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벳에서 7년 -한창 영화에 빠져있던 시절.(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을 때 이 영화를 보았다. 처음 눈에 들어 왔던 것은 물론 “브래드 피트” 그 다음 들어 온 것은 “티벳”이라는 곳. 영화를 보며 차차 달라이 라마와 티벳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시간이 흘러 다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의 시선은 그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먼저 극 중 하러의 등산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에베레스트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 산을 그 시절 오르려 했던 사람의 용기와 패배가 보였으며 내가 상상하는 그 고단함이 도를 넘어 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하러라는 극중 인물과 달라이 라마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중국과 티벳의 분쟁에 대해서는 크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티벳의 멋진 풍경을 다시 한번 맛보았는데 그 푸른 하늘과 자연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주목해서 본 것은 내가 좋아하는 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이다. 이 등산가 하러와 다라이 라마는 어떻게 만나서 관계를 키워가는가. 낯선 이방인과 티벳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로만나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된다. 처음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서구문명을 알려주는 하러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달라이 라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욕심을 버리고 가족을 생각하고 나를 버리고. 하러의 지금까지의 모습에서는 절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고 실천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끈끈한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또 한 가지. 중국과 티벳의 갈등. 그 속에서 보여 지는 슬픔.영화가 인물들과의 관계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영화의 배경이 되어지는 역사적 시대를 깊게 말하지 않음)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들이 배경지식이 없어도 부담 없이 볼 수 있으나,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으며, 작가나 작품, 시대별로 줄줄줄 알고 있지 않다. 이론적인 면은 중?고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들은 것이 전부였으며(그나마도 시험 때 달달 외웠던 것이다.) 간혹 가고 싶은 전시회가 있으면 찾아가 보는 정도이다.이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작가도 이번 강의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전시회에 가는 날은 날씨가 좋았다. 오랜만에 미술관에도 가고 게다가 날씨까지 좋은터라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이미 강의시간에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보고, 교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은 터라 나는 작품을 보려고 했다. 하나하나마다 직접 그 작품 앞에서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느낌이나 천천히 둘려보면서 드는 느낌과 생각들. 그런 것을 소중하게 느끼고 싶었다. 책자나 화면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손대고, 열정을 담아냈을 작품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역시나 그 전과는 달랐다.처음 초상화나 풍경화들은 이 작가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약간은 어두워 보이는 전체적인 느낌과 동등하게 하기 위해 흐릿하게 그린다는 작가의 말에 작은 충격이 왔다. 동등하게 하기 위해 흐릿하게 그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상에 남은 작품들로 숲속의 연인과 바다풍경은 잊지 못할 것이다. 숲속의 연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내 마음은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곧 작품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어둠을 보았다. 시대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표현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바다 풍경 역시 전체적으로 음울한 냄새(냄새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난 작품을 처음 보자마자 어두운 하늘을 품고 있는 바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를 풍기고 있었는데, 바다의 거대함과 하늘의 거대함을 맞물려 표현한 작가의 위대함, 거기에 그 섬세한 모습. 눈을 뗄 수 없었다.추상화들 중에 내 시선을 잡았던 그림은 강의 시간에 들었던 올빼미와 가건물이었다. 올빼미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한 작가의 그 능력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시각. 미술작품은 나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라게 한다. 가건물 앞에서 멈춘 내 발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라 함은 나는 원래 추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작품은 달랐기 때문이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이것은 가건물이고 저것과 대칭되는 것 같고... 이런 식으로 작품을 감상했다. 이로써는 나에게 처음 있었던 일이다.
