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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나오는 플롯의 내용적 조건
    2021. 06. 11.김**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0-16장플롯 – 내용적 조건I. 참고문헌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주, 문예출판사, 2021.H. House, 『Aristotle’s Poetics』, London: Rupert Hart-Davis, 1958.W. D. Ross, 『아리스토텔레스-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김진성 역, 누멘, 2011.II. 주제의 의미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10-14장에서 비극에 있어서의 플롯, 그리고 비극의 효과에 있어 훌륭한 비극의 조건을 알아보고, 15-16장에서는 비극적 인물의 성격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점과 비극적 인물의 운명을 전개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III. 주제의 장소“()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발견없이 이루어질 때 나는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부르고,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발견, 또는 이 양자를 다 수반하여 이루어질 때 복잡한 행동이라고 부른다”(Po. ch.x. 1452a14-17).“급전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가티,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변화는 앞서 말했듯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 발견이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지(知)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등장 인물들이 행운의 숙명을 지녔느냐 불행의 숙명을 지녔느냐에 따라 우호 관계를 맺게도 되고 적대 관계를 맺게도 된다. 그런데 발견은 『오디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급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한 것이다. ()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전에 의해 야기된 사태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Po. ch.xi. 1452a22-1452b3).“제3의 부분은 파토스다. 파토스란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Po. ch.xi. 1452b10).“훌륭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방금 규정한 바 있는, 성격이 선량하고 적합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넷째는 성격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일관성이 없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는 시종일관 일관성이 없어야 한다”(Po. ch.xv. 1454a16-29).IV. 주제의 전개1. 단순한 플롯과 복잡한 플롯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발견없이 이루어질 때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부르고, 또는 이 양자를 다 수반하여 이루어질 때 ‘복잡한 행동’이라고 부른다. 플롯은 행동의 모방이므로 단순한 행동은 단순한 플롯으로, 복잡한 행동은 복잡한 플롯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급전과 발견을 포함한 복잡한 플롯을 옹호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한 선행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인 결과여야 함을 강조한다.2. 급전, 발견, 파토스급전과 발견은 플롯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요소이다. 11장에서의 정의를 따르면 급전 이란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 속에서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급전peripeteia이라는 단어가 ‘운명의 수레바퀴를 갑자기 역전시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발견anagnorisis은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면서 등장 인물들이 가진 행운 또는 불행의 숙명에 따라 우호 또는 적대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발견은 급전을 수반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가장 훌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로 인해 야기된 사태의 변화에 따라 불행과 행복이 결정된다.플롯의 세번째 부분으로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나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파토스pathos가 제시되는데 이는 13장과 14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가 된다.3. 비극의 양적 요소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에 대한 논의를 잠시 멈추고 양적인 측면에 있어 비극의 구성 요소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그에 않고 복잡해야 하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이에 따라서 마땅히 피해야 할 세 가지의 플롯을 제시한다.1) 유덕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 공포도 연민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자아낼 뿐이다.2) 악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 이러한 플롯은 가장 비비극적인데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구비하고 있지 않다.3)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모르나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공포는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플롯은 유덕한 자와 악한 자의 중간에 있는 인물(우리와같거나 훌륭한)의 운명이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겪는 것이다. 또한 악한 자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선한 자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것인 이중의 결말보다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단일한 결말이 더 훌륭하다 말하며 전자는 관중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쓴 결과이고 이때의 쾌감은 비극적 쾌감이 아닌 희극적 쾌감이라 비판한다.5. 비극적 행위14장의 서두에서 장경(場景, 배우의 분장이나 무대 꾸밈과 장식)에 의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 환기될수도 있지만 사건의 구성 자체에 의하여 환기 되는 것이 더 훌륭한 방법이라 단언한다.