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테일러『불안한 현대사회』에 대해 논하라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자기 결정의 자유(self-determining freedom)”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자유’의 개념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유의 침해나 제한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특정 계층에게 자유란 제한적일 수 있고,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 역시 사회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시장에서의 재화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고, 사회적 지위 수준이 정치적 파워에 힘을 미친다.찰스 테일러는 자기 결정의 자유를 ‘나에 관한 것이 외부의 영향들에 의하여 형성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결정할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고’(테일러 : 43) 라고 규정한다. ‘사회의 법칙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영향을 받고 있는 내 자신과 〔전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자유로서 ‘외부로부터 부여된 압력의 제한을 철폐하고 내 스스로 혼자서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테일러 :43) 이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제시하고 있는 ‘자기진실성’과 맥락이 닿아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외재적인 도덕이 아닌, 인간 내면의 정서 즉 마음속의 목소리에서 찾는 ‘자기진실성’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아닌 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정을 요구하는‘자기결정의 자유’와 유사해 보인다.하지만, 테일러는 이 둘이 구별되며 자주 혼동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결정의 자유를 갖지 못함으로써 현대의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개인주의로 인해 무기력함과 무관심에 빠진 개인들은 정치에 무감각하게 되고, 자신의 자유를 정치인들(타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게 된다. ‘자기 결정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일부 계층은 자신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고, 이는 계층갈등과 사회적 분배 정의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찰스 테일러는 현대의 불안이 이러한 개인주의, 자기 결정의 자유의 상실에 귀인한다고 보며,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유의 상실은,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선택권마저도,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보호(감독) 권력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테일러 : 21) 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실제로도 우리 주변에서,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젊은이들이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 대통령선거에 참여하는 대신 여행을 택할 것이다. 반복적이고 거듭되는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책임을 물을 수 없는”권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하지만, 거대 권력이 내 일상의 자유를 침범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정부의 메르스 1차 방어의 실패로 인해 자신이 자가격리자가 되고, 일할 자유, 돌아다닐 자유가 침해되기 전까지, 사실 사람들은 정책에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테일러의 주장은 이러한 자기결정의 자유를 회복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찰스 테일러의 이러한 주장을 교육현장에 접목시킨다면,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과정 등 교육 전반의 결정에 관한 자율성, 자결권과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6차 교육과정 이후부터 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와 구조의 다양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시행되어왔으며, 단위 교육과정 자율성 역시 상당부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전의 통제 및 강제 규정에서 벗어나, '교과 집중 이수제 도입', '교과수업 시수의 증감 운영', '고등학교 선택 중심 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대' 등 지역 및 학교 단위에서의 자율성 증진이 추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자율성은 국가 교육과정 기준에 기초해야 하고, 교육부의 지침에 따른 제한적 자율성이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 역시 수업 시수와 학교, 학년별 기준에 따라 제한적으로 운영된다. 국가 기준, 통제 내에서의 제한적 자율성인 것이다. 물론, 기준 없이 무제한의 자율성 증진은 각기 다른 교과 기준과 방법 면에서 혼선이 오고, 교육 체계 자체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실제 교사나 학생들의 ‘자기 결정의 자유’, 자기 선택권이 별로 없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자율성의 증진이라 보기 힘들다. “나에 관한 것이 외부의 영향들에 의해 형성되기보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교육적 제도의 형성은 현실적으로 힘든 것인가? 사실 다문화, 다원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교육내용과 교육과정은 실로 다양해지고 범위가 확대될 수 있다.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외국어 교육 역시 이전의 프랑스어, 독일어에서 이제는 중국어, 일본어로 변화되었다. 이는 학생들의 개별적 선택이나 선호라기보다 시대 변화에 따른 과목 이동 현상에 불과하다. 베트남어나 태국어 등 다문화 사회의 언어를 습득할 기회, 그런 언어를 선택할 자유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 모든 것을 확대하고 수용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학생들이 ‘외부의 압력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함으로써, 외부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스스로가 선택한 학습에 대한 자율권과 학습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교육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테일러가 경고했듯이, 최소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권력이 우리 일상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이 자신의 자율권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과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하는 교육적 환경이 필요해 보인다.찰스 테일러『불안한 현대사회』에 대해 논하라