* 우리나라의 환율제도 *1.1945 ~ 1964 : 고정환율제도고정환율제도(fixed or pegged exchange rate system)는 정부가 특정통화에 대한 환율을 일정수준으로 고정시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제도. 실제로는 균형환율을 기준으로 상하 소폭적인 범위 내에서 환율변동을 허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고정환율제도하에서 환율을 고정시키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환율변동폭 자체를 고정시키는 경우, 환율을 절대수준(absolute level)으로 고정시키는 경우이다.?1945년 10월 미군정의 공정환율 시행?1948년?2월 외환의 자율매매율의 성립?1949년?6월 공정환금률과 일반환금율로 구성된 복수환율 제도 채택?1951년, 1964년 두차례의 통화개혁2.1964 ~ 1980 : 단일변동환율제도단일변동환율제도는 달러당 255원을 하한으로 하는 단일변동환율제도. 외환증서제도를 도입. 취지는 고정환율이 실세를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즉 환율을 외환시장에서 외환증서의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률로 결정되도록 유지하는 것이다.?1964년 5월 3일 달러당 255원을 하한으로 하는 단일변동환율제도 채택?1974년 12월 7일~ 1980년 2월26일 한국은행 개입의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도채택3.1980 ~ 1990 : 복수통화바스켓제도복수통화바스켓제도는 SDR바스켓에 의한 원화의 대미 달러화 환율과 독자바스켓에 의한 원화의 대미 달러화와 환율을 산출한 후 이 두 개의 환율을 기준으로 한국은행 총재가 내외금리차, 내외물가상승률차, 외환시장전망 등을 감안하여 당일의 한국은행 집중기준율을 결정 고시하는 제도.환율결정공식 :ERt = β*SDR바스켓환율 + β'*독자바스켓환율 + αtERt는 t기의 원화의 대미 달러화 환율을 나타내며, β와β' 는 각각 SDR바스켓과 독자바스켓의 가중치로서 β+β' =1이 된다. αt 는 t기의 실세를 반영하기 위한 장치로서 정책변수를 의미한다.?1980년 2월 27일을 기해 복수통화바스켓제도를 채택4.1990 ~ 1997 : 시장평균환율제도시장평균환율제도는 전일 은행간 시장에서 거래된 현물환율 금융결제원의 자금중개실을 경유한 은행간 외환거래량으로 가중 평균하여 산출하는 원화의 대미 달러화 환율을 말한다. 이는 당일 외환거래의 매매기준환율이 된다.은행간에 거래되는 환율의 일일변동허용폭은 시장평균환율의 상하 2.25% 이내에서 거래당사자인 은행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대만이 한때 시행했던 중심환율제도와 유사한 환율제도인 데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조치이다5.1997 ~ 현재 : 자유변동환율제도변동환율제도(floating or flexible exchang rate system)는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외환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제도를 말한다. 변동환율제도도 환율이 자유롭게 결정되느냐 아니면 중앙은행이 어느 정도는 개입하느냐에 따라 순수변동환율제도와 관리변동환율제도로 구분된다.순수변동환율제도clean-floating exchange rate system는 중아은행이 외환시장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오직 외환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환율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경우이다.관리변동환율제도managed or controlled floating exchange rate system는 장기적으로는 환율이 외환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허용하나 단기적으로는 중앙은행이 환율의 지나친 등락을 방지하고 환율변동의 속도를 완화할 목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형태로 환율을 관리하는 제도이다.1997년 12월 16일 일일환율변동폭 ± 2.25%로 유지하는 자유변동환율제도 시행6. 현 환율정책의 목표현재 자유변동환율제도(free floating exchange rate system)하에서는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완화하는 것이 환율정책의 목표이다.외환위기 이후에는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를 도입하여 통화정책을 운용함에 따라 물가와 환율을 조화롭게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가안정목표제란 중앙은행이 명시적인 중간목표(통화, 환율 등) 없이 운용목표(콜금리)의 조정을 통하여 사전에 설정된 물가목표를 직접 달성하고자 하는 통화정책 운영체계를 말한다. 여기서 조화롭게란 자본이동 자유화, 환율목표제(고정환율제),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동시에 달성 불가능하다는 3원체제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le trinity)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다.잠시, 아시아 주요국의 환율제도를 살펴보면 자유변동환율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 일본, 필리핀이 있고, 관리변동환율제도는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는 홍콩이 채택하고 있다.