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해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반면, 장경에 의해 같은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비예술적이며 많은 비용이 드는데다 비극과는 아무 상관 없는 쾌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쾌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 고유의 쾌감, 즉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구해야 한다. 시인은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을 포함한 사건 모방에 의해 산출해야 한다.그러면 무섭다거나, 가엾다륭한 것인 경우의 조건을 갖춘 사건이 흔하지 않아 소수의 가문만이 비극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인들이 이러한 종류의 사건을 그들의 플롯 속에 구현하게 된 것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언급이 뒤따른다. 시인들의 시작의 관행은 예술보다는 관습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일반적인 형식을 개괄함으로서, ‘소수의 가문’을 기초로 하는 이야기가 비극에 적합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시학』은 (당대 시인들에게) 허구적인 플롯을 짜는 방법을 지시해주고 있는 것이다.6. 비극적 인물의 성격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적 인물의 성격으로 추구해야 할 네 가지 특징을 구정한다.1) 성격의 선량함 Goodness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이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인데, 만약 주인공이 악한 의도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그 결과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비극적 감정들, 즉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불쾌감만 자아낼 것이다. 그래서 제13장에서도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닌 과실로 인한 불행을 당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량함은 모든 종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다.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의 모방이므로 어떠한 성격적 특징을 가지더라도 선량함을 가진 인물로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2) 적합함 Appropriateness둘째로, 성격은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은, 여자도 용감할 수 있지만 용감하거나 똑똑한 것은 여자의 성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물들의 정체성을 보장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되어야하며, “적합함”에 대한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단지 인물의 특성을 나타내줄 뿐인 성격묘사를 줄이고자 했던 과제를 명백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적합함”은 남녀 성별간의 외면적인 차이나 전통적인 성격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극적인 개별화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3) 원형과의 유사함 Likeness이것은 아니라 “성격의 기본이자 기초”를 고려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복이 전혀 없는 평평한 획일성이 아니라 살아있는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7. 비극의 전개 - 발견의 종류16장에서는 11장에서 설명한 ‘발견’을 6가지의 종류로 나누어 설명한다.1) 비예술적인 발견시인들의 창의력 부족으로 인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표지(標識)에 의한 발견이다. 이런 표지들 가운데 일부는 선천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후천적인 것이다. 이 중 어떤 것은 흉터와 같이 신체에 있는 징표이고, 어떤 것은 목걸이나 『튀로Tyro』에서 발견의 근거가 된 조각배처럼 외적인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우열이 있고, 남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지를 사용하는 발견이나 이와 유사한 발견은 모두 비예술적이라 말하며, 이에 비해 급전의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발견은 훌륭하다 덧붙이고 있다.2) 시인에 의해 조작된 발견이것은 시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비예술적이다. 『이피게네이아』에서 오레스테스는 자기가 오레스테임을 밝히는데 이피게네이아는 편지에 의해 발견되지만, 오레스테스는 플롯이 아니라 시인이 요구하는 바를 스스로 말한다. 오레스테스는 어떤 표지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3) 기억에 의한 발견이것은 무엇을 보자 지난 일이 회상되어 이로 인해 발견되는 경우이다. 예로, 『퀴프로스 사람들』에서 주인공은 아버지 사후에 변장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신분이 밝혀진다.4) 추리에 의한 발견이것은 차선의 훌륭한 발견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왔다갔다. 나를 닮은 사람은 오레스테스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레스테스가 왔다갔음에 틀림없다’고 추리한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추리한 것은 모두 발견의 근거가 되었다.5) 상대방의 오류 추리에 의한 복잡한 발견『거짓 사자(使者) 오디세우스』를 보면, 오디세우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활에1
    인문/어학| 2023.10.04| 7페이지| 3,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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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트의 음악미학_판단력비판을 중심으로