한스 라우쉔베르거의『교육함과 철학함』에 대해 논하라“철학함이야말로 교육의 의미를 밝혀줄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한스 라우쉔베르거의 『교육함과 철학함』은 교육을 업으로 하거나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대단히 흥미를 끄는 명제이다. 수많은 교육학자들이 교육을 나름의 개념으로 정의해 왔지만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적 행위는 언제나 많은 가변적인 요소를 전제로 한다. 특히, 필자가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의 교육적 행위가 그 상대가 되는 아이 혹은 학생에게 어떠한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우리 자신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설사 교육자가 이러이러한 교육적 행위가 무수히 좋은 의도를 품고, 긍정적 작용을 할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교육을 실행하더라도, 교육적 특수한 상황 또는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학생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그 사고방식에 따라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행위에 대한 불확신은 사실 교육행위 자체의 불가능성 혹은 무용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필자도 그러한 측면에서, 교육이 과연 의미없는 것인가, 교육적 행위를 그만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어찌됐든 교육은 아이의 사회화와 개별화의 과정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행될 수 밖에 없고,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는 하나의 문제 상황이 시시때때로, 우연히 우리 삶에 불쑥 들어오기도 함으로써 어른으로써의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육적 행위를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요소로서의 교육은 잠시의 우연한 기회가 아닌 신뢰를 기본으로 하여 연속적인 관계가 지속될 때 보다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지속성이면서 동시에 교육적 행위의 파급력이 중시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교사들이 교육을 시킬 때, 그는 나름의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교육을 실행한다. 인간이 인간을 교육시킨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지만, 그 안에 많은 교육적 오류가 내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른으로써의 교사 역시 여전히 미완성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최선이 최선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의 편견과 오만에 집착해 아이의 교육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특히, 저자는 교육의 목표가 개별화와 사회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에서, 그러한 “가능성”이 손상되지 않고 실현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것(p.53) 이라고 밝히면서, 인간이 가진 자기 모순적 오류가 교육행위로 실행되는 것에 우려하고 있다. 야누쉬 코르착의“모든 아이가 자신이 죽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주장은 그런 측면에서 지극히 부모들에게 충격적 주장이다. 모든 것을 지극히, 긍정적으로,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부모의 교육이 때때로 아무런 갈등이나 혼란 없이 세상을 온전히 아름답게만 보여주려 함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어떤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사유를 없앨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으며, 교육이란 이러한 인간의 가능성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일종의 안내인 같은 역할을 하는 항해이며, 어떠한 성과를 확정짓거나 규정짓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범주로 된 물음의 형식이라고 주장한다.(p.48)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확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원인과 결과, 그 과정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짐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아름다움, 성공, 행복 뿐 아니라 죽음, 슬픔, 혼란, 갈등이 혼재해 있는 이 사회에서 바르게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적 사유를 통한 교육의 진정한 본질이자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교사의 역할 범위를 어디까지 규정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교사가 철학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모든 과목에 철학적 사유를 결합한 교육방식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이들의 철학적 사고의 발달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교육이 철학함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명제의 본질적 지향점에는 동의하지만, 수업 현장에서의 현실적 적용의 문제는 사실 별개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철학적 사고는 인간 내면의 본질과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기제가 되지만, 실제 수업에서의 실천적 적용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이상향에 불과할 것이다. 교사나 부모, 학생들이 철학적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명제적 지식이 중요시되고, 입시에서의 성공, 시험에서의 성적만이 중시되는 학업 풍토에서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철학적 사유의 발달이 학교 현장에서 적용되기 위한 단계별 실천 방안이 함께 모색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한스 라우쉔베르거의『교육함과 철학함』에 대해 논하라“철학함이야말로 교육의 의미를 밝혀줄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한스 라우쉔베르거의 『교육함과 철학함』은 교육을 업으로 하거나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대단히 흥미를 끄는 명제이다. 