우리 사회를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 채 선다형 문제의 보기 중 옳은 답을 선택하는 방법만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이냐는 것이다. 시험과 입시에만 과도하게 치우쳐 창의적 체험 수업시간이나 학급시간은 부족한 수업의 보충수업으로 변질되었고 교과서대신 시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연계교재로 수업을 하는 것은 한국 교육 현실의 오래된 역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험은 필요하며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험이 도움이 될 때에는 교육에서 인간의 능력과 역량을 판단하는 보충 수단으로써 작용할 때이며 수단의 목적화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살아있는 인간의 능력을 계량화하여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어리석은 행위이며 이에 대해 우리는 학교의 본래 역할과 교육 본연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보아야 한다. 학교는 전인교육을 바탕으로 인성을 가다듬고, 건강한 몸에 건전한 마음을 깃들게 하며,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넘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교육이란 단순한 읽기, 수리 능력을 넘어선 어떠한 것으로 ‘교육이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교육은 복잡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따평가할 수 없는 것을 중요시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인 학교가 강조해야 할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좋은 인성과 올바른 가치관이며 이를 하나의 과목으론 편성할 수 없어도 교육과정과 교사가 자율적으로 녹여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둘째로, 신자유주의 사상이 대표적으로 반영된 교육정책으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의 적극적 확대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골라 뽑고, 등록금도 평균 5배~10배에 이르도록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용하니 일반학교들은 정부가 억제해도 자사고로의 변신을 꾀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결국 자사고라는 것은 오랜 기간 갈고 닦아온 고교 평준화의 파괴이자 차별 교육의 표본이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없으면 자사고는 열리지 않는 금단의 문이었고 이는 곧 계층이동의 구름판으로써 교육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을 재생산해내는 기계로써 교육이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되는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계층이 낮은 학부모와 학생들은 교육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며 이는 헌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사고의 확대는 오히려 일부 학생들의 교육적 권리를 빼앗는 것이었으며 경제력으로 교육 차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잔인한 비교육적 정책이었다. 국가의 교육정책은 국민이 교육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 유지될 수 있으며, 교육정책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작용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학교 서열화와 국민의 교육포기 선언을 야기하는 이 정책에 대해 재검토해야 하며 정책 시행 당시 “학교의 자율화와 경쟁을 통해 공교육의 질을 높여 사교육비를 절감하겠다.”는 정책적 포부가 서열화된 대학구조, 과도한 학벌주의, 거대한 사교육 시장 등 사회, 정치적 관계와 교육이 복잡하게 연관된 대통령은 자율적이고 수월성을 보장하는 교육 체제로 바꿔야 함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공교육 정책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수월성 교육’이다. 수월성 교육이란 학생들의 적성, 재능, 잠재력을 조기에 발굴하여 다양한 학습기회 제공과 함께 각 학습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킨다는 교육이다. 산업구조가 지식기반 구조로 바뀌고 있는 최근 수월성 교육이 현 시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며, 교육 전체의 모습이 아닌 최상위권 학생들의 경우만 보았을 때 수월성 교육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측면도 물론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교육에 있어서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제도의 목적에만 치우쳐 시장원리가 교육에 과도하게 도입되었을 때의 이면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수월성 교육이 대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수준별 수업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교사들은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달리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시행 전과 다름없이 중하위권의 학생들에게 맞춰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학교에서도 명확한 기준 없이 학생들의 수준을 분류해 수업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학생이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맞춤식 교육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수강하기를 원하고, 배우고자 하는 과목보다는 학교 자체에서 제공할 수 있는 과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즉,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실정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 재능, 흥미를 계발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무한경쟁의 논리 속에서 단순히 다양한 학습기회의 제공과 경제적인 지원으로 학생들에게 공부에 대한 열정과 흥미, 내재적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시험에 나오니까 공부해”란 말로 학생들에게 외재적인 동기만을 부여 하는 교사들의 모습은 학창시절만 떠올려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수월성 교육의 적용이 잘못 이루어지고 있음은 물론 수월성 교육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한국 이다.
