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가 이끄는 이야기의 변화, 그리고 이야기와 인간의 삶호모 나랜스라는 단어의 뜻을 아는가? 이는 라틴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이며, 이야기에는 인간의 삶,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있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이야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의 내용을 중심으로 ‘매체’와 이야기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매체는 어떤 작용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물체, 또는 그런 수단으로 정의된다. 인간은 이야기 전달에 매체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책에 따르면 매체의 시작은 구술 문화이다. 그 후 동굴 벽화로 발전했고 고대에 문자 문화가 생겼다. 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인쇄 매체를 중심으로 발전이 가속화되었고, 인터넷이 발명된 후에는 매체의 양적, 질적 변화 모두 일어났다.매체의 변화는 이야기의 특성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구전이 주된 매체이던 시대의 이야기는 즉흥성과 변화의 특징을 가졌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용이 즉흥적으로 변했고, 전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도 했다. 문자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고유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기록해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책, 신문 등 인쇄 매체를 통해 이야기의 접근성이 높아졌고 정보의 향유자가 늘었다.또한 디지털 매체는 이야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SNS, 동영상 플랫폼 등 수많은 매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형태 또한 글뿐 아니라 이미지, 동영상, 숏폼 콘텐츠 등으로 다양해졌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발전은 이야기의 경향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 인해 스스로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많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책에선 이를 자기 서사라 표현한다. 우리가 SNS 등에 게시한 사진 모두가 자기 서사 과정이며, 스마트폰이라는 매체의 전면 카메라를 활용한 셀피도 게시자의 특정 의식 상태를 전달하므로 일상의 서사적 단편이 된다.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이야기의 특성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야기의 형태와 특성이 어떻게 변화할까? 일단 스마트폰이 발명되고 SNS가 매체로 사용되면서 자기 서사가 이야기를 주도했듯, AI의 발전으로 새로운 기술과 주인공이 이야기를 주도할 것이다. 챗GPT의 출시로 생성형 AI시대가 열렸고, 이 AI는 창작을 할 수 있어 다양한 콘텐츠 생성이 가능하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류하는 수준을 넘어 원하는 사항을 입력하면 서사를 담은 글, 비디오 등의 결과물을 생성한다. 즉, 지금까지는 이야기의 생산자가 인간이었다면, 인공지능 시대에는 AI도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활용한 VR, AR을 매체로 해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이는 게임 같은 인터넷 매체와 결합해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기술들은 상호작용적, 비선형적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참가자는 선택을 통해 이야기 전개를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 선택별로 다른 결말을 확인해 여러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또 이야기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융합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AR은 실제 장소에서 가상 존재와의 이야기 진행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예시로 포켓몬고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의 사용이 보편화될수록, 이야기 형태도 다양하게 변화할 것이다.구술 문화에서 시작해 문자, 인쇄, 디지털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는 이야기의 특성과 형태에 계속해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생성형 AI, VR, AR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가 등장할 것이며 이는 우리의 호모 나랜스 본능을 더욱 충족시켜줄 것이다. 우리는 늘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며, 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변화는 곧 인간의 삶과 세계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의의를 갖는다.
유전자와 좋은 삶: 상호작용하는 미래의 지표들유전자와 인간의 관계는 전부터 모든 분야에서 큰 관심을 갖는 사회적 논제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는 에서 유전자는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존재이고, 유전자로 구성된 인간도 이기적인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요아힘 바우어는 를 통해 반대 의견을 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유전자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 말했다. 그럼 유전자는 인간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에서 말하는 좋은 삶과 유전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 유전자가 사회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이 책에서 저자는 ‘좋은 삶’을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는 자발적인 삶으로 정의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현실에서 행위자가 올바른 판단, 좋은 품성을 수행함으로써 실현 가능한 인간적 선’이다. 인간은 의미 지향적인 삶, 사회 친화적인 공존의 삶을 살도록 정해진 존재이고, 둘을 합친 것이 좋은 삶이다.저자는 유전자를 피아노 건반에 비유해 우리가 유전자라는 건반을 연주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유전자를 조절하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세대 교류 프로그램은 인간은 타인을 자발적으로 도울 때 삶의 질이 향상되며 자신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과 타인을 대하는 내면의 태도가 유전자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좋은 삶을 살면 유전자도 영향을 받아 좋게 변화한다는 것이 ‘좋은 삶’과 유전자의 관계이다.좋은 삶을 살기 위해선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행복을 확인하므로 타인과 단절된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이는 현대 사회의 문제인 노인 소외, 차별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을 인터넷으로 대체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노인들은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며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소외와 차별을 받는다. 예를 들어, 전에는 가게에서 직원이 주문을 받고 응대했다면, 지금은 대부분이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다. 전의 방식에 익숙했던 노인들은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느끼게 되었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개인적 측면의 노력은 고령층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 관계의 장을 만드는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있다. 또 전자기기 사용법에 대해 알려드려 정보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사회적 측면으로는 정부가 시행하는 디지털 포용 정책이 있다. 주민센터 등 접근성이 좋은 곳에서 디지털 역량 강화 교육을 진행해 고령층이 사회에서 소외와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또 노인 일자리를 확대해 그들이 주변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 문제의 대안이 될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적 태도가 내면화된 노인은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보호된다. 따라서 그들이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을 더 강구해야 한다.초반에 유전자는 인간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유전자는 공존의 삶, 의미 지향적 삶인 좋은 삶에 영향을 받는다. 유전자와 인간의 삶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인 것이다. 좋은 삶과 유전자는 사회적 관계를 맺어 공동체와 연대할 수 있게 하며, 현재 우리 사회의 소외, 차별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지표 역할을 한다.