한국은행은 기본적으로 외환수급사정 등 기초경제여건과 국제통화시세 등 시장원리에 의해 환율이 결정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시장참가자들의 과도한 일방적 기대심리, 일시적 수습불균형 등으로 환율이 급등락할 경우에는 smoothing operation을 실시한다. 한편 대외충격이 발생하더라도 환율의 왜곡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외환시장의 질적ㆍ양적 발전을 도모한다.- 외환시장의 발달은 환율안정, 다양한 해지수단 제공, 금융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 등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외환시장 참가자로 구성된 외환시장운영협의회를 통해 시장제도 및 거래관행의 개선*을 유도한다.*개선이라 함은 외환거래의 현물환 결제일을 국제거래 관행에 맞게 익익일로 단일화(2002.8월),외환시장의 개장 및 폐장시간을 자본시장과 일치(2005.3월), 새로운 환율호가제도 도입(2006.2월) 등이 있다.- 파생상품거래 활성화 등으로 외환시장의 확대 및 발전을 도모한다.7. 현 환율정책의 수단환율정책의 목표 달성을 위한 대표적인 수단은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이다.외환시장개입(intervention)이란 통화당국이 환율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외환시장에서 자국 통화를 대가로 외화자산을 매입 또는 매각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황제‘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영화’라는 주제를 놓고 한참동안 생각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꽤 많이 보았지만 단편적인 느낌만으로 “좋다, 나쁘다”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좋다고 느낀 영화들 중에 하나인 마지막 황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마지막 황제를 처음 본건 아직 어렸던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한창 TV, 영화, 연극 등 여러 문화에 관심이 많았을 때로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편씩 영화를 보곤 했었다. 방학 때는 하루에 두 편씩 보기도 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오락영화 뿐 아니라 장르 구별하지 않고 모두 보았는데 ‘티벳에서 7년’도 이때 보았던 것 같다. 중국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3시간동안이나 계속 되는 이야기는 나에게 지루함을 주었다. 하지만 중간에 끊지 않고 계속 보게 하는 재미도 있었다.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이때 나는 주인공 푸이가 ‘불쌍하다, 안됐다.’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그 후로 시간이 꽤 흐르고 대학에 들어와서 다시 한번 마지막 황제를 보게 되었다. 이때 영화는 나에게 많은 생각과 인식을 갖도록 만들었다.나는 마지막 황제가 중국 영화인줄로만 알았다. 즉, 이 말은 중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이 영화는 1987년 홍콩에서 제작되어진 영화로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감독의 작품이었다.감독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베르톨루치는 1960년대부터 영화역사를 개척해 온 현대영화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자이다. 오손 웰즈, 페데리코 펠리니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하고도 화려한 스타일로 60년대의 유럽예술 영화의 뛰어난 수사학을 보여주고 있다. 1973년 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작)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다뤄 외설시비를 낳으며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베르톨루치 감독은 청나라 12대 황제 푸이의 일생을 그린 1987년 작 마지막 황제가 감독상, 작품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 9부문 후보, 전 부문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한다. 그 후 데보라 윙거, 존 말코비치, 로버트 드 니로, 제레미 아이언스, 리브 타일러 등 최고의 배우들과 활발한 작업을 해왔다. 그의 최근 영화인 2003년 작 몽상가들을 통해 감독은 세 명의 젊은 배우와 함께 ‘청춘’의 꿈을 말하기 위해 돌아 왔다. ‘미래와 자유를 향해 뛰어드는 환상적 경험’을 다룬 몽상가들은 베르톨루치 감독이 끊임없이 추구해 오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춰 만든 작품이기도 해, 40년간 펼쳐 온 그의 사상과 미학이 접점을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몽상가들은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여러 의견에 둘러싸여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몽사가들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난 영화를 볼 때 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판단은 아직 보류로 남겨 놓고 있다.다시 마지막 황제로 돌아가 영화의 내용은 1950년 하얼빈 역. 44세의 푸이는 소련군의 감시 아래 중국인 전쟁범 800명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허름한 감옥에서 자기의 굴곡 많은 생애를 기록하며 황제였던 과거를 회상한다. 자식이 없는 광서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부의는 즉의 했을 때 겨우 4살. 