수많은 교육학자들이 교육을 나름의 개념으로 정의해 왔지만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적 행위는 언제나 많은 가변적인 요소를 전제로 한다. 특히, 필자가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의 교육적 행위가 그 상대가 되는 아이 혹은 학생에게 어떠한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우리 자신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설사 교육자가 이러이러한 교육적 행위가 무수히 좋은 의도를 품고, 긍정적 작용을 할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교육을 실행하더라도, 교육적 특수한 상황 또는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학생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그 사고방식에 따라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행위에 대한 불확신은 사실 교육행위 자체의 불가능성 혹은 무용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로티 『자아의 우연성』에대해 논하라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눈물지었다. 꽃다운 학생들의 죽음...과연 이것만이 전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한 유일한 이유였을까? 어린 학생들의 죽음, 그 학생들이 단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아픔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살아서 다른 이와 구별되는 자신의 개별성과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아이덴터티)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이들과 다른 각자의 ‘나’로 형성되어 가는 삶의 여정과 인식의 과정들을 심지어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가야 했다는 그 안타까움이 고통과 분노, 좌절로 전환되었는지도 모른다. 각 개인이 가진 개별성과 독특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바로, 로티가 얘기하는 “구체적인 잃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로티는 라르킨의 시를 인용하면서, 개별성과 보편성의 대립, 우연성을 인식하여 자아창조를 이루려는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 우연성을 초월함으로써 보편성을 성취하려는 노력 간의 싸움(p.3) 등을 대조를 통해 보여주면서, 눈먼 각인(blind impress)’이라는 흥미로운 어휘를 사용한다. 사람의 모든 행동을 담고 있는 이‘눈먼 각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행위, 일종의 사회화의 과정으로서, 한 개인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을 인식하고 수용하여 행위로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회화의 수동적 산물로서의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눈먼 각인’으로부터 자신의 개별성과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눈먼 각인을 편안하게 느끼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특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자기 자신의 특유성을 드러내기 위한 특유한 낱말이나 형식을 찾아내는 것’(p.2) 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찍혀져 왔던 흔적을 드러내고, 보편적인 각인과는 대조적인 개인적인 삶의 개별적 우연성들로부터 비롯되는 ‘눈먼 각인’을 지각하는 것이다.니체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동물의 죽음과 구별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이러한 자기인식, 자아 창조 능력에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에게 소중한 유일한 부분을 창안하고, 자신의 마음을 창안한다는 것은...자기 자신의 언어를 창안하는 것(p.5) 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가 자신에게 행하고자 하였던 바를 과거에게 그대로 행하는 것, 과거 자체가 자신의 각인을 담도록 하는 일이다(p.7)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삶을 자기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재진술하는 것, 이것이 니체식의 자기 극복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육적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모두 개별적으로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로서, 각각의 교육적,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각자의 존엄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를 복사품이나 복제물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그 삶에는 희망도, 자기극복도, 자기창조도 존재하지 못한다. 내가 타인과 다른 나만의 독특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의 독특한 언어나 낱말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노력, 그러한 교육적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특히, 로티가 말미에서 밝히고 있는, ‘그 근원을 어린 시절 교육의 우연성에서 찾음으로써 자아에서 신적인 것을 탈각’(p.7)할 수 있게 하는데, 타고난 자아로부터 새롭게 발견되는 자아, 새로 창조되는 자아의 탄생이 바로 이 교육적 우연성으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있다. 교육적 우연성을 교육적 기회로 환원하면, 자아 창조를 가능케 하는 어린 시절의 교육적 기회가 중요할 수 있다. 로티는 그 적절한 교육 시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나,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자아의 가능성을 찾는 노력, 특히 어린 시절의 일종의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듯 하다. 구조화되지 않은, 비공식적, 비가시적 교육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 사고, 태도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내적 교육을 통해 자신을 재진술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창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이 될 수 있다.