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개론Ⅰ서론사회복지사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클라이언트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사회복지가치를 적절하게 수용하고 적용 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회복지의 기본가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일반가치와 전문직 실천의 가치로 나뉘어 살펴보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Ⅱ본론1.가치의 기능과 성격가치란 바람직함의 기준으로 중요한 결정의 기준이 되는 지침을 뜻한다. 사회복지에서 가치는 사회구성원이 모두 안녕을 누리기위한 사회적인 노력이다. 사회복지사로서도 활동기준이 되며 사회복지의 전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클라이언트를 돕기 위한 윤리적 지침이 되기도 한다.2.사회복지의 기본가치1)사회복지의 일반가치①자유적극적 자유를 뜻하며 국가의 개입을 선호한다.②평등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기 위한 권리이다. 결과적, 비례적, 기회의 평등이있다.③정의분배의 정의를 강조하며 사회 취약계층들에게 보다 더 나은 처우를 해주고 권리와 자원을 배분하기위한 것이다.④연대과거 전통사회에서는 기계적 연대에 의한 재분배였다면 근대사회 이후의 연대는 사회통합을 위한 사회복지를 의미한다.2)사회복지전문직 실천의 가치프리드랜더(Friedlander)가 제시한 가치는 다음과 같다.①개인존중의 원리모든 사람들은 가치와 품위, 존엄을 가지며 존중되어야한다. 이는 사회복지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지능이나 신체 경제적 속성등 으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되고 기회균등을 보장받아야한다.②자발성 존중의 원리사람은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를 직접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가 자원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결정을 존중 해줘야한다.③기회균등원리인간사회는 여러 계층으로 분류되어지는데 사회복지측면에서는 아무 차별 없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차별은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잘 지켜져야 스스로 존엄성을 존중하여 적응할 수 있다.④사회연대의 원리(사회적 책임성)현대사회에서의 문제들은 한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다. 연대적으로 책임을 지며 해결하기위해 공동과제라 생각하고 임해야한다. 사회생활에 적극 참여하도록 보장해 줘야하고 인간다운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며 상호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인식하는 존재임을 뜻한다.레비가 제시한 가치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①사람우선의 가치: 클라이언트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권한을 주는 가치이다.②결과우선의 가치: 사회참여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해줘야 한다는 책임에 대한 믿음이다.③수단우선의 가치: 인간은 존엄과 존경 속에서 자기결정권리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아야한다는 것이다.3. 가장 중요한 가치다양한 가치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는 자발성 존중의 원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타인의 의견을 듣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순 있지만 타인이 내 결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등학교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어느 대학에 수시를 넣을지, 어떤 학과로 넣을지 고민이 많았다. 고민 끝에 희망하는 학과와 대학을 결정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내가 전혀 진로로 생각하지 않았던 과를 추천해주셨고,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지원하고 싶었는데 내 성적이 낮아서 어려울 거라며 지방에 있는 대학들을 지원하라고 하셨었다. 붙게 되면 그 대학에 다니는 건 담임선생님이 아닌 나이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곳을 지원해야 내가 만족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에 떨어지더라도 내가 직접 내린 결정이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가족, 친구, 선생님과 충분한 상담 끝에 선생님 의견도 고려를 하되 내가 원하는 곳 위주로 넣었다. 그리고 결과는 다행히 좋았다. 물론 담임선생님은 그동안 교직 생활을 오래하셨고 고3 담당을 여러번 맡으시면서 어쩌면 학생들보다도 더 열심히 입시에 대해 공부하고 그동안 봐온 케이스들을 통해 판단도 잘 하신다는 것을 알기도하고 또 결정적으로 나를 위해, 나에게 도움을 주시고자 내주신 의견이지만 그때의 담임선생님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가치와 결정을 존중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난 사회복지의 가치 중 자발성 존중의 원리를 배우면서 이때의 경험이 생각이 났다. 사회복지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클라이언트에게 원하는 정보와 자원을 전달하고 충분한 조언은 해줄 수 있되 결정은 전문가가 아닌 클라이언트가 직접 해야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복지법제Ⅰ서론사람들은 다양한 위험을 맞닥뜨린다. 예상치 못한 사고 등으로 위협받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나이가 증가함에 따라 근로능력을 잃기도 한다. 또 사회적 특성떄문에 실업에 처해지기도 한다. 본인의 의사나 능력과 상관없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적 위험들로 부터 보호받기위해 나라의 도움과 제도가 필요하다. 어떤 제도들이 있는지 알아보고자한다.Ⅱ본론1. 사회보장제도와 사회안전망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일반국민을 위한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등 기본적인 4대 사회보험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로 이루어져 있다. 