도덕과 교육I 과제-나의 도덕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나의 도덕성은 어떻게, 어디서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나는 도덕적인가?’에 대한 판단과 ‘그렇다면 도덕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도덕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덕이란 인간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이자 바람직한 행동기준”을 말하며 “인간의 사회생활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나는 상당부분 공감하는 바이며 이에 비추어 도덕에 대한 주관적인 정의를 내려 보자면 도덕이란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자 지켜야할 규범으로 안정된 사회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논란이 있는 가운데, 도덕을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 인간의 본성’ 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나는 도덕이라는 것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게 되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안정된 사회를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더 나아가 권력 세력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규범이자 학습과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면 내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나는 과연 얼마나 ‘도덕적’인가. 위의 도덕의 정의를 바탕으로 볼 때, ‘도덕적’ 이란 것은 인간이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모든 상황에 있어서 도덕적이냐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면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흔한 예일지 모르지만 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횡단보도의 신호를 무시하는 때도 종종 있었으며 나에게 불이익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 닥치면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말을 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저질렀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도덕이라는 것이 사실 내면적인 측면이 훨씬 강함에도 도덕적 판단은 오직 행동을 통해서만 판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형성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도덕성은 타의에 의한 교육과 더불어 개인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해야 착하지.”란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성장해왔으며 학교에서는 도덕 교과서를 통해 도덕적인 어린이, 착한 어린이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 배우며 도덕적인 행동을 한 아이에게는 칭찬스티커와 선물을 주는 등의 선생님의 행동을 통해 도덕적인 행동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익히고 도덕성을 형성해 나갔다. 즉 다시 말해 가정과 학교 즉, 타의에 의한 교육에 의해 도덕을 학습한 것이다. 물론 가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만이 온전히 나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며 교육과 더불어 나만의 경험을 통해서 제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횡단보도의 신호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무단횡단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뻔 한 일을 겪고 난 후에서야 교통규범, 나아가 사회규범을 잘 지키는 것이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던 것 같다. 작은 예이지만 이와 같은 경험의 반복과 교육을 통해 제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성장시키고 발달시켜가며 지금 현재의 도덕성을 형성하게 되었지 않나 싶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적응과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 어떤 교육을 할 수 있을까?-공감과 상상력 교육을 바탕으로‘인공지능‘, SNS발달’, ‘나홀로 족의 증가‘ 등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키워드로, 일상생활에서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먼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 예상되었던 현상들은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오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예상지 못한 현상들이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지 못한 채, 과거에 고착화되어 있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회적 민감성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분노‘, ’혐오‘, ’공포‘등은 개인의 감정상태를 표현하거나 우발적 또는 계획적 범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단어였다. 하지만, ’분노사회‘, ’혐오사회‘, ’공포사회‘라고 이름을 붙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단어들이 우리 생활에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곧 우리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대해 현대인들은 사회의 정상화를 위한 공동체적인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 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구체화하여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적응과 비정상적인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 어떤 교육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자발적 싱글 사회-비혼주의자들의 증가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SBS의 한 예능 프로그램 ‘미운 오리 새끼’는 결혼을 하지 않은 40~50대의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제목에서 단 번에 느낄 수 있듯, 결혼을 하지 않은 취급받으며, 결혼을 본인의 의지에 따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과거부터 쓰이고 있는 ‘노처녀’, ‘노총각’ 이라는 단어만 봐도 사회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과 남성에게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곤 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치부하며,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정인 것처럼 하나의 프레임을 입혀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을 조금만 살펴봐도 우리는 이러한 고정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함을 쉽게 알 수 있다. 2016년 기준 통계청 인구동향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가구형태는 1인 가구(27.2%)로, 2인(26.1%), 3인(21.5%), 4인(18.8%) 가구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40대 이하에서는 절반이 넘는 52.8%가 1인 가구를 이루고 있었다. 즉, 결혼이 때가 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인생 단계라고 간주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이며, 세상을 ‘결혼을 꿈꾸는 미혼’과 ‘이미 그 꿈을 이룬 기혼’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볼 수 있다. ‘비혼’이란 미혼(未婚)이라는 단어가 ‘원래해야 하나 아직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어휘이다. 즉, 결혼을 못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 또는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비혼주의자들은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감과 경제적인 어려움, 자유에 대한 갈망, 온전히 개인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의지 등의 다양한 이유로 비혼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비혼’에 대한 사람들과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으며 다양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비혼자들에게는 ‘결혼을 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타박과 ‘아이를 낳지 않아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비난이 언제나 따라다니고 있으며, 심지어는 ‘저출산’과 ‘인구절벽 현상’의 원인을 그들에게 떠넘기기 까지 하고 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그를 실천 현상 속에서 비혼주의자들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자신들이 정상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변화된 사회 속에서 ‘정상범주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기본적인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놓은 필수 의사결정인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개인은 각각 다르다는 수준의 교육을 넘어 ‘다르다는 것이 곧 틀린 것이 아님’을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공동체적 사회에서 ‘공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임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좋아요’ 집착 사회SNS란 Social Network Service의 줄임말로, 일종의 관계 지향적 커뮤니티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기존의 인간관계를 관리하거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동시에 자신이 다녀온 맛집, 여행지 등을 공유하며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생활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공유하며 자아를 표출해내고자 한다. 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 표출이 과도하게 드러나 자신의 원래 모습과 괴리감이 있는 일종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흔히들 일컫는 SNS상의 맛집만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가서도 누가 봐도 멋진 사진을 건지기 위해 여행의 풍경과 정처를 느끼기 보단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심지어는 자신도 타인의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임에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타인의 무지를 깔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즉, 자신의 생활이 중심이 과 공유하는 것이 아닌 SNS에 끼워 맞추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며 두 가지의 자아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좋아요’수가 곧 자신의 가치라는 잘못된 판단 하에 더욱 심해진다. 