하지만, 최근의 교육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고의 개발이라기 보다 실용적, 유용한 지식의 전달에 치중함으로써, 잠재적 자기계발의 가능성의 기회를 차단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 상황의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주어진 답에만 맞춰 가려는 아이들의 현실은 로티가 얘기하는 ‘눈먼 각인’이 지각 없이 그대로 작동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개별적 우연성이 오히려 차단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로티가 얘기하는 교육의 본질에 다시 한 번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삶에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재진술하도록 노력하게 하고, 자신만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자각하게 하는 노력을 통해, 교육이 개인의 개별화를 획득하고 자기극복의 과정을 수행하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로티 『자아의 우연성』에대해 논하라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눈물지었다. 꽃다운 학생들의 죽음...과연 이것만이 전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한 유일한 이유였을까? 어린 학생들의 죽음, 그 학생들이 단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아픔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살아서 다른 이와 구별되는 자신의 개별성과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아이덴터티)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이들과 다른 각자의 ‘나’로 형성되어 가는 삶의 여정과 인식의 과정들을 심지어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가야 했다는 그 안타까움이 고통과 분노, 좌절로 전환되었는지도 모른다. 각 개인이 가진 개별성과 독특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바로, 로티가 얘기하는 “구체적인 잃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라일 『마음의 개념』에 대해 논하라라일이 『마음의 개념』을 통해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의 그 유명한 명제에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실체로서의 마음 이론을 비판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마음이란 행위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대한 기질이나 성향이 드러난 것이다. 주지주의적 관점에서는 진리를 인식하고 이론의 틀을 구성하는 지성(Intellect) 작용이 마음의 핵심 기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알면 행동하게 된다는 인식론을 정당화한다.하지만, 라일은 이러한 지정적 작용만이 마음의 핵심기능은 아니며, 지성적 작용과 범주를 달리하는 다양한 예지적 개념들 역시 마음의 주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본다. 그는 지성적 사고가 예지적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반대로, 지성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 예지적으로 행위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과 육체를 구별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신화, 범주 오류에 대한 비판과 방식을 아는 것(knowing how)과 사실을 아는 것(knowing that) 의 차이를 설명을 시도한다.우선, 라일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부르는데, 마음(유령)이 인간의 육체(기계) 속에 신비스럽게 숨어 있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마음의 작용은 육체의 행위로 모두 설명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타인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공유할 수 없는데도, 심신이원론에서는 마음을 육체와 같은 범주로 봄으로써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고, 육체의 행위를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음의 작용과 육체의 작용은 다른 범주이며, 이 둘은 각기 작용하는 다른 범주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입술을 혀로 막고, 귓구멍이나 콧구멍을 손가락을 사용해 막을 수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들은 눈을 감는다고 해서 배제되지 않는다”(p.11) 라일은 마음과 육체가 다른 범주에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이 단지 지성적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음(정신) 작용을 지성적(intellect) 개념으로 생각하는 주지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마음은 예지적(intelligence) 개념과 지성적(intellect)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실을 아는 것(knowing that)으로서의 지성과 방식을 아는 것(knowing how)의 예지적 능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지식이나 진리를 안다는 것과, 그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의 ‘명제적 지식’과 방식을 아는 것으로서의 ‘방법적 지식’의 구별이 필요하다. 즉, 자전거타기에 대해 말할 때, 자전거 타는 것을 아는 원리를 아는 것과 실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라일에 따르면, 방식을 아는 사람은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 효과적으로 혹은 성공적으로 잘 수행하는 경향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수행은 일정한 기준들을 충족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 기준을 직접 적용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예지적인 행위란 방식에 대한 앎을 가지는 것이며, 관찰이나 실천을 통해 수행될 수 있다. 예지적 행위는 습관과 유사하지만 다르게 구별될 수 있다. 습관은 행위로써 눈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예지적 행위는 일종의 경향성으로서 어떠한 상황이나 맥락이 주어질 때,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며, 관찰과 수행, 훈련을 통해 길러질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교육학적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인식 및 이론을 아는 것으로서의 명제적 지식 뿐 아니라, 방식을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서의 방법적 지식인 예지(intelligence)를 끊임없는 관찰과 훈련, 실질적 수행을 통해 기를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지식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예지(intelligence) 에 해당되는 형용사군인 '똑똑한(clever)', ‘주의 깊은(careful)', ‘창의적인 (inventive)' , ‘신중한(prudent)' 등의 마음의 경향성이 방법적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라일은 이러한 기질이나 성향을 기르기 위해서 반복적인 관찰, 훈련, 수행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때의 관찰은 단순한 관찰이나 모방이 아니라, 성찰과 숙고를 통한 기질과 성향성의 개발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찰(Reflection) 과 인간의 사고 및 숙고 능력이 사실을 아는 것(명제적 지식)을 배제하고, 방식을 아는 것(방법적 지식)만을 학습함으로써 길러질 수 있는 것인가?