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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여론의 뜻과 형성과정- 만들어진 여론, 여론은 드러나는가 구성되는가
    여론의 뜻과 형성과정- 만들어진 여론, 여론은 드러나는가 구성되는가
    ‘만들어진 여론’-여론은 드러나는가, 구성되는가-Ⅰ. 문제제기와 분석방법“가장 확실한 것들을 의심하고, 해부하라.”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까지도 밑바탕부터 의심하라고 주장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은 비단 형이상학적 의식 체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명징하게 증명될 때까지 사건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 그것은 곧 현대 사회 매체의 역할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더욱이 사건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감각에 의해 얼기설기 구성된다. 누군가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행위의 총체는 각인에게 인지되는 순간부터 매체를 경유해 언어로 표현될 때까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재구성 과정은 더러 창작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공적 사안이 공적·사적 담론을 자아내는 과정을 관찰하며 나는 여론의 의미가 “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사전식 정의로 결코 간추려질 수 없다고 느꼈다. 단지 ‘나’의 생각 혹은 ‘너’의 생각, ‘다른 누군가’의 생각만을 두고 여론이라 부르지 않으리란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여론은 반드시 ‘나’, ‘너’,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 모여 완성될 수밖에 없다. 완벽하게 같을 수 없는 의견을 모아 ‘공통의’ 의견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각 매체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이들이 말하는 다중의 의견, 여론의 뜻과 그 생리를 밝혀내는 일은 캄캄하고 거대한 불확실성의 장막에 가려진 듯 보인다.10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것만으로는 이 장막을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대표하는 입장을 수업 시간에 다룬 여론의 다양한 정의를 기준으로 분석 및 분류한 후, 그들의 차별화된 입장을 관통하는 공통된 인식을 추출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신문, 방송과 같은 전통적 매체가 여론 형성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인터넷, SNS와 같은 새로운 매체의 역할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았다.Ⅱ. 심층면접 결과 보고심층면접은 평소 한국사회의 정치현실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서울대학교 및 고려대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10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논의 및 결정 과정에는 넓게 보아 대한민국 성인, 더 넓게는 국민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따라서 선택 편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구통계학적 소속 군에서 면접 대상을 선별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본 보고서가 양적 분석을 요하지 않으며, 면접 대상자가 비교적 적고, 현실적 여건 상 무작위 추출을 할 기회가 제한되므로 평소에 해당 주제에 관해 고민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의견에 주목해보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론의 의미와 그 형성과정에 대해 인터뷰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여론에 대한 네 가지 정의는 각각 수업에서 다룬 노엘레 노이만, 허버트 블루머, 월터 리프먼, 피에르 부르디외의 입장에 따라 구분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여론 형성과정에 대한 인터뷰 결과를 도식화해 첨부했다.이름 및 소속여론의 정의여론의 형성과정노이만: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여론A(정치외교12)여론조사를 통해 파악된 결과. 하지만 여론조사는 결과에 대한 책임 없이 응답하기 때문에 그 유효성을 의심해야 한다.*정치적인 정보를 접하기 가장 쉬운 통로는 언론*언론은 공신력 있는 매체*언론에 드러난 견해와 개인의 의견을 비교하고, 공유된 견해인 경우 의견 증폭B(서어서문15)한 사회나 집단에서 특정 사건에 대해 취하는 중심 의견, 태도*사안에 대한 개개인의 의견 형성에는 그 사회의 교육·역사·문화관이 영향을 미침.*개체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 ‘옳은’, ‘합당한’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을 습득하고 이것이 의견 형성의 기준이 됨.*여론은 사회가 규범화한 가치에 따라 취사선택된 의견의 총체적 집합블루머:집단 간 공적 토론의 결과로서의 여론C(언론정보14)합리적 이성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의견. 이는 기계적 의미에서 ‘다수’의 의견과는 구분됨.*신문·뉴스·라디오와 같은 전통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의견을 합리적으로 수용하고 여론으로 인지.*포털이나 SNS 등의 새로운 매체는 여론을 확산하는 역할 수행D(정치외교12)공동체 내의 상당수(과반수는 아니더라도 사회 분위기를 형성할 만한 정도) 시민들이 행동으로 나타낸 의사*언론, 그 중에서도 JTBC처럼 대중이 쉽게 접하는 뉴스 앵커의 발언 등이 촉발제가 됨.*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에 노출돼 실시간 검색어로 떠오름.E(미학12)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쟁점이나 이슈에 대해 대체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드러낸 것.*미디어에서 선택한 의제가 여론의 소재가 됨.*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보다는 전통 언론 매체가 프레이밍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 수행*원자 단위의 개인이 SNS를 플랫폼 삼아 의견을 표하기도 함.리프먼:사회적 엘리트가 만들어내는 여론F(국어국문12)공론장에서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의 의견. 주류 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집단 및 기관, 이를 테면 국회, 노동조합 등에서 공유하는 의견.*대다수 사람들은 일상적 역할을 수행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가지기 힘듦.*국회나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공유하는 의견이 여론으로 인식됨.G(언론정보13)특정 의제에 대해 한 사회에서 가장 강력히 주장되는 것으로 보이는 의견.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무관심한 태도로 여론의 형성을 지켜보기만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론처럼 보이는 것이 한 사회의 실질적 주된 의견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사회·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의지는 있지만 여론 형성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 발생*집단의 대표와 같은 선도자가 의견을 제시*구성원들과 제시한 의견을 논의하고 조율하면서 여론 형성F(경제13)여론 조사기관이 이해관계에 따라 미리 만들어놓은 정답*여론조사의 질문 구성이나 표적 집단 선정 과정이 편향적임.*공적으로 자신의 정치·사회적 의견을 드러내는 자는 소수에 불과*여론은 이미 정해진 방향성을 따르게 됨.H(컴공09 졸)특정 사안에 대해 집단에서 표현된 의견 중 선별된 것. 선별됐는지 여부는 언론의 노출 빈도를 통해 파악 가능하다.*각 매체의 특성에 따라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여론이 다르게 형성됨.- 전통적 언론의 경우 고연령층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침.- 인터넷 매체의 경우 상대적으로 젊은 사회 구성원의 여론 형성*집단 내에서는 형성된 여론에 대한 입장에 따라 구성원을 인입·퇴출시킴으로써 여론 그 자체가 변하기도 함.