    2023-1 예술과 기술 하선규 교수님칸트의 음악미학-『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미학과 석사 3차 C1113507 김소연목차I. 서론 II. 『판단력 비판』에서의 칸트의 음악관 III. 음악미학 논의에서의 칸트 미학 IV. 결론I. 서론칸트(Immanuel Kant)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대표자이자 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로 평가되는 인 물이다.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논의 되는 칸트의 미학적 입장은 새로운 예술 론의 길을 열었고, 그만의 음악해석도 볼 수 있다. 물론 칸트는 음악에 대한 상세한 저술을 남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음악에 우호적 입장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였다. 그렇지만 『판단력 비판』에 나타난 그의 음악관과 미학적 입장은 음악미학의 논의에 있어서 한번은 거쳐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보다는 미에 대한 인식 능력의 이론과 예술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칸트는 이러한 부분을 음악과 직접 관련 짓지 않지만, 이것은 음악미학에 있어서 다양하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각 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고에서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논의된 부분에 집중하여, 그의 음악미학 이론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II. 『판단력 비판』에서의 칸트의 음악관칸트는 기예를 “기계적 기예”와 “심미적 기예”로 구분한다. “기계적 기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 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순전히 이 대상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 하고, 그에 반해 “심미적 기예”는 쾌의 감정이 인식방식으로서 표상들을 수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심미적 기예”는 다시 한번 지각이나 감각적 쾌와 관련된 “쾌적한 기예”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이고 마음의 능력들을 도야하도록 촉진하는 표상 방식인 “아름다운 예술”로 구분 한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예술”이다. 칸트는 “아름다운 예술”을 우리가 말할 때 사용하는 방식, 을 개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감각들에 따라서도 가능한 한 완전하게 상호 전달하기 위해 사용 한다.”(KU, §51)칸트는 말(분절), 몸짓(제스처), 음조(변조)를 구분하였고 이에 따라 예술유형을 언어예술, 조형예 술, 감각들의 유희의 예술로 구분하였다. 1) 언어예술 : 웅변, 시, 문학 2) 조형예술: 제1종류(조소) - 조각예술과 건축예술 제2종류(회화) – 본래적인 회화, 정원예술 3) 감각들의 유희의 예술: 음악, 색채예술 또한 칸트는 아름다운 예술을 “사고 표현의 예술”과 “직관 표현의 예술”로 이분법적으로도 구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도 “이런 식의 구분은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들에 그다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KU, §51) 라며 이 구분은 후에 더 언급하지 않는다. 음악은 칸트의 예술 체계 안에서 “아름다운 감각들의 유희의 예술”에 속해있으며, 청각과 시각의 감각들의 기교적 유희 중 청각의 감각과 관련된다. 이 두가지 감관과 관련하여 칸트는 “인상들을 수용하는 것 이외에도 외적 대상들의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이것들과 특별히 결합된 감각 도 지닌다는 점”(KU, A209)에 주목한다.“우리는 이것이 감관에 기초하고 있는지 혹은 반성에 기초하고 있는지, 정확히 결정할 수는 없다. […] 다시 말해서 어떤 색채나 음(음향)이 단지 쾌적한 감각들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이미 감각들의미적 유희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러한 미적 유희로 심미적 판정에서 형식에 대한 만족감을 동반하 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KU, §51 )칸트는 감관취미는 예술로 인정하지 않고 반성취미만을 예술로 인정하는데, 음악은 이에 따른 구분이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칸트는 음악의 위치를 명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음악은 “아름다 운 예술”이 되기도하고 “쾌적한 예술” 1 로 표상 되기도 한다. 공기의 진동 속도와 이 진동들에 의 한 시간 분할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기 어려우며 우리 신체에 미치는 효과만이 느껴질 뿐 인지되 거나 판정되기 어려운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은 “아 름다운 예술”로 표상된다. 칸트의 음악에 대한 이중적 입장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칸트가 분류한 3가지 예술 체계 속 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학이다. “시 예술은 상상력(Einbildungskraft)을 자유롭게 해주며, 어떤 주어진 개념의 한계 안에서 이 개념에 부합하는 가능한 형식들의 무한한 다양성 가 운데 바로 다음과 같은 형식 2 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마음을 넓혀주기 때문이다.”(KU, §53) 여기서 칸트의 아름다운 예술 가운데 음악은 두 번째에 위치한다.“마음을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면, 나는 시 예술 다음으로 언어예술에 가장 가깝고 언어 예술과 아주 자연스럽게 합일할 수 있는 소리예술을 놓고 싶다. 왜냐하면 소리예술은 물론 개념 없이 오직 감각들만으로 말하고, 그래서 시처럼 숙고를 위한 무엇인가를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리예술은 마음을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비록 단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더욱 내면적 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KU, §53 )하지만 칸트는 곧바로 이것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며, 음악은 칸트의 예술 체계에서 가장 낮 은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음악은 ‘문화’라기보다는 향유일 뿐이기 때문에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 보다 가치가 적다. 조형예술들은 “상상력이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지성에 적합하게 유희”하도록 하며, “지성개념들과 감성의 합일을 촉진”함으로써 특정한 이념들에서 감각들로 가는 반면, 음악은 단지 감각들과만 유희하며 시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심미적 이념”을 표현할 수 있다고 칸트는 보고 있다. 정리하자면, 음악에 대한 칸트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음악을 본인이 제시한 예술의 조건에 맞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예술”로 인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음악은 감정(Affekt)의 표현으로 보면서 감각들과 유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능력을 자유로운 유희로 이끌기보다 쾌적함의 감 정을 체험하는 것에 그친다고 말한다. 즉 칸트에게 음악은 에 포함되기 하는 형식III. 음악미학 논의에서의 칸트 미학칸트의 음악에 대한 논의에서 작곡가나 작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가 음악을 많이 알지 못했을 것 같은 회의적인 생각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 있었던 음악에 관한 논의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3칸트의 음악에 관한 논의에서는 당대에 널리 퍼져있던 음악에 관한 생각들을 볼 수 있고, 또한 전통적인 음악미학 논의를 계승하는 면을 볼 수 있다. 