라일 『마음의 개념』에 대해 논하라라일이 『마음의 개념』을 통해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의 그 유명한 명제에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실체로서의 마음 이론을 비판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마음이란 행위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대한 기질이나 성향이 드러난 것이다. 주지주의적 관점에서는 진리를 인식하고 이론의 틀을 구성하는 지성(Intellect) 작용이 마음의 핵심 기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알면 행동하게 된다는 인식론을 정당화한다.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지식’에 대한자신의 관점을 제시하시오.인간은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해 혹은 자기계발을 위해 여러 가지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교육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위한 여러 가지 사고의 기반을 제공해야 하며, 특히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지식’은 인간 삶의 보편적 가치와 사고의 발달을 도와주는 기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교육학 용어 사전”에 따르면, 지식[知識, knowledge] 이란 “올바른 근거에 입각한 참 신념(信念), 즉 감각경험(感覺經驗)이나 타당한 추리(推理)를 통하여 대상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의문(疑問)에 의하여 혼란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로써, “통속적으로는 이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 진술(陳述)을 뜻하기도 한다”고 정의내리고 있다. 지식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은 이처럼 지식을 “정당화된 참된 신념(justified true belief)”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이 때 지식은 진리와 동의어가 될 수 있고, 정당한 근거에 기반해 신념을 가질 때 지식은 “참 신념”이 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점은 “정당한 근거”를 반드시 요하는 것이며, 합리적인 설명이 없는 신념은 그것이 아무리 참된 신념이라고 해도 지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혹은 인식적으로 논박되고 입증되는 과정을 거쳐 지식은 “정당한 근거”를 가지게 되며 일종의 진리로써의 입장을 굳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가설과 논증, 입증에 의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 아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이 진리가 되고, 지식이 되며 학교 교과과정에서 당연히 배워야 하는 지식으로 굳어진 과정과 같다.반면, 이러한 지식의 정의에 대해 인간이 갖는 어떠한 신념도 현실적으로는 참이 아니라 참에 가까울 뿐이며, 절대적 진리에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등장한다. 지식에 대한 신념은 결국 우리의 기초적 신념과 연결될 수 밖에 없으며 여러 경쟁하는 신념들 중에서 취사선택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인 신념'이 아니라, ‘선택된 참에 가까운 신념'이며 정당화의 조건은 선호의 조건으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과학과 기술공학의 탄생과 발전으로 많은 새로운 지식들이 탄생했고, 이는 소위 합리적 설명, 과학적 입증, 정당한 근거에 의해 진리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았지만, 실제 불변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들의 취사 선택에 의해 ‘진리’의 옷을 입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많은 교육과정 사회학자들도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들은 교과과정이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상황으로부터 추출되고 취사ㆍ선택되는 과정에서 개별적 가치 행위가 개입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교과과정의 구성과 선택과정을 통해 어떤 지식은 부각되고 어떤 지식은 방치, 격하 또는 폐기됨으로써 지식의 선호와 위계화가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모든 선택 행위에 가치가 개입된다’는 견해는 “가치 개입 배제”라는 가치를 개입시킬 수 밖에 없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고 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조사 방법 중 무선표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임의표본추출법이 연구자의 가치를 배제시키기 위한 방법이지만, 오히려 역으로 객관성이라는 가치를 표방함으로써 의도한 결과를 산출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현장에서 배우는 많은 지식들이 ‘객관적’ 지식이라는 가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 교육과정이 선택되고 구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지식들이 서열화되고, 위계화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교단의 선생님으로부터 ‘공적으로’ 배우는 지식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 지식이 거부할 수 없는, 불변의, 절대적인 지식이라는 받아들이게 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인정하지 않는 지식들은 무시되는 혹은 쓸모없는 지식이라는 점으로 오인하게 한다. 이러한 지식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사회과학에 적용될 때, 사태는 심각해질 수 있다. 학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역할, 혹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에 대한 편견을 가정하고 지식교육을 시킬 때, 지식의 위계화와 서열화는 더욱 공고해 질 위험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과 지식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즉 교육내용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사회적 힘과는 어떤 숨겨진 역동 관계를 가지는가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비판적 교육 사회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다. 