그는 황제 즉의식 때도 많이 모인 사람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어린애였다. 푸이는 즉위 3년째 신해혁명을 당해 궁중에서 쫓겨나 자금성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결혼을 하고 시대 상황을 깨닫고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받은 영향을 영어를 배우면서 영국으로 유학살 꿈에 부푼다. 그러나 1924년 다시 군사 쿠데타에 의해 일본으로 피한 푸이는 유학에의 꿈을 접고 일본 특무기간원의 감언에 넘어가 만주국의 집정이 되어 2년 뒤 황제로 등극한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하고 부의는 일본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공산국가로 변한 중공으로 이송되어 형기를 마치고 평범한 노인이 되어 쓸쓸한 생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여기서 나오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보았다.먼저 푸이가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 신해혁명.청조는 이미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그 이전부터 열강 및 일본의 침략으로 말뿐인 강대국이 되어 있었으며 위신 또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개혁도 실패하였고 게다가 1901년 의화단운동조차 실패로 끝나자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에 청조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런 가운데 이미 오래전부터 삼민주의를 표방하고 공화국 설립을 주장한 쑨원은 회복중화, 창립민국, 평균지권 등 명분을 내세워 청나라 타도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와 중에도 청조는 벨기에 소유의 철도를 국유화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여러 곳에서 혁명군의 봉기가 일어나 청조의 마지막 수호자 원세개마저 등을 돌렸다. 그로 인해 청조는 망하고 2천년의 군주제역사는 종식되어 민주국가가 설립되지만 혁명에 동조했던 원세개가 돌연 반기를 들음으로써 청조의 멸망은 새로운 역사이면서도 혼란기를 야기했다.두 번째 만주국.1932~1945년 일본이 중국 둥베이 지방에 세운 괴뢰국가로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하였다. 그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고, 청조의 폐제 푸이를 집정에 앉혔다. 수도는 신경(지금의 장춘), 연호를 대동이라 하였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에스파냐 ·헝가리 ·폴란드 등의 일부 국가가 승인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은 러허작전으로 청더가 점령됨으로써 국토는 랴오닝 · 지린 · 헤이룽장 · 러허의 4성, 인구는 3000만에 이르렀고, 1934년 3월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은 일본 ·조선 ·만주 ·몽골 ·중국의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표방하였으나,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였고, 중국인의 국무총리 및 각부대신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또 경제면에서도 일본인의 만철이 전철도를 경영하고 닛산 콘체른이 진출하여 개발사업을 독점하였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푸이가 잡히고 만주국도 무너졌다.덧붙여 이 만주국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았다.친일 만주국의 등장은 식민치하의 조국을 등지고 만주, 즉 둥베이에 근거를 잡은 200만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였다. 또한 만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도 큰 타격을 주어 무장 독립군은 최후의 거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만주국 출범 직후 만주 곳곳에는 의적을 자처하는 일본의 낭인배들이 횡행하여, 반만 · 항일의 기치를 들거나 배일 부락으로 지목되는 곳에는 반드시 그들이 나타나 방화 ·약탈 ·살육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친일 중국인으로 조직된 ‘대도회’ 등 테러 단체는 일본 낭인배의 행패를 한국인의 소행이라 선전하면서 창 ·칼로 한국농민을 살상하였는데, 관동군은 이들 낭인배 ·테러단을 조종하였다.또, 일본은 관동군 ·만주국군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한국독립군을 몰아내면서 테러단을 조종하여 벽지의 한국 농민을 살육하는 정책을 썼는데, 초기에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전투에서처럼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차차 근거지를 상실하여 국권피탈 후 20여 년 간 무장독립항쟁의 기지였던 만주를 버리고 중국본토로 그 근거지를 옮겨야만 하였다.