최저생계비는 기초생활수급자를 기준으로 사용되고사회안전망이란 인생주기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위험들(질병, 재해, 노령 실업, 사망 등)로 인해 소득을 잃고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할 경우 이를 도와줘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장치를 의미한다.2.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안전망 구조1) 국민연금제도국민연금은 소득활동기간동안 조금씩 납부해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소득활동이 중단된 경우에 연금을 지급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이다. 1988년부터 시행되었으며 노령인구 증가에 따라 노후대비책으로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최근에는 ‘노후에 연급수금이 가능할까?’라는 근본적인 의문과 불안감으로 인해 따로 개인연금에 가입하기도 한다.2) 건강보험제도우리나라는 1977년 직장인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고 직장,지역,공무원 의료보험 등으로 각각 운영되어 오다가 1989년 전국민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 건강보험제도로 통합되고 2008년에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었으며 2012년 사회보험 통합 징수제를 시행하고 있다. 보험료는 각 가입자의 소득이나 재산 수준 등을 참고해 부과하고 있다.3) 고용보험제도고용보험은 1995년 시행된 제도로 실직 근로자에게 실업급여를 주는 실업보험 외에 적극적으로 취업을 알선을 통해 재취업을 돕고, 고용안정을 위한 사업들과 연계하여 시행되고 있다. 즉 사전적, 적극적 차원의 수단이다.4)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산재 보험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험이다. 1960년대 공업화와 산업화 진전에 따른 산업재해 근로자를 보호하기위해 1964년부터 시행되었다. 산업재해로 인한 근로자의 부상이나 사망에 따른 근로자와 가족을 보호하고 보상해주기 위해 ㅏ련된 제도이다. 정부는 재해배상책임을 보상하기 위해 보험료를 일부 징수해 사업주를 대신해 필요한 상황에 보상을 해준다.5)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국민기초생활 보장제도는 어려운 사람에게 급여를 실시해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제도이다. 수급자는 각종 수수료, 수신료 등을 면제받고 수도,전화,전기요금등을 감면받는다.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한 금액이 급여로 지급된다. 생계급여 선정기준은 기준 중위소득의 100분의 30이상이다. 이외에도 주거, 교육,의료, 해산,자활 급여 등이 지급된다.Ⅲ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와 안전망 구조의 시사점과 향후 과제지금까지 사회보장제도란 무엇인지,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 본 결과 꼭 필요한 제도들이 우리 삶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나도 부모님께서 보험료를 열심히 납부해주신 덕에 병원이나 약국에가도 진료비를 일부만 부담하는 등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안전망의 기본요소인 포괄성, 보편성, 최저보장을 완벽하게 충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움을 주어야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 안전망 구조는 구조가 취약하다. 사회보험의 경우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쉬운 취약계층을 완전히 보호하기 어려우며 공공부조의 경우에도 근로능력이 있는 계층은 일할 능력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소득이 없는 경우 생계보호가 부족한 실정이다지난 20년간 사회보장제도는 크게 확대되었고 각 대상에 맞는 여러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사회보험의 경우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플랜이 아닌 필요에 따라 순차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정규직 근로자 위주로 된 사회보험은 다수의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를 지켜주기 어려웠다. 재산이 일정수준이하로 되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빈곤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보험료부담문제가 존재하는 만큼 앞으로 사회안전망을 재구축 하는 게 필요하다.
종이의 도발-다큐멘터리 ‘페이퍼로드’를 감상하고..-정보시스템발전사찬바람이 불던 작년 이맘때, 수시면접을 보러 왔을 때가 문득 생각이났다. 서울여대의 가족이 되고자하는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드는 날이었고 나 역시 그간 살아온 열아홉 인생 중에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생각되기 때문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번에 관련된 다큐멘터리영상을 보면서 그 날이 떠올랐다. 한글창제 후 쉬워진 문자로 누구나 읽고 쓰기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면접문제에서 문자에 대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당시 질문이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의 특징 설명, 문자사용으로 인해 얻은 인류의 이점, 문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모습을 추론해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켜보게 되었다. 