부르디외:존재하지 않는, 허구로서의 여론I(언론정보 13)여론은 허구에 가깝다.*공적 사안에 대한 토론 과정이 부재하고 의견은 양극화된 채 대치하고 있을 뿐이므로 여론 형성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함.*대인 커뮤니케이션(친구와의 대화), SNS(페이스북)을 통해 접하는 의견은 나와 정념이 유사한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므로 여론이라 칭할 수 없음.Ⅲ. 심층면접 결과 분석: 여론이 아닌 ‘여론’과 매체 간 차이이들에게서 구해낸 답은 그 개별성과 차별성을 넘어 통일된 총체적 진실을 갈망한다. 나는 심층면접을 진행하며 면접 대상자 중 어느 누구도 보도된 여론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순진한 대중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다. 면접 대상 중 여론을 ‘개별 의견의 산술적 합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즉 여론에 대한 계량화된 공리주의적 접근 방식은 방법론적 실효성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공적 사안에 대한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 기능하지 못한다. 여론조사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김소현 씨의 의견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미리 만들어놓은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여론으로 그려지고 마침내는 그것이 여론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월터 리프먼(1922)은 그의 저서 《여론》을 통해 ‘우리는 고정관념을 본다’고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에서조차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일을 적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도 비판하는 지점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목격자마다의 진술이 달라지고, 또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왜곡되는 현상이 소설의 주된 서사이다. 소설에는 ‘(사람들 혹은 언론이) 그랬다고 한다’와 같은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언론이 어떻게 고정관념을 진실과 여론으로 위장하는지 냉철하게 보여준다.한편 배인환, 길한아, 남기완 씨의 의견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은 전통 언론 매체에서 보도하는 내용의 권위에 기대어 그것이 여론 형성의 출발점이 된다고 보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SNS 등의 보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매체를 통해 본인의 입장에 맞는 뉴스를 공유하거나 그에 대한 의견을 표현한다. 이처럼 매체를 여론 형성의 ‘촉발제’ 혹은 ‘출발점’을 보는 것은 여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이다. 심지어 여론이 형성될 수 없다고 생각한 송재인 씨의 경우도 공적 사안을 공표하는 기능으로서의 역할엔 동의했다는 점에서 여론 형성에 있어 매체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매체가 단순히 여론 형성의 출발점에서만 그치는지, 혹은 그 보도내용 자체가 여론으로 인식되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일 것이다. 공적 담론으로서의 여론에 동의하는 이들은 매체의 소극적 역할에 동의하겠지만, 엘리트가 구성해낸 산물로서의 여론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보도를 통해 표현된 공적 의견, 저널리스트의 의견을 곧 여론으로 인식할 것이다.
    사회과학| 2024.01.07| 6페이지| 1,000원| 조회(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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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라 셀레스티나>의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현대인의 사랑에 던지는 메시지
    <라 셀레스티나>의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현대인의 사랑에 던지는 메시지
    ‘마음의 돌’이 없는 사랑의 타자성- 라 셀레스티나 의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현대인의 사랑에 던지는 메시지-2018 봄학기 스페인문학사Ⅰ. 들어가는 말아르헨티나 작가 안드레스 네우만(Andres Neuman)은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죽게 되리란 걸 깨닫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음이 사랑의 선결 조건이라는 판단이다. 타자에 대한 사랑은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그의 통찰은 중세 시대 사랑의 조건을 시사한다. 『라 셀레스티나 La Celestina』에서 칼리스토와 멜리베아는 뚜쟁이 셀레스티나의 마법에 이끌려 서로를 성적으로 탐닉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이들의 사랑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같이 위태롭다. 시대적·종교적 이유 때문이다.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중세 사회에서 칼리스토와 멜리베아는 비밀 연애를 해야 했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모두 귀족 출신이었지만, 멜리베아의 아버지 플레베리오는 둘도 없는 딸 멜리베아의 체면과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더불어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의 박해와 종교재판이 이뤄진 당대 사회에서 둘 중 한 명이 유태교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여러 비평가의 해석에 따르면, 둘의 사랑은 한시적이다.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이 현세적 쾌락주의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이 같은 사랑과 존재의 유한성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은 뚜쟁이의 도움으로 가능했지만, 이후에 셀레스티나의 간계 없이도 밀회를 지속한 것은 시대 및 종교와 투쟁하며 주어진 시간 속에 사랑을 쟁취하려 한 투지 덕분에 가능했다. 아낌없이 서로에게 골몰하는 『라 셀레스티나』의 사랑은 현대 소비사회의 사랑과 구분된다.본고에서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멜리베아와 칼리스토의 사랑이 현대 소비사회의 사랑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이들 사랑의 실존주의적 면모를 밝힌다. 이들 사랑의 본질은 당사자의 쾌락 혹은 가문의 명예라는 관점으로 조명할 수 있다. 그리고 쾌락과 명예라는 사랑의 고갱이는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상대적 교환가치에 감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앞선 대사와 기능적으로 유사하다.칼리스토의 일방적 구애로 싹튼 사랑은 뚜쟁이 셀레스티나의 마법에 힘입어 서로 간의 불타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셀레스티나는 사랑의 당위를 설득하며 ‘젊음의 수사(修辭)’를 펼친다. 셀레스티나는 자신을 이미 늙은 몸이라 평가절하하는 동시에 젊음을 찬미한다. “이처럼 싱싱하고 포동포동할 수가! 젖가슴이 어쩌면 이렇게도 예쁠 수가!” “하느님은 네게 이 싱싱한 젊음을 여섯 겹 옷 속에 헛되이 숨겨 놓으라고 준 것이 아니란다. 네가 힘들이지 않고 얻은 것에 너무 욕심내지 마라. 너의 아름다움을 너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지 말란 말이야. 아름다움이란 마치 돈처럼 나누어 즐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야”(p.170). 이들 대사는 모두 셀레스티나가 파르메노의 연인 아레우사에게 사랑을 설득하며 하는 말이다. 셀레스티나가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젊음’이란 변수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셀레스티나는 멜리베아에게도 “아가씨, 당신의 고귀한 젊음을 믿으세요”(p.221)라고 말하며 막연한 두려움의 장막을 걷어내고 즐거운 감정을 따를 것을 주문한다.