우리 나라 근대사와 연결해 보면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친일 역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만주국 장교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만주국 군인들은 독립군을 탄압했고, 박정희 역시 그랬으리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영화는 이탈리아 출신의 감독, 아메리칸-차이니즈 배우, 미국 자본,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스텝진, 이 정도면 다국적 영화의 제왕자리를 차지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이 영화에 손을 안댄 대륙이라곤 아프리카와 두 극대륙 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 좌파 성향의 영화를 만들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유럽의 정치 역사에 가졌던 관심을 중국이 공산화되던 19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격변의 시대로 옮겼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영화가 곧 정치라고 바라보던 베르톨루치는 정치 색깔은 뺀 채 한 인간의 굴곡 많은 인생을 철저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그가 생각한 푸이는 시대가 낳은 희생물에 불과했고, 전제 정치의 최고 자리에서는 제대로 자신의 뜻조차 품지 못하다가 혁명에 의해 중국이 해방되고 공산 정권이 정착해 평범한 인민이 되면서 평온을 얻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진정한 푸이의 모습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 져야 할 한 인간의 공적 역사가 베르톨루치의 사적인 감상주의로 흐르게 된 건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농노-놀랐다. 지금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9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처음이었다. 1960년대 영화를 본 것은. 놀란 이유는 여러 가지이었지만 그중에 그 흑백과 더구나 티벳영화 중에 그렇게 오래 된 영화를 본 일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시대이고, 나라가 나라인 만큼 영화는 재미보다는 다른 의미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농노는 홍하곡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은 영화이다. 티벳영화이고 여전히 신분차별이 존재 한다. 그러나 흑백영화이고 홍하곡보다는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만큼 영화적 기법은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따라서 농노에서는 티벳의 멋진 자연환경이라든지 그 푸르른 색채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상황에서 영화는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영화는 계급모순을 강조한다. 얼마나 억압 받았으며,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며 인민해방군이 티벳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말하고 있다. 주선일 영화로써 중국의 사회주의, 민족 단결을 더 굳건히 하기 위한 국책영화이다. 중국의 지배논리와 이 당시 티벳의 현실, 나아가 당시 동아시아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황하곡은 여성혁명과 민족모순을 강조하였지만 농노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계급모순을 강조한다. 이것은 이 두 작품의 대비되는 점이다.농노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집중한다.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주위 배경(풍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농노를 짐승 취급하는 장면은 극대화 하여 보여 지는데 주인공 남자가 귀족이 말을 탈 때 등을 구부리는 것이 잊혀지질 않는다. 아무래도 중국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쇠사슬을 끊는 장면은 농노가 해방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김산이 다큐를 처음 보고 난 내 느낌은 아쉬움이었다. 광복 60년을 맞은 지금, 아직도 우리가 다 알아보지 못한, 찾아내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우리나라에서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면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런 독립 운동가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작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민족이지만 사상적인 면에서 다른 면을 가졌을 뿐인데(그것도 특수한 우리 나라의 상황 때문에) 그 사람들이 가진 다른 훌륭한 점과 업적,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근래에 들어 우리 남한의 작가들과 북한의 작가들의 만남이 주선되고 서로의 작품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어 이 또한 민족 교류와 앞으로의 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사상이 달라도 같은 민족이기에 우리 민족의 뿌리는 하나이다. 김산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행한 많은 훌륭한 일들이 공산주의라는 것만으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이전까지는 김산이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큐를 보고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김산이라는 인물은 어린나이에 험난한 삶을 시작해 마지막까지 편안한 시간을 맞이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아, 님 웨일즈를 만났을 시간은 조금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에도 김산은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김산의 삶을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조국을 잃고 그 험한 압록강을 건넜으니 그 어린 아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처해있는 상황과 시대가 그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그렇고, 그때 김산이 살았을 시대 역시 그랬을 것이다. 