뒤보(Abbé duBos), 바퇴(Ch. Batteux) 등에 서 출발한 자연 모방 미학과 천재미학, 언어와의 연관성을 중시한 루소(J.-J. Rousseau)의 음악관, 음악과 수를 연관시키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적 사고 등은 칸트 미학에서 뚜렷한 영향을 미 치고 있다. 4 그러나 이러한 음악미학의 전통을 칸트는 자신의 철학 체계에 따라 독자적으로 수용 하였다. 여기에서는 칸트 미학을 음악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칸트는 음악을 언어와 관련시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는 18세기 감정이론 (Affektenlehre)과 관련성을 보인다. 감정이론에 의하면 음악은 인간의 내면인 감정을 모방하고, 이 를 통해 보편적 전달이 가능하다. 칸트가 인간의 의사소통 측면에서 3가지로 예술을 구분한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정이론에서는 “한 작품에서는 하나의 감정이 지배”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칸트는 이것을 “악곡에서 지배적인 정동을 이루는 하나의 특 정한 주제에 맞춰 표현”(KU, §53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달하우스(C. Dahlhaus)에 따르면 칸트의 음악에 대한 견해가 감정이론에 근접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우연적”이지 “체계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5 언어에 관련한 연장선으로 칸트는 기악과 성악 가운데, 언어가 포함된 성악에 높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는 음악은 개념 없이 감각들로만 말하기 때문 에 보다는 에 분류하는 칸트의 견의 조건으로서 감각들의 유희와 결합”해준다고 평가한다. 이는 칸트가 살았던 1700년대의 바로크 음악과 관련이 있어보인다. 바로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하게 질서 잡혀있고 조직 적인 면이 있으며, 감정의 큰 기복이 두드러지지않는다. 작곡가들은 사람이 연주할 때 생기는 자 연스러운 강약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인위적인 느낌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점점 느리 게(ritardanto)’나 ‘점점 빠르게(accelerando)’ 등의 방식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바로크의 선율은 복잡하고 세밀하게 짜여져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이 시대의 음악은 칸트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맞게 비록 규정된 개념을 통해 표상되지는 않아도 칸트의 ‘아름다운 예술’에 어느정도 적 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미”와 “쾌”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는데, 이는 칸트에게 남아있는 고전주의적 성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칸트의 분리는 더 나아가 음악의 자율성과 관련될 수 있다. 중세부터 바로크 시대까 지의 음악은 종교의 기능과 사회적 역할에 얽매여 있었다면, 18세기 고전파부터 목적과 기능에서 해방된 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트의 “무관심성”은 음악이 감동이나 즐거 움이라는 목적이나 기능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음악 자체만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진다는 의 토대에 힘을 실어준다.IV. 결론본 고에서는 『판단력 비판』에서 논의된 칸트의 음악미학을 다루었다. 칸트는 음악에 있어서 상 반된 입지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칸트는 음악에 우호적 입장은 아니었고, 음악에 대한 논의도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칸트는 음악을 “아름다운 예술”로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인식론에 근 거하여 다시금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칸트의 미학은 음악미학의 흐름에서 그 나름의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음악에 대한 가치 평가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칸트의 취미판단은 중요 한 논점을 제공하고 있다. 6 칸트가 말한 내용 그대로는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많지만, 『판단력002
    인문/어학| 2023.10.04| 5페이지| 3,000원| 조회(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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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오샤먼으로서의 예술치료사
    2021-2네오샤먼으로서의 예술치료사- 샤머니즘의 치료행위와 예술치료의 연관관계를 중심으로김**I. 서론과거 ‘샤먼’은 원시종족의 치유자인 동시에 영혼의 인도자였다. 자본과 과학만능에 치우친 현대인들로 인해 정신병자로 매도당하곤 했지만, 현대에도 ‘샤먼’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의 주술적인 역할의 ‘샤먼’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부터 현대까지 관통하는 인간정신의 원형적인 것을 현대인들로 하여금 되찾을 수 있게 하는 ‘샤먼’의 역할과 관련하여 예술이 어떤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 연구해보고자 한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예술치료사의 ‘네오 샤먼’으로서의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한다.II. 샤머니즘(1) 샤먼/샤머니즘이란‘샤먼’이라는 용어는 시베리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원래의 의미로는 ‘열정적인’ 혹은 ‘정열에 넘치는’ 그래서 ‘신이 내린 듯한’을 뜻하는 정도로 해석 할 수 있다. ‘샤먼’은 세계 곳곳에서 민간치료사나 요술사, 마법사, 마술치료사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해 왔다. 특별히 이들은 제도화된 주류 종교 밖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또한 ‘샤먼’의 의미에는 트랜스 또는 망아상태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기도 한다. 17세기 후반에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지방을 여행한 서양의 학자들이 퉁구스 말로 샤만(Saman)이라 부르는 특수한 존재와 그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주술-종교체계를 발견하고 이를 샤머니즘이라 명명하였다.샤먼은 원시종족의 치유자인 동시에 영혼의 인도자였다. 샤먼은 ‘엑스타시를 창출하는 대가’로서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사자의 넋을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영혼의 인도자였으며, 이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드럼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경을 읽거나, 감각을 상실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엑스타시적인 상태를 유도하여 이승(일상적인 세계)과 저승(영혼세계)를 오가며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샤먼은 치유자임과 동시에 사제이며 신비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매도당해 왔다.