실존주의는 옳고 그름의 가치를 초월해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현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 쾌락주의와 닮아있고, 인과율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 구분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은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이다. 사회가 역사적으로 구성한 기존의 가치를 보란 듯이 뛰어넘어 인간을 해방하는 휴머니즘 정신이 실존주의 철학의 묘미다. ‘옳음’과 ‘정의’를 지키는 합리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좋음’과 ‘쾌락’을 따르는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이 실존주의적인 이유다.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이 셀레스티나의 주술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까지도 이들의 사랑이 체통과 명예, 순결보다는 육욕을 우선시한다는 관점에는 입을 모은다. 김춘진은 셀레스티나의 마법이 멜리베아와 칼리스토의 징검다리처럼 묘사된 것은 멜 칼리스토가 사랑을 인식하는 방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감미로움에 도취된 사랑”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의 논리적 불가해성에서 비롯된다. 남녀가 서로를 탐닉하는 것은 필연적 운명일진대, 그 운명은 ‘감미로움’ ‘극한적인 희열’ ‘희망’과 같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감각적 차원에만 의지한다. 말하자면 이들 사랑은 맹목적이고 무모하며 무조건적이다.불가해성에서 비롯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사랑을 ‘투쟁’과 ‘싸움’으로 이해하려는 의지 덕분이다. 라 셀레스티나 의 서문에서 작가 페르난도 데 로하스는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투쟁이나 전투로 만들어진 것”(p.23)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인용한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물의 어머니인 자연은 어떠한 것도 다툼과 투쟁 없이 만들어 놓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자리 쟁탈전을 벌이고 상극을 이루는 요소들은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고 대지는 떨고 바다는 넘실대고 공기는 진동하고 불길은 솟고 바람은 서로 끊임없이 으르렁댄다”(pp.23-24)는 시인 페트라르카의 말도 인용한다. 요지는 전투가 생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싸움은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다.삶을 ‘투쟁과 싸움의 연속’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합리성과 대비되는 실존주의의 면모다. 싸움 없이 사회가 진보할 수 없듯, 투쟁 없이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 시대와 대립하고 종교와 반목하는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이 고통일지언정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쾌락이 사랑 그 자체를 향하면서도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까지 포섭한 덕분이다. 투쟁이 곧 이들 사랑의 미학이다. 이들을 가로막는 장벽의 설정이 전투의 대상이다. 플레베리오라는 가부장적 인물, ‘문’이나 ‘담’과 같은 상징적 소품 및 공간이 대표적이다.16막에서 플레베리오와 알리사는 딸 멜리베아의 결혼에 결정 권한을 가진 듯 대화하고, 멜리베아는 이에 절망한다. 멜리베아는 사회적 평판과는 관계없이 칼리스토를 세계의 전부로 이해한다. 그와 보내지 못한 시간에 애통해하고 서로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고자린 문제가 아니라면 이 문을 박살 냈을 텐데” “오, 불행한 나여, 당신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다니!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당신의 명예에 금이 갈까 두려워서입니다”(p.252)와 같이 말하며 멜리베아의 명예를 순간적 정동(情動)보다 우선시한다.명예에 대한 집념은 멜리베아의 죽음의 순간에도 나타나며 사회의 모순적 면모를 드러낸다. 플레베리오는 멜리베아가 칼리스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며 죽음을 예고하는 순간에도 딸을 막지 않는다. 또 딸이 죽은 후에도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슬피 우는 게 아니라, 그 죽음의 참담한 이유 때문에 우는 것”(p.350)이라며 가문의 평판과 위신을 추락케 한 딸에게 문책하는 듯한 대사를 읊는다. 플레베리오가 멜리베아를 일찍 결혼시키고자 한 것도 “깨끗한 평판”(p.299)을 위해서다. 이들 대사를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스페인 사회의 과도기에도 여전히 명예와 사회적 인식이 사고를 지배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가문의 절대적 명예에 대한 집념은 작품을 지배하는 대표적 관념이지만,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을 견인하는 속성은 서로를 대체 불가능한 탐닉의 대상으로 여기는 가치의 절대성이다. 칼리스토가 멜리베아를 종교와 같이 여기는 대목은 이 같은 사랑의 절대성을 증명하는 데 유효하다. 김춘진은 이 대목이 “기독교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패러디”했으며 “연인 숭모를 성모 마리아 경배의 경지로 격상시킨 전형적 궁정 연애 양식”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종교의 영역이 된 사랑은 절대적이고 궁극적 가치로서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칼리스토-멜리베아 사랑의 절대성은 서로를 통해 서로를 망각하는, 타자에 의한 자아의 대체성을 뜻한다. 헤겔은 “사랑의 진정한 본질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고 했다. 타자에 자신을 허용하는 수용성에 사랑이 자리한다는 관점이다. “난 남편도 싫고, 부모도 싫고, 친척도 원하지 않아! 칼리스토가 없으면 내 목숨도 없어. 목숨은 그 그 사람은 떨어져 죽었는데 저는 살아남아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이 얼마나 잔인하겠습니까? 그 사람의 죽음이 저의 죽음을 부르고 있습니다.”(p.343)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에서 출발했던 멜리베아의 사랑은 죽음의 순간에 그녀의 존재 조건을 칼리스토가 결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서로가 서로를 대체하고, 서로에 의해 서로가 변해가는 사랑의 절대성이 중세에 용이했던 것은 정보의 부족 때문이다. 이 지점이 멜리베아-칼리스토 사랑이 현대 소비사회의 사랑과 구분되는 시작점이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 에서 정보의 부족이 누군가를 과대평가하고, 그에게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그를 이상화하는 조건이라 판단한다. ‘담’과 ‘문’이 상징하는 서로에 대한 장벽은 정보의 획득 가능성을 차단한다. 일루즈는 또한 “시력을 제거함으로써 진리와 과잉된 가시성의 세계에서 물러난 동굴”이라는 공간을 제시한다. 전근대적 공간인 ‘동굴’의 ‘비가시성’은 어두운 밤 과수원에서 은밀히 만나는 칼리스토와 멜리베아를 상기한다. 어두운 과수원, 담과 문의 ‘차단성’은 상상력의 작동 가능성을 증대한다. 즉 제한된 정보와 비가시성을 통해 서로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바치는 것이 중세 사랑의 본질이다.Ⅳ. 현대 소비사회의 사랑앞선 두 절을 통해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이 실존주의 및 쾌락주의의 공리를 따르고 있으며, 이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투쟁을 통해 사랑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또 이들의 사랑은 중세적 절대성을 보이며, 이 같은 절대성을 지탱하는 힘이 서로가 서로를 통해 잊히는 ‘상호 망각’과 ‘변신’이라는 점,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차단된 정보라는 점을 이해했다. 이번 절은 이들의 사랑이 소비사회의 사랑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밝힌다.중세와 근대의 사랑을 구분하는 핵심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냐, 상대적 교환가치의 획득에 힘쓰냐 하는 점이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이들 존재 자체가 사랑의 충분조건이라는 점이 자한다.