물론 김산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이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험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김산의 생애를 쭉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의 활동들, 모진 고문을 이겨낸 시간,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도 다시 일어난 그 강한 의지. 자신이 원하고자 바라고자 했던 바를 이뤄내기 위해 그가 행한 노력들. 과연 나는 지금의 내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꼭 그가 행한 독립에 대한 일들이 아니라도 그가 가진 배움에 대한 열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많은 것을 느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 하는 것에 대해 뛰어들고 책임지는 그런 모습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청렴하게 살아간 그 젊은 남자를 본받고 싶다.
1. 축제의 개념축제는 하나의 이벤트이다.이벤트는 주민에 대한 레저, 문화적인 기회제공, 지역개발 촉진, 비영리조직의 기금마련, 관광 진흥, 도시상징성 제고, 좋은 공공관계 및 이미지 창출 도구로써 대중적인 인식과 호응을 받으면서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 집중적으로 경주되는 가운데 널리 이용되고 있다.이벤트의 사전적 의미는 “우연히 발생한 것, 사건, 경과, 실행, 스포츠 종목, 더 나아가서는 특별한 사건”을 뜻하며, 현상적 의미로는 “사람들을 모이도록 모임을 개최하는 일”로 해석한다. 여기서 사람들 모임은 인간본능에 근거한 것이며, 모임 속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찾아내려고 함을 뜻한다.따라서 이벤트 개념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구경거리, 비일상적인 특별활동, 곧 이슈가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벤트는 기존에 있는 것이나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닌 특별한 하나의 막중한 의미이고 행사와 의식이 진행되는 독특한 순간이 특별한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기쁨과 재미, 감동과 의미를 창출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다.또한 방문객의 입장에서 이벤트는 일과성 또는 정규적인 범주를 넘어선 레저, 사회문화적 경험의 기회이다. 이와 같은 이벤트의 비정규성 또는 단속성은 이벤트를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이벤트는 축제, 특별한 이벤트, 대형 이벤트 등의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다시 말해 이벤트는 이러한 축제적인 요소들이 특정의 주제를 향하도록 고도의 노력을 집중시켜 조직화하는 행사이다.2. 축제의 경제적 파급효과2.1 축제로 인한 경제의 활성화 : 직접적 효과각 나라, 근래에는 지자체마다 개성을 찾고 역사를 찾아 이것을 문화산업과 연계시키는 것은 경제기반의 강화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과거 지역민이 결속력 강화라는 원초적 의미가 산업화 사회로 이전되면서 축제 역시 자본의 논리와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가 창출하게 되었다. 즉 축제의 현대적 의미가 자본의 논리와 새롭게 결합되면서 더 이상 주민들의 실생활을 담아내지 못한 채 들이 이곳에 중동철로를 건설하자 30여개 국가의 16만여 외국인 거주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전례 없이 번성하여 하얼빈은 당시 동북아의 가장 부유하면서 유명한 국제 상업도시가 되었다. 중국과 서방문화가 이곳에서 연결, 융합하였고 그런 독특한 문화는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하얼빈은 매우 많은 유럽식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어, 중앙대로를 따라 이어진 1400미터의 긴 거리에는 배전정풍, 바로크풍, 르네상스풍 등의 다양한 정교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여전히 늘어 서있다. 이런 풍경으로 하얼빈은 "동방의 작은 파리" , " 동방의 모스크바: 라는 애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하얼빈은 중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로 겨울은 길고 여름은 짧으며, 그 짧은 여름도 덥기보다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꽁꽁 얼은 강풍이 불어와 빙설(氷雪)문화가 오랫동안 발전하여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얼음 도시(氷城)"로 빙설관광, 피서관광 등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아시아 최대의 빙설성지가 있어 야부리 스키 리조트및 얼롱산 스키장 등 최신설비가 갖추어진 훌륭한 대형 스키장이 많으며, 위취안 수렵장등의 수렵장, 동북아시아 호랑이를 야생 사육하는 동북호림원 등의 쉽게 볼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들도 있다. 무엇보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하얼빈 빙설제"때는 얼음과 눈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빙등제가 열려 관광객들로 하여금 그 화려함에 넋을 잃게 만든다.특색 있는 빙설자원과 광활한 산천호수, 역사가 만들어준 유럽풍의 이국적 건축물들은 하얼빈을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속 도시로 만들어주고 있다.5.2. 