(2) 샤머니즘의 본질샤머니즘의 본질은 큰 시각에서 보면 ‘우주의 질서 복원과 조화의 추구’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인간 중심으로 본다면 인간과 신의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고, 샤먼을 중심으로 보면 샤먼이 매개가 되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화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샤먼 세계는 세계 종족에 따라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샤먼을 통해 ‘우주의 질서 복원과 조화의 회복과 추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III. 왜 샤머니즘과 예술치료인가샤머니즘은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주술종교 현상으로 고대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샤머니즘이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정신의 표현으로 보여지는 점은 공통적이다. 또한 샤먼이 행하는 제의과정을 통해 망아체험을 위한 창작행위나, 이승(일상적인 의식상태)에서 저승(비일상적인 무의식상태)으로 향하는 여행의 과정에서 저승(무의식상태)의 내용물들을 통하여 자신 혹은 공동체 사람들을 치유하고 이롭게 변화시키는 데에 목적을 가지고 있다.샤머니즘적인 관점의 예술치료는 샤먼이 제의 혹은 여러 가지 (예술)창작적인 형태의 작업을 통해 공동체를 치유하고 이롭게 하듯이, 예술치료사 역시 언어 차원과 상관없이 창작적인 작업을 통해 인간정신의 의식과 무의식적인 영역을 오가며 치유를 이끌어낸다. 이런 점에서 예술치료는 샤머니즘과 비슷하게 보편적인 인간 심성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심적인 부분을 비언어적인 형태, 즉 예술적인 형태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국내외 여러 예술심리치료학자들이 각자가 취하는 입장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대 샤먼의 주술적인 치료가 예술치료의 시작이라는 점에는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예술치료사의 ‘네오 샤먼’으로서의 가능성과, 자본과 과학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으로 하여금 균형감각을 되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예술치료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IV. 망아체험을 통한 예술치료의 사례「샤머니즘과 예술치료-치유과정의 심층심리학적 은유-」의 저자인 김진숙 박사의 1990년 3월부터 8주간에 걸쳐 진행된 워크숍을 통한 치료사례 두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문화와 삶의 경험이 다른 참여자들의 치료과정을 통해 “심리적, 영적, 사회적 역할의 변화가 한국의 입무자의 경험과 유사”했다는 점을 볼 수 있었고, “인간정신의 보편성과 치유 및 변형과정의 원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참여자들의 심적인 고통과 무의식 속의 고통은 ‘가면 뜨기’와 ‘인형 만들기’의 과정을 통해 반영되며 그 후 공연을 통해 표출된다. 첫 번째 참여자는 반복적으로 꿈에 나와 자신을 괴롭히는 두 개의 얼굴을 한 사람의 가면을 만든다. 참여자는 처음에 가면 양쪽에 각각 다른 얼굴을 그렸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두 개의 얼굴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환자는 두 개의 얼굴이 자신이 대면하기를 거부해 온 자신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가면을 쓰고 본 인물을 연기할 때, 참여자는 여러겹으로 두껍게 겹쳐진 석고붕대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이것을 자신의 (내면)비밀통로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 참여자는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고 한다.두 번째 참여자는 분리-개별화 이슈가 있다. 이 참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물 속의 여신의 모습의 가면을 만든 후, 만든 가면을 쓰고 진행한 연기에서 모성과의 분리하는 것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던 문제가 망아상태 속에서 모성세계인 바닷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출이 되고 그 바다 속에서 편안함을 경험한다. 다음 치료단계에서 참여자는 풍만한 유방을 강조한 몸을 가진 인형을 만들고, 자신이 일할 때 입는 전문직 직장여성의 옷을 가져와 입혔다. 그 인형과 대화하는 방식의 공연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달나라 여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지상으로 내려와야하는 달나라 여신이 지상에 내려오는 유일한 방법인 밧줄이 짧아 떨어져 죽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참여자는 그의 분리불안을 안전한 예술매체를 통하여 대면하였고, 공연에서 나눈 이야기 속 달나라 여신의 죽음은 내면의 인격상의 죽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상징적 죽음으로 볼 수 있다. 이 사례를 통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샤먼적인 모티브를 볼 수 있다.샤먼과 예술치료는 비슷한 통로로써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듯 하지만 치유양식은 다르다. 샤먼은 자신이 치유방식을 이해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닌 영(신)으로부터 받은 것을 환자에게 시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치유방식은 감정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 반면 예술치료사는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 수도 있지만, 주로 상상적인 놀이영역(연극, 인형 만들기 등)에서 환자 스스로 무의식을 탐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머문다. 환자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여행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샤먼이 되고, 예술치료사는 이런 (제의)과정을 안전하게 집전되도록 돕는 신어머니/아버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V. 결론샤머니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반복되어 보여지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인간정신의 뿌리의 표현이며 타파될 그 무언가가 아니다. 현대에 무속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샤머니즘은 인간정신의 근간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것과 단절되고 자연적인 것을 밀어내며 자본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을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인간정신의 원형적인 부분’을 회복 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이 되며 이번 연구를 통해 샤머니즘적 개념이 예술치료에 있어서 현대인의 정신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내적인 변화와 치유의 가능성을 위한 은유를 제공하는 예술치료사는 네오샤먼의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문헌]김진숙, 「샤머니즘과 예술치료(치유과정의 심층심리학적 은유)」, 학지사, 2010양민종, 「샤먼이야기(잃어버린 신화 샤먼 세계를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3피어스 비텝스키, 「샤먼」, 김성례, 홍석준 역, 창해, 2005