    인문/어학| 2024.01.06| 10페이지| 1,500원|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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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객관성 논의요약 및 네트워크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의 함의
    객관성 논의요약 및 네트워크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의 함의
    객관성 논의 요약 및 네트워크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의 함의Ⅰ. 요약“Journalistic Objectivity”에서 메릴(Merrill)은 언론의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데니스(Dennis)는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메릴은 기사의 소재를 선정하고, 의제로 설정하며, 일정한 맥락을 갖춰 보도하는 전방위적 과정에 개입하는 기자의 역할을 역설한다. 그는 흔히 불편부당하고,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 보도한다면 ‘객관적’이라고 평가하는 통념을 반박한다. 그는 언어의 취약성(weakness of language)을 언론의 불가피한 운명이라 말한다. 메릴에 따르면 ‘이야기(story)’는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말과 글로 표현되는 상징적 형태는 실재적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은 “언론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있어 주요 전제가 된다.어떠한 언론 보도라도 과정 없이 튀어나올 수 없다. 기사는 소재의 선정과 취재, 인터뷰, 데스킹, 편집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내어진다. 메릴은 이 과정에서 행하는 선택은 기자의 경험, 지식, 상황, 환경, 신체 상태 및 교육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고 말한다.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이를 의제로 설정할지, 설정한다면 어떤 관점을 취할지, 어떤 단어를 어떻게 조탁할지 등의 심판대 앞에서 기자 개인의 인구통계학적 소속 및 가치관은 논조를 결정하는 독립변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기사는 기자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편집자, 좀 더 넓게는 언론사의 기조에 의해 영향 받게 된다. 메릴은 이 같은 논거에 바탕을 두고 언론의 객관성이 불가능하다고 피력한다.그는 또한 기계적 의미에서의 ‘분리’가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보도되는 사안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 않고, 특정 관점을 취하지 않는 것이 곧 언론의 객관성은 아니다. 사실 여부를 검토하고 진술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그 검증의 과정에는 필히 특정 관점이 개입하게 마련이므로 온전한 지는 논쟁의 지점이다. 설령 개별 문장이 객관적일지라도, 이것이 일정한 맥락에 놓여 이야기를 구성하는 한, 전체 기사는 객관적일 수 없다. 이와 같이 객관적 요소와 그렇지 않을 여지가 있는 요소의 결합을 ‘부분적 객관성’이라 일컫는 자들이 있다. 이에 대해 메릴은 ‘부분적’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객관성은 온전해야 한다. 전체로서의 순수한 객관성 그 자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객관성이 아니다.이러한 주장에 맞서 데니스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와, 이를 수용하는 대중이 합리성과 규칙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친다는 사실에 방점을 둔다. 그가 말하는 객관성이란 정보를 제시하는 방법이자 양식으로서, 체계성과 합리성이 그 주를 이룬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우선 객관성 개념의 변모 과정을 소개한다. 1920년대의 정파적 선정보도 관행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던 초기 객관성 모델은 복잡한 현실 상황을 억지스러운 이분법 구도로 환원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이에 따라 객관 보도의 ‘전략적 관습(strategic ritual)’이라 불리던 요소가 오히려 진실을 유폐할지도 모른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대두됐다. 결국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뉴저널리즘, 주창저널리즘 등 전통적 보도 관례에 비해 보다 주관적 현실을 보도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를 주동하던 자들은 오히려 이처럼 ‘구성된’ 보도가 이전의 기계적 객관성에 비해 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으로 보이는 주장을 펼쳤다.하지만 데니스는 60~70년대의 흐름 또한 극단적으로 치우쳤다고 지적하며 언론 객관성의 본질은 일련의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편익이 비용에 우세해야 한다는 경제적 합리주의 정신을 계승한다. 그리고 이 합리주의는 기획부터 기사 작성 및 편집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즉 언론의 객관성은 기사 작성의 모든 과정에서 공기처럼 편재(遍在)한 원칙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데니스는 기사의 작성 과정에서 주관적 의견이 개입될 가능성을 인정한다.사 작성, 편집의 과정에서 합리적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일반 독자는 기사가 이 같은 절차를 거쳐 편집·발행됐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 후 합리적 관점에서 기사를 읽고 이해하며 수용한다. 이는 기사가 기술적이든, 분석적이든, 결과론적이든 그 종류에 구속받지 않는다. 다만 공적 사안을 비판하고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와 규칙이 있다면 그 자체로 기사는 ‘객관적’이다. 물론 이때의 합리성은 문화와 체제에 따라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한 문화권 내에서 합리적인 판단이 다른 문화권 내에서는 비합리적 광기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리히텐버그(Lichtenberg)의 In Defence of Objectivity Revisited에서도 주요한 논점으로 부각된다.리히텐버그는 위 글을 통해 객관성의 이상을 기각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으며, 실상 객관성을 비판하는 자들 또한 객관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을 설파한다. 