그들은 교육과정이 사회와 학교의 권력과 권위 구조를 확립ㆍ유지하는 중심요소로 작용해 왔으며, 교육과정은 결국 사회 통제에 의해 결정된다고 간주한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내용 선정의 주요 원천이 과거의 지배적인 문화전통에 기반하며, 유일한 선택적 전통(the selective tradition) 인데, 이 전통은 항상 선택되며, 그 밖의 의미와 경험들은 무시되어 학교지식으로부터 제외된다. 이러한 계속적인 선택과 제외의 반복을 통해 지배적 문화가 의미 있고, 유일한 전통이 되며, 지배적 문화 밖에 있는 삶의 경험들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 배제되고, 거부되며, 교육내용에 포함되지 않게 된다. 객관성으로 표방되는 가치들이 실제로는 사회와 전통의 ‘주관적’ 선호에 의해 구분되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 학교 교육과정에 침투되어 지식의 선별처리 과정이 더욱 공고화되게 된다.한편,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비판적 주장이 거세지만, 주지주의 교육학자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주지주의의 대표 학자인 허스트에 따르면, 지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정신적 노력의 산물로서, 지식 즉 학문의 탐구는 인류가 이룩해 온 지적 경험에 대한 독특한 방식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된다. 지식은 학문과 거의 같은 의미이며, 개인의 선호나 취향에 상관없이 지식 그 자체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다움’의 성장을 위해 보편적으로 받아야 할 교육이 있으며, 전통교과는 그러한 점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전통적 교육 내용이 학교 교과과정으로 채택되고, 지속적으로 교육되는 이유는 인류가 역사적으로 쌓아온 경험의 세계가 그 지식 안에 이미 녹아들어가 있고, 인류가 공동으로 노력하여 이룩한 '공적인 언어에 담겨 있는 공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에는 교육사회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들어가 있다기보다 인간이라면 꼭 받아야 할 교육, “인간다운 사고의 계발”을 위한 필수교육으로서 이미 교육적 가치가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사회적 파워에 의한 위계화나 서열화의 과정보다는 인류의 경험을 내면화하기 위한 지식체계로서의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가정한다. 즉, 학교에서 공적으로 교육시키는 내용, 특히 필수(교양) 과목의 내용은 시대나 사회의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배워야 할 합리적 마음의 계발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선호나 취향, 선택의 문제를 배제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선험적 정당화’란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왜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 질문에서 답하고자 하는 원리가 이미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지식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라 볼 수 있다. 선험적 정당화를 통해 전통교과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내재적 가치가 논리적으로 설명됨으로써 교과가 실용적 목적만이 아닌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선험적 정당화는 개인이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와 무관하게 성립하는 정당화로서 우리의 선호와 상관없이 우리 삶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에 입문하지 않으면 주어진 삶을 원만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삶의 선험적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인류가 오랫동안 공동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한 지식으로서의 보편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실로 한정된 교과 내용에 인류의 이 방대한 경험체계를 모두 넣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교과내용의 취사 선택에서의 신념 및 가치 문제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교과서에 실린 지식이 정말로“정당화된 참된 신념(justified true belief)”인 것인가? “선택된 참에 가까운 신념”을 우리는 진리라고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교육받고 교육하는 것은 아닌가?획일화된 커리큘럼, 단편적인 교수법으로 구성된 학교 시스템에서 학생들은 그 “정당화된 신념”을 진리라고 믿으며, 그에 대한 반박은 거부된다. 지식의 위계화를 통해 학생이 가지지 않은 지식을 보유한 교사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권위는 학생과 교사의 지적 위계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교육내용이 전제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강화시킬 위험성을 안게 된다.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며, 먼저 배운 “선진”으로서의 교사와 그를 따라잡으려는“후진”으로서의 학생이 존재한다는 랑시에르의 지적이 문득 떠오르는 지점이다. 실제 학습현장에서 기존 지배 권력이 선택, 선정한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당연시되고, 위계화된 지식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거부되는 학교 시스템에서는 학생의 자율성, 주체적 의지의 발현이 어렵게 된다. 지적 위계를 전제하는 교육현장에서는 21세기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 혁신적, 도전적 사고의 계발은 어쩌면 요원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이 검색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식이 위계화되어 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특히 공교육 시스템의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지식들 중 취사선택된 지식들만이 ‘정당화된 참된 신념’으로 자리잡는다고 할 때, 그 취사선택 과정에서의 가치 및 신념의 개입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네트워크형 지식이 부각되고 있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위계화, 서열화된 지식으로서의 계층적 지식이 여전히 그 우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