문자가 없어진다면 늘상 사용하던 스마트폰에도 글자가 없을테니,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고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학교에 갔을 것이라는 예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문자가 없었다면 당연히 책도 없었을 것이고 또, 책은 여러 매체가운데 한가지라는 걸 생각한다면 지금 사회의 변화와 돌풍을 일으킨 수많은 매체들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시청을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모든건 종이로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그렇게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면서도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필요에 의해 종이도 만들고 문자도 사용하고 뒤이어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다양한 정보매체들의 탄생까지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페이퍼로드’인만큼 종이의 탄생, 발전과정에 대해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히 종이에만 주안점을 둘게 아니라고 생각한다.기록에 대한 욕망을 시작으로 해서 파피루스→ 양피지 → 인쇄술보급 → 전자책 등으로 발전한 기록매체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사상을 전파하기도하는 등 우리생활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어떠한 형태·내용의 정보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시대나 상황에 따라 적합한 정보전달 매체는 각각 다르며 그 판단은 본인 스스로가 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헌정보학도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취사선택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때그때 꼭 필요한 정보를 적합한 매체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학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론적 공부와 실무적 능력을 쌓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 보고서정도전에 대해정도전은 경복궁을 총 설계하고 각 전각의 이름을 모두 직접 지었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정도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 보고 싶었던 계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재 3호선 노선도를 보면 독립문역- 경복궁 - 안국 순서대로 되어있는데 나는 독립문역에 살고 있고, 집에서 지하철로는 2정거장, 버스로는 3정거장 떨어진 안국역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통학할때마다 늘 경복궁과 광화문을 지나쳐가곤 했다. 학교 끝나고 심심하면 인사동도 구경하고 삼청동도 구경하고 경복궁에도 놀러갔었다. 맨날 지나가면서 볼 때는 별로 특별한지도 몰랐는데 어느새부턴가 중고등학생들이 한복대여해서 궁에 입고가서 셀카찍고 sns에 올리고 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 사람도 더 많아지고 그래서 관심이 많이 갔던 것 같다. 게다가 고3때는 졸업사진마저 경복궁에서 찍었다. 나름 경복궁과 인연이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복궁을 설계하고 이름짓고 만든 정도전에 대해 어떤 업적이 더 있는지, 어떤분이신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정도전의 생애와 업적, 평가 그리고 정도전에 대해 알아보고 느낀점과 내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정도전은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지만 외가와 관련된 신분 문제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3남 1녀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확실치 않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했다.」 벼슬을 하고나서 언제부턴가 공민왕이 신돈을 총애하고 그가 국정 간여하자 정도전은 실망해서 삼각산 옛집으로 가서 살았다. 「공민왕이 성균관 개혁하고 명망높은 유신들 불러들인다고 하자 성균박사에 임명되었다. 우왕이 즉위하고 나서 정도전은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1375년 북원사신이 고려에 와서 이인임, 경복홍등 친원파 대신들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사신 접대하도록 했는데 정도전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로 귀양간다.」 글을써서 아내에게 걱정말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열심히 농사짓고 사는 농민들이 귀양살이중인 정도전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유배생활을 마치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의 군대가 기강이 잡히고 훈련이 잘 되어 있어 혁명이 성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388년은 역사적인 해였다.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더해져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주도자였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없어졌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정몽주가 살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속에 드디어 1392년, 고려시대는 끝나고 조선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선이 시작된후 정도전의 활약은 다방면에서 다양했다. 흔히들 많이 알고 있듯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도 했고 현재의 경복궁 과 도성 자리를 정하고, 수도건설 등의 일을 했다. 「경복궁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유교와 관련한 가치가 담긴 상징들을 부여하기도 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되자 새 궁궐로 이사했고 새 궁궐의 전각들에 대한 이름을 지으라고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령했다. 궁궐 남문 이름을 처음에는 정문으로 지었는데 나중에 지금의 광화문으로 고쳤다.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주장한 것으로도 알려져있는데 그와 관련해서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을 하면서 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였다.