그녀는 논증과정에서 ‘상대주의’ 개념을 논한다. 흔히 객관성의 문제는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논쟁으로 환원되곤 하는데, 어떤 쪽에 속하든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관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녀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 관념의 차이보다 이상주의에서 파생된 상대주의 개념이다. 즉, 현실은 관점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보다 문화·공동체·개인마다 ‘다르게 구성’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하지만 사회구조주의자들 또한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주장 사이에서 흔히 혼동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들은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대중 매체가 편파적이거나 왜곡된 표현을 한다”는 주장을 동시에 하곤 한다. 그러나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면 매체에서 편파성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또 매체가 이념적 기능을 수행하거나 편파성을 내비친다고 비판하려면 더 나은, 객관적 진실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두 주장은 양립할 수 없다. 게다가 문화 상대주의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우리는 그 정보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현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그 구성 과정에는 각 분야의 이론과 또 다른 사회적 구성물인 기관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 또한 객관성의 존립을 위협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사회적으로 구성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부가 아니라 각 관점에 대한 호불호, 우열의 판단이 가능한지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판단 가능하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현실은 진실성과 신뢰성, 객관성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뿐만 아니라 리히텐버그는 객관성 개념이 선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즉 객관성은 한 단어로 정의되는 단편적 개념이 아니며, 연속선상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상대적 속성을 갖는다. 한쪽 끝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보도가 있지만, 다른 한쪽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객관적 보도 또한 존재한다. 후자의 보도 또한 객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보도에 대해서도 여전히 우리는 사실과 의견을 분리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일종의 ‘규범적 원칙’으로서 우리가 늘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같은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The Politics of Objectivity’라는 장에서 그녀는 권위주의적이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전유물 혹은 그에 순종하는 자들의 도구로서의 객관성 비판에 응답한다. 우리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상으로서의 객관성과 방법론으로서의 객관성은 구분돼야 하며, 객관성처럼 보이는 것과 원칙으로서의 객관성 또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객관성이란 가치의 부재 그 자체가 아니다. 객관성은 '가치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보도의 원칙이다.Ⅱ. 코끼리는 그래도 코끼리다여느 논의가 그렇듯 언론 객관성 또한 사회·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주요 대중매체가 신문이었던 시대의 두 논문과, 지금 그리고 대한민국에서의 객관성에 대한 논의는 그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전과 이에서 파생된 언론 지형의 변화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뉴 저널리즘, 시민 저널리즘, 대안 저널리즘, 네트워크 저널리즘 등 용어는 파편화됐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시민의,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언론이다.장병희와 남상현(2012)은 뉴스의 생산과 유통, 피드백 과정에 전문 기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현 언론의 양태를 ‘네트워크 저널리즘’이라 이름 지었다. 이들은 네트워크 저널리즘의 주된 수단으로 기능하는 소셜미디어는 그 구조적 특성 때문에 사적 커뮤니케이션 성향이 강하고 그 때문에 객관성이 더 위협받는 현실을 지적했다. 더불어 비전문가 보도자들은 소셜미디어의 객관성에 대한 지각 역시 낮을 것이라 분석했다. 이처럼 수용자의 적극적 참여를 보장하는 현 보도 양상은 우리를 객관성 가치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게 될까?나는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라 생각한다. 저널리즘의 외연 확장과 경계의 해체는 오히려 객관적 저널리즘에 대한 수요를 더 증강할 뿐 아니라, 그 토대가 되는 객관성 이념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선 객관성의 범주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김상호(2007)에 따르면 객관성은 방법론으로서 구체적 지침과 관행을 뜻하는 최소주의 객관성과 가치나 윤리로서 객관성을 지향점으로 삼고자 하는 최대주의 객관성으로 그 논의의 맥이 구분된다. 이는 객관성의 폭넓은 범위에 대해 논한 바 있는 위 리히텐버그의 의견과도 합치되는 면이 있다. 또한 전자의 최소주의 객관성 관행은 터크만(Tuchman)(1972)이 주장한 전략적 관행으로서 언론의 객관성 개념과 상통하고, 후자의 객관성 관념은 전문적 공동체 구성원 간 합의로서의 객관성을 주장한 서슨(Schudson)(1978)의 견해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나는 논의에서 일종의 이상적 가치로서 객관성을 논하는 최대주의 객관성 관점을 취하고자 한다.「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중 제2절 ‘객관성’과 관련된 조항에서는 객관성을 보도의 준칙으로 상정하며 이의 실천을 감독·규제 있다.