하얼빈의 민족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 어룬춘족중국 동북 흑룡강 부근 산림에 거주하고 있는 어룬춘은 그 이름에 있어서 두가지 해석이 있다. 첫번째는 '순록을 타는 사람들' 이고, 둘째는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의 견해를 지지한다.총 인구는 약 7,004이고 알타이어계, 만-퉁그스어족에 속하고 있다.*역사1903년 중동철로가 개통되면서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오게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멀리 고향을 떠난 사병들의 군심을 달래기 위해 1907년 나무 구조로된 병사들을 위한 군 예배당으로 성소피아 성당을 건축하였다.이후 1923년 9월 27일 재건축을 위한 시공식을 열고 장장 9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공사로 화려하면서도 전아한 건축예술품 성소피아 성당이 재탄생하였다.5.3.3. 아픈 역사가 담긴 731부대 유적지(日軍 第731部隊 罪證陳列館)1939년 이시이 시로가 창설한 생화학 실험 기지로, 하얼빈 근교에 위치해 있다. 생체실험 대상은 주로 한국, 중국, 러시아, 영국 포로들이었다. 전쟁 기간동안 이곳에서 실험으로 희생된 사람 수는 약 4,000명에 이른다고 한다.이 부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초 한 일본기자에 의해서이며, 그 이전까지는 의학실험 자료를 건네받는 대가로 이시이 시로의 만행을 면죄한 미국만이 알고 있었던 극비사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한다.5.3.4. 태양도(太陽島)풍경구태양도풍경구는 하얼빈시의 송화강(松花江) 북쪽 끝에 위치하는 섬으로 스탈린공원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호방한 풍경을 가진 북방 평원의 특색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이곳은 중국 국내외에 잘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하얼빈의 시민들은 야유회나 물놀이, 소풍장소로 즐겨 찾고 있다. 80년대 초반에는 중국의 유명한 가수 정서란이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태양도 풍경구는 태양도와 부근의 여러 섬, 사주(沙洲)가 조성하는 유락,피서지로 워터월드가 유명한 곳이다. 섬에는 수각(물가의 누각)과 두루미 군, 사슴, 제방 위의 수양버들 등 20여개의 경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유람구 내에는 태양산, 태양호, 연꽃호수, 자매교, 정교, 백옥교, 상오교, 수각운천, 어린이 낙원, 정향원, 화초원, 태양도 지석등 강을 따라서 수십여개의 특색있는 풍관이 펼쳐지면서 주변 산, 호수 등 자연환경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5대학, 하얼빈 기차역, 하얼빈 박물관, 추림 비즈니스 빌딩, 하얼빈 국제 전람센터, 하얼빈 공업대학 등 하얼빈의 주요 관광지와 중심명소 등을 모두 지나칠 수 있다.*과과리대가(果戈里大街)하얼빈에서 러시아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상업거리로 이곳의 가장 큰 볼거리는 러시아식 궤도전차와 그리스 정교회 예배당광장이다. 남강구(南崗區)에 자리하고 있다.5.3.7. 문묘 (文廟 : 원미아오)하얼빈시 남강구(南崗區) 동대직(東大直)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문묘는 1926년에 지어진 공자 사당으로 흑룡강성에서 현존하는 고건축물 중 가장 옛모습 그대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인 동시에 동북지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자 사당이기도 하다.사당의 모든 구조는 남북향에 삼진(三進) 정원을 갖춘 전형적인 청대 건축풍격을 따랐다. 전원(前院)은 입구 정원으로 정원 내에는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있으며, 붉은 담장이 그 주위를 두르고 있다. 중원(中院)은 문묘의 중심으로 정전(正殿) 대성전(大成殿)이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있는 공묘 대성전(大成殿)의 9칸 규모를 넘는 11칸(9당 2실)의 방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전내에는 공자와 사배(공자의 좌우에 신주가 모셔진 4명의 현인)의 위패와, 12명의 성현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대전 양편으로는 공자의 제자들의 위패가 있다. 정원의 동남쪽 끝에는 중국의 유명한 장군인 장학량이 쓴 가 쓰여진 비석이 서있다.1985년에 이곳에 흑룡강성 민족박물관이 세워졌고, 현재는 주 건축물들이 수리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5.3.8.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극락사(極樂寺 : 지러스)하얼빈시 남강구(南崗區) 동대직(東大直)거리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극락사는 1924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924년에 완공된 흑룡강성 최대 규모의 근대 불교사원이다. 동북3성(길림성,요녕성, 길림성)의 4대 불교사찰(장춘의 반약사, 심양의 자은사, 영구의 릉엄사)중 하나이다.산문(山門),종루(鍾樓),천왕전, 대웅보전, 삼성전, 동서배전 으로 이루어진 극락전시회 뿐 아니라 꽁꽁 언 송화강 위에서 각종 빙상경기를 펼치며 빙설제 문화의 밤 등 문화행사 등이 열리고 있다.빙등제의 전체 행사 공식명칭은 '제x회 하얼빈 빙설대세계'라고 표기를 하며(빙등제라고 하는 것은 이 빙설대세계 행사의 한 부분이다.)