    인문/어학| 2023.10.04| 4페이지| 2,000원| 조회(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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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의 비도덕주의 윤리학
    2021-2니체의 비도덕주의 윤리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을 중심으로김**I. 서론니체는 전통 철학자들이 도덕 문제를 다루는 입장과는 다르게 도덕 문제를 ‘도덕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전통 철학자들은 도덕을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무엇을 위한’ 도덕인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않았다. 니체의 이런 방향의 접근을 통한 서양의 도덕 비판과 도덕적 자연주의 주장은 서양의 가치 체계 전체와 철학의 토대를 전복시킨다.도덕을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비도덕주의의 기본 입장이다. 본 글에서는 니체의 반자연적인 전통 철학을 비판하는 내용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0장 에서 논의되는 기존 도덕에 의해 비방받고 왜곡되어 왔던 ‘사악한 것 세 가지’에 대한 니체의 재평가를 다루고자 한다.II. 전통 도덕의 문제(1) 절대적 도덕전통 철학은 도덕 문제를 다룰 때 ‘무엇’이 도덕적인 행위이고, ‘무엇’이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인지만을 물었고 그 행위의 주체인 ‘누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행위인지는 묻지 않았다. 곧 도덕의 ‘가치’에 대한 논의는 없었고 도덕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기존 서양의 도덕 철학을 도덕적 절대주의라고 말한다. 니체의 도덕적 절대주의의 정의는 “도덕의 구속성과 정당성을 선 그 자체에 두는 절대적 도덕을 상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절대적 도덕은 개인의 평가와는 독립적이고, 인간에게 초시간적인 구속력을 행사하며, 그것에 대한 이의 제기를 허락하지 않는 도덕이다. 이런 도덕은 자신의 가치를 터부시한다”라고 말한다. 니체는 도덕 문제를 전통 철학과 다르게 ‘행위’ 자체가 아닌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던 서양의 도덕 가치에 주목하고, 도덕적 절대주의에 반발하며 자신의 도덕철학을 출발시킨다.(2) 이분법적 도덕전통 도덕은 선과 악의 본질적, 이원적 대립개념을 설정하는 이분법적 도덕이다. 니체는 이같은 기준으로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악으로, 이성적인 것을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인간 삶의 본능에 적대적이고 인간과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며 전통 도덕의 반자연적 성격을 찾아낸다. 그리고 니체는 행위 그 자체는 도덕적 선과 악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며, 가치 중립적이고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행위자를 척도로 하기에 도덕적 사실은 없다고 선언한다. 본질적인 대립개념, 즉 선은 영원한 추구대상이고 악은 멸절의 대상으로 여겨진 기존의 도덕 대신 니체는 ‘좋다’, ‘나쁘다’와 같은 삶의 상승적 전개로써 위버멘쉬적 삶에 유용하면 ‘좋음’, 유용하지 않으면 ‘나쁨’으로 구별한다. 또한 ‘좋다’, ‘나쁘다’는 힘에의 의지가 결정한다고 말함으로써 전통 도덕의 도덕적 이분법을 극복한다.니체는 행위 자체에만 초첨을 맞추고 행위의 ‘주체’를 문제 삼지 않았던 전통 도덕과 다르게 니체는 도덕을 ‘해석’으로 이해하고 ‘행위자’를 판단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이것은 니체의 비도덕주의의 기본 바탕을 이루게 된다.III. 세 가지 악3부 10장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아온 사악한 것 세 가지, 즉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은 왜곡되어 왔다고 말하며 인간적인 관점에서 다시 ‘저울질’한다고 한다. 10장 전체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행위 하는가’가 중심에 놓이며 니체의 비도덕주의를 살펴볼 수 있다. 해석으로서의 도덕론은 강자, 극복의 힘, 긍정의 힘을 지닌 주권적 존재, 위버멘쉬를 전제하는 도덕론이 세 가지 악 비판을 통해 전개된다.(1) 관능적 쾌락관능적 쾌락sexuality, 즉 육욕은 이원론자들로부터 ‘세속’으로 저주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육욕이 ‘혼란과 오류를 가르쳐 온 자’들 모두를 조롱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들이 자기 지배 능력의 부재 상태인 병리적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기내부의 경향성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욕을 세속적이고 악한 것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니체는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자들’, 자기 지배능력이 있는 자들은 욕정의 노예가 아닌 주권적 존재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병리적 상태인 자들에게는 육욕이 자기파괴로 가는 길이겠지만, 건강한 상태인 자들에게는 한층 더 높은 행복과 희망을 누릴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2) 지배욕니체에게 있어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는 인간에게 내제하는 힘에의 의지의 본성으로 당연한 자연적 현상이며 본성이다. 그러므로 강자의 지배욕은 악으로 단정될 수는 없다. 이런 강자의 지배욕은 약자의 지배욕과 다르게 파괴와 멸절을 목적을 하지 않는다.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열망할 때 누가 그것을 두고 병적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 같은 열망과 하강에는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거늘!”이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위에서 아래를 향한 지배욕은 병적인 탐욕이 아닌 자연적 현상임을 강조한다. 또한 기존의 강자가 반복하여 계속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강자의 지배로 인해 약자의 힘에의 의지가 강화되고, 강화된 약자의 의지를 통해 지배관계가 뒤바뀔 수 있게된다.