즉, ‘좋아요’수를 얼마나 받느냐가 개인의 취향이 얼마나 그럴싸한 것인지를 가늠하게 되는 척도가 되면서 자신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단 현실을 있어 보이게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왜곡된 가치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소외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 잦은 단절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SNS는 자신의 인간관계를 무한대로 넓혀갈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가 되었을 것이며 관계로부터 느끼게 되는 허무함을 ‘좋아요’수를 통해 채워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에 대한 압박이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모습만 드러낼 수 있는 즉,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세계에서 더욱 극대화된 것 같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SNS상에서 또 다른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해내 이미지 개선에 대한 욕구를 해소한 것이다. 물론, SNS상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완벽하게 일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SNS를 중심에 놓은 채 진정한 ‘나’를 외면하고, 그 사이 간의 괴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며 관계에 있어서의 해결책을 가상에서만 찾게 된다는 점에서도 옳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올바른 자기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일종의 ‘공감적 태도’도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공감’이란 흔히들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로지 타인만을 향해 공감적 태도만 보인다면,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한 채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억누르게 되고 이러한 억압이 SNS상의 왜곡된 자아를 만드는 등의 괴이한 현상 발생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공감’에 해 정확하게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자신을 넘어 타인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혐오 사회‘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혐오’ 는 모두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에 대한 범죄는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된장녀‘, ’김치녀‘ 등 온갖 언어폭력으로 시작된 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실제적 위협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강남역 10번출구 살인사건으로, 이 사건의 피고인은 ‘여성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며 여성혐오 범죄사건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이외에도 ‘장애인 혐오’를 검색하면, 장애인 혐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보단 직접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있는 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식당에 ‘노키즈존’까지 등장하면서 사회는 아동에까지 혐오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점점 더 당당해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혐오’가 단순히 잘못된 감정 표현의 일종이 아니라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약자들에게 생활 속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현실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들에 대한 원인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강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 아래 약자들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회 구성원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으로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자신이 강자라는 판단아래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오늘도 살아남았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약자들의 표현에서 우리는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해 올바르게 깨닫고,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적인 교육을 실시하여야만 한다. 또한,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에 대해 넓은 범 한다.
특수아동의 이해 - 『장애학 함께 읽기』 서평“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장애학’이라는 말을 들어 본이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장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제목과 함께 등장한 이 책의 첫 줄은 나로 하여금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말은 자주 들어보았지만 ‘장애학’은 나에게 낯설게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장애에 관한 학문이겠거니’ 라는 단순한 생각과 함께 나는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장애학의 기본적 특징과 함께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해 설명한다. 장애학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한다. 장애학 이외의 다른 학문들 예를 들면 의학, 심리학, 특수교육학에서도 장애에 대한 연구를 다루지만 이들은 모두 개인적 차원에서 장애에 접근하고 있다. 이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아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 심리학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이 때에도 장애 아동의 개개인적인 사례를 살펴보고 아이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었었지 장애를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하는 사회적 산물로서 바라보진 않았었다. 장애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라고 나온다. 위의 정의처럼 사실 나는 지금껏 장애를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가지고 태어나는 것 또는 사고로 인해 발생하는 후천적인 것으로만 여겨왔었지 사회적 억압의 차원에서 장애를 분석해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 내리고 있는 장애를 ‘손상’이라고 표현하며 장애란 손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 없이 그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한으로 정의한다. 자본주의가 등장함에 따라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 간주되었고 그 속에서 장애인은 노동을 수행할 수 없는 즉, 일정기준에 미달하는 여타의 손상된 상품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장애인들을 수용시설, 특수학교 등의 다양한 시설로 격리시켰고 이는 장애인들로 하여금 자립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하게 되었다. 이 내용을 읽고 나니 고등학교 시절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로 3년간 다녔던 봉사활동의 기억이 났다. 그 때에는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장애인 분들에게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요양 시설에 있는 장애인 분들을 위해 하나하나 다 챙겨주시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배려해주는 사회 복지사 분들의 마음과 희생에 감탄하곤 했었다. 또한 나도 봉사활동자로서 장애인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사소한 것까지 다 해주려고 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니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쩌면 장애인 분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일정한 선을 넘어서 과도하게 배려를 해주려는 마음이 장애인분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무능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키우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이 책에서 말하는 장애학에 대한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장애인 대중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장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차별 철폐와 권리 확보를 향한 실천 지향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과 장애인을 연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의 주체와 공동연구자로 본다는 점이다. 사회학, 경제학 등 일반적인 학문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실천을 지향으로 하는 학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연구 대상자와 연구 주체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문제 해결에 힘써가는 학문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연구 과정 그 자체가 장애인들에게 하나의 해방과정이 되는 장애학 이라는 학문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평을 쓰면서도 ‘장애학’이라는 단어에만 계속해서 빨간 줄이 그어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장애인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며 그들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장애인’ 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고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야 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현재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손상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사회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에 통합되거나 배제되는 정도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적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위치로 살아가는 것이 빨간 줄이 그어지는 현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 개개인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인식을 바꿔나가도록 모두가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