    사회과학| 2024.01.06| 6페이지| 1,000원| 조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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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돈키호테>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상(理想)과 균형 서사
    <돈키호테>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상(理想)과 균형 서사
    2017 가을학기 중남미시연습돈키호테와 조르바가 불러온 거룩한 변화- 돈키호테 와 그리스인 조르바 의 이상(理想)과 균형 서사-2018 봄학기 스페인소설Ⅰ. 『돈키호테』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균형 회복 서사『돈키호테』의 돈키호테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모두 자유를 좇는다. 돈키호테는 “현재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방랑기사 같은 정의의 투사들”이라고 말한다. 몰락한 시골 양반 돈키호테가 편력기사 행세를 하고 출정에 나서는 이유다. 돈키호테가 믿는 진리와 정의는 허구 같은 현실이자 현실 같은 허구다. 삶 자체가 허구를 현실화시키고, 맹목적 이상을 추구하는 여정이었으니 돈키호테의 정의(正義)는 생애가 지향했던 자유로 향하는 본원(本原)적 실천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를 갈급하는 것은 조르바 또한 다르지 않다. 돈키호테가 사회정의를 수호하고자 기사를 흉내냄으로써 가치를 실현한다면 조르바의 ‘출정’은 산투르 연주와 춤으로 상징된다. 돈키호테가 세상 사람들의 조언에 굴하지 않고 출정에 나설 때 보이는 광기와, 조르바가 춤추고 연주할 때 드러내는 무아지경은 고유하고 독립적 세계를 구축해 존재가 온전해진다는 점에서 닮아있다.두 소설의 중심인물 돈키호테와 조르바는 균형과 불균형 사이를 오가는 서사의 중심축을 이룬다. 토도로프(1969)는 완결된 플롯이 하나의 ‘균형’ 상태에서 또 다른 ‘균형’ 상태로의 이행이라고 보았다. 그는 균형(혹은 평형) 상태란 ‘안정적이지만 고정되지는 않은 사회 구성원 간 관계의 존재’라고 말한다. 가령 사회적 법규, 게임의 규칙, 교환 시스템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균형 상태는 일정 기간의 ‘불균형’에 의해 분절되는데, 이는 퇴보 혹은 개선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토도로프의 내러티브 분석은 돈키호테와 조르바의 이야기를 탁월하게 설명한다.알론소 키하노로 태어나 알론소 키하노로 죽는 돈키호테가 키하노가 아닌 편력기사 ‘돈키호테’로 살던 기간은 사회적·관습적으로나 정신병리학적으로나 불균형 상태다. 사회가 돈키호테에게 기대하는 시를 삶의 가치 삼던 조르바 또한 말년에 이르러 한 여자에게 정착해 아이를 낳는 등 사회 일반의 규약에 순응해 균형을 찾으려 시도한다.돈키호테와 조르바는 내적·외적 불균형 상태를 겪지만, 믿음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성과 동반자와의 길항 관계를 통해 불균형 속의 균형, 이를테면 ‘모순적 균형’을 유지한다. 이러한 바, 본고는 돈키호테와 조르바의 이상과 그 실천 방식을 짚고, 돈키호테의 동반자 산초, 조르바의 동반자인 1인칭 서술자(‘나’)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서사의 균형이 유지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한다. 또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하는 돈키호테와 조르바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이상을 실현한 것인지 즉, 토도로브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균형에 균열이 난 후 삶이 ‘진보’했는지에 대해 답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다.Ⅱ. 돈키호테와 조르바의 이상(理想), 즉흥성과 무정부주의돈키호테와 조르바를 규합하는 열쇳말은 즉흥성이다. 이들은 사고와 행동의 합리적 이유를 찾고 논리적 인과율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충동과 본능이 이끄는 정동(情動)을 신뢰한다. 안영옥은 돈키호테의 광기가 당대의 교리와 사회·정치적 구속에서의 해방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의 모험정신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로 이어진다고 이해한다. 돈키호테의 모험정신은 외부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순간적 의지로부터 파생된다. 돈키호테가 감흥에 따라 행동을 취하는 모습은 기사도 원정을 떠날 때의 ‘광기’뿐 아니라 ‘마법’의 법칙으로 묘사된다. 돈키호테 전편 47장에서 산초는 비록 “소인이 모시는 돈 끼호테 나리께서 마법에 걸려 끌려가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올시다”라며 항변하지만, 곧이어 돈키호테의 행동 법칙이 “빌어먹을 귀신”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또 이발사와 법사신부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미친 기”에 의한 것으로 표현하며 그의 행동을 관통하는 ‘비정상성’이 주술적이고 초자연적인 충동성을 지녔음을 강조한다.한편 조르바의 광기와 즉흥성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구분한 아폴론적 속성과 디오니소스적 끌림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조르바의 ‘무조건성’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상과 맞닿아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1인칭 서술자 ‘나’(바실)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을 데리고 크레타섬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를 묻는 바실에게 조르바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라며 따진다. 그의 요구는 일면 억지스럽고 무례해 보이지만 이 같은 즉흥성이 조르바의 삶을 지탱하는 축이다.두 인물의 즉흥적 성향은 필연적으로 사회와 갈등한다. 근대적 사회 규범은 명확한 인과율에 따라 개인의 행동 범주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개인의 갈등은 두 인물의 무정부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돈키호테는 사회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조직이라기보다 영웅적 개인이라 생각한다. 그는 조직화 된 집단의 질서보다 개인의 성과를 더욱 신뢰한다. 기사 출정을 통해 사회정의를 달성할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갖는 것, 전편 45장에서 산초가 바라따리아 섬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면모가 두드러진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임금이니, 민주주의니, 국민 투표니, 국회의원이니 해봐야 다 그게 그거”라며 근대적 정치·사회적 규율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바람을 내비친다. 규범 대신 본능이 통치하는 조르바적 세계는 그의 ‘천당’을 채우는 사물의 상징성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르바는 직업이 작가인 서술자 바실에게 “두목, 언젠가 내가 사람에게는 저 나름의 천당이 있다고 한 적이 있지요. 당신의 천당은 책이 잔뜩 쌓이고 잉크가 됫병으로 한 병 놓인 방일지도 모르지요. 포도주, 럼, 브랜디 병이 가득한 방을 천당으로 아는 놈, [...] 가지각색입니다”라고 말한다. 조르바의 천당은 곧 이상적 내면세계다. 책 대신 술로 내면세계를 그득하게 채운 그의 ‘디오니소스성(性)’은 표준적 규범에 저항하는 그의 성격을 강조해 드러낸다.Ⅲ. 세계의 내적 균형을 달성하는 동반자, 산초와 바실앞 절을 통해 돈키호테와 조르바와 조르바의 동반자는 각각 산초 판사와 서술자 바실이다.산초는 돈키호테의 시종이다. 그는 돈키호테의 세 번 출정 중 두 번의 출정에 동행한다.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으며 그를 꾄다. 돈키호테는 산초의 평화로운 일상과 가정을 파괴하고 그의 세상에 균열을 내는 듯하지만, 이내 산초는 돈키호테의 광기에 동화된다. 동시에 산초는 돈키호테의 광기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는 데 역할을 다한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인식하거나 쇳그릇을 투구로 보는 등의 광기를 보일 때뿐만은 아니다. 산초는 돈키호테의 모험과 대화에 가담해 기꺼이 그의 동반자가 된다. 둘은 때로 돈키호테의 광기 그 자체를 대화 소재로 삼기도 한다. 전편 49장에서 광기의 근원이 ‘마법’일지에 대해 고민하거나, 후편 마지막 장에서 돈키호테가 광기를 털어놓고 돈키호테가 이에 답하는 장면은 돈키호테의 정체성 탐구 과정에서 산초의 역할이 중대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산초가 돈키호테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돈키호테 삶의 반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산초의 동행 덕분이다. 