유토피아는 과연 진정한 이상향일까?모두가 평등하고,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는 곳. 누구나 꿈꾸는 이상향일 것이다. 16세기 정치가이자 작가인 토마스 모어는 이러한 곳에 이름을 붙여 세상에 알렸다.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없다’를 뜻하는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를 조합한 단어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좋은 장소’를 의미하는 ‘Eutopia’와 발음이 같다. 즉,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곳을 의미한다.토머스 무어의 책 ‘유토피아’에서 묘사되는 이 곳은 모두가 사유재산이 없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을 하며, 모든 공간을 공유한다. 남녀노소 전부 농업에 종사하고, 10년에 한 번 추첨을 통해 집을 바꿔 생활한다. 오전에 3시간을 일하고 2시간 휴식을 취하고, 3시간을 마저 일한 뒤 식사 후 8시부터 8시간 취침을 하는 생활 패턴도 동일하다. 모두가 사치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을 하며 과소비를 하지 않고, 모든 게 풍족하다. 학자들은 일을 면제받는데,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시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고, 일반 시민이어도 여가 시간에 연구해 훌륭한 성과를 내면 학자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이를 통해 유토피아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평등’임을 알 수 있다. 모두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공유함으로써 같은 조건에서 생활해 모자람과 부러움이 없는 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 유토피아의 지향점인 것이다. 그런데 난 이 곳이 진정한 이상향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라가 중시하는 관념 속에 갇혀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행복한 삶이라고 세뇌당하고,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사는 건 아닐까?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도 평등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이지만, 보편적으로 중요시되는 가치 중 하나에는 다양성도 있다. 유토피아처럼 모두가 같은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과 사고 방식, 취향이 있으며,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도 주어지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유토피아가 모두를 위한 이상향이라고 한다면, 이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며, 유토피아처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최고 효율의 일을 한 후 정신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유토피아의 반대 용어는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이는 전체주의적 정부에 의해 억압받는 세상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을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상으로,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읽으며 유토피아에서 전체주의의 면모를 느꼈다. 책에 ‘이 나라의 최고 목표는 공공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라는 서술이 있다.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럼 유토피아도 결국 집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모두가 개성을 잃은 유토피아는, 어쩌면 전부 자유를 상실한, 속박된 존재로 살아가도록 유도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현실에서 유토피아를 실현하려 한다면, 결국 디스토피아로 귀결될 것이다.유토피아에서는 결핍을 경계하고, 모두가 평등하며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 그러나 행복은 결핍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결핍이 존재해야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단어의 어원처럼 유토피아는 이상향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바람직해 보이지만, 불완전하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약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고찰들이 모여 세상을 Eutopia로 만들기 위한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 ‘유토피아’가 시사하는 바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한 관찰, 그리고 성장우리는 모두 살면서 무언가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강낭콩을 키워 살펴보았다거나, 버스를 타며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보았다거나,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밤하늘을 보았다거나. 이 모든 경험은 무언가를 관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하는 관찰은 이와 다르다. 무언가를 그저 ‘살펴본’ 경험은 관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관찰은 무엇일까?에서는 관찰을 수동적으로 보기만 하는 행위와 구분하고 있다. 그저 대상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정보를 사용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관찰, 즉 적극적인 관찰이라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라고 말했다. 또 저레드 다이아몬드는 새를 관찰할 때 시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만 듣고도 그 종을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적극적인 관찰은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된다.난 이 책에서 말하는 ‘적극적인 관찰’을 실천해 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주의력을 집중시키고, 모든 감각 정보를 동원하여 대상의 의미와 본질을 찾으려 했던 경험이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니, 나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17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을 시절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즉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 나는 적극적인 관찰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무슨 버릇이 있는지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고, 눈뿐만 아니라 귀로도 주의를 기울이는 등 모든 감각기관을 활용해 관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관찰할 때는 오로지 관찰에만 집중했으며, 그가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관찰해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아름다움을 찾았다. 이 경험을 생각해 보니, 관찰은 확실히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찰을 하기도 하지만, 나에 대해서도 관찰하게 된다. 난 어떤 사람인지, 무슨 말을 자주 사용하는지 등 나를 되돌아보는 관찰을 하게 된다. 이때 자신이 하는 관찰은 적극적인 관찰이기도 하고, 성찰이기도 하다. 의 저자는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관찰’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를 우리의 삶으로 확장하면, 관찰은 자신에 대해 더 잘 알도록 해주고, 내적으로 성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삶에서의 관찰의 가치이자, 미덕인 것이다.내가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생활 속 관찰의 예시는 진정한 관찰이 아니다. 그저 대상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진정한 관찰은 내가 사랑을 경험했을 때 느꼈던 것처럼,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는 상태에서 대상의 의미와 본질을 찾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의 내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 내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우리 삶에서 관찰의 가치이다. 이제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대상을 그저 인식하고 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를 적극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