(3) 이기심니체의 ‘행위 자체’가 아닌 ‘행위의 주체’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은 이기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기심의 ‘주체’가 이기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기심을 학대하는’ 그리스도교에 의해 연민이나 이웃 사랑이 덕으로 간주되었지만 이는 노예의 근성이다 약자의 생존방식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이기심에 의해 행해질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는 자, 독이 든 침과 사악한 시선을 삼켜버리는 자, 무던히 참기만 하는 자, 모든 것을 인내하는 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만족해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존경하거나 긍정할 수 없는 약자들로서, 자신을 타인와의 관계에 의지해서 평가한다. 이들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자신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며 자기 긍정이 불가하다. 그렇기에 이웃으로 눈을 돌리고 이웃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자기 부정 성향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니체는 말한다.IV. 결론3부 10장 를 통해 전통 도덕의 반자연성을 드러내고, 선 그자체와 악 그 자체의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차이로 바라보는 니체의 비도덕주의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은 파시즘 따위가 아니다. 육욕, 지배욕 그리고 이기심을 누리고 ‘나의 덕’으로 삼으려면 나 자신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고 자기 지배능력을 지닌 건강한 상태, 즉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인문/어학| 2023.10.04| 3페이지| 2,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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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리스 블랑쇼의 이중성의 사유
    2023-1블랑쇼의 이중성 사유- 『카오스의 글쓰기』 를 중심으로김**I. 서론모리스 블랑쇼는 작가이자 철학자로서 이 시대에 하나의 사상적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는 ‘바깥의 사유’를 전개했으며 푸코, 들뢰즈, 데리다부터 아감벤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블랑쇼의 후기 사유를 대표하는 저작들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사유 전체를 마지막으로 집약 시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일기를 쓰듯이 글이 파편적으로 구성되어 전체적 윤곽이나 주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묶어내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블랑쇼도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본 고에서는 흩뿌려져 있는 블랑쇼의 사유를 — 완전하게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 『카오스의 글쓰기』를 짚어 올라가며 그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한번 고찰해보고자 한다.II. 블랑쇼의 언어(1) 카오스 désastre‘désastre’라는 단어를 어원학적으로 ‘astre(별, 천체)’에 부정 접두어 ‘dés(dis)’가 결합되어 구성되었고 ‘astre’의 어원은 그리스어 ‘astron(우주, 천체)’이다. 따라서 별들의 궤도 이탈,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블랑쇼와 관련해서는 조화로운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로부터 벗어나 천체의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공간, 코스모스의 잉여이며, ‘바깥’을 의미하기도 한다.블랑쇼가 카오스의 특성으로 말하는 것 중 하나는 부재로서의 존재이다. 현전과 부재가 겹쳐진 — 구분되지 않는 — 제3의 공간에 있는 카오스는 현전하지만 물러나 있는 형태로 존재하기에 현전도 부재도 아니다. 물러남(withdrawal)은 의미의 부재를 뜻하며, 이는 비가시적이고 드러나 있지 않다. “카오스는 분리되어 있으며, 가장 멀리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바깥이다. 블랑쇼는 “카오스는 대 카오스가 아니며”라고 말하며 카오스는 초월적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카오스는 모든 곳에 있지만 모든 곳는 카오스의 발생 방식을 “카오스가 갑자기 발생할 때, 그것이 도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카오스는 임박해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도래와 비도래의 관계를 메시아사상에 연결시켜 설명한다. 누군가 메시아에게 “당신은 언제 올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메시아가 “오늘”이라고 대답한다. 메시아는 이미 의미를 박탈당한 공백과도 같은 인간들 사이에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메시아가 대답한 “오늘”, 지금 그리고 언제나 지금인 것은 일반적 시간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여전히 도래하지만 도래하지 않는 것으로 도래한다. 곧 카오스는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발생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카오스는 때맞춰오지 않으며, 의미의 현재가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회귀하고 미래가 산정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가까이 — 내 안에 — 있으면서도 멀리 있기에 — 내가 지배할 수 없는 —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외재성을 가지고 있다. 카오스는 모든 곳에 있지만 모든 곳에 구멍으로 존재(Everywhere Nowhere)하기에 인식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의 존재조건인 것이다.(2) 수동성블랑쇼의 사유에 있어 ‘수동성’은 큰 역할을 한다. 그의 수동성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능동의 단순 대립어가 아니다. 이는 존재의 수동성으로 능동의 대립이 아닌, 수동과 능동의 대립 이전이며 레비나스의 근원적 수동성이다. 이 수동성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능동도 수동도 아닌 방식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저항을 블랑쇼는 필경사 바틀비Bartleby의 거부를 예시로 든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Je préférais ne pas (le faire)”라는 바틀비의 말을 빌려 이를 거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부정성, 거절 그 이상이며 단순히 거부에 집착하지 않고 소멸로, 존재의 상실로, 사유로 열리는 자기 거부이다.”라고 말한다.“수동성 : 우리는 그는 자아는 상실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고통 당하는 ‘나’는 존재 불가능하다.