그러나 둘은 결국 당초 기사로서 꿈꾸었던 세계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돈키호테와 산초가 세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목적을 두지만 결국 섬의 통치에 실패하고 마는 것과 같이, 조르바와 바실은 케이블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일을 그르친다. “고가선이 이 마을에 가져올 이익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이같이 엄청난 일(케이블 건설 사업)에 인간의 두뇌란 얼마나 무력한가를 절감했지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인간 이성의 공허함과 무력감을 여실히 드러낸다.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 관계의 서사는 유사해 보이지만, 소설 전개 과정에서 각 관계 속 인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구분된다. 거칠게 이해했을 때 두 소설은 모두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공존 및 길항 관계를 그리고 있지만, 관계의 역학이 다르다. 『돈키호테』에서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가 현실 세계의 규율을 깨닫고 이상을 포기함으로써 외적 균형바실은 그 자체로 유구한 자연물과 원초적 생명 욕구를 지향했다. 현실의 순간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행복을 느끼는 장면은 바실이 조르바에게서 영향을 받은 대표적 장면이다. 바실은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라며 1인칭 시점으로 내면을 묘사한다.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맹목적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믿음 덕분이다. 바실에게 크레타 해안은 무조건적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자연물이다. 크레타 해안과 자연의 영속성은 이상을 영원히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장치다. 산초가 바라따리아 섬에서 취하고자 했던 ‘권력’은 본질적으로 유한하다는 점과 구분된다.바실의 ‘조르바적’ 모습은 그가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공제조합이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그는 이때의 이상을 ‘돈키호테’와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험은 조르바와의 만남 및 대화가 아니었더라면 기억의 저편에 묻혀 있을 잠든 기억이었다. 또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 묘사된 “외부적으로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는 바실의 내면은 조르바적 이상이 둘 사이의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넘어 바실의 세계관 그 자체로 치환됐음을 보여준다. 조르바의 세계관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바실의 영원불멸한 내면성으로 잔존한다.Ⅳ. 돈키호테와 조르바의 죽음이 남긴 것돈키호테와 조르바는 사회의 규율로부터 탈피하려는 탈근대적·해체적 속성을 공통적으로 엿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태도의 궤를 달리한다. 돈키호테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현실 세계를 초연히 인식해가는 데 반해, 조르바의 원초적·본원적 충동으로의 끌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된다. 돈키호테는 작품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이젠 그것들이 다 엉터리이고 사기였음을 알았단다”고 .
    인문/어학| 2024.01.04| 5페이지| 1,5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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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 <그녀>를 통해 살펴본 환멸과 성장 사이의 욕망
    2016 봄학기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 〈그녀〉를 통해 살펴본환멸과 성장 사이의 욕망Ⅰ. 서론사랑이 당연시되는 사회다. -여기서의 사랑은 만물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남녀 혹은 남남, 여여의 서로를 향한 이타적 감정, 서로를 제외한 다른 대상에 대한 배타적 감정으로 논의를 한정한다.- 특히나 외적으로 매력적인 남녀를 보면 애인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사람인지, 없다면 왜 없는지 무수한 호기심을 투척하고 대답을 갈망한다. 사랑의 위상은 이상하리만치 높아졌다. 오래도록 애인이 없던 사람에 대해서는 혹시 정신적, 육체적 문제가 있지는 않나 하고 수군대고 의심하는 세상이랄까. 왜? 추측하건대 다수의 사람들은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한 대상과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 마치 그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 공감 능력, 타협 능력을 방증해준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은 정말 삶의 반짝거리는 순간, 한없이 아름다운 순간들의 집합으로만 정의내릴 수 있을까?사랑을 욕망과 동일시하는 라캉에 따르면 사랑이란 즉, 욕망이란 근본적으로 결핍이면서 계속되는 반복충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사랑이란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공허한 발길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같은 감정에 끊임없이 사로잡힌다. 역설적이게도 원하는 대상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욕망의 농간 때문이다. 루이스 부뉴엘의 마지막 작품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 미국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 각본, 감독의 〈그녀(Her)〉(2013)에서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마티유는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인 콘치타는 마티유에게서 계속해서 달아난다. 테오도르는 운명의 짝을 만난 듯 기뻐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는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운영체제일 뿐이다. 테오도르는 결코 사만다를 소유할 수도, 영혼의 짝으로 삼을 수도 없다.이와 같은 사실을 깨우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레질서는 허위의 동일시와 이중성에 의해 지배된다. 거울단계라고도 불리는 상상적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에 비친 영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듯, 자기 자신과 어머니의 구분도 뚜렷하지 않다. 이 단계의 행동은 타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허위의 동일시이며 타자가 상상적 관계를 통해 나르시스적 자아가 되는 자기소외의 징후이다. 이에 따르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마티유는 콘치타라는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콘치타에 나르시시즘적인 선호를 투영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서사의 중심에 위치한 마티유는 광적이고 강박적인 사랑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욕망의 대상인 콘치타를 향해 열정적으로 돌진하지만 결국은 고독만을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 콘치타라는 거울이 제공하는 정체성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항상 마티유라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소외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콘치타라는 인물은 각기 다른 두 여배우가 교차적으로 연기함으로써 그 모호성 및 잡히지 않는 성질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이와 같은 욕망의 모호성은 〈그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테오도르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성장해왔던 캐서린과 이혼 후 길을 가다 전광판 광고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던, 사랑의 대상이자 인생의 동반자에 가까웠던 캐서린과 결국 ‘이별’이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은, 테오도르가 캐서린에게 자신만의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이혼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캐서린은 테오도르에게 “너는 내가 밝고 행복하고 톡톡 튀고 마냥 낙천적 아내가 되길 원했지. 