그는 각종 철학서를 저술하기도 했는데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심기리편, 불씨잡변등을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이요 정학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나 문물같은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했다.정도전에 대한 평가도 찾아보았는데 훗날 신숙주가 삼봉집의 후서에서「"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으나 선생에 비교된만한 이가 없었다"」고 평가할 만큼 정도전은 문인이면서도 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태조이성계는「“헤어진지 오래되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최긍이 와서 안부를 듣게 되니 적잖이 위로가 되었소.”」라고 하며 정도전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말도 있다.「“나의 원훈을 죽였구나”」라며 정도전의 죽음을 병석에서 전해들으면서 굉장히 놀라서 탄식했다.반면 명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을 화의 근원이라고 표현했는데 그에 정도전은「“소신의 희생으로 두 나라 관계가 정립되고 조선의 사직이 안정된다면 열 번 백 번 갈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의 의도는 소신을 죽여 조선이 다시는 자주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명나라에 갈 수 없다”」며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감이 느껴지는 멘트에 역시 정도전이구나 싶었다.58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 정도전은 건국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고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무서운 혁명가 이면서도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민본사상을 강조해서 백성들을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혁명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잘못된 군주는 바꿀수있다는 그런 생각도 담겨있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다’라는 천인감응설을 믿기도 했다. 맹자의 혁명사상에 의거해 조선왕조 건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그에 따르면 이성계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민심의 추대와 천명의 허락을 받아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정조전은 인정을 통한 민심수렴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국가 안보도 무기같은 물리적인 것으로 막는 것만이 아니라 내치를 잘해 백성들을 사랑하고 인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출발해서 백성들을 풍요롭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경제든 정치든 모든 면에서 중요하게 생각했고 백성을 사랑했다.농업을 중요시했고 농사짓는 인구를 많이 늘리려 했으며 제대로 쓰여지지 않고 있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권하는 정책을 했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창제도의 필요성과 기능을 역설」했다.「의료사업에도 관심이 있어 혜민전약국」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론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대간기능의 강화를 주장하고 동시에 대간 언론 이외에도 신하와 일반 백성의 여론이 국정에 투입되는 기회가 넓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연제도와 일반백성이 정치에 관한 의견을 글로 써서 바치는 구언진서를 제안」했다.「민본정치와 위민정치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통치자의 윤리를 높이고 언론 및 감찰기능을 강화하며 독재를 방지하는 등의 여러 대책이 필요하지만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지방관 수령의 자질과 역할을 강조하여 수령의 직책을 중시하고 도덕규범과 책임을 강조」했다.*느낀점. 생각지금까지는 단순히 정도전을 경복궁과만 연관지어서 생각했는데 업적이 수없이 많아서 놀라웠다. 정도전은 한양을 거의 대부분 설계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조선을 세운 일등공신이라는 말이 정말 잘어울린다. 특히 한양천도가 신의한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울도 가끔씩 여러 문제들이 생길때도 있지만 북쪽은 너무 춥고 남쪽은 너무 덥고 서울이 그나마 온도도 가장 중간이고 적당하고, 또 경주같은 곳에서 몇 달 전 지진이 일어날 때도 서울이 최고구나 싶었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수도라고 생각된다.정도전의 업적은 마치 우리가 숨쉬고 현재 살아가는 문화의 근간이 정도전에게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방원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사실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재주가 너무 많은 인재이기 때문에 오래 살았더라면 더 나라 발전에 기여했을텐데 말이다. 전략이나 외교 법제 행정 등 모든 면에서 밝았고 시나 문장 에도 뛰어나서 책도 쓰고 악장도 쓰고 여러 가지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 같다. 이방원이 아버지 도와 조선건국의 공이 커서 자신이 세자가 되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능력은 있을지언정 덕이 부족하단 이유로 정도전에 의해 계속 견제되었는데 결국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건 너무 극단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죽이지 않고 함께 공생할 수는 없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한국근대사 보고서갑신정변에대해요새 거의 케이블 방송이나 종합편성 채널에서 나오는 예능 위주로 tv를 시청하고 드라마도 거의 안보는 편이라 공중파를 볼 일이 없는데 공중파에서 몇 안되게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역사저널 그날’이다. 