‘참아 봐.’ 간단한 말. 그 말은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의지의 영역 뿐만 아니라 또한 참을 수 있는 힘을 이미 박탈당한 채 참았다. 즉 내가 참을 수 있다면, 참으면서 내 안의 자제하는 이 ‘내’가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면서 나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이 표명하는 아니다le pas du tout à fait passif’라는 어떤 수동성으로, 따라서 수동적인 것이 단순히 능동적인 것과 대립되는 수준의 삶을 저버린 데에서 비롯된 어떤 수동성으로 점점 열려 간다.’참을성을 통해 나는 카오스와 타자의 관계를 감당하게 되지만, 그 관계 내에서 내가 타자를 떠맡도록 허락 받는 것도, 타자를 겪어낼 수 있게 나로 남아 있도록 허락 받는 것도 아니다. 참을성을 통해 나와 참을성 있는 어떤 나와의 관계는 모두 중단되는 것이다.타자에의 노출인 수동성은 참을성으로 연결되는데 수동성과 마찬가지로 참을성은 자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점이 동일하다. ‘참을성 있는 나’가 먼저 있고 그 참을성을 가지고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블랑쇼에 의하면 참을성은 주체의 능력과는 관계가 없고, 타자를 지배하려는 힘을 박탈당한 채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 나에게 상처를 초래하는 타자와의 만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이는 내가 타자를 지배하기 전 이미 타자에게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수동성과 참을성 모두 자아의 문제, 자아의 자질이 아니며 타자에의 노출이다. 블랑쇼는 닫혀 있지 않고 타자에게 노출 될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게 됨을 말한다.(3) 타인(타자)전통 철학에서는 주체가 항상 기원적이었고 타자는 대상으로 2차적이고 파생적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주체의 타자 지배, 절대적 주체의 나르시시즘적 확장에 반대하여 주체가 결코 지배할 수 없는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와 타자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고, 주체보다 타자가 우선시 되어 또 다른 지배관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의 동일성으로부터 빠져나오게’하며, 타자 역시 자기동일성에서 빠져나온다. 블랑쇼는 자아가 먼저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면서도, 레비나스의 지배관계의 한계를 극복한다.그러나 역설로 인해 애매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타인이 나를 급진적 자기 상실에 이르기까지 짓밟을 때, 자아를 박탈당한 내가 가장 수동적인 수동성을 (체험할 수 없는 채) 감당해야 하는 시련에 놓여 있다면, 내가 여전히 상대해야 하는 자는 타인인가? 오히려 주인으로서의 ‘나’가, 이기주의적 힘의 절대가, 가차 없는 박해에 이르기까지 힘을 쓰고 있는 압도하는 지배자가 아닌가? … 자신이 타인이 아니라 절대적인 ‘나’에, 이기적인 전능한 힘, 살기 돋친 의지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아로 되돌아오면서, 또한 거부와 저항과 전투를 통해 그 박해에 응답해야만 한다.블랑쇼는 나 역시 타자의 타자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타인과 나’ 관계의 전도가능성을 말한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타자와 또 다른 점으로 연결되는데, 레비나스의 타인은 결핍이 없는 ‘절대 선’으로 주체를 지배하지 않으면서 주체가 타자를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없도록 만들어 윤리적 주체로 만든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윤리적 타자이기 때문에 나를 압도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블랑쇼의 타인은 결핍되어 있고 서로에게 열려있다. 주체와 타자가 겹쳐진 제3의 공간에서 윤리가 생긴다. 블랑쇼의 타인은 이웃으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와 관련하여 블랑쇼는 익명성 주체의 저항을 강조한다. (레비나스의) 타인이 ‘타인’이 아니라 반대의 ‘나’에 불과하다면, 타인이 동일자(나)와 똑같은 지배자가 되어 돌아온다면 저항해야 한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이는 타자 역시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와 저항이 필요한 것이다.정리하자면, 레비나스는 동일자의 위계질서를 비판하기 위해 윤리적 타자와 절대적 타자성을 주장했지만, 윤리적 타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위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블랑쇼는 타자의 이중성을 강조하며, 동일자와 타자 모두 결핍된 자임을무엇을 위해, 다른 무엇에 의해 응답할 일을 면제받은 자는 아니다. 말하자면 나는 빌려 온 단수성, 만남의 단수성 —사실상 (레비나스Levinas)가 말하는 대로) 볼모otage의 단수성 가운데 있다. 볼모는 스스로 하지 않았던 어떤 약속의 보증인, 동의하지 않고 선택되지 않은 보증인이며,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대체될 수 없는 자이다. … (내가 감당하고 있는 책임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나일 수 없게 만든다.)블랑쇼는 수동성과 연결되는 책임이 주체의 능력으로 인하여 선택 받음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책임responsibility는 ‘response’와 ‘ability’가 결합된 단어로 ‘응답할 능력’ 정도로 해석된다. 책임은 수동성과 마찬가지로 타자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블랑쇼는 책임이 곧 ‘타인에게 응답함’임을 말한다. 응답은 곧 타인에게의 노출이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은 이것으로부터 오며,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책임져야한다.단수성singularity는 대체불가능성을, singular는 유일하지 않은 대체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대체가능성과 대체불가능성이 같아지는 지점이 된다. 이것이 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지만, 그것은 나에게 능력이나 특권이 있기 때문이 아니기에 언제나 대체 가능한 자인 것으로 연결된다.위 두 인용문에서 블랑쇼는 마지막 문장을 조금 바꾸어서 반복한다. “나를 나 이상으로 되게”하면서도 “내가 나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타인이다. 여기서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볼모otage 개념을 가져온다. 볼모, 즉 타자의 포로hostage는 주인host와 어원이 같다. 이를 통해 레비나스의 주인은 손님의 포로이기에 손님에게 무관심 할 수 없으며 무조건적인 환대를 한다. 환대란 타자를 내 안으로 들이는 것이고, 이 때에 타자와 나와의 관계가 생긴다. 타자를 환대할 때, 즉 타자를 내 안으로 들일 때 내가 나와 달라지고 비로소 나는 나와 같아진다.III. 결론을 대신하여『카
    독후감/창작| 2023.10.04| 7페이지| 4,0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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