서로 맞춰가기보다는 순종형 아내를 원했잖아.”라고 말한다. 테오도르는 거울단계에서 허위의 동일시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캐서린에 자신만의 욕망을 투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허위의 동일시에서 비롯된 소외감은 증오로 표출되기도 한다. 결국 욕망의 대상은 욕망의 주체인 테오도르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탓또 다른 의미를 낳기 때문이다.라캉 이론은 욕망의 표출 방식 또한 언어규칙에 입각하여 이해한다. 이에 따라 프로이트의 꿈의 이론에서 압축과 전치로 표현되던 것은 라캉 이론에서 은유 및 환유로 설명된다. 잠재적 꿈을 이루는 유사한 내용들이 하나의 내용으로 중첩결정되는 프로이트의 압축은, 문장에 나타난 특정 어휘의 의미가 중첩결정되는 원리와 같다는 점에서 소쉬르 구조주의 언어학의 계열관계 및 수사학적 은유와 유사하다. 한편 사회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잠재적 꿈의 특정 내용이 검열을 피해 사소한 이미지로 바뀌어 나타나는 전치는 어떤 기표가 인접한 다른 기표로 바뀌는 원리와 같다는 점에서 연쇄관계 및 환유와도 상통한다. 이때 계열관계에서는 다른 그 자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어휘와의 차별적 관계를 통해 그 가치가 결정되므로 부재가 현존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운영체제 사만다는 캐서린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캐서린의 부재가 사만다의 존재원인이 되지만, 사만다에게 부여된 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기의는 꼬리를 물고 다른 실체로 연결되기 때문에 결코 그 의미를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이다.이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재현된다. 욕망의 대상은 신기루처럼 잡는 순간 물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상징계에 접어드는 것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욕망의 속성 탓에 프로이트는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티유가 욕망하는 대상인 콘치타는 〈그녀〉의 사만다와 같이 하나의 기표로서 존재한다. 콘치타는 그러나 두 여배우 캐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라는 두 기표 사이를 오가며, 기의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즉,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전치 혹은 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캐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는 번갈아 등장하며 서로의 계열관계로서 기능하고, 각자의 부재가 서로의 현존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 기표가 되든 마티유는 그들에게 하나의 기의를 부여할 수 없창과 거울에 비친 테오도르의 모습은 반사상을 통해서라도 두 사람이 되고자 하는 테오도르의 근원적 외로움과 욕망을 투사한다. 그러나 관음은 그 본질적 속성상 주체와 객체의 메울 수 없는 틈을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테오도르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마티유가 욕망의 주체로서 대상과 유리된 것과 다를 바 없이, 욕망의 대상으로서 주체와 괴리된다.욕망은 모든 곳에 편재하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마티유는 두 명의 여배우가 연기하는 콘치타에게,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사만다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소유하려 했다. 마티유가 캐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의 뒤바뀌는 양상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그가 오로지 콘치타의 몸만을 탐닉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실제로 욕망했던 대상은 그녀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또한 마찬가지다. 캐서린이 그에게 원망하듯 내뱉은 말과 같이 테오도르는 애인을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유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애인에게 투사된 자신의 모습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라캉의 상상계, 거울단계에서 나타나는 행동의 양상이며 타자는 결코 주체가 될 수 없기에 그러한 욕망을 추구할수록 주체는 영원히 소외될 뿐이다. 마티유가 욕망의 굴레 속에서 결핍을 충족시키기란 불가능하며, 테오도르가 느끼는 인간 군상 속의 소외는 하나의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이 욕망을 언어로, 행위로 표현하는 과정은 욕망의 대상에 더 다가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와 대상의 간극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요, 욕망이 남아 그 다음 대상을 찾아나서는 것이 실재계라면 마티유와 테오도르가 각각 콘치타와 사만다를 실재라 믿고 다가간 이후 끝내 그 대상을 얻어낸다 할지라도 결국 그 후에 남는 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실재의 심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 〈그녀〉는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는 욕망의 불충족성을 여실히 보여주며, 특히로에게 등을 돌리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 때의 기억은 테오도르에게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을 만큼. 한편 사만다와의 사랑은 어떠한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 그녀가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캐서린을 좋아하던 그 감정과는 또 다른, 하지만 동등한 지위의 감정으로 사만다를 대했다. 결코 사만다를 향한 감정이 캐서린에 대한 감정보다 하위의 범주에 속하는 무엇은 아니었다. 테오도르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의 눈빛을 본다면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해변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흘러나오는 곡 “Arcade Fire: Song on the Beach”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을 저 지하 끝, 그 깊이를 수치로 표현하는 것조차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의 심도의 애틋함으로 전해지게 한다.물론 그는 고독했다. 테오도르가 존재하는 어떤 장소에서든 카메라는 같은 공간에 발 딛고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비추는 것을 잊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노스탤지아를 불러일으키며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소품들의 활용, 이를 테면 열쇠, 옷핀, 2차원 그림 등은 디지털화된 사회에서도 결코 떠나고 싶지 않은 과거로의 회귀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는 모두 고독해진 미래사회에서 테오도르가 더욱 욕망의 충족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그가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만다 또한 그가 정착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그 좌절감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추락할 뿐이다. 라캉이 예견했다시피 욕망의 추구는 끝없는 좌절의 연쇄 고리 앞에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는 욕망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위의 무익함 및 공허함은 부정하기 어려운 명제로 다가오는 것인가?그렇지 않다. 욕망을 추구한 탓에 테오도르가 그 공허함 끝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있었기에, 욕 않다.
    인문/어학| 2024.01.04| 9페이지| 1,000원| 조회(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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