사실 이런 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고 예전에 케이블 신청안해서 공중파만 나올 때였는데 방학인데 tv봐도 평일 낮에는 너무 볼게 없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역사저널 그날 재방송을 틀었는데 보다보니 되게 재미있어서 빠져들었다.무조건 전문가만 나와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아나운서와 시인과 연예인 한분과 전문가 3분 정도가 나와서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함께 얘기를 나누기 때문에 내가 궁금했던 점을 비전공자가 질문하고 물어보면 역사전문가 분들이 답하고, 또 역사적 사건들을 연기하기도 하고 이런 과정들이 재미있다. 그리고 다들 진짜 말을 재밌게 잘 하셔서 지금은 케이블이 나와서 예전만큼 열심히 보진 않지만 가끔씩 보고 있다. 진짜 역사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부담없이 보기 좋은 프로다.워낙 재밌는 편들도 있고, 또 너무 슬픈 편들도 있는데 그중에 기억에 남았던 편은 갑신정변에 대해 얘기를 나눈 회였다. 갑신정변과 관련된 장소들인 조계사안에 위치한 우정총국, 창덕궁, 헌법재판소( 박규수와 홍영식 집터), 정독도서관(김옥균과 서재필 집터) 모두 고등학교 근처라 익숙한 장소들이라 갑신정변편이 기억에 남았다. 대학 합격기원하면서도 조계사에 가서 빌었고, 헌법재판소를 지나 북촌쪽으로 가 구경하기도 하고 특히 정독도서관에는 시험공부하러 많이 갔었다. 지금은 자주 못가는데 가끔씩 고등학교 친구를 만날때면 그런 장소들과 추억들이 더 많이 생각이 나는 것 같다.사실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아서 보고서를 쓰기전 갑신정변편만 다시 한 번 봤다. 지금부터 역사저널프로그램에서 나눈 이야기와 평가를 내린 여러 주장들을를참고해 갑신정변에 대한 정의(배경, 과정, 결과 등을 포함한)와 긍정적 평가 그리고 부정적 평가를 적어보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개화의 바람이 불던 때,조선 정계 거물들과 외국 공사들이 참석한 가운데우정국 완공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다. 그런데 이때 정변이 일어난다. 우정국 초대총판이었던 홍영식을 비롯해 당시 신진관료였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정변의 주도자들은 축하연에 참석한 정부 고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찾은 뒤, 고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으로 급히 향하여 우정국에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린다. 이들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키고, 경우궁 안팎에 병력을 배치해 수비한다.거사 이튿날 새벽, 정변 세력은 군사 지휘권자들과 권력의 핵심실세들을 국왕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고종의 만류에도 서슬 퍼런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한다. 급진개화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흥선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왕실 외척, 세력이 개혁내각에 임명된다.하지만 정변의 실상을 파악한 명성황후는 창덕궁환궁을 요청합니다. 정변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고종도 왕권을 잃게 될 위기감을 느껴 입장을 바꾸었고, 정변 세력은 결국 환궁을 결정한다. .고종이 새로운 정권과 함께 혁신정강을 반포한 정변 셋째 날 오후, 명성황후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한 청나라 군대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창덕궁을 공격한다. 정변 세력은 청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창덕궁 바깥 수비를 맡은 군사 천여 명이 청군에 합류하고,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군마저 철병하면서 정변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행해진 갑신정변. 그들의 집권은 그렇게 46시간 만에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했을까?우선은 고종이 창덕궁으로 환궁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었다.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은왕권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또한 청군이 창덕궁을 공격하기 전 청·일 간에모종의 거래가 성사되어 있었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일본 공사의 말을 쉽게 믿었던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청불전쟁 때 것도 잘못된판단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청나라는 신속하게 개입을 했다.본래는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안국동 별궁에 방화한 후 척신들이 왕이 있는 궁궐로 급히 돌아갈 때에 이들을 모두 암살할 참이었다. 그러나 방화 계획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은 즉시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하며, 일본군의 호위를 청해 경우궁으로 국왕을 모셨다. 이들은 이어 궁으로 들어오는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등 사대당 일파를 살해하고, 다음날인 5일에 각국 공사-영사들에게 신정권의 성립을 통고했고 6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했다.그러나 미처 공포도 하기 전에 김옥균의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쿠데타의 주역임을 눈치챈 명성황후가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해 주둔 중인 1500명의 청국군이 출동하여 12월 6일 오후부터 (만으로는 2일째) 창덕궁을 공격하는 바람에 궁궐은 삽시간에 전쟁터가 되었고 수적으로 불리한 급진 개화파 세력은 일본 공사가 사전 약속을 어기고 철수하자 일이 틀렸음을 알고 대거 망명한다.이 와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 조선 정부는 훗날 배상금 문제로 한성 조약을 체결한다. 