올해는 1월 5일 오후 4시 30분, "세계 디즈니 빙설락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위원장 리펑이 빙설대세계의 개원 버튼을 누르며 행사가 개막되었다. (중국 전국 동계체전도 이 행사와 병행하여 하얼빈시 빙구관-아이스하키장에서 열렸다) 보도 발표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를 비롯하여 51개 국 주중국 대사, 국제조직대표, 우호도시대표단 대표, 국내외 80여 개 매체의 기자 등이 개원식에 참석하였고, 개막 첫날 참관인원은 5만명이 입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올해 행사의 경우 얼음사용량이 12만입방미터, 눈 사용량 10만입방미터, 각종 전시제품은 약 2000건, 참여항목은 20여종으로 전년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며, 이 행사장내에는 각 대륙별 풍정을 기초로한 유럽, 러시아, 중국 원림 등등의 8개 풍경구를 설치하였었다. 지난해 빙설축제기간동안 하얼빈 태평국제공항으로 중국 남방지역과 러시아, 일본, 타이, 싱가포로 등 국가에서 전세기를 취항하였으며 대만관광객만 약 6만여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부대행사인 빙등예술제는 올해로서 제 29회를 맞았고, 눈축제는 19회를 맞았다.하얼빈시는 자체적으로 홍보팀을 구성하여 빙설관광을 브랜드로 내세워 중국내 10여개 남부지역의 성과 멀리 유럽지역에까지 직접 빙등 관광 홍보를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효과가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이 빙설제를 본따서 중국 동북지역의 도시에서 공원등지에 얼음 조각과 빙등을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빙등제라고 열리고 있다. 실제 장춘(길림성 성도)의 정월담 관광지의 빙등제는 하얼빈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장식을 잘 해 놓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하얼빈 빙등제라는 이름을 붙여 얼음 조각과 네온 조명을 이용한 전시를 하는여준다.
“홍하곡 - 붉은 빛깔의 강과 골짜기”를 보고.홍하곡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중국영화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 왔다. 중국영화라 함은 어렸을적 고모가 좋아했던 임청하가 나왔던 영화들과 르와르 영화, 그리고 홍콩영화가 다였다.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영화들은 무협이나 멜로 중심의 영화들이었다. 상업적인 색깔이 강하고 유명한 배우나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였다. 그러나 이번에 본 홍하곡은 달랐다. 홍하곡도 상업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주선일 영화로서 애국주의 영화를 보여 주고 있다. 홍하곡은 주선일 영화와 애국주의 영화로서는 내가 처음으로 맛본 영화이었다. 어느 정도의 상업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이 영화는 티벳에서 7년이란 영화와 대결구조로 만들어진 영화라 한다. 티벳에서 7년을 보고 꽤 많은 감동을 받은 나로서는 좀더 유심히 영화를 보게 되었다.영화에서 티벳은 아름답다. 푸른 호수와 푸르른 하늘이 맞닿고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가 보인다. 거기에 거대한 자연의 위대함과 티벳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숭고한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여기서 먼저 화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감독은 특별한 장치나 작업 없이 티벳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면에 가득 담아냈다. 그 장면을 보고 어느 누구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티벳에 다녀온 친구의 이야기로는 정말 푸르고도 푸른 하늘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한다. 밤이 되면 그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다고 하고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이 옴마니밧메옴을 외며 수수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은 곳곳에서 보여 진다.여기선 주인공들의 삼각관계가 나온다. 공주와 신분차이가 나는 농노인 게쌍, 그리고 이민족인 쉐얼다마가 나와 사랑을 말한다. 공주와 게쌍의 관계는 신분관계의 모순을 보여준다. 쉐얼다마와 게쌍의 관계에서는 민족관계의 모순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국군의 침략에서 모든 모순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적 모순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사실이 아닌 것들을 보여준 것이다. 청나라를 우호적으로 보여주고 영국을 적대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한족이 가지고 있는 환타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티벳에서 7년에서는 이와 반대로 청을 야만적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 영화는 이야기 구조상 흥미를 더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픽션이 가미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홍하곡에서는 애국영화로서 그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중국인들은 마치 영화의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문명에 맞서서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티벳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약소국이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모습으로 하여금 나에게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역시 외세로부터 우리의 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