더 나아가서는 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의 알력 다툼이 심해져 훗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결국 이들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갑신정변의 긍정적평가갑신정변은 시대적 과제에 충실한 개혁 내용을 담고 있었고 조선의 개화자강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흔히 갑신정변을 당대의 엘리트였던개화파 관료들이 일으킨 정치적 사건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정변 세력이포섭한 행동대원들의 다수가 상천민이었다는 의견들이 있다. 실제로 당시 정변에 참여했던 상천민의 진술을 보면, 이들 또한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열망을 갖고 스스로 나섰던 것임을 알 수 있다.또한 말그대로 온건파가 아닌 급진개혁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미온적인 발전에 비해 앞으로 조선의 경제가 성장을 이룰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가 있다.. 즉 보수적인 세력을 숙청하고 진보적인 젊은 정치가들이 집권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를 해나가기 수월했을 것이다.헐버트도 갑신정변에 대해 평가를 했는데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에게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훨씬 앞서고 있다. 조선국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돌아갈 영예가 결코 감소될 수는 없다’고 그 세력들을 옹호하는듯한 주장을 했다.당시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는데, 이러한 국제간의 구조를 이용하기 위해선 내부의 역량이 이러한 구조를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어 있어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당시에 그러한 역량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책임으로만은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냉기류가 시작되고 있던 상황인지라, 청나라의 개입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김옥균으로써는 일본을 어느 정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변을 일으켰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70년대가 특히 갑신정변이 긍정적으로 미화된 때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모델이 일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모델로 개혁하려 했던 갑신정변이 훌륭하다는 식으로 말해진다. 북한도 역사발전 모델에 따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회주의 전 자본주의 가 있는데 이 자본주의척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인 갑신정변으로 나타났다고 보여지는 것이다.*갑신정변의 부정적평가갑신정변은 우리가 독자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개입이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본세력이 청측의 견제가 되어줄거라 생각하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점이 아쉬운 점이다. 결국 일본이 한발짝 물러나며 청에 의해 진압되어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결국 일본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성공을 거둬 오래 집정을 하였더라도 일본 것이다. 갑신정변이 성공을 거뒀더라도 갑오개혁이나 을미개혁과 별다를 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일부를 살펴보면 ‘그는 일류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 그처럼 크나큰 차오를 저질렀으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어찌 일본인이 진심으로 김옥균을 성공하게 하고 성의있게 조선의 운명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우리가 만일 발전의 형세를 보이면 그들이 백방으로 방해할 터인데 어찌 원조하겠는가?,,,,, 일본이 이를 이용해서 청으로부터 독립을 권하고 원조까지 약속했지만, 사실은 조선과 청의 악감정을 도발하여 그 속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이는 김옥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김옥균은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침략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신뢰할 수 없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보조를 맞추었고 이에 거의 일본의 침략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기에 비판 받을 만한 것이다.갑신정변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 시행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시기를 거쳐 일본에 의해 미화된 것일수도 있다.게다가 이들이 세운 개혁정강에는 계급적 한계가 뚜렷이 보이고 있따. 대부분의 지주 등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이 아니라 세금개혁안인 지조법만을 내세웠다. 이들은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개혁에 차질이 생겨버렸다.갑신정변이 좌절되고 개화를 표방하는 주요 세력들이 목숨을 잃거나 국외로 축출되면서 개혁의 에너지가 한동안 사라지게 된다. 개화를 입에 담기조차 마다하게 됐다는 윤치호 일기는 갑신정변 직후의 일반적 세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을 대신하여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비수와 같은 말을 깊숙이 숨기고 있던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서 근대화를 이루어 보겠다고 기세등등한 개화파의 생각은 굉장히 위험천만해 보이는 일이었다.갑신정변의 실패는 어쩌면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었고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점, 붕당의 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